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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

조선 판한성부사
정절공(靖節公)
이옥
李沃
출생 미상
사망 1409년(음력 태종 9년 9월 4일)
시호 정절(靖節)
묘소 경기도 평택시 죽백동 이화로 138
본관 양성 이씨[1]
경력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개성유후
부모 부친 - 이춘부(李春富)
모친 - 공암 허씨 허선(許僐)의 딸
부인 남양 홍씨 홍상재(洪尙載)[2]의 딸
자녀 슬하 4남1녀
장남 - 이사치(李思恥)
차남 - 이사근(李思謹)
삼남 - 이사검(李思儉)
사남 - 이사임(李思任)
장녀 - 능성 구씨 구종유(具宗猷)의 처

1. 개요2. 생애3. 묘소4. 가족 관계
4.1. 선대 가계4.2. 배우자 및 자녀

1. 개요

이옥(李沃, ? ~ 1409년)은 여말선초 때 문신이다. 부친 문하시중 이춘부(李春富)가 죽고 일가친척들이 관노가 되었을 때 가문을 다시 일으킨 인물이다.

2. 생애

본관은 양성 이씨로 아버지는 공민왕 때 문하시중을 지낸 이춘부(李春富)이고 어머니는 공암 허씨 허선(許僐)의 딸이다. 고려사에 활을 잘 쏜다고 말을 하사받은 기록이 있다.
이춘부가 처형되자 이원부·이광부도 신돈의 일당으로 외지로 유배되었다. 이춘부의 아들 이옥(李沃)·이윤(李贇)·이예(李裔)·이한(李澣)·이징(李澂) 등도 모두 적몰되었고, 종(奴)이 되어 각 고을에 나누어 예속되었다. 이옥은 강릉에 예속되었는데, 왜구가 동계(東界)에 침략하자 아군은 멀리서 바라만 보고도 궤멸되어 도망해 버렸다. 평소에 이옥의 용맹함을 알고 있던 안렴사가 군사를 주어 왜적을 치게 하니, 이옥이 힘껏 싸워 물리친 덕분에 강릉 일대는 참화를 면하였다. 왕이 보고를 받자 말과 안장을 하사하고 그 〈관노의〉 역(役)을 면하게 해 주었으며, 뒤에 우왕은 이춘부의 고신(告身)을 지급하였다.
《고려사》125권 「간신1(姦臣一)」 이춘부(李春富) 中

1371년(공민왕 20) 부친 이춘부(李春富)는 신돈의 최측근으로 활동하다가 신돈이 몰락한 후 죽고 형제들과 아들들이 모두 종이 된다.
1372년(공민왕 21) 왜구가 강릉부(江陵府) 및 영덕현(盈德縣)과 덕원현(德原縣)의 2개 현을 노략질하였다. 이에 안렴사(按廉使)가 이옥이 용맹하고 날래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주어서 그들을 공격하게 하니, 이옥이 힘써 싸워서 왜를 물리쳤다. 왕이 안마(鞍馬)를 하사하고, 그의 역을 면제해주었다.[3]

1387년(우왕 13) 좌상시(左常侍)일 때 우왕을 호종하여 활을 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창왕이 폐위되고 조민수(曺敏修)의 일파로 창왕을 세우는 데 가담하였다 하여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공격을 받아 파직되었다.

1390년(공양왕 2) 강릉도 절제사(江陵道節制使)를 재임하던 중 윤이·이초의 옥사 때 김종연이 거사를 모의한 사람들을 거론한 이름 중 이옥 또한 거론되어 유배를 갔다. 다행히 공양왕은 이옥이 공이 있고 외관직을 맡고 있을 때라 정황상 증거가 없다며 유배만 보냈다.

이옥은 이후 조선이 건국되고 개국원종공신에 책록된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 하필 이옥은 편제상 이방간의 휘하였기 때문에 옥에 갇혔다.

1405년(태종 5)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를 지냈다.

1406년(태종 6) 문가학이라는 도사가 있었는데 자기가 귀신을 부리고 하늘에서 병사들을 불러낼 수 있다며 헛소리를 해댔다. 이거에 진짜 혹한 사람들과 함께 역모를 모의하던 중 조곤(趙昆)이 이 일을 밀고하여 문가학은 붙잡히게 된다.
부사직(副司直) 조곤(趙昆)이 그 음모를 알고 고(告)하여, 문가학과 그 무리들을 체포해서 국문(鞫問)하였다. 태종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 문가학(文可學)을 미친놈이라 여긴다. 천병(天兵)과 신병(神兵)을 제가 부를 수가 있다 하니, 미친놈의 말이 아니겠는가?"

하니, 황희(黃喜)가 아뢰기를,

"한 놈의 문가학은 미친놈이라 하겠으나, 그를 따른 자들이야 어찌 다 그렇겠습니까?"

하였다. 태종이 국옥관(鞫獄官)에게 말하였다.

"지금 문가학 때문에 무죄(無罪)한 사람이 갇힌 자도 많을 것이니, 빨리 분변(分辨)함이 옳겠다."
《태종실록》12권, 태종 6년 11월 15일 신미 2번째 기사 中

이 때 문가학은 아무 고위 관료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의금부 옥에 갇혔는데 이옥도 갇혔다가 이튿날 풀려났다.

1409년(태종 9) 개성유후로 있을 때 죽고 정절(靖節)이란 시호를 받았다.

3. 묘소

이옥의 묘소는 그동안 실전되어있다가 2001년 4월 1일에 양천 허씨 세장산 안에서 발견되었다. 이후 2002년에 양주 이씨 대종회에서 경기도 포천군으로 이장하였다가 2026년 3월 1일에 경기도 평택시로 이장하였다. #1 #2

첫번째 묘소 -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산 48(구 군영리(軍營里))
두번째 묘소 - 경기 포천시 창수면 가양리 산213-4(아들 이사검의 묘 뒷편쯤에 있었다.)
현재 묘소 위치 - 경기도 평택시 죽백동 이화로 138

4. 가족 관계

4.1. 선대 가계

4.2. 배우자 및 자녀


[1] 시조 8세손, 일시중파 2세.[2] 충혜왕의 제3비 화비 홍씨(和妃 洪氏)의 오빠.[3] 이때 일가친척들도 함께 면제된 듯하다.[4] 이공의 딸이 연산군의 후궁인 숙의 이씨이다.[5] 목은 이색의 삼남, 권근의 사위.[6] 목은 이색의 차남.[7] 충혜왕의 제3비 화비 홍씨(和妃 洪氏)의 오빠.[8] 문하시중을 지낸 한악(韓渥)의 4남.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확(韓確)의 증조부.[9] 구종유는 구종수(具宗秀)의 동생으로, 양녕대군이 자주 궐에 나가 유흥을 벌일 때 구종수와 함께 이를 동조하였고 태종은 이를 명목으로 구종수, 구종지, 구종유 형제를 처참(處斬)하였다. 태종 17년 3월 5일 신묘 3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