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인도-파키스탄 국경은 인도와 파키스탄간의 국경이다. 1947년 영국이 인도를 탈식민화 할때 인도 제국을 종교에 따라 국경선을 그렸기에 대부분 자연적인 방벽은 없는 편이다.2. 상세
인도-파키스탄 국경에 관한 VOX borders 영상 |
인도와 파키스탄의 별개 독립이 확정된 후 영국은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새로 그어질 국경을 정하느라 고심하였는데 가장 문제가 되는 지역은 비무슬림이 서로 섞여사는 단일 행정구역으로서 한번도 제대로 분할되어본 적이 없는 펀자브와 벵골이었다. 이 지역에서 서로 한뼘이나마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려는 양측의 주장이 엇갈리면서 국경 획정은 지지부진한 반면에 영국 정부는 인도의 독립을 빠르게 밀어붙히면서 독립 시한인 1947년 8월 15일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영국 정부는 펀자브와 벵골 지방의 국경을 획정하기 위해 변호사인 시릴 래드클리프 경(Sir Cyril John Radcliffe, 1st Viscount Radcliffe, 1899~1977)을 인도로 파견했다. 일생동안 인도를 단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래드클리프는 1947년 7월 8일 인도에 도착하고 나서 단 5주 안에 수천만 명의 운명을 결정지을 국경을 그려야 했다.
5주 동안 국경 획정 위원회와 함께 노력한 결과, 8월 9일 래드클리프는 확정된 인도-파키스탄 국경선, 일명 래드클리프 선(Radcliffe Line)을 영국 정부에 제출했고 8월 14일 파키스탄 자치령, 8월 15일 인도 자치령이 독립한 지 며칠 후인 8월 17일 래드클리프 선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새로 확정된 국경을 따라서 1000만에서 1200만여 명의 주민들이 고향을 떠나 자신의 종교적인 조국으로 이동했으며 도중 사망한 이들도 적게는 20만에서 많게는 200만까지 추정된다. 거기에다 펀자브 각지에 살던 힌두교와 이슬람교, 시크교 성지들은 둘로 분단되었으며[1] 국가가 종교에 따라 둘로 나뉘어 이산가족들도 다수 발생하였다. 거기다가 번왕국들에 관해서는 인도랑 파키스탄, 둘 중 어느 쪽에 귀속될 것인지 번왕국들이 알아서 결정하도록 했기 때문에 번왕국들의 귀속을 두고 양측의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힌두교도 번왕이 다스리나 주민 대부분이 무슬림이던 카슈미르의 경우 인도나 파키스탄 둘 중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국으로 독립하기로 결정했으나 결정에 반발한 무슬림들이 반란을 일으켜 파키스탄으로 편입을 시도하자 번왕이 인도의 지원을 요청하며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촉발되었고 영토 분쟁으로 인해 인도-파키스탄 국경은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오늘날도 인도-파키스탄 국경은 세계에서 가장 군사화된 국경 중 하나로 남아 있다.
거기에다 1947년 독립 직후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1965년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1971년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방글라데시 독립전쟁 과 1999년 카길 전쟁, 그리고 그 외에도 2019년 인도-파키스탄 분쟁과 같은 무력 대치 상태가 수차례 벌어졌고 뭄바이 연쇄 테러와 같은 사건도 일어난 덕에 현재 인도-파키스탄 국경을 건너는 것은 5곳의[2] 정해진 위치 외에는 금지된 상태이다.[3]
또한 카슈미르 지역은 지금도 영토 분쟁 지역이고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이후 카슈미르는 LAC(Line of Actual Control)이라는 군사분계선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양국 모두 이 경계를 인정하지 않고 카슈미르 전체[4]를 주장하고 있어서 비인정 국경으로 남아 있다. 또한 카슈미르 내에서도 (특히 남부 지역에서는) 간간히 무력 충돌이 일어나고 인도령 카슈미르에선 특히 힌두교도 다수 국가의 무슬림 다수 지역이기에 테러도 일어나고 있는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카슈미르 북부 국경 지대의 시아첸 빙하는 워낙 험준하여 군사들의 주둔이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군사 분계선도 세우지 못하는 무주지가 되어버렸다.
더군다나 인도-파키스탄 관계 때문에 인도인들에게는 파키스탄 관광비자가 발급되지 않으며 인도인들이 파키스탄 비자를 받을 수 있는 경우는 외교관이거나 친지 방문, 통행과 성지순례 뿐이다, 또한 파키스탄인들에게도 인도 비자는 외교관, 사업, 학생용 외에는 매우 까다로우며 도착비자 발급도 1년에 두번으로 제한된다.
워낙 졸속으로 지역에 대한 정보 없이 한 변호사가 단독적으로 그린[5] 국경이다 보니 많은 험지들을 가른다. 남쪽 라자스탄과 신드 지역에는 타르 사막을 가르면서 그어져 있고 중부에는 펀자브 지역을 반으로 가르며 평원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북쪽에서는 험준한 산 지형을 가로지르며 주둔도 불가능한 시아첸 빙하에서 멈춘다.
3. 국경 폐쇄식
인도 암리차르와 파키스탄 라호르 사이 펀자브의 와가-아타리 국경 검문소(Attari Wagah Border Checkpoint)에서는 매일 국기 하강식을 치르는데 양쪽 군대에서 뽑힌 인원들이 모두 화려하게 차려입고 과장된 몸동작으로 준비한 묘기를 부리며 자존심 대결을 한다.
전쟁까지 했었고 지금도 여전히 심심하면 군사 충돌이 발생하는 나라 둘이서 마치 서커스 쇼 비슷한 것을 하는 꼴인지라 꽤 기묘한 느낌을 준다. 거기에다가 수많은 인도인들과 파키스탄인들도 모여서 관객석에서 서로 각자의 국가를 응원하며 마치 축제처럼 떠들석하게 진행하기 때문에 볼 거리도 많은 지라 군사 분쟁지역답지 않게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
사실 이는 양국의 공개적인 정치적인 메세지, 양국은 평화와 협력을 위해 협조하고 공동으로 노력한다는 의미가 담긴 축제이다.
아시안 하이웨이 1호선이 해당 국경을 그대로 관통하여 지나가기에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로 여겨진다. 하지만 해당 국경을 내국인과 더불어 외국인 또한 이 국경을 통해 인도와 파키스탄을 자유롭게 통행할 수 없으며, 직항편에 철도편도 없기에 반드시 제3국을 경유해야 한다.
4. 기타
이렇게 군사화되었고 전쟁이나 분쟁도 자주 일어난 국경이지만 카슈미르를 제외한 다른 지역의 국경 지대는 꽤 안정적인 편이다.펀자브 지역은 시크교도들의 전통적 강역이었는데 이 국경 때문에 암리차르 황금사원[6]과 카르타르푸르 구루 나나크 영묘[7]를 포함한 많은 성지들이 국경 양쪽에 존재하게 되었고 분단 후 두 나라들의 관계가 악화되고 국경을 건너는 것이 더욱 어려워지자 한국의 통일전망대와 비슷한 '성지전망대'가 생겼었고 지금까지도 인도와 파키스탄을 왕래하는 것은 매우 어렵기에 아직도 남아있다.
여담으로 인도 펀자브 주와 하리아나 주[8]의 공동 수도이자 르 코르뷔지에의 계획도시 찬디가르가 생긴 것도 이 국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인도와 펀자브의 분단 후 펀자브의 중심도시 라호르를 비롯한 많은 펀자브 주요도시들이 파키스탄으로 넘어갔는데, 이로 인해 인도의 펀자브 지역의 주도를 맡을 마땅한 도시가 없자 건설된게 계획도시 찬디가르이다.
2024년 3월 16일, 인도군이 파키스탄 접경 지역에 아파치 헬기 부대를 창설했다.#
5. 관련 문서
[1] 예를 들어 시크교의 경우, 시크교의 3대 성지 중 암리차르 황금사원은 인도에 있는 반면, 구루 나나크의 탄생지인 난카나 사히브, 구루 나나크가 사망한 카르타르푸르는 파키스탄에 있다.[2] 과거에는 6곳[3] 물론 다른 국경들도 정해진 검문소가 있지만 주목할 점은 3323km나 되는 긴 국경에 검문소가 5곳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4] 파키스탄의 경우 중국이 점유정인 아크사이친은 제외.[5] 완전히 단독으로 그리지는 않았고 그래도 어느 정도 과거 행정 구역이나 종교 분포 지도를 참고하여 그렸기에 해당 서술에는 다소 과장이 포함되어 있지만 크게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6] 인도에 있음[7] 파키스탄에 있음[8] 과거 펀자브의 일부였으나 분단 후 펀자브 주에서 분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