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잠수함
1. 개요
잠수함의 개발 역사에 관한 문서이다.2. 초기 개발사
인력으로 움직이는 최초의 잠수함은 1620년에 영국에서 네덜란드인 코넬리스 드레벨이 개발했다.[1]인력으로 움직이는 최초의 실용적인 잠수함은 1800년에 프랑스에서 미국인 로버트 풀턴이 개발했다. 증기선으로 유명한 풀턴은 루앙에서 노틸러스[2]를 건조하고 프랑스 정부에 구입을 제안했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과 전쟁 중이었는데 프랑스 해군의 통상적인 전력으로는 도저히 영국 해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잠수함이라는 병기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세느 강에서 잠항 및 항해 실연, 그 이후에 어뢰[3]를 발사해 40톤짜리 슬루프함을 날려버리는 시범까지 보인 다음 영국의 항구에 잠입해 통상파괴를 가해 영국의 경제에 타격을 가한다는 구체적인 활용 방안까지 제시했지만 나폴레옹의 반응은 여전히 시큰둥했고 결국 판매는 실패했다.[4] 나폴레옹은 잠수함을 비롯한 풀턴의 장비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나폴레옹은 본래 '신무기'의 개발에 열중하는 대신 기존의 무기 체계 및 작전 기술 등을 보다 효율적으로 개선, 운용하는 방법을 더욱 선호했기 때문이다. 잠수함은 50년 넘게 뒤인 남북전쟁때조차도 실제 사용해서 성과가 없는 판이었으니 나폴레옹 시대의 기술 수준으로는 성과를 내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이때 수중에서 항해하는 배에서도 나침반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 최초로 확인되었다. 실제로 지구는 자북극점과 자남극점을 기준으로 하는 거대한 막대자석과 같으므로 지구 전체에 작용하는 전자기력의 방향을 탐지하는 원리가 바로 나침반이기에 바닷속이라고 해서 나침반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지만, 이전까지는 실제로 실험을 통해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나중에는 지구의 자북극점과 자남극점이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변하고 있으며 그 점의 위치가 바다 위였을 때도 꽤나 있었다는 걸 증명하기까지 잠수함은 나름대로 다른 분야의 과학 기술 발전에도 공헌한 셈이다.
원동기로 움직이는 최초의 잠수함은 1860년에 프랑스 해군에서 개발한 플롱죄르[5]이다.[6]
3. 최초의 군용 잠수함 터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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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틀 잠수함의 모습과 내부 구조. |
최초의 군용 잠수함인 터틀은 미국 독립전쟁 당시 1775년에 데이비드 부쉬넬이 개발했다.[7] 터틀은 양조용 큰 나무통에 타르를 발라 방수하고 쇠테를 덧대어서 좀 튼튼하게 만든 다음 위에 수동 드릴(드라이버 정도 크기)을 달아서 적함에 구멍을 내어 기뢰를 부착, 터트려 격침시키는 게 목적이었다. 저시인성을 최대의 목표로 하여 1인승에 그 크기가 매우 작았다.(추진은 발로 젓는 오리배 방식) 그래도 잠항, 부상 장치와 잠망경에 함 내 산소를 절약하기 위해 무연소 등명구까지 탑재한, 현재 잠수함이 갖추어야 할 것은 다 갖춘 어엿한 잠수함이었다. 또한 터틀은 사상 최초 기록을 여럿 가지고 있는데 최초의 프로펠러 추진선이자 터틀의 첫 출격은 최초의 기뢰공격이기도 하다. 터틀은 영국 해군의 HMS 이글 함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으며, 그 방법은 적함에 접근해서 수동 드릴로 구멍을 뚫고 그 부분에 폭약을 집어넣어서 터뜨린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크기와 형상 및 인력 1명에 의존하는 동력구조 때문에 목표에 접근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글에 근접한 위치도 목선 중에서 강도가 요구되어 동판 등으로 강화된 구역이라 수동 드릴로는 구멍도 뚫지 못했다. 결국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정장 에즈라 리(Ezra Lee) 미 육군 중사는 이 배와 함께 살아 돌아오긴 했다. 또한 이 와중에 물에 흘러간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영국 해군이 깜놀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리 중사는 이후 한번 더 터틀을 타고 출격했다가 발각되어 영국 해군의 포로가 되었고 터틀은 격침됐으나, 그의 용맹함과 공로는 큰 찬사를 받아 석방 후 미 해군에서 그를 장교로 임관시켜줬다.
4. 남북전쟁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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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연합국(남부) 육군의 잠수함 헌리 함을 그린 그림 | 2000년 인양 당시의 헌리 함[8] |
최초로 적함을 격침시킨 기록을 가진 잠수함은 미국의 남북전쟁 시기 남군 육군(실제로 승조원도 전부 육군이었다.)의 잠수함이었던 헌리 함이었다. 압도적인 미합중국 해군 전력에 의해 항만을 봉쇄당한 남부는 당시 심각한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비밀병기로서 사용하려 했던 것이 바로 잠수함이었다. 헌리 함은 실험 단계에서 이미 선체 결함으로 인해 개발자인 헌리 육군 대위를 포함한 실험자들을 익사시키는 등 불안함을 보였는데, 이 때문에 남군 지휘부는 이 계획을 폐기하려 하였으나 당시 절망적인 해상 전력의 차이 때문에 한번 써보기나 하자는 심정으로 프로젝트가 계속 진행되었다.
헌리 함은 인력으로 크랭크를 돌려 추진하는 원시적인 방식[9]이었는데, 이렇게 잠항하여 접근한 상태에서 작살을 적 함선의 밑바닥에 꽂아 수뢰를 기폭시키는 방식으로 연방 해군의 프리깃 USS 후사토닉 함을 격침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공격의 성공 이후 헌리 함은 승조원들과 함께 실종된다. 설상가상으로 피해는 헌리 함이 더 컸는데, 헌리 함은 승조원 10명이 전원 실종(전사)된 데 반해, 정작 공격을 받은 USS 후사토닉 함은 승조원들의 훌륭한 대처로 인해 4명의 전사자를 제외하고는 전원 구조됐기 때문이다. 헌리 함은 2006년 격침 장소에서 인양되었는데, 선체는 그리 파손되지 않아서 내부에서 전사자들의 유해와 유류품들이 고스란히 발견되었다고 한다. 인양 후의 조사에 따르면, 애초에 몇 m 안 되는 장대에 폭약을 달아서 적함에 박아넣는 구조인 데다가 기폭 시까지 멀리 피난할 수 없는 인력식 동력 구조로 인해 선체가 파손되진 않았으나 폭발 시의 충격으로 승조원들이 기절해 다시 부상 못하고 가라앉은 것이 침몰 원인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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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 해군의 잠수함 앨리게이터 함. |
그러나 이 시기 잠수함의 공격은 대부분이 실패로 끝났으며, 이후에는 닻줄을 끊는 등, 공격이라고 표현하기엔 심히 사소한 심술을 부리기 위한 장비가 개발되기도 했다. 물론 이도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은밀한 공격을 가능케 하는 잠수정의 개념은 이때 이미 제시되었다. 이후 적 항구에 은밀히 숨어들어 상륙을 하거나 접안 시설을 파괴하는 등의 기능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그 후 존 홀랜드라는 사람이 등장하여 현대적인 잠수함의 원형이 되는 홀랜드 호를 가지고 영국 해군에 선보였지만 해군 당국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이에 홀랜드는 자신이 만든 잠수함을 가지고 스캐퍼플로우 항을 구석구석 찍어서 해군에 제출했는데 정작 영국 해군 당국의 반응은 "오오 이거 알고보니 좀 짱인 듯"이 아니라 "이 색히 간첩이구나 너 고소"(...) 그래도 그 공로는 인정을 받은 것인지, 홀랜드의 잠수함은 미 해군의 SS-1을 시작으로 각국 해군의 잠수함으로 채용되었다.
이후 잠수함 개발에 가장 열심인 나라는 역시 해군을 중시한 영국이었다. 1차 세계대전 개전당시 총 74척의 잠수함을 보유하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잠수함을 보유한 나라였다.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유명한 독일이 개전당시 보유한 잠수함은 44척에 불과했으며, 그중에 상당수는 등유를 사용하는 구형이라 전투에 투입할만한 성능을 지닌 디젤 잠수함은 20척에 불과했다. 다만, 1차대전 종전시까지 373척을 만들어 종전 시점에서는 독일의 잠수함 생산량이 가장 많았다.
5. 번외: 오스만 제국의 잠수함
의외로 오스만 제국 해군은 1886년이라는 매우 빠른 시기에 잠수함 전대를 창설했다.#
당시에 오스만 해군이 도입한 잠수함 압뒬하미드(Abdül hamid) 함은 최초로 잠수 상태에서 어뢰를 쏠 수 있는 잠수함이었으며, 영국의 빅커스 & 암스트롱(Vickers & Armstrong) 사에서 제조했다. 이 잠수함을 오스만 해군이 입찰하는데에 불안을 느낀 그리스 측에서 적극적으로 방해를 했지만, 결국에는 오스만 제국군이 입수하는 데 성공했고 1888년에 잠수한 채 어뢰 한 방으로 목선을 박살내는 퍼포먼스를 연출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었다.
오스만 해군 잠수함부대는 이 배 한 척으로만 이루어진 간소한 부대였지만 이후 같은 노르덴펠트 Nordenfelt급으로 압뒬메지드 함도 구입해 사용했다. 다만 실전에 투입되기 전에 퇴역해 실전 사례는 없다.
6.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
6.1. 독일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고 두 달이 채 안되어 전세계를 충격에 빠트린 사건이 발생했다. 9월 22일, 북해 네덜란드 인근 공해상에서 독일 해군 잠수함 U-9에 의해 단 90분만에 영국 해군 장갑순양함 3척(HMS 아부키르, 호그, 크레시)이 격침당한 것이다.# 이는 전쟁 초기 전 세계에 영국 해군의 절대적 제해권 우위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였으며, 영국 해군 내에서도 잠수함이라는 신병기의 위협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을 불러왔다.다만 U-9의 대전과는 개전 초기 대 잠수함전에 대한 준비나 대처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었으며, 이후 독일의 유보트 작전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의 잠수함은 적을 찾아다니며 주력함과 결전을 벌이기보다 상선같은 비무장 함선을 기습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우연한 기습이 아닌 한 호위함과 같이 다니며, 속도도 빠른 전함 등의 주력함을 공격하기는커녕 쫒아가기도 힘든 잠수함의 수중속도 탓이 컸다. 이미 1차대전 초반에 기본적인 잠수함의 구조가 완성되었으나, 당시의 기술 수준으론 수상에 떠 있는 경우에는 20km 남짓한 속력밖에 내지 못했고 수중에 있을 때는 엔진에 산소를 지속적으로 공급할 방법이 없어서 한정된 용량의 구식 축전지로 초기형 전기모터를 돌려야 하니 6-7노트의 속도로 한 시간 정도만 항해하면 그대로 표류하거나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인간이 쌍안경으로 볼 수 있는 것 이상을 찾아낼 수 없으니 주 항로에 죽치고 숨어있다가 오는 적을 기습하는 지극히 단순한 전술밖에 구사할 수 없었으며, 장거리 통신 기술이 전무하다시피 하여 조직적으로 뭉쳐 다니거나 하는 발상은 전혀 불가능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크릭스마리네는 개량된 유보트와 새로운 전술로 선공을 가했다. 때마침 영국 해군은 아직 전쟁에 대한 대비가 충분히 되어있지 않았기에 기습효과로 상당히 고전하게 되었다. 상선의 항로에 외로이 매복해 있다가 공격하는 1차대전식 유보트 전술은, 뭉쳐서 가면 유보트가 아무리 용을 써도 피해는 전체의 5퍼센트 이하라는 간단한 발상으로 파해했지만, 그것을 깨기 위해 카를 되니츠 (당시)대위의 오랜 연구는 이른바 울프팩 전술로 결실을 맺었고 전쟁 초반 아직 대잠 전력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영국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미국이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영국이 본격적으로 대잠 전력을 구축해 반격에 나서자 한때 대서양의 늑대라고 불리던 유보트들은 동네 똥개로 전락하게 되었다.
영국 역시 잠수함을 개발하는 데 힘을 쏟았고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수송선단을 상대로한 전과 자체는 독일에 비하면 적었으나[10] 이탈리아 왕국 상대로는 상당한 전과를 올려서 몰타섬에 배치된 항공기와 더불어 지중해에 있는 추축국 수송선단의 씨를 말려버렸다. 게다가 잠수함간의 전투에서는 독일과 이탈리아를 압도하는 전과를 올렸다. 특히 V급 잠수함 벤튜러는 현재까지 유일하게 잠항 상태의 적 잠수함(U-864)을 잠수한 상태에서 격침시키는 기록을 세운다.
그러나 2차대전 시의 잠수함도 자체의 성능 향상이 있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잠수가 가능한 수상함'이라는 한계는 여전했다. 그리고 1차대전 때와는 달리 영국은 발빠르게 유보트의 위협에 대응해 효과적인 전술과 장비를 고안하여 맞서기 시작했다. 통신 감청을 통한 위치 추정, 사람의 눈보다 훨씬 멀리서 탐지해내고 선공을 가능하게 한 레이더, 수중에 잠항한 잠수함도 탐지해버리는 애즈딕, 유보트의 빈약한 대공 장비론 상대가 불가능한 대잠수함 호위 항모, 거기에 울트라를 통한 암호 해독으로 유보트의 좋던 시절은 끝나버렸고 거기에 미국이 본격적으로 물량을 쏟아붓자 1943년 5월부터 전과는커녕 작전에 나간 유보트의 대부분이 일방적으로 격침당하는 패배를 겪다 끝내는 전력 보존을 위해 장기간 전투에 손을 떼버리고 만다. 결국엔 연합군의 발목을 붙잡으며 힘을 다른 곳에 쓰게 만들며 귀찮게 구는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
6.2. 일본
2차대전 당시 일본 제국 해군은 함대결전사상에 의거, 점감요격작전으로 선두의 잠수함을 이용해 미영 해군의 전함 등 주력함 수를 본격적인 교전 이전에 최대한 줄이려는 계획이었다. 때문에 덩치가 크고 배수량도 큰 편인데 전쟁 중에 건조된 2등 잠수함마저도 평균적으로 사용된 독일 U보트보다는 거의 두 배 가까이 무거웠다. 원양 항해에 중점을 두고 건조한 1등 잠수함의 경우에는 구축함급이 기본에 어떤 기종은 거의 경순양함에 필적할 정도의 배수량을 자랑했다. 그 덩치 때문에 1등 잠수함의 경우에는 잠항 능력도 매우 떨어졌고, 대부분 미군 주력함을 공격하려고 접근하다 발각되어 격침당했다고 한다. 애초에 정숙성에 주목한 설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쉽게 발각되었다. 그나마 전쟁중 전훈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 건조하고 배수량이 작아 기민했던 2등 잠수함들이 소소한 전과를 올렸다.'함대결전사상'에 끝까지 매달린 일본 해군에게 있어서 잠수함이란 정찰용, 또는 전함을 보조하는 역할에 불과해서 전장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실제로 함대결전이 벌어지지 않다보니 일본군의 잠수함은 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잠수함이 세운 굵직한 전과도 존재한다. 몸집이 거대한 만큼 원양을 순양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적 함대를 발견하여 알려주기도 하고, 구축함만 보이면 도망친 독일의 유보트와 달리 와스프, 요크타운, 인디애나폴리스 등 거대 함종을 격침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전과는 미국에 비해 매우 떨어졌다. 그나마 잡은 거대 함종도 정규 항공모함이 아닌 경항공모함 아니면 호위 항공모함 뿐이었다.[11]
반대로 미군 잠수함들은 맹활약을 하여 필리핀 근해와 태평양을 돌아다니면서 일본 수송선단을 철저히 파괴했다. 잠수함으로 대영제국을 완전 봉쇄하지 못한 독일과는 달리 미국은 태평양에 대형 잠수함과 육군 항공대의 기뢰로 전쟁 말에는 일본 제국 본토를 완전히 봉쇄해 버렸다. 즉 독일이 대서양, 북극해에서 자국과 동맹국 함선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미 해군 잠수함 역시 일본 깃발을 단 배는 모조리 격침시켰던 것이다. 전쟁 말기에는 격침시킬 배가 없어져서 할일이 없어지자 잠수함 승조원들이 자원해서 일본 본토에 침투해서 폭탄을 설치하고 오는 특수 작전을 행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추락한 항공모함 함재기 조종사를 비롯한 사람들을 구조하는 임무[12]도 실행했다.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잠수함 승조원들은 다른 미 해군, 특히 항공모함 승조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13] 그 유명한 야마토급 전함 3번함에서 개장된 항모 시나노 역시 수십 대의 함재기가 투입되어 격침시킨 야마토, 무사시와 달리 잠수함 단 한 척에 의해 진수 직후 격침되었다.
일본 해군이 잠수함을 막을 호송선단과 전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일본은 고립되었고, 외부에서 유입되어온 연료와 식량이 끊기면서 일본인들은 기아에 허덕였다. 이때 일본에서는 아사자가 속출하는 등 봉쇄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의 트라우마로 잠수함 노이로제에 걸리고 전후 소련 해군의 잠수함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해상자위대의 대잠 전력을 기형적으로 강하게 육성하는데 영향을 주었다.[14]
특이하게도 잠수함을 보급 임무에 투입했던 것으로 유명한데, 일본은 이미 해상이 봉쇄된 섬의 병력에 물자를 보급해야 하는 상황을 자주 맞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미 해군의 포위를 뚫고 미국 본토를 공습할 목적으로 잠수항모를 건조하기도 했다.
7. 현대
2차대전 중 기술의 발전에 의해 잠수함은 엄청난 발달을 하게 된다. 이미 전쟁중에 용골을 부러뜨리는 자기신관 어뢰와 유도 어뢰의 초기형 작품이 등장했으며, 유선형 설계, 마침내는 당시의 잠수함을 '지속적으로 잠수하고 다니는 배'로 만드는 기술들이 대전 말기에 등장한다. 비록 과산화수소를 이용해 잠수 중에도 주 엔진을 돌리는 것이 가능한 '발터식 잠수함'은 끝내 실전에 투입되지는 못했지만 대형화된 축전지를 이용해 잠항 시에도 속력이 빨라지고 오래가는 신형 XXI와 XXIII형 잠수함이 당시 독일에서 실용화된다.1953년 취역한 미국의 실험용 잠수함 앨버코어는 여전히 잠수가 가능한 수상함에 가까웠던 기존의 선형을 버리고, 세계 최초로 눈물방울형(Teardrop) 선형을 완성하여 비로소 현대 잠수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눈물방울형 선형은 물방울이 떨어질 때의 모양을 채용한 것으로, 공기 저항뿐만 아니라 물의 저항도 최소로 받는 형태로 오늘날의 잠수함에도 많이 적용되는 형상이다. 앨버코어의 수중 항해 시험 결과 수중에서 33노트의 최대 속력을 발휘했다. 이는 기존의 잠수함들에 비해 2배 이상의 빠른 속력을 발휘한 것이다. 눈물방울형 선형의 우수성을 확인한 미 해군은, 1956년부터 건조된 스킵잭급 공격원잠에 눈물방울형 선형을 도입했다. 눈물방울형 선형은 미 해군뿐만 아니라 이후 세계 각국의 잠수함 개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원자력의 대두는 당시 재래식 잠수함의 한계를 단숨에 뚫어버렸다.[15] 미 해군이 USS 노틸러스를 건조하면서 원자력 잠수함의 시대가 열렸는데, 수중 이동을 통해 적함 파괴 및 정찰임무를 수행하는 해군 병력의 총아. 이 핵잠수함은 기존의 재래식 잠수함보다 월등히 높은 수중 항행능력과 속도로 인해 수상함의 공포이자 악몽[16]으로 불리고 있다. 부상할 필요도 없이 원자로에서 전기가 쏟아지니 산소도 바닷물을 전기 분해해서 얻고, 공기 정화장치도 전기로 돌리며, 민물도 조수기를 가동해서 얻을 수 있고 엄청난 크기의 연료 탱크도 필요없으므로 식량과 무장은 물론이고 편의시설을 더 갖출 수 있어서 잠수함 승조원이 버틸 수 있는 작전 지속시간을 크게 향상시켰다. 거기에 SLBM을 탑재한 전략 미사일 잠수함은 핵과 해군력, 경제력을 동시에 가진 강대국들 사이에서 정치, 군사적으로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1] 건조 후 운행 성공을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사례로써, 그렇지 않은 기록은 1562년부터 있다.[2] 해저 2만 리에 나오는 노틸러스는 이 잠수함의 이름을 딴 것이다.[3] 풀턴은 최초의 어뢰를 발명하기도 했다.[4] 사실 나폴레옹은 잠수함뿐만 아니라 증기선에도 탐탁찮은 반응을 보였다. 이때 "뭐? 갑판 밑에서 석탄을 태워서 배를 바람에 맞서서 항해하게 한다고? 그런 헛소리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군."라고 한 말은 상당히 유명해져서, 문명 4에서도 등장한다.[5] Plongeur, 잠수부란 뜻이다.[6] 당시의 책임 공학자는 샤를 브하이다.[7] 그 전 17세기에 영국 해군에서 개발한 잠수함은 시운행은 성공적이었지만 군함으로 채택되지 못 했다.[8] 출처[9]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밀폐된 잠수함에서 증기 기관이나 전기 모터를 사용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10] 영국이나 연합군의 잠수함 운용 능력이나 기술이 부족해서 그런게 아니라, 추축국들이 하나같이 지리적 문제로 육상전을 중시하거나 보급을 경시해서 때릴 수송선이 별로 없어서 그런 것이다. 후술될 지중해나 태평양에서의 연합국의 활약상을 보면 잠수함 운용 능력이나 전과는 독일에 비견되거나 그 이상이었다.[11] 물론 그렇다고 당시 일본 해군의 잠수함이 완전히 무용지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잠수함은 매우 위협적인 병기이기에 미국도 일본의 잠수함에 매우 민감히 반응했다.[12] 아군 함재기 파일럿을 구한 사례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1944년 9월 3일에 10시간 동안 허우적 거리던, 뇌격기 파일럿 대위를 구한 사례가 유명하다.[13] 이렇게 생환한 파일럿들은 자신을 구해준 잠수함 승조원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드럼통으로 사주며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14] 이런 트라우마도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실질적으로 미 해군이 서태평양 일대에서 대잠 임무를 일본에게 분담시키기 위해 지원한 영향이 크다.[15] 이는 원자력이 수상함에 도입된 것보다도 빠른 것이다. 그 기술은 물론 수상함에도 적용되긴 하지만 원자로로 얻는 이점보다 원자로의 안전 문제로 인한 단점이 훨씬 크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수상함은 재래식 동력으로 돌아간다.[16] USS 노틸러스, SSN-571이 처음 연습에 참가했을 때도 다른 함정들을 관광시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