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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당 지역의 남쪽 지역은 중국-인도 국경분쟁으로 인도가 실효 지배 중이다. 인도 행정구역상 아루나찰프라데시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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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체 종에서 바라본 뺄최(dpal chos) 사원과 꿈붐(sku 'bum)
갼체 종에서 바라본 시가지
갼체 종의 장엄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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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어 江孜镇티베트어 རྒྱལ་རྩེ (rgyal tse[1])
영어 Jiangzi / Gyantse County
시짱 티베트 자치구 남부의 도시. 르카쩌 (시가체)에서 동남쪽으로 60km, 라싸에서 서남쪽으로 130km 떨어진 협곡 분지에 위치한다. 남쪽과 서남쪽으로 약 80km 지점에 각각 부탄과 인도령 시킴과 접경한다. 인구는 약 6만명으로, 과거 티베트 제3의 도시 갼체였다. 시내에는 14세기에 세워진 갼체 종, 15세기에 세워진 뺄최 사원 등의 유적이 남아있다. 영국의 티베트 침공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었다. 해발 약 4000m의 고지대에 위치하여 기후는 서늘하다. 여름에도 20도를 잘 넘지 않고, 겨울에는 영하 20도까지 떨어진다.
2. 역사
암벽 위에 세워진 갼체 종
9세기 후반 토번 제국의 마지막 군주 랑다르마의 아들 뺄코르쩬이 현재의 갼체 종의 모태가 되는 요새를 세웠다. 3세기 후, 원나라의 비호 하에 티베트의 지배권을 얻은 샤카파 세력이 1268년 요새를 증축하였다. 그리고 14세기 중반, 현지 왕공 팍빠 뺄상뽀('phags pa dpal bzang po)가 갼체를 남부의 샤카파 잔존 세력에 대한 원정 거점으로 삼았다. 그의 치세에 고승 부뙨 린첸둡(bu ston rin chen grub)이 갼체로 초청되었다. 1370년 팍빠 뺄상뽀가 사망한 후 그를 계승한 아들 뀐가 팍빠(kun dga' 'phags pa)는 갼체를 수도로 삼았고, 이로써 갼체 왕국이 성립되었다. 1412년 뀐가 팍빠가 사망한 후 그 후계자인 랍땐 뀐상 팍(rab brtan kun bzang 'phags)의 대에 갼체는 크게 번영하였다. 1418-28년 2대 왕공 랍땐 뀐상 팍은 후일 뺄최 사원의 모태가 되는 쭉라캉(gtsug lag khang) 사원을 세웠고, 1427-37년에는 꿈붐(sku 'bum)을 더하였다. 비록 15세기 후반 들어 시가체와 라싸에 밀려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지만, 여전히 티베트 남부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2.1. 갼체 공방전 (1904년)
갼체 종의 성벽
1904년 4월 12일, 티베트 침공에 나선 제임스 맥도날드 휘하의 1만 영국-인도 군대는 라싸 방면으로 나아가던 도중 갼체를 공격하였다. 현지 티베트 군대는 갼체 인근의 고개에서 영국군을 저지하려 했지만, 무기의 열세로 추믹 셴코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영국군은 갼체 종을 무혈 점령하여 유니언 잭을 게양했으나, 이내 방어하기 어렵다고 여겨 느양 강 남안의 창로로 철수하였다. 이후 영국군은 보급로를 지키기 위해 더 남쪽의 춤비 협곡으로 철수하며 프랜시스 영허즈번드 휘하 5백인의 수비대를 남겨두었다. 산지로 철수했던 티베트 군대는 5월 5일, 수적 우세를 앞세워 창로의 영허즈번드 부대를 공격하였다. 티베트 군은 거의 승리할 뻔 했으나, 영국군의 결사 항전과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2백인의 전사자를 내며 후퇴하였다.
티베트 군대는 이후 게릴라 전에 임하여 영국군을 괴롭혔고, 이내 갼체 종을 재차 장악한 후 소형 대포를 설치하여 영국군 진영을 포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영국과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던) 러시아 제국령 부랴트 출신인 겔룩파 승려이자 달라이 라마 13세의 스승 중 하나였던 아그반 도르지에프[2]가 라싸의 무기고 혹은 갼체의 수비를 맡고 있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영허즈번드는 본국과의 논의 끝에 몰래 춤비 협곡의 본대로 가서 기병 1백, 보병 2천, 일꾼 2천, 대포 8문, 야크와 당나귀 4천마리를 대동하여 돌아왔다. 이에 창로를 포위하던 티베트 군은 철수하였고, 영허즈번드는 티베트 측에 위협조의 서신을 보내어 협상을 시도했으나 결렬되자 갼체 종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6월 28일)
같은날 영허즈번드와 합류한 맥도날드의 주장대로 영국군은 일몰 전까지 갼체 종의 후방에 해당하는 쩨첸 수도원을 포격해 점령하였다. 7월 5일부터 영국군은 갼체 종에 대한 총공세에 나섰다. 6일 오후, 포격으로 성벽이 일부 붕괴되고 뒤이어 화약고가 명중하여 큰 폭발이 벌어지자 구르카 용병을 필두로 영국군은 암반을 기어올라 성채에 진입하였다. 소수의 살아남은 수비대는 돌을 던지며 저항했으나 결국 전멸하였고, 영국군은 포로들을 동원해 그들을 안장해주었다. 종군 기록에 의하면 티베트 군의 주축을 이룬 장발의 캄 부대는 변변치 않은 전근대적인 무기를 쥔 채로 평온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한다. 그후 며칠간 화약을 통해 갼체 종과 쩨첸, 뺄최의 성벽을 파괴한 영국군은 7월 14일 갼체를 떠나 라싸로 향하였다
2.2. 현대
달라이 라마 13세의 도주 후 체결된 라싸 조약에서 티베트 조정은 갼체와 카일라쉬에의 영국 상관 설치를 승인하였다. 이후 갼체에는 인도인 중심의 영국군이 주둔하였고, 인도 제국의 교두보로 여겨졌다. 신해혁명으로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달라이 라마 13세는 갼체의 영국군에게 티베트 군의 근대화를 부탁하여 장교들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 학교가 설치되었다.1940년까지 갼체에 주둔하던 영국군은 2차 대전의 격화와 인도 독립의 가시화로 철수하였다. 1950년 중국의 티베트 침공 당시 별 피해를 입지 않았던 갼체는 1967년 문화대혁명 당시 재차 성벽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이후로 성벽은 점차 복구되었고, 중국 당국은 서구 열강에 결사 저항한 것을 높이 사서 장쯔 (갼체)를 영웅 도시로 지정하였다. 1952년 기준 도시의 인구는 약 8천이었다.
3. 볼거리
좌측의 뺄최 사원, 우측의 갼체 종
시내에서 바라본 갼체 종의 모습 | 뺄최 사원 내의 불상 |
뺄최 사원에서 바라본 갼체 종의 성벽
3.1. 갼체종
3.2. 뺄최[3] 사원 (백거사 白居寺)
19세기 무렵 뺄최 사원에는 '다창(grwa tshang)'이라고 부르는 18개의 신학교가 있었으나, 격동의 20세기를 보낸 후 현재는 겔룩파 산하의 2개의 학교만이 남아있다. 사원 벽에는 1904년 영국군의 침공 당시의 탄환 자국이 남아있다. 문화대혁명 당시 사원은 일부 파괴되었으나 후일 복구되었다. 다만 1520명에 달했던 승려는 문혁 후 8명으로 줄었고, 현재도 수십명 단위를 넘지 못하고 있다. 외형적 파괴는 복구되어도 내형적으로는 복구가 되지 않는 것.
- [백거사 불상들)]
뺄최 사원의 본당 내에는 티베트 불교 미술의 전형을 보여주는 거대한 불상들이 안치되어 있다.
3.2.1. 갼체 꿈붐
1497년 갼체 왕공이 세운 9층 스투파로, 높이는 35m에 달한다. 뺄최 사원 경내에 있는 탑으로, 본당 바로 왼쪽에 위치해 있으며, 내부에는 조각상과 탱화, 불교 목판 등이 있다. 비록 문화대혁명 당시 조각상 대부분이 파괴되었지만 14세기에 불교 세계관을 묘사한 벽화는 거의 그대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