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16:34:02

전일본공수 61편 납치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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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 사건 사고 요약표
발생일 1999년 7월 23일
유형 하이재킹, 칼부림
발생 위치
[[일본|]][[틀:국기|]][[틀:국기|]] 치바현 상공
탑승인원 승객: 503명
승무원: 14명
사망자 승무원: 1명
생존자 승객: 503명
승무원: 13명
기종 Boeing 747-481D
항공사 전일본공수
기체 등록 번호 JA8966
출발지
[[일본|]][[틀:국기|]][[틀:국기|]] 도쿄 하네다 국제공항
도착지
[[일본|]][[틀:국기|]][[틀:국기|]] 삿포로 신치토세 공항

1. 개요2. 사고기/사고기편3. 납치범 인적 사항4. 사건
4.1. 납치 계획4.2. 전개
4.2.1. 납치 개시4.2.2. 납치4.2.3. 납치범의 조종 시도와 제압
4.3. 대응과 사건 처리, 조사
5. 여담

[clearfix]
사고 재현 영상 사고 당시 기록된 CVR이다.[1]

1. 개요

全日空61便ハイジャック事件

1999년 7월 23일 정신질환을 가진 비행 시뮬레이션 매니아보잉 747을 조종하려고 했던 비행기 납치 사건.

2. 사고기/사고기편

파일:cfgyer76.png
납치 사건 한 달 전, 하네다 공항에서 촬영된 사고기의 모습

사고기의 테일넘버는 JA8966. B747-481D 항공기로, -400D 계열은 일본 국내선용 항공기였다.[2] 바로 그 전설의 전체 일반석. 시리얼 넘버는 27442/1066. 최초 비행은 1995년 7월 이루어졌으며 전일본공수에는 동년 12월 11일 인도되었고 2014년 1월 17일 퇴역 처리되어 미국 미시시피 주에 소재한 투펄로 지역공항의 비행기 무덤[3]에서 주기중이다. 이 기체는 747-400D 계열의 마지막 기체다.

사고기편인 NH061/062편은 삿포로-도쿄(하네다) 간 정기 항공편이다. 해당 편명은 똑같이 운행되고 있다.

3. 납치범 인적 사항

파일:5264962558047796456.jpg

범인 니시자와 유지(西沢 裕司, 당시 29세)는 1970년생으로, 사건 당시 도쿄도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명문대로 유명한 히토츠바시대학을 졸업했으며 원래 철도 매니아였지만 대학 생활을 하면서 항공 매니아로 전향했다. 그래서 JALANA 등 여러 항공사에 입사 지원서를 냈지만 떨어진 후 1994년부터 1996년까지 JR 화물에서 화물 하역을 담당하는 일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의사소통 능력의 부족으로 대인관계의 어려움을 겪고 결국 우울증 진단을 받았으며 자취 생활과 직장에서의 잦은 실수 등으로 인해 결국 1996년 가을 무단 결근하고 회사를 뛰쳐나갔다가 6개월 간 방황하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회사를 나온 후 집에서 게임을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는데 주로 마이크로소프트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98 등의 게임을 했다고 한다.

1998년에 결국 조현병 판정을 받았다. 그해 여름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이후 경찰과 가족의 권유로 2개월간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4. 사건

4.1. 납치 계획

1999년 6월 니시자와 유지는 도쿄 하네다 국제공항의 보안상 허점을 발견하고 국토교통성, 일본항공전일본공수, 언론 등에 알리면서 자신을 하네다 공항의 경비원으로 고용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했고 심지어 허점 지적도 무시당하자 범행을 꾸미기 시작했다.

이 보안상 허점은 실제로 매우 심각한 것이었는데 1층 도착장에서 제한 없이 바로 2층 출발 구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즉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뒤 그대로 막혀있지 않은 통로를 이용해 출발층으로 들어가 다른 비행기를 몰래 타도 검문이 없어 알 방법이 없었다. 쉽게 말해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지 않고 비행기를 탈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경비원 고용 요구는 그렇다 치고 허점 지적조차도 씹혔고 니시자와의 범행 후 이 일이 알려지면서 보안 허점에 대한 큰 비난이 일었고 이후 공항 재진입이 금지되는 원인이 되었다.[4]

니시자와는 도쿄 하네다 국제공항에서 자신이 발견한 허점을 토대로 납치를 계획했다. 당초 7월 22일로 예정되었던 범행은 날씨가 좋지 않아[5] 그 다음 날로 연기했다.

4.2. 전개

4.2.1. 납치 개시

니시자와 유지는 7월 22일 집을 나가 하네다행 전철 부근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다음 날 하네다 공항으로 갔다.

니시자와는 허점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먼저 일본항공 JL101편을 탑승하여 오사카 이타미 공항까지 갔다가 JL102편으로 다시 하네다 공항으로 돌아왔는데 이 때가 오전 11시를 막 넘긴 시각이었다. 흉기를 소지하고 있었지만 니시자와는 흉기를 수하물로 넣어서 검문을 피하는 치밀함을 보여주었다.[6]

니시자와는 1층 터미널에서 수하물을 찾은 후 곧바로 아무런 제지 없이 2층까지 올라가는 데 성공했으며 전일본공수 NH061편에 탑승하였다.[7]

4.2.2. 납치

파일:external/www.murderpedia.org/pilot.jpg

이 사건의 유일한 사망자 나가시마 나오유키(長島直之) 기장.

11시 21분 52초 NH061편은 이륙 허가를 받았고 22분 하네다 공항이륙하였다.

이륙 2분 후 비행기 2층에 앉아 있던 니시자와 유지는 범행을 개시했다. 니시자와는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후 괴성을 지르며 식칼을 든 채 승무원에게 달려들었으며 승무원에게 조종실 문을 열라고 위협하였고 겁에 질린 승무원이 조종석 문을 열어주자 조종석에 난입하였다. 깜짝 놀란 기장 나가시마 나오유키는 11시 25분 도쿄 출발관제소에 비행기의 납치를 알렸으며 니시자와는 고도를 3000ft(900m)까지 내린 뒤 요코스카로 기수를 돌릴 것을 강요하였다.[8] 관제소는 이것을 승인하였지만 니시자와는 비행기가 기수를 돌린 후 오시마로의 비행을 요구했다.

11시 37분 니시자와는 마음이 변해 이번에는 주일미군요코타 미합중국 공군 기지[9]로 가겠다고 위협했으며 부기장에게 나가라고 지시하였다. 부기장은 니시자와의 요구대로를 조종실을 나갔고 니시자와는 문을 잠갔다.

11시 39분부터 45분까지 기장이 납치범과 한 대화 내용이 관제탑으로 그대로 전송되었으며 45분에는 전일본공수 본사에서 NH061편 납치 대책본부가 설치되었다. 11시 47분 비행기는 미우라 반도를 지났다. 기장은 목적지를 요코타로 변경하겠다고 알렸다.

11시 50분 도쿄 접근관제소는 요코타 접근관제소로 비행기를 이관했다. 같은 시각부터 기장과 납치범의 대화가 다시 관제소로 전송되었으며 니시자와가 전문용어를 쓰는 게 들리기도 했다.

4.2.3. 납치범의 조종 시도와 제압

부기장 좌석에 앉은 니시자와는 조종간을 잡고 조종하려고 했지만 기장은 자신의 조종간을 힘껏 붙들어[10] 니시자와가 비행기를 조종할 수 없게 막고 있었다.

11시 54분 니시자와는 이를 눈치채고 기장에게 조종간을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기장은 고도가 낮아 산에 부딪칠 수 있다고 조종간을 주지 않았다. 니시자와는 화가 나서 들고 있던 흉기로 기장의 어깨와 목을 찔렀다.

11시 55분, 니시자와는 기장을 끌어내리고 비행기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니시자와는 과격하게 조종간을 이리저리 틀며 선회를 하는가 하면 끝내는 조종간을 앞으로 밀어 비행기를 급강하시키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조종실을 나가 있던 부기장은 기장의 비명소리를 들었고 비행기가 곡예비행을 하자 비번이었던 다른 기장과 승객 여러 명을 규합해 조종석으로 달려가 문을 열려고 시도하지만 이미 범인이 잠근 상태였다.

기장 피습 2분 후 부기장은 결국 잠금장치를 부수고 문을 여는 데 성공했고 납치범을 제압했다.[11] 하지만 비행기는 계속 하강 중이었고 분당 1천 피트(304.8m)씩 강하 중이었다. 부기장은 조종석에 앉아 침착하게 비행기를 조종하기 시작했고 기수를 최대로 올려 고도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급하게 조종간을 당긴 나머지 잠시 실속 위기가 있었지만 기장이 미리 오토 스로틀을 설정해 두었기 때문에 자동으로 엔진 출력이 올라가며 무사히 상승할 수 있었다.[12] 한편 승객들 중 의사에게 기장의 응급 조치를 하게 하였다.

오후 12시 3분 부기장은 하네다 공항으로의 회항을 알리고 12시 14분 하네다 공항 22번 활주로에 무사히 착륙하였다. 범인은 체포되었고 기장은 응급조치를 했음에도 골든아워를 놓쳐 과다출혈로 기내에서 사망하였다.

여담으로 나가시마 기장은 고등학생 시절부터 글라이더 조종을 즐겼다고 한다.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스카이다이빙을 했던 경력도 있으며 당시 마이니치 신문에 이 소식이 기사로 실리기도 했다. 결국 같은 항덕인데 한 명은 존경받는 인물로서 영웅적으로 죽어가고 한 명은 정신나간 살인자가 된 것이다.

4.3. 대응과 사건 처리, 조사

파일:external/www.murderpedia.org/plane.jpg
사건 직후 하네다 공항으로 회항한 사고기. 승객들이 내리고 있다.

11시 40분 텔레비전에서 일제히 속보가 나오기 시작했으며 NHK는 12시 40분을 넘어서까지 정오 뉴스를 연장해 사건을 생중계하였다. 다음 날 산케이 신문에서는 용의자의 실명을 1면에 실어 보도하였다.

사망한 나가지마 기장에 대해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와 운수성 대신 카와사키 지로는 각각 표창을 하였으며 기타 별도의 서훈이 이루어졌고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아 폴라리스상이 추서되었다. 2000년 1월 일본 정부는 기장에 대한 산업재해를 인정하였는데 이는 납치 사건 피해자에 대한 첫 산업재해 인정 사례이다.

사건 이후 전세계의 모든 공항에서는 도착한 승객이 내리는 공간과 출발하는 승객이 타는 공간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항공기 환승객이 내리는 곳에서 타는 곳으로 바로 이동할 수 없게 되었다.[13] 운수성 교통국에서는 급히 임시예산을 투입해 하네다 공항과 기타 공항에 대한 보안을 강화하는 한편 다른 공항에서도 보안상 문제점이 있는지 면밀히 조사하였다. 이후 보강이 이루어졌지만 2002년 요미우리 신문은 "범인이 범행 이전 문제점을 지적하였음에도 교통국은 이 문제점을 수용/보강하지 않았다."고 폭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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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니시자와는 조사 당시 사진의 일본동작대교급 다리인 도쿄 무지개 대교 아래를 비행해 보고 싶다고 했는데 그 큰 다리라도 점보 제트기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이나 높이가 당연히 안 되기 때문에[14] 비행기 납치 당시 이 계획을 실행했다면 비행기가 추락하거나 다리와 충돌하며 다리가 붕괴하거나 주변의 다른 건물에 충돌해 대형 참사가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한편 니시자와는 요코타 공군기지로 가려고 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플라이트 시뮬레이터에서만 보던 요코타 기지의 긴 활주로에 착륙해 보고 싶었다" 고 처음 말했으나 이어 "거기서 자살하려 했다."는 등 횡설수설했다.

도쿄 검찰청은 니시자와를 조사한 후 항우울제로 인한 정신불안을 가졌다고 밝혔다. 실제로 니시자와는 우울증 치료를 위해 항우울제를 다량 처방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8년에는 정신분열증까지 발전했는데 체포되면서 항우울제를 먹지 못하자 처음의 들뜬 분위기가 점점 차분해졌다고 한다. 해당 판결문을 인용한 일본 정신과 의사 HP 아스퍼거 증후군에 대한 감정서도 있으나 증거부족으로 법원에서 기각되었다.

1999년 12월 첫 공판이 열렸고 2005년 도쿄 지방 재판소는 4개의 혐의[15]를 인정해 무기징역을 선고해 확정함에 따라 수감 중이다.

5. 여담

  • 4년 전에 일어난 전일본공수 857편 납치 사건과 비슷한 점이 어느 정도 있다. 납치된 항공기가 모두 보잉 747이었으며 공항은 다르지만 모두 도쿄 하네다에서 홋카이도로 향하던 항공편이었다.

[1] 녹음의 음질이 좋지 않은 편이다.[2] 근데 일본항공은 국제노선 중 한국 노선만은 죄다 -400D계열로 운용했는데 그것도 매일 만석이었다. 즉 항속거리는 국제선기준으론 대한민국이 마지노선이었다. 심지어 JL957로 부산 김해국제공항에도 온 적이 있다.[3] 비행기 무덤이라고 모하비 공항만 있는 것은 아니고 미국에 몇 군데 있다. 당장 한국 항공 매니아들에게 친숙한 파이널 에어파크도 있다.[4] 현재 거의 모든 공항은 수하물을 찾는 곳에서 도착 로비로 나가면 절대로 수하물 찾는 공간(보안구역)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데(중요한 짐을 깜빡하고 두고 와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요청해서 찾아서 가지고 나와달라고 해야 한다) 이 규정이 확립된 계기가 이 사건이다.[5] 7월 22일 도쿄 일대는 폭우가 내렸다고 한다.[6] 사실 당시 수하물 운송에도 허점이 있었다. 모든 수하물은(폭탄을 제외하고) 검사 없이 목적지까지 수송되는 점을 범인이 악용한 것이다.[7] 사실 범행 대상기는 오키나와행 NH083편이었는데 환승 도중 비행기를 놓쳐 급하게 NH061편으로 변경한 것이다.[8] 이때 비행기는 도쿄만 상공을 지나 치바현 보소 반도 상공을 선회하여 예정대로 북쪽으로 기수를 틀고 상승하던 중이었다.[9] 도쿄도 다마 지역에 있으며 주일미군 사령부, 주일 미국 공군/제5공군과 항공자위대의 항공총대가 주둔하고 있는 연합 군용비행장이다. 육군이 주력이며 사령관을 맡는 주한미군과 다르게 주일미군은 공군이 주력이고 해병대가 서포트하는 편제며 공군이 사령관을 맡는다.[10] 보잉사의 항공기는 기장석과 부기장석의 조종간이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한쪽이 움직이면 다른 쪽도 똑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기장은 이를 이용해 니시자와의 조작을 막을 수 있었다.[11]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이 사건이 1999년에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9.11 테러 이후 조종실의 문은 외부에서 절대로 열지도 못하고 파괴도 되지 않게 설계되는 것으로 규정이 바뀌었기 때문에 이 사건이 2001년 이후에 발생했다면 승무원들이 조종실에 들어갈 수 없었을 테고 그러면 저먼윙스 9525편 추락 사고와 같은 형태의 참사가 발생했을 것이다. 더불어 당시 기체는 500명이 넘는 승객이 있었고 산맥에 충돌한 저먼윙스 9525편과는 다르게 시내 한 가운데에 추락하게 되었을 것이니 더욱 끔찍한 참사가 벌어질 뻔 했다.[12] 이때 부기장이 몇 분만 늦었어도 비행기는 하치오지 시내에 추락했을 것이며 이 사건은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때보다 더 많은 사망자를 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테네리페 참사를 뛰어넘는 사망자가 나왔을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둘 다 항공사상 최악의 참사다.[13] 미국 국내선과 멕시코 국내선은 비행기에서 내리게 되면 면세구역으로 들어가서 출발 승객과 섞이지만 짐 찾는 곳으로 갈 경우 면세구역으로는 다시 갈 수 없는 건 매한가지다. 환승객의 경우 짐이 자동으로 연결된다.[14] 비상착수를 할 경우엔 이론상으로 완전히 불가능하진 않지만 해수면의 온도가 높아서 상승 기류 문제로 추락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비상착수는 숙련된 베테랑 파일럿도 해내기 힘든 착륙이다.[15] 항공기 강취/치사, 살인, 총도법 위반 혐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