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전일(全一) |
출생 | 1919년 10월 12일 |
평안남도 평양부[1] (現 평양시) | |
사망 | 1986년 5월 18일 (향년 66세) |
인천직할시 북구 가좌동 가좌주공아파트 2단지 자택 (現 인천광역시 서구 가좌동 인천가좌두산위브트레지움) | |
학력 | 일본 센슈대학(専修大學)[2] |
독립운동 경력 | 한족동맹 조사위원장 한국광복군 제 3징모분처 한교전지공작대 대원 |
광복 후 경력 | 강릉경찰서장 충주경찰서장 경기도경찰국 사찰과장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45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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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경찰공무원.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한 공적을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19년 10월 12일 평안남도 평양부(現 평양시)에서 태어났다.3. 독립운동
1936년 만주국으로 건너가 길림성 통화현(通化縣)[3]을 거점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는데 조선혁명당의 정보부장을 역임했다. 그 뒤 중화민국 국민혁명군에 입대해 제 3전구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안휘성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김해일(金海一)의 인솔 하에 한국광복군 제 3징모분처 입대했다.
1943년 3월, 저장성(浙江省) 티엔타이현(天臺縣) 티엔무산(天目山)에 주둔 중인 제 1정진유격종대사령부第一挺進遊擊從隊司令部(타오광陶廣 중장) 영하에 절서분실(浙西分室)을 설치하고 박철원씨를 분실장으로 임명하였으며, 동 간부 전호인, 정영호 등을 항저우(抗州), 상하이(上海), 자싱(嘉興), 닝보(寧波) 등지에 파견하여 적전후공작을 전개하여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Washington Registry Intelligence Field Files, 1942 - 1947 (Entry UD 108)
한국 독립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보고에서는 한족동맹(Korean National League) 간부들을 일일이 나열하여 기록하고 있다.
Strategic Services Unit, 미 전쟁성 [4]
국적 : 한국
제목 : 한족동맹(韓族同盟) 간부들, 마오린(茂林) 본부
문서기원 : 상하이
전구 : 중국
문서 생산날짜 : 1945년 5월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10]
한국 독립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보고에서는 한족동맹(Korean National League) 간부들을 일일이 나열하여 기록하고 있다.
Strategic Services Unit, 미 전쟁성 [4]
국적 : 한국
제목 : 한족동맹(韓族同盟) 간부들, 마오린(茂林) 본부
문서기원 : 상하이
전구 : 중국
문서 생산날짜 : 1945년 5월
유수인 | 한족동맹 의장. 현재 제 3전구 한교전지공작대 주임. 41세 진링대학(金陵大學) 졸업. 향촌사범학교 교장, 남화한인연맹 가담. |
박철원 | 한족동맹 총비서[5]. 제 3전구 한교전지공작대 대원, 27세, 남경중앙대 농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및 만선일보 기자. |
전일 | 한족동맹 조사위원장. 30세이며 일본에 센슈대학(専修大學)에서 공부함. 만주의 조선혁명당[6]의 정보부장. |
정동율 | 한족동맹 조사위원회. 43세, 숭실대학 졸업. |
이일범 | 한족동맹 조사위원회. 27세 남경중앙대 법학과 졸업. 일본 헌병대에 통역병으로 근무. |
안강 | 한족동맹 총무과장. 26세 일본중앙대 졸업. 안후이성(安徽省) 벙부(蜯埠)에서 일본영사관 직원이었다. |
조일문 | 한족동맹 정치부장. 27세 남경중앙대 법학과 졸업. 일본군 특무부대에 통역병으로 근무. |
김호 | 한족동맹 훈련부장. 32세 보성고등학교 졸업. 환남총사령부 고문. |
류향 | 한족동맹 비서. 24세. 일본의 대학에서 다닌 적이 있다. 광신소학교 교장. |
심용철 | 한족동맹 비서. 32세. 푸젠셩(福建省) 민생학교(民生學敎)[7]에서 훈련반 졸업. 난징괴뢰국(中華民國南京國民政府)의 훈련장교였다. |
피춘여 | 한족동맹 총무부 총무본부. 26세 봉천대학 |
변일성 | 한족동맹 총무부 회계조장. 25세. 도쿄이과대학. |
정람명 | 한족동맹 총무부처 공공복지담당. 26세, 평양전문의대 졸업. 약사 |
김형석 | 한족동맹 정치부 정보장교. 28세.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제3 분대장 |
한진원 | 한족동맹 선전부장. 38세. 피어슨 성경 기념 학원(Pearson Bible Training School)[8] 졸업. 한국광복군 대원 |
김해성[9] | 한족동맹 징모처장. 28세 강계고등학교 졸업. 난징괴뢰국의 특무대원. |
석원석 | 한족동맹 군사훈련장교 23세. 일본군 26사단 통역병. |
박화 | 한족동맹 군사훈련장교, 22세. 난징중앙대 건축과 이수. |
4. 광복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하자, 징모 제 3분처에서는 간부 20명을 중심으로 적군지역에 대한 초모 확대반 5개조를 조편성하여 파견계획을 완비하던 중 적이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되여 총사령부 지시에 의한 적 점령지구 내의 교포 생명/재산 보전 및 한적 장병 수용 임무를 구축하고자 각 지구에 선발대를 파견하였으며 그 명단은 아래와 같다.
우후지구(蕪湖地區) | 박승학 |
난징지구(南京地區) | 이일범, 박철원, 피문성 |
상하이지구(上海地區) | 김룡, 박시준 |
항저우지구(抗州地區) | 전호인, 정영호[11], 유익배 |
등이 파견되어 소임직무를 완축하였다.[12]
5. 경찰 입적
8.15 광복 후 귀국했고, 1948년 경찰공무원으로 입직했다. 강릉경찰서장 재직 중이던[13] 1949년, 관내 왕산면 대기리 노추산에 공비 100여명이 집결해 부근 일대에서 주둔해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10월 10일부터 공비 소탕전을 전개해 공비 30여 명을 사살해 공비 소탕에 큰 공을 세웠다. 또한 이 과정에서 공비들의 은신처에 납치되어 취사 등 잡역에 종사하던 15~16세 되는 소녀 10여 명을 구출해 친척들에게 돌려 보내주었으며, 의탁할 곳 없는 소녀들은 적당한 곳에 알선해주는 등 선행을 베풀기도 했다.
6.25 전쟁 발발 당시 조선인민군이 강릉군(現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 정동진에 상륙해 강릉군 읍내로 진출한다는 보고를 받고는 제8보병사단에 통보하고, 관할 경찰서에 비상을 걸어 상륙을 저지하려 했으나 통신망 두절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6월 27일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 대관령으로 후퇴하고, 주문진경찰서 소속 경찰과 합류해 낙동강 전선으로 철수,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였다.
1950년 9월 10일부터 1951년 11월 13일까지 제7대 충주경찰서장을 역임했으며, 1953년 6월 30일에는 경기도경찰국 사찰과장으로 근무하다가 10월 17일 총경으로 대한민국 내무부 치안국으로 전보되었다. 그 뒤 1954년 4월 10일 같은 한국광복군 출신인 김기도, 이세경(李世鏡)과 함께 군과 경찰 내에 숙군(肅軍)사업으로 인하여 면직했다. 이후 다시 복직했으나 1960년 퇴직했다.
이후 경기도 인천시(現 인천광역시)에 거주했고, 1963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 이후 광복회 인천지회장을 역임했고, 1977년 11월에는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1986년 5월 18일 인천직할시 북구 가좌동 가좌주공아파트 2단지(現 인천광역시 서구 가좌동 인천가좌두산위브트레지움) 자택에서 협심증으로 별세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고, 2003년 11월 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6. 가족관계
장녀 전성희(全聖姬)는 대성산업 김영대 회장의 비서실장으로 40여 년 째 근무 중이며, 국내 최고령 비서이다. 첫째 사위이자 전성희의 남편인 심재룡(沈在龍, 1943 ~ 2004. 10. 20)[14]은 1961년 서울고등학교를 거쳐 1965년 서울대학교 철학과(61학번)를 졸업하고 1968년부터 경향신문 기자로 근무했으며, 1969년 동서문화재단 장학생으로 하와이 대학교로 유학해 석사 과정을 거쳐 1979년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해 귀국 후 모교인 서울대학교 철학과 불교철학 전공 교수로 부임했다. 2004년 10월 20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지병인 백혈병으로 별세했다.7. 참고자료
- 독립유공자 공훈록
- 독립운동사 제6권
[1] 1950년 3월 13일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중화민국 출생이라고도 한다.[2] 일본 지요다구의 대학[3]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4]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에 존재했던 미국 정부 의 정보 기관. 이는 전시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의 비밀 정보 및 대첩 부서로 1945년 10월 1일 창설된다. 이 문서는 중국전구(China Theatre)에 주둔하던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요원이 작성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 조직은 훗날 미국 CIA가 된다.[5] 유기석 회고록에선 보조대장으로 불린다. 유기석, 삼십년방랑기-유기석 회고록, 국가보훈처 2010[6] 양세봉, 지청천[7] 1937년 평민중학교(平民中學校)의 교사였다.[8] 現 평택대학교[9] 산시성 시안 2지대의 김해성과 다른 동명이인이다.[10] Washington Registry Intelligence Field Files, 1942 - 1947 (Entry UD 108),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소장[11] 저장성 외교조원[12] 김승학, 한국독립사 제 2편 제 3장 제 6절 p. 302[13] 강릉경찰서 홈페이지에는 무슨 이유에선지 전호인의 재직 기간을 1950년 3월 19일부터 1950년 9월 29일까지로 기재하고 있다. 강릉경찰서 홈페이지에 따르면 1949년 10월 10일 당시 강릉경찰서장은 제8대 윤종한 서장(재직기간 1949. 9. 25 ~ 1950. 3. 18)이었고, 전호인은 제9대 서장이었다.[14] 초명은 심광웅(沈光雄)이며 광웅(光雄, 미츠오)이 일제식 이름과 같다고 하여 1974년 12월 16일 항렬자인 '재'를 따서 재룡으로 개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