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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관

파일:정윤관(1910).pn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야마다 마코토칸(山田允官), 야마다 게이오(山田啓男)
출생 1910년 9월 19일
평안북도 선천군 심천면 고군영동 36번지(平安北道 宣川郡 深川面 古軍營洞 36番地)
사망 1981년 6월 27일 (70세)
본관 진주 정씨
소속 한국광복군 제 3징모분처 한교전지공작대(韓國光復軍 第三徵募分處 韓橋戰地工作隊) 군자금 조달 지하공작 요원[1]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128호
상훈 건국훈장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3. 독립운동4. 이일범 구명운동5. 광복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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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윤관은 평북 선천 출신으로 1939년 중국에 와서 군속으로 활약하여 광복군에 군자금을 제공한 독립운동가이다.

2. 생애


일찍이 중국으로 건너와 일본인 상회에서 일하며 근면, 성실함을 인정받아 사장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경영에 대한 수업을 전수받게 된다. 그 후 당시 중국 수도였던 난징(南京)으로 거처를 옮긴 후, 군납의류사업을 시작으로 전기제품 사업 등을 일으켜 뛰어난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자수성가로 남경 제일의 부자가 되었다.

1943년 그가 운영한 난징피복공장은 군 지정공장으로서 15만엔 이상의 자본으로 중국인 직공 수백 명을 고용하고 500여 대의 미싱을 보유하고 있었다. 주로 일본군 군복과 화평군(왕징웨이 괴뢰 중국군) 군복제작을 하고 있었다.

1943년 6월 초, 이일범의 누나인 이성희와 결혼한다.[2]

3. 독립운동


일본군의 점령 하에 있던 중국 난징(南京), 상하이(上海) 등지에서 표면적으로는 개인사업 등 사회활동을 계속하면서, 이면에서는 광복군 군자금 및 공작금을 조달하여 제공하는 등 철저하게 위장된 지하공작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일본이름 출생년도 업종/상호 원적 개업년도 주소
야마다 마코토칸山田允官, 야마다 게이오山田啓男 1910.9.19. 무역업/산따꽁스(三大公司), 산쥬히로유키(三中洋行) 평북 선천 심천면 고군영동 36번지 1939 난징 타이핑루 405호(南京 太平路 405號)
[3]

1938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남경지구 지하공작대 소속으로 유수인, 정봉주 등 30여 동지에게 7년간에 걸쳐 당시 일화 기백만 원의 군자금 및 공작금을 제공했다.
제공년도 제공금액 공작금 받은 사람
1938~1944 15만엔 정봉주, 정영호
1940~1944 1만엔 김해일
1940~1944 80만엔 이일범, 정영, 이근
1940~1944 5만엔 유익배
1940~1944 10만엔 조일문
1941~1944 3만엔 전호인
1942~1944 5만엔 정희섭
[4]

4. 이일범 구명운동


1943년 6월, 난징 중앙대학 학생사건의 주모자 조일문, 송지영(宋志英), 이일범, 이정선 등 이 한인 밀정 최상교에 의해 일본 주상하이 경찰에 의해 발각, 피체(被逮)되어 송지영, 이일범은 각각 17년 형을 선고받고, 조일문은 난징 중앙대학 궈꽝완리(國光萬里) 교수의 노력으로 남경특무기관(南京特務機關) 근무를 조건으로 석방되었다고 한다.

정윤관은 궈꽝완리(國光萬里) 교수를 일화 20만엔에 매수, 그를 통하여 일본 중지파견 헌병사령부(中支派遣 憲兵司令部) 특고과장 중좌(特高課長 中佐/성명미상)를 일화 100만엔에 매수하여 처남 이일범을 헌병총사령부 통역으로 근무하는 조건으로 석방시켰다.

1944년 3월 말, 정윤관은 200만엔을 조달, 위문단 초청 수속과 허가 등은 당시 만주국 난징주재공사(滿洲國 南京駐在公使)인 박석훈(朴錫勳/한국인)의 전적인 후원으로 성사되어 박시춘(朴時春)이 인솔하는 서울신협가극단원 43명을 초청한다.

난징 주재 일본군부대를 위문 공연할 때를 기회삼아 조일문, 이일범, 유익배, 정봉주, 정영호, 이근, 정영, 정희섭, 왕하이칭(王海靑, 중국 대학생) 피안창주(片昌柱, 중국 대학생)외 7명 등 총 18 명을 대거 일본군 병영에서 탈출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 탈출을 지휘한 사람은 유기석으로 30년 방랑기 유기석 회고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당일 오전, 나카하라 스스무(조일문의 일본이름)는 미리 연락부 초소에서 우리들을 영접했는데, 이렇게 하여 초병이 손님을 검문하는 것을 면하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날 나는 황색과 옅은 갈색이 섞인 군복을 입고 망토를 걸치고 긴 가죽신을 신고 왕汪 괴뢰군대의 소장으로 가장했다.
(중략)
적의 수사망이 소북(蘇北)으로부터 펼쳐져 갈수록 바싹 좁혀 들고, 남경에서 머지않아 조사가 시작될 것이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만일 이전과 같이 의사나 상인으로 변장하면 아마도 적 포위망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어서, 나는 군복으로 갈아입고 괴뢰군대의 고급군관으로 가장했다. ‘고급군관’이기에 몇 명의 호위병을 데리고 가지 않을 수 없었고, 호위병이 없으면 고급 장령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단독으로 길을 가면 도리어 불편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두 소북 관적의 동료 청程과 양楊에게 나의 호위병을 맡으라고 말하고, 그들 역시 괴뢰군대의 병사 복장을 입었으며 완장ㆍ부호ㆍ이정표 등을 모두 다 준비했다. [5]

여기서 '괴뢰군대'란 친일괴뢰 왕징웨이 정권의 난징중화민국의 화평건국군을 말하며 정윤관은 이 군복을 제작하여 탈출하는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5. 광복 이후


난징탈출공작 이후로는 장쑤성 친현(江蘇省 秦懸)에 탈출, 피신했다고 한다.
1946년 2월 말에서 3월 중순 사이 상하이로 이송되어 귀국한다.
[1] 정윤관 독립운동공적정보[2]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출판사, 2012, p. 83[3] 출처 :「南京實業家の群像—現地に於けゐ半島人の活躍振りを見ゐ—」, 『대동아』 제 15권 제 3호, 1943.3.1, 82∼88, 102∼104쪽[4] 위의 내용이 모두 거짓 없는 진실이었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던 광복군 동지들이 확인 서명(날인)한 원본은 보훈처에 제출(1976년)하여 보관하고 있다.[5] 유기석, 30년 방랑기 유기석 회고록, 국가보훈처, 2010, pp. 315~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