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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야마모토 시에이(山本志泳) |
호 | 우인(雨人) |
본관 | 여산 송씨[2] |
출생 | 1916년 12월 13일 |
평안북도 박천군 남면 동하동[3] (현 평안북도 박천군 맹하리)[4] | |
사망 | 1989년 4월 24일 (향년 72세) |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3가 서울을지병원 | |
학력 | 난징 국립중앙대학 (중문학 / 중퇴[5])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92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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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전 언론인, 소설가, 정치인이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2.1. 초년기
1916년 12월 13일 평안북도 박천군 남면 동하동(현 박천군 맹하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12살 되던 1928년 평소 정감록에 심취해있던 조부의 주도하에 가족들과 함께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 금계동(현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432번지로 이주했고, 이곳에 본적을 두었다.10대에 영주군 풍기면 삼가리 달밭골에서 사촌 동생 유계(幽溪) 송지향(宋志香, 1918 ~ 2004)과 함께 한문·국문학·역사 등을 배웠고, 이후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가산리 상선암에서 수학하면서 독학으로 사서오경과 주역을 깨우쳤다.
14살 때, 3살 위인 함(咸)씨랑 결혼을 하게 되었다. 17세 때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생활수기 모집에 「화전민들과 같이」라는 제목으로 응모, 당선, 산 속의 초막 생활을 소설체로 쓴 체험기는 신문에 15회나 연재했다. 동아일보 독자란에 논문, 수필을 보내기만 하면 빠짐없이 게재되었고, 힘을 얻은 그는 그 당시 <일월시보>와 지금의 <신동아> 전신인 <신가정>에 수필이 실렸다. 이미 <동아일보>의 편집국에서는 그의 글 솜씨를 인정하고 있던 터였고 경상도의 동아일보 지국에서는 "기자를 해 보는게 어떠냐?"고 농담할 정도로 마을에서는 글 잘 쓰는 청년으로 알려진다.
어느날, 동아일보에서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편집국장 설의식씨의 편지인데 "글을 보고 기자의 소질이 있다고 생각되기에 본사에 올라와 견습기자 생활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살사건의 기사로 인해 1년 6개월 동안 휴간당했다가 다시 복간된 직후였다.
그 뒤 1935년 7월 24일 동아일보사 맹중리(孟中里)분국 기자로 임명되면서 언론계에 입문하게 되었고, 이어 1936년 5월 9일에는 동아일보사 풍기지국 기자로 임명되었다. 1937년 6월 1일 동아일보사 풍기지국 총무에 임명되었고, 1939년 11월 1일에는 동아일보사 신경지국 총무에 임명되어 만주특파원 등을 지내기도 했다.
동아일보에서 인생을 초년병으로 나딴엔 정열을 쏟아 오다가 일제의 강압으로 발간되자 만주땅을 떠돌며 잠시 동안 만선일보에 일터를 열었으나 그것마저 가갸거겨도 모르는 색맹같은 일본인이 우리말 신문의 편집국장으로 오는 것을 보고 보따리를 싸지 않을 수 없었다.
무작정 상하이(上海)로 갔다. 가기도 무척 힘이 들어 어떤 생명보험회사의 외교원으로 간다는 명목으로 다롄(大連)에서 배를 탔었다. 상하이는 우리 임시정부의 발상지요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혈흔으로 얼룩진 고장이었다. 그러나 내가 갔을 때는 일제에 덮여 있는 국제도시 상하이의 모습이었다.
고달프고 괴로와하는 중생들이 넋을 읽고 방황하나 다름없는 거리에서 나는 노래로 불러지는 꿈속의 사마로의 등불의 낭만조차도 느껴 볼 겨를도 없이 얼마동안 교포 김경재[6]가 경영하는 중국말 신문사 상하이시보(上海時報)에서 일을 보다가 난징으로 가버렸던 것이었다.[7]
무작정 상하이(上海)로 갔다. 가기도 무척 힘이 들어 어떤 생명보험회사의 외교원으로 간다는 명목으로 다롄(大連)에서 배를 탔었다. 상하이는 우리 임시정부의 발상지요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혈흔으로 얼룩진 고장이었다. 그러나 내가 갔을 때는 일제에 덮여 있는 국제도시 상하이의 모습이었다.
고달프고 괴로와하는 중생들이 넋을 읽고 방황하나 다름없는 거리에서 나는 노래로 불러지는 꿈속의 사마로의 등불의 낭만조차도 느껴 볼 겨를도 없이 얼마동안 교포 김경재[6]가 경영하는 중국말 신문사 상하이시보(上海時報)에서 일을 보다가 난징으로 가버렸던 것이었다.[7]
난징 중앙대학에 입학하기 두 달 전(1940.7) 상하이시보(上海時報) 기자 신분으로 난징을 방문하였는데[8] 당시 그에게 난징의 인상은 ‘환도(還都) 1주년이 지난 수도’로서 ‘육십만 시민이 몸과 마음을 합하여 왕(汪) 주석을 옹호하고 그런 만치 화평과 질서를 끔직이도 사랑하며 사랑하므로서’ 안정된 도시였다. 그는 중앙대학 재학 중에도 국내에서 발간되는 《춘추(春秋)》잡지에 1942년 4월부터 1년 동안 익명으로 난징 상하이 통신(南京上海通信), 난징 통신(南京通信) 이라는 제목으로 8 편의 글을 연재하였다.[9]
김경재와 송지영의 인연은 1936년 만선일보 논설위원을 하면서부터였고 1939년 일본도쿄제국대학 농과 동기 동창이자 저장성 재벌인 중국인 쏴(紹)씨의 후원으로 중국어판 상하이시보 일간지를 발행했다고 한다. 신문사 경영에서 오는 손실을 보완하기 위에서 웨일리스 극장을 매수하여 운영을 했다고 한다.
1942년 2월초 김경재가 포고령 위반혐의로 연행되어 일본 헌병대에 수감되고 상하이시보 간부들을 모아놓고 전시 하, 언론통합령에 의거하여 신문사를 폐쇄처분하게 된다. 중일전쟁으로 인하여 신문사는 폐간되고 웨일리스 극장도 압류당하게 된다. 이러한 기고문을 쓰게 된 것도 신문사가 일본인에게 넘어가면서 송지영은 당장이라도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입장이었고 하숙방에서 난징 계명사(鷄鳴寺)라는 절에 기거하면서 1943년 6월에 충칭으로 탈출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난징중앙대를 다니고 있던 송지영의 입장에선 하숙비와 대학등록금을 독촉받고 있어서 어려움이 있던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2.2. 독립운동
상하이시보(上海時報) 기자로 재직하다가, 같은 해 난징시로 가서 난징 국립중앙대학 중문학과에 입학했다. 그 해 대학에서 만난 조일문·신영묵·이정선·이일범(李一凡)·박철원(朴哲遠)·박익득(朴益得) 등과 함께 중화민국 국민정부 특파원인 링즈난(凌志男) 상교[10]와 접선했고, 이에 비밀결사 한족동맹(韓族同盟)을 조직했다. 그 뒤 쑤징허(蘇景和)·왕하이칭(王海靑)·링단루(凌澹如)·린시위안(林世源) 등 중국인 학우들의 협조로 일본군의 동향을 탐사하고 독립운동 참여를 희망하는 청년들을 규합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제 2 지대(支隊) 등에 후송했다.[11]
1943년 6월, 충칭(重慶) 임시정부에서 밀파되어 중경에서 파견된 한국독립당 소속김병호(본명은 김병호金柄豪, 김중민金仲民, 고중민高仲民)가 송지영의 거처로 찾아와 한국독립당 상하이ㆍ난징 지구 공작 임무를 맡아 줄 것을 제의했고 이에 송지영은 쾌히 승낙하였다. 당시 김병호는 국내에 갔다가 돌아온 후 난징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베이징으로 떠났다.[12]
나를 찾아 온 그는 경기도 용인 태생으로 이름은 김중민(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 암살사건으로 옥사) 내가 그 외진 절간에 기숙하고 있음을 어떻게 알고 찾아 왔는지 처음 그가 자기의 내력을 밝혔을 때 나는 적지 않아 놀랐으나 한 편 반갑기 한량 없었다.
충칭(重慶)에서 임시정부의 특명을 받고 나왔노라는 한 마디에 나는 놀라면서도 가슴은 몹시 설레었다. 방학이 끝나면 결행하기로 한 우리들의 간절한 염원이 이보다 쉽게 빠르게 이루어질 것이 기뻣다. 그러나 김중민 형은 나의 고백을 귀담아 듣고 나더니 머리를 가볍게 저으며 우리들 생각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였다.
일제의 야수적인 전쟁이 마지막 고비에 이른 때에 스촨으로 가는 것은 물론 바람직한 일이나 더 급한 일을 상하이 난징 지구에서 해야 할 일이 더 많다는 것이었다. 그 자신은 중요한 임무를 맡아 국내로 들어가는 길이니 나더러 상하이, 난징지구의 공작임무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안팎의 정세를 소상히 설명하면서 그런 말을 하는데는 벅찬 감격과 아울러 피가 용솟음 침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 자리에서 결히 승낙하였다. 그는 내 손을 꼭 잡고 고맙다는 말을 되뇌이면서 속 한국독립당의 강령이며 규약등을 외워 주고 나는 그대로 받아 썼다. 그래서 나는 한독당의 비밀당원으로 가입을 한 셈이고 상하이와 난징 지구에서 지하공작의 책임을 맡게 되었던 것이었다.[13]
충칭(重慶)에서 임시정부의 특명을 받고 나왔노라는 한 마디에 나는 놀라면서도 가슴은 몹시 설레었다. 방학이 끝나면 결행하기로 한 우리들의 간절한 염원이 이보다 쉽게 빠르게 이루어질 것이 기뻣다. 그러나 김중민 형은 나의 고백을 귀담아 듣고 나더니 머리를 가볍게 저으며 우리들 생각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였다.
일제의 야수적인 전쟁이 마지막 고비에 이른 때에 스촨으로 가는 것은 물론 바람직한 일이나 더 급한 일을 상하이 난징 지구에서 해야 할 일이 더 많다는 것이었다. 그 자신은 중요한 임무를 맡아 국내로 들어가는 길이니 나더러 상하이, 난징지구의 공작임무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안팎의 정세를 소상히 설명하면서 그런 말을 하는데는 벅찬 감격과 아울러 피가 용솟음 침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 자리에서 결히 승낙하였다. 그는 내 손을 꼭 잡고 고맙다는 말을 되뇌이면서 속 한국독립당의 강령이며 규약등을 외워 주고 나는 그대로 받아 썼다. 그래서 나는 한독당의 비밀당원으로 가입을 한 셈이고 상하이와 난징 지구에서 지하공작의 책임을 맡게 되었던 것이었다.[13]
1943년 우리가 대학 3학년 때였다. 일단의 일본군경이 송지영 형의 숙소를 덮쳤다. 그를 붙잡아가고 방안의 모든 것을 압수해 갔다. 나는 금시 짚이는 데가 있었다. 송형이 잡혀가기 한 달 전 충칭(重慶)의 한국독립당에서 밀파된 김중민(金仲民)씨가 난징(南京)에 잠입하여 그를 만났다. 며칠 뒤 송형은 나에게 그 사실을 일러 주면서, 그를 한 번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는 내주의 중간고사가 끝난 다음에 보자고 했다. 송형이 끌려간 지 닷새만에 일본 영사관 경찰이 내 하숙방에 들이닥쳤다. 나는 갖은 고문과 협박 끝에 열흘만에 풀려났다. 김중민 씨를 만나지도 못한 내가 단지 그런 말을 들었다는 사실만으로 그토록 심한 곤욕을 당하였는데, 김중민 씨나 송형은 얼마나 모진 고통을 당했겠는가?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친다.
그 후 우리는 멀리 떨어졌다. 송형은 일본 나가사키(長崎)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고, 나는 중국 장쑤(江蘇), 장시(江西) 일대에서 광복군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나는 푸젠성(福建省) 장팅(長汀) 비행장에서 충칭행 비행기를 기다렸다가 적의 항복 소식을 들었고 송형은 나가사키 감옥에서 원자탄 세례를 받고 해방을 맞이했다.[14]
그 후 우리는 멀리 떨어졌다. 송형은 일본 나가사키(長崎)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고, 나는 중국 장쑤(江蘇), 장시(江西) 일대에서 광복군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나는 푸젠성(福建省) 장팅(長汀) 비행장에서 충칭행 비행기를 기다렸다가 적의 항복 소식을 들었고 송형은 나가사키 감옥에서 원자탄 세례를 받고 해방을 맞이했다.[14]
그때가 1943년 8월 중순이었다.(중략)내가 상하이에 온 것을 알고 찾아와서 박철원, 송지영 두 형이 충칭임시정부에서 밀파된 김중민(金仲民)을 1943년 6월 중순 난징(南京)에서 만나 반일지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동지를 규합하기로 모의한 일이 탄로가 나서 송지영 형은 상하이에서, 김중민은 난징에서 체포되어 영사관에 구금되어 있다고 전했다.
사건의 발단은 송지영 형이 상하이에 와서 황포군관학교 출신 전향자 최상교를 찾아가서 충칭임시정부에서 밀파된 김중민과 모의한 내용 일체를 털어놓고 말한 다음 이제부터 조국광복운동에 가담하면 전과(前科) 일체를 불문에 부치고 용서해 준다고 하니 자기와 같이 일을 하자고 종용했다고 한다. 최상교는 송지영의 말을 듣고 나서 일언반구 대꾸도 않고 있었다고 한다. 송지영이 간다고 일어나자 지금 어디 갈거냐고 묻더란다. 유인섭(柳仁燮)형을 만나러 가려고 한다고 하자 그러냐고 하고 작별인사를 하고 난 후 최상교는 일본영사관에 연락을 했다고 한다. 송지영 형은 그런 사실도 모르고 유인섭 댁을 찾아가 문전에서 부저를 누르고 있다가 일본영사관 형사에게 검거되었다. 송지영형이 끌려가는걸 유인섭은 때마침 현관문을 열다가 그 광경을 보았다고 한다. [15]
사건의 발단은 송지영 형이 상하이에 와서 황포군관학교 출신 전향자 최상교를 찾아가서 충칭임시정부에서 밀파된 김중민과 모의한 내용 일체를 털어놓고 말한 다음 이제부터 조국광복운동에 가담하면 전과(前科) 일체를 불문에 부치고 용서해 준다고 하니 자기와 같이 일을 하자고 종용했다고 한다. 최상교는 송지영의 말을 듣고 나서 일언반구 대꾸도 않고 있었다고 한다. 송지영이 간다고 일어나자 지금 어디 갈거냐고 묻더란다. 유인섭(柳仁燮)형을 만나러 가려고 한다고 하자 그러냐고 하고 작별인사를 하고 난 후 최상교는 일본영사관에 연락을 했다고 한다. 송지영 형은 그런 사실도 모르고 유인섭 댁을 찾아가 문전에서 부저를 누르고 있다가 일본영사관 형사에게 검거되었다. 송지영형이 끌려가는걸 유인섭은 때마침 현관문을 열다가 그 광경을 보았다고 한다. [15]
김병호(金柄豪)가 상하이(上海)의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므로써 송지영도 임시정부의 비밀 공작원이라는 사실이 탄로나고 말았다. 송지영도 상하이에서 체포되었다.
1944년 8월 15일 재외상해일본제국영사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일본으로 이송돼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복역 중이던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으나 가까스로 화를 면했고, 일주일 뒤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 패하면서 비로소 석방되었다.
정정화의 장강일기에서도 송지영에 대한 언급이 있다.
고중민[16]은 고등계 형사로 있을 때 이른 바, 사상범으로 글려 들어온 학생을 감싸주었다가 일본 경찰에게 몰려 쫒겨났는데, 그 후 국내를 빠져나와 광복진영에 합류한 것이었다. 고중민은 자신의 과거 행적을 숨김없이 밝혀 우리 사이에 오해가 풀리고 난 후 충칭에서 1년 남짓 임시정부의 일을 도와주며 지내다가 국내로 들어가 지하활동을 하겠다고 자청했다.
국내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국내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고, 임시정부로서도 국내의 사정을 잘 알고 활동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했으므로 그의 자원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임정에서는 여러 해만에 국내에 사람을 밀파하게 되었다.
고중민은 임정의 밀령을 받고 충칭을 떠나 중국 국민당의 지하 연락망을 통해 난징으로 갔다. 그 무렵 난징에는 일본 괴뢰정부가 들어서 있던 때였고, 흔히들 그 정부를 가르켜 "난징 정부"라고 불렀다. 그 곳 난징에는 괴뢰정부와의 교섭으로 교환학생들이 여러 명 유학하고 있었는데, 그 중 진링(金陵)대학(진링은 난징의 옛 이름)에 한인 학생들이 여럿 유학을 와 있던 참이었다.
그가 난징으로 간 것은 이들 유학생을 포섭하여 광복군에 입대시키기 위해서였다. 김병호(金炳豪)라는 자기 본명을 숨기고 고중민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하면서 그는 여러 유학생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고중민의 유학생 포섭 공작은 적지나 다름없는 곳에서 진행되는 것이었으므로 위험하기로 따진다면 거의 목숨을 걸고 활동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포섭공작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 즈음 예상되었던 위험이 현실로 나타났다. 완벽하게 포섭되었으리라고 믿었던 한 학생이 동료들을 등지고 일본 헌병에 밀고해버린 것이다. 고중민의 포섭 공작은 샅샅이 탄로났고, 그 공작에 포섭되었던 유학생 다수도 전원 일본 헌병대에 수감되었다.
극비로 추진되는 포섭활동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외부 보안에만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채 내부 동태관리에 소흘하였던 것이 큰 불찰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일본인 교수 한 명이 학생들을 옹호하고 나섰고 수감되었던 학생들의 신분을 참작한다는 일본 헌병대의 배려(?)로 학생들만은 전원 석방되었다.
다만, 고중민과 유학생 송지영은 유죄 판결을 받고 일본 나가사키 근처 한 형무소에 투옥되고 말았다. 송지영은 「동아일보」의 기자로 있다가 진링대학으로 유학을 와 있을 때였는데, 다른 학생들에 비해 나이가 많았고, 포섭공작에 깊게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중민과 함께 주동자로 판결이 났던 것이다.
그 후, 고중민과 송지영은 일본 형무소에서 해방을 맞게 되었다. 고중민은 귀국 후, 김중민이라고 개명했으며,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여 행동했는데,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암살 계획에 관련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그 곳에서 옥사하고 말았다.
그는 성품이 활달하고 모든 일에 적극적이어서 일단 자신이 해야할 일이라고 판단을 내리면 주저하지 않고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었다. 일본 고등계 형사로 있다가 광복진영으로 뛰어든 일, 자신의 아름답지 않은 과거를 과감하게 밝히고 자청해서 위험천만한 포섭공작을 맡았던 일, 출옥 후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투쟁한 일 등 그의 행적이 그의 성품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그와 함께 대구형무소에 투옥된 사람들을 4.19혁명 후 모두 출옥했는데, 고중민은 단명한 탓인지 이승만 독재가 무너지는 것도 못보고 그만 세상을 떠난 것이다.[17]
국내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국내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고, 임시정부로서도 국내의 사정을 잘 알고 활동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했으므로 그의 자원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임정에서는 여러 해만에 국내에 사람을 밀파하게 되었다.
고중민은 임정의 밀령을 받고 충칭을 떠나 중국 국민당의 지하 연락망을 통해 난징으로 갔다. 그 무렵 난징에는 일본 괴뢰정부가 들어서 있던 때였고, 흔히들 그 정부를 가르켜 "난징 정부"라고 불렀다. 그 곳 난징에는 괴뢰정부와의 교섭으로 교환학생들이 여러 명 유학하고 있었는데, 그 중 진링(金陵)대학(진링은 난징의 옛 이름)에 한인 학생들이 여럿 유학을 와 있던 참이었다.
그가 난징으로 간 것은 이들 유학생을 포섭하여 광복군에 입대시키기 위해서였다. 김병호(金炳豪)라는 자기 본명을 숨기고 고중민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하면서 그는 여러 유학생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고중민의 유학생 포섭 공작은 적지나 다름없는 곳에서 진행되는 것이었으므로 위험하기로 따진다면 거의 목숨을 걸고 활동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포섭공작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 즈음 예상되었던 위험이 현실로 나타났다. 완벽하게 포섭되었으리라고 믿었던 한 학생이 동료들을 등지고 일본 헌병에 밀고해버린 것이다. 고중민의 포섭 공작은 샅샅이 탄로났고, 그 공작에 포섭되었던 유학생 다수도 전원 일본 헌병대에 수감되었다.
극비로 추진되는 포섭활동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외부 보안에만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채 내부 동태관리에 소흘하였던 것이 큰 불찰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일본인 교수 한 명이 학생들을 옹호하고 나섰고 수감되었던 학생들의 신분을 참작한다는 일본 헌병대의 배려(?)로 학생들만은 전원 석방되었다.
다만, 고중민과 유학생 송지영은 유죄 판결을 받고 일본 나가사키 근처 한 형무소에 투옥되고 말았다. 송지영은 「동아일보」의 기자로 있다가 진링대학으로 유학을 와 있을 때였는데, 다른 학생들에 비해 나이가 많았고, 포섭공작에 깊게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중민과 함께 주동자로 판결이 났던 것이다.
그 후, 고중민과 송지영은 일본 형무소에서 해방을 맞게 되었다. 고중민은 귀국 후, 김중민이라고 개명했으며,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여 행동했는데,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암살 계획에 관련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그 곳에서 옥사하고 말았다.
그는 성품이 활달하고 모든 일에 적극적이어서 일단 자신이 해야할 일이라고 판단을 내리면 주저하지 않고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었다. 일본 고등계 형사로 있다가 광복진영으로 뛰어든 일, 자신의 아름답지 않은 과거를 과감하게 밝히고 자청해서 위험천만한 포섭공작을 맡았던 일, 출옥 후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투쟁한 일 등 그의 행적이 그의 성품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그와 함께 대구형무소에 투옥된 사람들을 4.19혁명 후 모두 출옥했는데, 고중민은 단명한 탓인지 이승만 독재가 무너지는 것도 못보고 그만 세상을 떠난 것이다.[17]
2.3. 광복 후
8.15 광복 후인 1946년 민세(民世) 안재홍의 한성일보[18] 기자로 활동하였다. 이 때 문예지 백민에 젊은날의 노래를 발표하여 소설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한국일보 전신인 <태양신문사(太陽新聞社)>[19]에서 주필겸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6월 25일, 휴일이어서 신문사를 출근하지 않고 명동을 걷고 있는데, 전쟁이 발발했다고 뒤숭숭했고, 정부는 후퇴하지 않는다고 방송하면서 장안 사람들에게 피난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어느 새 북한군들은 서울을 넘어왔고 피난가지 못한 많은 지식인, 사회 저명인사들이 색출되고 있었다. 뒤숭숭한 어느 날 「토지공작 특별위원회」를 소집한다고 출두명령을 내렸다. 알고 보니 지식인 색출작전이었다. 그래서 그는 서대문 형무소로 끌려갔는데, 많은 명사들이 붙잡혀 왔다. 심문을 받고 풀려나온 송지영은 해방 후 순수 문학을 하던 김동석을 만났다. 그는이미 사상범으로 남한이 머지 않아 섬멸되고 해방이 된다고 역설했다.
"부산으로 미리 내려가 머지 않아 해방이 될 그 지역에 공작을 해야 한다."면서 풀어주었다. 그들이 차에 실어다 내려준 곳이 낙동강 모래사장이었다. 그곳에서 고향이 100여리, 또 40리 가면 친구집이 있다는 생각이 번뜻 스쳐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고향 풍기로 도망해 온 그는 유년 시절 초막을 짓고 공부해 낮익던 소백산으로 잠적한다.[20]
부산피난시기 국제신문 기자를 거쳐 1958년 조선일보에 논설위원으로 입사했으며, 1년 여 뒤에 편집국장으로 승진했다. 한편 소설가로 활동하면서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중앙위원을 역임하였다.
1961년 민족일보(民族日報)에 논설위원으로 몸담다가 5.16 군사정변 후 열린 혁명재판에서 사장 조용수, 감사 안신규(安新奎)와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8년이 넘게 복역하면서 우수의 일월이라는 소설을 집필하였다. 결국 감형으로 1969년에 풀려났다. 1969년 10월 조선일보에 재입사해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970년부터 3년간 무협소설 「천풍」을 연재해 큰 인기를 끌었다.
1979년부터 5년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을 지내며 1980년 신군부가 국가보위입법회의를 설치했을 때 의원으로 참가해 언론기본법을 제정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제6번)으로 당선되었다.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1984년 한국방송공사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60년대와 70년대까지만 해도 진보언론인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전두환 집권기 들어서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이 되는 등 적극적으로 신군부에 영합하는 행보를 보였기 때문에 욕을 왕창 퍼먹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군부-신군부 정권으로 이어오면서 정통성이 없는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이었기 때문에, 이승만, 박정희 정부때 고초를 당하던 독립운동가 출신들을 기용한 것이고 표면적으로 그렇게 하면서 독립기념관 재건사업이나 독립운동가 증언 수집, 박기성 지사의 회고록 나와 조국도 출판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송지영의 생활은 그의 유고집 우인일기를 참조하면 된다.
1989년 4월 24일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3가 서울을지병원[21]에서 지병인 당뇨와 고혈압으로 별세했다. 향년 72세. 그의 유해는 1989년 4월 2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되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종류 | 선거구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81 |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 전국구 | | 5,776,624 (35.6%) | 당선 (6번) | 초선 |
4. 둘러보기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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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환 | 서종렬 | 손정혁 | 김노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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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광 | 이필우 | 노차태 | 조정구 | |||||
김한선 | 김유복 | 강기필 | ||||||
제12대 ▶ | }}} }}}}}} |
[1] 宋[2] 1988년 1월 5일 여산 송씨 대종중 명예회장에 추대되었다.[3] 여산 송씨 집성촌이다.[4] #. #2[5] 3학년 때 중퇴했다.[6] 광복군 김룡의 회고록, 나의 길을 찾아 이화, 2012에 따르면, 본명 김순재의 형이 운영하고 있던 신문사로 찐화(金華)에 극장을 운영하는 수익으로 신문사를 운영하고 있었다.[7] 나의 유수기, (송지영 : 조선일보 논설위원)에서 발췌[8] 송지영은 어려서부터 한문학을 공부하였고 1934년 이후부터 문단에 등단하여 수필 기행문들을 꾸준히 발표하였다(송지영, 송지영 연보 , 《雨人日記》, 隆盛, 1991). 그가 1940년 난징 방문 당시 ‘반공화평(反共和平)을 부르짖고 동아영원화평(東亞永遠和平)의 대계를 꾀하는 ‘신지나(新支那)의 지식인’ 중 ‘중견분자’인 국민정부 요인들을 만나고 선전부장 린보성(林柏生)을 만한 후에 난징행(南京行) 이라는 글을 발표했다(송지영, 南京行 , 《춘추》, 2권 6호, 1941.7, 254쪽).[9] 南京上海通信 , 《春秋》 3권 4호, 1942.4., 南京通信 , 《春秋》 3권 5호, 1942.5 ; 3권 6호, 1942.6 ; 3권 7호, 1942.7 ; 3권 8호, 1942.8 ; 3권 12호, 1942.12 ; 4권 1호, 1943.1 ; 4권 4호, 1943.4.[10] 국민혁명군 대령 계급[11] 송지영이 주도했다기보다 난징내에서 초모공작은 이미 조일문, 이일범이 주도적으로 하고 있었다. 조일문은 같은 기숙사 중국인 동창인 쑤징허를 통해서 한국광복군 제 2지대 시안의 이범석 장군의 지령을 받고 이일범은 왕하이칭과 링단루와 연애교제를 하면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와 접선을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12] 당시 김병호는 송지영 거차인 난징 계명사에서만 만나고 조일문, 이일범 등과는 만나지 않았다. 송지영이 체포된 이유는 난징 중앙대 학생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았기 때문에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1917년생으로 나이 많은 조일문, 이일범, 이정선이 체포가 되었고 이정선은 풀려났으나 조일문, 이일범은 6개월 구류된 후, 조일문은 일본군 특무기관 통역병으로 차출되고 이일범은 일본군 헌병대 통역관으로 차출된다. 이 소식을 듣고 온 유기석 선생이 잠입해서 극적으로 탈출된다.[13] 송지영, 나의 유수기(옥중기)[14] 조일문의 추도문에서 발췌 송지영, 우인일기, 융성출판사, 1991, pp.611~612[15]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 2010, pp.89~90[16] 본명 김병호, 변성명으로 고중민, 김중민이라는 이름 사용[17] 정정화, 장강일기, 학민사, 1998, pp. 220~222[18] 일제 때 친일 신문인 <매일신문>을 접수, <한성신문>으로 바꿔 발간했다. 주필 이선근씨와 안면있는 안재홍 사장의 권유로 편집부장으로 임명되었다.[19] 광복군 제 2지대 구대장 출신 노태준 사장[20] 잡지 「북한(北韓)」, 실향인/ 송지영, 1984년 12월호, pp. 213~220[21] 1996년 12월 경영악화로 폐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