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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제주목 산지항(山地港)의 모습. |
1. 개요
1885년 10월, 러시아 제국이 제주도에 상륙해 섬을 점거하려고 했던 계획.2. 전개
러시아 제국의 제주도 점령에 대한 가능성을 보도한 당시 일본 언론사의 기사# |
조선 정부가 거문도 문제에 이렇듯 엄중하게 대처하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외아문 독판 김윤식의 의견에 따르면, 거문도 문제는 단순히 현재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조선의 국권을 떨어뜨려서 미래에 다른 열강이 조선의 영토를 침해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유럽일대의 신문들 에서는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면 러시아는 반드시 제주도를 점령할 것이라는 기사가 지속해서 보도되고 있었다. (중략)
우리역사넷, 거문도 사건 中#[1]
우리역사넷, 거문도 사건 中#[1]
'드니 데일리 신문'에 따르면 러시아가 조선의 남쪽에 있는 하나의 작은 섬, 즉 제주도를 해군 정박소로 하려고 한다는 풍설이 있다.
1885년 3월 4일. 일본 진제이(鎭西)일보 기사 中
1885년 3월 4일. 일본 진제이(鎭西)일보 기사 中
지난 14일 오후 2시 상하이 발로 도쿄의 모처에 아래와 같은 전보가 들어왔는데 과연 진실인가. '노국 동양함대 사령관 가쯔나고흐씨[2]는 본국 정부로부터 제주도를 점령하여 본부를 설치하라는 훈령을 받았다'
1885년 4월 21일. 마이니치(每日)신문 기사 中
1885년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는 거문도 점령 사건이 일어나자 러시아 제국은 영국에 경고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거문도에서 영국 해군을 철수하지 않으면서, 러시아 제국이 제주도를 점령하려 한 사건이다. 1885년 4월 21일. 마이니치(每日)신문 기사 中
또한 이미 러시아는 1885년 영국과의 갈등이 지속되면서 제주도 점령을 고려하고 있었고 이를 본격적으로 시도하였던 일이었기에 러시아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신속한 점령 시도 계획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얼지 않는 항구인 부동항을 원했는데 이에 적합한 지역이 연해주, 만주, 조선, 일본, 청나라였다. 이에 러시아는 자신들의 부동항 진출을 막던 영국을 거문도에서 철수시켜야 했고 이에 따라 블라디보스토크에 정박 중이던 함대들을 제주도에 보낼 계획을 하였다.
청국과 일본은 러시아의 존재 때문에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찬성할 수 없었다. 실제 청국 주재 러시아 공사 포포프(S. I. Popov)는 5월 18일 청국이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허용할 경우 러시아도 조선의 다른 항구를 점령하겠다고 공언했다. 동시에 러시아 정부는 일본주재 러시아 공사관의 슈페이에르(A. N. Shpeier)참사관을 서울로 파견했다. 슈페이에르의 파견 목적은 조선이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반대하도록 압박을 가하기 위함이었다.
슈페이에르는 6월 10일 조선 주재 미국공사 포크(G. C. Foulk)와 대담에서 영국이 거문도 점령을 계속한다면 러시아는 이보다 10배에 달하는 조선 영토를 획득하라는 훈령을 받았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슈페이에르는 김윤식(金允植)으로부터 조선정부가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반대한다는 대답을 획득했다. 하지만 조선정부로부터 러시아 교관 파견 요청을 이끌어 내는 데는 실패했다. 이후 러시아는 청국과의 우호 관계 속에서 거문도에서 영국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거문도 사건(한국학 국영문 사전 편찬사업)#
슈페이에르는 6월 10일 조선 주재 미국공사 포크(G. C. Foulk)와 대담에서 영국이 거문도 점령을 계속한다면 러시아는 이보다 10배에 달하는 조선 영토를 획득하라는 훈령을 받았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슈페이에르는 김윤식(金允植)으로부터 조선정부가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반대한다는 대답을 획득했다. 하지만 조선정부로부터 러시아 교관 파견 요청을 이끌어 내는 데는 실패했다. 이후 러시아는 청국과의 우호 관계 속에서 거문도에서 영국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거문도 사건(한국학 국영문 사전 편찬사업)#
영국은 이처럼 이 섬에 영구적인 설비를 갖춤과 동시에, 항구 이름을 해밀톤이라고 불렀다. 러시아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조선에 항의하여 영국 함대가 이 섬에서 철수하도록 압박하게 하였으며, 또 청나라에 대해 영국의 이 섬 점령을 승인한 것은 불법이라고 비난하였으며,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러시아도 반도의 일부를 점령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중략)
러시아 대표 스페이에르(de Speyer, A.)는 한로밀약이 통리아문에 의해 거부당하자,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면서 러시아도 제주도 등 조선의 영토를 점령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따라서 통리아문으로서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이 불가피했다. 이홍장 또한 거문도사건이 국제 문제로 커질 조짐을 보이자 조선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할 목적에서 적극적으로 사건의 중재에 나섰다.
우리역사넷·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거문도 사건(巨文島事件) 中##
(중략)
러시아 대표 스페이에르(de Speyer, A.)는 한로밀약이 통리아문에 의해 거부당하자,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면서 러시아도 제주도 등 조선의 영토를 점령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따라서 통리아문으로서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이 불가피했다. 이홍장 또한 거문도사건이 국제 문제로 커질 조짐을 보이자 조선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할 목적에서 적극적으로 사건의 중재에 나섰다.
우리역사넷·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거문도 사건(巨文島事件) 中##
6월 13일 일본은 ① 영국의 거문도 점령은 러시아가 그 전철을 밟아 원산·부산 또는 제주도를 점령할 우려가 있고 ② 조·러 조약이 체결된다면 최혜국 조관에 따라 조선이 제3국에 이와 같이 허락할 우려가 있으며 ③ 이홍장도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반대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사실상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반대한다는 입장으로 정리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태도변화는 장기적으로 볼 때 영국의 거문도 점령이 러시아에게 조선을 농락할 기회를 주어 러시아가 조선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에 기인하였다.
우리역사넷, 조일관계 中#
이러한 일본의 태도변화는 장기적으로 볼 때 영국의 거문도 점령이 러시아에게 조선을 농락할 기회를 주어 러시아가 조선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에 기인하였다.
우리역사넷, 조일관계 中#
영국 해군성은 현장의 보고를 바탕으로 1896년 1월 외무성에 거문도 철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공문을 보냈다.
그러나 외무성은 영국군이 거문도에서 철수한 이후 러시아가 바로 조선의 또 다른 영토를 점거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외무성은 거문도 철군을 결정하기 이전에 우선 조선의 종주국으로 상정하고 있던 청에 중재를 요청하여 러시아로부터 조선을 침략하지 않겠다는 사항을 보장받고자 했다. 즉 1885년 9월 이후 거문도 점거의 명분이 사라졌음에도 영국군이 즉각 철수하지 않았던 상황의 배경에는 영국 정부 내부의 의견 대립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외교적 성과를 중시한 외무성의 의견이 핵심적이었다.
영국 정부의 요청을 받은 북양대신 이홍장은 1886년 8월부터 10월까지 두 달간 북경에 주재하는 러시아 대리공사 라디젠스키(Nikolai Fedorovich Ladyzhenskii)와 거문도 문제에 관해 여러 차례 논의하였다. 그 결과 ‘영국은 거문도에서 철수해야 하며 러시아는 앞으로 조선의 영토를 취하지 않는다’는 사항에 관한 양자 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영국 외무성은 이를 토대로 두 달 뒤인 1886년 12월 거문도에서 철군할 것을 결정하였다. 남도에 주둔하였던 영국군이 고향을 향해 떠나간 것은 1887년 2월, 사건이 발생한 지 약 2년 만의 일이었다.
우리역사넷, "거문도에서 조선 정부의 외교력이 시험대에 오르다" 中#
그러나 외무성은 영국군이 거문도에서 철수한 이후 러시아가 바로 조선의 또 다른 영토를 점거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외무성은 거문도 철군을 결정하기 이전에 우선 조선의 종주국으로 상정하고 있던 청에 중재를 요청하여 러시아로부터 조선을 침략하지 않겠다는 사항을 보장받고자 했다. 즉 1885년 9월 이후 거문도 점거의 명분이 사라졌음에도 영국군이 즉각 철수하지 않았던 상황의 배경에는 영국 정부 내부의 의견 대립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외교적 성과를 중시한 외무성의 의견이 핵심적이었다.
영국 정부의 요청을 받은 북양대신 이홍장은 1886년 8월부터 10월까지 두 달간 북경에 주재하는 러시아 대리공사 라디젠스키(Nikolai Fedorovich Ladyzhenskii)와 거문도 문제에 관해 여러 차례 논의하였다. 그 결과 ‘영국은 거문도에서 철수해야 하며 러시아는 앞으로 조선의 영토를 취하지 않는다’는 사항에 관한 양자 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영국 외무성은 이를 토대로 두 달 뒤인 1886년 12월 거문도에서 철군할 것을 결정하였다. 남도에 주둔하였던 영국군이 고향을 향해 떠나간 것은 1887년 2월, 사건이 발생한 지 약 2년 만의 일이었다.
우리역사넷, "거문도에서 조선 정부의 외교력이 시험대에 오르다" 中#
그러나 이후 보급 문제와 영국-러시아 제국 관계가 좋아질 가능성이 보이지 않고, 영국 측이 러시아 제국에 양국이 서로 조선 영토를 점령하지 않는다는 제한을 함과 동시에 이를 합의하자 결국 제주도의 점령을 포기했다.
3. 관련 자료
- 자료집·일본신문이 보도한 제주도: 1878~1910년#
- "러시아, 1885년 제주도 점령 시도"(2006.08.07 조선일보 기사)
- "러시아도 제주를 점령하려 했었다"(2006.08.07 제주의 소리기사
- 거문도에서 조선 정부의 외교력이 시험대에 오르다(우리역사넷)
- 신편한국사-조·일 관계(우리역사넷)
- 거문도 사건(巨文島事件)(우리역사넷)
- 거문도사건(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거문도 사건(디지털여수문화대전)
- 한로밀약(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기획]제주어장 침탈..제국주의 격전장"(2006.08.08 제주일보 기사)
- 거문도 점령 사건, [연구사업] 한국학 국영문 사전 편찬사업-한국외교사전(근대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