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주요 선거·투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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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투표 | 제6차 1987년 10월 27일 | 시행 불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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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6월 15일 제3차 개헌으로 부통령직 폐지 ** 2014년 7월 24일 헌법재판소가 국민투표법 제14조 제1항 내용 중 일부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으나 이후 법률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2016년 1월 1일자로 효력을 상실하여 시행 불가능 | }}}}}}}}} |
대한민국 국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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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 | |||||||||
{{{#!wiki style="margin: -7px -12px" | 1948년 5월 10일 1대 총선 | → | 1950년 5월 30일 2대 총선 | → | 1954년 5월 20일 3대 민선 | }}} | |||
투표율 | 91.9%▼ 3.6%p | ||||||||
선거 결과 | |||||||||
<rowcolor=#580009,#cfa547> 정당 | 지역구 | 총합 | 비율 | ||||||
{{{#!wiki style="margin: 0 -10px" | 24석 | 38석 | 18.09% | ||||||
14석 | |||||||||
[[민주국민당| 민주국민당 ]] | 24석 | 24석 | 11.42% | ||||||
[[대한청년단| 대한청년단 ]] | 10석 | 10석 | 4.76% | ||||||
[[대한노동총연맹| 대한노동총연맹 ]] | 3석 | 3석 | 1.42% | ||||||
[[일민구락부| 일민구락부 ]] | 3석 | 3석 | 1.42% | ||||||
[[사회당(1948년)| 사회당 ]] | 2석 | 2석 | 0.95% | ||||||
[[민족자주연맹| 민족자주연맹 ]] | 1석 | 1석 | 0.47% | ||||||
[[대한부인회| 대한부인회 ]] | 1석 | 1석 | 0.47% | ||||||
[[중앙불교위원회| 중앙불교위원회 ]] | 1석 | 1석 | 0.47% | ||||||
[[대한여자국민당| 대한여자국민당 ]] | 1석 | 1석 | 0.47% | ||||||
[[무소속| 무소속 ]] | 126석 | 126석 | 60.00% |
[clearfix]
1. 개요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 투표율은 91.9%를 기록했다. 이 선거로 선출된 국회의원의 임기는 1950년 5월 31일부터 1954년 5월 30일까지였다.2. 배경
제헌 국회를 대부분 자신의 계파로 채운 이승만 정부는 불과 2년 만에 민심을 잃고 여론이 대단히 악화되었다. 1949년 벌어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무산 사건으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이 좌절되고 김구의 암살이 이승만과 연관되어 있다는 여론이 확산되어 2대 총선에서는 여당의 패배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그리하여 이승만 정부는 선거일을 12월로 미루고 시간을 두어 민심을 수습하려 했다.[1]
3. 과정
소선거구제를 유지했고, 선출의석 수는 210석으로 200석에서 10석 늘어났으며 경쟁률은 10.5대 1로(후보자가 2,209명) 역대 총선 중 가장 높았다. 이는 의회 민주주의의 맛을 본 국민들이 "우리도 마음만 먹으면 권력을 쥘 수 있다"라는 생각이 작용했기 때문. 대한민국이 처음 수립될 때는 아무리 선거가 실시된다지만 나라를 이끄는 자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분들이라는 봉건적 관념이 만연했었지만, 2년 간의 민주주의를 경험한 후에 치러진 2대 총선에서는 각 지방의 유지들이 앞다투어 출마하게 된다. 다만 정당정치가 아직 뿌리잡지 못했던 터라 무소속 후보가 많았고 선거 결과에서도 무소속 의원의 비율이 대단히 높았다.[4]제헌국회 초기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한국민주당, 그리고 제3지대로 나뉘었던 국회 파벌 구도는 임기 말에 다다라 양당제로 재편되었다. 신익희가 독촉 내 자기 세력을 이끌고 대한국민당을 창당했으며, 이후 한민당과 합당해 민주국민당을 창당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한민당과의 합당에 반대한 인사들이 대한국민당을 재건했다. 이후 민주국민당(약칭 민국당)은 친야, 대한국민당(약칭 국민당)은 친여 포지션을 대표하게 되었다. 두 정당이 의석수를 늘려 가면서 제2대 총선을 앞두고 보수 양당제가 확립되었으나...
4. 결과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 ||
제1당 | | 24석[5] |
제2당 | [[대한국민당(1949년)| 대한국민당 ]] | 24석 |
제3당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 14석 |
제4당 | | 10석 |
제5당 | [[대한노동총연맹| 대한노동총연맹 ]] | 3석 |
제6당 | | 3석 |
제7당 | [[사회당(1948년)| 사회당 ]] | 2석 |
제8당 | [[민족자주연맹| 민족자주연맹 ]] | 1석 |
제9당 | 대한부인회 | 1석 |
제9당 | [[중앙불교위원회| 중앙불교위원회 ]] | 1석 |
제9당 | [[대한여자국민당|]] | 1석 |
-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26석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지역구 의석 현황 | |||||||||||||
지역 | 민주국민당 | 대한국민당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대한청년단 | 대한노동총연맹 | 일민구락부 | 사회당 | 민족자주연맹 | 대한부인회 | 중앙불교위원회 | 대한여자국민당 | 무소속 | |
서울 | 2 | 2 | 1 | 0 | 1 | 0 | 1 | 1 | 1 | 0 | 0 | 7 | |
경기 | 4 | 2 | 0 | 0 | 1 | 0 | 1 | 0 | 0 | 0 | 0 | 17 | |
강원 | 2 | 0 | 2 | 1 | 0 | 0 | 0 | 0 | 0 | 0 | 0 | 6 | |
충남 | 1 | 3 | 3 | 0 | 0 | 1 | 0 | 0 | 0 | 0 | 0 | 11 | |
충북 | 2 | 3 | 0 | 0 | 0 | 0 | 0 | 0 | 0 | 0 | 0 | 7 | |
전남 | 9 | 2 | 3 | 3 | 1 | 0 | 0 | 0 | 0 | 0 | 0 | 12 | |
전북 | 3 | 2 | 0 | 0 | 1 | 0 | 0 | 0 | 0 | 0 | 1 | 15 | |
경남 | 2 | 0 | 2 | 2 | 0 | 0 | 0 | 0 | 0 | 0 | 0 | 26 | |
경북 | 2 | 3 | 1 | 4 | 0 | 1 | 0 | 0 | 0 | 1 | 0 | 21 | |
제주 | 2 | 0 | 0 | 1 | 0 | 0 | 0 | 0 | 0 | 0 | 0 | 0 | 2 |
합계 | 27 (9.8%) | 17 (9.7%) | 13 (6.8%) | 10 (3.3%) | 2 (1.7%) | 3 (1.0%) | 2 (1.3%) | 1 (0.5%) | 1 | 1 | 1 | 1 | 124 (62.9%) |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와는 달리 남북협상파의 선거 참여가 두드러졌으며 최종 투표율은 91.9%였다.
이 선거에서 무소속이 총 210석 중 126석[6]을 얻어 초강세를 보였고, 한민당의 후신세력인 보수야당 민주국민당(24석)이 제1당을 차지했다. 특히 민국당은 전남 지역 전체 12석 중 무려 9석을 얻으며 지난 총선에 이어 텃밭을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반대로 친 이승만파는 대한국민당(71석→24석),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잔당(48석→12석→14석), 대한청년단(19석→10석), 대한여자국민당(1석)를 더해도 단 57석에 그치는 참패를 당했다.
의원들도 대부분 물갈이되어 기존 국회의원 중 재선된 의원의 비율은 불과 31명뿐이었다. 제1당이 야당에게 넘어간 최초의 선거.[7]
얼마나 무소속이 강세였는가 하면 무소속이 차지하는 비율이 62.9%. 참고로 제1당은 신익희가 이끄는 민주국민당, 제2당은 여당 격인 윤치영이 이끄는 대한국민당이었으나 이 두 당을 합쳐도 의석의 20%가 안 될 정도였다. 사실상 제1당 같은 걸 따지는 의미가 없는 상황. 지난 선거의 제1당이었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대한국민당으로 대부분의 의원이 빠지면서 제3당을 유지했다.[8]
6월 10일 개회된 국회는 보수야당과 중도파가 크게 신장되면서 초대 국회의장은 신익희가 되었지만, 의장선거에서 사회당의 조소앙이나 무소속 오화영도 큰 지지를 받았다. 이승만은 여소야대로 끌려다니며 탄핵설까지 대두되었으나, 전쟁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임시수도 부산에서 발췌 개헌(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했다.
5. 이후
- 선거 직후 6.25 전쟁이 발발하여 국회도 피난을 가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정부로부터 정보를 늦게 받거나 수도 사수 등의 명분으로 붙잡혀 납북된 의원[9]도 있다. 대표적으로 납북된 의원은 당시 경기도 평택군이 지역구였던 민세 안재홍을 비롯해, 조소앙, 원세훈, 윤기섭 등이 있다.[10]
- 휴전 협정의 결과 일부 의원들의 지역구는 전체 혹은 대부분의 지역이 북한령이 되었는데, 옹진군 '갑' 선거구는 백령도, 대청도만 남았고 옹진군 '을' 선거구는 연평도만 남았으며, 연백군 갑, 연백군 을, 개성시, 개풍군은 완전한 북한령이 되었고 장단군 선거구도 남은 지역이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어 주민이 없었다. 옹진군의 경우 선거구를 개편하여 단일 선거구로 다음 선거를 치르는 안도 논의되었으나 무산되고 이들 지역의 국회의원은 자리가 없게 되었다. 결국 제3대 국회의원 선거를 치를 수 없는 이들 지역의 국회의원의 임기를 연장하는 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으나 헌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거부권이 발동되었다. 이 때문에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이들 선거구를 뺀 나머지 203석의 국회의원만 선출하게 되었다. 반면에 전쟁 이후 수복지구의 경우 제4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국회의원을 뽑을 수 있었다.
- 선거하고 한 달도 안 되어 6.25 전쟁으로 관공서가 불타면서 선거와 관련 기록이 없어진 선거구가 많다.[11] 후보가 몇 명이고 당선자가 몇 표를 얻었는지까지는 언론사의 보도 자료로 확인할 수 있으나, 유권자 수, 투표자 수, 각 후보별 득표와 무효표 수는 확인할 수 없다. 주로 접경지였던 경기도와 강원도의 선거구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12]
- 임기 중 사망한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10명으로 가장 많은 국회이다.[14]
- 각각 여당과 야당이었던 민주국민당과 대한국민당에 실망한 국민들은 무소속 후보자들을 대거 당선시켜주었다. 이 무소속 의원들은 자유당에 입당하거나 민주국민당에 입당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끝까지 무소속으로 남은 의원들은 원내에서 힘을 기르기 위해 교섭단체를 구성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다.
[1] 이승만도 당시 민심이 자신에게 매우 불리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일부러 선거를 뒤로 미루려고 했었다.[2] 애치슨 라인의 그 애치슨이다.[3] 이승만이 국회의원 총선을 연기한다면, 한국에 대한 모든 경제 원조를 끊겠다는 강력한 압박이었다. 한국경제는 정부수립이 된 1948년부터 물가폭등세가 점차적으로 진정되었고, 1949년부터는 경제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으나, 그러나 이러한 안정된 경제상황에는 미국의 원조가 큰 역할을 했기 때문에, 미국이 정말로 원조를 끊어버리면 그 즉시 한국 경제는 망할 수밖에 없었다.[4] 전체 의원의 60%가 무소속으로 채워졌고, 무소속 당선자가 가장 많은 선거가 되었다.[5] 의석수가 동일한 경우는 비례대표 득표율로 정당 순서를 구별하는데, 2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에는 비례대표제가 없었으므로 이 문서에서는 정당득표율대로 순서를 구별했다.[6] 무소속 의원들 상당수가 김구, 김규식과 노선을 같이한 중도우파 세력이 주축이었다. 대표적으로 안재홍, 조소앙, 조봉암, 장건상 등등 거물급 인사들.[7]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는 야당 제1당인 한나라당이 선거 전에도 1당이었고, 제1당이 바뀐 선거는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가 기록을 깼다.[8] 참고로 비슷한 시기에 치러졌던 북한 최고인민회의 선거도 무소속이 강세였다. 1946년 인민위원회 선거에서 조선로동당은 꼴랑 31%의 득표를 올리는데 그쳤고 1948년 북한 최고인민회의 선거에서는 대다수 지역구에서 단일후보를 내기는 했지만 조선로동당이 과반수의 후보를 내지 못했으며 덕택에 조선로동당이 과반수를 점하지 못하고 오히려 무소속과 기타정당이 강세였던 상황이었다.[9] 이때 북한에 납치된 의원들의 가족이 월북자 취급을 받아 수모를 겪기도 했다.[10] 여기 블로그에 당시 국회의원 명단과 함께 행적들이 적혀있다. 특히 성명에 붉은 표시를 한 건 '친일 행적'이 있는 사람들이니 살펴보길 바란다.[11] 당시에는 선거를 내무부가 주관하고 각 시, 군청이 진행했으므로, 선거 관련 자료도 모두 각 행정기관에 있었다.[12] 제1대 국회의원 선거 때에는 4.3 사태의 여파로 제주도 선거구 세 곳의 선거 관련 기록이 사라졌다. 그나마 북제주군 갑, 을의 두 선거구는 1948년에 투표율이 50%에 미달하면서 무효가 되어 1949년에 치른 재선거의 자료가 남아있지만, 1948년에 선거를 정상적으로 치른 남제주군 선거구에서는 모든 자료가 사라져 언론사의 보도 자료로 남아있는 후보자 세 명의 이름과 당선자의 득표수만 확인할 수 있다.[13] 선거구는 김해군 을. 3·4대 국회의원도 역임했다.[14] 납북 의원들은 포함시키지 않은것이다. 포함시키면 당연히 더 많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