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29 23:48:34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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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골라 공화국 제2대 대통령
조제 에두아르두 반-두넴 두스산투스[1]
José Eduardo Van-Dúnem dos Santos
파일:external/adrempress.com/31-bajarangi.jpg
출생 1942년 8월 28일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포르투갈령 앙골라 루안다
사망 2022년 7월 8일 (향년 79세)
파일:스페인 국기.svg 스페인 바르셀로나
재임기간 제2대 대통령
1979년 10월 10일 ~ 2017년 9월 26일
종교 로마 가톨릭
정당 [[앙골라 해방인민운동|
앙골라 해방인민운동
]]

1. 개요2. 생애
2.1. 대통령 취임 전2.2. 앙골라 인민공화국 대통령2.3. 앙골라 대통령2.4. 퇴임 이후2.5. 사망
3. 평가
3.1. 긍정적 평가3.2. 부정적 평가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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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www.granma.cu/f0011316.jpg
대통령 재임기 공식 사진

앙골라의 독립운동가이자 앙골라 인민공화국의 제2대, 앙골라 공화국의 제1대 대통령으로, 앙골라 해방인민운동(MPLA)의 의장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손꼽히는 장기집권 독재자로서, 취임 전에는 앙골라 내전을 종식 시키고 임기 동안 앙골라의 고도성장을 이끌었으나 이 과정에서 빈민층들에 대한 지원을 소홀히 하면서 앙골라의 양극화를 극심하게 진행시켰으며, 비민주적인 권력 유지와 사치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그나마 종신집권은 하지 않고 스스로 물러났으나[2] 퇴임 뒤부터 후임의 부패 척결 정책으로 자식들과 측근들이 속속 해임당하거나 구속당하는 등 영 좋지 않은 상황에 봉착했다가 결국 2022년 지병으로 병사하였다.

2. 생애

2.1. 대통령 취임 전

산투스는 평범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950년대 중반에 포르투갈의 식민정책과 앙골라인에 대한 암묵적인 차별에 대항하여 1956년에 설립된 앙골라 해방인민운동(MPLA)가 설립되던 시점에 가입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탄압으로 1961년에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망명해서 살다가 소련으로 유학가서 아제르바이잔 석유화학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고, 1970년에 귀국하여 몇 안되는 지식인 지도층으로서 독립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앙골라는 1975년, 해방되고 앙골라 인민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하지만 앙골라 해방인민운동과 사상적으로 대치되던 군벌인 UNITA가 체제에 불응하여 앙골라 민주주의 인민공화국(RPDA)을 세우며 앙골라 내전이 발발였고 앙골라는 혼란에 빠진다. 전쟁 기간, 두스산투스는 MPLA의 총재가 되었고 1979년에 앙골라 인민공화국의 아고스티뉴 네투 대통령이 사망하자 MPLA의 간접 선거를 통해 대통령직을 승계받아 제2대 대통령이 된다. 당시 그의 나이는 고작 37세였다.

2.2. 앙골라 인민공화국 대통령

취임 직후였던 1980년대는 내전이 매우 격렬하던 시점이었기에 큰 업적을 쌓을 시간이 없었다. 그나마 RPDA의 조나스 사빔비 비해 훨씬 이성적인 통치력을 보여주었다. 이후 냉전이 끝나자 내전에서 대치하던 양측 파벌의 합의로 1차 앙골라 내전이 끝나고 앙골라 공화국 체제가 설립되며 1992년에 선거가 치러졌는데, 조나스 사빔비가 1차 선거에서 49.5%라는 높은 득표율을 보였으나 결국 두스산투스가 승리하였다. 문제는 이 선거에서 두스산투스에게 유리하도록 투표 조작이 이루어졌다는 정황이 너무 명확했던 것. 이에 사빔비는 선거에 불복하고 RPDA가 다시 등장하여 2차 앙골라 내전이 일어나면서 앙골라는 다시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물론 사빔비가 사라지자 앙골라 대통령직은 두스산투스가 문제 없이 이어갔다.

2.3. 앙골라 대통령

2차 내전 발발 10년 후인 2002년, RPDA가 결국 패배하면서 앙골라 공화국이 앙골라 전역을 통일하였고 이후에 국가를 빠르게 안정화 시켜나갔다. 산투스는 2009년 말에 예정되어 있던 총선 겸 대선에 불출마 입장을 밝혔지만 집권 연장에 나설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했는데 그냥 쉽게 2012년까지 선거를 지연시켜버렸다. 바로 한해 전인 2008년에 MPLA가 압도적인 의석 수를 차지했었기에 가능했던 폭거였다.

한편 두스산투스는 2010년에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간선제로 바꾸며 자신의 철권독재 체제를 더욱 강화했었다. 앙골라의 선거 역사는 앙골라 국회 참조.[3] 이러한 간선제로 진행된 2012년 총선 겸 대선에서도 쉽게 당선되었다. 물론 야당과 국제사회는 불법선거로 이루어진 당선이라고 비판을 했다.

국제사회는 그를 "은둔형 독재자"로 평가했었다. 그가 다른 독재자들과 달리 크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막대한 자원을 통해 생기는 자금을 활용해 정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원유와 다이아몬드 수출로 챙기는 자금으로 정치세력을 관리하고 있으며 서방과의 관계도 원만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행태도 한계가 있었다. UNITA는 타 독재국가의 야당과는 달리 호락호락한 구색정당이 아니었고 엄연히 내전을 종전하기 위한 타협을 통하여 국가 정치의 일부가 된 정당이었다. 즉, 언제든지 무력항쟁을 시작할 수 있는 세력으로 비추어졌던 것. 두스산투스는 돈을 뿌려가며 정치권을 장악하고 투표를 조작하는 것을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한 주요 전략으로 사용했던 사람이었으며 혹여 야당을 대놓고 탄압했다가는 앞서 말한 것처럼 2차 앙골라 내전 같은 무력 항쟁이 또 발생할 수 있었기에 폭주가 불가능했다. 특히, 경제적 불평등은 심화되는데 2010년 중반부터 시작된 셰일 혁명으로 유가가 폭락하며 앙골라의 경제적 원동력인 석유 수출에서 오는 자본량이 급감하자 앙골라 내부에서는 점점 MPLA와 두스산투스에 대한 회의적인 시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결국, 두스산투스는 2017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하여 MPLA 소속 후임인 주앙 로렌수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장장 38년에 걸친 두스산투스 체제가 이렇게 막을 내렸다.

2.4. 퇴임 이후

산투스는 퇴임 이후로는 개혁바람이 불면서 영 좋지 않은 상황에 놓여있었다. 후임 주앙 로렌수는 2017년 총선 겸 대선에서 지지율이 급락한 MPLA를 살리기 위해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산투스/산투스 일가-관련 정치인들과 선을 긋고 그들을 처단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구조를 조정하고 개혁을 할 성의 정도는 보여야 정책 집행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일단 산투스 자신은 영국과 포르투갈을 오가며 해외의 유럽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구속이 되지는 않았으나, 측근 일부가 구속되고 있고 자녀들도 고위직에서 해임되었으며 아들은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되기까지 했다. 사실상 가문이 통째로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은 것.

2.5. 사망

2022년 7월 8일 바르셀로나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 하지만 공교롭게도 아베 신조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이 같은 날에 암살을 당한지라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또한 멕시코 전 대통령인 루이스 에체베리아도 같은 날에 사망하였다.[4]

장례는 8월 28일에 국장으로 치러졌다.#

3. 평가

산투스 재임기의 앙골라는 외적으로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하지만 부의 재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부패문제가 심각하여 앙골라가 고도성장을 하는 과정에서도 일단 극빈층의 수치는 줄기는 했지만 극빈층의 수치는 여전히 40%에 육박했으며 또한 공중보건에 대해 충분한 투자를 진행하지 않아서 영유아 사망률은 여전히 높아서 평균수명이 50대에 머물렀다. 또한 고도성장 과정에서 실업률은 10%를 넘었으며, 인권이야 말할 것이 없는 수준이다. 그나마 야당인 UNITA의 세가 크게 약했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집권을 이어 나갈수는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평했을 때 내정에 있어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했기는 하나 양극화가 극심하게 진행되어 국민들이 큰 이득을 보지 못했다 할 수 있다.

이후 자신의 정치자금으로 확장을 억누르던 UNITA가 앙골라 정부의 수입이 줄어들고 경제적 불황이 시점을 틈타 약진하자 권력 유지가 힘들다 판단했는지 퇴임하였다.

3.1. 긍정적 평가

산투스는 비록 현재 독재자로 분류되는 인물이지만 엄연히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던 인물이었다. 독립 전까지 망명까지 해가며 활발한 정치적 활동을 보여주었으며 1970년부터는 직접 무장투쟁에 참가하여 5년간 앙골라 독립전쟁기 독립 세력의 지도부로 활동했다.

이후 앙골라 독립전쟁이 종전되고 앙골라 인민공화국이 세워지자 바로 앙골라 내전이 발발한다. 아고스티뉴 네투의 대통령의 후임으로 1979년에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취임하였음에도 결론적으로 인민공화국-공화국 체제를 승리로 이끌게 되었다. 특히, 내전기 RPDA의 지도자였던 조나스 사빔비에 비해 훨씬 이성적인 행보를 보였다. 전시였음에도 앙골라 인민공화국의 공립 초등-중등교육기관 건설 프로젝트 등은 앙골라 곳곳에서 진행된 반면 RPDA의 우두머리였던 사빔비는 모든 예산을 전부 내전에 쏟아붓는 비상식적인 내정을 보여주었다.

두스산투스는 내전 종전 직후 앙골라의 완전히 파괴된 인프라를 재건하기 시작하였으며 많은 진전을 보였다. 이와 동시에, 앙골라는 2000년초부터 고개를 점점 들더니 2010년대 초부터 두스산투스의 퇴임 전까지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중앙아프리카-남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지역강국 수준의 국가로 성장했다. 외교적으로도 미국을 적대시 하지 않으면서도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일대일로 투자를 유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삶의 질의 개선과 경제적 발전으로 두스산투스의 퇴임 시점인 2017년의 인구는 내전 종전 시점은 2002년에 비해 2배가 증가하였다.

독재자긴 하지만 로버트 무가베이사야스 아페워키, 피에르 은쿠룬지자, 폴 카가메[5][6]등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의 대통령 독재자와 달리 영구 종신 집권하려는 야욕이 없었는지 2017년 총선에 대통령 후보로 등록하지 않았으며 로렌수가 후임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몇 없는 독재자가 권력을 내려놓은 사례인 것.

3.2. 부정적 평가

하지만 두스산투스는 결론적으로 썩어빠진 도둑정치독재 체제의 우두머리였을 뿐이었다. 정적 암살과 기본적인 독재자로서의 통치행위는 기본이요, 오일머니를 통해 번 돈은 사치와 정치적 매수를 위한 도구로 소모되었으며 대량의 국부가 횡령되었다.

내전기 앙골라 인민공화국 역시 딱히 잘한 것이 없는 그냥 RPDA에 대항하는 군벌 중 하나였으며 특히 1차 앙골라 내전이 종전되고 앙골라 공화국이 설립되며 진행된 선거에서 충분히 정정당당한 대결을 통하여 앙골라의 내전을 끝낼 수 있었음에도 투표 조작과 UNITA 인사 암살을 통해 그 기회를 날려버렸으며 이러한 행위를 통해 조나스 사빔비의 심기를 건드려 내전 기간을 10년씩이나 늘려버린 원흉이다.

내전이 끝나자 두스산투스는 앙골라 내 부정부패의 정점으로 올라섰다. 산투스 자신과 그 가족들, 측근들은 매년 수억달러가 넘는돈을 횡령해가며 재산을 불려나갔고, 그래서 국민들 대다수는 여전히 그 혜택을 제대로 받지못한채 빈곤층으로 살고 있다. 2017년 퇴진 이후로 해외재산의 상당수가 앙골라 당국에 의해 몰수되는 형국이지만 한때 대통령 일가가 소유한 재산은 국부의 30%에 이를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래서 젊었을 때 독립운동가로서 지녔던 이념따윈 내평겨치고 치부에 눈이 먼 타락한 인물이라는 평이 거의 지배적이다.

교육이나 보육, 보건 예산에 대한 투자는 임기 말에 지지율이 급락할 시점에야 시작하는 국익과는 먼 행보를 보였다.

4. 기타

아프리카 최고의 여성 부호로 꼽히는 이사벨 두스 산투스가 그의 장녀이다. 두스산투스가 아제르바이잔에서 공부하면서 만난 러시아인 전부인 타치아나 쿠카노바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사벨은 대학을 갓 마친 24세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사업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각종 관급 사업을 사실상 독점계약하며 급속도로 현금을 불렸고, 투자업체인 켄토홀딩을 설립해 포르투갈의 각종 기업들 지분을 사들였다. 2013년에는 포르투갈의 미디어 복합기업 존 멀티미디어 지분 10%를 1억 6400만 유로(한화 2600억원)에 인수했고, Optimus 역시 인수하고 이들을 합병하여 NOS를 만든다. 포르투갈 은행인 방쿠 에스피리투 산투, 전력회사인 에네르지아스 데 포르투갈 등의 대주주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성공 비결이 본인의 자질보다는 아버지인 조제 산투스의 빽이라는 것이지만. 그리고 자신의 특권을 재산 증식에 악용한 정황이 드러났다.# 두스산투스가 여러 자녀 중에서 유달리 이사벨을 편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7] 하지만 주앙 로렌수 정부 출범 이후 이사벨 역시 로렌수의 반부패 프로젝트의 표적이 되어 먼지가 폴폴 나도록 털렸으며 앙골라 내에서의 정치적 입지가 사라졌다.

유명 가수인 머라이어 캐리가 앙골라 조제 대통령을 위해 거액인 100만 달러(약 10억 6050만원)를 받고 2시간 공연을 벌여 국제 인권단체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은 적도 있다. 토르 이사장은 "머라이어 캐리는 독재자들로부터 받은 현금이 아직 충분치 않은 모양이다"라며 "불과 5년 전 카다피 가족 앞에서 공연했는데, 또 아프리카 최고 인권 파괴자이자 타락한 정권(로버트 무가베도 만만치 않다.)의 전시 공연을 했다"고 비난했다. 자료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이로 인해서 전형적인 아프리카 독재자들에 비하면 평가가 그나마 괜찮은 편이다.[3] 여담으로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을 때 앙골라의 야당인 UNITA 소속 라울 단다 의원은 "오늘은 앙골라의 민주주의에 매우 슬픈 날, 이는 민주주의를 파묻기 위해 무덤으로 향하는 것과 다름 없다"고 비난했던 이야기도 있다.[4] 참고로 기사에 있는 시각은 미국 동부 표준시 오전 8시 14분으로 서머타임을 고려하면 사망 시점은 한국-일본 시각으로 오후 9시쯤 된다. 오후 5시에 사망한 아베 신조보다 조금 늦은 셈.[5] 폴 카가메는 그나마 탄압과 학살, 검열 등을 안해서인지 종신집권 정도만 빼면 사실상 개발독재자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리고 생전 자기 잇속만 챙기는데 급급하였던 무가베나 아페위키, 은쿠룬지자 등에 비하면 평가는 훨씬 좋다.[6] 아페워키는 작은 사무실에 허름한 옷차림 등 검소한 생활을 하는 등 국고를 자신의 호강에 쓰지 않는다지만...애초에 해당 인물은 권력욕에 매몰되어 정적 암살을 일삼고 통치 기간이 몇십 년이 넘어가는 독재자다.[7] 공식적으로 확인된 자녀로는 러시아인 전 부인 사이에서 낳은 딸 이사벨 한 명과 아들 두 명 이렇게 총 세 명이 전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