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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존 말체이스 데이비드 샬리카시빌리 ჯონ მალხაზ დავით შალიკაშვილი John Malchase David Shalikashvili | ||
출생 | 1936년 7월 27일 | ||
바르샤바주 바르샤바 (現 마조비에츠키에주 바르샤바) | |||
사망 | 2011년 7월 23일 (향년 74세) | ||
워싱턴주 타코마 루이스-맥코드 합동군사기지 | |||
묘소 | 알링턴 국립묘지 | ||
재임기간 | 제9대 유럽사령관 제10대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 | ||
1992년 6월 23일 ~ 1993년 10월 22일 | |||
제13대 합동참모의장 | |||
1993년 10월 25일 ~ 1997년 9월 30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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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조지 워싱턴 대학교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
1958년 ~ 1997년 | |||
최종 계급 | 대장 (미합중국 육군) | ||
주요 참전 | 베트남 전쟁 걸프 전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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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 13대 합참의장을 지냈다. 미국 내에 10만명에 불과한 조지아계 미국인으로 합참의장까지 올랐으며 사병 출신 장성이기도 하다.2. 생애
1936년 7월 27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조지아의 귀족 집안으로 아버지 드미트리 샬리카시빌리는 공작이었다. 존의 증조할아버지는 바쿠 총독이자 군인이었던 드미트리 스타로셀스키 중장이었다.아버지 드미트리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존은 이주 당시에 영어가 서툴렀으나 브래들리 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하고 1958년에 졸업했다. 그리고 1958년 5월에 처음으로 국적을 취득해 미국인이 되었다.
1958년에 미 국적을 취득하자 미 육군에 입대하여 일병으로 근무하던 중에 간부사관(OCS)을 지원하여 1959년에 소위로 임관했다. 형인 오서는 1955년에 OCS로 임관했다. 존의 병과는 포병이었다. 임관한 이후, 알래스카 주둔 부대에서 박격포 소대장으로 육군 생활을 시작한 존은 육군방공학교에서 중위와 대위 시절을 보내던 중 유럽으로 보내져서 유럽육군사령부의 정보, 작전, 지휘 부서에서 근무했다.
소령으로 진급한 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서 남베트남군 선임 관구 자문관으로 있던 중 소규모 수색 작전 도중 적의 공격에 용감하게 저항해 동성무공훈장을 수훈했다. 해군전쟁대학을 거친 후 제212야전포병단 예하 제18포병연대 제2대대의 부대대장을 지냈고, 한국에 파병된 뒤에는 유엔군과 주한미군에서 작전장교로 근무했다. 육군 군인사센터에서 근무하던 중, 중령으로 진급한 존은 9보병사단 포병 보조화력지원조정관과 제84야전포병연대 제1대대장을 지낸 뒤 육군전쟁대학에 입학했다. 육군전쟁대학을 졸업한 뒤, 남유럽특수임무부대 작전처 부장을 거쳐 대령으로 진급했고, 제1기갑사단 포병사령관을 지냈다. 본토로 돌아온 뒤에는 육군본부와 합동참모본부의 작전과 정책 부서에서 근무했다.
준장으로 진급한 존은 제1기갑사단 부사단장이 되었다. 이후 육군본부로 돌아와 작전참모부의 합동정책 부부장과 전략계획정책국장을 지냈다. 소장으로 진급한 존은 제9보병사단장이 되었는데, 이 때 전력사령관이던 콜린 파월 장군의 눈에 띄게 된다. 중장으로 진급한 뒤 유럽육군 부사령관이 된 존은 걸프 전쟁 당시에는 성공적인 민사작전을 수행했는데 터키 정부의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만나고 이라크군의 주요 요인들과도 대면 접촉했다. 미국으로 복귀한 존은 콜린 파월 합동참모의장의 보좌관을 지낸 뒤, 대장으로 진급해 유럽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년 뒤인 1993년에 빌 클린턴은 존을 콜린 파월에 이어 합동참모의장으로 지명했다. 4년의 합참의장 임기 동안 테일후크 스캔들과 제러미 마이클 보더 해군참모총장의 자살 같은 내부 문제와 북한 핵시설 공습[2]을 진지하게 검토하는등 피곤한 임기를 마치고 1997년에 군문을 나섰다. 2004년에는 존 케리 민주당 후보의 대선 당시 자문을 맡았다. 그 해에 뇌졸중을 겪었고 결국 2011년에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1] 폴란드에서 태어났지만 조지아 망명자의 자식이라 폴란드 국적을 받지 못했다.[2] 이게 1990년대 미국의 이슈들 중에서도 가장 골때리는 이슈였는데, 이 1994년이 중국이 아직 덜 큰 상태에 러시아도 맛이 간 시절이라 타이밍만 따지면 미국이 북한을 정리하기엔 그리 나쁘지는 않을 때였다. 하지만 남한 측과의 불협화음, 그리고 남한에 있던 미국인 최소 10만명의 일괄 소개, 그리고 남한에 있는 기타 우방국들의 추가 소개, 그리고 당시 김영삼 한국 대통령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혀 전쟁 일보 직전에서 지미 카터의 방북이 성사되며 조용히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