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666633><colcolor=#fff> 지노비 페트로비치 로제스트벤스키 Зиновий Петрович Рожественский | ||
이름 | 한국어: 지노비 페트로비치 로제스트벤스키 러시아어: Зиновий Петрович Рожественский 영어: Zinovy Petrovich Rozhestvensky | |
출생 | 1848년 11월 11일 |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 ||
사망 | 1909년 1월 14일 (향년 60세) |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 ||
복무 | 러시아 제국 해군 | |
최종 계급 | 해군 중장 | |
주요 참전 | 제2차 동방전쟁 러일전쟁 | |
주요 서훈 | 성 게오르기 훈장 성 블라디미르 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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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의 해군 제독. 유능할 뿐 아니라 청렴함과 합리적인 사고방식까지 겸비한 군인이었으나, 쓰시마 해전에서 패전하여 결국 러일전쟁을 러시아에 불리하게 끝내는 계기를 마련한 비운의 인물이다.2. 전간기
2.1. 출생과 해군 입대
1848년 11월 11일, 해군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노비'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1] 좋은 신분 출신은 아니었으나,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귀족 자제들과 함께 공부할 정도는 되었다.1873년에 해군사관학교를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병과로 포술을 선택, 미하일로프스키 포술학교에 들어갔는데, 로제스트벤스키가 포술 병과를 택한 것은 당시로선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제정 러시아 해군에서 포술 병과는 진급이 더뎠기 때문에 항해 병과보다 인기가 없었고, 로제스트벤스키는 성적이 우수하여 원하기만 하면 항해 장교가 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2.2. 초급 장교 시절
1876년 발트 함대에 배치된 뒤, 포함 베스타의 포술장으로 근무했으며, 1년 뒤 러시아와 터키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어뢰정들을 지휘, 두 개의 훈장(성 조지 훈장과 성 블라디미르 훈장)을 받았다. 1883년부터 1885년까지 2년간 대위 계급으로 신생 불가리아 해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재직하며 이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왔다. 귀국 후 소령으로 진급해 보조함과 순양함의 부장을 거쳤다.2.3. 영관급 장교 시절
로제스트벤스키는 클리퍼 나에크직과 포함 그리지약의 함장을 맡은 뒤, 대령으로 진급하여 1891년부터 1893년까지 런던에서 주영대사관의 무관 직책으로 근무했다. 귀국 후 스테판 마카로프 제독의 지중해 전대 예하 함선인 장갑순양함 블라디미르 모노타크의 함장으로 부임했으며, 2년 뒤 해방함 페르베네츠에서 또다시 함장을 지냈다.1898년 발트 함대의 포술학교 교장이 되었으며, 좌초한 해방함 아드미랄 그라프 아프락신의 구난 작전을 피해없이 완수해[2] 주목을 받았다. 이 덕분에 로제스트벤스키는 해군 본부로 영전되어 극동 지역의 해군력 강화 방안을 연구했다.
3. 러일전쟁
3.1. 발트 함대를 극동으로
1904년 소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발트 함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 해, 일본군의 기습으로 러일전쟁이 터졌고 태평양 함대는 사령관 마카로프 제독이 전사하는 바람에 뤼순에 고립되자, 차르 니콜라이 2세는 발트 함대를 제2태평양전단으로 명명,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잔존한 태평양 함대와 합류해 일본 제국의 연합 함대를 격멸하고 극동의 제해권을 확보할 것을 지시, 로제스트벤스키를 중장으로 진급시켜 전단장으로 임명했다.로제스트벤스키는 처음에 이 계획에 반대했다. 보내기로 한 전투함들 태반이 낡았고 승조원들의 훈련 상태가 부실한 점, 출동해야 할 전장까지 지나치게 멀다는 점, 보급 수준이 형편없던 점 등으로 도저히 이런 기나긴 여정을 소화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시 러시아의 범국가적으로 만연했던 부패로 인해 단 한 척의 함정도 포탄을 만재하지 못해 포탄을 아끼느라 포 사격 훈련을 거의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강행되었고, 발트 함대는 로제스트벤스키가 좌승한 기함인 전함 수보로프의 지휘하에 그 해 10월 출항했다. 여담으로, 로제스트벤스키는 이 전쟁에 매우 부정적인 전망을 해서 출항식 때 장병들을 불러놓고는 우리는 이기지 못할 것이며 확실하게 죽는 것은 보장한다고 연설했다.
발트 함대의 여정.
세 전대로 나뉘어 출동한 발트 함대는 얼마 안 가 북해에서 대형 사고를 치고 만다. 당시 함대는 일본 해군이 항로 곳곳에 어뢰정들을 숨겨놓고 기습을 가할 것이라는 정보를 받아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물론 그 정보는 거짓이였지만 그것을 알 리가 없었던 함대는 신경이 곤두서있던 차에 야간에 함대 인근에 있던 영국 어선들을 어뢰정으로 오인, 발포해 수 척을 가라앉히고 파손시키는 사건을 저질렀다. 당시에는 밤이라 함정식별이 어려웠고, 어선의 움직임이 어뢰정의 뇌격 시도와 흡사했기 때문에 오해할 법 했다. 하지만 중립국의 민간 선박을 공격하고도 구조하지 않고 그냥 가버리는 바람에 영국은 이른바 이 도거 뱅크 사건을 계기로 영일 동맹으로 사이가 가까워진 일본을 위해 러시아 함대의 움직임을 곳곳에서 방해했다.
일단 수에즈 운하까지 왔는데 문제가 생겼다. 발트 함대의 주력인 대형 군함들은 크기가 너무 커서 운하를 통과할 방법이 도저히 없었던 것이다. 흔히 루머로 수에즈 운하를 관리하던 영국이 영일동맹 때문에 러시아 함대의 통행을 막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이 때문에 함대를 둘로 나눠 주력함대는 희망봉을 돌아서, 소형선들은 그대로 운하를 통과해 당시 러시아 제국에 우호적이던 프랑스 식민지인 마다가스카르에 모이기로 한다. 어찌어찌 간신히 마다가스카르에 집결, 이후 싱가포르 등을 거치며 동아시아를 향해 전진해 나갔다. 마다가스카르 출항 이후 함대는 외부와 연락할 수단이 사실상 없었으므로, 몇 달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함대가 멀쩡하게 아시아에 도착한 사실은 전 세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 동안 함대는 많은 인원이 각종 질병과 사고 등으로 죽거나 부상당해 거의 탈진해 있었지만, 그나마 사기까지 바닥을 치지는 않았다. 아마 증기선 시대 초창기에 달성하기 힘든 인도양 무보급 횡단을 마다가스카르 출항 이래 큰 사고 없이 마친데다, 개고생해서 온 목표가 보이기 시작하니 다시 사기가 올랐던 듯 하다. 아시아에 도착한 뒤, 수병들 사이에서 함대가 전투를 포기하고 돌아간다는 헛소문이 돌기도 했는데, "개고생해서 왔는데 그냥 돌아간다니 미친 게 아니냐?"는 반응이 대세였다고 한다.
3.2. 쓰시마 해전
침몰하는 러시아 전함 보로디노 함을 묘사한 그림.
이동하던 중, 뤼순 요새의 함락으로 태평양 함대가 항복했기 때문에, 이들 전단은 본토의 블라디보스토크로 항로를 바꾸었다. 대한해협을 통과하던 도중 전단은 일본 해군에게 발각되었고, 1905년 5월 27일 마침내 연합함대와 교전이 시작되었다.
로제스트벤스키의 기함 수보로프는 전단의 선두에서 일본 해군의 기함 미카사를 집중적으로 노렸으나, 포술 연습이 충분치 않아 거의 명중탄을 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T자 전법"에 걸려든 함대는 기함 수보로프를 시작으로 차례차례 격파되기 시작했다. 일본 해군의 신병기 시모세 폭약[3] 등에 의해 수보로프는 금세 만신창이가 되어 전투 불능 상태가 되어 버렸고, 여러 참모와 승조원들을 잃은 끝에 로제스트벤스키 역시 파편상을 입었다.
일본 해군에게 항복하는 로제스트벤스키 제독 일행
수보로프의 함장은 결국 배를 포기하기로 하고 주변을 지나던 어뢰정 브라비 함을 불러 로제스트벤스키를 포함한 생존자들을 가능한 한 옮겨 태우고 현장을 벗어나려 했다. 하룻밤의 추격전 끝에, 부상으로 정신이 혼미했던 로제스트벤스키를 대신해 참모들이 합의하여 추격해온 일본 해군에게 항복하기로 했으며, 결국 로제스트벤스키는 부상을 입은 채 포로가 되었다. 발트 함대는 불과 1척의 순양함인 알마스 함[4]과 2척의 어뢰정[5]만이 무사히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함대의 전함은 모두 격침되거나 항복하여 노획되었고, 해군소장 엔크비스트 제독이 지휘하는 아브로라 함을 포함한 3척의 순양함 등 일부 함정들은 생존해 미국령 필리핀 등으로 도주했다. 가장 가관은 민간 계약으로 함대에 연료를 보급하던 석탄 보급선들 중 하나인 말라야 호였는데, 함대에 보급해 줄 석탄을 자가소모하며 마다가스카르까지 도망친 것이다.
3.3. 포로 생활과 귀국
입원 치료 중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문안을 받는 로제스트벤스키.
로제스트벤스키는 상당히 심각했던 부상으로 인해 일본으로 후송된 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며, 혼미했던 정신도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승자인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직접 문병을 오기도 했는데,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좋았다고 한다. 퇴원 이후에도 한동안 목발을 짚고 다녀야 했을 정도로 부상은 심각했으나, 다행히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로제스트벤스키를 포함한 러시아 해군 포로들은 한 절에 수용되었으며, 일본 해군은 이들을 나쁘지 않게 대해주었다. 종전 직전, 로제스트벤스키는 일종의 신사 협정에 서명한 뒤 일본에서 제공한 선편으로 다른 몇몇 장교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귀국했다.
4. 말년
귀국 이후, 니콜라이 2세는 맡은 바 의무를 다했다고 하여 사면해 주었고, 로제스트벤스키는 한동안 제대로 싸우지 않고 항복했다는 죄명으로 기소되었던 부하 장교들을 구명하기 위해 노력했다.그 해 중장 계급으로 해군을 떠난 뒤, 가족들과 함께 비교적 평안하게 여생을 보내다가 1909년 1월 14일, 자택에서 신년을 축하하는 저녁 만찬[6]을 마치고 서재로 들어간 뒤 60세의 나이로 돌연사했다.
5. 여담
- 성질이 굉장히 더럽기로 유명해, '미친개'라는 별명이 붙었다. 조금이라도 군기를 어기거나 하는 수병이 있으면 가차없이 주먹을 날려대거나 발길질을 해댔고, 장교들도 구타는 당하지 않았으나 여러모로 시달렸다. 함교에서 자기가 보기에 마음에 안 드는 무언가를 발견하면 쌍안경을 바다에 집어 던지며 성질을 부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니콜라이 2세가 참관한 훈련에서도 그 짓을 하다 니콜라이 2세의 시선을 끌었다. 그 광경을 본 니콜라이 2세는 로제스트벤스키가 용맹하다며 칭찬했다. 발트 함대가 출격하기 직전, 로제스트벤스키의 성깔을 아는 군수참모가 쌍안경 100개를 확보해 가져갔다. 물론 그 재고도 군수참모의 예상보다 빠르게 소진되어 항해 내내 참모들의 간을 졸이게 했다.
- 이런 포악한 성격과는 반대로, 관대한 면도 있었다. 로제스트벤스키는 당시 불고 있던 자유주의적인 움직임을 극도로 싫어했고, 자연히 상관에게 행하는 반항은 원칙적으로 용납하지 않았으나, 항해 중 식사에 대해 불만을 품고 파업을 한 수병들을 찾아가 실태를 조사해보고 기준에 못 미치는 식사를 수병들이 지급받고 있었음을 알아내자, 수병들 대신 함의 장교들을 처벌하고 식사를 개선하기도 했다. 또한, 로제스트벤스키는 절대로 자기 휘하의 장병들을 사형에 처하지 않았으며, 전투 직전 "이들 중 그 누가 영웅이라도 될지 누가 아느냐?"라며 영창 수감자들을 전원 석방했다.
- 청렴한 성격으로 로제스트벤스키의 성격이 만들어낸 수많은 정적들의 공격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비를 털어 형편이 어려운 하급 장교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 비록 패장이었으나, 죽기 직전까지 용맹하게 싸웠고 또 전쟁 이전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아왔기 때문에, 로제스트벤스키가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귀국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가는 동안 많은 이들이 환영했다. 피의 일요일 사건 등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전국에서 소요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일각에서는 로제스트벤스키가 마음만 먹었다면 차르에 반하는 하나의 정부를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낭설에 불과하다. 1905년 혁명으로 촉발된 혼란은 수년 동안 지속되었으나, 군부는 차르에게 충성하고 있었으며 러시아군의 주력인 육군은 로제스트벤스키를 따를 이유가 없었다. 만약 로제스트벤스키가 반역을 시도했다면, 오흐라나의 총에 머리가 꿰뚫리거나, 장병들에게 붙잡혀 군사 법정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 평생을 류머티즘에 시달렸으며, 그로 인해 위와 같은 더러운 성격이 됐다고 많은 이들이 짐작한다. 또한 류머티즘의 통증을 잊기 위해 여러 가지 일에 몰두했고, 자연히 그것이 로제스트벤스키를 더욱 유능하게 만들었다고도 한다.
- 여자 문제가 많았다. 한 때 자신의 상관이었던 마카로프 제독의 부인과 불륜 관계가 있었고, 그로 인해 둘의 사이는 매우 나빴다. 그럼에도 둘 다 서로의 군사적인 재능만큼은 인정했고, 공적인 부분에서는 주저없이 협력했다. 그리고 부인의 불륜 관계를 알고 있었음에도 부부 및 가족들간의 관계는 매우 화목했다. 또한 러일전쟁 당시 발트함대의 병원선 오렐 호의 간호장교 나탈리아 시베르스와 열애중이었다고 한다.
- 로제스트벤스키의 행적에 관해 볼 수 있는 책 중 국내에 번역 출간된 것으로 짜르의 마지막 함대가 있다. 러시아계 미국인 사학자가 썼다.
[1] '지노비'라는 이름은 농부나 장사꾼 등에게 흔히 붙이던 이름이었다. 당시 제정 러시아에서 의사는 비록 이들보다는 훨씬 대우가 좋았지만, 귀족들에게 있어서는 좀 잘 나가는 평민 정도로만 여겨졌다.[2] 암초를 폭약으로 날려 버리는 방식을 썼다.[3] 인화성 물질이 충전되어 있어 적함 페인트에 들러붙어 불을 붙인다.[4] 또 다른 순양함 이줌루트 함이 더 포위망을 벗어났으나 블라디보스토크에 오기 전 좌초해 버렸다. 니콜라이 2세는 이줌루트도 귀환한 함정에 포함시켜주고, 귀환한 함정 승조원들을 포상할 때 이들도 동일한 대우를 해 주었다.[5] 그 중 1척은 로제스트벤스키 일행이 타고 있던 어뢰정과 동행하던 브라비 함으로, 로제스트벤스키의 참모들이 내린 항복 지시를 거부하고 단독으로 항해를 지속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6] 옛 러시아 달력(율리우스력)으로는 이 날이 1월 1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