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차이잉원
선거 승리 연설 |
1. 개요
2016년 1월 16일 총통선거 승리를 확정지은 후 지지자들에게 답례하는 모습. 왼쪽으로 민진당 원로인 뤼슈롄 전 부총통, 오른쪽으로 선대위원장인 천쥐 가오슝 시장이 보인다. 뤼슈롄, 천쥐 두 사람은 모두 민진당의 창립 계기가 된 1979년 메이리다오 사건 주동자 출신이다. 이외에 린자룽 타이중 시장, 러닝메이트인 천젠런 부총통 당선인도 있다.
유권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1월 18일, 대만의 한 주간지의 인터뷰에서 양안관계에 대해 대륙의 불간섭에 감사한다는, 다소 친중적인 발언을 하였다. 대만독립 문제에서도 오히려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표를 얻어내려고 사기쳤냐 는 국민당 측의 반발을 사는 중.
2016년 1월 30일 열리는 팬시 프론티어 27에 참석했다. 이를 두고 '오타쿠 인증'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차이잉원 총통의 FF27 방문에 따라 FF는 사상 최대 방문인 기록을 갈아치웠으며[1], 차이잉원 총통은 대만의 콘텐츠 산업 발전을 위해 컨벤션 이벤트가 매우 중요하다며 임기 중에도 FF 방문을 1회 이상 추진한다고 공언했다.
2.28 사건 69주기 추도식에 참석, 연설을 통해 "남아공의 진실-화해위원회 방식과 유사한 과거사 청산을 모색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2. 행적
2016년 2월 28일, 위의 차이잉원이 대만 독립에 대해 모호한 표현을 하자 왕이(王毅)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부장(장관)이 중화민국 헌법을 언급하면서 화해 제스쳐를 보냈다. 급격한 경색이 우려되던 양안관계가 조금 진정 국면에 들어가는 듯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2016년 3월 3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최대 정치행사인 양회(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와 전국인민대표대회) 첫날부터 위정성(兪正聲)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이 "92공식과 '대만 독립 반대'란 정치적 기초 위에서 양안 교류를 확대해 나갈 것"(기사)이라고 발언하여 역시나 다시 긴장국면에 들어가는 모양새다.기사 3월 4일 현재 민주진보당과 차이잉원 총통 당선인 역시 이 문제에 대해 즉답은 피하고 발언의 진의를 파악하는 중.2016년 3월 1일에 중화민국 입법원에서 달라이 라마의 대만 방문일정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2] 민주진보당 고위 인사가 "달라이 라마는 대만 국경일인 10월 10일 쌍십절 때 대만을 방문할 가능성이 있다. 그는 대만을 방문하더라도 아마도 차이잉원 새 총통 등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입장으로 양안관계가 악화되는 것에 대해 차이잉원 총통 당선인 역시 경계하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기사
2016년 3월 6일, 시진핑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이 차이잉원 중화민국 총통 당선인을 겨냥한 연설을 했다. 시진핑 주석 曰 "우리의 대만정책은 명확하고 일관적이다. 대만 정국의 변화에 따라 변하지는 않는다. 어떤 형태의 이른바 대만독립 분열 행동도 결단코 굴복시키겠다"라는 강경발언을 쏟아냈다. 기사 민진당의 재집권을 앞두고, 과거 천수이볜 시절과 같은 분리 독립노선으로의 변화를 묵과하지 않을 것임을 재확인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3월 9일 쑹추위 친민당 주석과 만나 1시간 이상 대화를 가졌다. 이를 두고 양안대화에 적극적이고, 중국 정부당국과도 다수의 회담 경험이 있었던 쑹추위를 해협교류기금회[3] 이사장으로 기용할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차이잉원이 취임할 때 첫 행정원장으로 천수이볜 정부 시절 재정부장(한국의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냈던 린취안(林全) 신경계문교기금회(新境界文敎基金會: New Frontier Foundation)[4] 사무총장을 지명했다고 한다. 기사 린추안 내정자는 차이잉원 정부 출범과 동시에 취임하게 된다. 그 이전까지는 장산정(무소속) 행정원장이 직을 유지한다.
2016년 3월 17일 차이잉원에 대한 견제로 중화인민공화국이 감비아와 외교관계를 수립해버렸다. 기사 천수이볜 시절처럼 중국대륙이 마잉주 중국국민당 정부에서 휴전했던 수교국 쟁탈전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2016년 3월 20일, 시대역량이 본격적으로 타이완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고 ECFA 폐기 등의 구호를 내걸자 차이잉원 당선인도 긴장하는 모양새다. 기사
3월 21일, 당 원로이자 2008년 총통선거 후보로 출마했던 셰창팅 전 행정원장을 사실상의 주일 대사인 '도쿄 주재 타이베이경제문화대표처 대표'로 임명했다. 한국 기사
2016년 3월 22일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인 홍콩에서 대만인 연출가의 경력 표기를 문제 삼았다. "국립 타이베이 예술대"를 나왔다고 했는데 국립 자를 빼라고 한 것. 기사 외견상 개인 차원 활동에 관한 충돌로 보일수 있지만, 차이잉원의 총통 취임을 앞둔 상황에서 다분히 중국측의 압력, 견제 성격으로 해석되고 있다.[5] 차이잉원 당선인 측은 "중국대륙 측의 선의를 먼저 보이고 압박을 가해라"며 반발하고 있다. 이 발언을 전해들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2016년 3월 24일, 국무원 대만판작공실 주임(북한의 통일전선부 부장에 해당)을 통해 "우리(대륙)의 선의는 대만 신정부(차이잉원과 민진당)가 '하나의 중국'을 먼저 인정할 때나 가능하다"며 맞불을 놨다.
2016년 3월 23일 마잉주 총통(인수인계 레임덕 기간이다)이 스프래틀리 군도에서 중화민국이 실효 점유중인 곳 중 제일 큰 다이핑다오(大平島, 이투 아바 섬)에 외신기자들을 초청해 자국의 영유권을 과시한 이벤트가 있었다. 기사 여기에 대해 차이잉원 당선인은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았고, 마잉주 총통은 차이잉원 당선인한테 당선인 신분 중(5월 20일 이전)에 다이핑다오 방문을 제안할 것이라는 관측이 있다.
2016년 6월 제2파나마 운하 개통을 앞두고 파나마 정부(중화민국과 수교중이다)에서 시진핑과 차이잉원을 동시에 초청했다. 이에 2015년 11월 시진핑-마잉주 정상회담에 이어서 7개월만에 시진핑-차이잉원 정상회담이 성사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기사
2016년 3월 28일 중화민국(대만) 타이베이 시 한복판에서 4살 여아가 참수 살해당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에 차이잉원 총통 당선인은 용의자를 비난하고 사건 조사를 당부했으며, 마잉주 총통은 애통하다며 사회안전망 강화를 지시했다. 그리고 훙슈주 중국국민당 주석은 "이래도 사형제 폐지를 주장할 것이냐"며 만 12세 이하 아동 살해범을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해야 한다는 입법안에 찬성하고 사형을 적극적으로 집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끔찍한 사건으로 사형제도까지 부상했다. 기사
2016년 3월 30일 마잉주 총통과 함께 현 총통(마잉주)과 당선인(차이잉원) 자격으로 총통부에서 만남을 가져 외교문제를 논의했다. 기사 양안관계 문제는 제외했다고 한다.
2016년 1월과 2월 중국-대만 양안 무역액이 15.4%나 급감했다고 한다. 기사 중국의 대외무역액 자체가 줄어든 탓도 있지만, 급격한 양안 무역 감소는 중국 측에서 차이잉원 총통 당선인을 견제하려는 포석이라는 해석이 있다.
2016년 파나마 페이퍼즈에 차이잉원의 오빠인 차이잉양(蔡瀛陽)의 이름이 있다는 것이 폭로되었다. 일단 당사자의 변호사측은 단순히 투자를 위해 설립되었을뿐 계약 부진으로 해산한 이후에는 어떠한 불법적 행위도 없었다고 해명했지만 차이잉원에게 안 좋은 사건임은 분명하다. 기사
2016년 4월 14일 케냐에 체류하던 대만인을 전부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송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기사 차이잉원 총통 당선인에 대한 중국 정부의 견제 차원으로 해석되고 있다. 2016년 4월 16일에는 차이잉원 총통의 새 정부의 내각 인선이 거의 완료되었다는 기사가 났다. 2016년 4월 19일에는 OECD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가중이던 대만 대표단을 중국이 쫓아내는 일도 일어났다. 기사.
2016년 5월 12일, 마잉주 총통 내각이 총 사퇴했다. 기사 총사퇴의 발효일은 차이잉원이 취임하는 5월 20일이다. 정권 인수인계도 거의 끝난 셈이다.
차이잉원 첫 행정원장인 린취안은 무소속(민진당 탈당)이고, 대부분의 요직은 민진당이 차지했으나, 외교부 장관(외교부장)으로 내정된 사람은 리다웨이(李大維)라고 하는데, 이 사람은 중국국민당 소속이다.기사 기사2 리다웨이 관련 링크 중화민국 정치에서는 민주화 이후 한 당이 내각을 독식할 수 없고 야당에게도 최소한 1석의 각료를 보장해야 하는데, 차이잉원은 중국국민당한테 외교부 장관을 준 것. 사실 린취안 내각에 무소속이 많다. 신임 타이완 성, 푸젠 성 주석도 무소속. 단, 타이완 성 주석인 스쥔지는 원래 민진당 중앙위원이었다. 린취안처럼 내각에 들어가게 되면서 탈당한 것. 전임인 마잉주 총통 때도 대륙위원회 주임(한국의 통일부 장관)은 대만단결연맹 소속이었다. 펑준난[6] 중화민국중앙은행 총재(1998년 취임)도 논란 끝에 유임이 결정되면서 무려 18년동안 중앙은행 총재가 안 바뀌는 대기록도 작성했다. 전 세계 중앙은행 총재 중 최장수 총재 기록을 세웠다.(...) 물론 펑준난도 중국국민당 소속이라 실질적으로 차이잉원 정부에서 국민당도 2석의 고위직을 확보한 셈.
[1] 토/일 양일 합쳐 20만명에 육박했다. 한국 코믹월드가 토/일 양일 합쳐서 5만명을 넘은 바가 없다.(...)[2] 참고로 달라이 라마는 1997년, 2001년, 2009년에 대만을 방문한 적이 있다. 1997년과 2001년은 독립 성향이 강한 리덩후이, 천수이볜 총통 시절이었고, 2009년의 경우 태풍 모라콧 피해에 대한 위문 차원이었다.[3] 약칭 해기회. 대만이 중국과의 양안 대화를 위해 1990년대 초 설립한 반관반민 성격의 재단. 마잉주 정부 시절의 대3통 실현, ECFA 등에 관한 협상도 담당했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대한적십자회에 해당한다. 남북 적십자 회담이 남북 정부간 회담으로 처리되니까. 애당초 해협회 - 해기회 양안회담이 남북적십자회담에서 협상방식을 따 왔다.[4] 1999년 창립된 민진당 직속의 싱크 탱크로 당 차원의 주요 정책 공약을 연구, 개발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국민당도 같은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국가정책연구기금회(國家政策研究基金會)를 운영 중이다.[5] 중화 타이베이, 하나의 중국 항목에도 나오지만, 중국은 대만이 주권국가로 표기될수 있는 단어가 사용되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철저히 봉쇄해 왔으며, 이는 친중 성향인 마잉주 총통의 국민당 집권 시절도 예외가 아니었다. 단지 민진당의 재집권을 앞둔 상황이다보니, 양안 갈등의 성격이 더 두드러져 보일 뿐인 것이다.[6] 대한민국 외국인 인명 표기법에 따라 펑'준'난으로 번역명이 결정되었다.(1999년) 실제 발음하고 전혀 딴판인 표기법. 淮(물이름 회)자를 准(준할 준)자로 착각해서 생긴 일이다. 1999년에 이 표기법으로 결정되었는데 바뀔 생각을 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