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도시
1.1. 개요
트립어드바이저 선정 세계의 뜨는 여행지 20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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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FFF><colcolor=#000> 1위 | 마요르카, 발레아레스 제도 | |||
2위 | 카이로, 이집트 | |||
3위 | 로도스, 도데카니스 제도 | |||
4위 | 툴룸, 멕시코 | |||
5위 | 두브로브니크, 크로아티아 | |||
6위 | 이비사, 발레아레스 제도 | |||
7위 | 나타우, 브라질 | |||
8위 | 아루샤, 탄자니아 | |||
9위 | 괴레메, 튀르키예 | |||
10위 | 산토리니, 키클라데스 제도 | |||
11위 | 파라티, 브라질 | |||
12위 | 아루바, 안틸레스 제도 | |||
13위 | 스플리트, 크로아티아 | |||
14위 | 플라야 델 카르멘, 멕시코 | |||
15위 | 하와이 섬, 하와이 | |||
16위 | 룩소르, 이집트 | |||
17위 | 도미니카 공화국 | |||
18위 | 찰스턴, 사우스캐롤라이나 | |||
19위 | 생마르탱/신트마르턴 | |||
20위 | 북 말레아톨, 몰디브 | |||
21위 | 잔지바르, 잔지바르 군도 | |||
22위 | 라 포르투나 데 산 카를로스, 코스타리카 |
찰스턴 Charlest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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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정보 | ||
지역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사우스캐롤라이나 | |
설립 | 1670년 | |
인구 | 155,369명 | |
시간대 | UTC−5 (GMT) | |
위치 | ||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항구 도시. 대서양 연안에 위치하고 있다. '찰스 왕의 도시'라는 뜻으로 영국의 찰스 2세를 기념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1670년에 건설되었으며, 식민지 시대에는 미국 남부의 주요 항구로서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미국 독립 직후에는 미국에서 4번째로 큰 도시였으나 이후 성장이 정체되었다. 그러나 식민지 초기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어 최근 관광지로 각광받고있다. 2020년 통계에 따르면 찰스턴 자체의 인구가 15만명이고, 2023년 통계에 따르면 찰스턴 광역 인구는 85만명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3번째로 크다.
별칭은 성스러운 도시로 역사적으로 찰스턴은 종교에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특히 유럽에 반유대주의가 심할 때도 유대인들이 제한 없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였다.
1.2. 지리
남북 전쟁 이후에는 플로리다를 제외한 미국 남동부 해안 지대가 대체로 그렇듯이 찰스턴도 발전에서 뒤쳐졌다. 수심이 깊은 자연 항구가 넘치게 많은 북동부의 뉴욕이나 보스턴과는 달리, 찰스턴 근해는 수심이 얕고 허리케인으로 인한 수해도 자주 입어서 도시가 크게 발전할만한 지형이 아니다. 게다가 주변의 애슐리(Ashley) 강, 쿠퍼(Cooper) 강, 완도(Wando) 강은 내륙 수운으로 대량의 화물을 수송하기에 충분히 크지도 않고, 오히려 도시가 확장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또한 찰스턴은 온난 습윤 기후라서 더운 여름, 온화한 겨울 연중 내내 많은 비가 내린다. 특히 여름에는 연간 강수량의 절반이 내려서 여름에 관광하는 것은 비추천한다.
1.3. 경제
찰스턴은 역사적으로 노예 무역과 목화 산업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남북 전쟁 이후 이 산업은 쇠퇴하였고 현재는 관광과 해운 그리고 찰스턴에 위치한 군기지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근근히 먹고 살고 있다.1.4. 역사
원래 찰스턴이 위치한 사우스캐롤라이나 지역은 쿠사보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인들이 이 곳에 정착하면서 이 일대에 천연두를 퍼트렸다. 그래서 많은 원주민들은 사망하였다. 하지만 원주민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건너온 이주민들도 황열병과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하였다. 이는 1950년대 살충제가 개발 되기 전까지 찰스턴에 계속 발생한 문제이다. 전염병뿐만이 아니라 스페인과 프랑스는 이 일대를 호시탐탐 노렸고 카리브해에 널렸던 해적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1704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주지사인 나다니엘 존슨의 지휘 하에 요새화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적들은 찰스턴을 계속 공격하였고 그 중에는 검은 수염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티치도 있었다.찰스턴은 노예 무역으로 유명했으먀 1708년까지 도시 대부분의 인구가 흑인이었다. 당시 찰스턴에서 가장 잘나갔던 노예 상인인 조셉 래그는 10만명이나 찰스턴으로 끌고 왔을 정도 였다. 찰스턴은 18세기 중반까지 대서양 노예 무역의 중심지였고 아프리카에서 북미로 유입된 아프리카인들의 40%를 찰스턴에서 처리할 정도였다.
노예 무역과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은 찰스턴은 13개의 식민지 중 가장 부유한 도시로 만들었으며 필라델피아 남쪽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노예 무역으로 부를 쌓은 찰스턴의 시민들은 영국으로 부터 독립하는 것에 반대하였지만, 다른 주들이 하나 둘 찬성하자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찬성하였다. 이즈음 영국에서 노예제를 금지하서 남부 백인들은 영국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접었다. 또한 영국이 흑인 노예들에게 자유를 보장해준다고하면서 군인으로 쓰자 남부 사람들은 왕실에 대한 지지를 접고 독립군을 지지하게 되었다.
1783년 미국이 독립한 후 찰스턴은 막대한 경제적 호황을 경험하였다. 특히 엘리 휘트니가 조면기를 발명하면서 목화솜에서 씨앗을 분리하기가 쉬워지자 목화 생산이 50배나 많아졌다. 때 마침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목화의 수요가 높아지자 찰스턴은 노예들을 부려서 목화를 재배하는 플랜테이션 산업이 급격하게 발전하였다. 또한 1808년 영국이 노예 무역을 금지해 합법적으로 흑인들을 수입 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밀수를 통해 수많은 흑인들을 수입해오기도 했다. 이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전체의 50% 이상이 노예가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결국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연방을 첫번째로 탈퇴하게 만들었다.
1861년 남북 전쟁이 일어나자 남부군은 남부의 주요한 도시인 찰스턴 앞에 위치한 섬터 요새를 함락시키기를 원했고, 이는 북군과 남군이 처음으로 격돌하는 전투의 원인이 되었고 결국 P. G. T. 보우리가드 장군 지휘 하에 섬터 요새는 함락되었다. 전쟁 기간 내내 찰스턴은 미국 남부 해군의 거점이 되었고 북군은 이 곳을 함락시키려고 여러 번 군대를 보냈으나 실패하였다.[1] 결국 전쟁이 끝나기 두달 전인 1865년 2월 17일 윌리엄 테쿰세 셔먼이 이끄는 북부군에 함락되었다.
남북 전쟁이 북군의 패배로 끝이 나고 이 지역 흑인들은 해방되었다. 흑인은 도시 인구의 57%를 차지하였고, 이전에 누리지 못했던 개, 총, 술을 구매하였다. 이는 많은 남부 백인들을 격분시켰고 흑인과 공화당원들에 대한 린치가 급증하였다. 이렇게 찰스턴 전체가 뒤숭숭한 가운데 1886년 8월 31일 찰스턴에 진도 7이상의 지진이 일어나자 2,000채의 건물이 파손하고 600만 달러의 피해를 입었다. 이는 안 그대도 쇠퇴하고 있던 찰스턴의 경제 몰락에 쇄기를 박았고 흑백 간의 갈등은 보다 더 격화되었다.
미국 전역에 흑백차별을 정당화 하는 짐크로법이 시행되고 남부 흑인들은 백인들의 억압 속에 살게 되었다. 특히 1919년 5월 10일 백인 선원들이 흑인들을 무작위로 공격하면서 생긴 폭동으로 6명의 흑인이 사망하고 흑인 사업체들이 백인들에 의해 약탈당하자 흑백 갈등은 더욱 격화되었고 많은 흑인들은 북부로 떠나게 되었다.
1950년대 미국 전역에서는 흑인에게 백인과 똑같은 대우를 요구하는 흑인 민권 운동이 벌어졌고 그 여하는 찰스턴에도 일어났다. 1969년 찰스턴에 위치한 한 병원에서 백인과 동일한 임금을 요구하던 흑인 직원 12명이 해고되자 흑인들이 대규모 파업을 일으켰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아내인 코레타 스콧 킹여사까지 이 파업에 개입하자 결국, 병원 원장인 윌리엄 맥코드는 시위대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월급을 인상해 주었다.
흑인 민권 운동 이후 찰스턴의 흑인 차별은 점점 사라졌지만 그 잔재는 계속 남아 2015년 6월 17일에는 찰스턴에 위치한 한 흑인 교회에서 백인 인종차별주의자에 의한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나 9명의 흑인이 사망하기도 하였다.
1.5. 여행
- Visitor's Center 옆에 1773년에 설립된 미국 최초의 박물관인 찰스턴 박물관이 있다. 찰스턴과 미국 남부의 역사에 대해 전시하고 있다. 여기서 표를 사면 일부 대저택 내부입장권을 할인받을수 있다. 또한 남북 전쟁 당시 남부군이 썼던 잠수정도 볼 수 있다.
- 해변가의 E.Battery St로 가면 가장 고풍스러운 주택가를 볼수 있다. 어떤 저택은 20~40불 정도를 내면 1시간정도 가이드와 함께 내부구경을 할 수 있다.
- Water Front Park로 가면 남북 전쟁의 첫 전투가 일어났던 섬터요새까지 가는 유람선을 탈 수 있다. 유람선을 타면서 찰스턴의 모습을 볼수 있다
시골
- King Street 쪽에 쇼핑몰이 밀집되어있다. 건물이 유럽풍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King Street 아래로 내려오면 찰스턴 교회중 가장 유명한 St Michael 교회가 보인다.
- 찰스턴 국제공항 근처 Tanger 아울렛에 저렴한 식당들이 밀집해있다.
- Mount Pleasant 쪽에 항공모함이 있다. 에식스급 항공모함 CV-10 요크타운으로 미드웨이 해전 때 침몰한 요크타운의 이름을 물려받은 함선이다. 퇴역한 이후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 교외로 나가면 플렌테이션 농장 투어를 할 수 있다.
- 차로 2시간 거리에 휴양지로 유명한 머틀비치 (Myrtle Beach)가 있다.
- 작은 도시이기 때문에 걸어다녀도 충분하지만, Visitor center에 모이는 Trolley(미니버스)를 타고 다녀도 된다.
- 찰스턴 중심부에는 찰스턴 역사 지구가 존재한다. 미국 최초로 법률에 의해 보호되던 역사 지구로 18세기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5번째로 큰 도시였던 찰스턴의 고풍스러운 풍경을 볼 수 있다.
- 찰스턴 역사 지구가 위치한 meeting street에는 미국의 7대 부통령이자 노예제 옹호자였던 존 C. 칼훈이 살았던 칼훈 저택, 오늘날에는 저택의 첫 소유주인 조지 W. 윌리엄스의 이름을 딴 윌리엄스 저택이 있다.
- 찰스턴의 해안가에는 White Point Garden이 있는데 이곳에 있는 방파제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 에이버리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 및 문화 연구 센터에서 미국 흑인의 역사와 전통을 볼 수 있다.
1.6. 찰스턴 리듬(춤, 음악)
미국에서 재즈뮤지션 '제임스 프라이스 존슨(James P. Johnson)'에 의해 1923년 작곡된 'The Charleston' 이라는 뮤지컬용 재즈곡이 당시 미국에서 엄청난 흥행을 했으며 전 세계 뮤지션들이 많이 연주하는 스탠다즈 재즈곡이 되었다.일반 재즈음악과 다른 독특한 리듬의 찰스턴은 당시 하나의 재즈음악의 분화 장르로 유행했었는데, 이후 찰스턴 음악들이 미국, 유럽 지역에서 여러곡이 작곡되어 흥행했다. 당시 재즈음악은 진화 과정에서 '딕시랜드/래그타임 > 찰스턴 > 스윙재즈 > 모던재즈(비밥)'으로 변화상의 래그타임과 스윙의 중간 지점에 있었고 20~30년대 초반에 유행하였다. 딕시랜드, 래그타임 등 초기 재즈에는 당김음(싱코페이션)개념이 없었으나 제임스 존슨의 음악들을 기점으로 싱코페이션기법이 도입된 스윙재즈로 점차 변화되어 갔으며 이후 스윙재즈 뮤지션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또한 찰스턴 리듬을 기반으로 킥과 바운스, 팔동작으로 구성된 '찰스턴 댄스'도 유행했는데 이후에도 스윙댄스의 분화 장르로 유행했다. 스윙댄스의 메인인 린디합 과 지터벅 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이전에 생겨난 장르이다. 한국에도 스윙댄스가 전파되었으며 찰스턴 댄스도 같이 수입되어 국내 스윙댄스 관련 동호회, 클럽을 방문하면 종종 볼 수 있다.[2]
이외에도 '찰스턴' 댄서에서 분화한 Black Bottom이라는 스윙댄스 장르도 있었다. 미국 디트로이트 지역을 중심으로 1920년 후반까지 반짝 유행했다가 사장되었다.
1.7. 여담
2022년 US 뉴스지에 따르면 찰스턴의 치안이 다른 대도시에 비해서 특히 나쁘지는 않다고 나오긴 했는데,# 도심 지역을 다닐 때는 다른 미국의 대도시에서처럼 범죄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조심을 해야 한다.영화 <노트북>의 촬영장소다.
두 건의 굵직한 사고가 있었던 도시이기도 하다. 우선 2007년 6월, 이 도시의 한 가구 판매점에서 발생한 초대형 화재로 인해 소방관 9명이 순직하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2015년 6월에는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오늘날 러시아 궤간이라는 이름으로 흔히 불리는 1524 mm 또는 1520 mm 광궤 간선철도가 처음 부설된 지역이다. 오늘날에는 러시아를 비롯한 구소련 국가 및 핀란드에서 주로 쓰이는 궤간이지만, 본래 1830년 찰스턴에 처음 부설된 것을 시작으로 미국 남부를 중심으로 널리 부설된 것이 이 궤간의 시초이다.[3]
1.8. 출신 인물
-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 : 서강대학교 초대 총장.
- 아서 L. 브리스톨 : 미해군 중장
- 윌리엄 모펫 : 미해군 소장
- 찰스 C. 핑크니 : 미국의 정치인이자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
- 아이보리 로빈 : 미국 흑인 여성 레슬러
- 윌 패튼 : 미국의 배우
- 제임스 개즈던 : 미국의 군인이자 외교관으로 개즈던 매입을 추진한 인물
- 아트 쉘 : 미국의 미식 축구 감독
- 스티븐 콜베어 : 미국의 방송인
- 로렌 허튼 : 미국의 배우
- 존 로렌스 : 미국 독립 전쟁 시기 군인.
1.9. 자매 도시
2. 웨스트버지니아주의 주도
웨스트버지니아주의 주도 | |||
Charleston 찰스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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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市旗) | 시장(市章) | ||
<colbgcolor=#b31c31><colcolor=#fff> 지역 | 웨스트버지니아 Kanawha County | ||
면적 | 32.64 sq mi (84.54 km2) | ||
해발고도 | 597 ft (182 m) | ||
인구 | 48,864명 | ||
인구밀도 | 1,551.2/sq mi (598.9/km2) | ||
시장 | Amy Shuler Goodwin | ||
시간대 | UTC−5 (EST) / Summer (DST) UTC−4 (EDT) | ||
지역코드 | 304/681 |
웨스트버지니아주의 주도이자 최대도시이다. 웨스트버지니아의 중서부 쯤이며, 입지는 앨러게니 고원의 커노와강과 엘크강이 합쳐지는 지점이다.
2.1. 역사
지역의 역사는 1788년 조지 클렌데닌이 땅을 매입해 리 요새를 건설한 후 그의 아버지 이름을 붙혀서 찰스타운이 되었다가 다시 1818년 찰스턴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오하이오 계곡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했던 까닭에 배를 갈아타는 장소로서 교통의 요지였으며, 대니얼 분과 사이먼 켄턴 등의 개척자들이 이곳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개발에 나선다. 19세기 초 카나와 강을 따라 소금물이 발견 되었고 1806년 최초의 소금 우물이 시추되었다. 1808년까지 매일 1,250파운드의 소금이 생산되었고 많은 노예들이 동원되었다. 또한 제임스 윌슨이 소금을 시추하던 중 1815년 최초의 천연가스가 발견되었고 2년 뒤 석탄이 발견되 점차 소금 공장의 연료로 사용되었다. 특히 화학 제품에는 소금에 포함된 염소와 수산화나트륨이 필요해서 이 지역에 대한 소금 수요 증가는 계속 되었다.1861년 남북 전쟁이 시작되자 공업이 발달되었던 버지니아 서부는 연방에 잔류하고 싶어했다. 결국 버지니아 서부는 버지니아에서 분리되었고 현재의 웨스트버지니아가 되었다. 그러자 남부는 곧장 웨스트버지니아에 군을 파견하였고 1862년 9월 13일 북군과 남군은 찰스턴에서 충돌하였다. 남군이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6주 뒤 북군이 다시 탈환하였다. 그 후 연방 정부는 웨스트버지니아의 연방 가입을 승인하였고 2년 뒤 북군이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하지만 새롭게 주가 된 웨스트버지니아에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었다. 바로 주도를 정하는 일이었다. 원래 주도는 휠링이었지만 다시 찰스턴으로 이전하였고 1875년 다시 휠링으로 옮겨졌다. 결국 주도를 정하기 위해 주민 투표가 시행되었고 41,243표를 받은 찰스턴이 주도가 되었다.
찰스턴이 주도가 된 후 이 지역은 급격하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주의회, 주대법원, 웨스트버지니아 주립 대학교 등이 속속들이 들어섰고 철도 확장과 함께 화학, 유리, 목재, 철강 공장도 들어섰다. 특히 2차대전 시기 고무의 주산지인 인도네시아가 일본군에게 점령당하자 미군은 대체 고무를 필요했는데, 대체 고무인 스타이렌뷰타다이엔고무를 생산하는 공장이 찰스턴에 위치해 있었다. 이렇게 공업이 발전하였지만, 미국의 제조업이 쇠락하면서 찰스턴도 같이 쇠락하게 되었다.
2.2. 경제
찰스턴의 초기 산업은 소금과 천연가스정 이었다가 나중에 석탄이 채굴되어서 도시와 주변 지역의 경제 번영의 핵심이 되었다. 오늘날엔 무역, 공공 시설, 정부기관, 의학 및 교육이 도시 경제에 중심이다. 미국의 주내 최대도시 50곳 가운데 인구가 가장 적은 편이다.(찰스턴: 5만명) 전체순위에서 49위인데 참고로 꼴지는 버몬트 주의 벌링턴(4만 2천명)이다.2.3. 스포츠
찰스턴의 스포츠는 마이너리그(더블A) 야구팀 웨스트버지니아 파워가 있고, 마이너(CIFL) 농구팀 웨스트버지니아 와일드가 있다. 그리고 매년마다 24km 달리기 대회 찰스턴 디스턴스 런이 열린다. 소형의 예거공항과 찰스턴 대학교가 시(市)에 위치하고 인근지역에 웨스트버지니아 대학교 캠퍼스와 마샬 대학교 캠퍼스, 웨스트버지니아 주립대학교 캠퍼스가 주재한다.2.4. 자매 도시
[1] 이 때 벌어진 전투가 영화 영광의 깃발의 배경이 된 전투인 제2차 찰스턴 항구 전투이다.[2] 한국의 찰스턴 유행은 의외로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30년 신문에서 소위 '모던보이' 들이 찰스턴 추는 것에 환장하여 이듬해인 1931년에는 집 위에 용수철을 올려놓고 찰스턴 추는 데 여념이 없을 거라는 풍자 만화가 올라올 정도였다.[3] 미국 남부의 간선철도는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1524 mm 궤간이 보편적이었지만 1886년에 모두 표준궤로 개궤되었고, 현재는 더 나중에 미국 기술자의 추천으로 이 궤간을 도입한 러시아에서 이 궤간이 주로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