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2 10:02:04

춘향전(1955)

역대 춘향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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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국산 1위 흥행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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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 (1955)
Chun-Hyang Story
파일:춘향전(1955) 포스터.jpg
감독 이규환
제작 이철혁
기획 김재중
제작사 동명영화사
촬영 유장산
조명 고해진
편집 이성파
음악 성경린
출연 조미령, 이민
상영일자 1955.01.16
개봉극장 국도극장
관람인원 150,000명[1]

1. 개요2. 등장인물3. 내용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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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25 전쟁 이후 한국 영화 부활에 신호탄을 알린 상징적인 작품. 춘향은 당시 김지미 이전에 최고의 미녀 여배우로 알려진 조미령이 맡았고, 도령은 당시 미남 배우였던 이민이 맡았다. 당시 10만 ~ 18만[2]명을 동원하여 해방 이후 최고의 흥행 영화가 되었다. 물론 이 기록은 자유부인의 흥행으로 곧 깨지게 된다. 당시 전후 침체될 수 밖에 없었던 영화계를 부흥시켜 영화사적인 의미가 있었던 영화라고 한다.

2. 등장인물

역대 춘향전 영화의 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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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영화 성춘향 이몽룡 변학도 방자 향단 월매
춘향전 (1935) 문예봉 한일송 박제행 이종철 노재신 김영숙
춘향전 (1955) 조미령 이민 이금룡 전택이 노경희 석금성
춘향전 (1958) 고유미 최현 김승호 허장강 김현주 전옥
탈선 춘향전 (1960) 김해연 박복남 장혁 복원규 강선희 유청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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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춘향 (1961) 최은희 김진규 이예춘 허장강 도금봉 한은진
한양에 온 성춘향 (1963) 조미령 신영균 이예춘 구봉서 전계현 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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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뎐 (2000) 이효정 조승우 이정헌 김학용 이혜은 김성녀
방자전 (2010) 조여정 류승범 송새벽 김주혁 류현경 김성령 }}}}}}}}}

3. 내용

남원기생 월매의 딸 춘향(조미령)과 이도령(이민)은 백년가약을 언약한 사이로 도령이 부친을 따라 한양으로 올라가자 새로 부임한 변학도(이금룡)는 절세의 미녀 춘향을 탐하나 끝내 수청을 거절하는 춘향은 옥고를 겪게 된다. 한편 과거에 급제한 이도령은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출도하여 변학도를 처단하고 춘향을 구한다.

4. 기타

이 영화는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

1956년 국내 최초의 영화상인 제1회 금룡상 녹음상(이경순)을 수상했다.

방자 역의 전택이와 향단 역의 노경희는 부부였다.


[1] 한국영상자료원의 기록이다.[2] 관람인원 수가 들쭉날쭉하다. 당시 서울 인구가 200만도 채 안되던 시절이라 10만만 넘어도 엄청난 대박 흥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