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13 05:15:42

치비타테 전투

치비타테 전투
영어: Battle of Civitate
이탈리아어: Bataglia di Civitate
시기 1053년 6월 18일
장소 남부 이탈리아 아풀리아 주 산 파올로 디 치비타테
원인 노르만족을 남부 이탈리아에서 축출하려는 교황청-랑고바르드족-동로마 제국의 합동 공세와 노르만족의 반격
교전국 파일:교황령 국기(754-1803).svg 교황령

[[로렌 공국|
파일:로렌 공국 국기.svg
로렌 공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스와비아
파일:로베르 기스카르.png 노르만
지휘관 파일:교황령 국기(754-1803).svg 레오 9세
파일:로렌 공국 국기.svg 제라르
스와비아의 루돌프
파일:로베르 기스카르.png 웅프루아
파일:로베르 기스카르.png 리카르도 드렝고
파일:로베르 기스카르.png 로베르 기스카르
병력 6천 명의 보병과 기병 3천 기병과 500 보병
결과 노르만족의 승리.
영향 노르만족의 남부 이탈리아 패권 확보.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이후

[clearfix]

1. 개요




1053년 6월 18일, 교황 레오 9세를 중심으로 뭉친 랑고바르드족-로트링겐 공국-스와비아 연합군이 노르만족을 남부 이탈리아에서 축출하기 위한 원정에 착수하면서 벌어진 전투. 노르만족은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남부 이탈리아의 패권을 확보했고, 이후 로베르 기스카르를 중심으로 뭉치면서 시칠리아 왕국을 건설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2. 배경

1015년경, 40명 가량의 노르만족 순례자들이 아풀리아 북부 몬테 가르가노에 있는 대천사 미카엘의 동굴 수도원을 성지순례했다. 이때 바리랑고바르드 귀족 멜루스가 그들에게 접근했다. 멜루스는 1009년 남부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1010년 제국의 이탈리아 총독 바실리오스 메사르도니테스에게 패배해 바리를 상실한 뒤 몬테카시노의 베네딕토 수도원에 은거했다가 동로마 제국을 적대하던 교황 베네딕토 8세의 도움으로 가릴리아노 요새에 자리잡았다.

멜루스는 노르만 순례자들의 지도자 라눌프 드렝고(Rainulf Drengot)에게 자신이 바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하며 풍부한 전리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1017년, 라눌프와 노르만 용병대는 카푸아에서 멜루스 휘하의 랑고바르드군과 합세한 뒤 아풀리아로 진격했다. 이후 1018년 10월까지 아풀리아 전역을 석권하며 동로마 제국을 남이탈리아에서 축출하는 듯했다.

그러던 1018년 10월, 바실리오스 2세로부터 바랑인 친위대와 막대한 군자금을 지원받은 이탈리아 총독 바실리오스 보이안네스는 군대를 일으켜 그 옛날의 포에니 전쟁의 주요 전투와 같은 장소의 칸나이에서 랑고바르드-노르만 연합군과 맞붙었다. 결과는 동로마군의 압승이었고, 멜루스는 아내와 아들 아르이로스를 비롯한 모든 가족과 병력, 세력 기반을 모조리 빼앗기고 독일로 망명했다. 하지만 바실리오스는 보이안네스는 노르만족의 용맹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들에게 높은 급료를 주고 북쪽의 신성 로마 제국과 남쪽의 시칠리아 토후국의 침략으로부터 변경 요새를 사수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 후 라눌프 드렝고는 동로마 제국과 랑고바르드 귀족들, 교황령,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에 잇따라 고용되어 전장에서 용맹을 떨쳤고, 1030년 나폴리 공작 세르기우스로부터 아베르사(Aversa) 일대를 영지로 수여받으면서 남이탈리아에 정착했다. 노르망디 공국에서 부모로부터 토지를 물려받지 못해 곤궁하게 살아가던 노르만 전사들은 라눌프의 성공담을 전해듣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남이탈리아로 대거 이동했다.

이렇듯 남부 이탈리아로 이주한 노르만족 중에서 오트빌 가문이 두각을 드러냈다. 오트빌 가문의 가주 탕크레드는 노르망디의 코탕탱 반도를 영지로 삼고 있었으며, 2명의 아내로부터 12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두었다. 자식들에게 영지를 나눠주기에는 토지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자식들은 활로를 찾고자 남이탈리아로 대거 이주했다. 장남 강철팔 기욤(William Iron arm)은 1042년 칼라브리아와 아풀리아 백작위를 확보했고, 뒤를 이은 차남 드로고(Drogo)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 대가로 칼라브리아와 아풀리아 백작 작위의 정당성과 계승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노르만족은 남부 이탈리아에 자리잡는 과정에서 현지 이탈리아인을 심하게 핍박했다. 많은 교회가 약탈당하고 많은 수도자가 살해당하고 수녀는 강간당했으며, 노르만군이 들이닥친 마을 중 무사했던 곳은 별로 없었다. 이에 현지민들은 노르만족에게 깊은 반감을 품었고, 기존에 남이탈리아를 다스렸던 랑고바르드 귀족들 역시 위협을 느꼈다. 교황 레오 9세는 남이탈리아에서 자행되는 교회 약탈을 막기 위해 하인리히 3세에게 노르만족을 토벌할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하인리히 3세는 당시 헝가리 왕국과의 전쟁과 제후들의 반란을 처리하는 데 힘을 기울이던 터라 이탈리아에 병력을 보낼 여력이 없었다. 이에 황제는 교황에게 직접 드로고와 만나서 설득해 보라고 제안했다.

1051년, 레오 9세는 남이탈리아를 찾아가 드로고와 면담했다. 드로고는 교황이 사절을 보내는 대신 직접 찾아온 것에 큰 감명을 받았는지, 아니면 교황에게 이런 일을 시켰을 하인리히 3세와 갈라설 이유는 없다고 판단했는지, 교황의 부탁을 받자마자 다시는 교회에 손을 대지 않겠으며 동족들이 주민들을 학대하는 것을 금지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런데 그 해 8월 교황과의 회담을 마치고 귀환하던 중 보비노 인근 몬테이라로(Monteilaro)에서 암살당했다. 11세기 베네딕토회 수도사이자 역사가인 고페레도 말라테라(Gaufredo Malaterra)에 따르면, 랑고바르드 주민들이 드로고를 암살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아풀리아를 회복하려는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총독 아르이로스가 사주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드로고 사후 백작에 선임된 옹프루아는 형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형이 살해된 몬테이라로를 공략한 뒤 학살을 자행했다. 이후 노르만족은 옹프루아의 지휘하에 주변 일대를 이전보다 더욱 심하게 약탈했다. 이에 레오 9세는 1052년 작센으로 가서 하인리히 3세를 알현해 노르만족의 만행을 설명하고 그들을 토벌할 수 있도록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하인리히 3세는 이번에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로트링겐 공국의 공작 제라르와 스와비아루돌프가 교황을 돕기 위해 700명의 스와비아 기사와 함께 교황에게 가담했다.

로마로 돌아온 레오 9세는 각지에 노르만 토벌에 협조해달라는 공문을 보냈고, 그동안 노르만족의 약탈에 시달렸던 베네벤토, 가에타, 아키노, 테아노, 아말피 등지의 랑고바르드 귀족과 이탈리아 현지인들이 대거 호응해 로마에 달려왔다. 이리하여 보병과 기병을 합해 6천 가량의 병력이 로마에 모였다. 여기에 바리의 이탈리아 총독 아르이로스가 이끄는 동로마군도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교황군과 합세해 노르만족을 공동으로 협공하겠다고 제안했고, 레온 9세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로마와 바리에서 교황군과 동로마군이 출진했다는 소식을 접한 웅프루아는 아베르사 백작이자 동생인 리카르도 드렝고와 또다른 동생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자신과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두 사람이 즉각 달려오면서 3,000명의 기병과 500명의 보병을 확보한 그는 교황군과 동로마군이 합세하기 전에 요격하기로 하고 교황군을 향해 북상했다. 이리하여 남부 이탈리아의 패권을 건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전투 경과

로마에서 6천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던 레오 9세는 포르토레 강 근처의 치비타테에서 노르만군과 마주치자, 자신은 치비타테 요새에 남고 제라르와 루돌프에게 군대 통솔권을 일임했다. 당시 노르만군은 적군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한 데다 식량 수급이 여의치 않아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가톨릭을 신봉하는 많은 전사들이 교황에게 무기를 겨눠야 한다는 것에 거부감을 내비쳤다. 이에 웅프루아는 교황에게 사절을 보내 "교황의 종주권을 인정할 테니 평화 협정을 맺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랑고바르드 귀족들이 "너희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만 평화가 있을 것이다"라며 평화 협상을 맺을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하자, 노르만인들은 전투를 감행하기로 했다.

양군은 작은 언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노르만인들은 기병을 3개 중대로 나뉘어 배치했다. 우익에는 리카르도가 이끄는 기병대가 배치되었고, 중앙에는 보병과 하마 기사, 궁수대로 편성된 웅프루아의 부대가 있었으며, 좌익에는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기병대가 편성되었다. 교황군은 제라르와 루돌프가 각자 부대를 나누어 이끌었다. 중무장한 스와비아 보병대가 중앙 대열에서 오른쪽으로 뻗은 가늘고 긴 전열을 형성했으며, 왼편에는 이탈리아 민병대가 배치되었으며, 기병대는 양익 측면에 자리잡았다.

1053년 6월 18일 정오, 리카르도가 이끄는 우익 노르만 기병대가 이탈리아 민병대를 향해 돌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평원을 가로질러 돌진했고, 이탈리아 민병대는 삽시간에 공포에 사로잡혀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않고 도주했다. 루돌프가 이끄는 랑고바르드 보병과 기병대가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지만, 적의 맹렬한 공세에 점차 밀리다가 이내 패주했다. 리카르도의 노르만군은 패주하는 적을 맹렬히 추격해 살육을 자행했다.

한편, 스와비아 보병대는 언덕으로 이동해 노르만 중앙 부대와 격돌했다. 아풀리아의 수도사 기욤이 저술한 '게스타 위스카디(Gesta Wiscardi)'에 따르면, 스와비아 보병들은 양손에 검을 쥐고 적을 향해 맹렬히 돌격하여 탁월한 무예를 선보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웅프루아가 이끄는 노르만군이 점차 밀리자, 좌익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로베르 기스카르가 기병대를 이끌고 출격해 상대 기병대를 격파한 뒤 스와비아 보병대의 측면을 요격했다. 하지만 스와비아 보병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사력을 다해 싸웠고, 로베르 기스카르는 전투를 치르는 와중에 말에서 3번 떨어졌지만 곧바로 일어나 새 말을 갈아타서 싸웠다.

그렇게 반나절 동안 격전이 이어지던 중, 랑고바르드인들을 완전히 패주시킨 리카르도의 기병대가 전장에 돌아와 스와비아 보병대의 후방을 공격했다. 이리하여 사방이 포위당했지만, 스와비아 보병대는 도망쳐서 불명예를 얻느니 싸우다 죽기를 택하고 최후의 한 사람까지 분전하다 끝내 전멸했다. 이리하여 치비타테 전투는 노르만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4. 이후

교황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둔 노르만군은 여세를 이어가 레오 9세가 있는 치비타테 요새를 포위했다. 교황청 측 기록에 따르면, 레오 9세는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요새에서 나와 노르만군에 항복했다고 한다. 그러나 말라테라를 포함한 다른 기록들은 주민들이 공성탑을 대거 건설해 공성전을 준비하는 적의 기세에 두려움을 느끼고 교황을 내주었다고 밝혔다. 노르만인들은 포도주, 빵 등을 제공하는 등 교황을 정중하게 대하면서도 9개월간 베네벤토에 억류했다. 레오 9세는 하인리히 3세가 원군을 보내주기를 기다리며 한동안 버텼지만, 황제가 군대를 보내주지 않는다는 게 분명해지자 어쩔 수 없이 노르만인들이 남부 이탈리아의 통치자로 자리잡는 것을 인정했다. 한편, 아르이로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은 교황군이 패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바리로 철수했다.

그 후 노르만인들은 로베르 기스카르의 지휘하에 1055년 미네르비노, 오트란토, 갈리폴리를 점령해 아풀리아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옹프루아는 기스카르의 권세가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해 칼라브리아로 보냈다. 기스카르는 그곳에서도 탁월한 활약을 하여 1056년 살레르노를 공략하고 뒤이어 코센차를 함락했다. 1057년 봄, 옹프루아는 임종이 다가오자 기스카르를 멜피로 부른 뒤 어린 아들들을 보좌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1057년 8월 옹프루아가 사망한 후, 기스카르는 조카들을 밀어내고 아풀리아의 백작에 취임했다.

1057년, 로베르 기스카르는 칼라브리아의 동로마 제국령인 카리아티 시를 포위 공격해 수 개월만에 함락시켰다. 뒤이어 교황 니콜라오 2세와 밀약을 맺었다. 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압력으로부터 교황령을 지켜주는 대신, 교황은 그를 아풀리아, 칼라브리아, 시칠리아의 공작으로 봉한다는 것이었다.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는 여전히 동로마 제국에 속했고 시칠리아는 무슬림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 이래 시칠리아 토후국 수중에 있었다. 즉, 그는 교황으로부터 이 지역을 자기 것으로 삼을 권리를 인정받은 것이다.

1059년, 기스카르는 로사노와 게라체를 잇따라 공략했다. 이때 아풀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기스카르는 아풀리아로 진군했고, 동생 루지에로가 칼라브리아의 남은 영토를 마저 공략했다. 1059~1060년 겨울, 루지에로는 칼리브리아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동로마 제국의 도시인 레지오 시를 공략하기 위해 공성 무기를 대거 활용해 맹공을 펼쳤지만 수비대의 끈질긴 저항으로 조기 함락에 실패했다. 1060년 봄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온 기스카르가 동생과 합류해 공세를 펼쳤다. 결국 그해 여름 레지오 수비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자유롭게 돌아갈 수 있는 조건하에 항복했다. 이리하여 칼라브리아는 노르만족의 손에 넘어갔다.

1060년, 콘스탄티노스 10세는 기스카르가 칼라브리아 정복을 완료하는 사이에 이탈리아에 아불하레가 이끄는 군대를 파견했다. 아불하레는 전임 총독 아르이로스와 힘을 합쳐 아풀리아 일대 대부분을 장악한 뒤 기스카르의 본거지인 멜피를 포위했다. 기스카르와 루지에로는 급히 멜피로 달려와서 1061년 동로마군을 격퇴해 멜피를 구했고, 여세를 이어가 브린디시와 오리아를 탈환했다. 그러나 1064년부터 1068년까지 옹프루아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들을 지지하는 가신들의 반란에 직면했고, 동로마군은 이들과 연합해 브린디시, 오리아, 타란토를 다시 공략했다.

그러던 1068년, 로마노스 4세셀주크 제국의 아나톨리아 침략에 대응하고자 남이탈리아에서 병력을 대거 차출했다. 기스카르는 이 때를 틈타 공세를 감행해 동로마군과 반란군의 손아귀에 있던 모든 도시를 쉽게 공략했다. 1068년 6월, 그는 아르시나에 갇혀 있던 마지막 반란군 요새를 함락시켰고, 동로마군을 바리에 몰아붙였다. 1068년 8월 5일, 기스카르는 바리를 육상과 해상에서 모두 봉쇄하고 포위 공격을 가했다. 아르이로스는 공방전이 한창일 때 병사했고, 아불하레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공방전이 막 시작할 때 바리에서 탈출했다.

1069년 초, 스테파노스가 지휘하는 동로마 함대가 노르만 함대의 해상 봉쇄를 돌파하려 했다가 대부분의 함선을 잃었다. 그럼에도 스테파노스는 기어이 봉쇄를 뚫고 바리로 입성하여 음식과 무기를 지원한 뒤 바리 수비를 이끌었다. 1071년 초, 스테파노스는 바리에서 빠져나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달려가서 로마노스 4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로마노스 4세가 파견한 함대는 바리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동로마 함대에게 섬멸되었다. 눈앞에서 이 참상을 지켜본 바리 주민들을 잃고 성문을 열었다. 이리하여 1071년 4월 16일, 기스카르는 동생 루지에로와 함께 바리에 입성했다.

바리를 함락시킨 뒤, 기스카르는 남이탈리아에서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랑고바르드 계열 국가인 살레르노 공국과 아랍인의 지배를 받는 시칠리아 공략에 착수했다. 1072년 시칠리아에 남은 아랍인의 마지막 거점인 팔레르모가 공략되었고, 1077년 살레르노 역시 기스카르에게 넘어갔다. 기스카르는 남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전역을 지배하게 된 아풀리아 공국의 새로운 수도를 살레르노로 정했다. 이리하여 노르만족은 로베르 기스카르의 영도하에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유일무이한 지배자가 되었다. 하지만 기스카르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발칸 반도까지 석권해 노르만 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전쟁을 단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