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09:40:01

폐도령

카타나가리에서 넘어옴
1. 개요2. 배경3. 경과와 결과4. 폐도령이 등장하는 대중매체

1. 개요

(はいとうれい, 하이토-레-)

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 정부가 군경이 아닌 사무라이, 민간인이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을 금지한 법. 1876년(메이지 9년)에 내려진 포고령이다.

2. 배경

전국시대에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선포한 카타나가리(칼 사냥, 刀狩り)란 선례가 있었다.[1] 당시 일본에는 농민이라도 호신을 겸해 칼 한 자루 정도는 지니고 있었는데, "칼을 녹여 농기구를 만들겠다."는 명목으로 무기를 몰수한 것이 칼사냥이다. 이 칼 사냥은 무기를 회수하여 농업 생산력 증대를 위해 농기구를 만들고자 하는 명분이 있었으나 농민들에게서 무기를 압수하여 유사시 봉기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통제한다는 것이 실질적인 목적이었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제가 없었던 전국시대에는 농민들이 겨울철에 돈벌이를 위해 용병(아시가루)으로 이리저리 전장을 누비는 일이 많았다.[2] 이들은 무력이 있으니 다이묘가 세금을 과중하게 물린다는 등의 이유로 봉기를 일으키는 일이 매우 흔했고 각 다이묘들도 농민봉기의 진압에 고심했다. 당시 일본에는 상비군이 따로 없어서 농민들을 병사로 징집했기 때문에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는 말은 예비군 또는 정규군이 들고 일어났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전국시대 당시 농민들은 패잔병의 소지품을 노리고 무리를 지어 몰려가서 노략질을 하거나, 목을 베어 상대 다이묘에게 갖다 바치는 경우가 잦았다. 이를 落武者狩り(오치무샤가리)이라고 한다. 패잔병 처리를 쉽게 할 수 있으니 다이묘들도 현상금까지 걸면서 이를 부추겼다. 농민들 입장에선 운 좋게 지휘관을 잡으면 현상금은 물론이고 신분이 상승하며, 낙오 무사의 장비들을 부수입으로 챙길 수 있으니 눈에 불을 켜고 낙오무사를 추적했으며, 당연히 침공전에서 패퇴하면 패잔병들은 패잔병 사냥에 시달렸다. 거기에 더해 오치무샤와 그 부하들은 따지고 보면 자기들의 고향을 침략해서 살인, 약탈, 방화는 물론이고 같은 마을 사람이나 가족들을 노예로 파는 일도 했거나[3]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단순 금전적 이익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건 감정적으로라건 그럴 이유는 충분했다. 일본의 속담 중 하나인 '낙오무사는 참억새 꽃에도 겁을 먹는다(落ち武者は薄の穂にも怖ずという)'가 이런 연유에서 발생했다는 설도 있다. 대표적인 낙오 무사 사냥의 피해자가 아케치 미츠히데다.[4]

그래서 히데요시는 자기가 정권을 쥐게 되자 농민들에게서 무기를 빼앗아 차후에 불씨가 될 만한 소지를 아주 없애버리려고 한 것이다. 농민봉기에 골머리를 썩힌 만큼 히데요시 이전에도 이러한 정책을 취한 경우가 없지는 않았으나 어느 쪽이든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긴 힘들다. 농민들의 무기는 처음부터 반란을 위해서 준비한 게 아니라 맹수나 도적단 등에 맞서려고 준비한 게 어쩌다가 반란에 쓰인 것이었으므로, 맹수나 도적 떼를 완전히 몰아내지 않은 상태에서 농민들의 무기 소지만 금지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 정권이 무너지고 찾아온 에도 시대에도 칼을 차는 풍습은 그대로 남았다. 무사들은 두 개의 검을 차고 다니는 것이 전통이었는데, 이것이 에도 시대에도 이어져 은퇴하지 않았고 주인을 섬기고 있는 사무라이는 두 자루를 착용하는 것이 예의가 되었다. 그리고 그 밖에도 평민들도 호신을 위하여 와키자시 정도의 길이라면 차고 다니는 것이 허용되어 있었다. 또한 당시의 칼은 단순한 무기나 도구 이상의 의미, 즉 '남자의 명예'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에 조선 시대 선비가 밖에 나갈 때 반드시 을 쓰고 나가듯이 사무라이도 반드시 칼을 차고 외출했다. 때문에 폐도령은 당대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무기를 빼앗는다는 면 이외에도 사무라이의 명예를 몰수한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3. 경과와 결과

그러나 아무래도 개인이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이 근대화된 정부로서는 다소 부담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토론을 거쳐서 결국 폐도령이 내려지게 된다. 당초에는 왕정복고를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황의 수호자로서 사무라이의 기개를 살리기 위하여 폐도령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있었으나 메이지 정부의 슬로건이었던 사민 평등을 과시하기 위해서 사족을 견제할 필요와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폐도령이 반포되었다.

이에 사족들의 반발은 매우 극심했다. 당시 사무라이의 급료는 일정한 시기에 쌀로 지급되었는데 상인들이 이 쌀의 수요와 공급량을 조절하여 쌀을 싸게 사들이자 에도 시대 후반 사족의 삶은 가난에 찌들게 되었다. 더욱이 그 급료를 지급하던 에도 막부와 다이묘들도 사라지면서 먹고 살 길조차 막막해졌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폐도령까지 내려졌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로 치자면 지체 높은 고위 공직자들에게 쥐꼬리 같은 박봉만 주면서 이들에게 강제로 공직자를 상징하는 장신구와 고급 의복까지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밥줄이 날아간 것으로도 모자라 그나마 근근히 지키고 있던 사회적인 명예까지 대놓고 짓밟아 버리니 사무라이들이 느꼈을 감정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국민개병령(國民皆兵の令)[5]으로 백성들이 병사이기 때문에 칼로 조국을 수호하는 사무라이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6][7] 아마도 이에 따라 국가의 무력 집단이라는 역할은 사무라이에게서 완전히 정부에 이양되어 정부가 통제하는 관병(군인)과 경찰만이 칼을 차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한 사족은 사가의 난, 하기의 난, 신푸렌의 난 등의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사족 반란이라고 부른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이 바로 세이난 전쟁. 이전에도 산발탈도령이 있었으나 이건 강제가 아니라 그렇게 해도 된다는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이었고 폐도령은 말하자면 사족을 완전히 해체하겠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 물론 일부 사족은 메이지 정부 성립시의 공에 근거하여 화족 작위를 받아 폐도령을 크게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에 사족의 반란에는 그리 많은 병력이 모이지는 않았으나 일본 정부는 사족의 2배에 해당하는 병력을 투입했음에도 병력의 손실은 동등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메이지 정부의 군대가 가진 나약함이 폭로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메이지 정부는 군비확충에 적극적으로 임했고 여기에 중앙집권적 군국주의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국민개병령이 더해진다.

어쨌거나 이 폐도령은 히데요시의 칼사냥과는 주도자와 당하는 자들의 입장이 서로 바뀌었으나 체제 측이 사회적 비주류를 통제하기 위해 국가정책을 시도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기 때문에 비교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여전히 농촌의 무기 폐기는 그리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여전히 메이지 정부의 능력이 부족해서 농촌에서는 맹수, 도적에 대한 치안유지 관점에서 대량의 무기를 비축하고 있었기 때문. 심지어 제2차 세계 대전 전후[8] 까지 활이나 창칼 같은 냉병기, 구식 화승총은 별다른 단속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후 적군파 등 좌익 세력의 봉기 사건이 여러 차례 터지자 경찰에서는 엄격한 총도법을 적용하였고 그제서야 겨우 무장해제가 이루어진다.

칼의 휴대는 사무라이-사족들에겐 그 자체가 예법이자 상징이었기 때문에 끝내 폐도령을 수용한 사족들 중 일부는 나무를 깎아 만든 목도를 차고 다닌 사례[9]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라스트 사무라이 같은 매체에서는 사무라이를 총기로 무장한 신식 군인들이 에워싸고 강제로 칼을 뺏어가는 폭압적인 정책처럼 나오지만 아무래도 정책 입안자들 또한 사족 출신이라 그렇게 막 나갈 수는 없었던 관계로 허리에 차는 것만 제지했고, 끈을 달아 등에 매거나 가방에 넣어 들고 다니거나 하는 등 즉시 발도할 수 없는 상태로 갖고 다니는 정도는 허용되었다고 한다. 사실상 현대의 총포도검류 단속과 달리 순수하게 드레스 코드에 대한 규제에 가까웠던 것.

현대 일본은 한국만큼이나 도검총포에 대한 단속이 빡세게 이루어지는 나라이지만, 예외적으로 전통 도검은 무기가 아닌 예술품으로 분류되어 단속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일본에서는 전통 도검의 거래가 의외로 활발한 편이다. 창작물에서 야쿠자들이 일본도를 든 모습으로 자주 그려지는 이유가 이것 때문인데, 예술품 취급이어서 밀수, 소지에 애로사항이 많은 다른 무기보다 상대적으로 손에 넣기 수월하기 때문. 다만 실제로는 아무래도 아예 제약이 없는 것은 아니라서 현대에 병기용으로 사용할 만한 강철로 만드는 것은 불법인데다[10] 등록 절차가 있기는 하고, 무엇보다 전통 도검의 가격 자체가 매우 높기 때문에 이걸 무기로 사용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강도도 약하기 때문에 공장에서 찍어내는 식칼이 더 우월한 강도를 가지고 있는 현대에 무기로 쓰기 부적합하다. 예외라고 해 봐야 거합도 등의 무도를 수련하는 유파의 실력자들이 검술 연마를 위해 진검을 소지하고 있는 정도이며 나머지는 어디까지나 전통 예술품으로 간주된다.

4. 폐도령이 등장하는 대중매체


[1] 원나라 때도 한족은 무기류를 일체 가질 수 없었고, 10가구 당 하나의 부엌칼만 가질 수 있게 한 경우까지 있으니 특별하다고 할 것도 없다. 또한,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총기의 경우 민간인의 소지를 엄격히 금지하는 나라가 많은 것을 생각해보면 민간인의 무기 소지 금지는 치안 유지라는 명분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정책이었다.[2] 그냥 병사로써만 활동하는 게 아니라, 약탈과 인근마을을 습격하여 사람들을 잡아다 노예로 파는 것이 겨울철 벌이 중에 하나였다. 이 분야에서는 특히 우에스기 겐신이 유명하다. 우에스기의 지배령인 에치고 지역은 척박하여 먹고 살길이 막막했기 때문에 겨울철에 다른 다이묘의 땅을 침략하여 약탈과 노예업을 일삼았다.[3] 우에스기 겐신이 그런 노예 장사로 부수입을 챙겼고 적어도 일본 서부 일대에서는 가톨릭도 이런 노예 매매업에 관여했다.[4] 이런 패잔병 사냥은 일본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볼 수 있었다. 워털루 전투가 끝나고, 전장에서 낙오된 부상병들이 가진 군수품을 노린 지역 주민들에게 살해당하고 약탈당하는 일이 일어났다.[5] 국민 모두가 병사, 즉 국군의 창설.[6]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의 역사편에서는 단발령, 폐도령과 징병제가 실시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무라이가 "아니, 전쟁은 우리 전문인데"라고 놀라다가 "이건 완전히 사무라이 죽이기 대작전이다!"라며 바닥을 구르며 징징거린다(...).[7] 심지어 도쿠가와 쇼군가 부활을 외치는 조슈 번 출신 사족들도 있을 지경이었다. 그러니 도쿠가와 종가와 방계가문마저도 당혹했다고 한다.[8] 전후 잠시 일본을 통치한 미 군정청이 도검, 총포 등을 압수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긴 하다. 당연히 뭔가 폐도령을 연상시키는 모양새로 난리가 났고(...) 깜짝 놀란 군정청은 예술적 가치가 높은 도검의 민간 소유를 허락했으나 이미 '칼을 내놓지 않으면 총살당한다' 는 둥 헛소문에 넘어가버린 사람들이 국보급 도검 여럿을 폐기하는 참사가 발생한 후였다.[9] 의외로 역사 깊은 행위인데, 에도 시대에도 에도 성 내에서 칼을 뽑을 경우에는 이유를 불문하고 참수로 다스렸었기 때문에 실수로라도 칼이 뽑힐 일이 없도록 아예 칼날을 칼날 모양 대나무 조각으로 대체한 타케미츠(竹光, たけみつ)를 차고 입성하는 사람도 많았다.[10] 즉, 전통적인 제철법으로 만든 타마하가네를 써야만 한다. 직접 만들 수도 있으나 일본미술도검보존협회에서 제작해 등록된 장인들에게 보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