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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önigsberg-Klasse |
1. 개요
크릭스마리네의 경순양함.2. 제원
쾨니히스베르크급 순양함 | ||||
선행함 | 엠덴급 경순양함 | |||
후계함 | 라이프치히급 경순양함 | |||
기준배수량 | 6,100톤 | |||
만재배수량 | 7,800톤 | |||
전장 | 174m | |||
전폭 | 15.3m | |||
흘수선 | 6.28m | |||
속력 | 32.1노트 (59km/h) | |||
항속거리 | 19노트 (35km/h)로 5,700해리 (10,600km) | |||
승조원 | 514명 (전쟁중 850명으로 증가) | |||
무장 | 15cm/60 SK C/25 3연장 주포탑 3기 (총 9문) 8.8cm/45 Flak L/45 2연장 대공포탑 2기 (총 4문)[1] 50cm 3연장 수상 어뢰 발사관 4기 (총 12문) 기뢰 120개 | |||
장갑 | 현측장갑 최대 50mm 갑판장갑 최대 40mm 장갑함교 최대 100mm | |||
함재기 | 아라도 Ar 196 수상기 2기, 캐터펄트 1개[2] |
3. 특징
쾨니히스베르크급 경순양함의 조감도 |
193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은 과거 독일 제국 해군의 영광을 되찾기를 원했고, 베르사유 조약으로 반쯤 불구가 된 해군을 재건하기 위한 일환으로 대형함 건조를 시작했다. 그래서 1924년도의 해군 건함 계획에서 가칭함명 B,C,D로 불리는 3척의 건조가 바이마르 공화국 의회에서 승인되었다.
쾨니히스베르크급 경순양함은 독일 군함으로써 최초로 15cm/60 SK C/25 함포를 136,910kg의 중량을 가지는 Drh Tr C/25 밀폐식 3연장 주포탑에 탑재했다. 해당 주포는 일반적인 경순양함의 주포인 6인치 (152mm) 보다 약간 작은 명칭 15cm, 실제 149.1mm라는 구경을 선택하여 포탄 중량이 45.5kg으로 가볍지만 분당 6발에서 8발의 연사속도를 가지며 +40도에서 25,700m까지 포탄을 날릴 수 있다. 포탑의 경우에는 포신부앙각도는 -10도에서 +40도이고 포신부앙속도는 초당 6도이며 포탑선회각도는 360도 선회가 가능하며 포탑선회속도는 초당 6도에서 8도이며 장전각도는 +3도 고정장전이고 포신수명은 500발이다.
취역 당시 기준으로 장갑이 얇아서 부실한 포탑 방어력 빼고는 3,200m 거리에서 60mm 장갑을 관통하고 11,200m 거리에서 20mm 장갑을 관통하므로 대수상전에서 약간 소구경인 것 치고는 적당한 위력을 가지고 민첩한 주포탑이었다. 그래서 후속 함급인 라이프치히급 경순양함의 2번함인 뉘른베르크에서 포탑 중량이 147,150kg로 약간 증가했으나 연사속도를 분당 10발에서 12발로 늘리고 포신부앙속도를 초당 6도에서 8도로 증가시키고 포탑선회속도도 초당 7.6도로 올린 개량형인 Drh Tr C/28 3연장 주포탑이 채택되었다.
이전의 함급인 엠덴급 경순양함은 개방식 단장포탑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발전이었으며 심지어 6인치급 (152mm) 함포를 3연장 주포탑에 장착한 최초의 군함이기도 하다. 프랑스 제3공화국의 경우 에밀 베르탱 경순양함이 1935년에 취역하면서 3연장화에 성공했고 미국은 중순양함의 주포인 8인치 함포의 3연장화는 1929년에 펜사콜라급 중순양함이 취역하면서 이미 달성했으나 한동안 경순양함을 건조하지 않아서 6인치 3연장 포탑은 1935년에 취역한 브루클린급 경순양함부터 적용했다. 영국은 경순양함을 다수 건조하였으나 1936년에 타운급 경순양함부터 3연장 포탑을 적용하였다.
베르사유 조약에 규정된 순양함의 기준배수량 6천롱톤의 기준을 맞추기 위해서 각종 신기술을 투입했다. 그래서 합금강을 도입했고 군함의 건조시 기존의 리벳 연결 방식이 아니라 전기용접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서 선체의 85%를 전기용접으로 조립했다.
순양함답게 속력에도 신경을 써서 슈르츠 - 소니크로프트식 중유 전소방식 해군형 보일러 6기와 게르마니아식 해군형 기어드 증기터빈 4기를 조합하고 증기터빈은 고속형 1기와 순항형 1기를 1조로 묶어서 2조 2축 추진을 통해 68,000마력을 달성하여 최대 32.1노트라는 준수한 속력을 얻었고 19노트 (35km/h)로 5,700해리 (10,600km)까지 항속거리를 달성할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항속거리의 연장을 위해 MAN사제 W10 V26/33형 4사이클 10기통 디젤기관 2기를 1축으로 묶어서 중앙축에 연결하는 형태를 추가해서 저속 순항시에는 1,800마력의 디젤엔진을 사용가능하므로 이론상 10노트에서 8,000해리까지 항속거리를 늘릴 수 있었다. 이렇게 증기터빈과 디젤엔진을 혼성 운용하는 시스템은 현대에도 COSOG 시스템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후의 나치 독일 해군의 군함들과는 다르게 출력이 높지만 관리가 어렵고 내구성이 낮은 고온고압방식 보일러를 채택하지 않았기에 기관부의 신뢰성은 매우 높았으며 내해나 연안에서의 기동성도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4. 문제점
베르사유 조약에 규정된 순양함의 기준배수량 6천롱톤의 기준을 맞추기 위해서 장갑이 매우 얇고 배수량에 비해서 과무장을 한 탓에 군함의 무게중심이 불안했고 악천후에 매우 취약했으며 적진을 돌파하는 능력이 매우 떨어졌다.주포탑의 경우에는 함수부에 1기를 장착한 것까지는 중량증가로 함수가 내려앉아서 항행에 큰 지장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선체 중심선에 정확하게 설치했으므로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함미부에 주포탑 2기를 설치한 방식이 문제였다. 주포탑의 포신부앙각도인 -10도에서 +40도를 최대한 살리고 군함의 양쪽 측면에서 근접하는 적군의 소형 군함을 상대하기 위해서 선체중심선이 아니라 양쪽 측면에 각각 1기씩 주포탑을 붙여서 설치했는데 군함의 무게중심 악화에 큰 영향을 준 것이다.
해당 방식은 앙 애슐론(en echelon) 방식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과거에 전드레드노트급 전함같은 구식 주력함이 기술력 부족 문제로 인해 선수부와 선미부에 주포탑을 선체 중심선에 맞추어서 설치하지 못할 때 차선책으로 쓰던 방식으로 이론상 양 측면에 1기씩 주포탑이 배치되며 긴급시에는 양 측면의 모든 함포를 한쪽 측면에 집중시킬 수 있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론은 이론일 뿐 현실과는 전혀 달라서 적 군함이 아군 군함의 주포탑이 조준하는 정면 방향으로 똑바로 오지 않으면 반대쪽 측면에 있는 주포탑을 사용할 수 없으며 설령 적이 아군의 입맛에 맞게 움직여도 모든 주포탑을 해당 목표에 집중할 경우 반대쪽 측면에 있는 주포탑이 발포시 함체의 상부구조물과 갑판이 충격파와 후폭풍으로 뒤덮이는 바람에 손상이 발생하는 등 문제점이 많아서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극초기까지만 사용하고 버려진 방식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앙 애슐론(en echelon) 방식을 사용하려면 양 측면의 주포탑 높이가 동일해야 하는 등 무게중심을 제대로 맞추어야 한다. 그런데 쾨니히스베르크급 경순양함의 후방 주포탑을 보면 계단식 설계를 채용했기 때문에 2번 주포탑이 3번 주포탑보다 1층이나 높다. 태생적으로 군함의 무게중심을 내다버린 설계다. 덕분에 대양항해가 매우 힘들어졌고 장기간 순항하면 무리한 경량화의 악영향까지 합쳐져서 전기용접부위가 파손되는 등 선체가 부서지기 시작한다. 실제로 카를스루에가 전간기에 해외순방 및 세계일주 항해중에 태평양에서 1936년 3월 13일에 악천후를 만나서 선체 파열의 문제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순항을 중단하고 미국의 샌디에이고에서 수리를 받은 일이 발생했다.
방어력 측면에서는 기준배수량 6천롱톤의 제약하에서 최대한 노력해서 취역 당시에는 그럭저럭 튼튼한 편이었다. 일단 장갑판의 높이가 낮은 편이긴 하지만 50mm 측면장갑 후면에 10mm 경사장갑이 있어서 터틀백 장갑의 측면방어구조를 적용하기도 했고 갑판장갑도 20mm 정도를 확보했고 탄약고에서는 40mm로 증가했으며 주포탑도 전면장갑 30mm와 후면 및 천정장갑 20mm를 확보하고 주포탑 바벳도 30mm를 포탄 파편 방호 정도는 가능했다. 장갑함교는 100mm의 측면장갑과 30mm의 천정장갑을 가진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출현하기 시작한 열강들의 신형 경순양함보다는 당연하게도 장갑방어력이 모자란데 대규모 개조를 통해 배수량을 늘리는 방식으로 방어력을 높이려고 해도 종횡비가 11:1로 매우 길쭉하고 무게중심이 안맞는 함체를 개조하는 것보다는 그냥 신규 군함을 건조하는 것이 더 나을 지경이라 근본적인 방어력 개선은 불가능했다.
방어용 장갑에 988t을 사용해서 전체 배수량의 13%를 사용했는데도 베르사유 조약 덕분에 배수량이 매우 적어서 포탄에 대한 방어력도 부족한 상황이니 어뢰나 기뢰를 방어할 수밀격벽이나 벌지에 대한 투자는 없다시피했다. 일단 내부 격실 자체가 엠덴급 경순양함에 비해서도 16개나 숫자가 줄었고 함저는 2중 바닥을 갖추긴 했으나 벌지가 없으므로 어뢰 명중이나 기뢰 폭발을 당하면 속수무책이다.
속력의 경우에는 증기터빈과 디젤의 동시운용으로 속도와 항속거리를 잡았으나 해당 시스템을 동시에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고 일단 군함을 정지시키고 엔진을 끈 후에야 시스템 전환이 가능했다는 것이 약점이었다. 전환시간은 최소 15분이 걸렸고 그 동안은 무방비가 되기 때문에 실전에서는 동력 시스템 전환시기를 제대로 포착해야 했으며 실제로는 그게 불가능했기에 안전이 확보된 해역이 아니라면 디젤엔진을 제대로 가동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서 연비가 감소하고 항속거리도 짧아진다. 사실 증기터빈과 디젤을 혼합편성한 이유도 당시에는 디젤엔진으로만 군함을 동작시키려고 했으나 대출력과 장기간 동작 및 운용이 가능할 수준의 군용 디젤 엔진이 없었기에 선택한 것이라서 한계점이 컸다.
그리고 함체의 무게중심 불안정성으로 인해 함 내부에 탄약과 연료와 보급품등의 중량물을 부적절하게 적재하면 배가 뒤집어지는 전복현상이 발생할 수 있었으며 군함을 조타하는 것도 어려움이 많았다. 심지어 급선회를 할 경우에는 군함이 20도까지 기울어졌으며 속도도 20% 상실했다. 설상가상으로 무게중심을 맞추기 위해서 연료탱크 내부에 연료가 최소 680㎥ 은 남아있어야 하므로 사실상 전투시에는 원양항해는 불가능하므로 발트해 같은 내해에서만 전투용으로 사용이 가능하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1차대전 패배로 대형함 건조의 맥이 끊어진 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는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하면 안된다고 한 눈에 들어오며 설령 실행했더라도 설계국 상부에서 거의 자동적으로 바로 걸러져야 하는 부분이 그대로 실행된 결과가 매우 심각했다.
나치 독일도 쾨니히스베르크급 경순양함의 단점을 인정했고 후계함인 뉘른베르크에서 상당부분 개선된다.
5. 개량
1930년대부터 개량작업에 돌입하여 우선 무게중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상기 발진용 캐터펄트를 철거하고 배수량을 늘렸으며 함체 내구성의 강화 및 장갑방어력 증강을 위해서 Wh(Wotan hart) 장갑강을 도입해서 10mm - 14mm 두께의 외부측면장갑과 16mm의 외부갑판장갑을 장착했다. 그리고 외부측면장갑과 기존의 측면장갑 사이에 50cm - 70cm의 공간을 두었다. 그래서 기본적인 방어력 구조 변경은 없었으나 함폭은 1.4m, 기준배수량은 6,730t, 만재배수량은 8,350t로 증가했으며 속도는 약 2노트 감소했다. 그리고 연료탑재량도 약간 늘어나서 기존의 중유 1,100t과 경유 139t에서 중유 1,300t과 경유 150t이 되었다.주포는 배수량을 고려하면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편이지만 대공포를 비롯한 대공화기는 애초 설계시부터 8.8cm/75 SK C/25가 채택되었으나 실제로는 낡고 오래되었으며 속사포를 대공포로 긴급개조한 8.8cm/45 Flak L/45를 장착하여 매우 불만족스러웠다. 그래서 1931년부터 8.8cm/75 SK C/25의 탑재실험이 쾰른함에서 실시되었으나 대공포 자체의 성능결함으로 인해 실패하였고 8.8cm/45 Flak L/45의 수량을 늘렸으며 1933년에서 1934년 사이에 단장 대공포탑이 8.8cm/76 SK C/32 2연장 대공포탑 3기로 교체된다.
대공기관포도 1935년에서 1936년에 배치되기 시작해서 3.7cm/83 SK C/30 2연장 대공기관포좌 4기와 2cm/65 C/30 단장 대공기관포좌 8기를 장착했다. 비록 비스마르크급 전함에서 보듯이 나치 독일 해군의 대공화기가 전반적으로 큰 문제가 있었으나 일단 없던 것이 생기거나 증설되었으므로 대공성능이 늘어난 것 자체는 사실이다.
어뢰도 기존의 50cm 어뢰를 53.3cm의 G-7a 어뢰를 발사가능한 3연장 어뢰발사관 4기로 교체해서 12기의 어뢰발사관을 확보했고 예비로 24기의 어뢰를 추가로 저장했다. 그 외에 기뢰도 120발을 장착했다.
그러나 원래 문제가 많았던 군함이었기에 근본적인 변화는 어려웠고 개조비용도 높았기에 카를스루에를 개장하는데만 570만 마르크가 들어가는 등의 이유로 개장작업도 느려져서 2차대전이 터질 때까지 카를스루에만 장갑개조가 완료되는 등의 사태가 발생한다. 대공화기도 모든 자매함들이 충분하게 받은 것이 아니었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쾰른만 제대로 받았고 추가증설도 해서 최종적으로는 3.7cm 기관포 8문과 2cm 기관포 18문을 장착하고 장착예정자리까지 합치면 3.7cm 기관포 10문과 2cm 기관포 24문까지 장착이 가능했다.
6. 실전
3척 모두 스페인 내전에서 활동한 전적이 있고 1930년대 말에 근대화 개장을 했다. 개별함 설명은 주로 제2차 세계 대전중심으로 서술한다.함재기에게 공격당한 쾨니히스베르크 |
1번함 쾨니히스베르크 (Königsberg)는 1929년에 취역했다. 1940년 노르웨이 전역에서 베르겐을 목표로 한 그룹 3에 포함되어 동형함 쾰른 및 표적함 브렘제, 수송함 카를 페터스, 어뢰정 6척와 함께 출항했으나, 이후 노르웨이군의 해안포에 맞아서 기관부에 치명타를 입고 귀항중 영국 항공모함 HMS 퓨리어스의 함재기 블랙번 스쿠아의 급강하 폭격을 얻어맞고 격침되었다. 잔해는 1942년 인양되어 1943년에 스크랩되었다.
개장 이후 카를스루에 |
2번함 카를스루에 (Karlsruhe)는 마찬가지로 1929년에 취역했다. 1936년 항해 훈련차 미국으로 향하던 도중 도중 폭풍으로 현측장갑에 손상이 생겼고 미국의 샌디에이고에서 수리를 받았다. 1940년 노르웨이 전역에서 그룹 4에 구성되어 어뢰정 10척과 함께 크리스티안산으로 출항했다. 이후 해안가에 도달한 카를스루에는 노르웨이 해안포와 교전, 해안포대를 성공적으로 무력화시키고 병력을 상륙시켰다. 이후 임무를 마친 카를스루에는 어뢰정 3척과 함께 피오르드 밖으로 나가다가 영국 잠수함 HMS 투란트(Turant)의 어뢰를 맞고 격침되었고, 생존 승조원들은 1923년형 어뢰정 그라이프(Greif)가 구조했다. 2020년에 잔해가 발견되었다. 대략 수심 490미터 정도에서 발견되었다고.[3]
개장 이후의 쾰른 |
3번함 쾰른 (Köln)은 1930년에 취역했다. 이 함의 특이사항이라면 1935년에는 1년간 훈련차 세계 일주를 한 적이 있다.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 단치히 만에 기뢰를 부설했고 1940년 노르웨이 전역에서 쾨니히스베르크와 함께 그룹 3에 구성되었다. 언니하고 다르게 무사히 귀항했고 1940년 말에 근대화 개장으로 2번 포탑 위에서 헬리콥터 이륙을 위한 테스트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기술력으로는 헬리콥터가 정찰기에 비해 별로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이 밝혀지며 쾰른의 헬리콥터 운용은 1942년 중단되었다.
1941년, 쾰른은 전함 티르피츠, 아드미랄 그라프 셰어, 뉘른베르크와 구축함들과 함께 발트함대에 소속되었고 이때 쾰른은 소련 잠수함의 공격을 받을 뻔했다. 독일이 발트해 일대를 장악하자 쾰른은 노르웨이와 독일 사이를 이동했고 결국 노르웨이에서 영국 공군의 공습탓에 아드미랄 히퍼와 함께 독일 킬항구에 정박했다가 빌헬름스하펜으로 이동했고 1945년 3월 미국 육군 항공대 소속의 B-24의 공습에 의해 격침된다.
빌헬름스하펜에서 격침된 쾰른 |
그러나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함 자체는 착저했지만 주포는 여전히 수면 위에 있어서, 쾰른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때까지 함포 사격으로 항구를 방어하는 지상군을 지원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쾰른은 그 상태로 방치되다가 1956년에 스크랩된다.
7. 매체에서 등장
- 네이비필드 및 네이비필드2
경순양함 트리 함정 중 하나로 구현되었다. 애칭은 멸치. (베타테스트 시기 처음 등장했을 때는 은색에 기다란 모양을 가져서 은갈치라고도 불렸다.) 갈색 갑판에 피탄면적이 은근히 좁아서 붙여진 별명인데 성능은 좀 애매하다. 뭐든 안그러겠냐만 잘하는 사람이 타면 중순양함도 위협할 정도지만 일반적으론 안 잡자니 거슬리고, 잡자니 은근히 안 맞아서 포탄 아까운 계륵같은 배.
- 월드 오브 워쉽
독일 순양함 5티어 트리로 등장한다. 우수한 연사력과 사정거리가 있지만 심하게 물장갑이다.
- 전함소녀에서 의인화되어 나온다. 세 자매가 모두 나오며 자세한 건 쾨니히스베르크(전함소녀), 칼스루헤(전함소녀), 쾰른(전함소녀) 참조
- 벽람항로에서 의인화되어 나온다. 세 자매가 모두 나오며 자세한 건 쾨니히스베르크(벽람항로), 카를스루에(벽람항로), 쾰른(벽람항로) 참조
- 워 썬더 3번함 쾰른이 독일 해상 병기 순양함으로 등장. 매우 큰 사이즈와 빈약한 대공, 얇은 장갑, 부족한 화력으로 인하여 겉보기에는 그닥 좋다고만은 볼 수 없는 물건이다만 속도가 구축함마냥 빠르고 어뢰가 한쪽당 6문 총합 12문으로 많이 달려있으며 주포의 집탄률이 사실상 인게임 1위라고 봐도될 수준으로 좋은탓에 체급이 커진 구축함처럼 운용하면 킬을 쓸어담긴 힘들더라도 여러명을 불구로 만들어 주는게 가능한 함선이다.
[1] 나중에 개장하면 3기 까지 늘어남[2] 무게중심의 이유로 철거됨[3] 기사에 따르면 사실 잔해 자체는 2017년에 발견되었으나 뭔지 몰라 그대로 두다가 2020년이 돼서야 탐사선을 보내 카를스루에라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