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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프 리드

파일:클리프 리드3.jpg
안양 SBS 스타즈 시절
파일:클리프 리드1.jpg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시절
이름 클리퍼드 애런 리드
(Clifford Aaron Reed)
생년월일 1970년 12월 18일 ([age(1970-12-18)]세)
국적 미국
출신학교 딕시 주니어 칼리지(Div.II) (1989~1991)
뉴멕시코 주립대학교 (1991~1993)
포지션 파워 포워드
신체사이즈 190.4cm
프로 입단 1994년 산타루시아 레알토스 (PBA; 필리핀 리그)
KBL 소속팀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1997~1999)
안양 SBS 스타즈 (1999~2000)
KBL 챔피언결정전 우승 반지
1997

1. 개요2. 대학시절 ~ KBL 입성 이전3. KBL에서의 선수생활4. KBL 방출 이후5. 커리어 스탯
5.1. 대학 시절5.2. KBL
6. 관련 문서

1. 개요

KBL 초대 외국인 드래프트 1순위 외국인 선수.

KBL 초창기를 대표하는 외국인 선수로, 원년 시즌(1997) 국가대표 센터였던 김유택의 존재감을 가려버린 놀라운 점프력의 단신 파워 포워드. KBL 언더사이즈 빅맨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2. 대학시절 ~ KBL 입성 이전

고교 졸업 후 NCAA 1부 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디비전 II의 딕시 주니어 칼리지(현 딕시 주립대학교)에 진학, 칼리지의 올타임 득점 3위, 리바운드 2위에 오른 뒤, 당시 NCAA Big West 컨퍼런스 소속[1]이던 뉴멕시코 주립대학교으로 편입해 두시즌 더 활약한다.

파일:lKhOYCs.jpg
  • 뉴멕시코 주립대 시절 클리프 리드(왼쪽 아래 42번)[2]

당시 닐 매카시 감독이 이끌던 뉴멕시코 주립대는 겨우 6-5(196cm)[3]의 리드가 파워 포워드로 뛸 정도로 단신팀에 속했으나, 리드가 다니던 91-92 시즌과 92-93 시즌 2년 연속으로 NCAA 토너먼트에 진출, 1992년 토너먼트에서는 Sweet Sixteen(16강)까지 오르는 돌풍을 일으켰고, 이때부터 리드는 겨우 190cm을 넘는 신장에도 불구, 특유의 고무공같은 탄력을 자랑하며 팀내 두번째로 많은 리바운드를 잡는 선수였다. 졸업반이던 92-93 시즌에는 리드의 뉴멕시코 주립대는 Big West 컨퍼런스 우승을 차지했고, NCAA 토너먼트 2회전까지 오르는 등 리드로선 꽤 화려하게 대학시절을 마무리했는데, 이후 NCAA 사무국에서 닐 매카시 감독이 뉴멕시코 주립대 선수들의 불성실한 수업참여를 방조하고 심지어 일부 선수들의 수업 출석을 조작하기까지 한게 발각되면서, 리드의 재학시절을 포함한 1991년부터 1996년까지 뉴멕시코 주립대의 모든 성적과 기록이 삭제되고 만다.[4]

대학 졸업 후 리드는 필리핀 PBA 산타루시아 레알토스 팀에서 프로 커리어를 시작한다.

3. KBL에서의 선수생활

3.1.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1997~1999)

1996년 11월 LA에서 실시한 KBL의 첫 외국인선수 트라이아웃에 참가한 리드는, 겨우 이틀간 열린 트라이아웃 동안 서전트 점프 90cm를 넘어가는 자신의 탄력을 아낌없이 선보이며 각 팀 관계자들의 눈을 현혹시켰고, 테스트 종료 후 실시된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의 선택을 받게 된다.[5] 다소 노쇠하긴 했지만 전 국가대표 센터 김유택(34세,197cm)이 건재한데다 백업센터로 조현일(30세,195cm)까지 있는 마당에, 외곽슛이라곤 기대할수조차 없는 단신 리바운더 리드의 선택은 당시 농구관계자들로부터 픽 낭비라는 평을 받았으나, 이러한 우려는 KBL 원년 1997시즌 부산 기아의 홈 개막전이 끝나고 말끔히 사라졌다.

파일: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KBL 원년 첫 우승 달성.jpg
왼쪽부터 김영만-김유택-리드-윌커슨.

1997년 2월 3일, 대전 현대 다이넷과의 개막전에 주전 파워 포워드로 출장한 리드는 31득점 15리바운드라는 괴물같은 스탯을 찍으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특히 경기 중반 강동희의 패스를 공중에서 받아 상대팀 센터 머리위에 앨리웁 덩크로 마무리한 장면은 부산사직체육관을 가득 메운 관중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선사했고, 클리프 리드는 단 한게임만에 트리오를 제치고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를 대표하는 선수로 각인되어 버린다.[6] 특히 이 개막전에서 전 국가대표 센터 김유택은 경기내내 나서지 못하다가 경기 종료 1분을 남기고 외인 센터 로버트 월커슨(193cm)[7]이 5반칙 퇴장당한 후에야 교체로 등장하는 대굴욕을 맛본다.

8팀이 단 3라운드(21경기)로만 치른 원년시즌에 클리프 리드는 트리오를 제치고 부산 기아의 리딩 스코어러(22.4득점)였고, 당연하게도 리바운드(10.7개, 전체 4위)와 블록(1.24개, 전체 2위)도 팀내 1위였다. 기존의 트리오가 건재한데다 리드-윌커슨 더블포스트가 지키는 골밑은 원년시즌 KBL 최고의 조합이었고, 강력한 베스트 5를 바탕으로 부산 기아는 무난히 정규리그 1위에 올랐고, 플레이오프와 챔피언 결정전을 연이어 돌파하며 KBL 초대 우승팀 타이틀을 차지했다. 리드는 4강 플레이오프에서 전희철이 지키는 대구 동양의 골밑을 연일 맹폭하며 20.3득점-13.7리바-1.7블록을 기록했고,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상대팀 원주 나래의 최우수 외국인선수 제이슨 윌리포드(194cm)를 맞아 다소 활약이 줄긴 했지만(17.4득점-9.2리바), 챔프전 MVP 강동희(챔프전 평균 18득점 6어시)와 김영만(챔프전 평균 25.4득점) 콤비가 원주 나래의 백코트를 압살하는 동안 윌커슨과 함께 시리즈 내내 부산 기아의 골밑을 든든히 지켜내며 우승에 기여했다.
클리프 리드 덩크슛 모음 영상


190.4cm의 단신임에도 3점은커녕 중거리슛조차 없고 드리블 스킬도 아주 투박한 전형적인 빅맨, 그것도 블루워커로서의 플레이밖에 못하던 리드였으나, 서전트 점프 90cm의 폭발적인 점프만으로도 초창기 KBL에서 최상급 빅맨으로 뛰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당연하게도 부산 기아의 최인선 감독은 리그 2연패를 위해 클리프 리드와 재계약을 맺는다. 다음시즌(97-98) 시즌들어 각 팀들이 장신센터들을 대거 보강[8] 와중에도 리드는 여전히 경쟁력을 가진 빅맨이었다. 외국인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11순위로 뽑은 새 외인센터 저스틴 피닉스(195cm)가 정규리그에서 다소 헤매는 플레이를 보인데다 팀 에이스였던 허재는 부상에다 당시 팀 코칭스태프와의 불화까지 겹치며, 전대회 우승팀 부산 기아는 시즌 막판 5연패를 당하는 등 부진을 겪으면서 이상민-조니 맥도웰 콤비의 대전 현대는 물론 신생팀 창원 LG에도 밀려 정규리그 3위에 그치고 만다. 리드는 지난시즌에 비해 평균 득점은 다소 줄었으나 리바운드 수치가 증가(13.7개, 전체 2위)하는 등 골밑에서의 지배력은 여전했고, 정규리그 인천 대우와의 경기에선 무려 29리바운드를 올리며 이부문 역대 최다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9]

인천 대우와의 6강 플레이오프에서 부산 기아는 리드가 무릎부상으로 결장한 홈 2차전에서 졌지만, 이후 리드가 복귀하고 플레이오프 들어 180도 달라진 플레이를 보여준 센터 저스틴 피닉스까지 맹활약한 덕분에 인천 대우를 3승 1패로 가볍게 제치고 4강에 진출한다.

4강전 상대는 돌풍의 신생팀 창원 LG였는데, 이 때까지 잘 해주던 센터 피닉스가 갑자기 부상을 핑계로 태업을 하기 시작하면서 벤치멤버였던 조동기, 김유택이 출전해야 했고 아직 무릎부상 회복이 덜 되어 제 컨디션이 아니었던 리드는 홀로 골밑을 막아내야 했다. 피닉스가 또 다시 결장한 4차전 홈경기에서 리드는 18개의 공격리바운드를 포함해 30 리바운드를 올리며(24득점은 덤) 로버트 보이킨스(194cm)-박재헌(200cm)이 지키던 창원 LG의 골밑을 접수해버렸고 부산 기아는 2년연속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다.

가장 많은 농구팬들이 기억하는 97-98 시즌 KBL 챔피언결정전에서 부산 기아는 -- 트리오와 조니 맥도웰이 이끄는 대전 현대에 최종전적 3승 4패로 패하면서 기아자동차 시절부터 이어져오던 "기아왕조"의 종말을 맞게 된다. 준우승팀에도 챔피언결정전 MVP를 수상한 허재의 눈부신 투혼으로 더 많이 기억에 남는 시리즈이긴 했지만, 시리즈가 7차전까지 간 것은 당시 KBL 최강의 골밑으로 평가받던 대전 현대의 조니 맥도웰-제이 웹 콤비를 거의 혼자 맞서다시피하며 부산 기아의 골밑을 지켰던 리드의 활약 덕분이기도 했다. 챔프전 들어 저스틴 피닉스가 부상을 핑계로 태업을 지속한 탓에[10] 리드는 7차전 내내 거의 풀타임을 소화하며 말라깽이 센터 조동기, 김유택 등의 수비구멍까지 막아야했는데, 5차전에서 자신보다 10cm가 더 큰 제이 웹(201cm)를 앞에 두고 덩크를 꽂는 등 명장면을 연출하기도 했으나 결국 파워와 센스에서 우세했던 맥도웰의 활약을 막지 못했고 6,7차전을 연이어 내주고 말았다.

챔피언 결정전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최인선 감독을 대신해 신임감독으로 승격된 박인규 감독(전시즌 코치)은 클리프 리드에 대한 여전한 신뢰를 보여주며 리드 3시즌 연속 재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외인 드래프트 2라운드에서 뽑은 장신 센터 데릭 존슨(204cm)을 원주 나래로 보내면서 한때 리드의 라이벌이자 역시 원주 나래와 3년 연속 재계약을 맺었던 센터 제이슨 윌리포드(194cm)을 트레이드로 영입하는 강수를 띄운다. 리드-윌리포드라는 검증된 외인 듀오는 역시나 기대에 걸맞은 활약을 펼치며 허재마저 떠난 부산 기아를 정규리그 2위로 이끌었고, 특히 리그 1위 대전 현대와의 맞대결에서 3승 2패로 우세[11]를 보이며 챔피언 결정전을 기대하게 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 도중 센터 윌리포드와 식스맨 김유택이 연이어 부상을 당하면서 정작 챔프전에서 정상적인 플레이를 하지 못했고, 리드 혼자 평균 23.8득점을 올리며 분투했지만 대전 현대의 맥도웰-재키 존스 콤비에 밀리며 2년 연속 챔프전 패배를 막지 못했다.

3.2. 안양 SBS 스타즈 (1999-2000)

파일:클리프 리드2.jpg
1998-99 시즌 종료 후, 부산 기아 수뇌부는 2년 연속으로 우승에 실패한 코칭 스태프를 물갈이했고[12] 외국인 듀오 리드, 윌리포드와도 각각 결별했다. 발목 상태가 심각했던 윌리포드가 곧장 은퇴를 택한 반면, 리드는 KBL 트라이아웃에 신청서를 내었고 1999년 KBL 외국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4순위로 안양 SBS 스타즈의 지명을 받았고, 프레즈노 주립대 출신의 장신 데이먼드 포니(203cm)를 새 골밑 파트너로 맞게 된다. 99-00 시즌을 앞두고 안양 SBS는 청주 SK 나이츠 부단장으로 있던 김인건[13] 전 삼성전자 감독을 새 감독으로 임명하는데, 너무 오래 현장을 떠나있었던 탓인지 시즌 초반 이해할 수 없는 선수기용을 연발했고[14] 볼이 제대로 돌지 않는 엉망진창의 팀에서 파워 포워드 리드가 외곽까지 나와 패스를 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이 바람에 리드는 99-00 시즌 1라운드 첫 5경기에서 평균 5어시스트를 기록한다.) 이후 2라운드 들어 홍사붕이 다시 1번을 맡으며 팀은 4연승을 달리며 정상궤도로 올라오는가 싶었지만, 리드는 그간의 답답했던 상황들 때문인지 경기중 짜증을 내고 심판 판정에 자주 항의하는 등 부산 기아 시절엔 잘 보이지 않던 모습을 자주 보여주기 시작했고, 연승을 달리던 팀은 다시금 연패에 빠진다. 2라운드 중반 리드가 엄지손가락 부상을 당하면서 일시 대체선수로 퀸시 브루어(192cm)가 합류하는데, 리바운드를 책임지던 리드의 공백은 금세 드러났고 팀은 좀처럼 반등하지 못했다.

3라운드가 진행중이던 2000년 1월 12일 갑자기 뉴스에서는 "안양 SBS의 클리프 리드-데이먼드 포니 동반 퇴출"이라는 뉴스가 나왔다. 순박한 미소로 유명했던 리드가 팀 훈련에서 불성실한 태도를 보여주고 숙소에서 무단 이탈하기도 했다는 뉴스는 그동안 클리프 리드를 알았던 팬들에겐 믿기 힘든 소식이었지만, 결국 리드는 일시 대체선수였던 브루어와 완전 대체되어 4년간 뛰었던 한국 무대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리드-포니 콤비가 퇴출되고 득점형 외인 퀸시 브루어와 수비형 센터 데릴 프루(200cm)가 뛰기 시작한 리그 후반기부터, 안양 SBS는 이전과는 확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며 리그 5위에 올라 3년만에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았고, 이 바람에 클리프 리드는 국내 팬들의 기억 속에 여느 문제아 외국인 선수들과 같은 모습으로만 각인된 채 잊혀져버렸다.[15]

4. KBL 방출 이후

2001-02 시즌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에 다시 신청했지만 위의 이유로 반려되었으며 한때 사망설이 돌기도 했다.

2001년 멕시코 프로리그 LNBP의 Correcaminos Matamoros 팀에서 뛰며 18.5득점-10리바-1.5어시-1.9블록을 기록하며 여전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2002년엔 멕시코의 다른 리그인 CIEMBA의 Soles Jalisco에서 한시즌을 보냈고, 이후 미국 중소리그인 ABA의 Las Vegas Rattlers에서 뛰었다.

5. 커리어 스탯

5.1. 대학 시절

시즌 소속팀 학년 경기수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록 FG% 3P% 비고
91-92 뉴멕시코 주립 3 33 10.4 6.3 0.9 0.4 0.4 48.3 0.0 NCAA 토너먼트 16강
(Sweet Sixteen)
92-93 뉴멕시코 주립 4 30 11.0 5.9 1.2 1.1 0.5 49.6 0.0 NCAA 토너먼트 2라운드 (32강)

5.2. KBL

시즌 나이 소속팀 경기수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록 FG% 3P% 비고
97 27 부산 기아 21 22.4 10.7 2.1 2.1 1.2 59.1 33.3 챔프전 우승
97-98 27 43 17.7 13.7 1.5 1.0 1.6 56.0 0.0 챔프전 준우승
98-99 28 40 17.2 12.3 2.3 1.1 1.6 51.9 7.1 챔프전 준우승
99-00 29 안양 SBS 16 16.9 9.6 3.5 1.1 0.9 50.7 16.7 시즌중 방출

6. 관련 문서



[1] 05-06 시즌 이후 컨퍼런스를 이전하여, 2017년 현재 WAC(Western Athletic Conference) 소속이다.[2] 웃는 모습만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3] KBL 트라이아웃 당시 실측 키는 190.4cm였다.[4] NCAA의 학사관리는 역시 아주 타이트하기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NCAA는 선수, 지도자 모두에게 엄격하다. 관계자로부터 금전, 선물을 받아서도 안 된다.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 미식축구팀 코치가 소년을 성폭행하고 있음을 오래 전에 알았음에도 공개하지 않아 기록말살, 장학금 박탈, 벌금 등 중징계를 맞은 사례도 있다. 일부 유망주들은 고가의 선물을 대학 시절에 받아 졸업 후 팀의 승리 기록이 다 무효화(vacate)되는 사태도 발생했다.[5] 이때 2,3,4위는 각각 제럴드 워커(안양 SBS), 빈스 킹(수원 삼성), 칼레이 해리스(원주 나래)로 모두다 탄력이라면 한가락 하는 선수들로, 당시 관계자들이 외인들의 탄력에 얼마나 눈이 돌아갔는지 알수 있다. 점프력이 상대적으로 평범해보였던 버지니아 대학교의 스타 제이슨 윌리포드가 전체 11위, 득점기계 에릭 이버츠는 아예 드래프트에서 탈락했다가, 이후 추가 선발때 광주 나산 플라망스에 지명되기도 했다.[6] 90년대 농구대잔치 인기가 절정일 때, 대학 오빠들(서장훈, 전희철, 현주엽 등)이 노마크에서 보여주던 철봉 덩크, 작대기 덩크만 해도 오빠부대들이 자지러지던 시절이었다. 앨리웁이라 해봤자 고려대 전희철, 현주엽의 앨리웁 레이업 정도가 다였는데, 190cm가 겨우 넘는 리드가 NBA에서나 보던 앨리웁 덩크를 보여주니 팬들이 뒤집어질수 밖에 없었다. 이후 전희철이 1997년 아시아 올스타팀을 상대로한 국가대표팀 친선경기에서 문경은의 패스를 받아 한차례 멋들어진 앨리웁 덩크를 보여주긴 했다.[7] KBL 드래프트 2라운드 14순위 출신으로, 미주리 주립대 4학년때 팀내 어시스트 1위를 찍었던 스윙맨 출신이었으나 KBL에선 내내 센터로만 뛰었다. 포지션 변경에도 불구, 개막전에선 무려 16득점-17리바(!!)를 올렸고, 시즌 평균 17.1득점 9.1리바를 올리며 원년시즌 기준 Top 3급 센터로 꼽혔다.[8] 원년시즌 최우수 외국인선수였던 제이슨 윌리포드가 불과 한시즌만에 단신센터가 되어버릴 정도로 각팀들이 장신센터를 대거 뽑았다. 대표적인 선수가 대전 현대의 제이 웹(201cm), 수원 삼성의 존 스트릭랜드(200cm), 인천 대우의 알렉스 스텀(202cm) 등이다. 외국인 선수/역대 프로농구 항목 참조.[9] 현재 한 경기 최다 리바운드 기록은 11-12 시즌 울산 모비스 소속이던 테렌스 레더가 창원 LG전에서 세운 31리바운드다.[10] 다음 시즌 재계약에 특별 출전수당을 요구했다고 한다.[11] 2패 중 한번은 방콕 아시안게임 때문에 양팀 모두 강동희, 이상민이 없을 때였고, 또 한번은 리드가 부상이라 윌리포드 혼자 골밑을 지키던 경기였다. 풀전력으로 붙었을 땐 모두 부산 기아가 승리했다.[12] 그리고 부임한 게 리그 파괴자 박수교!![13] 1994-95 농구대잔치 플레이오프 8강전에서 상관타 사건을 사주했다고 알려진 그분;;[14] 멀쩡히 잘 뛰던 홍사붕을 후보로 밀어내고, 포워드 조신영(190cm)과 슈터 김상식을 포인트 가드로 기용했다.[15] 유명한 꼰대 감독이던 김인건 감독의 강압적인 통솔방식이 문제였다는 의견도 일부 있었지만 공론화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