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25 11:24:46

탐가

1. 개요2. 각 민족의 탐가
2.1. 탐가의 기원2.2. 튀르크의 탐가2.3. 몽골의 탐가2.4. 그 외 지역의 탐가
3. 탐가의 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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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탐가(Tamga)는 튀르크 민족 및 그들의 영향을 받은 문화권에서 사용하던 문장(그림)의 일종이다. 문장 하면 생각나는 유럽 쪽의 화려한 그림과 달리, 선으로 이루어진 추상적인 형태가 특징이다. 처음에는 가축에 찍어 넣어서 소유자를 표시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강력한 유목민 가문이 등장하고 유목 제국이 성립되면서 가문 문장 및 국장의 기능을 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문장학적으로 분석하여 가문 간의 관계를 알아내는 것도 가능하다.

2. 각 민족의 탐가

2.1. 탐가의 기원

튀르크인들이 대대적으로 탐가를 사용하기 전부터, 문양을 만들어 개인이나 가문의 상징으로 삼는다는 아이디어는 세계 곳곳의 문화권에서 나타났다. 후대에 유목 문화권으로 편입되는 지역들 곳곳의 선사시대 암벽화에서 탐가와 비슷한 추상적 문양이 드러나지만, 최초로 이러한 문양을 국가 단위로 사용하고 기록으로 남긴 국가는 정주민인 그리스인과 유목민인 스키타이인들이 연합하여 세운 보스포루스 왕국이었다. 보스포루스 왕국 후기의 티베리우스-율리우스 왕조 국왕들은 점차 공중분해되어가는 국가를 통합시키기 위해 스키타이 문화를 수용했는데, 이 과정에서 스키타이인들이 사용하던 원시적인 탐가와 비슷한 문양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러한 스템 서쪽의 '추상적 문양'이 현재까지 내려오는 튀르크인들의 '탐가'와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유목민들은 활동 범위가 넓고 상호간의 교류도 많았던 만큼, 탐가 문화가 형성되는 데에 스키타이인들의 문양 문화가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하고 추정만 할 수 있을 뿐이다.

2.2. 튀르크의 탐가

고대 튀르크어 문헌 기록에서 이미 탐가라는 단어가 식별된다. 그 뜻은 '말, 소 및 기타 가축에 찍는 낙인'이었다. 하지만 튀르크인들이 탐가를 사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상술했듯이 강력한 가문의 문장이나 국장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돌궐 제국과 키르키스인들의 장례 부장품 유물에서 탐가가 식별되었고, 그 덕분에 현재 유명한 옛 튀르크 가문들의 탐가가 알려져 있다. 돌궐 제국하자르 칸국을 지배했고 카라한 칸국도 지배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시나 가문은 산양 모양의 탐가[1]를, 아틸라훈족의 직계 후예라 주장한 둘로 가문은 두 짧은 직선 사이에 Y자가 들어간 탐가를, 셀주크 투르크 및 그 파생 국가들을 세운 셀주크 가문은 팔각별 모양의 탐가를 사용했다.

11세기 즈음부터 튀르크인들이 각지에 정착하여 정주민으로 전환하면서 탐가는 하층민들의 것부터 차근차근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근본이 유목 중 초원에서 다른 가문의 가축들과 섞여서 잃어버리는 일을 막기 위해 고안된 문장인데, 농사 및 상업에는 탐가를 쓸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지배층에서만 가문 문장의 역할로 남았다. 나무위키에 등재되어 있는 중세 튀르크계 왕조에 관련된 문서들에 실려 있는 국기들은, 대부분 각국의 왕조 가문의 탐가를 묘사한 것이다. 흑양 왕조백양 왕조 등의 중세 후기 튀르크계 국가는 공식적으로 왕가의 탐가가 찍힌 깃발로 군기를 통일하고 화폐에 왕가의 탐가를 찍어 넣는 등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티무르도 자신 가문의 동그라미 3개 모양의 탐가를 군기로 사용했다.

반면,아나톨리아 반도로 들어간 룸 셀주크계 튀르크 가문들은 좀 더 일찍 탐가를 포기했다. 이들은 동로마 제국 문화에 강한 영향을 받아, 전통 탐가가 아닌 동로마풍의 문장으로 갈아탔다. 많은 가문들은 이때 오랜 시간 동안 무슬림의 상징으로 기능하던 육망성을 가문의 문장으로 채택했다. 단 한 가문만 더 오랜 기간 동안 탐가를 사용했는데, 그들이 바로 오스만 가문이었다. 오스만 가문은 활에 화살을 채운 모양의 탐가를 14세기 후반까지 사용했다. 소수 학설이지만, 오스만 제국이 사용하여 현대 튀르키예까지 이어지는 월성기가 오스만 가문의 탐가를 단순화시킨 모양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꽤나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 월성기에는 별이 없었기 때문이다.

2.3. 몽골의 탐가

튀르크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몽골인들도 일찍이 탐가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여러 기라성 같은 유목민들이 나타났다가 스러져가는 동안 몽골인들은 통일되지 못하고 분열되어 여러 타 민족들의 지배를 받았기에 오래된 탐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최초로 식별되는 탐가는 몽골 제국의 탐가다. 여러 기록이나 유물을 통해, 초기 몽골 제국 주요 인물들의 탐가가 대부분 알려져 있다. 칭기즈 칸은 한글 '오' 모양의 탐가를, 오고타이 칸은 좌우대칭한 S자 모양의 탐가를, 귀위크 칸은 두 동그라미가 세로선으로 이어진 모양의 탐가를 사용했다. 몽골 제국에서 대칸의 탐가는 주로 화폐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몽골인들은 튀르크인들보다 같은 탐가를 조금씩 변형해서 쓰는 일이 잦아서 현대 학자들이 식별하는 데 골머리를 앓고 있다.

몽골은 현대에도 적잖은 유목민들이 있기 때문에 탐가를 실제로 사용하고 있다. 현대 몽골어로는 '타마가'라고 한다. 쇳조각을 굽혀서 탐가용 도장을 만들고 이를 불에 달궈서 가축의 다리에 찍는데, 도장을 얼기설기 만들기 때문에 정교하지는 않다고 한다. 울란바토르에 있는 국가문장기념비에는 몽골 전역에서 수집한 168개의 탐가가 조각되어 있어 편하게 알아볼 수 있다. 또 '타마가'라는 단어는 도장이나 서양의 문장 등도 나타내는 단어가 되어, 현대 몽골의 국새도 타마가라고 부른다. 모양은 탐가와는 다르지만, 어쨌든 탐가를 국장으로 사용하는 셈이다.

2.4. 그 외 지역의 탐가

중세에 튀르크계 민족들에게 자주 침략받았던 캅카스 지역 민족들도 목축을 많이 하는 특성 상, 탐가가 유용하다고 생각해 받아들였다. 현대에도 체르케스인들은 가문마다 하나씩 탐가를 가지고 있다.

하자르 칸국과 자주 싸웠던 키예프 루스도 탐가를 수용하였다. 스뱌토슬라프 1세를 시작으로 류리크 왕조 초중기 구성원들은 모두 개인 탐가를 사용했다. 모든 이들의 탐가는 다른 모양이었으나 크게 두 갈래 또는 세 갈래의 창 모양을 베이스로 하여 변화를 준 모양이었다. 그 중에서 블라디미르 1세의 탐가는 먼 훗날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재발굴되어, 1991년 소련이 붕괴한 후 독립한 우크라이나의 국장으로 채택되었다. 이름은 '삼지창'이라는 뜻의 트리주브라고 한다. 즉, 몽골이 국가의 상징 문양을 탐가라 부르는 유일한 현대 국가라면 우크라이나는 부르는 호칭은 다르지만 실제 탐가를 국장으로 사용하는 유일한 현대 국가인 셈이다.

3. 탐가의 잔재

탐가라는 단어는 변형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러시아어벨라루스어에서는 관세를 의미하는 단어 '타마쥐야'로 변화했는데, 이는 몽골-타타르의 멍에 시기에 화폐나 국가 인증 서류에 탐가가 사용되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무굴 제국의 국어 우르두어에서 탐가는 '훈장'이라는 뜻으로 변화했다. 4등급 전시 훈장인 탐가-이-주라트나 4등급 평시 훈장인 탐가-이-임티앗, 5등급 평시 훈장인 탐가-에-키드마트 등 각종 훈장의 이름에 탐가가 들어간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오래 받은 이집트에도 탐가의 잔재가 남았는데, 현지 발음으로 '담가'라고 한다. 이집트 아랍어의 담가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첫번째 뜻은 '정부 우표'이다. 이집트에서는 편지에 붙이는 우표 말고도 운전면허증이나 각종 공인 계약서 등의 공문서에 사서 붙여야 하는 정부 우표가 따로 있는데, 이를 뜻한다. 두번째 뜻은 금이나 보석 등의 진품 감정서다. 둘 다 오스만 제국 시절, 오스만 가문의 탐가가 들어갔었던 것들이라 그대로 담가라는 이름을 물려받은 것이다.




[1] 탐가와 함께 늑대 문양도 별개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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