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01:09:30

토니 쿠코치

토니 쿠코치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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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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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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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1989 1991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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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1997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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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83 1983-84 1984-85 1985-86 1986-87
바비 존스 케빈 맥헤일 케빈 맥헤일 빌 월튼 리키 피어스
1987-88 1988-89 1989-90 1990-91 199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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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쿠코치
헌액 연도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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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쿠코치
Toni Kukoč
출생 1968년 9월 18일 ([age(1968-09-18)]세)
유고슬라비아 SFR 크로아티아 SR 스플리트
국적
[[크로아티아|]][[틀:국기|]][[틀:국기|]] |
[[미국|]][[틀:국기|]][[틀:국기|]]
신장 208cm (6' 10")
체중 107kg (235 lbs)
포지션 스몰 포워드 / 파워 포워드[1]
드래프트 1990 NBA 드래프트 2라운드 29순위
시카고 불스 지명
소속 팀 KK 유고플라스티카[2] (1985~1991)
트레비소 SPA (1991~1993)
시카고 불스 (1993~2000)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2000~2001)
애틀랜타 호크스 (2001~2002)
밀워키 벅스 (2002~2006)
등번호 7번 - 시카고 / 필라델피아 / 애틀랜타 / 밀워키 / 크로아티아 농구 국가대표팀

1. 개요2. 선수 시절
2.1. 유럽 리그2.2. NBA
3. 은퇴 후4. 수상 내역5. 플레이스타일6. 여담

[clearfix]

1. 개요

유럽 리그와 NBA에서 뛰었던 크로아티아 출신의 전 농구 선수.

6' 10"(208cm)의 장신 포워드이면서 정교한 슈팅과 볼 핸들링, 패싱 능력 등을 고루 갖추어 공격력이 매우 출중했다.

유럽 최고의 선수로 이름을 날리다가 시카고 불스 소속으로 NBA에 데뷔했으며, 이후 리그에서 수준높은 식스맨으로 자리잡았다.[3]

2. 선수 시절

2.1. 유럽 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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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코치는 1985년 유고슬라브 리그의 유고플라스티카 스필트에 입단한다. 신인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쿠코치는 1987년 유고슬라비아 농구 국가대표로 출전한 세계주니어 선수권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거머쥔다.

이 때부터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기 시작한 쿠코치는 1988년 팀의 유고슬라브 리그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하고 1988년 서울 올림픽에도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로 출전해서 은메달을 따는 데 기여한다.

1989년에는 팀의 유로리그 우승과 유고슬라브 리그 2연패, 유로바스켓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또한 이 활약으로 쿠코치는 크로아티아 올해의 스포츠맨에 선정되었다.

1990년, 쿠코치는 팀이 유로리그 2연패를 달성하는 데 주역으로 맹활약하며 유로리그 파이널 MVP에 선정된다. 또한 유고슬라브 컵 우승, 유고슬라브 리그 3연패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이런 맹활약으로 FIBA에서 개최한 세계선수권 챔피언십에 크로아티아 농구 국가대표로 출전해 팀의 우승을 이끌으며 대회 MVP로 선정되었으며, 미스터 유로파 올해의 선수상과 유로스카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고 전년도에 이은 크로아티아 올해의 스포츠맨에 선정되는 등 최고의 해를 보낸다. 전부터 쿠코치의 활약을 눈여겨보던 시카고 불스는 이 해 드래프트에서 쿠코치를 지명했고, 1992-1993 시즌이 끝나면 불스에 데뷔시키는 조건 하에 쿠코치와 계약에 성공했다.

1991년, 쿠코치는 팀의 유고슬라브 리그 우승 4연패, 유고슬라브 컵 2연패에 기여하고 유로바스켓 우승과 유로리그 3연패에 주역으로 활약하며 유로바스켓 MVP와 유로리그 파이널 MVP에 선정되었다. 미스터 유로파 올해의 선수상,유로스카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또한 3년연속으로 크로아티아 올해의 스포츠맨에 선정되고, FIBA에서 선정한 올해의 베스트 선수 50인에 선정되었다. 쿠코치는 이 시즌 도중 이탈리아 리그의 트레비소 SPA로 이적했다.

1992년, 쿠코치는 팀의 이탈리아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유고슬라비아의 해체 이후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크로아티아 국가대표로 출전해 은메달을 따냈다.[4] 비록 은메달이었지만 쿠코치는 NBA 스카우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때 드림팀은 올림픽 본무대 8경기에서 평균 43점차로 압승을 거뒀는데, 점수차가 35점차 이내로 난 경기는 단 두번이었고 둘 다 상대가 크로아티아였다. 또한 결승전에서 32점차는 드림팀을 상대로 한 최소 점수차였다. 즉, 쿠코치가 이끄는 크로아티아는 그나마 드림팀을 괴롭혔던 유일한 팀이었다. 참고로 아비다스 사보니스란 또 다른 유럽 레전드가 이끌던 리투아니아는 드림팀에게 4강에서 53점차로 뭉개졌다. 이후 미스터 유로파 올해의 선수상도 수상했다.

하지만 쿠코치 본인에게 드림팀과의 상대는 결코 좋지만은 않은 추억이다. 쿠코치를 결승에서 상대한 찰스 바클리칼 말론은 각각 그저 "유럽 내에서만 최고의 선수다. 별로 대단한 실력이 아니었다"며 쿠코치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는데 바로 그의 상대가 그 당시 최고의 수비수이며 NBA 역사를 놓고봐도 역대급 수비수들로 여겨지는 마이클 조던스카티 피펜. 이들의 분노를 사게 된 계기는 공교롭게도 그가 조던과 피펜의 친정팀인 불스의 단장 제리 크라우스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스카티 피펜 문서에도 잘 나와있지만 그는 확실히 조던의 조력자로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크라우스 단장은 첫 계약을 근거로 그에게 걸맞은 대우를 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외부에 관심을 돌려 쿠코치를 엄청나게 높이 평가하면서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드림팀 다큐멘터리에서는 좋게 표현해서 조던이 "그냥 사랑받는 아들들이 아버지가 다른 집 자식을 더 좋아하는것에 질투가 났다" 정도로 포장했지만 이때 조던과 피펜의 분노는 상당해서 쿠코치를 묵사발 만들기로 한 것.[5] 옆에서 지켜보던 캡틴 매직 존슨은 조던과 피펜이 서로 쿠코치를 맡겠다고 다퉜고, 그들의 눈에는 살기가 돌았다고 회술한다.

결국 전반에는 피펜이, 후반에는 조던이 전담마크한 쿠코치는 영혼까지 탈탈 털리며 부진했고 심지어 지켜보던 동료들도 "야, 쟤네 너한테 왜 그러냐?"고 물었다고 한다. 영문을 알리가 없는 쿠코치는 "글쎄...... 이게 미국 농구인가보지."라고 답했다고....... 경기 내내 좌절감을 겪는 쿠코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NBA 역사에 수비수로서도 역대급으로 회자되는 2인이 작정하고 덤비는데 무엇을 해볼수 있다는 말인가? 올림픽에서 미국을 상대로 거둔 쿠코치의 성적은 두 경기동안 20점 6리바운드 14 어시스트 2스틸 4블럭 10 턴오버다. 다소 평범해 보이긴 하는 성적이지만 진짜 피펜과 조던이 이를 갈았던 첫 경기에서 쿠코치의 성적은 처참했다. 조던, 피펜과의 첫 경기에서 쿠코치는 4득점 1 리바운드, 5 어시스트, 2스틸 4블럭 그리고 7턴오버(!)였으며 심지어 야투율은 11개를 던져 2개만 성공시켰을 정도 하지만 2번째 경기에서는 괜찮은 경기력을 보여주면서 조던에게로 부터 경기후 인터뷰에서 어느정도 인정받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1993년에는 팀의 이탈리아 컵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유로리그 파이널 MVP에 선정되었다. 1992-93 시즌이 끝나자 쿠코치는 예정대로 미국 NBA시카고 불스에 입단했다. 하지만 정작 마이클 조던스카티 피펜은 쿠코치의 입단을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당시 결승에서 쿠코치의 크로아티아를 개발살낸 기억도 있고, 아무리 잘해봤자 NBA 레벨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2. NBA

2.2.1. 시카고 불스

쿠코치가 입단할 당시 NBA는 유럽 선수들의 가능성에 대해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당시 NBA와 다른 리그들은 기술차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피지컬 차이가 있었고, 이 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게 바로 1992년 올림픽. 그러나 유러피안들 중에서도 데틀레프 슈렘프, 릭 스미츠, 아비다스 사보니스, 블라디 디박, 드라젠 페트로비치, 게오르그 뮤레산 등 주목받는 선수들이 있었으며, 이 중 디박은 어린 나이에 NBA로 넘어가 좋은 활약을 보였고, 사보니스는 당시 소련, 이후 동유럽의 상황 때문에 1990년대 중반에 몸이 망가져서 NBA로 오게 되지만 농구 전설과 전문가들로부터 엄청난 기대를 받았다.

그전에도 유럽 출신 NBA 선수들은 있었지만, "NBA 스타"라고 불릴만한 위상을 처음으로 갖게 된 선수는 디박과 페트로비치였다. 특히 페트로비치는 1992, 93년에 연속으로 20점을 넘기고 93년엔 올 NBA 써드팀에 오르며 슈퍼스타에 근접한 위상을 가졌지만, 안타깝게 사고로 인해 29세 나이로 요절하게 된다. 디박도 데뷔 시즌 첫 해인 1990년에 올 루키 퍼스트팀에 오르고 2001년에 올스타에 선정되기까지 하였다.

한편 시카고 불스의 GM 제리 크라우스는 쿠코치가 어렸을때부터 그에게 주목을 했다. 크라우스는 선수를 볼 때 큰 손, 긴 팔, 뛰어난 기동력, 높은 농구 이해도 등 뚜렷한 취향이 있었는데, 이 모든 걸 완벽히 충족하는 쿠코치에게 쏙 반해버린 것. 크라우스는 쿠코치가 유럽 최정상급 선수 반열에 오른 1990년에 2라운드 픽으로 그를 선점했지만 쿠코치는 NBA행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크라우스, 그리고 불스 구단주 제리 라인스도프는 계속 쿠코치를 노렸고 심지어 90-91시즌에는 쿠코치가 언제든 합류할 수 있게 샐러리캡 여유분을 1백만 달러 이상 비워두느라 벤치스코어러 보강 포기 및 여러 어그로를 끌어 선수들의 원성을 샀다. 심지어 시즌 중 구단주와 GM이 쿠코치 경기를 보러 유럽으로 넘어가 주전 스몰포워드인 스카티 피펜의 어그로를 끌 정도.[6] 결국 쿠코치는 불스행을 결심하게 된다.

불스에 입단한 쿠코치는 1993-94시즌 직전 아버지의 죽음로 인해 돌연 은퇴를 선언한 조던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입단 첫 해인 93-94 시즌부터 팀의 주축 선수로 뛰었다.

처음에는 수비도 평균 이하였고, 늘 볼을 오래 소유했을뿐만이 아니라 종종 트라이앵글 오펜스에서도 헤메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쿠코치는 팀에 적응을 하기 시작했고 그해 NBA 올 루키 세컨드 팀에 포함되었으며 시즌 평균 10.9득점을 기록한다. 물론 유럽에서 뛰었을때에 비하면 초라한 성적이었지만, 그래도 플레이스타일이 다른 NBA에 어느정도 적응이 되었다고 평가받았다.

그러나 쿠코치에 대한 기대는 "적응" 정도가 아니었기에 실망스럽다는 반응이 많았다. 사실 쿠코치는 큰 키 덕분에 착각하기 쉽지만 엄연히 따지면 쿠코치가 선호하는 포지션은 '가드' 내지는 포워드다. 덕분에 쿠코치를 맨투맨 수비에서 활용법에 에로사항이 꽃피는데, 맨투맨에서 그나마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스몰포워드 수비를 맡기고 공격에서 프리롤을 줘야하는데, 시카고는 다들 알다시피 스몰포워드에 레전드 스카티 피펜이 있고 공격에서는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운영하는 팀이다. 트라이앵글에서 보통 PG는 역할이 극히 제한되며 심지어 마이클 조던조차 어느 정도 제약을 받았다.[7]

또한 피펜이 아무리 1번에서 5번까지 막을 수 있다지만 정말 경기 내내 파워포워드를 막는 건 재능 낭비가 된다. 기본적으로 외곽 수비수인 피펜을 쿠코치를 배려한다는 이유로 4번으로 올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국 쿠코치는 어울리지도 않는 파워포워드를 소화하며 골밑 수비에서 당연히 재앙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밑에도 나오지만 불스에서 쿠코치는 자기가 가진 재능에 비해 극히 일부인 득점 지원만을 주로 보였다. 그가 유럽 최고의 가드 겸 포워드 중 하나였단 걸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 쿠코치와 쌍벽을 이룬 드라젠 페트로비치는 1993년 올 NBA 서드팀에 뽑히고, 포지션은 다르지만 동갑내기인 블라디 디박이 2001년 올스타에 뽑힌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사실 쿠코치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라 다재다능함이 빛나는 선수로 슈팅/돌파/리딩/리바운드 등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는 만능형 선수였다. 실제로 그가 NBA로 넘어오기 전 베네통 트레비소에서 남긴 기록을 보면 이탈리아 리그에서 득점 5위 어시스트 2위 스틸 6위 삼점슛 성공률 4위 등 다양한 부문에서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고, 1991년 피바 유러피언 챔피언쉽에서는 이미 NBA에서 주전급 센터로 활약하던 블라디 디박이나 NBA에서 한때 평균 20점 10리바운드 가까이 올렸던 디노 라자 등을 제치고 평균 19점으로 득점 1위에 올랐었다. 또한 수비도 특급은 아니었지만 나쁜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억지로 파워포워드로 출장하게 된 NBA에서는 수비가 완전 구멍 수준이 되었고, 트라이앵글 오펜스 때문에 리딩도 공격롤도 제약을 받아서 공격에선 그냥 캐치 앤슛밖에 할게 없게 되었다. 다양한 방법으로 득점과 리딩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선수를 차포 다 떼고 슛만 시킨 꼴. 이러니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다음 해인 1994-95시즌, 쿠코치는 1경기를 제외하고 시즌 전경기에 출전해 팀내 2옵션을 맡아 시즌 평균 15.7득점을 기록했다. 또한 시즌 후반 조던이 돌아오면서 쿠코치는 자신이 오랫동안 존경하던 조던과 같이 경기를 뛰게 되었다.

1995-96시즌, 마이클 조던의 복귀와 데니스 로드맨의 영입으로 쿠코치는 식스 맨 역할을 맡아 조던, 피펜에 이은 제 3의 공격 옵션으로 활약하며 시즌 평균 13.1득점을 기록하며 팀내 득점 3위에 오른다.[8] 이 해 식스맨으로 맹활약한 쿠코치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NBA 올해의 식스맨 상을 수상했으며 소속팀인 불스는 72승 10패로 NBA 역사상 한 시즌 최다승 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다.

1997-98시즌 쿠코치는 시즌 평균 13.3득점을 기록하며 조던과 피펜에 이은 제 3의 공격옵션이자 식스맨으로 활약한다. 그러나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조던의 은퇴, 피펜이 휴스턴 로키츠로 이적, 로드맨의 팀 이탈, 그리고 필 잭슨 감독의 사직 등으로 불스의 에이스 역할을 맡게 되었다.

1998-99시즌, 마지막 춤사위가 끝난 후 불스 왕조의 주역들이 사라지자 드디어 제리 크라우스의 구상대로 불스의 에이스 자리는 쿠코치에게 넘어왔다. 쿠코치는 이 해에 시즌 평균 37.6분, 평균 18.8득점을 기록하며 외로운 에이스로 활약했다. 하지만 조던도, 피펜도, 필도 없는 불스는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고 이렇게 혼자 고군분투하던 쿠코치는 99-00 시즌 불스가 팀 재정비에 나서면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로 이적했다.

2.2.2. 그 이후

필라델피아로 이적한 쿠코치는 시즌 전 앨런 아이버슨과 함께 팀의 주축으로 활약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하지만 쿠코치는 아이버슨과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했을 뿐만이 아니라 불스 시절보다 성적이 더 떨어졌다.[9] 이후 쿠코치는 저니맨이 됐다. 애틀랜타 호크스밀워키 벅스를 거친 후 부상으로 2006년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

3. 은퇴 후

은퇴 후 미국에 정착한 쿠코치는 골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고 2011년 크로아티아 전국 아마추어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그는 현재 고문직으로 시카고 불스에서 일하고 있다. 아들인 마린 쿠코치는 고등학교에서 농구를 했으며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진학했고, 딸 스텔라 쿠코치는 마이애미 대학교에서 배구를 하고 있다고 한다. 2021년 9월 11일 국제위원회 선출 자격으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쿠코치의 입성 당시 조던이 직접 와 축하를 했다.[10]

4. 수상 내역

수상 내역
NBA Champion 3회 (1996-1998)
NBA Sixth man of the year (1996)

NBA ALL-Rookie Second team(1994)
유로리그 우승 3회 (1989, 1990, 1991)
FIBA 유로바스켓 우승 2회 (1989, 1991)
유고슬라브 리그 우승 4회 (1988, 1989, 1990, 1991)
유고슬라브 컵 우승 2회 (1990, 1991)
이탈리아 리그 우승 (1992)
이탈리아 컵 우승(1993)
크로아티아 올해의 스포츠맨 3회 (1989, 1990, 1991)
FIBA 세계 남자 농구선수권 MVP (1990)
유로리그 파이널 MVP 3회 (1990, 1991, 1993)
미스터 유로파 올해의 선수상 4회 (1990, 1991, 1992, 1996)
유로스카 올해의 선수상 5회 (1990, 1991, 1994, 1996, 1998)
FIBA 유로바스켓 MVP (1991)
FIBA 선정 50인의 위대한 선수 (1991)
1988 서울 올림픽 은메달 (유고슬라비아)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은메달 (크로아티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21)

5. 플레이스타일

NBA 기준으로도 센터급 신장인 6-10(208cm)의 장신임에도[11] 불구하고 포지션은 스몰 포워드, 그것도 동시대의 스카티 피펜처럼 외곽에서 주로 뛰면서 게임리딩도 같이 하는 포인트 포워드에 가까웠다.

그가 실질적인 전성기를 달렸던 1990년대 초중반까지 유럽에서 뛰던 모습, 그리고 드림팀을 92 올림픽에서 상대할 때 경기 모습을 보면 쿠코치는 포인트 가드처럼 볼을 운반하고 게임 리딩을 했다. 실제로 그는 7피트에 가까운 키에도 가드로 분류되었다.[12] 그가 NBA로 처음 올 당시 그의 가장 큰 장점은 패스 능력이었으며 이때문에 "웨이터", "백인 매직 존슨"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불스 합류 초기에 고생했던 이유 중 하나가 그를 파워포워드로 기용했기 때문인데, 키는 센터만큼 커도 몸무게가 가볍고, 무엇보다 한번도 골밑 요원으로 뛴 적이 없는 선수를 파워포워드로 쓰니 잘 뛸리가 없다.[13] 1994년 당시 시카고 트리뷴의 유명 기자 샘 스미스는 BJ암스트롱을 트레이드하고 토니 쿠코치를 주전 포인트가드로 올리자면서, 포인트가드야 말로 쿠코치의 재능을 가장 살릴 수 있는 포지션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14]

마이클 조던호레이스 그랜트가 빠진 1994-95 시즌부터는 스카티 피펜에 이어 팀내 No.2 옵션이었고, 1994-95 시즌 도중 조던이 합류한 뒤에는 팀내 No.3 옵션이긴 했지만 중거리 슛이 기복이 매우 심했던 피펜에 비해 가끔 피펜을 제치고 No.2 옵션을 맡는 경우도 있었다. 쿠코치는 데니스 로드맨의 합류 이후 스타팅 멤버에서 제외되어 경기당 25-30분 정도 출장하는 식스맨으로 활약했는데, 조던/피펜 둘 중하나가 게임에서 빠지는 경우에는 2옵션 및 제한적인 게임 메이킹 롤을 맡기도 했다. 시카고 불스가 쓰는 트라이앵글 오펜스는 포인트가드의 역할이 제한적인 팀이라[15] 쿠코치 역할은 벤치 스코어러 및 보조 핸들러 정도에 그쳤다. 이때 그는 전성기가 완전히 지난 론 하퍼나 애시당초 주전급이 아니었던 룩 롱리보다 뛰어난 선수였지만, 주전에서 하퍼를 빼자니 가드수비에 공백이 생기고[16] 롱리를 빼자니 골밑에 세워둘 센터가 없으니 쿠코치가 벤치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17]

진짜로 가드처럼 뛰었던 유럽과 달리 NBA에서, 그리고 불스라는 이미 완성된 시스템 하에서 그는 패싱 센스가 뛰어난 팀내 2-3의 득점원 정도로 제한적인 역할을 맡는데 그쳤다. 물론 특유의 천재성을 살려 폭발적인 득점으로 팀을 이끈 적도 있지만, 쿠코치의 플레이메이킹이 주요하게 기능할 수 없는 환경에서 뛰었기 때문에 가진 재능을 온전히 발휘하진 못했던 셈. 물론 그럼에도 팀내 최주요 식스맨이자 조던, 피펜, 로드맨에 이은 4인자 격은 되는 선수였고, 특유의 다재다능함 덕분에 조던, 피펜, 로드맨, 하퍼, 롱리 등 주전들이 벤치에 들어가거나 결장하는 등 코트를 비운다면 최우선적으로 투입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수비. 쿠코치는 본인의 수비 역량 자체도 떨어지지만 불스에서는 수비코트에서의 포지션 자체가 상당히 애매했다. 신장은 클지언정 체중이 낮고[18] 힘이 떨어져 4~5번 수비에 적합하지 않고, 퀵니스는 뛰어나지만 사이드스텝은 그리 빠르지 않아 1~2번 수비에도 맞지 않았다. 즉 그나마 어울리는건 3번 수비인데, 이미 피펜이라는 역대 최고급 수비력의 스몰포워드가 있는 상태에서 쿠코치가 3번 수비를 전담하긴 애매했던 것. 4번에게도 내외곽을 오가는 수비를 요구하는 현대농구라면 피펜이 주포지션을 4번으로 가져가도 좋았겠지만, 당시 4번은 뒷선 수비와 리바운드 가담이 최우선 요소였기 때문에 피펜을 파워포워드로 쓰는건 재능낭비에 가까웠다.

안타깝지만 이 문제 때문에 체감되는 위력과 스탯 사이에 거리가 있고, 후대로 갈수록 기량 자체가 과소평가될 가능성이 높은 선수이기도 했다. 일단 스탯이 보여주는 것처럼 불스 왕조에 대한 기여도 자체는 스타급에 미달하는, 훌륭한 롤플레이어 정도였던 것이 맞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으로 불스 시스템에 그가 안 맞았던 것이 원인으로, 프리롤로 다재다능하게 뛰었어야할 그를 모션 오펜스인 트라이앵글에서 뛰게했으니 맞질 않았던 것. 쿠코치는 그럼에도 가끔씩 30점 이상씩 퍼붓거나 소나기처럼 3점을 꽂아넣는 등 맹활약을 해냈지만, 이 때문에 NBA 기준으로는 기복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모션 오펜스에서 저런 역할에 가장 안 맞는 다재다능한 선수가, 모션 오펜스를 쓰는데다가 다재다능한 슈퍼스타가 둘이나 있고[19][20] 수비를 중시하는 팀에서 뛰었으니 안 맞을 수 밖에 없었던 것. 물론 그렇다고 당시 기준으로 NBA보다 훨씬 떨어지는 수준의 유럽 리그에서 온 쿠코치를 위해 잭슨이 검증된 시스템을 버리거나, 쿠코치보다 훨씬 공격력이 뛰어난 조던이 쿠코치를 위해 자신의 롤을 버릴 이유도 없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또한 조던은 영리한 선수였기에 쿠코치가 핫핸드를 보여주고 있으면 그에게 공을 양보하기도 했다.[21] 즉, 시스템에 안 맞는 쿠코치를 변칙적으로나마 기용할 수 있는 잭슨, 팀농구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조던과 함께 했던 불스 시절 쿠코치는 상황을 감안하면 최선의 결과인 것은 맞지만, 그 상황 자체가 본인이 안 맞았던 것이 문제였다.

이 때문에 쿠코치의 실력을 직접 본 팬들은 그가 얼마나 뛰어났었고,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어 기복이 심했을 뿐이란 걸 알지만, 결국 스탯으로 남은 것은 저 정도의 기록 뿐이라 갈수록 과소평가받을 가능성이 높은 선수이다. 게다가 위에 언급했듯이 본인 실력과 별개로 (스타일 문제긴 했지만) 실제로 불스 3연패에 기여한 바가 '훌륭한 롤플레이어' 정도에 그쳤던 것이 맞기도 하다. 위에서 그의 기복에 대해 얘기했지만, 쿠코치 위주로 짜여진 공격에선 슛이 안 터지면 돌파로, 이것도 막히면 리딩 위주로 풀어갈 수 있는게 그의 스타일이었다.[22] 즉 공격을 주도하는 선수였다면 기복 문제가 큰 문제로 적용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불스에서 그에게 요구하는 건 주로 슈팅이었기에 문제로 작용한 것이다. 올스타, 어쩌면 그 이상이 됐었을지도 모르는 선수가 특급 식스맨급에 그쳤으니 팬들이 "불스 아닌 다른 팀에 갔으면 어땠을까" 아쉬워하는 것.

가정일 뿐이지만 쿠코치가 만약 그의 약한 수비력을 가려줄 수 있는 지역방어가 재도입된 2000년대 NBA에서 뛰었다면 스타급으로 성장했을 가능성도 있다. 예전과 달리 특정 선수의 수비 약점을 시스템으로 커버해 줄 수 있고, 능력만 된다면 포워드나 센터에게 볼핸들러 및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거부감없이 맡기는 시대이니 만큼 더 활약할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만약 현대 농구에서 활약한다면 다재다능하고 슛이 가능한 4번 자리에서 출장하며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맡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과거의 4번이 전투적으로 골밑 경합에 임하는 포지션이었다면, 현대의 4번은 핸들링과 리딩이 가능한 포인트 포워드, 장신 3번에 가까운 윙4, 슛 레인지가 긴 스트레치4 등 여러모로 다양화가 이루어져 쿠코치가 활약할 여지가 많은 포지션이 되었기 때문. 혹은 3번 자리에서 출장해 포인트포워드가 되거나, 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진짜 포인트가드를 맡았을 수도 있다.

수비와 골밑 경합 역시 현대의 4번은 90년대처럼 치열한 박스아웃과 골밑 싸움을 하기 보단, 오히려 쿠코치가 가진 기동성과 퀵니스 등을 요구받는 시대이니 만큼 쿠코치의 웨이트와 골밑 무게감의 부족이 그리 약점으로 부각되지는 않을 것이다. 기존의 4번들이 5번 포지션과 함께 '빅맨'으로 묶였다면, 2010년대 후반 ~ 2020년대의 4번들은 사실상 '중장신 3번'에 가깝게 변화했기 때문. 4번 포지션의 평균적인 기동성과 활동량이 매우 상향된 대신 피지컬(힘, 높이)로 쿠코치를 압도할 4번은 오히려 줄어든 셈이고, 전반적으로 다재다능해진 대신 골밑의 기본기에 있어선 과거의 4번들처럼 충실하진 않기 때문에 쿠코치의 골밑 경합에 대한 부담이 상당히 줄어들었을 것이다.[23] 이러나저러나 시대를 잘못 타고난 선수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다.[24]

6. 여담

  • 불스 입단 당시에 쿠코치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던 피펜과 갈등이 있었는데,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1993-94시즌 닉스와의 컨퍼런스 준결승 4차전. 당시 스코어가 102 대 102로 팽팽히 맞서던 상황에서 1.8초가 남은 상황이었다. 필 잭슨 감독은 쿠코치에게 마지막 슛을 맡겼고 이에 피펜은 펄쩍 뛰며 경기 출전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러든 말든 쿠코치는 슛을 성공시키며 불스는 4차전 승리를 가져갔다. 후에 잭슨 감독은 피펜에게 가장 실망했던 순간이라고 말했다.[25]
  • 그러나 쿠코치와 피펜은 이후 1998년까지 함께 뛰면서 관계가 회복된다. 실제로 쿠코치는 불스 입단 당시 조던과 함께 뛸 기회를 잃어버렸다는(조던은 쿠코치 입단 직전에 은퇴하고 야구하러 갔다) 것에 대해 실망할 정도로 조던빠였지만,[26] 이후 3연패 기간동안 자신이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 동료로 피펜을 꼽기에 이른다. 실제로 강압적인 리더십을 가진 조던과 달리, 피펜의 리더십은 다른 동료들을 묵묵히 서포트해주는 것이었다.
  • 사실 이 갈등은 스코티 피펜 항목에도 일부 서술되어있지만, 진짜 원인은 쿠코치를 영입한 제리 크라우스 당시 단장에 있다. 크라우스는 피펜을 드래프트에서 지명할때는 필사적이었지만, 피펜이 조던의 밑에서 리그 최고의 스몰포워드로 성장한 이후 피펜이 그에 걸맞은 고액연봉을 요구하자 돈 몇푼 아끼려고 정을 떼버리고, 피펜을 트레이드해버리려고 피펜 대체자로 쿠코치를 영입한 것이다. 실제로 피펜은 쿠코치 영입이후 롤이 겹치는 등 여러가지 이유로 불만을 표시하며 트레이드를 요청했고, 트레이드 성사 직전까지 간적도 있다. 하지만 불스 왕조 위기의 순간 조던이 돌아오면서 피펜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피펜도 조던의 지원에 잠시 불만표출을 접었고 자연스럽게 교통정리가 되면서 쿠코치가 식스맨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원래 공격에 장점이 있던 장신 3번 플레이어를 큰 키로 몸빵수비만 시키다보니 원래도 약했던 수비문제가 더욱 악화되면서 한때 선수들이 뽑는 리그 최악의 수비수에 매번 꼽히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반지 3개를 얻긴 했지만 쿠코치 개인으로써는 다소 아쉬운 커리어인 셈.
  • 그의 모습을 본뜬 레고 미니피겨가 레고 스포츠 시리즈 3563 제품으로 출시된 적이 있었다.


[1] 유럽에서는 가드 겸 포워드, NBA에서 주 포지션은 스몰포워드였으며, 로드맨 영입 전까지 주전 파워포워드로 출전을 많이 했다. 시카고는 골밑에서 존재감 때문에 그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룩 롱리를 주전 센터로 기용했는데(롱리가 뛰어난 건 아니지만 쿠코치는 외곽에서만 뛰어서 골밑 플레이, 특히 골밑 수비가 거의 없었다), 주전 중 누가 빠지든지 쿠코치가 1순위로 투입되었다. 다만 수비가 약하고 파워가 약했기 때문에 저 키에도 빅맨 수비는 힘들어해 스몰포워드 수비를 주로 맡았다. 론 하퍼가 빠지면 키 때문에 가드 수비가 불가능한 쿠코치 대신 조던과 피펜이 가드 수비를 맡고 쿠코치가 스몰포워드 수비를, 롱리가 빠지면 센터수비를 로드맨이 맡고 쿠코치는 포워드 수비를 맡았다. 다만 릭 스미츠처럼 키가 너무 크고 (224CM) 골밑 공격보다 점프슛 위주인 선수는 쿠코치가 막기도 했다. 어쨌거나 당시 NBA에서 심히 애매한 선수였지만, 현재였다면 포인트포워드로 아주 활개를 쳤을 선수. 자세한 상황은 플레이스타일 항목 참고.[2] 현 KK 스플리트.[3] 불스 왕조의 키 식스맨이라는 인상이 강하지만 의외로 주전으로 나선 경기도 꽤 있었다. 94-95시즌에 주전으로 뛴 것은 물론이고, 97-98시즌엔 74경기중 52경기를 주전으로 뛰었다. 당시 스카티 피펜의 부상으로 인한 장기출장도 있었고, 만 37세에 가까워지던 데니스 로드맨이 노화로 인한 기복으로 벤치에서 출장하는 경기도 꽤 있었기에 쿠코치가 주전으로 많이 나온 것. 왕조 몰락기의 시카고에서 에이스로 잠깐 활동하다 이후 다른 팀들로 옮겼으나, 30대 초중반부터 기량이 완연히 하락세를 보이면서 주전급으론 오래 뛰지 못했다.[4] 금메달을 못 딴 이유는 올림픽 농구 결승전 상대가 드림팀 1기였기 때문이다.[5] 조던은 우리는 쿠코치를 상대하는게 아니고, 크로아티아 선수복을 입은 제리 크라우스를 상대하는거다고 회술했고, 피펜은 쿠코치의 농구 역사에서 가장 기억하기 싫은 최악의 기억으로 남겨주겠다고 이를 갈았다.[6] 당시 쿠코치는 가드 겸 포워드였고, 크라우스는 그를 주전 포인트가드로 쓰겠다고 공언한 상태였지만 맨투맨 수비 비중이 지금보다 높은 90년대 당시 NBA 상황으로는 7피트 장신인 쿠코치가 PG를 하는게 수비 때문에라도 불가능했다. 또한 힘이 약해 빅맨은 무리였고, 미치지 않고서야 조던 자리에 세울리가 없으니 결국 스몰포워드밖에 자리가 없던 것. 실제로 쿠코치는 훗날 스몰포워드로 정착한다.[7] 물론 조던을 트라이앵글 안에서만 활용하는 건 낭비이므로 조던은 일반적인 경우에 비하면 자유롭게 공격할 수 있었다. 특히 다른 선수들의 부진으로 트라이앵글이 힘을 잃을 때 공격의 활로를 뚫은 건 조던의 1 대 1이었다.[8] 이때 쿠코치는 잭슨이 식스맨으로 자신을 지명한 것에 상당히 실망했지만, 잭슨은 식스맨이 그에게 잘 맞는 역할이란 것을 설득했다.[9] 쿠코치는 슛이 좋은 것과 별개로 기복이 좀 있고 득점 뿐 아니라 리딩을 동시에 하는 온 볼 타입의 선수이며, 이 때문에 리딩을 할 수 없는 시카고에서도 주전으로선 궁합이 좋지 않아 식스맨으로 공격을 이끄는 역할을 주로 했다. 그런데 아이버슨의 경우 오프 볼 무브도 수준급이긴 했지만 볼을 비교적 오래 끄는 플레이어였기에 쿠코치와 호궁합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불스마냥 쿠코치를 벤치로 내리자니 당시 필리는 공격력이 그리 좋은 팀이 아니었다.[10] NBA 시절 주로 식스맨으로 활동했지만 올해의 식스맨상 1회와 불스에서의 3회 연속 우승에 올림픽 은메달 2회, 유로바스켓 우승 2회, MVP 1회, 유럽리그에서의 맹활약 등의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만큼 명전 입성이 어려운 커리어는 아니었다.[11] 현역 시절엔 국제무대에선 6피트10인치, NBA에선 6피트11인치로 주로 표기되었다. 쿠코치가 데뷔하던 93년은 신체검사 결과가 공표되던 시기가 아니어서 불명이지만 맨발키와 착화신장일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당시엔 저런 식으로 (이미 성장이 끝난 이후에 드래프트되었음에도) 데뷔 후 표기신장이 바뀐 선수들이 종종 있었는데, 드래프트 당시 6피트9인치였다가 6피트10인치로 변한 크리스 웨버(92년 드래프트), 초창기엔 6피트10인치였다가 6피트11인치로 바뀐 라쉬드 월러스)95년 드래프트) 등이다.[12] http://www.si.com/vault/1992/06/22/126703/mens-basketball-the-toni-award-at-23-toni-kukoc-a-6-ft10-in-guard-is-already-europes-best-player-and-a-prize-coveted-by-the-chicago-bulls 1992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기사인데, "6피트 10인치의 가드인 쿠코치는 이미 유럽 최고의 선수이며 불스가 노리는 상품이다"라고 되어있다.[13] 파워 자체도 문제였지만 플레이스타일 자체도 문제였다. 예를 들어 벤 월러스는 불스 시절 쿠코치보다 가벼운 선수였지만 힘도 세고 빅맨으로서 기본기가 뛰어나기에 센터를 훌륭히 소화했다. 카림 압둘자바는 220파운드에 불과해 쿠코치는 물론이고 전반적으로 몸무게가 더 가벼웠던 80년대 기준으로도 매우 슬림한 신장이었지만 센터 포지션 소화엔 큰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쿠코치는 근본적으로 빅맨이 아니기에 로우포스트 수비와 박스아웃, 수비 앵커 역할을 하는 능력 자체가 제한적이었다. 쿠코치보다도 더욱 마른 케빈 가넷의 경우 고등학생이던 맥도널드 게임에서 보여준 풋워크만 봐도 골밑수비 기본기가 탄탄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쿠코치는 외곽선수였기 때문에 풋워크도 로테이션 수비도 기본적으로 가드/포워드의 것이었다. 어린 시절에 데뷔해 93-94시즌 당시 이미 베테랑이었던 쿠코치가 평생 몸에 베인 스타일을 버리고 아예 빅맨으로 전향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14] http://articles.chicagotribune.com/1994-11-09/sports/9411160467_1_bulls-toni-kukoc-salary-cap[15] 실제로 이 때문에 2004년 레이커스에서는 당시 아직 스타급 실력을 유지하던 게리 페이튼이 트라이앵글로 인해 급격히 평범한 선수가 된 적이 있다.[16] 하퍼라고 작고 빠른 포인트가드에 대한 수비가 아주 좋은 건 아니었지만, 조던은 공격에서의 역할이 많을 뿐더러 본인보다 작은 1번을 경기내내 수비하기엔 체력이 그 이전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3번 ~ 준 4번급의 사이즈인 피펜에게 경기내내 1번 수비를 맡길수도 없는 노릇.[17] 물론 롱리가 코트위에 없는 상태에서 로드맨과 매치업이 어려울 정도의 장신이 상대라면 쿠코치가 센터 수비를 맡기도 했다.[18] 빅맨 수비를 위해 유럽에서 뛰던 시절보다 체중을 꽤나 불리긴 했지만 한계는 있었다.[19] 셋 다 다재다능함에도 조던/피펜은 불스에 딱 맞은 반면 쿠코치는 안 맞았는데, 다재다능함의 성격이 달랐기 때문. 일단 조던은 슛거리는 조금 짧아도 안정적인 슛터치를 갖고 있었기에 캐치 앤 슛이 매우 뛰어났고, 포스트업 능력이 탁월해서 트라이앵글의 중심에서 수비를 끌어오는 능력도 뛰어났다. 즉 사실 조던은 본인 공격만 보면 커리어 초창기처럼 프리롤을 주는게 가장 효율적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체력소모가 너무 심하고 한계가 있으니 팀전력 극대화를 위해 트라이앵글을 도입한 것. 그러나 쿠코치는 의외로 꾸준하게 안정적인 선수는 아니었다. 슛 자체는 분명히 뛰어나지만 캐치 앤 슈터로 활동하기보단 본인이 공을 잡고 공격을 창조하는데 재능이 있었고, 포스트업보단 페이스업에 능한 플레이어였다. 한편 피펜은 포스트업 능력이 뛰어난 것도 있고, 무엇보다 기복이 있는 득점보단 리딩, 수비, 리바운드 등 다방면에서 빛을 발하는 선수였다. 그래서 득점력이 제한되는 트라이앵글이 잘 맞았던 것. 그러나 쿠코치는 피펜과 반대로 수비와 달리 공격에서 빛나야하는 선수인데, 공을 잡고 자기 페이스를 찾을 기회 자체가 불스에선 없었다.[20] 오해가 있을까봐 첨언하면 쿠코치가 모션오펜스에서 못 뛴단 얘기가 아니다. '모션오펜스에서 3옵션'이란 위치에서 뛰기엔 여러모로 쿠코치의 재능이 맞지 않았다는 것. 쿠코치 위주로 짜여진 오펜스라면 충분히 모션에서도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슛과 패스가 모두 뛰어난 선수기 때문. 모션 오펜스에서 조연이라는 역할을 기가 막히게 잘해줬던 것이 바로 같은 시즌에 재즈로 합류한 당시 제프 호너섹이었다. 5살이 더 많은 호너섹은 반대로 슈팅터치가 기계처럼 정확하고 기복이 없었기에, 칼 말론 위주로 짜여진 모션 오펜스에서 캐치 앤 슈터로 활약하거나 필요할때 스탭업하는 역할이 딱이었다. 반면 쿠코치는 테크닉 뛰어난 멀티플레이어가 피지컬한 90년대에 제한적인 역할을 맡았으니 위력을 발휘하기 힘들었던 것.[21] 조던은 오해와 달리 결코 자신만 공을 고집하는 볼호그가 아니었으며, 정상급의 볼배급 능력도 있었다. 실제로 그는 89시즌 후반부터 풀타임 PG로 뛰기도 했으며, 피펜의 커리어하이 득점 47점 역시 조던과 함께 뛰던 97시즌 도중 나온 것이었다.[22] 실제로 조던이 그랬다. 워낙 가진 무기가 많기에 하나가 막히면 그것만 고집하지 않는게 그가 공헌도가 꾸준히 높은 이유. 98년 동부파이널 7차전처럼 슛이 부진해도 많은 자유투 획득과 리바운드, 어시스트로 수준급 공헌을 해줄 수 있는게 조던이었다.[23] 물론 림프로텍팅과 리바운드가 되는 5번 파트너는 필수였겠지만.[24] 한마디로 '피지컬 농구'보다 '테크닉과 활동량의 농구'에서 빛날 선수인데, 실제로 NBA보다 피지컬이 약한 유럽리그에서 최강으로 군림하다가 피지컬이 중요한 NBA에 오니 장점이 묻혀버렸다. 그런데 현대 NBA는 전체적으로 거친 몸싸움이 룰 변경으로 훨씬 줄어들고 테크닉과 활동량이 중요한 리그로 변했으니 쿠코치에겐 그야말로 최적의 환경이다. 반대 케이스가 수비범위는 좁고 기술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거친 몸싸움을 기반으로 한 수비를 했던 찰스 오클리빌 레임비어같은 선수로, 이런 선수들은 현대에 오면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조던이나 르브론처럼 어딜 가도 잘할 선수들이 있는 반면 시대에 따라 확 차이가 날 선수들도 존재한다.[25] 잭슨뿐만 아니라 빌 카트라이트 역시 라커룸에서 분노의 눈물을 흘리며 피펜이 팀원들의 기대를 배신했다고 울분을 토했다.[26] 쿠코치가 불스에 입단한 후 얼마되지 않아서 조던이 은퇴선언을 한 뒤라 조던이 은퇴식 전에 선수들과 마지막으로 작별의 시간을 가졌는데 이때 쿠코치는 너무 상심한 나머지 눈물을 보여 천하의 조던이 당황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