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의 황족 Britannicus | 브리타니쿠스 | |
휘 | Tiberius Claudius Caesar Britannicus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브리타니쿠스 |
Tiberius Claudius Germanicus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게르마니쿠스 출생 당시 | |
출생 | AD 41년 2월 12일 로마 제국 본국 이탈리아 로마 |
사망 | AD 55년 2월 11일 (항년 13세) 로마 제국 본국 이탈리아 로마 |
매장지 | 아우구스투스 영묘 |
가문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
아버지 | 클라우디우스 |
어머니 | 발레리아 메살리나 |
형제 | 네로둘째매형, 입양형제, 공동계승권자,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이복형,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이복누나,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동복누나,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외삼촌, 첫째매형, 보호자 |
[clearfix]
1. 개요
브리타니쿠스는 로마 제국의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가 황후 발레리아 메살리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제위계승권자였다. 서기 48년 어머니가 중혼, 간통, 반역 혐의로 몰락한 이후, 네로의 친어머니 소 아그리피나가 다음 황후가 되고, 네로가 아버지의 둘째 사위이자 양자가 되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카이사르 가문 후계자에서 멀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네로가 양자가 된 이유는 아버지 사후 유언장을 통해 알려져 있듯 어린 나이의 브리타니쿠스의 안전 및 보호자 선정 등을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아버지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54년 10월 13일 63세의 나이에 급사한 이후, 계모이자 사촌누나였던 소 아그리피나가 세네카,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 부루스와 함께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네로만을 유일한 황제로 옹립했을 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공동계승권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배제됐다. 이후 네로와 소 아그리피나 사이의 권력 다툼이 표면화되면서 본래부터 네로의 강력한 잠재적 경쟁자였던 브리타니쿠스가 부각되었다. 그리고 이때 소 아그리피나가 중심이 된 황실 세력과 많은 로마인들이 네로의 법적 정당성과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적통이 왜 밀려났는지 의문을 드러내면서, 14세 생일 직전 네로에게 살해당했다. 사인은 독살이며 독살된 시체는 황궁 밖으로 은밀히 운반돼 비오는 날 화장 후 급히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매장됐다. 따라서 당대, 후대 로마인들에게 어린 나이에 한결같이 억울하게 살해당했다고 기록됐고, 그의 어린시절 친구 티투스는 즉위 후 이런 친구의 명복을 축원하고 동상을 세워 그를 신원복구했다.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의 혈통적 후계자인 브리타니쿠스는 네로와 달리, 카이사르 가문의 유일한 혈통적, 법적 후계자였는데, 그가 네로에게 독살되면서 가문은 혈통적으로 멸문됐으며 네로마저 68년 실각하고 자살하면서 역사상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1]
2. 생애
2.1. 출생과 가계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브리타니쿠스는 서기 41년 2월 12일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다섯 자녀 중 막내아이였으며, 황후 발레리아 메살리나가 낳은 두 자녀 중 첫 남자아이였다. 태어날 당시 이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게르마니쿠스였지만, 대개의 로마황족, 귀족들처럼 영아기 사망기가 지난 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브리타니쿠스로 개명했다.첫 가족 성씨인 게르마니쿠스는 친할아버지 대 드루수스가 게르마니아 정복전쟁때, 원로원으로부터 부여받은 개선 칭호이자 존칭 성씨다. 이 성씨는 백부 게르마니쿠스, 아버지 클라우디우스, 사촌형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가이우스(칼리굴라)가 대를 이어 전달받은 존칭 성씨이면서도,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의 적통 직계 후손 가문을 사실상 상징하는 칭호 중 하나였다.
반면 통칭으로 알려진 브리타니쿠스는 아버지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서기 43년 영국(브리타니아)를 정복한 뒤 원로원에서 개선 칭호로 또 다른 가문 상속명으로 붙여준 존칭이다. 그런데 클라우디우스는 이 자랑스러운 존칭 이름을 직접 사용하지 않고, 정식 후계자인 아들 브리타니쿠스가 고작 2살일 때 선사하고 아예 개명해 가족성씨 카이사르 뒤에 붙여줬다. 따라서 브리타니쿠스의 정식 성씨는 여전히 아우구스투스의 직계를 상징한 카이사르와 게르마니쿠스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이우스 칼리굴라 황제의 중매 아래 결혼해 낳은 첫 아들이라는 점, 칼리굴라 암살 후 클라우디우스 외엔 아우구스투스의 직계혈육이 끊길 위기였다가 태어났다는 상징성, 어머니 메살리나 역시 아우구스투스의 후손이라는 점 때문에 그 위상은 엄청났다고 한다. 따라서 태어날 당시부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유일무이한 적통으로 공인돼, 아우구스투스와 그 직계인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향수가 엄청난 이탈리아, 서방 속주, 황제숭배를 자발적으로 벌인 동방 속주들에게도 브리타니쿠스는 특별한 취급을 받았다. 아울러 아버지는 현직 황제 신분이며, 어머니 역시 아우구스타 지위를 가지고 있어 현직 황제의 적장자라는 상징성도 확고했다.
이런 배경으로 카이사르 가문의 적통 브리타니쿠스의 탄생과 개명은 그 자체만으로도 그 의미가 대단했다. 따라서 브리타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의 후계자라는 지위와 그 가계를 후광삼아, 원로원과 황실 식구, 프라이토리아니 장교들로부터 공식상속인으로 인정받았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그의 탄생을 기념하는 주화가 공식 발행됐으며, 황제와 로마 정부는 화페 앞면에 'Spes Augusta(스페스 아우구스타, 황가의 희망)'이라고 적어 넣어 그가 공식 상속인임을 명확히 표시했다. 아울러 '브리타니쿠스'라는 이름을 부여받을 당시 상황 역시 국가 공개행사로 진행됐는데, 이때 로마 민중들은 황제가 브리타니아 정복을 뜻하는 존칭을 아들에게 부여하는 것에 박수를 보냈고, 클라우디우스는 이런 환호 속에서 아들을 들어올려 공개적으로 소개했다고 한다.
2.2. 후계수업과 어머니의 몰락
브리타니쿠스는 일찌감치 차기 후계자로 유력시되어 철저한 예절교육과 기본교육을 배웠다. 이를 담당한 인사는 루키우스 실리우스 루푸스의 동료이며 어머니 메살리나 황후의 친구였던 소시비우스였다. 어린 브리타니쿠스는 대개의 로마 최상류층 자제들이 그렇듯 같은 계급의 원로원 의원 자제와 같이 잠자고 교육을 받는 방식으로 수업을 배웠는데 이때 그와 함께 가정교육을 받은 친구가 바로 당시 원로원 의원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였다. 따라서 브리타니쿠스는 걸음마를 뗀 이후부터 티투스와 늘 같이 살면서 가정교사들에게 수업을 배웠다고 알려져 있다.47년, 소시비우스와 루키우스 실리우스 루푸스는 어린 브리타니쿠스를 위해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접견하면서 공개적으로 "어린 브리타니쿠스의 안위와 카이사르 가문의 안정"을 언급했다. 그리고 이 시기, 칼리굴라 암살 배후에 원로원 의원이자 아시아 속주 총독으로 로마 민중들에게 지지를 얻기 시작한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가 있었던 것이 드러났다. 이는 메살리나가 이 사람의 막대한 재산과 그가 가진 호화로운 루쿨루스 정원을 강탈해 억울한 희생이었다는 고대기록이 정설처럼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메살리나의 고발이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한들, 이는 여러 증거가 많아 거짓이 아니었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조사관 비텔리우스는 어릴적부터 동고동락해온 아시아티쿠스를 무죄로 빼주고 싶어 했음에도 끝내 유죄를 선고 해야만 했다. 더욱이 아시아티쿠스는 기소 전부터 여러 정황, 발언, 행보 등에서도 억울한 피해자가 아님이 확인된다. 그래서 오늘날 일부 학자들은 그가 칼리굴라 암살 배후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주장 중이다[2] . 따라서 아시아티쿠스는 즉시 체포돼 쇠사슬에 묶여 로마로 끌려 왔는데, 그는 황제의 마지막 배려로 불명예스럽게 교수형에 처해지지 않고 스스로 정맥을 잘라 죽는 방식으로 죽었다.
이 사건 이후, 브리타니쿠스의 안위를 위해 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파 인사들과 메살리나는 지속적으로 클라우디우스와 브리타니쿠스를 위해 행동했다고 기록들은 전한다. 이런 연유로 티베리우스의 손녀 율리아 리비아와 그녀의 아들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가 반역죄로 기소됐고, 칼리굴라의 두 여동생 소 아그리피나, 율리아 리빌라 역시 메살리나에게 고발됐다. 이중 티베리우스의 손녀 율리아 리비아는 그 증거가 많고 명확해 재판을 통해 유죄를 선고받았다. 따라서 그녀는 어린 아들과 의붓딸을 구하고자 했는지, 아니면 명예를 지킬 요량인지 몰라도 사형 집행 직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메살리나는 매우 음탕하고 권력욕이 심했다. 따라서 그녀는 브리타니쿠스의 안위, 남편 클라우디우스의 제위를 지키겠다는 명분 아래 고소, 고발을 남발했다. 그러다가 자신의 여러 연인 중 한 명인 가이우스 실리우스와 공모해 48년 오스티아로 시찰나간 클라우디우스를 폐위시키기로 음모를 꾸몄고, 실리우스와 ‘진짜’ 결혼식을 올렸다.
이 초대형 중혼 스캔들은 클라우디우스도 눈치를 못 챌 정도로 은밀히 진행됐지만 유능한 충신 팔라스가 동료인 나르키수스, 칼리스투스와 함께 신속히 클라우디우스에게 사태를 보고하면서 궁정쿠데타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때 실리우스는 간통, 중혼 및 국가 반역죄로 체포돼 공모자들과 함께 즉시 처형되었다. 하지만 아내를 진심으로 연민하던 클라우디우스는 주동자인 메살리나 처벌에는 뜸을 들여 계속 미뤘다. 따라서 나르키수스는 결단력이 부족한 클라우디우스를 대신해 메살리나가 머물던 루쿨루스 별장에 사람을 보내 황제의 명이라 밝히고 그녀를 죽였다.
브리타니쿠스의 지위는 이 무렵 처음으로 꼬이게 됐는데, 이는 일부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버지 클라우디우스는 이렇게 세 번째 결혼이 파탄난 이후, 측근 팔라스의 강권 등에 따라 네 번째 결혼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재혼 상대를 고를 때, 해방노예 심복 3인에게 각각 후보를 제출하게 하여 그중에서 선택하였다. 당연히 그 3인은 각자의 권세가 달린 중대사였고, 권모술수가 판치고 말았다. 이때 팔라스는 황제의 조카이자 율리우스 가문의 유일한 여성인 소 아그리피나를 적극 밀어붙였고, 황제는 팔라스의 강권과 설득을 받아들여 아그리피나를 재혼 상대자로 결정내리며, 근친결혼임에도 이를 강행해 그녀와 결혼했다.
2.3. 계모 아그리피나와 네로의 등장
브리타니쿠스의 계모 소 아그리피나는 혈연적으로 사촌누나였는데, 그녀는 첫 남편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의 사이에서 외아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후일 네로)를 두고 있었다.아그리피나는 황궁에 다시 들어온 뒤, 브리타니쿠스보다 3살 많은 친아들 아헤노바르부스를 클라우디우스의 양자로 입적시켜 다음 황제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는 그녀와 브리타니쿠스의 증조할머니 리비아 드루실라가 자신의 친아들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형제를 아우구스투스의 정식 후계자로 만들려고 했던 것과 판박이였고, 실제로 소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아들 아헤노바르부스를 과거 대 드루수스처럼 클라우디우스의 차녀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와 결혼시킨 뒤 양자로 만들어 사위가 장인의 뒤를 잇는 방식으로 즉위시키려고 했다.
49년 브리타니쿠스의 친누나 클라우디아 옥타비아가 아헤노바르부스와 결혼했고, 50년 클라우디우스는 사위이자 의붓아들이며 조카의 아들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아예 양자로 들이고 이름까지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로 지어줬다. 아울러 소 아그리피나의 뜻에 따라 그녀의 측근인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를 근위대장에 임명시켜주고 네로의 교육은 박식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가 담당케했다. 또 그녀는 자신의 지위와 세력을 이용, 친아들 네로를 위해 브리타니쿠스에게 호의적이었던 근위대장 루키우스 게타와 크리스피누스를 제거했으며 기어이 51년에는 네로에게 프린켑스 유벤투티스(젊은 1인자)라는 칭호까지 내리도록 손을 썼다. 따라서 브리타니쿠스의 위치는 순식간에 애매해졌고 매우 불안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여전히 네로를 "아헤노바르부스"라고 부르며, 인망 높고 인품이 훌륭한 큰사위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3]를 브리타니쿠스의 보호자로 염두에 두고, 아직 어린 브리타니쿠스에게 내심 차기 제위를 물려주고 싶어했다. 그렇지만 클라우디우스는 54년 10월 13일 밤, 저녁 식사 후 몇시간 지나지 않아 급사했으며, 소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오른팔 팔라스, 네로의 스승 세네카, 근위대장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와 함께 16살의 네로를 로마시 옆의 프라이토리아니 병영으로 데리고 가 그를 황제로 선포했다.
2.4. 네로와 아그리피나의 대립
클라우디우스의 유언장에서 브리타니쿠스는 공동제위계승권자였다. 또한 어린 브리타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유일한 적통이자 선제의 아들인 까닭에 피바람이 불면 제거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네로 즉위 후, 계모 소 아그리피나는 친아들을 위해 브리타니쿠스의 잠재적 보호자들을 하나둘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어 추방시키거나 반역죄, 간통죄 같은 혐의를 뒤집어 씌워 죽였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루키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4] 부자를 비롯해, 브리타니쿠스의 외가 식구들인 도미티아 레피다 등이 제거됐다.
반면 네로는 자신보다 3살 어리고, 고종사촌누나의 아들이기도 한 브리타니쿠스에게 즉위 이전부터 어떤 악감정도 없었고, 그를 장애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온전히 브리타니쿠스를 보호해준 것은 전혀 아니었다. 왜냐하면 네로는 브리타니쿠스의 친척들인 방계황족들이 숙청될 당시, 아주 비열하게 법정에서 브리타니쿠스의 외조모(네로의 친고모) 도미티아 레피다 제거에 큰 영향을 끼친 거짓 증언 등을 했고 아주 뻔뻔하게 자신의 어머니만 나쁜 행동을 한 것처럼 연기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클라우디우스가 급사하고 4개여월도 안 될 즈음 브리타니쿠스의 성년식이 다가왔다. 그런데 이 무렵, 네로 부부 사이의 갈등이 심해졌다. 이는 일방적으로 네로의 심각한 여성편력과 이혼 요구에서 촉발된 부분으로, 황제 네로가 온순하고 정숙한 황후를 공개적으로 핍박하는 것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네로의 권좌와 그 정통성은 어디까지나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의 남편'이라는 것으로 유지됐고, 애초 아우구스투스 일가에 입양된 이유도 브리타니쿠스 친누나의 남편인 탓이 컸다. 따라서 소 아그리피나는 아들의 심각한 도덕적 문제와 아내 핍박 문제, 제위에 오른 이후 어머니의 명령에 반항적이고 공격적으로 변하는 태도를 지적하면서 네로를 꾸짖었다. 이에 네로와 소 아그리피나 사이는 좋은 모자 사이에서 냉랭한 관계가 됐다.
당시 네로와 소 아그리피나의 대결 구도에 세네카와 부루스가 끼어들었고, 이 과정에서 네로는 어머니의 위선적이고 강압적인 행동을 공격하며 무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본래 시기심이 많고 겁이 많은 네로의 성격 역시 자기과시적이고 심각하게 격한 성격으로 변하면서, 본래부터 기가 세고 권력욕이 강한 소 아그리피나와의 갈등은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2.5. 사망
서기 55년, 네로는 어머니의 총신이며 가신인 팔라스를 파면했다. 따라서 정적 관계가 된 네로와 소 아그리피나의 구도는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팔라스는 대 드루수스, 소 안토니아 부부 생전 이래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 1세 그리고 칼리굴라와 소 아그리피나까지 3대에 걸쳐 아우구스투스의 직계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모신 해방노예이자 가신으로, 소 아그리피나에겐 복심 그자체였고 꾀주머니 역할도 했던 사람이었다. 또 그는 브리타니쿠스를 지지하고 보호해준 나르키수스와 칼리스투스를 제거한 궁정쿠데타 성공의 일등공신인 터라, 브리타니쿠스의 계모 소 아그리피나는 마침내 분노가 폭발했다.
팔라스 파면 사건은 네로의 친모 소 아그리피나가 이 시기부터 상당히 애매해진 위치의 브리타니쿠스를 앞세워 네로 측과 대립하게 된 계기가 됐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의 사촌동생이자 의붓아들인 브리타니쿠스를 후원한 것의 정확한 의도는 확실치 않다. 이것이 진짜로 네로를 실각시키고 브리타니쿠스를 황제로 만들려고 했던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말 안듣는 네로를 위협하여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강화시키려고 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소 아그리피나가 이때부터 완전히 브리타니쿠스 지지세력이 되어 그를 후원했고, 이런 행동이 아우구스투스 직계 일가인 카이사르 가문의 멸문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브리타니쿠스는 태생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남자혈육이라는 상징성도 있었던 터라, 황실과 로마 사회에서는 애당초 네로보다는 브리타니쿠스의 정치적인 입장이 더 강력했다. 때문에 이는 네로에게 있어 매우 심각한 위협이었다. 그런데 소 아그리피나가 팔라스 파면 직후부터 자신이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이며 게르마니쿠스의 유일한 딸"임을 내세웠고, 네로를 직접 언급하면서 "배은망덕한 아들놈", "선황의 유언장을 어기고 제위를 차지한 녀석" 등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이미 네로는 이 무렵, 과거와 달리 14살이 되면서 변성기가 찾아온 브리타니쿠스가 훌륭한 목소리와 기품, 잘생긴 외모를 갖춘 것에 큰 위기감을 느끼고 이를 질투한 터라, 이런 상황에서 브리타니쿠스에 대한 악감정을 마구 내뿜었다고 한다.
하지만 권력욕이 강하고, 아우구스투스의 직계증손녀라는 자부심이 하늘을 찌른 소 아그리피나는 브리타니쿠스 신변에 문제가 될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팔라스 파면 이후, 로마 민중들에게 브리타니쿠스를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진짜 유일한 혈육", "신이 된 클라우디우스의 유일한 아들이자 대 드루수스의 유일한 후손"이라고 소개했고, 이는 이탈리아와 로마 민중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또 자신과 브리타니쿠스를 중심으로 프라이토리아니, 원로원 내 친 카이사르 가문 세력으로 대표되는 아우구스투스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 세력을 결집시켰는데, 민중들에게 처음 공개된 14살의 브리타니쿠스는 로마인들에게 아우구스투스의 향수와 클라우디우스에 대한 그리움까지 유발시켜 네로와 세네카, 부루스 모두를 위협할 정도였다. 즉, 소 아그리피나가 게르마니쿠스의 딸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임을 내세우면서, 측근들과 함께 브리타니쿠스의 편을 들 때부터 우려된 일들은, 브리타니쿠스의 공식석상 데뷔 후 네로와 세네카, 부루스에게 위기감을 느끼게 했다. 따라서 브리타니쿠스는 이런 상황 때문에 목숨이 위태롭게 됐고, 클라우디우스 사후 4개여월 만에 저녁식사 자리에서 네로에 의해 독살당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브리타니쿠스가 공개석상에서 소개된 이후, 선황의 인기와 민중들의 자발적인 지지를 등에 업게 됐고, 세네카 파벌의 권력은 애당초 선황의 유언장을 무시한 채 궁중쿠데타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독약은 클라우디우스 1세 독살에 사용된 독을 제조했던 독살 전문가 로쿠스타가 제조했는데, 1차 시도에서 실패해서 네로가 직접 로쿠스타를 고문한 후 다시 만든 독약으로 2차 시도를 했더니 성공했다고 한다. 이때 브리타니쿠스 곁에 있던 친구 티투스도 독을 소량 먹어 사경을 헤메다 살아났다.
이에 대해 타키투스 등은 브리타니쿠스가 억울하게 살해당한 이유는 네로가 친구 오토의 아내 폼페이아 사비나에게 홀딱 반해 아내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를 멸시했고, 이 과정에서 소 아그리피나가 네로와 사사건건 대적한 일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특히 타키투스는 소 아그리피나가 이 시기부터 대놓고 브리타니쿠스를 내세워 그의 지위를 강화시키고 네로와 그 측근세력을 적대시하면서 민중 앞에서 브리타니쿠스를 공개적으로 소개한 일을 거론했다.
3. 사후
브리타니쿠스가 살해될 당시, 네로는 놀란 참석자들에게 "간질을 앓고 있어서 발작증세를 일으킨 것이다"며 능청스럽게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독살인 것은 너무 명백해서, 네로는 서둘러 죽은 브리타니쿠스의 시신을 몰래 황궁 밖으로 옮긴 뒤 비가 내리는 와중에 급히 화장 후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매장했다.그러나 이후 네로는 자신의 어머니, 아내를 연이어 살해하고 이후에도 막장행동을 벌인 끝에 68년 실각 후 자살했다. 그런데 네로 몰락 전 로마인들에게 브리타니쿠스는 잊혀진 존재가 아니었으며, 네로 탄핵 당시 주요 악행 사례들 중의 하나로 언급됐다. 또 브리타니쿠스가 살해당한 부분은 원로원과 군대, 심지어 플라비우스 왕조의 황제들과 후대 황제들에게도 단순 언급을 넘어 네로가 아우구스투스 직계를 제 손으로 끊은 범죄자로 단정된 이유가 됐다.
친구 브리타니쿠스가 독살될 때 식사자리에 함께 있었던 티투스에게 일평생동안 잊지 못할 충격이 됐다고 한다. 따라서 티투스는 죽은 친구를 그리워하다가 즉위 후 브리타니쿠스의 모습을 황금상으로 만들고 그의 억울한 죽음을 기렸다고 하며, 이는 네로의 잔인성과 플라비우스 가문의 합법적 정당성 강화에 어느정도 영향을 끼쳤다.
[1] 라고는 하지만 카이사르 가문의 혈통적 직계 후손은 카이사르의 죽음으로 단절되었다. 물론 카이사리온이 있긴 했지만 법적으로 인정받지도 못 했고 나중에 옥타비아누스의 손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완전히 끊어졌다. 또한 법적인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는 양자(누나의 아들)다. 여기서 말하는 끊어진 혈통이란 엄밀히 말하면 카이사르가 아니라 사실상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직계 혈통. 즉, 아우구스투스의 직계를 말한다.[2] 아시아티쿠스는 메살리나의 부정한 의도와 별개로 과거부터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에 대해 적개심을 드러냈고,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모두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비니키아누스의 내부 협력자이자 동조자였다. 그래서 비니키아누스가 반란을 일으킨 이후, 내심 아시아티쿠스의 정체를 파악하게 된 클라우디우스는 이례적으로 갈리아에서 연설 중 간접적으로 이 사람을 힐난했다고 한다.[3] 브리타니쿠스의 외할머니가 재혼해 낳은 아들이기도 했기 때문에, 혈연상 외삼촌이기도 했다.[4] 이 사람과 그의 아들 모두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가 생전 "이 사람보다 착한 사람은 없다."고 평하고 야심조차 없어서 걱정이라고 할 정도로 온순한 황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