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티투스 라비에누스(Titus Labienus) |
생몰년도 | 기원전 100년경 ~ 기원전 45년 |
1. 개요
카이사르의 신병이로군! 왜 그렇게 긴장해 있나? 보아하니 그의 잘난 궤변에 홀렸던 모양이지? 그가 자네를 죽음으로 몰아넣었군. 진심으로 동정하네.
- '아프리카 전쟁기'에서 티투스 라비에누스[1]
- '아프리카 전쟁기'에서 티투스 라비에누스[1]
고대 로마 즉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수석 부관이자 기병대 사령관. 훗날 카이사르의 최대의 적 중 하나가 된 인물.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인 의미에서 카이사르의 최대 라이벌은 폼페이우스, 베르킨게토릭스 등을 들 수 있지만, 개인적인 원한 관계를 따지자면 라비에누스가 대표적이다.
2. 생애
2.1. 카이사르의 부관 시절
라비에누스는 폼페이우스와 같은 이탈리아 피케눔의 킨글룸 출신으로,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귀족이 아니라 기사 계급에 속한 인물이다. 기원전 79년의 집정관인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의 휘하에서 군 경력을 쌓았으며 카이킬리아의 해적 소탕 작전에도 참가했다.기원전 63년에 라비에누스는 호민관으로 선출되었고 당시 폰티펙스 막시무스에 선출된 카이사르와도 깊은 친분을 쌓게 되었다. 기원전 60년 전후로는 법무관을 맡은 것으로 여겨진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을 떠날 때 라비에누스를 레가투스(부관)로 삼았고 이후 8년 동안 그의 밑에서 군단이나 기병대를 이끌며 눈부신 활약을 펼친다. 그는 갈리아 전쟁기에서 카이사르가 가장 높게 평가하는 인물로 소개되며, 카이사르가 배후를 맡길 정도로 신임하는 장군이었다. 사실상 카이사르에 이은 부사령관 역할을 맡았다. 애초에 카이사르 휘하 군단장 중 법무관급 경력을 가진 것은 라비에누스를 제외하면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 정도밖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라비에누스는 9군단과 10군단을 지휘하여 사비스 전투 등에서 큰 공을 세웠는데 특히 루테티아 전투는 그가 없으면 패배했을지도 모를 만큼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로마군의 전략, 특히 카이사르에게 있어서 기병대의 활용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었고 따라서 기병대의 지휘관 자리는 웬만한 능력을 가지고서는 맡길 수 없는 중책이었다. 게다가 라비에누스는 독립적인 전투에서도 두각을 보여주는데 이는 그가 단순히 카이사르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 이상의 전략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군사적인 재능 외에도, 라비에누스는 피케눔의 부유한 원로원 의원이자 실력자로서 여겨졌으며 카이사르의 도움으로 상당한 부를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키케로는 라비에누스가 부자가 된 것을 한탄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이 시점에서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의 충실한 부장이자 핵심 카이사르파로 여겨졌다.
2.2. 내전기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갈등이 정점에 치닫고, 마침내 원로원 최종권고가 결의되자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도강하면서 내전을 일으키자 키살피나 속주에 있던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에게 합류할 300~400기의 갈리아, 게르만 기병을 이끌고 폼페이우스에게 투항해버린다.카이사르는 이 일로 대단히 큰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카이사르는 8년 동안 자신과 함께 싸워온 전우[2]이자 가장 유능한 측근 심복 장수가 이탈하였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의 이탈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글로 전혀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심경을 추측하긴 힘들지만,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의 짐을 폼페이우스 측으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이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그의 빈자리를 대신하며, 파르살루스 전투에서도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기병대를 이끌게 된다.
당연하지만 라비에누스는 폼페이우스 측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카이사르 휘하의 유명 부관인 그의 투신으로 원로원의 대의명분 강화라는 정치적 이점과 그의 군사적 능력만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 카이사르의 전략을 꿰뚫고 있다는 점이 높게 평가를 받은 것이다. 이후 라비에누스는 폼페이우스의 기병대 사령관으로 활약하며, 카이사르의 강화를 거절하고 "카이사르의 목을 가져오기 전까지 강화란 없다"라는 강경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3]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카이사르가 패배하자, 라비에누스는 폼페이우스를 설득해 투항한 카이사르군의 포로들을 인도받았다. 그리고 나선 그들을 전우 여러분(콤밀리테스)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카이사르의 정예들이 싸우는 방식인가?"라고 신랄하게 비판한 다음 다른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직접 찔러 죽였다. 이 일이 가지는 상징성은 굉장히 큰데, 그 이유는 카이사르의 부하들은 대부분 8년 동안 그의 지휘를 받았던 병사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라비에누스는 자신의 옛 부하들을 조롱하며 잔인하게 살해했다는 것. 카이사르는 내전기에서 라비에누스가 폼페이우스의 부하들과 결속을 새롭게 다지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잔혹한 모습을 보였다고 주장한다.[4]
하지만 로마의 역사를 바꾼 전투로 평가되는 기원전 48년의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에게 대패하며, 이 전투에서 폼페이우스의 기병대를 지휘한 라비에누스 역시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하고 패주하게 되는 신세가 된다. 오히려 수적으로 매우 유리한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망치가 되어줘야할 기병대를 통제하지 못해서 폼페이우스 및 옵티마테스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아무리 카이사르가 변칙전술로 대응했고, 아무리 기병대들이 대부분 신참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매우 유리한 상황에서 아주 제대로 발려버려서 정말 유능한 기병대 장교였는지 의심이 갈 정도.
2.3. 최후
라비에누스는 파르살루스에서 살아남은 메텔루스 스키피오, 폼페이우스의 아들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합류하여 북아프리카의 탑수스에서 세력을 규합해 카이사르에게 반기를 든다. 그러나 탑수스에서 벌어진 전투도 카이사르의 승리로 끝나버리고 라비에누스는 다시 히스파니아로 달아나는 신세가 된다.마지막으로 라비에누스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연합하여 히스파니아의 총독을 몰아내고 켈트-이베리아인들과 연합하여 13개 군단을 편성해 카이사르와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이것이 문다 전투로, 역시 라비에누스는 폼페이우스군의 기병대의 지휘관을 맡았다. 천하의 카이사르가 그동안 자신은 승리하기 위해서 싸워왔지만, 오늘만큼은 살기 위해서 싸웠다고 말했을만큼 문다 전투는 원로원파의 마지막 저항이자 총력전이었다.
그러나 10군단의 활약으로 폼페이우스군의 좌익이 무너지자 대세는 기울어졌고, 폼페이우스측의 패배에 라비에누스도 일조를 한 면이 있는데, 라비에누스는 후방에서 적이 나타나자 기병대를 이끌고 후방으로 이동했다. 병사들은 이것을 퇴각으로 착각했고, 이에 진형이 일시에 무너졌다. 그리하여 문다 전투는 최종적으로 카이사르의 승리로 끝났다. 라비에누스는 타고 있던 말이 쓰러지자 말에서 내려왔고, 항복을 거부한 채 최후까지 싸우다가 죽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이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역시 전사했다. 이 전투는 내전 역사상 볼 수 없었던 3만명이란 규모의 사상자가 나올 만큼 치열한 전투였다.
전투가 끝난 후 라비에누스의 시신은 카이사르에게 전달되었다. 기록은 여기서 끝이지만 카이사르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건데 간단한 장례 절차를 거쳐 매장되었을 것이다.
라비에누스의 아들 퀸투스 라비에누스도 대를 이어 카이사르 및 그 뒤를 이은 제2차 삼두정에 맞서 싸웠다. 퀸투스는 심지어 크라수스를 죽인 적국 파르티아와 손을 잡고 로마령 시리아를 침공(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했으나 안토니우스의 부하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에게 패하고 전사하였다.
3. 왜 카이사르에게 대적했는가?
카이사르의 심복 측근이자 카이사르파의 2인자인 라비에누스가 카이사르를 왜 배반했는가에 대해선 여러가지 학설이 있다. 첫째로 라비에누스가 카이사르의 전공을 시기했다는 학설이다. 갈리아에서의 전리품 배분, 혹은 2인자라는 위치에 불만을 품고 그에게 반기를 들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실제로 기원전 50년 경 라비에누스의 충성심에 의문이 제기되는 일이 있었고 카이사르는 도리어 그를 이탈리아와 가까운 키살피나 속주로 파견할 만큼 그를 두텁게 신임했으나 라비에누스는 그 기대를 보란듯이 어기고 말았다.라비에누스가 폼페이우스를 따른다고 해서 그의 지위가 더 나아진다는 보장이 당장은 없기는 했지만, 폼페이우스 주변에 결집한 옵티마테스가 원했던건 공화정의 수호, 즉 옛부터 그래온 것처럼 로마의 유력 가문들끼리 돌아가면서 1년씩 집정관 해먹고, 우리끼리 권력을 나눠가지면서 로마를 지배하자는 전통을 지키자는 것이었다. 이는 명예로운 경력을 밟아 더 높은 곳을 노리고자 하는 라비에누스와 이해가 일치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비록 라비에누스가 카이사르의 후원으로 뒷날 집정관에 당선되었다고 하더라도 본인의 뜻과 다르게 사실상 카이사르의 꼭두각시 겸 영원한 2인자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에 대해서 불만과 야망을 가졌을 수도 있다.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와 동갑으로 충분히 정치적으로 명예로운 경력에 포함된 직책들을 노려볼만한 기반이 충분히 다져진 상태였으나 사실상 독재를 휘두르던 카이사르 때문에 카이사르와 같이 집정관이 된다고 하더라도 꼭두각시 혹은 2인자로 밖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카이사르의 동료 집정관을 역임했던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의 전례를 통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내전 시기까지 카이사르에게 충실했던 트레보니우스나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카이사르 암살에 앞장선 것도 집정관이 되어봤자 카이사르의 꼭두각시로 머물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한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둘째로 로널드 사임(Ronald Syme)이 최초로 제기한 가설로 폼페이우스 가문이 위세를 떨치는 피케눔 출신으로서 자신의 오랜 파르토네스(후원자)인 폼페이우스의 은의를 저버릴 수 없었다는 시선이 존재한다.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에 대해서 어떤 악감정도 없었지만 옛 주군인 폼페이우스를 버릴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반론 역시 존재하는데, 파트로네스인 폼페이우스 사후에도 라비에누스가 아프리카와 히스파니아에서 계속 카이사르에 대항해 전쟁을 했다는 것은 순전히 파트로누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로만은 설명하기 힘들다. 다만 여기서 간과한 부분으로 폼페이우스의 아들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멀쩡히 도망가서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를 괴롭혔다.[5] 사실상 공화정의 종말을 고한 파르살루스 회전 이후 원로원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키케로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등은 카이사르에게 항복하였고,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문인의 길을 선택해 조용히 묻혀 지내는 상태였다. 다만 여기서 강경파이자 옵티마테스의 핵심인물들이었던 소(小) 카토나 스키피오는 아프리카로 건너가서 계속 저항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폼페이우스가 죽었다고 하더라도 스키피오는 폼페이우스의 정치적 후원자격이었으며, 폼페이우스의 아들들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계속 도망가서 아버지의 연줄을 이용해 계속 저항했다.
카이사르가 내전에서 적들을 여러차례 용서한 대인배이기는 하지만 키케로나 브루투스 등과는 달리, 자신을 이미 한번 강력히 배신한 전력이 있는 라비에누스를 카이사르가 용서했을 것이라곤 쉽게 생각하기 힘들고, 또한 라비에누스도 그것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끝까지 싸웠을 가능성도 있다.[6]
세번째는 라비에누스가 개인적으로 공화주의적인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을 경우이다. 카이사르의 곁에서 오랫동안 그를 보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야심을 드러내고 루비콘 강을 건너 내전을 일으켜 독재권을 탈취하려 하면서 로마의 국법을 어기는 행위를 좌시할 수 없었을 수도 있다. BBC의 다큐멘터리에선 이 설을 받아들여 그를 완고한 보수주의자로 묘사한다.
그러나 이에는 반론이 역시 존재한다. 라비에누스는 이미 카이사르의 후원으로 호민관으로 당선돼서 쿠리오나 안토니우스처럼 전형적인 카이사르가 로마에 심어놓은 카이사르파로 행동했으며 오랫동안 카이사르의 수하로 활동했다. 공화정에 대한 신념이 있는 사람이 카이사르의 부하 노릇을 했다고 하기는 영 모순이라는 것이다.[7] 라비에누스가 호민관이 된 이후에 첫 번째로 한 일들 중 하나가 호민관을 죽인 원로원 의원을 탄핵한 것이었다(물론 정상적인 보수주의자라면 호민관을 죽이는 걸 정상으로 보지는 않았겠지만).
아무튼 어떤 이유였든지간에, 라비에누스는 마치 원수라도 된 듯이 적이 된 순간부터 카이사르를 맹렬히 증오했다. 확실한 것은 카이사르의 목을 가져오라는 강경한 발언이나, 옛 부하들이었던 카이사르의 부하들을 직접 처형한 사건, 그리고 아프리카 전쟁기에서 라비에누스가 카이사르의 부하들의 앞에서 대놓고 독설을 내뱉는 등 적의를 쏟아냈다는 점에서 단순한 변심이 아닌 카이사르에 대한 강한 실망과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라비에누스는 그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은채 카이사르의 대적자로서 죽었고, 카이사르 또한 그의 배신의 원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왜 카이사르를 적대했는지 후대로서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4. 총평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의 최고 부관이자 그의 휘하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유력자였다. 만약에 라비에누스가 카이사르를 배반하지 않고 내전에서도 그를 따랐다면 폼페이우스는 더욱 불리해졌을 것이고 카이사르의 승리 가능성은 더 커졌을 것이다. 물론 라비에누스 자신도 내전기에서 실책들을 저질렀으며 카이사르의 휘하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등의 군단장들이 있었으나 그들의 능력은 라비에누스에 비해 비교적 떨어진다는 것이 중론이다.내전이 끝나고 그는 명실상부한 카이사르의 2인자 자리를 유지했을 것이며 집정관에 선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카이사르가 역시 일찍 죽었을 경우 카이사르파의 차기 후계자로서 그의 사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부각되는 일 역시 적어졌을 것이다. 어쩌면 제 2차 삼두정치의 주인공은 안토니우스나 레피두스가 아니라 라비에누스가 되었을 수도 있으며 로마의 1인자 독재관, 심지어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에 도전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에게는 (승리한다면) 카이사르에게서 얻을 것이 더 많았고 실제로 카이사르와의 밀접한 관계 그리고 갈리아에서 그와 함께 싸운 8년을 생각한다면 그래야 마땅했다. 하지만 라비에누스는 어떠한 연유로든 결국 카이사르에게 적대하는 쪽을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패사하게 된다.
5. 기타 매체에서의 모습
콜린 맥컬로의 소설 마스터스 오브 로마에서는 4-6부에 걸쳐 등장한다. 여기서 묘사되는 라비에누스는 '셈족의 코, 말(馬)의 이빨을 가진 사내'로 군사적 재능은 있으나 잔인하고 천박한 성품을 가진 비열남으로 묘사되며 카이사르가 자기를 갈리아 전쟁을 위한 소모품 정도로 평가하고 있고 갈리아 전쟁이 끝난 이후엔 토사구팽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폼페이우스 진영에 합류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콤미우스의 배반도 콤미우스를 질투한 라비에누스가 카이사르의 명령을 사칭해 콤미우스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하면서 배반하게 된 것으로 묘사할 정도. 폼페이우스 진영에 합류한 후에도 폼페이우스 측에게도 '피에 굶주린 야만인'이라는 평가를 받다가 문다 전투에서 쓰러진다.HBO의 드라마 "Rome"에서는 이름만 언급된다. 알레시아 전투까지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의 부관이었으나, 극중 더 중요한 인물인 안토니우스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비중이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전투가 중점이 아닌 Rome에서 순수한 무관인 라비에누스가 등장할 여지가 적기도 하다.
라비에누스 역을 맡은 사이먼 더튼.
BBC에서 제작한 드라마 Ancient Rome: The Rise and Fall of an Empire의 카이사르 편에서 라비에누스는 공화국을 뒤엎으려는 카이사르를 경계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유능한 부관이고 충성심도 강하지만, 카이사르의 야심에 대해 "전쟁을 일으키시려 드는 거군요"라고 일갈한다. 계속 자신을 따라달라며 포옹하는 카이사르를 비릿한 냉소로 바라보는 장면이 일품.
결국 루비콘 강 도하 직전에 폼페이우스의 친서를 받고 공화파에 합류해 폼페이우스의 부관으로 활약한다.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가 떠났다는 보고를 받고 애써 태연해보이는 태도로 "불쌍한 라비에누스, 결국 후회하게 될 텐데..."라고 말한다. 디라키움에서 패배한 뒤에도 안토니우스에게 "자네도 라비에누스처럼 폼페이우스에게 가지 그러나"라고 자조하는 걸 보면 영 신경쓰이긴 신경쓰였던 모양.
[1] 이 독설을 하자마자 라비에누스는 10군단의 고참병(그가 신병이라고 비웃은 자가 실은 고참병이었다.)에게 투창 세례를 받고 낙마한다. 고참병은 라비에누스에게 "이제 당신은 10군단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거요"라고 쏘아붙였다.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군한테서는 카이사르를 배반한데다가 옛 상관으로써 자신의 전우들을 참혹히 죽이고 아프리카 누미디아 경기병을 활용하여 카이사르의 군단병들을 농락하고 있었으니 최악의 배신자로써 카이사르의 군단병들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올라 있었을 것이다.[2] 게다가 라비에누스와 카이사르는 동갑내기이기도 했다.[3] 이 말을 어찌나 고압적으로 전했던지 라비에누스는 성난 군단병들에게 거의 살해당할 뻔 했다고 한다.[4] 하지만 카이사르는 마치 라비에누스가 자신을 적대한 대에는 개인적인 증오심이 전혀 없다는 투로 서술했는데, 이후 보여주는 라비에누스의 행적을 보면 그런 것 같진 않아 보인다. 사실 암살당할 때까지 카이사르는 신임하는 부하들의 불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성격이었고 이로인해 베르킨게토릭스 반란 때 자신이 신임하던 갈리아 족장 콤미우스의 반란, 라비에누스의 변절, 최정예 10군단의 종군 거부, 오른팔이던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와 데키무스 브루투스 및 카이사르파의 배반으로 인한 살해 등의 사태를 겪었다. 내전기는 자신의 이런 단점을 인정하고 싶지 않거나 무시하는 의도가 다분히 들어간 카이사르 시점에서의 프로파간다 서술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5] 이 당시에 술라의 실패한 개혁으로 인해서 사실상 로마 군단병들은 군단장의 사병처럼 되어 있었고, 폼페이우스의 아들들은 군대라는 폼페이우스의 유산을 물려받게 된다. 여기서 라비에누스와의 클리엔테스 관계도 포함이라는 것. 실제로 아프리카에서 패배한 이후에 라비에누스는 폼페이우스의 아들들에게 합류한다.[6]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라비에누스는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비록 패배했지만, 아프리카의 루스피나 전투, 히스파니아의 문다 전투에서 카이사르를 거의 죽일 뻔 했다.[7] 물론 카이사르를 따라 그의 파벌대로 행동한건 그냥 평범한 정치다툼 정도로 여겼을수는 있다. 루비콘 강을 건너 원로원에 대항하여 내전을 일으키는 건 결이 다른 행동인 반역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