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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 공화국 |
파나마 운하 지대 Panama Canal Zone Zona del Canal de Panamá | |||
기 | 문장 | ||
1903년 ~ 1979년 | |||
성립 이전 | 반환 이후 | ||
콜롬비아 합중국 | 파나마 | ||
위치 | 파나마 운하와 주변 8km 지역 | ||
국가 | The Star-Spangled Banner | ||
면적 | 1,432km2 | ||
수도 | 발보아 | ||
통화 | 미국 달러, 파나마 발보아 | ||
언어 | 영어, 스페인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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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나마 운하 주변 8km 지역에 존재하던 미국의 조차지이다. 파나마의 대도시이던 파나마시티와 콜론은 파나마 운하 지대에서 제외되어 파나마의 영토로 남았다.2. 역사
미국은 중남미의 세력 확장과 파나마의 전략적 위치를 고려해 파나마 운하를 착공하려 하였다. 미국은 1903년 1월 22일, 파나마를 영유하던 콜롬비아 측에 1000만 달러를 즉시 제공하고 연간 25만 달러 씩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파나마 운하 지대를 100년간 양도한다는 내용의 헤이-헤란 조약을 맺었지만 콜롬비아 상원이 이를 비준하지 않고 더 많은 금액을 요구하면서 무산되었다. 결국 미국은 파나마의 분리주의 세력에 접근했고, 파나마는 1903년 11월 3일 독립을 선언했다. 콜롬비아군은 당장 개입을 하려했으나 미 해군의 저지로 결국 파나마가 독립했다.파나마 독립 이후인 1903년 11월 18일, 헤이-뷔노 바리야 조약이 미국과 파나마 양국 간에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1000만 달러를 파나마 측에 제공하고 파나마 운하를 무기한 임대했다. 이후 파나마 운하가 건축되었다. 건축 과정은 파나마 운하 문서의 문단 참조.
파나마 운하 건설 이후 파나마 운하는 미국이 잘 써먹었다. 미국인들은 파나마 운하로 많이 이주하기도 했으며, 이들을 위한 인프라가 많이 세워졌다. 파나마 운하에는 미합중국 남부사령부(USSOUTHCOM)가 설치되기도 하여 미국의 군사적 요충지로도 쓰였다.[1] 파나마는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였다.
파나마 내에서는 파나마 운하 지대를 반환 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으며 파나마 운하 지대에 살던 파나마인들도 파나마로 돌아가길 원했다. 파나마 국기도 파나마 운하 내에서 게양이 금지되었다. 게다가 파나마 운하에서 근무하던 노동자들은 "골드 롤"과 "실버 롤"로 분류되었는데, 골드 롤은 미국인 노동자들이었고, 실버 롤은 비미국인 노동자들이었다.[2] 실버 롤 노동자들은 급여, 주택, 교육 측면에서 차별을 받았다. 결국 1959년 11월 3일 파나마 독립 기념일에 맞춰 파나마인들이 파나마 운하 지역으로 몰려가 반미 폭동을 일어켰다. 미국은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진압했고 시위대 2명을 체포했으며, 9명이 사망했다. 1963년에는 존 F. 케네디가 파나마 운하에서 파나마 국기와 성조기를 둘 다 게양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케네디가 사망하면서 파나마 운하 지대 주지사인 로버트 존 플레밍은 둘 다 게양하지 말라는 방침을 내렸다. 이에 미국인들은 성조기를 게양할 수 없다는 것에 반발했고 파나마 운하 지대의 발보아고등학교에 성조기를 단독으로 게양하자, 파나마인 학생들이 몰려가 파나마 국기를 게양하겠다고 요구했다. 당연히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충돌 속에서 파나마 국기가 찢어졌다. 결국 다시 폭동이 벌어졌다. 1964년 1월 9일의 일이었다.[3] 이번엔 1959년 사건과 달리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사건이 번졌다. 미국 기업의 공장들을 불태우고, 5000명 정도의 시위대가 모였다고 한다. 결국 28명이 사망했고, 324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으로 중국과 소련, 쿠바 같은 공산주의 국가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 같은 전통적인 북대서양 조약 기구 소속 우방국과 베네수엘라, 브라질 같은 남미의 친미 국가들도[4] 입을 모아 미국을 비난했다. 파나마 정부도 미국을 강력하게 비난했고, 1964년 1월 10일 미국과 단교했다.[5] 결국 파나마 운하 지역 반환을 결정하게 되고, 1977년 9월 7일 토리호스-카터 조약을 맺었다. 1979년 10월 1일 파나마 운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을 파나마 측에 반환했다. 이 조약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지미 카터가 자신의 공약으로(파나마 주둔 미군 철수 공약) 열성적으로 추진했다. 파나마에서는 이 조약 비준을 국민투표에 회부해 67%의 찬성(투표율 96%)을 얻어 조약을 비준했으며[6] 미국에서는 상원에서 찬성 68 대 반대 32로 비준 동의에 필요한 2/3 찬성(67명 찬성)을 가까스로 넘어 비준되었다.
당시 미국은 몰랐던 사실로, 파나마 내 과격파들은 만약 이 조약이 체결되지 않을 경우 운하 자체를 파괴해버릴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이는 파나마군의 장교로서 나중에 파나마의 실권자 자리에 오른 마누엘 노리에가가 세운 계획으로, 노리에가는 이미 수년 전부터 운하 주변 마을에 자기 심복들을 심어두고 폭약 등 사보타주에 필요한 장비를 운하 주변에 묻어두기까지 했다. 이 계획의 암호명은 "huele a quemado"(타는 냄새)였으며, 만약 조약이 체결되지 않으면 파나마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작전 개시를 알리는 암구호가 송출되고, 노리에가의 부하들이 한밤중에 운하의 중요 시설을 모두 파괴해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갑문을 모두 수리해도 운하를 다시 사용하려면 3년간에 걸쳐 빗물을 받아야 하는데다, 노리에가는 미국이 운하를 수리하게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으며 미국을 상대로 베트남 전쟁 시즌 2에 가까운 정글 게릴라전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조약이 미국 상원을 통과한 것은 미국과 파나마뿐 아니라 전 세계에 큰 행운이었다.
1979년 10월 1일 파나마 운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을 파나마 측에 반환했으나 파나마인들은 운하 자체를 반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1999년 12월 14일 파나마 운하 반환 협정을 맺고 그해 12월 31일 파나마 운하를 반환했다. 1914년에 완공된 이후 85년만에 이뤄진 일이였다. 권한 이양 행사 당시 미국 정부의 고위 공직자는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아서 미국이 파나마 운하에 가진 미련을 드러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