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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Pike장창. 그 중에서도 유난히 긴 창을 뜻하는 것으로, 보통 집단으로 기병을 막는데 사용되었으며 보병 상대로도 방어적인 용도로 널리 사용되었다.
파이크하면 좁게는 중세 말에서 근대 초까지 쓰인 5~6미터의 장창을 말하지만 넓게는 그냥 당대에 유난히 긴 종류의 장창을 의미하기도 한다. 일례로 고대의 사리사도 넓게는 파이크라고 불리고 중세에 간간이 쓰였던 대기병용 장창도 파이크라고 칭한다.
2. 상세
창의 일종으로 중세 말에서 근대 초기까지 두루 쓰였다. 길이가 5~6미터에 달해 이보다 전에 등장했던 여러 장창에 비해서도 매우 길다는 특징이 있다.그림의 오른쪽 스코틀랜드 병사가 든 긴 창이 파이크이고, 왼쪽의 짧은 쪽이 잉글랜드에서 많이 썼던 폴암인 빌이다. 일반적으로는 파이크가 유리했지만 그림처럼 창대 안쪽으로 파고드는 데에 성공했다면 입장이 정반대가 되었다. 1513년 플로든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빌과 스코틀랜드의 파이크가 맞붙은 바 있는데 전장이 언덕 지형이었던 데다 늪지대까지 있어 파이크가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다.
마케도니아의 사리사와 길이가 비슷하기 때문에 유사하거나 영향을 받은 무기로 생각하기 쉽지만 시간적, 공간적[1] 간극이 크다. 일단 외형부터 파이크는 이전까지 쓰인 창보다 날이 작아 아예 송곳 수준의 날만 달린 경우도 있었고, 중간을 분리할 수 있었떤 사리사와는 달리 파이크는 나무로 만든 단순한 일체형 창대에 날을 단 물건이었다. 일부 스위스 용병 등 더 쉽게 운반하고 관리하기 위해 사리사와 유사한 조립식 파이크를 사용한 경우도 있기는 했다. 따라서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고, 각자의 전장 환경에 적응하며 수렴 진화한 것에 가깝다.
용도에도 차이가 있다. 사리사 팔랑크스는 다른 병과 없이도 그 자체로 적의 공격을 받아내는 모루의 역할을 했지만 파이크 방진은 여러 보병 병과가 모여 모루의 역할을 하는 방진에서 화력을 담당하는 아퀘버스나 머스킷 총병들이 사격 후 재장전을 하는 동안 적의 보병이나 기병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방패 겸 장애물 역할을 맡았다.
유럽에서는 고대 헬레니즘 국가들의 팔랑크스 이후 한동안 장창 대형이 사라졌다. 긴 창이 기병에 대항하는데 안성맞춤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었으나 체계적인 훈련이 필요하고 기동성 저하로 인해 변화무쌍한 전장에 대처하기 어렵다는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창 대형보다는 검과 방패를 선호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기사의 전성기가 도래하기 전까지 한동안 장창 대형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장창 대형이 중세 유럽사에서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13세기 스코틀랜드에서이다. 지리적으로 산지가 많아 평지가 많은 잉글랜드의 기사에 대항하기 위해 스코틀랜드는 쉴트론이라는 파이크 대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2]이 대형은 원형, 혹은 직사각형의 모양으로 구축되었으며 스코틀랜드가 체급이 훨씬 큰 잉글랜드를 상대로 중세 내내 밀리지 않고 버티는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비슷한 시기 플랑드르의 소국들 역시 프랑스의 막강한 기병 전력을 상대로 파이크 대형으로 대항하여 큰 인상을 남겼다.
이후 파이크를 본격 유럽 전장의 중심으로 가져온 것은 스위스 용병이었다. 스위스 용병들은 위의 두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산지투성이인 국토로 인해 부족한 기병 전력을 메꾸기 위해 파이크를 주무기로 채택하였고, 여기에 할버드와 같은 다양한 폴암형 무기를 사용, 유럽 각지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후 스위스 용병을 모방한 란츠크네히트나 테르시오 등이 전장에서 맹위를 떨치면서, 근세 유럽의 근접전 보병 전력은 대부분 파이크병들로 통일되기에 이른다.
무기의 중심이 냉병기에서 흑색화약을 이용한 화기로 바뀌면서 창병의 역할도 보병 방진의 핵심에서 보병 화력의 주축인 총병을 호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여기에 갑옷 기술이 발달하면서 할버드, 글레이브, 빌 등 이전의 폴암류 무기로 방어구를 잘 갖춘 기병을 저지하기가 어려워졌다. 이 때 차라리 기병의 랜스보다 더 긴 창을 들려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스코틀랜드나 스위스 용병대의 전훈 등을 통해 입증되면서 중세 말부터 도입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스페인에서 중무장한 프랑스를 포함한 타 유럽의 기사에 대항하기 위해 파이크에 아퀘버스병을 조합하여 운용하는 테르시오를 개발했고, 이것이 당대 유럽의 거의 모든 전법을 상대로 우위를 보이면서[3] 르네상스와 종교전쟁 시대가 되면 창병의 무기가 파이크로 통일된다.
창병은 고대로부터 전장에서 창병끼리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근대화 이전에는 창병 부대가 다른 병과 부대에 비해 큰 피해를 보는 경우도 매우 흔했다. 다만 파이크가 등장한 시기는 느리지만 꾸준히 화기가 보급되며 기병과 중장보병의 빛이 바래는 시기였다[4]. 갑옷도 고대에 비해 가볍고 보호범위도 줄어들게 되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장창병 방진이 전장에서 서로 마주쳐 싸우는 Push of Pike 전투가 왕왕 발생했다. 이런 전투는 일단 시작되면 양 측이 서로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는데, 방진을 무너트리고 도망치기 시작하면 안 그래도 큰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서로 후퇴하지 않고 끝까지 맞붙을 때가 많았다. 이런 경향은 머스킷이 완전히 보급되어 제식병기의 지위를 차지하고, 총검이 개발되어 총이 창의 역할까지 대신할 수 있게 되기까지 지속되었다.
동유럽 쪽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았다. 스텝 초원이 넓게 펼쳐진 동유럽에서는 기병이 활개치기 좋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보병 전술이나 보병의 무기에 대한 관심이 떨어졌다. [5] 전술 역시 총을 든 보병의 화력을 중심으로 기병이 보조 역할을 하던 서유럽과 달리 기병의 속도와 돌격력을 중심으로 총을 든 보병의 화력이 기병을 지원하는 전술이었을 정도로 차이가 컸다. 폴란드의 경우 보병과 기병의 비율이 3:7일 정도로 보병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져 보병은 포대나 지키는 애들 정도로 취급했다.[6] 그래서 보병들도 대부분 화승총 등으로 무장했다. 파이크를 아예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서유럽과 같이 집단적으로 운용하지는 않았던 것. 시간이 지나면서 아예 파이크 대신 버디슈를 쓰기도 했다. 러시아의 경우 목책으로 기병의 접근을 막거나 버디슈를 사용했지만 스웨덴 같은 군사 선진국으로부터 파이크 방진을 받아들이려는 시도도 한 적이 있다.
파이크가 호위하는 화승총이 전장에 등장하면서 상대인 기병의 전술도 변했다 프랑스의 경우 위그노 전쟁 초기만 해도 중갑 기병이 기병 전력의 주류였지만 위그노 전쟁 말기 프랑스 기병대는 피스톨을 주무장으로 삼아 카라콜 기동 [7]을 주 전술로 활용하게 되었다. 다만 사거리가 짧고 명중률이 낮은 피스톨을 사용하던 카라콜 전술의 효용성에 대한 의문이 커지면서 결국 다시 총 한 발 쏘고 나서 돌격하는 전술이 자리잡게 되었다. 카라콜 문서 참조.
파이크의 방어능력과 공격력은 우수한 편이지만, 그 거대한 크기로 인해 세밀한 기술을 사용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양손으로 잡기에 한손무기만으로는 위협하기 어려웠으나 장병기나 양손무기로 지레의 원리를 이용해 끝단부를 타격할 경우 조종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 때문에 파이크 부대간의 싸움에는 도펠죌트너(양손검사)와 같이 파이크의 창대를 베거나 쳐내는 양손검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병사, 검과 방패를 다루는 병사, 폴암을 다루는 병사, 동양에서는 창을 걷어내기 위한 당파와 같은 무기를 다루는 병사 혹은 전시대 중무장 보병처럼 갑옷과 방패로 무장하고 파이크의 숲을 헤집는 중보병들이 상당기간 활약하기도 했다.
그러나 17~18세기가 되면서 아퀘버스 총기가 사라지고 보다 강력한 머스킷이 주력이 되면서 파이크병간 전투가 감소하게 되고, 귀찮게 따로 타겟티어(양손검-검+방패 보병)를 운용하느니 차라리 총병에게 칼을 들려주는 식의 통합적인 운영으로 바뀌면서 이러한 검보병은 사라진다.
다만 파이크 자체도 화기의 발달로 총의 신뢰도와 사거리 명중률이 늘어나고 선형진의 등장으로 쇠퇴하다 머스킷 총구에 다는 총검의 발명으로 그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부착상태에서도 사격이 가능한 소켓형 배요넷이 등장하면서 전열보병이 파이크 방진을 완벽하게 대체해 결국 파이크는 구시대의 유물로 사라지게 되었다. 파이크를 가장 나중까지(1720-30년대) 실전 무기로 유지한 나라는 스웨덴과 러시아였다.
이후 영국 등의 몇몇 나라에서는 고참 부사관의 상징으로 사람 키보다 조금 큰 하프 파이크 등이 사용되었기도 하지만, 19세기 중반이 되면 의장용으로 물러나게 된다.
3. 매체
보통 파이크병이 등장하며 창병의 발전형으로 많이 나온다. 대표적인 예가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나 문명 시리즈. 또한 대기병의 극한에 달한 무기답게 기병에게는 쥐약과도 같은 효과를 자랑하는 병과로 나오기도 한다.[1] 사리사는 기원전 마케도니아에서 출현하여 발칸 반도나 중동, 넓게 봐도 북아프리카 등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사용된 반면 파이크는 서, 중, 남유럽에서 주로 쓰였고 동쪽으로 갈수록 사용 빈도가 줄어 중동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심지어 동유럽이 중심지이고 서유럽 국가들과 수백년 동안 계속 싸웠던 오스만 제국조차 군대에 파이크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2] 다만 이 시기 사용되었던 파이크는 후대의 대형 파이크보다는 훨씬 짧았던 것으로 보인다.[3] 스위스 용병의 파이크병들은 테르시오의 아퀘버스에 대응하지 못해 파비아 전투에서 완패했고 주도권이 테르시오로 넘어가게 된다.[4] 그렇게 보급이 더뎠던 화약무기만을 가지고도 창에 상대적으로 유리한 검이나 폴암의 시대는 순식간에 끝났다.[5] 파이크 방진을 이루려면 기병의 돌격에 맞서 버티고 방진을 유지하기 위한 강도 높은 훈련이 필수인데 동유럽 귀족들은 서유럽에 비해 크게 가난한 농노들에게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 그런 훈련을 시키지 않았다.[6] 실제로도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의 주요 전술은 마차를 이용해 임시 방어벽을 만들고 그 안에서 포병과 보병이 우주방어를 하며 적 주력의 공격을 막는 동안 기병이 우회하여 적들을 격퇴하는 전략이었다.[7] 총으로 쏘고 퇴각했다가 장전하고 다시 돌아오는 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