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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槍 / Spear길다란 장대 끝에 뾰족한 끝 혹은 칼날이 있어, 휘두르고 찌르고 베고 던지는 게 가능한 병기. 보통 길이에 따라서 단창과 장창으로 구분한다.
2. 역사
구석기시대부터 유구하게 쓰여 온 무기. 인간이 총을 든 후부터 대형 포유류를 멸종시켰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창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대형 포유류들의 멸종은 진행되기 시작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저서 '사피엔스'에 따르면 인간은 수십만~수만 년 전부터 가는 곳마다 대형 포유류를 족족 멸종시켜 왔다. 위의 그림처럼, 현존 아프리카 코끼리보다 훨씬 거대한 매머드조차 인간 앞에서는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 되어야 했다. 그 원동력이 창이다. 인류가 개체 단위로 최강이 된 것은 총기의 등장 이후지만, 종 단위로 먹이사슬 최정상에 올라선 시점은 창을 쓴 후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창은 찌르기 공격의 효율성이 뛰어나서, 잘 만든 창에 적당한 힘과 기술이 실리면 베는 무기[1]나 두들겨 패는 무기에 비해 훨씬 확실하게 운동 에너지를 전달 할 수 있어 사람 몸통은 물론, 짐승의 무식하게 질긴 가죽과 근육도 한 방에 뚫어 버릴 수 있다. 거기에 집단생활의 조직력이 더해지니 짐승들에게는 정말로 답이 없는 것이다. 기린, 아프리카물소, 심지어 아프리카코끼리조차 인간의 집단 투창 짤짤이를 당하면 무수한 자상을 입다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감염 및 과다출혈과 쇼크로 쓰러진다. 또한 백병전도 가능하여 근접무기와 원거리무기를 둘 다 병행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인간 자체가 의외로 신체적 스펙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인간 스스로 과소평가하는 능력이지만, 수십km 이상을 계속하여 뛰거나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지구력과 무언가를 빠르고 정확하게 던지는 힘만큼은 인간이 모든 동물을 통틀어 가장 우수하다. 물론 운동부족에 시달리기 일쑤인 현대인 대부분에게는 해당사항이 없겠지만, 어차피 천부적으로 타고난 스펙이라 훈련하고 단련하면 충분히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인간이 마라톤과 행군, 야구를 할 수 있는 이유도 이것이다.
창이 준 또 다른 의의는, 사냥과 전투에서 개인 무력에 의존하는 비중이 매우 줄어 들었다는 점. 현장까지 쫓아올 수만 있다면, 그리고 조직력을 갖추면 전술(진형), 다양한 작전(치고빠지기나 유인, 함정 등)으로 개개인에게 특별한 무력이 없어도 맹수들을 언제든 사냥할 수 있게 됐다.
사용법을 익히기 쉽고, 공급이 용이해서 세계 어디에서나 인간은 창을 수렵과 전투무기로 사용했다. 다만 대양에 의해 고립되어 있던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는 부메랑을 먼저 개발했기에 석창을 수렵, 전투용 병기로 사용한 시점이 상당히 늦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사냥꾼이 창을 가지고 다녔고, 보어스피어 같이 서양에도 사냥창이 있었다.
고려나 조선에서는 호환이 발생하면 관청에서는 사냥꾼들을 모집하여 퇴치하였다. 이때 호랑이 사냥꾼들은 활이나 조총 몇 발로 타격을 준 후 계속 추적하여, 마지막에는 창으로 직접 찔러 쓰러 뜨리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이후 인류가 본격적인 문명 시대에 접어들면서 창은 수렵도구보다는 전쟁무기로 쓰인다. 칼에 비해 제작비가 저렴하며 대량생산이 쉽고,[2] 진형짜는 법, 찌르는 법만 집중적으로 훈련해도 (개인전이 아닌) 전쟁터에서 제구실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훈련기간[3]과 병력확보에 어떤 무기보다 수월했다.
유일한 문제는 그 엄청난 길이와 부피로 인한 휴대성. 그리고 인식이었다. 전근대 시기에 창이라는 물건에 대한 인식은 '본격적인 전쟁무기'이기 때문에, 전근대 시대에 아무나 이거 들고 다녔다간 반란이나 민란 일으키려는 줄 알고 공권력의 제재가 들어가기 쉬웠다.[4] 물론 개개인이 알아서 장만하거나 소지하는것 까지는 당시 행정력으론 거의 막을수도 없었으므로 현대사회처럼 칼같이 막았다는건 아니다.[5] 그리고 상술된 극악한 휴대성 때문에, 들고 다니기만 해도 이목을 집중시키는데다 사냥이나 대인전투 말곤 평시에 아무 쓸데가 없었던 이 무기는 만병지왕이라는 단어에 가장 가까운 무기였음에도 일상 호신용품으로는 선택받지 못했다. 그래서 조선의 '검계' 등 고대~중세의 깡패집단들이 칼은 흔히 가지고 다녔지만, 창을 들고 다닌 경우는 드물었다. 현대의 갱단이나 조폭이 권총, 커봤자 기관단총까지는 가지고 다녀도 돌격소총을 들고 다니지는 않는 것과 비슷하다.[6]
장창과 폴암의 예시.
창은 기본적으로 끝부분에 있는 창날로 찌르는 무기이다. 그러나 창의 자루 부분을 타격 병기로 이용하는 것도 가능하며 제대로 타격했을 때의 위력도 생각보다 뛰어나다. 쇳덩이가 달린 막대기를 전력으로 휘두르면 타격무기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중국에서는 봉술과 창술의 발달이 상호보완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으며, 전국시대 일본에서는 장창병들이 일제히 창을 들어올렸다가 내리치면서 그 타격으로 상대편 진형에 피해를 주는 전술을 구사하기도 했다.
길이를 최대한 늘린 장창의 경우 일대일이나 정면싸움은 우월한 길이로 제압할 수 있었으나 측면으로 적이 소수라도 돌아올 경우 측면을 지켜주는 다른 아군이 없는 장창병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거나 단검이라도 들어 저항할 뿐이었다. 때문에 막무가내 징집병이 아닌 제대로 된 부대의 장창병들은 언제나 다른 병종들과 함께 측면을 보완해 상호보완적으로 운영되었고, 개인의 이탈은 옆사람에게 줄줄이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많은 훈련이 필요했다. 장창 자체는 사리사처럼 고대에 이미 한번 등장했지만 로마에게 패배한 뒤 주력 병기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하지만 그 로마조차도 정면 힘싸움에 한해선 극강의 위력을 자랑하는 장창병을 보조부대로 종종 운영하기도 했으며, 특히 파르티아의 기병들과 머리끄댕이 잡고 드잡이질을 하던 동방의 군단에서는 단창과 함께 장창도 꽤나 자주 사용되었다. 로마의 동/서 분할 시기 즈음 가면 주력이 기병으로 전환되며 보병에 대한 투자가 줄어들자 장기간의 훈련과 보급을 받은 정예 보병이 대폭 줄어들었고 그 때문인지 보다 다루고 훈련하기 쉬운 란케아를 다루는 창병들이 정규 군단병 내에서도 등장하기 시작한다.
13세기 들어서자 스위스, 란츠크네흐트 같은 전문 용병단은 많은 경험에서 나오는 파이크 운용으로 무적을 자랑했고, 파이크를 상대할때도 대검을 이용해 멀리서 창자루를 자르거나 창을 쳐서 창병방진을 흐트려서 상대 창병방진에 깊숙히 침투하거나 아군 창병방진이 상대방 창병방진을 무너뜨리도록 지원하였다. 정면에서 흐트리기가 수월치 않거나 측면으로 공격하는 것이 더 나을 때에는 측면에서 돌격해 상대 장창병들을 박살내는 노련함을 보였다.
이런 혼란기가 끝나가고 나름 내부 서열정리가 되는 13세기 쯤엔 기사와 맨앳암즈, 그들을 보조하는 검을 주력으로 버클러 등 방패류 등을 사용하는 보병들과 조합하여 폴암과 창, 장창, 둔기류 등을 주력으로 쓰는 보병들이 많아지게 되고 장창병을 주력으로 쓰는 전문 용병단들이 등장하였다.
참고로 총안법에서 창은 도검의 일종으로 분류된다. 일부 폴암도 마찬가지. 사실 형법 등에서는 도검류에 무기가 될만한 날붙이 전반을 집어넣는다.
여담이지만,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에서는 사람을 공격한 인도호랑이가 주민 10여 명이 휘두른 막대기에 맞아 죽은 일이 발생했다.[7] 창 등 간격있는 무기를 집어든 인간
3. 다른 무기와의 비교
창은 일반적으로 검보다 제작단가가 싸고 제작하기가 매우 쉽다. 굳이 금속이 아니어도 적당한 길이의 날카로운 무언가만 충족되면 되며 그것만으로 충분한 살상효과를 가질 수 있다. 일례로 죽창과 같이 대나무를 끝부분만 뾰족하게 자르더라도 매우 위험한 흉기가 된다. 조금 더 공을 들여 주변의 뾰족한 돌을 막대기의 끝에 줄로 묶기만 해도 완성된다. 또한 금속으로 만들더라도 창날에만 철을 투자하면 되는 탓에 중요한 자원인 철을 아낄 수 있었다.
다만 민간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검과 창을 비교했을 때, 검은 검집만 허벅지에 매달아 두면 운신에 불편함 없는 은닉과 휴대 용이성이 있었다. 따라서 배우기만 하면 거의 모든 상황에서 사용이 가능했지만, 창의 경우 휴대하려면
창을 들고 다니면 역적이라는 말은 무협소설 작가들이 만든 문학적 창작이다. 중국을 지배하는 유목민족들은 한족이 무기 종류를 가리지 않고 규제했다. 물론 이게 완벽하게 시행되진 않았고 보통은 정적의 세력을 숙청하기 위한 빌미로 다루었다. 조선에서도 누군가가 사람들 불러모아서 무술과 신체단련을 하는 등 군사훈련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을 숙청을 위한 빌미로 삼거나 반체제행동으로 규제를 했지,[8] 딱히 무기 자체를 규제하지는 않았다. 당장 조선시대 때만 하더라도 호랑이 사냥꾼들은 활과 창을 가지고 다녔다.
검병 같은 경우 창병이 반드시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면[9] 거의 모든 방면에서 대응할 수 있는 기동성과 유연성이 있었지만, 이러한 장비를 제대로 다루려면 전문적이고 지속적인 훈련 과정을 통한 숙련이 필요하여 병사 하나당 유지비가 매우 비쌌다. 거기다 장병기보다 적과의 간격이 더 좁으니 만큼 적의 공격에도 더 많이 노출되므로 충분한 방호를 위한 갑옷과 투구 등 장비 보급에도 재정이 더 소요되었다. 따라서 검병이 주력이거나 핵심 요소 중 하나로 기능하는 군대의 경우, 용병이 발달하여 자기들이 알아서 장비와 숙련도를 갖추어 필요시에만 고용하면 그만이거나 시민군이 발달하여 구성원 전체가 집단적이고 체계적으로 교련되거나 세병제나 봉건제, 모병제, 사병처럼 전문군인이 있고 이를 사회경제적으로 뒷받침하는 체제가 형성되었으며, 고대 로마 레기온이나 에스파냐의 로델레로, 그리고 조선 팽배수 등의 검병들은 동서를 막론하고 정예군으로 취급되었다.
반면, 창은 높은 숙련도를 필요로 하는 검병들과 다르게, 위급할 때 농민을 징집하여 장창을 쥐어주고 훈련 몇 번을 끝으로 줄을 세운 뒤 탈영을 막기 위해 독전관을 세우고 방벽으로 세우기만 하면, 다른 병종들이 제 일을 해준다는 전제 아래에서 효율이 꽤 높다. 특히 중세 유럽처럼 분권화 경향이 큰 곳에서는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할 여력이 사라지다보니 유사시 징집병들로 머리수를 불리는 경우가 잦았으므로, 큰 훈련 없이 자리만 지켜도 제 역할은 해주는 창병이 수적으로는 많을 수밖에 없었다.
깨진 팔랑크스를 파고드는 로마군[10]
이처럼 창은 무장화 측면에서 매력적인 장점이 있는 만큼, 치명적인 단점도 있었다. 검에 비해 휴대성이 좋지 않고, 지형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조직력이 충분하지 않다면 쉽게 와해될 수 있었다.
따라서 창은 보통 저숙련도 병력을 대량 소집할 필요성이 있을 때 주 무장으로 활용되었다. 이렇게 징집된 병사들이 길이가 긴 창을 들고 대규모로 전개해 정면에서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서 기병 돌격조차도 패주시키고는 하였다. 이 경우 상대 측에서는 마찬가지로 정면을 창병으로 고착화해놓고 후열에서 데인액스나 할버드 등 전투도끼나 폴암류로 보조하여 균열을 일으키거나, 팽배수, 레기온, 도펠죌트너 등의 검병들이나 기사 혹은 카타프락토이처럼 기동성 좋은 병종들이 측면전투를 벌이거나, 장궁이나 투창, 프랑시스카 같은 투사무기들을 이용해 창병진을 와해하고자 했다. 기병이나 검병, 도끼병 등 충격병의 경우 특성상 기동전을 펼치며 싸워야 하고, 오랜 양성기간이 필요했으며, 집단에 대한 소속감과 충성도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 창병에 비해 쉽게 양성되는 편은 아니었다. 투사무기 역시 활이나 투석구처럼 검보다 더 길면 길지 짧지는 않은 훈련시간이 문제가 되거나, 쇠뇌처럼 기술이 필요하다보니 대량생산이 어려운 편이었다.
총기가 등장한 후에도 창은 여전히 전장의 주력으로 남았는데, 스페인의 테르시오 방진처럼 근접전 능력이 떨어지는 초창기의 총병을 보호하기 위한 이동식 방벽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창병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총검이 등장하고[11] 총병도 대기병 업무를 수행 할 수 있게 되면서 창병들도 전부 총병으로 교체되게 되어 전장에서 사라졌다. 게다가 창술도 입문하기가 쉬울 뿐, 정예병 소리를 들으려면 창병도 상당한 훈련을 필요로 했다. 스위스 장창병의 경우 5년을 해야 쓸만하다는 소리를, 10년을 해야 고참병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12] 그래서 막상 쓸만한 장창병을 마련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예컨대 북방전쟁 등을 겪으며 지역강국을 부상하면서 이를 이뤄낸 강군으로 평가받았던 스웨덴군도 그 시작점인 30년 전쟁 당시에는 서유럽 출신 고문관들로부터 스웨덴군 장창병들이 파이크를 제대로 집지도 못하고 방진도 제대로 못 만든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것을 해결하려면 병사들이 소속된 집단에 대한 소속감, 충성도가 높아야 하고 집단 상층부가 하층부에 대한 통제력과 영향력이 높아야 했다.
한편, 동시기 동아시아권에서는 좀 특이한 양상들이 나타났는데, 창병들이 대기병전투에는 잘 동원되지 않았다. 일단 동아시아 전반에서 활을 이용한 사격전 비중이 높았는데,[13] 이는 유럽에 비하여 대열의 간격을 더 넓게 만들어서 창을 집단운용하는 데에 불리해졌다. 그래서 유목세계와의 충돌이 잦았던 중국과 한국에서는 맞기병 전술을 채택하거나 전투 수레와 투사병기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장창병을 그리 많이 운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효신서의 원앙진에서 보듯, 장창병은 보병 중심의 왜구를 상대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었다. #조선 장창과 유럽 파이크의 차이 한국에서는 그마저도 잘 쓰이지 않았는데, 한정된 자원으로 북로남왜를 모두 상대해야 하는 안보환경 상 기효신서를 접하고 삼수병체제를 도입한 이후 조총의 활용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발전한 까닭에 총병의 화력에 집중하였기 때문이다.[14] 그런가 하면 일본에서는 테르시오마냥 장창병의 비율을 높게 유지하였는데, 이들은 기병을 잘 운용하지 않았으므로 대기병이 아니라 대보병에 특화되는 방식으로 장창이 발달하였다.[15] 그래서 동아시아의 장창술은 꽤 독특한 편이다. 일반적으로 창술은 접근거부를 목적으로 조직력 활용에 주목하여 찌르기에 집중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동아시아에서는 오히려 다른 병종들이 적을 방해하고 저지하는 동안 직접적 살상을 맡고는 하였다.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휘두르기 등 좀 더 역동적인 기술도 있었고, 일본에서의 창술은 (특히 장창의 경우)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기도 쓰였다.
창기병의 경우에는 양손으로 잡다가 겨드랑이에 창을 끼우는 카우치드랜스 방법을 도입하여 충격력을 극대화시켜 냉병기 중에서는 비할 데 없는 강력한 정면 충격력을 이용, 대보병전을 수행했다. 하지만 창기병 돌격은 창보병과 마찬가지로 대열을 이루지 않으면 효율이 몹시 떨어져서 열을 유지한 채 이동해야 하므로 방향 전환이 어렵고 측면이 약하며 상대도 순순히 아무 대책도 없이 정면 충돌해 주지 않는 데다가, 진형이 풀리거나 창의 거리 안쪽으로 파고들면 급격하게 불리해지는 단점이 있었다. 거기에 돌격거리 계산을 잘못 하기라도 하면 죽어나가는 건 창기병들 몫. 거기에 창에 상대가 100% 맞아준다는 보장도 없다. 예컨대 19세기 말 영국군 내에서의 인식에서 알 수 있듯, 훈련받은 검기병들은 검으로 창의 공격을 어떻게 받아내는지 알기 때문이다. #검기병 vs 창기병: 영국왕립합동군사연구소 저널 22권 (1878) #근대 기병검 vs 랜스 vs 총검 썰 모음 창기병들도 검도 가지고 있었지만, 급할 찰나에 빠르게 뽑아서 대응하기가 어려웠고 뽑는다 쳐도 검기병보다 검에 대해 숙련도가 떨어져서 발악 밖에 되지 못하였다. 게다가 훈련 강도와 기간도 일반 기병보다 강하고 길어 쉽게 양성할 수 없었다. 기병 전투는 측면 잡히는 쪽이 지게 되어있는 싸움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래서 나폴레옹 이후로도 기병의 주력은 검과 총을 사용하는 후사르가 될 수밖엔 없었다.
보병들도 하도 당하다보니 마차, 거치형 방패, 말뚝, 이동식 목책, 마대자루, 기타 수단을 동원한 야전축성, 투사무기 도배같이 별의 별 대책들을 강구하여 가면 갈수록 이전에 비해서는 효용이 떨어지다가 아예 화기까지 등장하자 16세기에 기병창 돌격으로 대표되는 기병창과 중갑을 위시로 한 충격력 위주의 기병 전술이 쇠퇴하면서 같이 쇠퇴하였다. 아예 기병의 위상이 이전시대보다 확 낮아졌을 정도라 검기병들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예시를 든다면 1503년 4월 28일에 일어난 체리뇰라(Cerignola) 전투가 있는데, 이 전투에서 활약한 에스파냐의 명장인 'El Gran Capitán' 코르도바는 일전의 1495년 세미나라 전투에서 스페인군이 프랑스군에게 패배한 뒤로 병종 구성을 개편하여 아퀘부스 부대의 숫자를 크게 늘려놓고 있었던 것을 이용해 프랑스군이 잘 볼 수 없는 위치에 야전 참호와 토담을 만들고 총병과 쇠뇌병을 다수 배치함으로써 중기병을 보유한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프랑스군 기병대는 지근거리에서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해야 했고 총지휘관인 느무르 공작 루이도 그 피해자 중 하나로 기록되고 말았다. 당시 프랑스군의 포병대는 에스파냐군의 야전축성을 파괴하는 데 실패했고, 이후 에스파냐군의 기보 총돌격이 프랑스군을 패주시키며 에스파냐군의 승리를 확정지었다. 그래도 1512년 라벤나 전투에서는 여전히 기병이 승패를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이는 야전에서 야전축성에 의지하지 않고도 화력의 중심인 총병을 보호하기 위해 고심하도록 만들었으며 이는 장창병과 총병의 유기적 운용으로 이어졌다.
1759년 7년 전쟁 당시 민덴 전투에서는 전투 중 명령 착오로 중앙에 있던 영국-하노버군 8개 보병 대대, 대략 5천명이 평지에서 정예 기병대가 버티고 있는 프랑스군 중앙으로 전진하는 자살행위를 저지르게 되는데 이를 보고 7천 5백 명의 프랑스 기병대들이 5천 명의 영국군을 항해 돌진했지만 3번에 걸친 돌격에서 27미터 거리에 들어왔을 때 영국군이 쏜 사격을 맞고 전부 실패했다. 심지어 마지막 돌격에선 메종 뒤 루아(국왕근위대) 기병여단이랑 카라비니에 드 프랑스(프랑스 기총병대)라는 프랑스 최고의 기병 2천을 투입했는데도 대기병 방진조차 짜지 않은 영국군 23보병연대 로열 웰시 퓨질리어한테 막혔다.
동양의 경우에는 동원되는 숫자가 서양과는 아예 차원이 다르고 게다가 대량의 병력이 발사하는 투사무기에 의해 이득보다 피해를 더 볼 확률이 많아 창기병이 전열 돌파를 위해 동원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팔기군 재현만 보더라도 갑옷을 충실히 갖춘 건 검이나 다른 근접전 무기를 든 경우고 창을 든 경우는 이보다는 경장으로 입거나 아예 궁기병처럼 입기도 했다. 서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서 흉갑이라던지 방어구를 충실히 입은 건 총을 가진 검기병 또는 검을 든 총기병들이었다. 그래도 창기병은 울란과 퀴레시어를 적절히 조합해서 쓰던 나폴레옹 덕분에 나폴레옹 전쟁 이후 약간은 살아났지만 이미 주력은 이전시대부터 그랬듯 총을 가진 검기병 또는 검을 든 총기병들이었다.
창보병들의 경우 로마시대까지도 정면 힘싸움에서는 대적할 무기가 없었다. 다른 무기들이 어느 정도 공간이 필요하거나(대부분의 냉병기) 길이가 짧은 반면(글라디우스 등의 짧은 검) 창은 찌르기라는 특성상 좁은 공간에서도 전투력이 발휘된다는 특징과 길이가 길다는 점을 이용해서 사정거리와 숫자의 힘으로 상대를 짓밟을 수 있었다. 위의 그림만 봐도 창을 쳐내고 들어가려 해도 첫 번째 창병과 근접전을 벌이기까지 상대해야 할 창이 최소 세 개다. 그러다보니 창진을 상대로 정면돌격하는 병사들은 그야말로 갈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창병방진은 방향전환조차 어려울 정도로 기동성이 낮기에 전술행동이 어려워 단독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대표적인 전투를 뽑자면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는 측면공격으로 무너뜨렸고 피드나 전투에서는 정면승부에서는 무참히 패배했지만 구릉지로 팔랑크스를 유인한 후 팔랑크스의 진형이 혼란스러워지자 전면에 생긴 틈을 통해 무너뜨렸으며 테르모필라이 전투에서도 불리한 지형으로 유인한 후 정면에서 싸움을 걸어 무너뜨렸다.
창으로 총병을 보조하는 스페인 테르시오[16]의 Pike & Shot을 묘사한 삽화.
이렇게 테르시오의 등장으로 장창이 총병의 보조 병과로 전쟁 전면에 나오면서 다시 창병의 중요성이 올랐다. 중국의 기록이나 맘루크의 전투경험 등 몇몇 기록에서는, (특히 중국 기록에서) 기병을 '척살'하는 용도로서는 창의 효용이 매우 낮았고 오히려 검이나 다른 단병기를 든 병사들이 효과적이라고 기술되어 있으나, 이는 전투 규모가 작거나 애초에 전장이 좁고 기동이 불리한 지형이거나 기병 측이 백병전보다 사격전을 선호하는 등 특수한 환경이 조성되어야 가능한 상황이었다.[17] 개인 병기 중에서는 창이야말로 기병에게 효과적인 무기였다. 무엇보다도 정작 단병기로는 기병을 살상하기 이전에 기병의 돌격을 막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18] 반면, 창병은 설령 스스로 기병을 직접 살상하지 못하더라도 조직력과 밀집된 방어력을 토대로 기병 돌격을 버틸 수 있으므로 다른 병과의 지원을 받아 대기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특히 총병이 등장하여 원거리 딜링을 넣어 화살 정도는 튕겨내던 기병들조차 쓰러뜨리게 되자 기병들은 총병을 향해 돌격할 수밖에 없었고, 총병을 호위하던 창병 역시 자신들이 기병을 상대로 얼마나 효율적인지를 다시 증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병조차 갑옷을 입어도 총에 어차피 뚫리는 판이니 비싼 전신 갑주 대신 중요 부위만 방호하거나 아예 갑옷을 얇게 만들어 입기 시작했기에 창병에게 본격적으로 데미지를 입게 되면서 창병은 총병과 함께 제2의 전성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전투의 중심은 "화력"이 되었고, 창병은 화력을 보호하는 식으로 기여할 뿐 정작 화력 그 자체를 강화시켜주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 기병들은 다른 장비보다 총을 주력 무기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에 비하여 보병은 총병을 보호해야 할 창병을 두어야 하므로 화력을 확보하는 데에 한계가 생겼다. 그 결과 오히려 기병이 보병을 상대로 화력우세를 점하면서 정면에서 충격을 가하여 방진을 격파하는 카라콜 및 그 변형 전술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차츰 보병 내에서 창병보다는 총병의 비율이 높이려는 시도가 이루어졌고, 총검의 등장과 화약무기의 지속적인 발달 끝에 창병의 보조가 없어도 총병만으로 충분한 저지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와 함께 기병들도 보병에 화력으로 압도당하자 측면전투 중심의 전술로 변화하면서 창병이 막아야 하는 충격기병이 대부분 사라져 버렸다. 이리하여 테르시오의 상징으로 대표되던, 방어력은 좋은데 공격력이 애매한 장창 기반의 밀집 방진을 대신하여 사격전에 치중한 선형진(Line formation)이 나타났다. 결국 장창 방진은 날이 갈수록 사거리와 위력이 강해지는 대포와 총으로 인하여 입지가 좁아졌고 기다란 총에 뾰족한 날을 단 총검의 개발로 창의 자리를 대체하면서 전장에서 보병이 사용하는 전투용 창은 완전히 사라진다. 반면 카라콜이 망한 이후 일어난 기병의 트렌드 변화 덕에 기병용 병기로서는 나름 장점이 남아있어서 좀 더 오랫동안 쓰이긴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검기병에 비해 효율적이지 못하여 주력 기병은 되지 못하였으며, 그나마도 더욱 발달하는 화기 탓에 리볼버 기병이나 기마소총병으로 전환되어 사라졌다. 이후 창은 주력 무기의 위치를 상실하고, 의장용이나 사냥용으로 주요 용도가 변화하게 되었다.
4. 창술
자세한 내용은 창술 문서 참고하십시오.5. 창잡이
자세한 내용은 창잡이 문서 참고하십시오.창을 사용하는 사람을 창잡이라고 한다.
5.1. 창병
자세한 내용은 창병 문서 참고하십시오.창을 사용하는 병과.
5.2. 랜서
자세한 내용은 랜서 문서 참고하십시오.창(랜스)를 사용하는 기마병.
6. 역사
6.1. 유럽
창은 그 특성상 밀집해서 사용할 때 그 진가가 드러난다. 그것을 극한으로 끌어낸 것이 그리스 시대에 개발된 팔랑크스라는 진형이다. 롱 스피어의 장점인 길이를 최대한 늘린 사리사라는 장창이 등장하면서 상대의 접근조차 불허하는 단단한 진형이 완성되었다.그러나 창의 특성상 길이가 길어질수록, 무게가 급증하고 다루기도 힘들어졌으며 그러다보니 정면을 제외한 측면과 후면을 들이치는 근접전에 대응하기도 힘들었고 진형이 깨질시 너무나도 취약하게 되었다. 때문에 전술적으로 움직이며 틈을 비집거나 만들면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로마군의 레기온에 그리스의 팔랑크스는 무너지고 동부 지중해는 로마 군의 손에 떨어진다. 물론 이 단점은 팔랑크스를 운용하는 국가들은 다 알고있었지만 이들은 국력의 한계와 타성에 젖어 단점을 보완하지 못했다.
고대 로마 말기 이후 동로마 제국과 그 근방을 제외하고 유럽에서는 중세 초까지는 로마수준으로 대규모 전투병을 유지하는 국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전과 같은 형식의 팔랑크스는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군대의 근간은 여전히 창병이 유지하고 있었고,[19] 이후 기사계급의 랜스와 이를 방어하는 보병 방진으로 이어졌으며, 갑옷 기술의 발달에 따라서 할버드, 폴액스, 빌 등의 복합 날을 가진 폴암이 발달했다.
스위스 용병이나 란츠크네히트같은 장창을 주력으로 하는 용병단도 존재했다.
화약무기의 발달로 주 무기가 총으로 변해갈 때, 장창은 파이크 앤 샷 전술의 주축으로서 다시 떠올랐다.로크루아 전투 이때의 장창은 아군 총병들을 기병의 공격으로부터 엄호하며 부대의 진형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았다.
18세기에 이르면 총의 성능향상과 대포의 발달로 인해 밀집대형이 위험해지고, 총검을 장착한 총이 라인배틀에서 창의 쓰임새를 밀어버리면서 보병의 주무기로서의 쓰임새가 다하게 된다. 19세기경까지 부사관의 지휘용/상징용 무기로 스펀툰이라는 단창이 남아있긴 했으나, 19세기 말이 되면 그마저도 깃발을 매다는 깃봉의 형태로 간략화 된다. 다만 울란 등 창기병은 이때에도 건재했는데, 여전히 당시 화기의 성능적 한계로 인해 정찰, 측면 타격, 추격, 섬멸 등을 맡을만한 병과는 기병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30년대에 들어 폴란드 기병도 창을 제식 병기에서 제외시키며 병기로서의 창의 역할은 끝나게 된다.
현대에도 총검이 남아있기는 하나, 최신 소총들은 모듈화로 총검 자체를 고려하지 않는 추세라 총검돌기도 대부분 사라졌으며, 총검술이 필요한 백병전 상황에서는 총검없이 머즐 스트라이크를 사용하는 식으로 쇠퇴했다.
6.2. 중국
영어로 쓰면 여전히 spear지만(병음으로 qiang이라고 쓰기도 한다), 무기의 분류법인 창 외에도 창(槍)이라고 불린 무기가 따로 존재했다. 즉 보다 큰 집합의 창과 그 안에 든 창이라고 보면 된다. 중국은 창(槍), 조선은 궁(弓), 일본은 도(刀)로 유명하다. 중국에서 창이 저리 각광 받는 이유는 바로 숙련의 용이성으로 인한 훈련기간의 짧음과 유교적 병농일치제에서 나오는 인구 수의 조합 때문. 특히 중국은 워낙 인구수가 방대하여 창의 사용 빈도가 다른 국가들보다 높았는데 병농일치제로 서양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징집병 물량을 뽑아내려면 창만한 물건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징집병이 아닌 숙련병은 검을 중시하여 한나라 시대 때 양손 검술이 융성했고, 이는 당나라 시대까지 이어져 당 태종은 1000명의 검사들을 휘하에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의 양손검이라는 검의 길이가 87cm가 약간 못 되어서 서양의 롱소드에 비하면 좀 짧았다고 한다.긴 나무 자루 끝에 크고 작은 날붙이를 단다는 개념은 이미 금속으로 된 무기를 만들기 시작하기 전부터 있었다.. 중국에서도 이런 개념으로 맨 처음 만들어진 찍는 戈가 있고, 이건 최소 상나라 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유물이 발견되고, 찌르는 투겁창인 矛가 동주 시대에 유물이 있고, 둘을 합친 戟이 있었다. 본디는 슴베창을 특칭하던 槍은 전국시대 말에는 이미 등장했다.
창이 특히 발달했던 중국의 창은 기본적으로 긴 막대 끝에 나뭇잎 모양의 창날과 창날 밑에 영이라 불린 붉은색의 끈 묶음이 있다. 이 끈 묶음이야말로 중국 창만의 특징이라 할 만한데, 이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세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는 적을 찔렀을 때 그 사람의 피가 손잡이를 타고 내려와서 손을 미끄럽게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간단한 장식이라는 설, 세번째는 칭기즈 칸이 서방 원정시에 적의 머리를 잘라서 창 끝에 매달아서 용맹을 과시한 것이 영이 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칭기즈칸이 생각 외로 빨리 죽어 중국을 지배한 기간이 짧기에 세번째는 별 의미없어 보인다.
그리고 실제 창을 사용시의 효과를 보면 아마도 1번과 2번의 이유가 모두 맞는 것으로 추정된다. 영문 위키백과의 설명에 따르면, 이 qiang은 최고급 목재로 만들어서 세게 휘두르면 탄성을 받아 휘는데, 고수가 창을 휘두를 때 창날의 이런 기동과 영의 시야 방해 효과가 겹치면 적은 지금 창날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저 적을 견제 하기위해 창끝을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리기만 해도 눈길을 끄는 특유의 붉은 영 덕분에 적의 집중을 상당히 흐트리게도 할 수 있다.
창의 뒷면에는 창준(槍鐏 / Spear tail)이라고 불리는 자그마한 창날이 있다. 이는 창을 지면에 고정시키기 위해 사용하거나 창날로 인해 생기는 무게 중심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하여 사용했고, 창날이 부러질 경우 임시방편으로 쓰기도 했다. 서양에서는 유사하게 그리스의 팔랑크스가 사용했던 사리사에도 달려 있었다. 다만 사리사는 지면에 고정시키기보다는 팔랑크스를 유지하며 들고 찌르는데 필요한 무게 중심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끝에 무게추 달았다. 민간용 창은 보통 준이 달려 있지 않다.
길이는 상당히 다양하나 최소한 사용자보다는 길어야 한다. 그러나 너무 길면 기동성이 떨어지니 사용자의 세배[20]가 넘는 길이는 안 된다는 중국 장병기의 원칙이 있었다. 단창을 제하면 2미터 이하는 없고 오히려 그 아래면 창을 쓰는 의미가 없다.
창의 단점을 해소하기 위해서 철창(鐵槍)이라는 것도 존재하였다. 나무를 전혀 쓰지 않고 모조리 철로 만든 것으로, 당연히 속은 비어있지만 철이 다보니 자루가 손상될 염려가 적고 타격 무기로도 사용 가능하기 때문에 공격력은 크게 상승한다[21]. 하지만 지나치게 무거워 다루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널리 쓰이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창이 전장에서 도태되면서 실전형 창술이 사라진 것은 서양 뿐이 아닌지라 남아있는 것은 민간의 물건들인데 이로 인해 대단히 섬세하고 오묘해 숙달하려면 긴 기간이 필요한 창과 창술이 남아 있다. 쿵후나 우슈에서 사용하는 창은 백낙곤을 이용해 만든 것으로 무협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창이 이것이다.
한편 중국은 화창의 영향인지 총(銃)이란 한자가 있음에도 총기류를 창(槍)이라 적는다. 이를테면 권총을 수창(手槍)이라 부르거나 기관총을 지창이라고 표기한다. 건슬링거 걸을 신창소녀神槍少女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6.3. 대한민국
조선 왕조 이전 고대에는 동예 병사들이 길이가 3장짜리[22] 긴 창을 들고 싸웠으며 보병 전술에 뛰어났다고 한다. 다만 여기서 쓰인 창은 매우 크고 아름다워 한 사람이 쓰기에는 힘들고 두 명 이상이 함께 썼다고 한다.[23]삼국통일전쟁 말기에 일어난 나당전쟁에서 매소성 전투 때 역시 신라의 장창병이 큰 활약을 했다고 한다.[24]
안압지 출토 쇠창.출처 서양의 할버드와 비슷하게 생겼다. 해당 유물은 드라마 해신에서 신라군의 창으로도 나온 바 있고, 비슷한 유물이 개성에서 출토된 적도 있다. (북한에선 철검이라고 한다.)
조선의《무예도보통지》에서는 24기 중 창법이 첫번째로 소개된다. '장창이 무예의 왕이다'라는 구절도 적혀 있으며, 무예가들 사이에서도 '천 번 내려치는 것이 한 번 찌르는 것보다 못하다.'라는 속담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찌르는 것은 베는 것보다 빠르게 가능하며 힘을 집중하기에 좋다. 편곤도 사실상 조선 창기병이 멸종된 상황에서 숙련이 쉬우며 강력하여 기병의 장병기로 들어온 것이지 멀리서 찌르는것의 강력함은 변함이 없다.
임진왜란 당시 한 군관이 명나라 장수들의 자문을 받아 창술의 기록을 남겼고, 훗날 스스로 연구하여 독자적인 세법을 추가하였다고 한다. 이중 명에서 배운 것이 12세, 스스로 깨우친 것이 12세로 모두 합쳐서 장창 24세라고 부른다.
창 날 밑에 석반이 뚜렷하게 보인다. |
임진왜란 이후 중국에서 삼지창의 일종인 당파가 도입되었는데 사극의 포졸들이 들고 나오는 바로 그 물건으로[25] 장창과는 다른 운용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곁가지를 이용해 적의 무기를 걸어 재껴 적의 장병기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주 용도였다. 길이는 7척 정도로 장창의 절반 길이였는데 길이가 너무 길 경우 적의 공격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적의 무기를 막아낼려면 최전선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 용도에 맞게 운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력과 담력이 필요했다고 한다. 또한 화전을 비롯한 화약무기를 발사할 때 받침대로 사용되기도 했다. 날 사이에 발사체를 끼우는 형식이었다고 한다.
죽장창의 길이는 2장으로 4미터를 훨씬 넘는 통대나무에 얇은 칼날을 달아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대나무 자루를 사용해서 일반적인 장창 보다 저렴하고 길이가 길긴 했으나, 길이가 긴데다 소재도 대나무라 내구도가 많이 약해 실전성은 많이 떨어졌다.
기창[26]은 지휘용, 의전용으로서의 무기이지만 24기 중 하나에 속하며 세법이 따로 존재한다. 기창을 하나의 무기체계로 인정한 것도 조선군만의 특성. 물론 실제 전장에서 활용될 기회는 적었다.[27]
조선 전기에 무과 시험과목에 기창을 포함했었고, 오위진법에서도 사용한 것을 보면 주로 보병용 단병접전에 썼으며, 개인 호신용 무술로서 남아있던것 같다.
《무예도보통지》에 따르면 2.5미터 정도의 창의 무게가 2.5 Kg라고 한다. 또한 창자루의 재질로는 척계광의 기록을 인용해 조목(稠木, 치밀하고 단단한 나무)이 제일이고, 합목(合木, 여러 나무를 합친 것(참조))이 그 다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6.4. 일본
일본식 창은 '야리(槍)'라고 한다.자세한 내용은 야리 문서 참고하십시오.
6.5. 서아시아·북아프리카
아시리아는 궁기병과 함께 창기병도 발달했었다. 페르시아 역시 창이 발달한 나라 중 하나였다.7. 가공 매체에서의 창
자세한 내용은 창잡이 문서 참고하십시오.8. 관련 문서
[1] 도검도 찌르기는 할 수 있지만, 리치가 짧아 위력이 떨어진다.[2] 참고로, 창날보다도 수급이 어려운 재료는 창대였다. 본격적인 군용 창은 3m를 훨씬 넘기는데, 이처럼 곧고 길며 단단한 목재를 대량으로 구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꽤 어려웠기 때문이다. 목재는 금속과 달리 접합도 불가능하며, 설령 못 등을 활용해 억지로 붙여도 내구도는 바닥을 치게 된다. 예외적으로 대나무가 자생하는 지역에서는 이런 창대의 수급이 상대적으로 용이했다.[3] 창에 비해 활이나 검은 매우 어렵다. 제대로 된 궁수, 검사가 되려면 아무리 열심히 수련해도 3~5년 이상은 너끈히 걸린다. 활로 이름을 날린 한국이나 잉글랜드에서는 궁수 양성에 최소한 7년을 잡는다. 반면 창은 몇 주 동안 기본기만 열심히 굴려도 아쉬운대로 머릿수를 채우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하다못해 훈련없이 그저 창만 들고 늘어서 있어도 제법 그럴듯한 인간 방벽이 완성된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제식무기로서 그렇다는 것이고, 장창을 휘두르는 창술까지 들어간다면 검과 거의 비슷한 숙련도를 요구한다. 단, 검이 장병기와의 대결에서 매우 불리한 점을 감안하면 상대적인 숙련도는 여전히 검이 훨씬 더 많이 요구된다. 뭐든간에 상대방보다 리치 짧은무기 가지고 있으면 불리하고, 리치 짧은쪽이 실력이 더 뛰어나야 겨뤄볼 수 있다.[4] 사실 이 부분은 약간의 오해의 소지가 있는게, 비단 창이 아니더라도 칼을 빼들고 다니는 등 무기류를 위협적으로 들고 다니면 당연히 제제를 받았다. 그러니 이런 무기를 갖고 다니기 위해서는 현대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이 무기로 해를 끼칠 생각이 없음을 보여야 했는데, 칼집에 넣으면 되는 검과 달리 창은 창날 부분을 아예 빼거나 천 따위로 꽁꽁 싸매야 했다. 그런데 이 경우 유사시에 창의 날을 신속하게 쓰기가 애매해 무기로써의 특성이 죽어버리기 때문에, 나중에는 아예 창날을 빼고 봉술을 연마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기도 했다. 봉 문서와도 비교하면 좋다.[5] 《수호전》에서는 한 등장인물이 길을 가다가 어떤 마을 앞에 창들이 꽂혀있는걸 보고서는, 이 마을이 큰 싸움에 대비하고 있다는것을 알아채고 한 마을주민에게 이걸 물어보는 장면이 있다. 그만큼 창이 당시에는 대표적인 전쟁무기였다는 것이다.[6] 물론 멕시코나 브라질의 갱단들은 대놓고 돌격소총을 지니고 다니지만, 이건 이들이 아예 공권력을 무시할 정도로 성장해 더 이상 일반적인 갱단이 아니라 군벌로 불러줘야 할만한 특이 케이스라 그렇다. 비유하자면 황건적의 난처럼 제대로 된 군사력을 지니고 있는 반란세력이 봉기한거나 마찬가지인 준전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7] 심지어 이 주민들은 창도 아니고 그냥 긴 막대기를 사용했다.[8] 대표적인 사례로 정여립의 난이 있다.[9] 기병의 접근을 위해 진을 치거나 등.[10] 이밖에도 로마군과 마케도니아군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삽화들을 보고 싶다면, 옆의 링크를 참조하기 바람.링크[11] 이 당시는 총도 총검도 길었기에 착검하면 거의 단창 수준이었다.[12] 코앞까지 달려들어 싸우는 육박전투에 필요한 담력, 그리고 우회기동에 필요한 제식능력이 요구되는 다른 무기들과는 달리 일단 대열만 맞춰서서 창을 찌르기만 해도 기본적인 전투력은 발휘할 수 있는 창은 신병에게 주기에는 좋은 무기였지만, 대열의 응집이 요구되므로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상황에서 장병기를 운용하려다가는 오히려 서로의 움직임을 방해하므로 신병이라도 어느 정도 훈련이 필요했다. 더 나아가 본격적으로 전술적인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베테랑이 되기 위해서는 결국 다른 병과들과 같은 수준의 훈련이 필요했다. 그래서 유럽의 파이크 훈련을 보면 적을 공격하기 위한 역동적인 투로를 보여주기보다는 행군과 이동, 전투대형 간 전환 시 서로 방해하지 않고 창을 다루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13] 유목민은 말할 것도 없고, 왜구도 통념과는 달리 활이나 조총을 많이 썼지 도검을 주무장으로 삼지는 않았다. 대왜구 전투의 전문가 척계광에 따르면 근접병기는 오히려 장창을 많이 사용했다고 하는데, 원래 일본 내에서 장창이 많이 쓰인 점을 생각해보면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다.[14] 살수도 존재하기는 했었지만 후대로 갈수록 포수로 통합되었고, 그 대신 야전축성을 활용하여 기병 등에 대비하고 포수에게는 도검류를 쥐어줘서 근접전을 수행하게 하였다. 참고로 원래 원앙진에서는 검병이나 창병 등은 투창과 활 등을 다룰 줄 알아야 하고 조총병도 쌍수도를 부무장으로 사용하도록 하였으므로 원거리 병과에 백병전을 요구한 점은 조선군의 특수성이 아니다.[15] 그래서 막상 장창을 주력으로 사용하면서도 대기병 능력이 취약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야리 문서를 참고할 것.[16] 테르시오는 전근대 스페인의 부대 편제 명칭이다.[17] 정작 중국사에서도 대기병용 근접무기는 창인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당나라에서는 대기병용으로 장창이나 맥도 등 장병기를 사용하였다. #당의 아사나하로에 대한 공격과 서역 평정, #당나라초 '갑기구장'(중장기병)의 쇠락과 경기병의 흥기 원인[18] 예컨대 글라디우스가 주무장이었던 고대 로마 군단병들도 대기병 전투는 기병대가 수행하거나 보병대 스스로 필룸으로 수행했는데, 필룸은 투창치고는 체급이 컸기에 그냥 단창처럼 들고 싸울 수 있었던 덕분이다. 그래서 나중에 투창이 필룸보다 더 짧은 웨르툼으로 바뀌었을 때에는 따로 제대로 된 창을 대기병용으로 휴대하였다.[19] 바이킹 소드를 잔뜩 들고 다닌다고 여겨지는 바이킹들도 주력 무장은 창과 도끼였다.[20] 6척(180cm) 기준 5.4m. 서양 장창과 길이가 비슷하다.[21] 금나라 말기의 장수인 이전(李全)이 철창을 잘 다루어 이철창(李鐵槍)이라고 불렸다.링크 또한 오대십국 시절 후량의 장수인 왕언장(王彦章)도 보통 사람이 들지 못하는 무거운 철창을 마음대로 휘저어서 왕철창(王鐵槍)이라고 불렸다. 출처: 중국을 말한다 10권/ 신원문화사/ 135쪽[22] 1장은 10척이고 삼국시대 한국에서 1척의 기준은 후한척인 23cm였으니, 계산하면 무려 6.9미터가 된다![23] 사실 창이 너무 길면 그 무게 또한 늘어나기 때문에 혼자서는 들기가 어렵다.[24] 하지만 이는 방송 다큐멘터리에서의 추측으로 재구성한 것일 뿐 삼국사기에 나온 매소성 전투 기록은 너무나 소략해서 전황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심지어 당측 기록도 아닌 신라측 기록임에도 기본적으로 기록해야 할 신라측 지휘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전투이다.[25] 사실 그 이전부터 한국에는 삼지창이 있었다. 초기 철기시대부터 유물이 나온것이 중요한 증거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한국의 삼지창은 중국의 당파와는 날의 형상이 달랐다.[26] 깃발 달린 창, 길이가 다른 창보다 짧아 단창이라고도 했으며, 덕분에 장창과는 달리 단병접전이 어느정도 가능했다.[27] 어찌 보면 당연한데, 기창은 기본적으로 지휘관이 들고 있는 무기이므로 기창이 실제로 사용될 지경까지 간다면 그 전투는 이미 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