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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도시에 대한 내용은 톨리야티 문서 참고하십시오.<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팔미로 톨리아티 Palmiro Togliatti | |
본명 | 팔미로 미켈레 니콜라 톨리아티 Palmiro Michele Nicola Togliatti |
출생 | 1893년 3월 26일 |
이탈리아 왕국 제노바 | |
사망 | 1964년 8월 21일 (향년 71세) |
소련 우크라이나 SSR 크림주 얄타 | |
국적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NNNcm, NNkg, 혈액형 |
가족 | 이름 (관계) |
학력 | 토리노 대학교 |
종교 | 무종교(무신론) |
직업 | 정치인, 사상가 |
최종 당적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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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공산주의 사상가, 정치인, 혁명가.이탈리아 공산당의 창립자 중 1명이며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공산당 서기장으로서 반파시즘 파르티지아노를 주도했고 전후에는 이탈리아 공산당을 이탈리아 최대 좌파 정당이자 프랑스 공산당과 함께 서유럽 공산주의 운동의 쌍두마차 역할을 하는 정당으로 성장시켰다.
2. 생애
2.1. 초창기
1893년 이탈리아 왕국 제노바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토리노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다가 이탈리아 사회당에 입당했다.1917년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인해 유럽 전역에 공산주의 운동이 확산되자 이탈리아 사회당에서도 볼셰비키 혁명 노선을 수용할지 여부를 놓고 논쟁이 격화되었는데 1921년 리보르노에서 열린 사회당 제17차 전당대회에서 그는 아마데오 보르디가, 안토니오 그람시, 안젤로 타스카 등 다른 사회당 혁명파 당원들과 집단으로 사회당을 탈당하여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했다.
2.2. 망명 생활
그러나 이탈리아 공산당 창당 1년만인 1922년에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이 수립되어, 공산당의 앞날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고 급기야 1926년에 이르러서는 국가 파시스트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이 금지되고 공산당 서기장 안토니오 그람시가 수감되기에 이르렀다.이렇게 당 조직이 풍비박산나자 체포를 피해 국외로 망명했고 다른 망명 공산당원들에 의해 서기장 대행으로 추대되었다.
서기장 대행 시절 그는 무솔리니 정권을 비판하며 반파시즘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34년에는 망명 공산당원들끼리 개최한 당대회에서 루제로 그리에코(Ruggero Grieco)가 정식으로 서기장에 선출되자 순순히 당권을 넘겨주었고 1936년에 스페인 내전이 시작되자 노동 계급의 국제적 연대라는 이상에 따라 스페인 공화국 인민전선 정부를 지지하는 국제여단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국제여단에서의 활약으로 명성을 쌓은 그는 1938년 당대회에서 정식으로 서기장에 선출되어 다시 당권을 거머쥐었고 1964년에 사망할 때까지 해당 직위를 유지했다.
2.3. 반파시즘 파르티지아노 투쟁
1943년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이탈리아 왕국이 연합국에 항복하자 이탈리아 공산당은 다시 합법정당으로 인정받았다.독일 국방군이 무솔리니를 구출하여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수립하자 그는 기독교민주당, 이탈리아 사회당 등과 함께 민족해방위원회를 결성하여 반파시즘 파르티지아노 투쟁을 전개했다.
2.4. 거국내각의 법무장관
1945년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이 붕괴되고 무솔리니가 총살당한 후 거꾸로 매달리는 비참한 최후를 맞음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의 이탈리아 전선은 일단락되었다.이후 그는 민족해방위원회 소속으로 함께 싸운 정당들로 구성된 거국내각에 법무장관으로 입각하여 파시스트 및 부역자 처벌을 주도했고 왕정 폐지를 당론으로 적극 추진하여 1946년 국민투표를 통한 왕정에서 공화정으로의 체제 전환을 실현했다.
2.5. 야당 지도자
그러나 1947년에 냉전이 격화되자 공산당은 미국 트루먼 행정부의 압력으로 인해 사회당과 함께 거국내각에서 축출되어 야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그러자 그는 사회당과 함께 인민민주전선이라는 정당연합을 결성함으로써 단일대오를 구성하고 1948년 총선에서 정권교체를 노렸으나 알치데 데 가스페리가 이끄는 기독교민주당의 아성을 넘지 못하고 패배했다.
다만 성과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는데 사상 최초로 공산당이 사회당을 제치고 원내2당으로 약진하는 데 성공했고 이로써 공산당은 사회당을 제치고 이탈리아 사회주의 운동의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공산당의 지지 기반을 확대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 1956년에는 보수적인 농민들을 포용하기 위해 이전의 국가 무신론 노선에서 탈피하여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등 상당히 온건한 노선을 내세운 '이탈리아의 사회주의로의 길 강령'을 채택하기도 했으나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완전히 탈피하진 않았기 때문에 훗날 유럽공산주의 노선을 택한 엔리코 베를링구에르 이후의 공산당과 달리 톨리아티 시대의 공산당은 여전히 극좌 정당으로 남았다.
톨리아티 시대의 공산당은 미국과 나토에 반대하며 소련과의 친분도 계속 유지했는데 1964년에 그는 소련을 방문하던 중 얄타에서 사망했다. 소련은 1966년에 스타브로폴나볼게[1]라는 자국 도시를 톨리야티[2]로 개칭하며 그를 기렸는데 해당 도시는 이탈리아 공산당과 소련이 모두 사라진 지금까지 이름을 바꾸지 않고 남아 있다.
3. 소속 정당
<rowcolor=#fff> 소속 | 기간 | 비고 |
이탈리아 사회당 | 1914 - 1921 | 입당 정계 입문 |
| 1921 ~ 1964 | 분당 사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