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FD5CA><colcolor=#000000> 헤센카셀 프리드리히 카를의 방백비 & 핀란드 왕국의 왕비 프로이센의 마르가레테 공주 Prinzessin Margarethe von Preußen | |
이름 | 마르가레테 베아트리체 페오도라 (Margarethe Beatrice Feodora) |
출생 | 1872년 4월 22일 |
독일국 프로이센 왕국 포츠담 신궁전 | |
사망 | 1954년 1월 22일 (향년 81세) |
독일연방공화국 헤센 | |
배우자 | 헤센카셀 방백 프리드리히 카를 (1893년 결혼 / 1940년 사망) |
자녀 | 프리드리히 빌헬름, 막시밀리안, 필리프, 볼프강, 크리스토프, 리하르트 |
아버지 | 프리드리히 3세 |
어머니 |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
형제 | 빌헬름 2세, 샤를로테, 하인리히, 지그문트, 빅토리아, 발데마어, 조피 |
종교 | 루터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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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의 공주. 프리드리히 3세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막내딸이다. 빌헬름 2세의 막내 여동생.남편 프리드리히 카를이 1918년에 독일 제국의 보호국인 핀란드 왕국의 국왕이 되면서 핀란드 왕비가 되었지만 1년도 안 돼서 동맹국이 항복하면서 왕비 자리에서 물러났다.
2. 생애
가족 사진 |
왼쪽부터 조피, 빅토리아, 마르가레테. |
마르가레테의 친조부모인 빌헬름 1세와 아우구스타 황후는 손주들 중에서 첫째인 빌헬름 2세, 둘째인 샤를로테, 셋째인 하인리히만 예뻐했다. 그러나 이후에 태어난 세 공주들인 빅토리아, 조피, 마르가레테는 찬밥 취급했다.
빌헬름 2세, 샤를로테, 하인리히는 프리드리히 3세 부부의 부적절한 양육을 보다못한 아우구스타 황후가 직접 데려다가 키운 반면 빅토리아, 조피, 마르가레테는 부모가 직접 키웠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서 빌헬름 2세는 대를 이을 왕위 계승 2위의 장손이고 샤를로테는 첫 손녀인데다 하인리히 역시 차남이지만 왕자여서 중요하게 여겨졌지만, 빅토리아, 조피, 마르가레테 세 딸들은 살리카법으로 왕위를 물려받지 못할 공주이고 프리드리히 3세 부부를 향한 빌헬름 1세 부부의 반감도 겹쳐서 더 그랬다.
2.1. 결혼 생활
헤센카셀의 카를 공자와 마르가레테. |
마르가레테는 막시밀리안 폰 바덴에게 빠져들었지만 그 둘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르가르테는 막시밀리안의 친구인 헤센카셀 가문[1]의 카를 공자와 결혼했다. 카를은 결혼 후 헤센카셀가의 당주가 되었다. 그는 1918년 10월 9일에 핀란드의 왕으로 선출되었지만, 1918년 12월 14일에 왕위를 포기했다.
1901년에 마르가르테는 어머니 빅토리아 황후로부터 프리드리히쇼프 성을 물려 받았다. 굉장히 좋은 성[2]이였기 때문에 기존에 살던 남편이 태어나 계속 지내던 홀슈타인의 성과 마르가르테와 남편이 지내고 있던 럼펜하인 성에서 프리드리히쇼프를 주 거주지로 삼았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필리프, 크리스토프,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 리하르트, 볼프강 |
슬하에 6남을 두었으며 그 중 3, 4남과 5, 6남은 쌍둥이다.
마르가레테는 아이들을 외가인 영국식으로 교육했다. 아이들을 위해 영국인 유모를 고용했고, 일부 아이들은 영국의 학교에서 공부했다. 크리스토프는 마르가레테에게 편지를 대부분 영어로 썼으며 필리프는 마르가레테와 대부분 영어로 대화했다. 또한 마르가레테는 프로이센 왕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강압적인 분위기와 엄격한 방법으로 아이들을 키우지 않았다. 덕분에 아이들은 어머니와 매우 가깝게 지냈다.[3] 그리고 당대 상류층 아이들과 달리 막내 2명을 제외하고 모두 기숙학교를 다녔다.[4]
2.2. 가정사
이종사촌동생들인 헤센다름슈타트 가문 못지 않게 이쪽도 가정적으로 비극을 겪었다.1차 세계 대전 때 남편은 큰 부상을 입고 장남과 차남[5]은 전사하고 5남은 2차 세계 대전 때 전사했다. 6명의 아들들 중에서 자녀를 낳은 아들은 2명으로 3남 필리프와 5남 크리스토프이다.[6]
3명의 며느리 중 3남 필리프의 부인인 사보이아의 마팔다[7]와 4남의 부인인 바덴의 마리 알렉산드라[8]는 전쟁 중에 폭격으로 죽었다. 전후에 막내 며느리인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는 마르가레테의 조카손자[9]와 재혼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연합군이 마르가레테가 거주하던 프리드리히쇼프 성을 점령하여 살던 곳에서 나가서 지내게 되었다. 성을 점령했던 미국인 장교 3명이 헤센 가문의 보석을 훔쳐 한 때 가문의 재정 상황이 이전보다 악화됐었다. 헤센 보석 도난 사건 참고.
차이점이 있다면 헤센다름슈타트 가문은 아예 단절됐지만 이쪽은 현재까지 후손들이 이어지게 된다.
2.3. 사망
1954년 서독 헤센에서 향년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프리드리히 3세와 빅토리아 황후의 자녀들 중에서 큰 오빠 빌헬름 2세처럼 80세 이상 장수했다.3. 가족관계
자세한 내용은 호엔촐레른 가문 문서 참고하십시오.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프로이센의 마르가레테 공주 (Princess Margaret of Prussia) | 프리드리히 3세 (Frederick III) | 빌헬름 1세 (William I) | |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Frederick William III) |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여공작 (Duchess Louise of Mecklenburg-Strelitz) |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아우구스타 공녀 (Princess Augusta of Saxe-Weimar-Eisenach) |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 (Charles Frederick, Grand Duke of Saxe-Weimar-Eisenach) | |||
러시아 제국의 마리야 파블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Maria Pavlovna of Russia)[10] | |||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Victoria, Princess Royal) | |||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앨버트 공자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 |||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 (Ernest I,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 |||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Saxe-Gotha-Altenburg) | |||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 |||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Prince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earn)[11] | |||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 (Princess Victoria of Saxe-Coburg-Saalfeld)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프리드리히 빌헬름 공자 (Prince Friedrich Wilhelm) | 1893년 11월 24일 | 1916년 9월 12일 | |
2남 | 막시밀리안 공자 (Prince Maximilian) | 1894년 10월 20일 | 1914년 10월 13일 | |
3남 | 헤센카셀 방백 필리프 (Philipp, Landgrave of Hesse) | 1896년 11월 6일 | 1980년 10월 25일 | 사보이아의 마팔다 공주[12] 슬하 3남 1녀 |
4남 | 볼프강 공자 (Prince Wolfgang) | 1896년 11월 6일 | 1989년 7월 12일 | 바덴의 마리 알렉산드라 공녀 |
오틸리 묄러 | ||||
5남 | 크리스토프 공자 (Prince Christoph) | 1901년 5월 14일 | 1943년 10월 7일 |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공주 슬하 2남 3녀 |
6남 | 리하르트 공자 (Prince Richard) | 1901년 5월 14일 | 1969년 2월 11일 |
3.3. 후손
장남과 차남이 자녀는 커녕 결혼도 못하고 죽은 터라 남편 프리드리히 카를의 뒤를 이은 건 삼남 필리프로 사보이아의 마팔다와 결혼해 슬하 3남 1녀를 두었다. 한편 헤센 대공가인 헤센다름슈타트 가문은 게오르크 도나투스의 남동생 루트비히가 1968년 자녀 없이 죽어서 단절되었고 헤센 대공국의 (명목상) 대공위는 필리프로 넘어왔다.
필리프의 장남 모리츠는 슬하 2남 2녀를 두었다.
현재 헤센 가문의 당주인 도나투스는 슬하 2남 1녀를 두어 현재까지 이어진다. 참고로 장녀와 장남은 쌍둥이 남매다.
4. 여담
- 조카인 빅토리아 루이제와 공통점이 많고 묘하게 비슷한 삶을 살았다. 둘 다 형제 자매들 중 막내였고 가장 장수했으며, 두 사람의 자손들은 현재까지 이어져 헤센 가문과 하노버 가문의 당주를 맡고 있다. 참고로 헤센카셀 가문의 헤센카셀 선제후국과 하노버 왕조의 하노버 왕국은 둘 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때 오스트리아 편을 들어서 프로이센에 의해 영토가 통째로 합병돼서 멸망했다. 이후 이 고모와 조카는 마르가레테의 며느리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관련으로 한번 더 엮이게 된다. 소피아가 마르가레테의 5남 헤센카셀의 크리스토프와 사별한 뒤, 빅토리아 루이제의 차남 하노버의 게오르크 빌헬름과 재혼했다.
- 마르가레테가 가장 사랑하던 아들은 장남 프리드리히였다. 1차 세계 대전 중 장남이 사망한 후 5남 크리스토프를 가장 사랑했지만 2차 세계 대전에서 크리스토프마저 전사했다.
[1] 헤센 가문의 종가다.[2] 빅토리아 황후가 말년에 거주하던 성이었다. 처음 지어질 때부터 전기, 엘리베이터, 온수와 냉수가 나오는 화장실이 설치됐다. 당시에는 굉장히 혁신적인 건축물이었다. 황궁을 비롯해서 백 개가 넘는 거주지가 이미 있음에도 빌헬름 2세는 빅토리아 황후가 프리드리히쇼프와 그 안의 예술품, 보석들을 마르가레테에게 물려줘 실망했다고 한다.(...) 현재는 5성급 호텔이다.[3] 막내 아들 크리스토프는 심지어 자신의 연애에 대해서 어머니와 자세히 이야기했다.[4] 첫째와 둘째 아들들이 베를린의 육군사관학교에 헤르만 괴링과 같이 다녔다. 이는 죽은 아들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1930년대에 마르가르테가 괴링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5] 장남 프리드리히는 적군의 총검에 의해 목이 잘렸으며 가슴이 칼에 찔렸다. 차남 막시밀리안은 영국군의 기관총에 부상을 입어 치료 중 영국군에게 잡혔다. 영국 야전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그는 의사에게 자신이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자라고 말했고, 독일에 있는 그의 어머니에게 보낼 라켓을 주었다. 영국인 의사는 라켓을 보내겠다고 약속했으며 몇시간 이후에 막시밀리안은 사망했다. 영국에 있는 의사의 부인이 영국의 메리 왕비에게 전해주어 마르가레테는 아들의 라켓을 받게 되었다. 막시밀리안은 사망한 마을에서 묻혔다. 하지만 독일인에 대한 반감 때문에 마을이 막시밀리안이 묻힌 위치를 알려주지 않아 1926년에서야 조지 5세의 도움을 받아 독일로 이장할 수 있었다.[6] 그럼에도 손주들은 모두 9명이었다.[7]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차녀. 2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연합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8] 막시밀리안 폰 바덴의 딸. 7명과 함께 여성 적십자 활동을 하던 중 1944년 1월 29일부터 30일까지 프랑크푸르트에서의 폭탄 공격으로 사망했다. 그들이 피신한 지하실은 건물의 무게로 무너져 마리 알렉산드라의 시신은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9] 조카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부인 빅토리아 루이제의 차남 게오르크 빌헬름.[10] 파벨 1세의 3녀이다.[11] 조지 3세의 4남이다.[12]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차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