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FE0E9><colcolor=#000> 츠바이브뤼켄의 궁정백 프리드리히 미하엘 Friedrich Michael, Pfalzgraf von Zweibrücken | |
이름 | 프리드리히 미하엘 폰 팔츠츠바이브뤼켄비르켄펠트 (Friedrich Michael von Pfalz-Zweibrücken-Birkenfeld) |
출생 | 1724년 2월 27일 |
프랑스 왕국 알자스 리보빌레 | |
사망 | 1767년 8월 15일 (향년 43세) |
팔츠 선제후국 슈베칭엔 | |
배우자 | 팔츠줄츠바흐의 마리아 프란치스카 여백작[1] |
자녀 | 카를 2세 아우구스트, 클레멘스 아우구스트, 아말리, 마리아 안나,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카를 프리드리히 슈테판(사생아) |
아버지 | 츠바이브뤼켄 궁정백 크리스티안 3세 |
어머니 | 나사우자르브뤼켄의 카롤리네 |
형제 | 카롤리네 헨리에테 크리스티네, 크리스티안 4세, 크리스티아네 헨리에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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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팔츠 비텔스바흐 가문의 분파 출신인 츠바이브뤼켄 궁정백이자 프랑스 왕국 부르봉 왕조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장성.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프랑스군에서 복무했고 7년 전쟁에선 오스트리아군에서 활약했다. 또한 바이에른 왕국의 초대 국왕인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아버지이기도 하다.2. 일생
2.1. 초기 경력
프리드리히 미하엘은 1724년 2월 27일 알자스의 리보빌레[2]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팔츠츠바이브뤼켄 궁정백 크리스티안 3세(1674~1735)이고, 어머니는 나사우 가문 출신인 나사우-자르브뤼켄 백작 루트비히 크라프트의 딸 카롤리네(1704~1774)이다. 본래 형 크리스티안이 상속자였기 때문에 그는 1734년 3월 10일, 불과 10세의 나이에 알자스 보병대의 명목상 대령이 되면서 프랑스군에서 군 경력을 시작했다가 몇년 후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가서 레이던에서 공부했다. 그는 젊은 시절에 당대 유럽 최고의 미남으로 손꼽혀 많은 인기를 누렸다.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1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미하엘은 프랑스의 바이에른 원정대에 가담하여 프라하 공략전에 참가했고 2개 척탄병 대대를 지휘하여 에그라 요새 공략에 기여했다. 1742년, 미하엘은 프랑스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고 6월부터 12월까지 그림 벨 아일 공작 샤를 루이 오귀스트 푸케의 지휘하에 프라하 방어전에 참여했다가 아군과 함께 프랑스로 철수했다. 1743년 1월, 미하엘은 바이에른에서의 여러 전투에 참여했고 같은 해 2월 20일에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5월 14일에 야전관 사령관을 맡았다. 그해 7월, 그는 바이에른 제 4군단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왔고, 노아유 원수 밑에서 알자스 방면에 주둔해 임무를 수행했다.1744년 4월, 미하엘은 코이니 원수의 지휘하에 린강 방면 군단에 배속되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비상부르 탈환전에 참가했고 아우게넘 전투에도 가담했다. 이후 세귀르 공작의 군단과 함께 바이에른에서 겨울을 보낸 그는 1745년 4월 파펜호펜 전투에서 분전했으나 패배를 면치 못하고 세귀르 공작을 따라 퇴각했으며 5월에 바랭 군단에 가담해 콩티 공작 밑에서 복무했다. 1746년 2월 16일, 미하엘은 중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그는 콩티 공작의 군대와 함께 몽스와 샤를루아 공성전에 참가했으며 모리스 드 삭스 원수가 지휘하는 프랑스 본군과 함께 1746년 10월 11일 로쿠스 전투에서 영국-헤센-네덜란드 연합군과 맞붙어 승리했다.
같은 해 11월 27일,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팔츠줄츠바흐의 여백작 마리아 프란치스카(Maria Franziska, Pfalzgräfin von Sulzbach 1724~1794)와 결혼했다.
2.3. 7년 전쟁
7년 전쟁이 발발한 1757년 11월, 프랑스 정부는 그를 오스트리아군 장성으로 전근시키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로 간 그는 포르포르타티 용기병 부대를 인계받고 기병대 대장으로 승진했다. 1758년 1월 18일, 미하엘은 제국군 야전 원수로 승진했고 지난 해에 로스바흐 전투에서 전멸한 제국군을 재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해 5월 작센 침공 작전을 위해 집결한 오스트리아군을 지휘한 그는 9월 5일 소넨슈타인 요새를 공략해 대포 38문, 곡사포 7문, 부대기 10기를 노획했다. 이후 10월 14일, 그는 호크키르히 전투에 참가해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군을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또한 11월에 라이프치히를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고 이후 제국군을 겨울 숙영지에 배치된 후 빈으로 돌아갔다.1759년, 미하엘은 제국군을 이끌고 8월 5일 라이프치히를 함락하고 8월 14일엔 토르가우를 점령했으며, 8월 22일엔 비텐베르크를, 그리고 9월 5일엔 드레스덴을 공략했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은 그해 9월에 비텐베르크, 토르가우, 라이프치히를 탈환했다. 11월20일, 미하엘은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의 지휘하에 막센 전투에 가담해 프로이센군 14,000명을 항복시키는 데 일조했고 12월에 다시 빈으로 돌아갔다. 1760년 1월 6일, 미하엘은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황금 양모 기사 직위를 수여받았고 1월 21일에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을 수여받았다. 1760년 8월 20일 스트레일라 전투에서 프로이센군과 맞붙어 패배했지만 며칠 후 프로이센군이 철수하면서 스트레일라 마을을 점거한 그는 토르가우와 비텐베르크 요새를 공략했다. 그러나 11월 3일 토르가우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악전고투 끝에 승리하자, 미하엘은 라이프치히와 토르가우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1761년, 미하엘은 퇴역하면서 제국군의 지휘권을 요한 폰 세르벨로니에게 넘겼다.
2.4. 이후의 경력
1763년 7년 전쟁이 종결된 후, 미하엘은 보헤미아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이후엔 비밀 군사 평의회 의장에 임명되었으며 만하임 총독을 겸임했다. 이후 그는 만하임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767년 4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뮌헨의 성 미하엘 예수회 성당에 묻혔다. 이후 그의 장남인 카를 아우구스트(1746 ~ 1795)가 팔츠츠바이브뤼켄 궁정백 카를 2세 아우구스트가 되었고 후사가 없던 팔츠-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테오도어의 뒤를 이을 계승자가 되었지만 그도 1795년 후사 없이 죽으면서[3] 차남인 막시밀리안 요제프가 루트비히 4세 이래 분열되었던 비텔스바흐 가문의 모든 영지를 통합했다.3.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팔츠츠바이브뤼켄 공작 카를 2세 아우구스트 (Karl II. August, Herzog von Pfalz-Zweibrücken) | 1746년 10월 29일 | 1795년 4월 1일 |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4] 슬하 1남 |
1녀 | 작센의 왕비 아말리 (Amalie, Königin von Sachsen) | 1752년 5월 10일 | 1828년 11월 15일 |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5] 슬하 1녀 |
2녀 | 바이에른 공작부인 마리아 안나 (Maria Anna, Herzogin in Bayern) | 1753년 7월 18일 | 1824년 2월 4일 | 바이에른에서의 공작 빌헬름[6] 슬하 1남 1녀[7] |
2남 |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Maximilian I Joseph) | 1756년 5월 27일 | 1825년 10월 13일 | 헤센다름슈타트의 아우구스테 빌헬미네 슬하 2남 2녀[8] |
바덴의 카롤리네 슬하 6녀[9] |
[1] 팔츠 선제후 카를 3세 필리프의 외손녀.[2] Ribeauvillé. 본래 팔츠비르켄펜트 분가의 영지였으나 1680년 프랑스로 넘어갔다. 독일어로는 라폴츠바일러(Rappoltsweiler)로 발음한다.[3] 심지어 1799년 죽은 카를 테오도어보다 빨리 죽었다. 사실 카를 아우구스트는 본인과 이름이 똑같은 아들 1명이 있었으나 1784년 8살에 죽었다. 사실 나이상으로만 삼촌-조카뻘이지 혈통상으로는 12촌 형제지간이다.[4]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의 딸.[5] 위에 나온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의 오빠.[6] 마리아 안나의 친가쪽 7촌 숙부이다.[7] 이중 공작위를 이어받은 아들 피우스 아우구스트(1786 ~ 1837)의 친손녀(외아들 막시밀리안 요제프의 차녀)가 바로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다. 막시밀리안 요제프의 아내이자 엘리자베트의 어머니인 루도비카 공주는 바로 후술되는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딸로 막시밀리안 요제프와 루도비카는 오촌 고모-조카이기도 하다. 루도비카가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가 재혼하여 52살에 얻은 늦둥이 딸이어서 이렇게 촌수가 꼬였다.[8] 루트비히 1세, 로이히텐베르크 공작부인 아우구스테, 오스트리아의 황후 카롤리네 등[9] 프로이센의 왕비 엘리자베트 루도비카,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조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