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이드 패터슨 Floyd Patterson | |
출생 | 1935년 1월 4일 |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웨이코 | |
사망 | 2006년 5월 11일 (향년 71세) |
미국 뉴욕주 뉴팰츠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권투 전적 | 64전 55승(40KO) 8패(5KO) 1무 |
신장/리치 | 183cm / 180cm |
체급 | 라이트 헤비급, 헤비급 |
스탠스 | 오소독스 |
주요 타이틀 | 1952 헬싱키 올림픽 권투 -75kg 금메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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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 권투 선수.2. 전적
- 주요 승: 이본 더렐(2), 토미 잭슨(2), 아치 무어, 피트 라데마처, 로이 해리스, 브라이언 런던, 잉게마르 요한슨(2), 톰 맥닐리, 에디 메이컨, 조지 추발로, 헨리 쿠퍼, 오스카 보나베나
- 무승부: 제리 쿼리
3. 커리어
1935년 1월 4일, 노스캐롤라이나주 웨이코의 한 오두막에서 11명의 자녀들 중 셋째 아이로 태어난 패터슨은 어린 시절 브루클린의 베드퍼드스타이베선트 지역에서 성장했다.패터슨은 학교에서 무단 결석을 하는 횟수가 잦았고, 11살이 될 때까지 글을 읽거나 쓸 줄도 몰랐다. 또한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다른 사람이 말을 걸면 그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려 하지 않았다. 결국 패터슨의 어머니는 아들을 뉴욕시 외곽의 비행 청소년들을 위한 기숙학교인 윌트윅 소년학교로 보내게 되었다. 그곳에서 패터슨이 만난 새로운 선생님들은 그가 글을 읽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왔으며, 권투를 시작할 수 있도록 격려하였다.
패터슨이 14살이 되었을 때, 그는 맨해튼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서 커스 다마토가 소유하고 운영하던 그래머시 짐에서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패터슨이 본격적으로 아마추어 복서로 활동한 시기는 1950년으로, 이후 1951년 뉴욕 데일리 뉴스 골든 글러브, 뉴욕 골든 글러브 토너먼트 오브 챔피언스 모두 오픈 미들급에서 우승한다.
1952년 뉴욕 데일리 뉴스 골든 글러브, 뉴욕 골든 글러브 토너먼트 오브 챔피언스, 인터시티 골든 글러브 챔피언십 모두 오픈 라이트헤비급에서 우승하였으며, 같은해 내셔널 AAU 미들급 챔피언십에서도 우승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52 헬싱키 올림픽에 미들급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금메달을 따낸 후 프로로 전향하였다.
패터슨은 프로 경력 초창기에 라이트 헤비급에서 활동하였고, 1954년 전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조이 맥심과의 대결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판정패를 당하며 첫 패배를 기록했다.
1956년 록키 마르시아노가 은퇴하면서 공석이 된 헤비급 타이틀을 손에 얻기 위해 패터슨은 타이틀 엘리미네이터 경기에서 토미 잭슨을 판정으로 물리친 뒤, 같은해 11월 30일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아치 무어를 5라운드 만에 KO시키며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이때 패터슨은 21세의 나이에 역대 최연소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1]
패터슨은 타이틀을 4차 방어까지 성공했지만, 1959년 6월 스웨덴의 잉게마르 요한슨에게 3라운드에만 7번이나 다운을 당하면서 TKO패를 당한 후 타이틀을 처음으로 잃게 되었다.
이후 패터슨은 요한슨을 재경기에서 꺾으며 사상 최초로 헤비급 타이틀을 되찾은 선수라는 업적까지 세우며 권투 역사에 다시 한 번 이름을 남기게 된다.
그러나 1962년 소니 리스턴에게 1라운드 만에 KO패를 당하며 두 번째로 타이틀을 잃었고, 10개월 후 재경기에서도 똑같이 1라운드 KO패로 무너진다.
1965년 11월 22일, 헤비급 타이틀을 되찾기 위해 당시 챔피언이었던 무하마드 알리에게 도전한다. 하지만 경기 내내 알리에게 압도당하던 패터슨을 보다못한 주심이 12라운드에 경기를 중단시키며 패터슨은 이번에도 챔피언십 도전에 실패했다.
1967년 6월 9일, 제리 쿼리와의 10라운드 논타이틀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하였다. 하지만 경기를 지켜보던 링사이드 언론의 대부분은 패터슨이 승리했다고 생각했다.
1967년 10월 28일, 제리 쿼리와의 2차전에서 12라운드 머저리티 판정패를 당하였다. 이 경기는 무하마드 알리가 미국 육군에 징집되는 것을 거부하여 타이틀을 박탈당한 후 공석이 된 헤비급 타이틀을 걸고 WBA가 기획한 8강 토너먼트의 일부였다.
1968년 9월 14일, 패터슨은 토너먼트의 승자이자 새로운 WBA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지미 엘리스을 상대로 그의 마지막 타이틀 도전에 나섰다. 결과는 패터슨의 15라운드 판정패였으나, 이번에도 판정논란이 불거졌다.[2]
1972년 9월 20일, 무하마드 알리와 7년 만에 재경기를 가졌다. 6라운드 알리는 콤비네이션을 날리며 패터슨의 왼쪽 눈 위에 커팅을 냈고, 7라운드가 끝날 무렵 패터슨의 왼쪽 눈이 심하게 부어오른 탓에 주심이 경기를 중단시켰다. 이후 패터슨이 은퇴를 발표하면서 이 경기는 패터슨의 커리어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은퇴 후 1977년부터 1984년까지 뉴욕주 체육 위원회 위원을 지내다가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1998년 4월 1일, 패터슨이 소송에서 증언한 3시간 분량의 비디오테이프에서 자신의 직업이나 권투 경력에서 중요한 사건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위원회 위원장직에서 사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패터슨은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았고, 이외에도 전립선암을 앓았다고 한다.
2006년 5월 11일, 뉴욕 뉴펠츠의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4. 파이팅 스타일
5. 여담
커스 다마토에 따르면, 그가 IBC와의 갈등으로 인해 패터슨의 경기를 잡기 어려웠을 때에도 실력이 녹슬지 않도록 훈련 캠프 동안 프로 선수들과 비공개로 경기를 주선했다고 한다. 또한 다마토는 패터슨이 22전 연속 KO승을 거두었고, 그 중 많은 경기가 원펀치 KO로 끝났다고 말했다. 이 경기에서 패터슨이 이긴 선수 중 두 명은 헤비급 컨텐더 헤롤드 카터와 미래에 프로무대에서 만나게 될 상대인 아치 맥브라이드였다.동생 레이 패터슨도 헤비급에서 프로복서로 활동하였다. 레이는 1965년 스웨덴에서 열린 스파링 경기에서 소니 리스턴을 다운시킨 적까지 있었다.#
타이슨과의 대결로 유명한 도노반 러독이 패터슨에게 훈련을 받은 적이 있다.
패터슨이 입양한 아들인 트레이시 해리스 패터슨도 그에게 훈련을 받았으며, 트레이시는 훗날 2체급에서 세계 타이틀을 석권하기도 하였다.
라이벌이였던 잉게마르 요한슨과 은퇴후 관계가 돈독해져 서로의 나라를 방문하기도 했다.
슬하에 2딸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