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롤드 마이너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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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럴드 데이비드 마이너 Harold David Miner | |
출생 | 1971년 5월 5일 ([age(1971-05-05)]세) |
캘리포니아주 잉글우드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신학교 |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
신장 | 196cm (6' 5") |
체중 | 95kg (210 lbs) |
포지션 | 슈팅 가드 / 스몰 포워드 |
드래프트 | 1992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2순위 마이애미 히트 지명 |
소속 팀 | 마이애미 히트 (1992~1995)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1995~1996) |
등번호 | 32번 - 마이애미 4번 - 마이애미 / 클리블랜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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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직 NBA 농구 선수이자 1993년, 1995년 슬램덩크 콘테스트 우승자.2. 선수 경력
잉글우드 고등학교 시절 평균 28 득점, 한 경기 48득점, 17리바운드를 기록했던 만큼 고등학교에서 알아주는 선수였고, 특히 그의 덩크 실력은 당대 최고의 플레이어인 마이클 조던에 비견되어 베이비 조던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바 있었다.그리고 USC 대학교 시절에도 당시 샤킬 오닐, 알론조 모닝 등의 쟁쟁한 선수들을 제치고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트 잡지 선정 올해의 대학 농구 선수로 뽑힐 만큼 대학교에서도 나름대로 알아주던 선수였다.[1]
그러한 그의 명성을 인정받았는지 1992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2순위로 마이애미 히트에 입성하였고, 당시 마이애미 히트의 최고 스타인 글렌 라이스와 더불어 마이애미 히트를 이끌어 갈 차세대 슈팅 가드로 기대를 모았고, 실제로 상술했듯이 2차례나 슬램덩크 컨테스트 우승을 차치했을 정도로 화려하고 정교한 덩크슛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그저 덩크만 화려한 선수 였다는 점이었다.
덩크 실력에 비해 필드골 성공률이나 수비 능력에 있어서 너무나 평범한 수준의 선수에 지나지 않았고, 그런 와중에 잦은 무릎 부상까지 겹치며 많은 기회를 얻지 못했다.
특히나 고등학교 때부터 꼬리표처럼 달고 있던 베이비 조던이라는 타이틀은 더더욱 그의 부진한 커리어에 대한 팀과 팬들에게 크나큰 실망감으로 드러나게 되었고,
결국 1994-95 시즌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로 이적해서도 평균 7.2분 출장에 3.2득점이라는 형편 없는 기록만 남겼고, 1996년 2월 20일 시카고 불스전 5분 출장을 끝으로 방출당했고, 결국 <베이비 조던>, <포스트 조던>이라는 과거 명성에 비해 초라하게 선수 생활을 은퇴[2]하고 말았다.
여러모로 베이비 조던 혹은 포스트 조던이라는 명성이 그의 커리어에 대한 과한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고, 결국 그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 그의 이른 은퇴를 부른 비운의 스타라고 평가할 수도 있었다.[3]
사실 타고난 재능 자체는 충분히 뛰어난 선수였다. 슈팅가드에 딱 좋은 체격에 무지막지한 점프력, 윙플레이어로선 최상급의 파워와 스피드도 괜찮았다. 슛거리는 긴 편이 아니었지만 슈팅터치 자체는 대학시절부터 자유투 성공률 8할 언저리일 정도로, 90년대 슈팅가드란 걸 감안하면 분명 괜찮은 수준이었다. 맨투맨 매치업에서 강점을 갖고 있었던 선수로, 초창기엔 제한된 출전시간에는 벤치멤버로 제 몫을 해줄 수 있는 선수긴 했다.
그러나 센스가 없고 농구를 하는 시야가 지나치게 좁았다. 한 마디로 마치 1대1 농구를 5대5에서 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선수였다. 대학시절에는 팀의 에이스였기에 이 단점이 크게 부각되진 않았지만 롤플레이어가 됐어야 할 프로 시절에는 더욱 문제가 되었다. 실제로 시야가 좁고 패스를 안 한다는 점은 대학시절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드래프트 직전 시즌에서 그는 26점이나 넣었음에도 어시스트는 단 1.3개에 불과했다. 수비에선 운동능력이 좋아 1대1로 막아내는 능력은 좋았지만 팀수비에서 별 공헌은 없는 선수였다. 그렇다고 특별한 고-투-무브가 있거나 수비를 분산시킬 외곽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농구를 잘하는 것 같긴 하고, 제한된 시간 안에 공을 주면 득점은 어느 정도 뽑아내는데 막상 경기에서 큰 도움은 되지 못하는 애매한 롤플레이어였고[4], 이 때문에 그나마 기대를 받던 초창기 이후 점점 역할이 줄어들면서 NBA에서 사라지게 된 것. 어찌보면 단점(팀에 녹아드는 플레이/동료들을 살리는 플레이 부족)이 대학시절에 고쳐지지 못한 상태에서 데뷔한 것이 독이 된 사례다.[5] 마이너의 재능은 분명히 특출났기에 기본기나 팀플레이 이해도가 부족한 상태에서도 대학에서 훌륭한 활약을 보였고, 이게 충분히 다져지지 않은 상태에서 NBA에 데뷔하다보니 그에 못지 않거나 그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지닌 선수들 앞에서 도태되고 만 것이다. 사실 '베이비 조던'이란 식으로 지나치게 언론을 받은 것이 독이 된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 플레이 자체에 한계가 있던 선수기도 했다.
3. 은퇴 후
은퇴한 후 인터뷰 및 대외적인 공개 활동을 일절 하지 않아서 그의 행적에 대해 이래저래 루머[6]가 많았지만, 2010년 대학 시절 지인들과의 연락을 원한다는 인터뷰에 동의해서 밝혀진 그의 근황은 다행히도 선수 시절 번 돈을[7] 현명하게 잘 투자한 덕택에 변변한 직장 없이도 라스베이거스에서 두 아이의 아버지로 평범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이후, 2012년 USC 대학교 유니폼 영구결번[8]식에 참석했었다.
23년 NBA 올스타 위크엔드 슬램덩크 컨테스트에 심사위원으로 나와 모처럼 NBA팬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1] 사실 이건 공신력이 크게 있는 상은 아니었고, 보통 전통의 올해의 대학선수 상들인 네이스미스 상, AP 선정 올해의 대학선수상, 존 우든 상, 오스카 로버트슨 상, NABC(전미농구감독협회) 상, 스포팅 뉴스 올해의 대학선수상 정도가 메이저상으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92시즌 당시 이걸 모두 휩쓴 것은 크리스챤 레이트너였다. 다만 이건 가장 뛰어난 활약을 한 선수에게 주는 것이기에 실력이나 재능 자체는 오닐, 모닝이 더 뛰어나다고 평가받았다. 마이너는 드래프트 1~3위인 저 셋보다 한 수 아래급의 유망주였으나, 올아메리칸 퍼스트팀에 선정될 정도로 뛰어난 톱급 유망주이긴 했다.[2] 사실 토론토 랩터스에 입단할 수 있는 기회가 2번 있었는데, 한 번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서 토론토 랩터스와의 트레이드를 추진하던 와중에 토론토에서 트레이드로 데리고 오려던 빅터 알렉산더 라는 선수가 피지컬 테스트에서 탈락함(특히, 클리블랜드는 마이너의 지독한 유리몸에 대한 경험으로 피지컬 능력을 중요시하게 보고 있던 터였다.)으로 인해 트레이드 거래 성사후 4일만에 무산되었고, 클리블랜드에서 방출된 이후에도 토론토 랩터스의 공개 테스트(트라이아웃)에 참가하기도 했으나, 그 테스트 와중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사고로 무릎과 발목을 다치게 되며 테스트에 탈락하고, 그 길로 은퇴를 선택해야 했다.[3] 하지만 마이너의 실패 사례 이후로, 유망주들에게 <포스트 조던>이라는 명칭이 붙는 트렌드는 계속되었다. 마이너의 한계가 드러난 이후인 95년에 드래프트된 제리 스택하우스의 경우, 조던과 비슷한 체격조건, 운동능력,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출신이란 것이란 점까지 더해져 언론과 팬들에게 포스트 조던 얘기를 들었고, 96년에 드래프트된 코비 브라이언트는 아예 본인부터 조던 져지를 입고 경기장에 오는 등 본인의 팬심까지 더해 (본인이 레전드 선수가 됐음에도) 커리어 내내 조던과 비교가 따라다녔다. 심지어 그랜트 힐처럼 스타일이 다른 선수들에게까지 비교는 계속되었고, 조던과 스타일이 전혀 다르고 세대 차이가 나는 르브론 제임스까지 와서야 조던과의 비교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농구계에서 조던이란 이름값의 무게, 자극적인 것에 끌리는 언론과 팬들의 성향이 맞물려져 벌어진 촌극으로, 조던이란 존재를 본 팬들은 끊임없이 또 다른 조던을 갈망했고 언론은 이에 따라 그럴듯한 유망주에게 포스트 조던 꼬리표를 붙힌 것. 사실 이는 넥스트 르브론이란 수식어가 붙은 유망주의 수가 몇명이나 되는지에서 볼 수 있듯이, 계속되는 현상이다.[4] 사실 스탯상으로 표현이 잘 안되는 애매함이다. 첫 2년간 스탯상으로 보면 적당한 시간 내에 4할 후반대에 10점 정도 뽑아내면서 턴오버가 그렇게 많지도 않은, 괜찮은 롤플레이어 득점원과 구분이 안 가기 때문. 그러나 농구는 산수가 아니란 얘기가 있듯이, '어떤 과정을 통해 득점이 나왔냐'를 볼 수밖에 없다. 팀플레이가 안되는 선수에게 공이 가면 일단 공격의 흐름이 한번 멈추며, 마이너처럼 시야가 좁은 선수들과 같이 뛰면 다른 선수들이 각자 리듬을 살리기 힘들 수밖에 없다.(득점이나 어시스트를 하지 않아도 팀공격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감이 유지되기 때문) 이 때문에 팀 입장에서는 어차피 19~20분 만에 10점을 뽑아낼 수 있는 롤플레이어들이 얼마든지 있으므로, 좀 더 도움이 되는 선수를 찾게 되는 것. 마이너의 반례가 스티브 커인데, 커는 득점력으로 따지면 마이너보다도 훨씬 못했고 딱히 어시스트로 도움이 되지도 않았지만 팀공격 내에서 움직이는 능력이 아주 뛰어난 선수였다. 이 때문에 딱히 커가 장점인 슛을 하지 못해도 팀공격의 흐름이 끊기거나 방해가 되는 일은 없었기에, 어느 팀에서든 아무 부담없이 데려와 그의 장점(슛)을 살릴 수가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노화가 심해져 스스로 은퇴를 선택하기 전까지 팀을 구하는데 걱정이 없었던 것이다.[5] 이런 식으로 대학 때 나쁜 습관이 들어 데뷔한 선수가 바로 피트 마라비치였다. 그의 아버지이기도 했던 LSU 감독의 마라비치의 눈부신 득점재능만 마음껏 활용하도록 했고, 초창기 그는 놀라운 개인기량과 별개로 팀 내에서 움직이는 능력이 부족했다. 마라비치가 워낙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라 결국 프로에서 이를 어느 정도 극복하고 레전드 커리어를 쌓았지만, 가진 재능에 비해 팀성공 측면에서 상당히 아쉬웠던 것이 사실. 노스캐롤라이나의 명장 딘 스미스는 이와 정반대 전략을 수용해 아무리 뛰어나도 한 선수에 올인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대학 무대에서 20점, 19점씩 넣던 마이클 조던 같은 선수가 데뷔하자마자 평균 28점을 넣기도 했다. 그만큼 대학 지도자가 선수들에게 (성적을 좀 희생하더라도) 팀플레이와 기본기를 확실히 익히게 하는게 중요하다.[6] FBI로부터 신변보호 요청을 받고 있다는 등의 굉장히 심각한 루머들도 있었다.[7] 고작 네 시즌만에 막을 내린 커리어지만 통산 529만 달러를 연봉으로 받았다. 96년 은퇴할 당시 연봉이 177만 달러로 리그에서 딱 중간 수준(161위). 나이키 광고에도 출연하는 등 한때 꽤 인기가 있었기에 실제수입은 더 높을 것이다. 여담으로 NBA연급 시스템에 따르면 50세부터 연금을 받을 경우 매달 306.45달러X리그에서 뛴 시즌 수 만큼의 금액을 받을 수 있고, 45세부터 받으면 이 액수의 2/3를 받는다. 즉 마이너의 경우 만약 50세가 된 2021년부터 받았다면 매달 900달러, 45세부터라면 600달러 정도 받았을 것.[8] 당시 베이비 조단이라는 명성을 의식해서 등번호 23번을 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