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000000> 바덴 대공국의 공세자비 헤센다름슈타트의 아말리 공녀 Prinzessin Amalie von Hessen-Darmstad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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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DEB3> 이름 | 프리데리케 아말리 (Friderike Amalie) |
출생 | 1754년 6월 20일 |
프로이센 왕국 브란덴부르크 프렌츨라우 | |
사망 | 1832년 6월 21일 (향년 78세) |
브룩살 | |
배우자 | 바덴의 공세자 카를 루트비히 (1774년 결혼 / 1801년 사망) |
자녀 | 아말리, 카롤리네, 루이제, 프리데리케, 마리, 카를 프리드리히, 카를, 빌헬미네 |
아버지 | 헤센다름슈타트 방백 루트비히 9세 |
어머니 | 팔츠츠바이브뤼켄의 카롤리네 여백작 |
형제 | 카롤리네, 프리데리케 루이제, 루트비히 1세, 빌헬미네, 루이제,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
1. 개요
바덴 대공국의 공세자 카를 루트비히의 배우자. 바이에른의 왕비 카롤리네, 러시아의 황후 옐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 스웨덴의 왕비 프레드리카, 카를 대공, 헤센의 대공비 빌헬미네의 어머니이다.2. 생애
2.1. 초반
1754년 6월 20일, 프렌츨라우에서 헤센다름슈타트 방백 루트비히 8세와 팔츠츠바이브뤼켄의 카롤리네 여백작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형제자매로는 헤센홈부르크 방백비 카롤리네, 프로이센의 왕비 프리데리케 루이제, 헤센의 초대 대공 루트비히 1세, 러시아의 황태자비 빌헬미네[1],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비 루이제,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등 있었다.1772년, 18세의 아말리는 어머니인 헤센다름슈타트 방백비 카롤리네와 함께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파벨 페트로비치 황태자의 황태자비 후보로 러시아 궁정을 방문했다. 파벨 페트로비치 황태자는 아말리의 여동생인 빌헬미네를 선택했다.
2.2. 바덴의 공세자비
아말리는 1774년 7월 15일, 고모 헤센다름슈타트의 카롤리네 루이제 공녀의 아들로 고종사촌인 바덴의 공세자 카를 루트비히와 결혼했다.결혼 생활 동안 아말리는 시아버지 카를 프리드리히의 냉담함과 남편 카를 루트비히의 어른답지 않은 행동에 대해 불평하며 종종 프로이센와 러시아 궁정을 그리워 했다. 1783년 고모이자 시어머니인 카롤리네 루이제가 사망하자 아말리는 1806년 아들 카를이 스테파니 드 보아르네와 결혼할 때까지 바덴 궁정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여성으로서 공무를 이행했다. 1801년에는 가족과 함께 러시아에 있는 딸 옐리자베타 황후를 방문했고, 이후 1801년 9월에는 스웨덴에서 넷째 딸인 프레드리카 왕비를 만나기도 했다. 스웨덴에서 머무는 동안 아말리는 상당히 재치있고, 지적이며, 올곧은 성격을 지녔고, 남편을 완전히 컨트롤 했다고 한다. 카를 루트비히 - 아말리 부부는 드로팅홀름 궁전과 그립숄름 성을 방문했다. 아말리는 사위인 구스타브 4세 아돌프의 숙모이자 미움을 받았던 홀슈타인고토르프의 헤트비히 엘리자베트 샤를로테[2]와 절친이 되었고, 그녀의 딸인 프레드리카 왕비가 공식석상에서 딱딱하고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해 질책했다. 1801년 12월, 남편 카를 루트비히 공세자가 스웨덴 아르보가 근처에서 사고로 죽었으며, 그녀는 1802년 5월까지 가족과 함께 스웨덴에 머물렀다. 바덴으로 떠나기 직전, 그녀는 프리메이슨 가문의 한 분파로 불리는 칼 아돌프 보헤만의 옐로우 로즈 로지에 기부했다.
2.3. 말년
아말리는 러시아와 스웨덴을 방문하면서 자신의 사위들인 알렉산드르 1세와 구스타브 4세 아돌프의 나라 간의 외교관계를 화해 시키기 위해 노력을 했다. 1803년, 아말리는 바덴에서 스웨덴 왕족을 손님으로 맞이했는데, 이 기간 동안 아말리는 사랑스럽고 재미있으며 정치에 대한 관심이 활발했으며, 사위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위 구스타브 아돌프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가 있었다고 전해진다.[3]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굉장히 싫어라 했던 아말리는 아들 카를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수양딸인 스테파니 드 보아르네[4]와의 결혼을 매우 반대를 했고, 1806년 결혼 후 크라이히가우의 슐로스 브룩살에 있는 저택으로 가서 지내게 되었다. 1807년, 아말리는 딸인 스웨덴의 프레드리카 왕비에게 셋째 딸인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황후의 편지를 보내 프레드리카가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스웨덴과 나폴레옹 사이의 평화를 이루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로 끝났다.1809년, 아말리는 사위 구스타브 4세 아돌프가 스웨덴 왕위에서 폐위 당하자 딸 프레드리카의 일가을 맞이했다. 1811년, 아말리는 구스타브 아돌프에게 프레드리카와 이혼하지 말라고 설득을 했지만, 이혼할 상황이 되자 딸의 경제적 독립과 손주들의 양육권을 마련했다. 1815년, 아말리의 외손자인 스웨덴의 구스타프는 바덴 대공가에서 "스웨덴의 왕자"로 불려지게 되었으며, 이는 스웨덴의 왕좌를 확보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 것으로 유명한 아말리에 의해 선동되었다고 믿었던 장 베르나도트[5]의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1815년 빈 회의에서 아말리가 사위인 알렉산드르 1세 황제에게 미친 영향은 바덴이 영토를 잃지 않고 대공국으로 남을 수 있게 하는 데 기여했다.
1832년 6월 21일 향년 78세로 사망하였다.
3. 가족관계
3.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아말리 공녀 (Princess Amalie) | 1776년 7월 13일 | 1823년 10월 26일 | |
2녀 | 바이에른의 왕비 카롤리네 (Caroline, Queen of Bavaria) | 1776년 7월 13일 | 1841년 11월 13일 |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슬하 6녀[6] |
3녀 | 러시아의 황후 옐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 (Elizabeth Alexeievna, Empress of Russia) | 1779년 1월 24일 | 1826년 5월 16일 | 알렉산드르 1세 슬하 2녀 |
4녀 | 스웨덴의 왕비 프레드리카 (Frederica, Queen of Sweden) | 1781년 3월 12일 | 1826년 9월 25일 | 슬하 2남 3녀[7] |
5녀 |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부인 마리 (Marie, Duchess of Brunswick-Wolfenbüttel) | 1782년 9월 7일 | 1808년 4월 20일 |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슬하 2남 |
1남 | 카를 프리드리히 공자 (Prince Charles Frederik) | 1784년 9월 13일 | 1785년 3월 1일 | |
2남 | 바덴 대공 카를 (Charles, Grand Duke of Baden) | 1786년 6월 8일 | 1818년 12월 8일 | 스테파니 드 보아르네 슬하 1남 3녀 |
6녀 | 헤센의 대공비 빌헬미네 (Wihelmine, Grand Duchess of Hesse and by Rhine) | 1788년 9월 10일 | 1836년 1월 27일 | 루트비히 2세 슬하 3남 2녀[8] |
[1] 파벨 1세의 황태자 시절 첫 부인.[2] 칼 15세의 배우자이자 스웨덴의 왕비가 되었다. 공식적으로 샬로타 왕비라고 불렀다.[3] 아말리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바덴의 공세자비는 굶주림에 힘을 실어줄 수 있으며 예카테리나 2세의 면의 맞먹는 힘을 발휘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4]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황후였던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시당조카다.[5] 훗날 칼 14세 요한으로 스웨덴의 국왕이 되었다.[6] 프로이센의 왕비 엘리자베트 루도비카, 오스트리아의 조피 대공비 등[7] 바덴의 대공비 조피 등[8] 루트비히 3세, 헤센의 알렉산더 공자, 러시아의 황후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