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호나우두/악성 팬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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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나우두의 플레이 스타일을 설명하는 문서.2. 포지션
183cm의 건장한 체격을 갖춘 센터포워드가 슈팅, 위치 선정, 스피드, 몸싸움, 볼 키핑, 볼 컨트롤, 드리블, 연계 등 공격수로서의 여러 가지 능력을 최고 수준으로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전성기의 그를 대표하는 압도적으로 빠른 주력과 볼 컨트롤을 살려서 오프사이드 라인을 순간적으로 무너뜨리는 것에도 능했다. 신기에 가까운 발재간으로 수비수들을 제쳐버리는 경이적인 드리블 능력도 그의 장점 중 하나였다.
한준희, 장지현의 원투펀치에서 호나우두에 대해 고전적인 스타일, 클래식한 스타일의 스트라이커라는 평가를 내렸는데 이는 그가 시대에 뒤처진 스타일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스트라이커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모습에 너무나도 완벽하게 부합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빠른 스피드와 화려한 발재간으로 수비수를 여럿 제치고 강한 슈팅으로 골을 넣는 스트라이커의 대표적인 이미지에 호나우두는 누구보다 어울리는 선수였다. 이로 인해 아직까지도 정석 스트라이커 하면 많은 이들은 호나우두를 떠올린다. 한준희는 호나우두는 필드에서 '매우 위력적인 선수'라고 표현하였다.
3. 장점
3.1. 스피드 및 온 더 볼 능력
전성기 시절 그의 플레이의 가장 큰 특징은 완벽한 바디 밸런스와 폭발적인 순간 가속력, 페인팅, 테크닉을 활용한 드리블, 그리고 최고 속력 36.2km/h[1]의 가속력을 바탕으로 공을 몰고 다니는 것이었다. 여기에 볼을 소유하고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속도의 변화가 크지 않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온 더 볼 상황에서의 스피드가 어마어마했으며, 단순히 속도만 빠른 게 아니라 신기에 가까운 볼 컨트롤 능력과 탁월한 바디 밸런스, 수비수와의 경합 상황에서 압도할 수 있는 뛰어난 몸싸움 능력과 피지컬을 갖췄고 스텝 오버, 플립 플랩, 라 크로케타, 마르세유 턴, 스쿱 턴 등 다양한 개인기를 잘 구사했다. 이를 이용해 엄청난 스피드로 드리블을 하면서도 동시에 화려한 개인기를 섞거나, 급격하게 방향전환을 하거나 턴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스텝 오버는 그를 대표하는 전매특허 기술로 그가 굉장히 애용하고 잘 썼는데, 대부분의 선수들이 주로 교란용으로 이를 쓰는 반면 호나우두는 스텝 오버를 이용해 수비수는 물론 골키퍼마저 휙휙 따돌리고 지나가는 모습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스텝 오버의 특성상 속도를 늦추거나 정지해야 하는데 호나우두는 달리면서도 잘 사용했다. 수비수 다리 사이로 볼을 빼내는 'Nutmeg', 소위 '알까기'에도 능했다. 이렇듯 다수[2]의 선수를 제치는 장면을 많이 보여줬으니 축구 역사상 최고의 드리블러를 꼽을 때 반드시 언급되는 선수이기도 하다.#
3.2. 골 결정력
양발을 고르게 사용했고 페널티 에어리어 안이라면 어느 위치에서든 빠르고 정확한 슈팅을 날릴 수 있었다. 특히 호나우두의 슈팅은 아드리아누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가 구사했던 것처럼 강하고 빠른 대포알 같은 슈팅보다는 정확하고 정교한, 전형적인 정통 스트라이커의 슈팅에 가까웠다. 물론 중거리 슛도 잘하긴 했지만, 호나우두의 진가는 피치 위의 어떤 상황에서든 공을 때릴 수 있는 정교한 슈팅 기술에서 나왔다. 이런 그의 뛰어난 슈팅 능력은 치명적인 무릎 부상을 당한 후에도 여전해서 2002 월드컵에서는 7경기 동안 28회의 슈팅을 때려 8골을 넣는 탁월한 골 결정력을 보여주었고,[3] 레알 마드리드 시절에도 통산 177경기 104골 34어시라는 좋은 기록을 남길 수 있게 만들었다.3.3. 피지컬
호나우두가 다른 역대급 드리블러들과 차별화되는 점은 바로 키 183cm, 체중 80kg 이상의 뛰어난 피지컬에 수비라인을 정면으로 뚫고 나갈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뛰어난 바디 밸런스를 지니고 있었기에 상대 선수의 거친 태클로 넘어지는 경우는 있어도 몸싸움에서 밀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4] 수비적이고 월드클래스 수비수들이 넘쳐나던 세리에 A를 평정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3.4. 패스 및 연계
바르사 시절에는 패스 지원이 원활했기 때문에 직선적인 돌파와 마무리에 집중하는 정통 9번 역할의 스트라이커에 가까웠으나, 인테르 시절에는 바르사 시절만큼 패스 지원이 안될 뿐 아니라, 세리에의 수비적이고 정적인 전술과 역습에 치중하는 특성상 팀의 공격 루트가 호나우두의 개인 전술에 의존해야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바르사 시절보다 측면 플레이나 패스 플레이의 빈도가 늘어났으며, 이로 인해 인테르에서의 첫 시즌은 프리롤 세컨드 스트라이커같은 프리롤로서의 재능이 개화하고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5] 호나우두가 턴오버가 상당하다는 오해는 아마 인테르 시절,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기인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렇듯 전성기에는 활동 반경이 넓은 편이었고 커리어를 공격형 미드필더로 시작했기 때문에 킬러 패스에 있어선 상당한 역량을 발휘했다. 때문에 부상 없이 기량을 완전히 만개했으면 정통 스트라이커로 평가받는 지금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라는 평가도 많다.[6]
다만 한 가지 알아둬야 될 점은 호나우두의 패싱력이나 연계 능력이 좋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당대 공격수 중에서 상위권이라는 얘기지 전문 플레이메이커급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테르 시절에 10번으로서의 재능이 개화하고 있었다는 평가도 있지만 부상으로 그 재능을 다 만개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고, 그 후로는 좁아진 활동 반경과 부상 후유증 등을 이유로 포처에 가까운 플레이 스타일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2대1 패스 후 마무리하는 능력은 여전히 뛰어났고 패스길을 보는 눈도 살아 있었다. 그러나 떨어진 킥력과 완전히 접히지 않는 무릎으로는 한계가 명확했다. 즉 전성기 기준으로도 최상위권의 10번 공격수는 아니었으며, 부상 이후로는 9번 공격수에 가까운 선수였다고 할 수 있다.
3.5. 클러치
클럽팀과 국가대표팀에서 치른 결승전에서 11경기 10골 2어시[7]을 기록하며 큰 경기에 누구보다도 강한 선수였다. 특히 국가대표팀에서는 역대 최고 수준의 활약을 했는데, 국제 대회 통산 37경기 29골 9어시 · 토너먼트 18경기 17골 4어시, 월드컵 통산 19경기 15골 4어시 · 토너먼트 10경기 8골 2어시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만들어냈다. 또한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도 UCL이 아닌 컵위너스컵과 UEFA컵에서는 모두 제몫을 해줬다. 컵위너스컵 통산 7경기 5골 1어시, UEFA컵 통산 23경기 15골 3어시를 기록했으며, 소위 전성기 구간으로 일컬어지는 1994~1998년 사이에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 25경기 20골 4어시를 기록했다.4. 단점
4.1. 공중전
지쿠가 펠레와 호나우두를 비교하면서, 부상 없는 호나우두는 펠레에 필적한다고 평하면서도, 펠레와 동급이 되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로 유리몸인 점과 공중전 능력이 떨어지는 점을 꼽았다. 경기 수의 차이도 있겠지만 키가 169cm에 불과한 리오넬 메시보다도 통산 헤더 골이 적다. 일단 헤더 자체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고 선수 본인도 점프를 하는 공중전을 부상 위험 때문에 불호했다.[8]4.2. 유리몸
잦은 부상 빈도와 그에 따른 기량 하락은 호나우두의 가장 큰 단점으로, 압도적인 재능을 가졌었던 그가 펠레와 마라도나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게 만든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다.1999년과 2000년에 연이은 두 번의 무릎 부상과 2년간의 공백기로 인해 전성기 시절의 운동 능력이 실종되고 바디 밸런스가 무너지면서 전성기가 끝나버리고[9] 이후에도 수 차례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하면서 기량이 하락해 이전과는 다른 선수가 되고 말았다. 즉 아직 한창인, 누군가에게는 처음으로 월드컵을 나가게 되는 나이일 수도 있는 24세에 전성기가 끝나버린 것. 이런 호나우두를 가리켜 한국의 팬들은 "신의 능력을 인간의 몸이 견디지 못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타고난 피지컬을 바탕으로 한 무리한 플레이 스타일이 잦은 부상을 초래한 측면도 있었다. 1996년 생애 첫 무릎 수술을 받을 당시 의료진에 의하면 그의 허벅지 근육이 지나치게 발달된 탓에[10] 무릎이 하중과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부상이 발생한 것이라고 한다. 호나우두의 플레이 스타일은 위의 움짤에서 보듯이 굉장히 빠르면서도 역동적이고 현란한 움직임과 페인트를 애용하면서 상체 전체의 무게를 무릎에 집중시키는 드리블링을 구사하는, 즉 허벅지 근육과 무릎을 혹사시키는 플레이 스타일에 기인하여 선수 생활 내내 고질적인 부상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경기 도중 슬개건이 끊어져 실려나간 것만 두 번이고 양쪽이 전부 차례대로 끊어진 사실은 그의 플레이 스타일이 몸에 굉장한 무리를 주는 움직임을 동반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심지어 20대 후반부터 발병한 것으로 추정되는 갑상선 기능 저하증은 체중 증가까지 겹치며 이후 대중에게 익숙한 호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호나우두의 부상 원인 중 하나로 국대와 클럽을 가리지 않은 지나친 혹사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90년대 축구계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나이키와 브라질 국가대표의 가장 큰 돈벌이이자 흥행 보증 수표였던 호나우두는 쉼없이 장거리 대륙 이동을 하며 경기에 투입됐고 이 과정에서 몸이 말그대로 갈렸다. 수 십년이 흐른 현대의 발달된 영양학, 의술에도 과도한 혹사에는 별 도리가 없는데 이 당시 호나우두의 스케쥴은 가히 살인적이었던 것이다.
자세히는 1998 월드컵 결승전 직전 원인을 알 수 없는 발작[11]으로 선발 명단에서도 제외되었다가 경기 직전 다시 돌아왔지만 어수선한 상황에서 최악의 경기력을 보여준 호나우두는 이후 슬럼프에 빠져 예전만한 경기력이 안 나오더니[12] 상술했듯 1999년과 2000년 두 번의 무릎 부상과 2년의 공백기로 운동 능력과 역동성, 체력 등 예전의 기량을 크게 잃어버리면서 전성기가 끝나고 말았다. 복귀한 후인 2002년부터는 드리블을 줄이고 포처에 가깝게 변하면서 전방위적인 경기 영향력보다는 전방에서 골을 넣는 역할에 집중하는 성향의 스트라이커가 되었다. 물론 원체 기량이 타고난 선수였기 때문에 피지컬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아직 남아 있던 발기술, 가속력, 오프 더 볼 감각, 골 결정력은 여전히 무서운 수준이라 포처 역할을 하기에는 충분했고, 기록적으로 봐도 레알 마드리드에서 세 시즌 연속으로 리그 20득점 이상[13]을 했다. 하지만 2005-06 시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루이스 페레아의 백태클에 의한 발목 부상 이후로는 폼이 더 하락하였다.[14] 2006-07 시즌 후반기 AC 밀란에서는 종종 번뜩이는 장면이 있긴 했으나 이제는 소프트웨어적인 부분에서도 폼이 떨어지며 다시는 우리가 아는 페노메노의 모습은 나오지 않았다.
4.3. 자기 관리 실패
큰 부상을 여러 번 당한 탓에 잘 거론되지 않는 호나우두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바로 브라질 출신 축구 선수들의 고질적 문제인 게으른 천재였다는 것이다. 게으르기만 하면 모를까, 자기 관리도 심각한 수준이었다.[15] 체중 문제로 인해 부상이 초래됐고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 가장 고통스러웠을텐데도 고칼로리 음식을 끊임없이 먹었던 것은 수많은 사진과 증언들이 증명하고 있다. 갑상선 질환을 앓았기에 체중 증가가 가속화됐다는 점은 변함이 없으나, 그런 심각한 질환이 있음에도 자기 관리를 게을리했다는 점은 참작의 여지가 없다. 이로써 호나우지뉴와 함께 축구 선수에게 있어 자기 관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축구 선수에게는 체력적으로 좋을 게 없는 술과 담배도 즐겼다.[16] 게다가 식습관이나 기호품에 대한 무절제한 태도 뿐이었다면 모를까, 인테르 시절 친하게 지냈던 크리스티안 비에리의 인터뷰나 카를로 안첼로티의 자서전, 동료 선수들의 증언 등에서 호나우두의 게으르고 방종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비에리의 자서전에 따르면 호나우두는 인테르 시절 매일 같이 저녁에 자신의 집에 찾아와 문을 열 때까지 차의 클락션을 빵빵거리고, 비에리가 어떤 날은 가기 싫었지만 결국 매일같이 호나우두랑 클럽에서 새벽까지 놀았다고 한다.[17] 그래도 비에리는 눈이라도 조금 붙이고 훈련하러 나갔는데 호나우두는 바로 출근했다고 한다. 몸에 무리가 많이 가는 플레이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브라질리언 공격수답게 호나우두도 술, 담배, 섹스, 폭식, 심야파티 등 상당히 방탕한 사생활을 이어갔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전성기를 단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문제는 선수 생활 내내 극복하지 못했으며, 말년에 다다를수록 더욱 심하게 체중 증가 문제를 앓았다. 실제로 은퇴한 지 오래된 현재는 전성기 시절의 모습은 당연히 찾아볼 수 없고 체중이 매우 증가해 100kg은 가뿐히 넘어보이는 후덕한 체구가 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저런 처참한 수준의 자기 관리로도 다른 2000년대 브라질 슈퍼스타들처럼 폭망까지 가진 않고 체면치레할 정도의 활약은 했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호나우두가 가진 재능과 기량의 크기를 알 수 있다.
4.4. 챔피언스리그에서의 부진
호나우두의 챔피언스리그 통산 기록은 40경기 14골로 경기 당 0.4골이 채 되지 않는다. 최고 성적은 4강 진출 1회로 우승은 커녕 결승도 못가봤다. 사실상 다른 역대급 선수들과의 비교에서 호나우두에게 가장 큰 약점이 되는 부분이다.5. 총평
전성기 때에는 공격수로서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툴이 최상위권인 육각형 스트라이커였으나 부상과 자기 관리 부족으로 인해 포처로 플레이 스타일이 변화한 케이스이다. 전성기 시절의 압도적이었던 퍼포먼스로 인해 '부상이 없었더라면' 하는 가정이 나올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선수 중 한 명이다.특히나 아쉬운 점은 절정의 기량을 보여줬던 최전성기가 너무 짧았다는 점. 그의 최전성기는 바르사에서의 1996-97 시즌과 인테르에서의 1997-98 시즌, 그리고 1998 월드컵 준결승까지로 2년 정도였고, 좀 더 넓게 잡아도 PSV에서의 1994-95 시즌만 추가될 뿐이다.[18] 월드컵이 끝난 이후 1998-99 시즌부턴 부상으로 결장하는 기간이 늘기 시작했고[19] 특히 1999-00 시즌에 두 차례의 큰 무릎 부상[20]을 당하면서 몇 년을 고스란히 날리게 된다. 결국 플레이 스타일을 바꿔 2002 월드컵에서 득점왕에 오르고, 레알 마드리드에서도 3년 동안은 리그 정상급 공격수로 활약했지만 흔히 말하는 전성기의 폼은 아니었다.
허나 이 짧은 전성기 동안 절대다수의 선수들이 쳐다보지도 못할 커리어를 쌓았다.[21][22] 커리어뿐만 아니라 당시엔 엄청난 스피드, 개인기, 몸싸움, 드리블, 골 결정력까지 조화를 이뤄서 동 시대는 물론이고 역대로 따져봐도 최상위권의 퍼포먼스를 선보였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전성기라는 인테르 시절에도 바르사 시절보다는 호나우두의 개인 전술에 한계가 있던 것을 보면 약간 혐의가 있고 특히 현대 축구에서 말하는 지원형 공격수나 압박, 연계 등의 능력은 전성기를 기준으로 봐도 최상위권에서 특출나지는 못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23]
또한 소위 말하는 이런 전성기 상태의 호나우두도 한 명의 사람이고 한 명의 사람이 물리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은 한계가 있다. 호나우두 보고 혼자서 전술이란 얘기를 하고, 흔히들 선수 혼자서 전술이 되거나 팀 이상이라는 말을 하지만 그런 건 스포츠 마케팅이나 스포츠 언론에서 표제를 뽑을 때 쓰는 일종의 예술적인 시와 같은 수식어에 불과하다.[24]
영어판 위키피디아에서도 호나우두의 플레이 스타일이 서술되어 있는데,[25] 유독 한국 인터넷에서 넘치는 인몸신능 같은 허황된 시쓰기와 같은 간증보다는 실질적인 얘기가 많다. 영어 위키피디아에서 호나우두의 플레이 스타일에 대한 대부분의 언급은 그의 스피드와 테크닉에 있다. 메시, 마라도나를 포함해서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 축구에서는 한국 인터넷 상에서 호나우두를 칭송하는 것처럼 한 명이 곧 전술이 되는 선수는 없고[26] 냉정하게 이런 류의 발언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크랙에 흔히 붙는 과장된 언플용 수식어에 불과하다. 물론 그런 수식어가 붙었을 만큼 호나우두의 최전성기 기량은 말 그대로 펠레, 마라도나에 비견될 정도였으나, 악재가 겹치며 그 기량을 오래 보존하지 못한 게 안타까운 케이스다.
[1] 현역 선수 중에선 엘링 홀란드의 속력과 비슷하다.[2] 2~3명 제치는 장면이야 굉장히 많이 보여줬지만 "매경기 4~5명씩 제치고는 했다, 매경기 수비라인을 파괴했다"는 등의 주장은 날조에 가깝다. 영어 위키피디아에 서술되어 있는 바르사 팀메이트였던 오스카 가르시아의 발언. 대단한 기술, 창조성, 정확성 그리고 압도적인 스피드. 남들이 어려운 것을 아주 쉬운 것처럼 하면서도 그걸 폭발적인 스피드에서 해낸다. 딱 이게 동시대 축구인들이 말하는 호나우두의 요체다. 한국 인터넷 아마추어들이 호나우두에 대해 말하는 것은 간증에 가깝지 정학한 서술은 아니다.[3] 게르트 뮐러가 1970 월드컵에서 10골을 넣은 후 2022 월드컵의 킬리안 음바페와 함께 월드컵 한 대회에서 8골 이상 넣은 유이한 경우. 나머지는 5~7골 선에서 정해졌고 그나마 7골은 1974 서독 월드컵의 그제고시 라토와 2022 월드컵의 리오넬 메시가 딱 두 번 기록했을 뿐이었다. 여담으로 한 대회 최다골은 13골을 기록한 프랑스의 쥐스트 퐁텐이다.[4] 다만 전성기에도 비슷한 체격에 세계 최고의 커멘더였던 릴리앙 튀랑을 상대로는 매번 고전했다.[5] 인테르 시절의 평가도 여러 가지 의견이 있는데 아무튼 재능이 깨어나고 있었다는 식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6] 2001년 CNN의 스포츠 과학자들의 스트라이커 평가를 보면 'Asist' 부문에서 호나우두가 89점, 라울이 90점, 히바우두가 92점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7] 1995-96 KNVB 베이커 1경기 1어시, 1996-97 컵위너스컵 1경기 1골, 1997 코파 아메리카 1경기 1골, 1997 컨페더레이션스컵 1경기 3골 1어시, 1997-98 UEFA컵 1경기 1골, 1998 월드컵 1경기, 1999 코파 아메리카 1경기 1골, 1999-00 코파 이탈리아 1경기, 2002 월드컵 1경기 2골, 2009 코파 두 브라질 2경기 1골.[8] 대표적으로 AC 밀란 소속이던 2007-08 시즌에 리보르노와의 리그 경기에서 공중볼 경합을 하다가 왼쪽 슬개건이 파열되는 부상을 당했었다.[9] 다만 라치오 전에서의 재발된 무릎 부상은 인테르 의료진의 판단 미스가 컸다. 호나우두의 무릎 부상이 덜 회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보냈다가 6분 만에 부상이 재발했기 때문. 이후 2년간 쉬게 되면서 다시는 예전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10] 역설적으로 덕분에 빨랐던 것일지도 모른다.[11] 후일 밝혀진 바로는 간질 발작 같은 건 아니고 호나우두가 어려서부터 지니고 있던 자면서 몸을 떠는 수면병이었다고 한다. 목숨이나 선수생명을 위협하는 그런 병은 아니고 일종의 몽유병인데, 이걸 본 동료들이 간질 발작한다고 여겨 해프닝이 일어난 것. 실제 이후 호나우두가 선수 시절 발작한 적은 1번도 없었는데, 하필 그 1번이 월드컵 결승전 하기 몇시간 전이었다는게 참 묘하다. 호나우두 본인은 이후에도 언제 또 발작할지 모른다고 생각해 속으론 꽤나 맘고생한 모양. 참고로 나이키가 아픈데도 억지로 협박해서 결승전 나가게 했다는 것도 인터넷발 음모론에 불과하다.[12] 득점력이 감소했을 뿐만 아니라 리그 평점도 100위권으로 추락했고 월드컵, 코파 아메리카, 컨페드컵과 컵위너스컵, UEFA컵 등 클럽과 국대를 가리지 않고 큰 경기에 강했던 호나우두가 챔피언스리그에서 고작 6경기 1골밖에 넣지 못하는 등 크게 부진했다. 다만 이 기간은 잔부상이 겹쳐 교체 투입 비율이 높아지는 등 꾸준한 출장이 어렵긴 했다. 또 상기했듯 발작이 언제 또 올지 모른다고 혼자 알게 모르게 속앓이한 것도 컨디션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13] 2002-03 시즌 23골, 2003-04 시즌 24골(득점왕), 2004-05 시즌 21골.[14] 시즌 초반 리그 7경기 7골을 기록하다가 저 부상 이후 폼이 급락하며 결국 23경기 14골에 그쳤는데, 만약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면 다시 한 번 득점왕을 노려볼만한 시즌이었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는다.[15] 비슷하게 게으른 천재 유형인 선배 호마리우도 훈련 빼먹고 놀러다녔지만 적어도 기본적인 식단 조절과 체중 관리는 충실히 하는 선수였기에 40대까지 현역으로 뛰었다.[16] 다만 담배는 의외로 많은 스타 선수들이 피우긴 했다. 대표적으로 요한 크루이프, 디에고 마라도나, 지네딘 지단, 루이스 피구, 안정환, 애슐리 콜, 웨인 루니, 라자 나잉골란, 마리오 발로텔리, 마르코 베라티 등이 있다. 다만 이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체력이 안 좋다고 평가받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초인적인 심폐지구력을 가지고 있었거나 어떤 사람은 약물 도움도 받고 해서 상관이 없었을 뿐이었지 당연히 선수에게 좋을 건 없다.[17] 사실 비에리 역시 성실함과는 거리가 한참 먼 선수였다. 다만 비에리는 불성실하긴 했어도 성추문 따위의 윤리적인 이슈는 크게 없었다. 또한 호나우두, 비에리뿐만 아니라 이 당시까지만 해도 슈퍼스타들 가운데 이처럼 프로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을 만큼 자기 관리가 전혀 안되는 선수들이 의외로 많았다. 가령 그 시절 인테르에서 뛰던 당시 튀르키예 최고의 재능 엠레 벨로조글루나 타고난 재능만으론 호나우두, 비에리에도 비견되던 알바로 레코바 같은 경우만 보더라도 부상 문제도 있지만 결국은 자기 관리 실패로 운동 선수로 뛸만한 몸 상태를 선보이지 못하고 체중이 급격히 불어난 모습을 자주 보여준 것이 짧은 전성기의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축구 선수들의 짧은 전성기는 2000년대 중반이 넘어서야 구단 차원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이나 식이요법 등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시스템을 도입하며 비로소 늘어나기 시작한다. 2000년대 후반~2010년대를 수놓은 메날두 장기집권 시대도 선수 개개인의 자기 관리뿐만 아니라 이런 뒷배경도 도움이 된 것.[18] PSV에서의 1995-96 시즌도 경기에 나섰을 땐 맹활약했지만, 시즌 중반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경기 출전 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생애 첫 무릎 수술이었는데, 이걸 보면 이때부터 이미 유리몸의 조짐이 있었다.[19] 리그 기록은 19경기 14골로 나쁘지 않았지만 페널티킥 득점이 7골에 달했을 정도로 순도가 떨어졌으며 챔피언스리그에선 6경기 1골에 그쳤다.[20] 레체와의 리그 경기에서 오른쪽 무릎을 다친 후 라치오와의 코파 이탈리아 결승 1차전에서 복귀했다가 투입된 지 6분만에 오른쪽 슬개건이 파열되었다.[21] 팀 커리어: 월드컵 우승 2회 · 준우승 1회, 코파 아메리카 우승 2회 · 준우승 1회, 컨페더레이션스컵 우승 1회, 라리가 우승 1회, UEFA 컵위너스컵 우승 1회, UEFA컵 우승 1회. 단 1994 월드컵 때는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22] 개인 커리어: 발롱도르 2회, FIFA 올해의 선수 3회,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 1회,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3회, 옹즈도르 2회, 유러피언 골든슈 1회, 월드컵 골든볼 · 실버볼 · 골든슈 · 브론즈슈 · 도움왕, 코파 아메리카 MVP · 득점왕, 컨페더레이션스컵 브론즈슈, 라리가 득점왕 2회, 에레디비시 득점왕 1회, UEFA 컵위너스컵 득점왕 1회, 세리에 A 올해의 선수 1회.[23] 전성기에는 워낙 잘 했기 때문에 이런 분류 따위가 상관없기는 했다. 즉 압박과 연계까지 유려했다면 더 좋기야 했겠지만 워낙 개인 전술이 뛰어났기 때문에 보통 필드에서 그런 역할의 공격수들을 능가하는 효과를 창출해냈던 것도 사실이다. 어차피 수비진을 뚫거나 내려서게 만드는 게 목적이라면 호나우두의 드리블만으로도 충분했다는 얘기다.[24] 80~90년대 업계인들이 서로를 평가할 때 경기만 나가면 골을 넣었다느니 해트트릭을 밥먹듯이 했다느니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본인과 함께 같은 팀에서 뛸 때 공식경기에서 해트트릭 한 번만 했어도 이런 식으로 평가해주는 일이 종종 있다. 호나우두가 전술이란 얘기를 했던 바비 롭슨도 "호나우두는 80%로도 펠레만큼 플레이했다"는 식의 얘기를 하는데 이걸 립서비스로 받아야지 진짜인 것처럼 받으면 안 된다. 레이카르트도 자기가 감독할 때 쓰던 호나우지뉴한테 이런 내용의 얘기를 했고, 크랙이나 에이스 선수들한테는 종종 나오는 립서비스인 것이다.[25] 호나우두의 플레이 스타일에 대한 영어 위키 언급은 대부분이 그가 경이로운 스피드와 테크닉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언급을 유명 축구인 여러 명이 반복적으로 해 주면서 확인, 재확인하는 식이다. 90~00년대 동시대를 살던 한국 축구인들의 호나우두에 관한 언급도 마찬가지다. 위키피디아에 언급되어 있는 실제 축구인들의 호나우두의 플레이 스타일에 대한 발언은 테크닉과 더불어 스피드, 또 스피드다.[26] 크랙형 선수에 대한 공통점이고 호나우두가 당대 크랙 중에서 최고수였던 것이지 결코 혼자서 무슨 새로운 전술을 창안하거나 전무후무한 무언가를 창조한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