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22:37:42

4대 센터

1. 개요2. 상세3. 선수 목록
3.1. 주요 경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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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NBA에서 센터 뎁스가 가장 뛰어난 1990년대,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센터였던 4명을 일컫는 말.

2. 상세

1984년 1라운드 1픽 하킴 올라주원, 1985년 1라운드 1픽 패트릭 유잉, 1986년 1라운드 1픽 브래드 도허티, 1987년 1라운드 1픽 데이비드 로빈슨 순으로 앨리트 센터 계보를 잇는 센터 4인 중 도허티가 부상으로 인해 빠르게 몰락하고, 1992년 1라운드 1픽 샤킬 오닐이 등장하자 신흥강자 오닐과 먼저 군림하던 올라주원-유잉-로빈슨의 빅3를 함께 설명하기 위해 한국에서 쓰이던 표현이다.

사실 리그 입성 시기가 다른 셋과는 꽤나 동떨어져 있는 오닐보단 도허티가 4대 센터에 들어가야 했겠지만, 도허티의 현역 시절에 저 넷이 묶이는 경우는 없었다. 유잉은 올라주원과는 대학시절부터 라이벌이었고 제독은 데뷔하자마자 위 둘과 어깨를 나란히 했지만,[1] 도허티는 1992년에 서드 팀 단 한번 올라간 것이 전부이며 다른 셋처럼 엎치락뒤치락을 한 적은 없었기에 저들보단 확연히 한 수 아래로 여겨졌기 때문이다.[2] 그런데 오닐의 존재로 '4대 요소'를 하도 좋아하는 한국인들이 4대 센터를 만들었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오닐보단 비슷한 연배인 도허티가 들어가야하지 않느냐'는 의견이 나온 것.

올라주원, 유잉, 로빈슨, 오닐은 최종적인 커리어는 차이가 있지만 4명 모두 현역으로 뛰던 당시에는 서로 비등비등한 위치에 놓여 있었고, 그만큼 매치업도 치열했으며, All-NBA 팀도 돌아가며 먹었다. 그러나 올라주원이 94 파이널에서 유잉을, 95년도에는 로빈슨과 오닐을 꺾고 연속 더맨 우승을 달성하며 한껏 앞서나갔고, 이후에는 나이가 제일 어렸던 오닐이 2000년대에 굵직한 레거시를 대거 추가해나갔다.

플레이 스타일 역시 각각의 개성이 있었다. 올라주원이 환상적인 테크니션이었다면 유잉은 센터의 교보재라고 불러도 좋을 정통파 센터, 로빈슨은 엄청난 효율성을 자랑하는 2차 스탯 아웃라이어였다. 미드레인지가 좋다는 건 셋 모두의 공통점이었지만 흔히 유잉의 그것이 제일 정교하다고 평가받았고, 스피드는 로빈슨이 제일 빼어났다면, 올라주원은 양쪽의 장점을 고루 갖추었고 기술적으로 가장 탁월한 선수였다. 여기에 후발주자인 오닐이 무지막지한 파워하우스 센터로서 앞선 셋 못지 않은 퍼포먼스로 이른 나이에 저들과 묶이게 된 것.

정규시즌 MVP는 유잉을 제외한 나머지 셋이 각각 한 번씩 수상했으며, 우승은 오닐이 4회, 올라주원과 로빈슨이 각각 2회 달성했고 유잉은 무관에 그쳤다. 파이널 MVP는 오닐(3회)과 올라주원(2회)만이 가지고 있다.

또한 오닐을 제외한다면 모두 디포이급 수비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올라주원은 2회, 로빈슨은 1회의 디포이를 수상했으며, 유잉은 둘보단 살짝 떨어지긴 했으나 뉴욕 닉스의 수비의 핵으로서 평균 블락 4개를 기록하기도 하는 등 어마무시한 수비능력을 보여주었다. 오닐 역시 상대적으로 수비에 빈틈이 있다는 것일 뿐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들 정도로 림프로텍팅과 빅맨 상대 대인 수비에 능했다.[3]

원클럽맨은 샌안토니오 스퍼스에서만 활약한 로빈슨 한 명 뿐이다. 올라주원은 휴스턴 로키츠에서 16년을 지내다 연봉 문제로 토론토 랩터스로 이적했고, 뉴욕의 거센 언론에 지쳐버린 유잉도 유잉무용론이라는 씁쓸한 억측을 들으며 올랜도 매직으로 이적했다. 오닐의 경우 친정팀 올랜도 매직부터 시작해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마이애미 히트, 피닉스 선즈,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보스턴 셀틱스를 거치며 저니맨으로 은퇴했다.

모두가 은퇴한지 오래인 지금에서야 선수간의 우위를 내려보자면 대체로 MDE 샤킬 오닐이 쓰리핏 포함 토탈 4회의 우승을 차지하며 1위, 94~95년도에 연속 우승을 거둔 하킴 올라주원이 2위, 플레이오프의 성적은 조금 아쉽지만 수상이력이라면 크게 밀리지 않고 커리어 후반기에[4] 두 번의 우승을 한 데이비드 로빈슨이 3위, MVP도 우승도 없이 은퇴한 패트릭 유잉이 4위로 평가받는다. 즉, 최종 커리어로만 보면 유잉은 나머지 3명에게 확연한 차이로 밀리고,[5] 우승 경력자인 로빈슨 역시 흔히 말하는 더 맨 우승과는 거리가 있었던 관계로 오닐과 올라주원에 비하면 낮게 평가받는 편.

4대 센터 모두 NBA 50주년 기념 NBA 역사상 위대한 50인 선수, NBA 75주년 기념 NBA 75주년 팀, 디 애슬레틱NBA TOP 75에 선정되었다.

3. 선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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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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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haq 구 레이커스 유니폼 1999.png
하킴 올라주원 패트릭 유잉 데이비드 로빈슨 샤킬 오닐
1963. 01. 21. ([age(1963-01-21)]세)

213cm (7' 0"), 116kg (255 l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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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픽 휴스턴 로키츠 지명
휴스턴 로키츠 (1984~2001)
토론토 랩터스 (2001~2002)
NBA 챔피언 2회 (1994-1995)
NBA 정규시즌 MVP (1994)
NBA 파이널 MVP 2회 (1994-1995)
올-NBA 퍼스트 팀 6회

올해의 수비수상 2회
NBA 올스타 12회
N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5회
올-NBA 세컨드 팀 3회
올-NBA 써드 팀 3회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4회
NBA 블락 리더 3회
NBA 리바운더 리더 2회
NBA 올-루키 퍼스트 팀
NCAA 파이널 포 MOP (1983)
파일:오륜기(여백X).svg 1996 애틀란타 올림픽 금메달
NBA 위대한 50인 선수
NBA 75주년 팀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08)
1962. 08. 05. ([age(1962-08-05)]세)

213cm (7' 0"), 116kg (255 l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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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픽 뉴욕 닉스 지명
뉴욕 닉스 (1985~2000)
시애틀 슈퍼소닉스 (2000~2001)
올랜도 매직 (2001~2002)
NBA 올-NBA 퍼스트 팀 1회
NBA 올스타 11회
올-NBA 세컨 팀 6회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3회
올해의 신인상
NBA 올-루키 퍼스트 팀
NCAA 챔피언 (1984)
NCAA 파이널 포 MOP (1984)
네이스미스협회 선정 올해의 대학선수상 (1985)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금메달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NBA 위대한 50인 선수
맥도날드 선정 위대한 35인 선수
NBA 75주년 팀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08)
1965. 08. 06. ([age(1965-08-06)]세)

216cm (7' 1"), 113kg (250 l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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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픽 샌안토니오 스퍼스 지명
샌안토니오 스퍼스 (1989~2003)
NBA 챔피언 2회 (1999-2003)
NBA 정규시즌 MVP (1995)

올-NBA 퍼스트 팀 4회
올해의 수비수상
NBA 올스타 10회
N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4회
올-NBA 세컨드 팀 2회
올-NBA 써드 팀 4회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4회
NBA 블락 리더 1회
NBA 리바운더 리더 1회
NBA 득점 리더 1회
NBA 올해의 신인상
NBA 올-루키 퍼스트 팀
NBA 스포츠맨십 어워드
1986 FIBA 스페인 세계 선수권 대회 금메달
1986 FIBA 스페인 세계 선수권 대회 올 토너먼트 퍼스트 팀
1988 서울 올림픽 동메달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1996 애틀란타 올림픽 금메달
NBA 위대한 50인 선수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선정 올해의 스포츠맨 (2003)
NBA 75주년 팀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09)
1972. 03. 06. ([age(1972-03-06)]세)

216cm (7' 1"), 168kg (370 l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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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픽 올랜도 매직 지명
올랜도 매직 (1992~1996)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1996~2004)

마이애미 히트 (2004~2008)
피닉스 선즈 (2008~2009)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2009~2010)
보스턴 셀틱스 (2010~2011)
NBA 챔피언 4회 (2000-2002, 2006)
NBA 정규시즌 MVP (2000)
NBA 파이널 MVP 3회 (2000-2002)
올-NBA 퍼스트 팀 8회

NBA 올스타 15회
NBA 올스타 게임 MVP 3회
올-NBA 세컨드 팀 2회
올-NBA 써드 팀 4회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3회
NBA 득점 리더 2회
올해의 신인상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94 FIBA 캐나다 세계 선수권 대회 금메달
1994 FIBA 캐나다 세계 선수권 대회 MVP
1994 FIBA 캐나다 세계 선수권 대회 올 토너먼트 퍼스트 팀
1996 애틀란타 올림픽 금메달
NBA 위대한 50인 선수
맥도날드 선정 위대한 35인 선수
NBA 75주년 팀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16)

3.1. 주요 경쟁자들

이들을 4대 센터로 부르는 이유 중 하나는, 이들 각자의 기량과 실적, 상훈이 S급인 것도 있지만 그 당시 이들 외에도 경쟁력을 갖춘 A급 센터들이 리그에 즐비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데뷔할 때 4대 센터의 윗세대에 군림했던 카림 압둘자바, 모제스 말론, 로버트 패리시 등 선배들도 커리어 황혼기였음에도 클래스를 보여주었고, 4대 센터와 동시대에 데뷔한 다른 센터들 중에도 우수한 실력을 가진 선수들이 많이 있어기 때문에 경쟁이 매우 치열했다. 그 많은 수준급 센터들 사이에서 최고의 자리를 지켜온 선수들이 바로 4대 센터인 것이다.

* 브래드 도허티
1986 드래프트 전체 1위이자 5시즌 연속 센터 1위 드래프트 기록을 이어간 센터.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서 활약했으며 좋은 패스와 슛을 지닌 선수였지만, 고질적인 부상때문에 끝내 28세의 나이에 이른 현역 은퇴를 하고 만다.
  • 랄프 샘슨
    1983 드래프트 전체 1위. 223cm의 신장과 엄청난 스피드를 겸비했던 센터로, 이 선수가 좀 더 건강했다면 오닐이 등장하기 전인 1980년대 중반에 이미 4대 센터라는 말이 만들어졌지도 모를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올라주원과 함께 휴스턴의 트윈타워 역할을 했으나, 너무 큰 키가 운동능력을 받쳐주지 못해 고질적인 무릎부상에 시달린 끝에 9시즌만에 은퇴하고 만다.[6]
  • 알론조 모닝
    1992 드래프트에서 오닐 바로 다음인 2순위로 뽑힌 센터. 키는 208cm로 포지션 대비 약간 작았으나 블로킹 감각과 수비력이 탁월해 마이애미 히트에서 두 번의 DPOY를 수상했고,[7] 득점력도 어느 정도 받쳐주는 공수겸장이었다. 커리어 후반에는 마이애미에서 샤킬 오닐을 백업하여 우승을 거두었으며, 은퇴 후에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또한 여기 있는 다른 선수들과는 다르게 디 애슬레틱에서 선정한 NBA TOP 75에 유일하게 선정되었다.
  • 디켐베 무톰보
    1991 드래프트 전체 4위. 218cm의 큰 키에서 나오는 위력적인 블록 슛이 인상적이었던 선수로, 덴버 너기츠와 애틀랜타 호크스,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등에서 활약하며 4번의 DPOY를 수상하고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된 수비형 센터이다.
  • 케빈 윌리스
    1984 드래프트 전체 11위. 4대 센터보다도 훨씬 긴 21년간 현역 선수생활을 이어갔던 선수이다. 올라주원, 로빈슨과 한 팀에서 뛰기도 했으며 스퍼스에서 로빈슨과 우승도 함께 했다.
  • 케빈 덕워스
    1986 드래프트 전체 33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서 활약하며 올스타에도 2회 선정되었고 클라이드 드렉슬러와 함께 포틀랜드를 NBA 파이널에 올린 주역 센터이다.
  • 아비다스 사보니스
    리투아니아의 농구선수.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에서 활약했으며, 당대로서는 희귀한 3점을 던질 수 있는 센터로 훌륭한 슛터치와 패싱, 볼핸들링 능력을 보여주며 국제대회에서 혼자 미국을 상대로 무쌍을 펼칠만큼 훌륭한 센터였다. 1988 서울 올림픽에서는 4대 센터 중 하나인 데이비드 로빈슨과 맞붙어 승리하고 금메달까지 따낸 바 있다. 냉전때문에 30대가 되어서야 NBA에 입성한 것이 아쉬울 따름.
  • 빌 카트라이트
    4대 센터들의 윗세대인 1980 드래프티로, 올스타에 1회 선정되었지만 4대 센터가 합류했을 땐 부상으로 인해 일찍이 하향세를 탔다. 닉스에서 유잉과 트윈타워를 이루다가 시카고 불스로 트레이드된 후, 35세 노장의 나이로 조던과 공동주장을 맡으며 불스의 1차 3-Peat에 기여한 주전 멤버였다.[8]
  • 릭 스미츠
    인디애나의 원클럽 프랜차이즈 스타로, 큰 신장과 정교한 훅 슛, 그리고 미드레인지 점퍼를 겸비한 선수였다.
  • 블라디 디박
    세르비아의 농구 레전드로 괴물 같은 피지컬이나 화려한 기술, 압도적인 임팩트는 없었지만 괴물 빅맨들이 즐비하던 시절에 이들을 상대하면서 듬직하게 제 몫을 해준, 어찌보면 시대를 잘못 타고나 저평가된 비운의 선수였다.

[1] 올라주원은 비교적 빨리 두각을 드러냈으나 첫 두 시즌을 부상에 시달리며 고생하던 유잉은 1987-88 시즌에 전성기가 지난 모제스 말론을 제치고 처음으로 올-NBA 세컨드 팀에 선정되며 그 다음 시즌에도 동일하게 퍼스트 팀 올라주원, 세컨드 팀 유잉의 구도를 만들었다. 반대로 1990년에는 퍼스트 팀에 유잉이, 세컨드 팀에 올라주원이 선정됨과 동시에 서드 팀에 로빈슨이 합류하였으며 1991년, 1993년에도 올-NBA 팀은 저 셋만 이름을 서로 바꿔가며 독차지한다.[2] 1992년에 서드 팀에 선정된 것도 이 때 휴스턴이 중간에 감독이 교체되면서 팀이 망하는 반면 클리블랜드는 당시 기준 팀 역사상 최고성적(타이)을 올린 덕에 올라주원을 밀어낸 것이다.[3] 단, 픽앤롤 대처나 미스매치 대처는 확실히 다른 셋보다 떨어졌다.[4] 팀 던컨 합류 후.[5] 유잉은 특히 퍼스트팀이 하나 뿐이라는 사실 때문에 저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All-NBA 팀에서 센터는 한 자리밖에 없어 리그에서 가장 잘하는 3명만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처럼 특급 센터들이 넘치는 시대라면 다른 포지션에 비해 All-NBA 팀 수상에 불리한 면이 있었다. 우선 반세대 정도만 겹치는 오닐을 제외하고 본다면 올라주원, 유잉, 로빈슨은 업치락뒤치락하며 서로 경쟁해왔으며, 유잉은 89-90 퍼스트팀 선정 후 92-93 시즌까지 쭉 세컨드 팀으로 선정되었다. 즉, 전성기에 해당되는 이 구간의 유잉은 최소 올라주원과 로빈슨 둘 중 한명보다는 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뜻이다.[6] 그럼에도 명전에 헌액되긴 했지만, 이건 대학무대에서의 성과가 적잖은 비중을 차지했다. 올해의 대학선수상을 무려 세 번이나 수상했을 정도로 NCAA에서 남긴 족적이 무시무시했기 때문. 사실 NBA 커리어만 두고 본다면 All-NBA Team 한 번에 올스타 4회, 우승은 없고 통산 누적은 동급 선수들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는 7000-4000 정도라 NBA에서의 활약만으로 명전에 갔다기엔 무리가 많다.[7] 기가 막히게도 이런 수비력을 지녔음에도 1999년이 올-디펜시브 팀 첫 선정이력이다. 올-NBA 팀 역시 이 때가 처음. 당시 7년차인데다가 29세로 베테랑이었음에도 6년동안 올스타 외에는 아무 이력도 못 쌓은 것. 위에 언급된 4대 센터는 오닐을 제외하고 다 수비괴물이었으며, 당대 최고의 수비형 센터인 무톰보까지 있었기 때문에 저 중 셋이 노화하고 본인도 기량이 올라온 1999년부터 두각을 나타낸 것.[8] 좋은 선수이긴 했지만 유잉과 트윈타워시절 (17.5점 7.7리바운드) 이후 지극히 평범한 수비력 좋은 롤플레이어로 전락했기 때문에 4대 센터가 활동하던 시절에 저들을 크게 위협한 적은 없다. 다만 시카고-뉴욕 라이벌 관계가 워낙 치열했기 때문에 (1991년부터 1994년까지 4년 연속 붙었고, 스윕으로 끝난 91년을 제외하곤 매번 혈투였다. 92년부터 7차전-6차전-7차전) 유잉 입장에선 상당히 거슬리는 상대이긴 했을 것이다. 당시 카트라이트는 기량은 이미 한참 떨어졌고 득점력은 거의 사라졌지만 그의 수비 존재감은 시카고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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