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2 16:13:29

4대 센터

1. 개요2. 상세3. 선수 목록
3.1. 주요 경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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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NBA에서 센터 뎁스가 가장 뛰어난 1990년대,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센터였던 4명을 일컫는 말.

2. 상세

1984년 1라운드 1픽인 하킴 올라주원, 1985년 1라운드 1픽인 패트릭 유잉, 1986년 1라운드 1픽이었던 브래드 도허티, 1987년 1라운드 1픽인 데이비드 로빈슨의 초특급 앨리트 센터 계보를 잇는 센터 4명을 부르는 한국에서만 쓰이는 말이었으나, 브래드 도허티의 부상으로 인한 빠른 몰락과 은퇴, 1992년 1라운드 1픽 샤킬 오닐의 등장으로 지금의 4대 센터가 되었다. 사실 4대 센터란 말은 오닐의 등장과, 등장 당시 군림했던 올라주원, 유잉, 로빈슨 빅3 구도를 같이 설명하려고 만든 케이스로 도허티를 거론하는 사람은 NBA를 좀 자세히 알아서 1980년대부터 빅3가 박터지게 싸웠던 시기를 올드 NBA팬 일부 외에는 없다.

사실 도허티의 전성시대에 저 넷이 묶이는 경우는 없었다. 유잉은 올라주원과는 대학시절부터 라이벌이었고, 제독은 데뷔하자마자 올라주원/유잉과 어께를 나란히 했지만 도허티는 항상 저 셋보단 당연히 아래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올라주원은 비교적 빨리 두각을 드러냈으나 첫 두 시즌을 부상에 시달리며 고생하던 유잉은 1987-88 시즌에 전성기가 지난 모제스 말론을 제치고 처음으로 올-NBA 세컨드 팀에 선정되며 퍼스트 팀 올라주원, 세컨드 팀 유잉의 구도를 만들었고, 사실상 세대교체가 이뤄지게 된다. 이후 1989년에 퍼스트 팀에 올라주원, 세컨드 팀에 유잉, 1990년에는 반대로 퍼스트 팀에 유잉, 세컨드 팀에 올라주원, 거기에 서드 팀에 로빈슨이 합류하면서 1991년, 1993년에도 올-NBA 팀은 저 셋만 이름을 서로 바꿔가며 독차지한다. 도허티는 엘리트 센터였지만 1992년에 서드 팀 단 한번 올라건것이 전부고, 저 셋처럼 엎치락뒤치락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 만큼 저 셋보다 확연히 한 수 아래로 여겨지던 도허티가 같이 묶일 이유는 없었다. 실제로 1992년에 서드 팀에 선정된 것도 이 때 휴스턴이 중간에 감독이 교체되면서 팀이 망하는 반면 클리블랜드는 당시 기준 팀 역사상 최고성적(타이)을 올리는 바람에 올라주원을 밀어낸 것이다. 그런데 오닐의 존재로 '4대 요소'를 하도 좋아하는 한국인들이 4대 센터를 만들었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오닐이 왜 4대냐, 차라리 비슷한 연배인 도허티가 더 낫지 않느냐'는 의견이 나온 것.

1990년대때 전성기를 겪으며, 조던이 없는 1994, 1995의 챔피언 자리를 놓고 싸운 센터들로 모두 각 팀의 1옵션으로 팀을 파이널로 이끌었으며, 커리어가 차이나는 현재와 달리 그 당시에는 서로 비등비등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서로 대등한 위치에서 대등한 경기를 했으며, 각자 다른 플레이 스타일로 재미를 보여주었다. 4대 센터는 돌아가면서 All-NBA팀을 먹었으며, 조던을 제외한다면 우승을 노릴 위치에 있던 자들로[1] 현재 역대 센터 랭킹에서도 고대 3센터 다음에 위치한다.[2]

1990년대가 조던의 시대여서 그렇지 이 4명의 센터들의 실력과 스타성, 위력도 대단했으며, 무톰보,모닝등의 센터보다 더 높게 쳐주는 공격,수비 모두 팀의 1옵이자 이 선수 한명이 합세함으로 팀은 플옵 상위 시드나 우승권으로 올라가는 놀라운 파괴력을 갖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전성기였던 유잉,올라주원,로빈슨과 달리 1992년에 데뷔한 오닐은 사실 뛰는 세대가 반세대쯤 차이남에도 1994년 컨퍼런스 파이널(vs유잉), 1995년(vs올라주원) 등 4대 센터랑 뛰기도 많이 뛰었고, 루키임에도 1990년대에도 4대 센터랑 비슷한 파괴력을 가진 대단한 기량을 가진 센터였다.

이 4대 센터의 플레이 스타일이 각각의 개성이 있었다. 하킴 올라주원은 환상적인 스피드랑 풋워크를 자랑하는 역대 최고의 포스트 테크니션인 한편 뛰어난 핸들링으로 가드/포워드같은 면모를 보여주었고 속공 참여와 페이스업이 위협적이었고 미드레인지도 최고였고, 패트릭 유잉은 정통파 센터의 이미지가 강하면서 미드레인지는 넷 중 최고였다. 데이비드 로빈슨은 기술적으론 위 둘보다 부족했지맛 가드같은 스피드에서 나오는 속공 참여와 페이스업이 위협적이었고, 샤킬 오닐은 압도적인 피지컬을 가진 파워하우스형 센터였다.

또한 오닐을 제외한다면 모두 디포이급 수비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실재로 올라주원은 디포이 2회, 로빈슨은 1회의 디포이를 받았으며, 유잉은 저들보다 살짝 떨어지긴 했으나, 당시 수비가 가장 강한 뉴욕 닉스의 수비의 핵으로 평균 블락 4개의 어마무시한 수비능력을 지녔다. 오닐 역시 상대적으로 수비에 빈틈이 있다는 것이지,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들 정도로 림프로텍팅에 능했다.[3]

팀을 위해 헌신한 레전드 선수임에도 말년에 우승한 로빈슨을 제외한다면 원클럽맨이 없다. 올라주원은 휴스턴 로키츠에서 16년을 지내다, 연봉 문제로 토론토 랩터스로 이적했고, 뉴욕의 거센 언론에 지쳐버린 유잉도 유잉무용론이라는 씁쓸한 억측을 들으며올랜도 매직으로 이적했다. 사실 이 분야 끝판왕은 오닐인데 친정팀인 올랜도 매직은 오닐이 나태해지자 앤퍼니 하더웨이를 선택하며 오닐을 트레이드, 쓰리핏을 시켜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는 좀 더 젊은 선수인 코비 브라이언트를 선택하며 트레이드, 이후 마이애미 히트에서 드웨인 웨이드를 도와 우승을 만들었음에도 다음해에 피닉스 선즈로 이적, 이후 계속되는 낮은 플옵성적으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로 트레이드해 르브론 제임스를 도와 플옵 2차전까지 갔으나 탈락, 르브론의 디시젼쇼 이후 보스턴 셀틱스로 이적해 뛰다가 저니맨으로 은퇴했다.
이에 비해 한 팀에 쭉 있으며 플옵권에 계속 뛰고 있다가, 팀 던컨의 합류 이후 2우승을 더한 로빈슨의 선수생활이 더 복되어 보인다.[4]

3. 선수 목록

3.1. 주요 경쟁자들

이들을 4대 센터로 부르는 이유 중 하나는, 이들 각자의 기량과 실적, 상훈이 S급인 것도 있지만 그 당시 이들 외에도 경쟁력을 갖춘 A급 센터들이 리그에 즐비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데뷔할때 4대 센터의 윗세대에 군림했던 카림 압둘자바, 모제스 말론, 로버트 패리시 등 선배들도 커리어 황혼기였음에도 클래스를 보여주었었고, 4대 센터와 동시대에 데뷔한 다른 센터들도 단순히 기록과 수상경력뿐 아니라 우수한 실력을 가진 선수들이 많이 있어서 경쟁이 엄청나게 치열했고 이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하면서 최고의 센터자리를 지켜온 게 4대 센터들이다. 아래 언급할 이들은 대부분 4대 센터의 존재가 없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고평가 받을 수 있던 동시대의 A급 센터들이다.[5] 3명이 명예의 전당 들어갔는데 A급따리 취급받는 시대다
  • 브래드 도허티
    1986 드래프트 전체 1위이자 5시즌 연속 센터 1위 드래프트 기록을 이어간 센터.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서 활약하며 좋은 패스와 슛을 지닌 선수였지만, 고질적인 부상때문에 끝내 28세의 나이에 이른 현역은퇴를 하고 만다.
  • 랄프 샘슨
    1983 드래프트 전체 1위. 이 선수가 좀 더 건강했다면 오닐이 등장하기 전인 1980년대 중반에 이미 4대 센터라는 말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을 실력과 운동능력을 가졌던 초장신 센터로, 223cm의 엄청난 키에도 스피드가 대단했던 선수로 올라주원과 함께 휴스턴의 트윈타워 역할을 했으나, 너무 큰 키가 운동능력을 받쳐주지 못해 고질적인 무릎부상에 시달린 끝에 9시즌만에 은퇴하고 만다.[6]
  • 알론조 모닝
    1992 드래프트 전체 2위로 오닐 바로 뒷 순위에 뽑힌 명센터. 당시 기준으로도 NBA 주전 센터 중에는 작은 키에 속하나(208cm) 블로킹 감각이 탁월했던 수비형 센터로 구 샬럿 호네츠, 마이애미 히트등에서 선수생활을 하면서 2번의 DPOY를 수상했고[7], 마이애미에서 파이널 우승도 차지했으며 은퇴후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된 1990~2000년대를 대표할 수비왕 센터였다. 드래프트 시기가 시기다보니 주로 오닐의 초기 라이벌 구도에 섰던 센터이다.
  • 디켐베 무톰보
    1991 드래프트 전체 4위. 덴버 너기츠, 애틀랜타 호크스 등에서 활약하며 4번의 DPOY를 수상했으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수비형 센터이다. 218cm의 큰 키에서 나오는 위력적인 블록 슛이 인상적이었던 선수이다.
  • 케빈 윌리스
    1984 드래프트 전체 11위이자, 4대 센터보다도 훨씬 긴 21년간 현역 선수생활을 이어가며 올라주원,로빈슨과 한 팀에서 뛰기도 한 센터이다.[8]
  • 케빈 덕워스
    1986 드래프트 전체 33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서 활약하며 올스타에도 2회 선정되었고 클라이드 드렉슬러와 함께 포틀랜드를 NBA 파이널에 올린 주역 센터이다.
  • 빌 카트라이트
    4대 센터들의 윗세대인 1980 드래프티이며 올스타 1회에, 4대 센터가 이미 합류한 뒤에는 부상으로 인해 하향세를 탔던 센터였지만, 그럼에도 1980년대는 뉴욕 닉스에서 유잉과 트윈타워, 이후 시카고 불스로 트레이드 된뒤 35세 노장의 나이로 조던과 공동주장을 맡으며 자신을 밀어낸 후배 유잉을 골밑에서 막아내던 시카고 불스 1차 3-Peat에 주전 멤버였다.[9]
  • 릭 스미츠
  • 블라디 디박
    세르비아의 농구 레전드로 동시대의 같은 포지션인 샤킬 오닐, 팀 던컨, 케빈 가넷, 하킴 올라주원, 알론조 모닝, 칼 말론, 찰스 바클리, 데이비드 로빈슨 등, 압도적인 빅맨들에 비하면 비교적 평범한 체격에, 괴물 같은 운동능력도, 화려한 기술도, 압도적이거나 임팩트 있는 플레이를 하지는 않았어도 팔팔한 20대 전성기 시절의 괴물 빅맨들이 즐비하던 시절, 이들을 홀로 상대하면서 자신이 속한 팀의 골밑을 묵묵히 맡아 리바운드와 몸싸움, 수비같은 중요해 보이지는 않아도 누군가는 꼭 해줘야만 하는 진흙탕 싸움을 책임지고,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며 동료들에게 스크린을 서주면서 찬스를 만드는 등의 어느정도 듬직한 활약을 해준, 어찌보면 시대를 잘못 타고나 평가절하가 된 비운의 선수

[1] 이 레전드를 이긴 조던의 6우승이 더 빛나는 이유는 센터가 최고의 시대에, 최고의 센터들을 꺾고 우승 했기 때문이다.[2] 고대 3센터는 빌 러셀, 윌트 체임벌린, 카림 압둘자바로 NBA가 인기를 끌기전 1960, 1970년대가 전성기이던 선수들로, 괴물같은 운동능력과 스탯, 우승경력을 갖고 있어서, 올타임 랭킹에서 조던 다음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3] 단, 픽앤롤 대처나 미스매치 대처는 확실히 다른 셋보다 떨어졌다.[4] 여담으로 4대 센터중에 패트릭 유잉만 우승을 못했다.[5] 여담으로 주요 경쟁자들 중에 빌 카트라이더와 알론조 모닝하고 케빈 윌리스를 재외하면 우승을 못했다.[6] 그럼에도 명전에 헌액되긴 했지만, 이건 대학무대에서의 성과가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긴 했다. 올해의 대학선수상을 무려 세 번이나 수상했을 정도로 NCAA에서 남긴 족적이 무시무시했기 때문. 사실 NBA 커리어만 두고 본다면 All-NBA Team 한 번에 올스타 4회, 우승은 없고 통산 누적은 동급 선수들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는 7000-4000 정도라 NBA에서의 활약만으로 명전에 갔다기엔 무리가 많다.[7] 기가 막히게도 이런 수비력을 지녔음에도 1999년이 올-디펜시브 팀 첫 선정이력이다. 올-NBA 팀도 처음이다. 당시 7년차인데다가 29세로 베테랑이었음에도 6년동안 올스타 외에는 아무 이력도 못 쌓은 것. 위에 언급된 4대 센터는 오닐을 제외하고 다 수비괴물이었으며, 무톰보까지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수비에서도 (다른) 4대 센터시절이었던 것이고, 저 중 셋이 노화하고 본인도 기량이 올라온 1999년부터 두각을 나타낸 것.[8] 로빈슨과 함께 우승을 했다.[9] 사실 좋은 선수이긴 하지만 유잉과 트윈타워시절 (17.5점 7.7리바운드) 이후 지극히 평범한 수비력 좋은 롤플레이어로 전락했기 때문에 4대 센터가 활동하던 시절에 저들을 크게 위협한 적은 없다. 다만 시카고-뉴욕 라이벌 관계가 워낙 치열했기 때문에(1991년부터 1994년까지 4년 연속 붙었고, 스윕으로 끝난 91년을 제외하곤 매번 혈투였다. 92년부터 7차전,6차전,7차전) 유잉 입장에선 상당히 거슬리는 상대이긴 했을 것이다. 당시 카트라이트는 기량은 이미 한참 떨어졌고 득점력은 거의 사라졌지만 그의 수비존재감은 시카고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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