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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L.37 화포 운반 트럭에 실려가는 75/32 Mod 37
1. 개요
| 사용국가 | 이탈리아 왕국 |
| 제작 | 안살도 |
| 중량 | 1.160kg (포차 포함), 69.3kg (본체) |
| 전장 | 2.574m |
| 구경 | 75 밀리미터 |
| 상하각도 | −10° 에서 +45° |
| 좌우각도 | 50° |
| 포구초속 | 624m/s |
| 관통력 | 철갑탄: 300m 에서 88mm 대전차고폭탄: 500m에서 55mm |
| 사용 탄종 | 철갑탄[1], 고폭탄[2], 성형작약탄[3] |
| 최대사거리 | 11500 m |
| 발사속도 | 분당 6~8 발 |
이 포는 1929년에 포병단 검사관인 에토레 주리아 장군이 연구한 신형화포 개발 프로그램에 포함되며 시작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왕립 육군 참모총장 알베르토 본자니 장군과 전쟁부 장관 피에트로 가제라 장군의 승인을 받았으나 신형 화포 개발을 위한 제한된 자금으로 인해 베르네세 대령이 개발한 장포신 프로그램이 연기되었다.
이후 1937년,이탈리아 왕국군의 의 최고 무기 및 탄약 기술 위원회(Comitato Superiore Tecnico per le Armi e Munizioni)는 전차에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야포의 사거리를 늘리기 위해 제작을 승인했으며 Obice da 75/18 곡사포의 부족한 사거리에 대한 불만과 대전차전을 수행할 새로운 무기에 필요성으로 인해서,
첫 번째 프로토타입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포병 생산 공장 중 하나인 나폴리 왕립 육군 병기창(Arsenale Regio Esercito di Napoli, AREN)에서 제작되어 1937년 안살도에 의해 공개되었다.
이 첫 번째 프로토타입은 75/34 Mod. S.F.라는 이름으로 육군에 의해 채택되었으나 이 신형 대전차포를 단축하고 소염기를 후추통 모양으로 변경한 것이 75/32 Mod 37이다. 포방패는 12mm의 두께로 장갑차와 교전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트럭인 TL.37이 견인을 하였다.
새로운 포의 기술 요구 사항에는 구경 75mm, 30구경장 포, 최대 압력 2,650기압, 무게 약 1,200 kg, 사거리 12,500 km 이상, 포구속도 600 m/sec,두 개의 포가 다리(혹은 '분리식 포가')와 시속 45~60km의 기계적 견인 속도가 포함되었으며 탄약은 이미 채택된 75/18 곡사포와 공통적이어야 했고 포구에 포구제동기가 있어 반동 에너지의 정밀도와 흡수가 향상되어야 했다.
이 후 실험적으로 제작된 75/34 Mod. S.F. 포대 5문에 대한 여러 시험을 거친 후, 포신은 32구경(2,400mm)으로 단축되었고, 세모벤테 75/18에도 사용된 "후추통" 형태의 포구 제동기가 장착되었다.
이후 원래의 34구경 포신 버전은 이후 수정되어 P26/40 중전차와 세모벤테 75/34 자주포에 장착되는 데 사용되었다.
이탈리아군은 원래 1938년 안살도에 192문을 주문했지만, 생산 우선순위가 높지 않았던데다
이들 중 한 명인 기술 서비스 최고 감독관(Ispettore Superiore dei Servizi Tecnici) 마리오 카라치올로 디 페롤레토 장군은 1940년 11월 왕립 육군 참모부(Stato Maggiore del Regio Esercito)에 75/32를 대규모로 채택할 것을 제안했음에도 이 제안은 1940년 12월 9일 번호 39853 문서에서 거부되었는데, 육군은 포병 운용 인력이 포를 제자리에 배치하고 정확하게 조준하여 장갑차와 같은 움직이는 목표물을 향해 사격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거부 이유로 내세웠다.
1941년 6월 21일, 최고 사령부는 문서에서 이탈리아 장군들이 75/34 Mod. S.F.를 선호한다고 밝혔음에도 이탈리아 육군 최고 사령부의 일부 인사들은 이 포의 뛰어난 대전차 능력을 인지해 75/32를 채택할 것을 주장하면서 75/32를 선택하는 과정에서의 갈등으로 인해 첫 번째 물량은 1941년이 되어서야 인도되었다.
1943년, OTO와 안살도에 두 번째로 주문된 분량인 총 483문-안살도 포추올리에 생산분 303문(육군 주문 170문 + 이전에 포르투갈에서 주문했다가 육군이 인수한 133문),OTO 생산분 180문에 대한 개량이 계획되었다. 새로운 신형버전는 자동 폐쇄기를 채택하고, 더 두꺼운 방패를 제공하며, 폐쇄기 왼쪽에 고각 및 발사 레버를 추가하여 장갑차에 대한 성능을 향상시키려 했으나, 결국 이러한 개량 사항이 적용된 포는 제작되지 않았다.
2. 설계
군의 목표 중 하나는 야포 생산을 표준화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포는 75/18 Mod. 34/35 포가에 32구경 포신을 장착하여 제작되었다. 포구 제동기는 정확도와 사거리를 높이고, 포의 고각이 높아짐에 따라 감소하는 반동을 일부 흡수하는 역할을 했다.왼쪽에 앉아 수평 조준을 제어하는 조준기를 포함하여 4명의 포반원이 있었고 사수는 오른쪽에 앉아 발사 레버와 고도 조정을 제어할 수 있었다. 다른 두 명의 반원은 포에 탄약을 공급하는 일을 담당했다.
포가는 두 개의 다리(분리식 포가)가 있으며 펼칠 수 있고 두 부분으로 접을 수 있어 다양한 지형 고도에 적응할 수 있었다.
이 포가는 50°의 횡단(좌우 회전) 범위와 -10°에서 +45°의 고각 범위를 허용한다. 이 포에는 4.2mm 두께의 방패도 장착되었다.
폐쇄기 블록은 전적으로 수동 방식이다.
스포크가 있는 바퀴는 처음에는 마그네슘-알루미늄 합금인 엘렉트론으로 만들어졌다. 생산 과정에서는 강판이 대신 사용되었다.
현가장치는 탄성이 있었고, 75/18 Mod. 34/35과 동일한 토션 바 차축으로 구성되었다.
포가에는 넓은 폭(사격 및 기계 견인용)과 좁은 폭(산악 견인용)의 두 가지 바퀴가 있었다.
3. 생산
| 생산량 | |
| 연도 | 수량 |
| 1941년 | 30문 |
| 1942년 | 44문 |
| 1943년 | 98문 |
| 합계 | 172문 |
| 1943년 9월 8일까지의 수치 |
포는 1941년 안살도가 포추올리 공장에서 개당 470,300리라의 가격으로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첫 번째 포는 그해 말에 공장을 출고했다.
제작은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으며, 1942년 9월에는 49문만 사용할 수 있었으나, 1943년 여름에는 172문으로 늘어났다.
포는 1938년에 192문이 주문되어 생산이 시작하였지만 대전차 기능에서의 유용성을 확인한 후 주문이 급격히 증가하여 1943년에는 542개가 주문되었으나 이는 서류상의 기록이었으며 실 생산량은 172문밖에 못 미쳤다.
또한 1943년 6월 포병 총국 - 생산 부서(Direzione Generale Artiglieria – Reparto Produzione) 문서에 따르면 안살도 포추올리는 한 달에 60문을 생산할 수 있었으나 휴전으로 인해 이 주문된 포는 완성되지 못했다.
TL.37과 같은 경량 트랙터로 견인되도록 설계되었지만, 3마리의 말이 끄는 것도 가능했다. 공식적으로는 견인 속도가 35-40km/h,혹은 45-60km/h로 추정되었지만, 실제 사용에서는 속도가 훨씬 낮았을 것이라한다.
이 대포를 자주포에 장착하려는 실험도 있었다. 1941년 여름, 육군 참모부는 자주포 무장으로 75/18 곡사포와 75/34의 볼마운트 주포 장착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6월 21일 회람에 따라 후자(75/34 대포)가 선정되었지만, 75/34 대포를 즉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75/32 대포를 세모벤테 M40 자주포 차체에 시험적으로 장착해보았다.
그러나 이 75/32 대포를 장착한 모델은 결국 정식 채택되지 못했다. 또한, 이 75/32 대포는 P26/40 전차와 세모벤테 M42 자주포에도 실험적으로 장착되었지만, 최종적으로 75/34 Mod. S.F. 대포보다 관통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선택받지 못했다.
일부 출처에서는 "후추통" 포구 제동기가 특징인 세모벤테 M40 자주포가 1943년 9월 9일~10일 로마 방어전에 배치되었다고 잘못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세모벤테 75/32는 프로토타입 1대(번호판 RE 4443)만 M14/41 전차 차체를 기반으로 제작되었을 뿐, 초기 생산 단계로 이어지지 않았다.
로마 방어전에 배치된 것은 해당 자주포가 아니라, 제135 기갑사단 '아리에테 II'가 보유하고 있던 장거리 포(Cannoni a Grande Gittata)인 75/32 대포 24문이었으며, 이 야포들이 이탈리아 수도 방어 임무에 투입되었다.
4. 운영
1937년부터 시작된 이 대포의 대량 생산은 이탈리아군이 적의 장갑에 대응할 수 있는 괜찮은 대전차 무기를 갖추도록 해주었고,특히 1940년~1941년 겨울 리비아에서 영국군이 반격을 주도한 북아프리카 전선의 마틸다 전차를 상대하는 데 유용했을 것이다.
이 대포는 T-34 전차에 맞선 동부 전선에서도 좋은 성능을 발휘했다.
화포는 이탈리아 러시아 원정 군단의 직접 지휘 하에 엔리코 알타빌라 대령이 지휘하는 제201 차량화 포병 연대 소속 3개 포병대대로 편성되어 사용되었다. 연대와 총 36문의 대포는 라 과르디아 중령의 제1대대, 프란체스코 징갈레스 중령의 제2대대, 비탈레 소령의 제3대대 등 3개대대로 구성되었다.
대포는 소련의 T-34 전차를 상대로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입증되었으며, 철갑탄뿐만 아니라 특히 포의 낮은 속도에도 불구하고 성형 작약탄을 사용하는 EP 포탄으로 대전차 역할을 매우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동부 전선에서 75/32 대포의 우수한 대전차 성능에 대한 소식은 왕립 육군 내에까지 퍼졌고, 최고 사령부(ASI) 대표단은 mod.37 대포를 장착한 일부 대대를 그 전선에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왕립 육군 참모부는 그리스에서 준비 중이거나 이미 사용될 예정인 물자를 제외하고는 그러한 물자를 사용할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
제201 차량화 포병 연대는 동부 전선에서 전투를 이어갔다. 1942년 8월 31일에는 제2알피니사단 소속 '베스토네' 알피니 대대의 공격을 지원하였다. 9월 5일에는 제2보병사단 '스포르체스카'를 증원하기 위해 제1 오토바이 중대와 함께 볼쇼이 마을에 또 다른 포대가 지원군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제201 차량화 포병 연대 전체는 1942년 12월부터 1943년 1월 사이 제2차 돈 방어 전투[4] 중에 사실상 궤멸되었다. 이 기간 연대의 전투 기록은 단편적이다. 1942년 12월 16일, 제9보병사단 '파수비오'에 배속된 제1대대 소속 제1포대는 소련 제38 근위사단의 공격 방어에 참전했다가, 소련군에 의해 모든 포병이 전사하며 완전히 파괴되었다. 12월 18일에는 제3군단의 일부 부대가 이탈리아군과 독일군 연합으로 탈리 마을을 방어했으며, 이 방어선은 다음날 독일군 부대에 인계되었다.
동부 전선에서 연대가 궤멸되고, 1943년 소련의 천왕성 작전 이후 동부전선에 지원을 위해 추가로 보낼 예정이었던 포병 대대용 신형 대포 또는 부속 물자/보급품이 수송 중 행방불명되거나 파괴되어 도착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대대는 작전을 계속 유지했다. 알바니아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제11보병사단 '브레너' 소속 제9포병 연대의 2개 대대와 로마 근처에서 작전을 펼치는 제135기갑사단 '아리에테 II' 소속 제235포병 연대의 2개 대대를 포함하여 총 5개 대대는 여전히 활발하게 운용되었으며 아리에테 II부대의 포대는 1943년 9월 8일 휴전 이후 독일군과의 전투에 참여했다.
알바니아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제11보병사단 '브레너' 소속 제9포병 연대의 2개 대대의 이 사진은 1943년 9월 8일 휴전 이후 제41보병사단 '피렌체', 제11보병사단 '브레너', 그리고 제53보병사단 '아레초'의 병사들로 편성된 그람시' 유격대대가 사용한 제11보병사단 '브레너' 소속 대포 두 문으로서 테르질리오 카디날리 상사 지휘하의 이 이탈리아 군인들은 휴전 후 며칠 동안 알바니아 해방군 제1 유격대 여단에 합류하여 독일군과 싸우는 것을 택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75mm 구경은 이제 사단 포병에 완전히 쓸모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모든 포가 퇴역하였다.
4.1. 파생형
1943년에는 75/32 Modello 1937 대포를 기반으로 한 두 가지 버전이 연구되었다.
첫 번째는 항공기에 장착하기 위한 항공 버전이었고
두 번째는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위스, 유고슬라비아와 맞닿은 이탈리아 알프스 국경을 방어하기 위한 벙커 및 기타 방어 시설 복합체인 리토리오 알프스 방벽 요새 내부에 설치될 예정이었다.
1942년 제노바 코르닐리아노에 위치한 안살도(Ansaldo) 공장에서 75/32 주포의 사진이 촬영되었는데, 이는 항공기 설치 테스트를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인다. 사진 속에서 대포는 발사 시 총구 섬광에 대한 항공기 기수의 저항을 시험하기 위해 항공기 기수를 모방한 구조물 내부에 배치되었다.
불행히도 이 프로젝트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1943년 9월 8일의 이탈리아 휴전으로 인해 프로젝트들이 포기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5. 사용국
5.1. 나치 독일
휴전 후 독일군은 48문의 대포를 온전하게 노획하여 7,5cm FK 248(i)라는 이름으로 독일군이 사용하였다.독일군은 이 대포를 이탈리아 전선과 유고슬라비아에서 티토의 파르티잔에 맞서 사용하는 데 투입했다.
독일군이 이탈리아에서 사용하는 75/32 대포(Cannone da 75/32)를 보여주는 유일한 사진은 아마도 팔시름예거 부대가 사용하는 뿐이다.
5.2. 페루
일부는 에콰도르-페루 전쟁 이전에 페루군에 의해 구입되어 사용되었다.5.3. 포르투갈
포르투갈은 전쟁 중 133문를 주문했지만 나중에 취소되어 이탈리아군이 인수했으며 이후 대포는 제작되지 않았다.[1] granata 75/32 perforante (cartoccio proietto)[2] Granata Dirompente da 75/32(570m/s),Granata Dirompente da 75/32 a d.e.(360-570m/s),Granata Dirompente da 75/32 Modelo 1932(390-490m/s)[3] Granata da 75 Effetto Pronto (초기형. 580m/s),Granata da 75 Effetto Pronto (후기형. 557m/s. 34구경장 발사시 탄속. 55,50mm 관통.[5]),Granata da 75 Effetto Pronto Speciale (초기형. 불명),Granata da 75 Effetto Pronto Speciale Modello 1942(349m/s.27구경장 발사시 탄속. 70mm 관통[6])[4] 소토성 작전 및 오스트로고즈스크-로소시 공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