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01 19:40:10

제헌의회그룹

CA(정파)에서 넘어옴
학생회의 계파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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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의 계파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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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정치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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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카데미학생회후진국경제연구회를 주축으로 하는 분파[2] 학계PD, PTR(무산계급혁명론), LC(노동운동)그룹, 트로츠키주의[3] 제독PD(AMC)+ND+제파PD(AF)[4] NL좌파+ND+제파PD(AP, A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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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제헌의회그룹 사건3.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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制憲議會그룹(CA그룹)
Constituent Assembly Group

1. 개요

1980년대 한국에 존재했던 운동권 정파 그룹으로 영문명의 머리글자를 따서 CA그룹이라고도 부른다.

사회구성체 논쟁이 한창이던 1986년, 서울대 인문대를 중심으로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가 결성된다. 그들은 직선제 개헌을 슬로건으로 하고 있던 NL그룹에 대립해 "파쇼하의 개헌 반대, 혁명으로 제헌의회 소집"을 주장하며 CA그룹으로 진화하였다. 이들은 민족민주혁명(NDR)을 주장하였다. 사회구성체 논쟁에서는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신식국독자)를 지지했으나 정파에 따라 식민지파쇼사회론이나 신식민지파쇼사회론을 지지한 경우도 있었고, 이들은 대부분 후에 제파PD가 된다.

이들은 한국 사회의 모순이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동일한 비율로 존재한다고 보았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소부르주아를 갈라친 노동자, 농민, 빈자와의 광범위한 동맹을 결성한 후 레닌주의를 기반으로 파쇼 정권을 완전히 타도한 후, 제헌의회를 소집해 헌법을 아예 새로 만든 뒤 북한과의 자주적인 민족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고, 이후 사적 소유의 철폐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수립을 골자로 하는 혁명노선을 지지했다. 그러나 제헌의회 공안사건으로 인한 지도부 검거와 노선 차이로 인한 내부 분열로 조직이 약화되고, 90년대 이후에는 PD계열에 좌파운동의 주도권을 내주게 된다.

2. 제헌의회그룹 사건

1987년 2월 검찰은 제헌의회그룹이 레닌의 혁명이론을 바탕으로 정부를 전복할 목적으로 각종 시위선동 및 정치신문 제작 등 활동을 한 혐의로 이들을 기소하였다. 재판부는 이를 인정하여 주동자인 최민[1]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고 ‘제헌의회 그룹’을 반국가단체로 판결하였다. 최민을 비롯해 김성식, 민병두 등의 지도부가 검거되면서 조직이 위축되었다.
사건 당시의 관련보도 영상. 이후 나온 특집프로그램(해당영상)도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2022년 8월 11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재심에서 지도부 중 주동자로 알려진 최민에게 무죄를 선고하였고, 반국가단체에서 해제하였다.

이는 수사과정에서 안기부 수사관에 의해 영장없이 구금되었고, 고문을 동반한 수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도부의 주장 중 "무장 봉기에 의한 혁명으로 정부를 전복해 임시혁명 정부를 수립하고 제헌의회를 소집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바로잡기 위한 의지의 표명으로 국가 반란을 구체적으로 모의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며 제헌의회그룹에서 발간한 "무엇이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진군을 막고 있는가" 등의 표현물이 "군사정권은 당시 국민의 기본권인 자유를 억압했기 때문에 이적표현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에 의한 것이다. #, #

3. 이후

지도부 검거 이후 이들은 '노동자해방투쟁동맹(약칭 노해동)'으로 결집한다.[2] 학생조직으로는 민민투 계열을 모아 '전국반제반파쇼 민족민주학생연맹(약칭 민민학련)을 두었는데 이는 80년대 후반 좌파 학생운동의 중심이 된다. [3]

1987년 12월 대선에서 CA는 독자출마한 민중후보 백기완[4][5]을 지지하며 대규모 거리유세를 조직하기도 했지만, 백기완 후보는 자신이 제기한 민주연립정부[6] 제안이 무산되자, 후보 단일화를 촉구화면서 선거운동 도중 사퇴하였다. 반면에 NL은 정권교체 구호를 들고 제도권 정치인 중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통일에 유화적인 김대중 후보 비판적 지지로 결집하면서 비록 대선은 패배했지만, 대학가에서 많은 공감을 얻으면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대선 이후 벌어진 논쟁속에서 CA그룹의 다수파는 대중운동속으로 산개할 것을 주장하며 1988년 조직을 해산한다. 이들 대다수는 NL의 대중노선을 따라 자주파에 흡수되는데,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한 NL주류와는 달리 남한의 자주적인 통일운동을 주장하여 비주사NL(혹은 NL좌파) 노선으로 불리기도 한다. 전대협 5기 김종식, 6기 태재준 의장(소위 관악자주파)이 이 흐름을 대표하며, 이후에는 PD 일부 그룹과 결합하여 21세기 진보학생연합으로 이어진다.[7]

NL에 합류하지 않은 CA 소수파는 기존의 NDR론을 계속 주장하며(그래서 ND라고 불리웠다.) 노학연대와 70말 학번의 좌파 노동운동가들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를 표방한 노동자계급의 전위정당 결성' 을 목표로 1989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약칭 사노맹)을 건설해 활동한다. 이들은 1991년 사노맹이 정권의 탄압으로 와해되면서 결속력이 약화되었다. 이후 1992년 대선의 백기완선거운동본부에서 활동하며 PD그룹과 섞이게 된다.

그래서 1990년대 이후에는 CA를 표방하는 그룹은 소멸되었고, CA로 활동하던 사람들은 80년대 말부터 싹튼 PD그룹과 함께 범좌파로 분류되며 운동사회 주류인 NL과 경쟁하였다. 국민승리21을 거쳐 민주노동당, 정의당으로 이어지는 진보정당 운동[8]에 참가하기도 했고,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사회운동에도 많이 진출하였다.


[1] 서울대 국사학과 78학번. 소아마비 중증장애인으로, 자본론공산당선언 독일어 원전을 번역하였고, 그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혁명운동의 기수를 제헌의회 소집으로'라는 문건은 CA 운동의 바탕이 되었다.[2] 이때의 지도부 중의 한명이 박종철의 선배, 박종운이다. 박종철 열사도 CA 그룹 소속으로 활동하였다.[3] 지금은 작고한 가수 신해철이 대학 초반 서강대 CA계열 그룹에 가담하여 교련 반대 투쟁에 참가했었다는 증언도 있다. 신해철 유고집에도 나오는 내용이고, 주변 인물들의 증언에도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 게다가 신해철은 87학번이었기 때문에 6월 항쟁을 신입생 때 겪었다(...). 더불어 이 시기에 주요 학생운동 정파간 대립으로 투쟁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일명 교문메가폰사건.(...)[4] 백기완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진보운동 역사에서 대단히 독특한 존재로 1970년대부터 활동했지만 어떤 특정 정파에 속한적도 없고, 백기완의 사상도 그 어떤 정파와도 딱 들어맞지는 않는다. 재야민주화운동그룹, 학생운동 세력 일부의 추대를 받아서 출마한 것이지 백기완이 CA그룹 소속이었던 것이 아니다.[5] 이당시 백기완 선본의 주력은 제헌의회 그룹과 인민노련이었다.[6] 김영삼-김대중-재야 3자연대.[7] 21세기는 CA는 물론이고 NL, PD 어떤것도 내세우지 않았고 정파 구분을 넘어서는 학생운동을 표방함.[8] CA-ND그룹의 일부는 사회당을 형성하기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