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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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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5.30. ~ 201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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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의정원 ·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제헌 · 2 · 3 · 4 · 5민 · 5참 · 6 · 7 · 8 · 9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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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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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개별 합류)
진보신당(등록 말소)[1]
진보신당연대회의
(재창당)
새진보통합연대
(개별 합류)
사회당
(흡수 합당)
시민통합당
(개별 합류)
파일:진보신당 로고.svg
진보신당
<colcolor=#e62020>영문 명칭<colbgcolor=#FFF,#191919>New Progressive Party
표어평등, 생태, 평화, 연대[2]
창당일2008년 3월 17일
해산일2012년 4월 12일
당 색 빨간색 (#E62020)
정치적 스펙트럼중도좌파 ~ 좌익[3]
해산 전 대표홍세화
해산 전 주소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70길 19
대하빌딩 801호 (여의도동)
해산 당시 국회의원0석 / 299석[4]
강령진보신당 연대회의 강령

1. 개요2. 로고3. 역사
3.1. 민주노동당 분당과 진보신당 창당3.2. 진보신당 창당과 총선3.3. 2010년 지방선거3.4. 통합파들의 탈당3.5. 사회당과 합당3.6.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참패, 그리고 노동당으로의 개명
4. 역대 지도부 5. 역대 선거 결과6. 여담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파일:NPParty.jpg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진보정당.
민주노동당이 분당되며 결성되었고 현재 노동당정의당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정당이다. 노동당은 진보신당의 강령과 역사를 이어받았으며, 정의당은 직계 후신은 아니지만 진보신당 출신의 인물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5]

2. 로고

파일:진보신당 로고.svg

바람개비 형상의 로고를 사용했다. 바람개비에는 평등(빨강), 생태(초록), 평화(파랑), 연대(노랑)를 상징하는 4가지 색상을 넣었다.

로고에 대한 아이디어는 서울 강남 지역의 당원들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레디앙 기사

3. 역사

3.1. 민주노동당 분당과 진보신당 창당

민주노동당 분당의 근본적인 이유는 노선에 따른 구조적 차이였다. 민족해방파(NL)의 경우 지도자 1인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구축한다. 강력한 집권층에게 선거로 권력을 위임하고, 일단 위임했으면 끝까지 밀어주는 것이 NL의 방식. 그러나 이러한 체제는 당연히 지도부가 거의 모든 권력을 누리게 되므로 많은 병폐를 낳을 수밖에 없다. 반면 진보신당으로 대표되는 민중민주파(PD)는 지도부를 정책 실행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인식하며, 중요도가 상대적으로 매우 낮다. 인물보다는 노선과 정책이 중요하여, 인물이 노선과 정책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경우 당연히 노선과 정책을 우선시한다. 이런 성격상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고 있으나, 의견 하나 내는 데 시간이 매우 오래 걸렸다.

한편 민주당계 정당에 대한 관점도 달랐는데, NL 계열은 민주당계 정당과의 선거 연대를 통한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였기에 민주당에 대해 탐탁치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적극적으로 연대를 하는 것을 지향한 반면, PD 계열은 민주당과 거리를 두면서도 진보의 재구성을 통해 여성주의,생태주의,사회민주주의에 기반한 진정한 진보정당을 만드는 것을 지향했다[6][7]. 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NL은 "더 큰 적에 맞써 싸우기 위해 민주당과 손을 잡자."라면, PD는 "보수정당이나 민주당이나 똑같이 보수인데, 우리가 재구성해서 진보정당으로써 색깔을 내면 안돼?" 이 정도로 보면 된다.[8]

진보신당 창당발기인 및 창당준비위원 명단

3.2. 진보신당 창당과 총선

한국사회당과 노선이 비슷해서 합당 이야기가 자주 나왔다. 창당 당시에도 한국사회당과 합당을 추진하였으나 무산되었다.# 이후 한국사회당은 등록이 취소되었지만 사회당으로 재등록하였고, 다시 합당이 논의되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사태로 인한 촛불시위 이전에는 존재감이 흐릿했지만, 진보신당에서 운영하는 아프리카TV 개인방송인 '칼라TV'로 점점 존재감을 알리는 동시에 인터넷상에서 어느 정도 세력 확장을 하였다.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두자릿수 지지율과 비례대표 6번까지 당선을 목표로 선거에 임하였다. 그러나 노회찬, 심상정이 여론조사에서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낙선하였고, 봉쇄조항 3%에 0.06%라는 근소한 차이로 미치지 못하면서 한 명의 의석도 확보하지 못하였다. 그래도 정당 존속 요건인 2%를 넘긴 만큼 해산은 면했다.[9]

2009년 3월 당원 목수정정명훈과의 사건에서 많은 논란을 사기도 했다. 문서 참고.

2009년 4월에 치른 2009년 재보궐선거에서 울산 북구에서 조승수 의원이 당선되었다. 이를 통해 첫 원내진입에 성공하였다.

이명박 前 대통령이 진보신당 창당식 및 진보신당 창당 2년차때 축하 화환을 보내서 축하의사를 표하기도 했다. 사실 당연한 게 이명박도 운동권 출신으로, 심상정노회찬과 꽤 사적에서 친분이 있기 때문이다.[10]

3.3. 2010년 지방선거

2010년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노총 등에서 각종 통합 떡밥이 나돌았지만 전반적으로 정서가 비판적이었다. 제대로 이혼한 부부에게 재결합하라는 강요에 대한 반응이라고나 할까. 자신들과 이념이 다른 민주당과의 연대에 대한 각 당의 갈등도 있는 상황에서, 모든 잘잘못을 덮고 통합을 강요하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민주노동당 임시대의원대회에서는 단독 후보 발의안이 부정되고 선거 시 진보대통합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고, 이 상황에서 노회찬 대표는 2009년 12월 16일, 통합정당은 선거 이후에 논의하더라도 민주당을 제외한 진보대연합으로 선거 연합을 하자고 제안하였다.[11] 이에 대해 국민참여당은 크게 반발하였고, 민주노동당에서도 통합정당 논의를 왜 선거 이후에 하느냐고 노회찬을 깠다. 결국 노회찬은 민주계와 민주노동당 양쪽으로부터 비판받게 되었고, 5당 + 4시민단체 회의의 파행 끝에 선거 연대는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치러지게 되었다.

결국 일부 지방을 제외하고는 선거 연대 없이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치렀다. 이 선거에서 진보신당은 광역의원 3명과 기초의원 22명을 배출했다. 하지만 경기도지사로 출마했던 심상정 후보는 선거 하루 전에 유시민 후보를 지지하고 사퇴하였다. 서울시장으로 출마했던 노회찬 후보는 선거를 완주하며 3.3%를 득표하였다.

이로 인해 서울특별시장 선거에서 노회찬 때문에 오세훈이 이겼다란 논리로 진보신당 홈페이지나 노회찬의 싸이월드 홈피에 민주당 지지자의 악성 댓글이 많았었다. 하지만 당시 한명숙의 패인은 소위 비호감 요소로 인한 강북 지역에서의 부진[12]이였고, 당시 노회찬 대상으로 단일화 제의가 없었다는 걸 감안하면 말 그대로 적반하장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똑같은 사유로 민주당이 져서[13] 더욱 험악한 관계가 되었을 때 정의당 지지자와 더불어민주당 지지자 사이에서 종종 써먹게 된다.[14]

3.4. 통합파들의 탈당

파일:external/www.labortoday.co.kr/106286_48150_2017.jpg
(탈당한 통합파들.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이른바 '노심조'.)

2011년 5월 소위 진보정당끼리 통합연대를 하기 위해 민주노동당과 통합을 추진하였다. 5월 27일 1차적으로 협상이 결렬되었으나#, 6월 1일 새벽까지 계속된 재협상 끝에 합의안이 통과#되었다.

그리고 6월 19일 고양시 일산신도시 킨텍스에서 열린 민주노동당 정책 당대회에서 조승수 대표가 지난 분당 과정에서의 자신의 발언과 행동에 대해 사과를 기초로 한 축사를 발표하였다. 22일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도 17대 대선과 분당 과정에 대해 사과하였다.


한편 9월 4일 오후 서울 삼전동 송파구민회관에서 개최된 당대회에서 통합 합의안을 표결에 부쳤다. 그 결과 재석 대의원 410명중 찬성 222명, 반대 188명로 찬성이 반대를 앞섰으나 정족수의 2/3(274명)을 넘지 못하여 통합 합의안은 최종 부결되었다.

9월 5일 통합을 추진하던 지도부가 사퇴하였고, 11월 1일 진보진영의 명망가들이던 노심조를 비롯해 윤난실 전 부대표 등 많은 당원들이 탈당한다. 이들은 '새진보통합연대'를 결성한 후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과 통합하여 통합진보당을 결성했다.

3.5. 사회당과 합당

통합파들의 탈당 이후, 새로운 4기 지도부가 구성되었다. 11월 26일 홍세화한겨레 기획위원이 대표 후보로 독자 출마해 찬반형식을 거쳐 당선되었다. 부대표는 김종철, 심재옥, 김선아, 강상구.

홍세화 후보는 야권 통합에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내면서, 필요하다면 사안에 따라 연대는 하겠지만 통합은 부정적이라고 천명하였다. 반면 좌파정당인 사회당, 녹색당과는 통합을 추진할 것을 시사하였다. 녹색당은 연대는 가능하지만 합당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피력하였고, 2012년 3월 사회당과 합당에 성공하게 된다.

3.6.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참패, 그리고 노동당으로의 개명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지역구 후보로 23명, 비례대표 후보 7명을 입후보시키고 경상남도 거제시김한주 후보의 당선과 비례대표 3% 돌파에 주력하였다. 학벌사회 반대의 논지로 출마자들의 학력을 표기하지 않았고, 비례대표 명단에는 박노자 교수도 있었다. 울산과학대학교의 청소노동자였던 김순자[15]가 1번, 홍세화 대표가 2번이였다.

사실 진보신당에게 믿을 만한 구석은 없지 않은게, 진보성향이라고 마냥 민주당에 대해 호의적이기도 않았을 뿐더러, 이들은 통합진보당-민주통합당과의 야권 연대에 대해서도 역시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지지를 받기라도 한다면 적어도 1석은 얻을 것이라 보고 원내진출을 생각했었으나... 결과는 지역구 전원 낙선에 비례대표 득표율 1.13%로 말 그대로 참패, 그나마 거제시에선 김한주 후보가 33%로 선전했긴 하나 아쉽게 낙선을 했으며[16], 나머지 지역에선 한자릿수대에 그치며 정통민주당과 같이 야권의 트롤러[17]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결과가 나오고야 말았다. 이로 인해 지역구 의석을 확보 못하고, 득표율이 2%에 미달하는 정당은 해산한다는 당시 정당법에 의거해 해산되었다.

등록 취소 이후 진보신당은 재창당하였으나, 당시 규정에는 이전의 정당 이름은 쓰지 못하는 관계로 진보신당연대회의라는 이름으로 창당하였다.[18] 그로부터 1년 뒤인 2013년에 노동당으로 이름을 바꿔서 오늘날로 이어진다.[19] 이후의 역사는 노동당(대한민국)/역사 문서를 보면 된다.

여담으로 이와 똑같은 상황을 이 정당의 실질적 후신[20]12년 뒤에 또 재현을 해버렸다.[21]

4. 역대 지도부

파일:진보신당 흰색 로고.svg 대표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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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심상정
제1-2대
노회찬
제3대
조승수
비대위
김혜경
제4대
홍세화
{{{#!wiki style="float: left;" }}}}}}}}}}}}

5. 역대 선거 결과

6. 여담

진보신당의 지지자들을 얕잡아 부르는 비칭으로 진신류가 있는데 진신류의 '진신'이 바로 진보신당을 줄인 말이다.

7. 둘러보기

대한민국의 진보정당
문민정부 ~ 이명박 정부
(1993 ~ 2013)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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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정부 이전
개혁국민정당 건설국민승리21 청년진보당 녹색평화당 민주사회당
개혁국민정당 열린우리당으로 합류 민주노동당 사회당 한국사회민주당
정당등록취소 희망사회당 녹색사회민주당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한국사회당 정당등록취소
사회당
새진보통합연대 진보신당 진보신당에 합당 초록당사람들 사회민주주의연대
시민통합당 통합진보당 진보신당 녹색당 청년당
민주통합당으로 합당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 진보신당연대회의 정당등록취소
이명박 정부 이후 }}}}}}}}}



[1] 당시 정당법에는 '의석을 얻지 못하고 유효투표 총수의 2% 이상을 얻지 못한 정당은 등록을 말소한다.'는 규정이 있었다.[2] 로고에서 빨간색은 평등, 초록색은 생태, 파란색은 평화, 노란색은 연대를 뜻한다.[3] 이후 좌익계열은 노동당이나 정의당으로, 중도좌파계열은(여러차례 정계개편을 거쳐서) 정의당이나 더불어민주당으로 갔다.[4] 당의 유일한 의원이었던 조승수 의원이 통합진보당으로 옮겨 갔다.[5] 사실 이 당시 진보신당 당원들 중 현재도 진보정당 당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대다수는 정의당에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통합진보당 창당 당시 절반에 가까운 당원들이 노회찬심상정을 따라 탈당하고 이후 정의당을 차렸으며, 4자 통합 당시에도 남은 노동당의 당원들 중 절반에 가까운 당원들이 나경채 당시 대표와 진보결집+를 따라 정의당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전자는 새진보통합연대라는 그룹으로 뭉쳤다가 현재는 고양시 중심의 심상정 그룹을 비롯하여 당 곳곳에 분포하여 있으며, 후자는 평등사회네트워크로 활동하다가 해산 이후로는 노동정치연대와 통합하여 전환에 모여 있다.[6] 참고로 이 당시 평등파에서 언급했던 구호가 바로 그 유명한 "보다 적색으로, 보다 녹색으로!"으로, 이들은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면서도, 생태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 소수자 운동과 결합하는 것이 이들의 지향점이였다.[7] 그리고 이 보다 적색으로 보다 녹색으로의 구호는 이후 여성주의와 합쳐져서 진보정당의 지향점으로 꼽히는 일명 "적녹보라 패러다임"이 되었다.[8] 이는 진보신당 창당 16년 뒤에 치르게 된 선거에서도 NL이 주류가 된 원내 정당PD가 주류가 된 원내 정당민주당과의 연대에 대한 태도가 달랐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9] 당시엔 2%가 넘지 않으면 해산해야 된다는 법조항이 있었다. 물론 이는 2012년 위헌판결을 받았다.[10] 실제로 당적과 상관없이 사적으로 친분이 있는 경우도 꽤 있는데, 문재인김무성도 사적에서 친분이 꽤 있다.[11] 사실 새삼스럽진 않는게, 민주노총 등으로 대표되는 노동운동 쪽은 물론 진보정당 쪽 지지자는 진보정당끼리의 진보대연합을 원하지, 민주당과의 최대진보연합은 원하지 않는다.[12] 실제로 한명숙의 강북 지역에서의 표는 강북 지역에서의 민주당 구청장 후보의 표의 합보다 무려 20만여표나 적었다(...).[13] 당시 간발의 차로 갈렸던 거, 민주당 후보가 비호감이여서 상대적으로 부진한 것 등 말 그대로 2010년의 그 선거 판박이였다. 물론 진보정당 후보가 욕을 먹은 건 덤이다.[14] 민주당 지지자 쪽이 노회찬을 언급하면서 심상정을 비판할 때, 정의당 지지자 쪽에선 너희는 노회찬 상대로 똑같은 짓 하지 않았냐 이런 식이다.[15]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출마한 그 김순자가 맞다.[16] 그나마 여긴 민주통합당-통합진보당과의 야권 연대를 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야권 연대를 안 한 곳에선 말 그대로 참패를 한 것.[17] 고양시 을,창원시 성산구 이 두곳에서 새누리당 후보의 어부지리 입성에 기여했다.[18] 같은 이유로 녹색당도 지역구 0석에 0.48%란 저조한 득표율이 나와서 해산 뒤 녹색당더하기라는 이름으로 재창당하였다.[19] 이후 이들은 역시 같은 운명을 맞았던 녹색당청년당과 함께 이 규정에 대하여 헌법소원을 냈고, 결국 2014년 이 규정에 대해 위헌 결정이 내려졌다.[20] 위에서 선술했지만 해당 정당의 주류가 바로 진보신당 탈당파다.[21] 도봉구 갑, 마포구 갑에서 본의 아니게 트롤러 역할을 한 것부터, 지역구 0석에 비례 0석한 것까지 매우 흡사하다. 게다가 그때와 달리 양 쪽 모두 다른 선거 패인이 더 있는데다, 두 후보 모두 5% 미만이 나왔기에 어찌보면 그때보다 더 열화판을 재현한 셈이다.[22] 조승수 대표 사퇴 이후 김은주 부대표가 권한대행을 맡았으나, 얼마 후 물러나고 비대위 설치.[23] 이후 진보신당연대회의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24] 사회당과의 합당 이후 상임대표. 일신상의 이유로 2012년 10월 사퇴.[25] 사회당과의 합당 당시 사회당 대표로 합당 이후 공동대표 취임. 2012년 11월 김순자 대선후보 출마 문제와 관련하여 사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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