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M8 그레이하운드
M8 Light Armored Ca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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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의 실전 기록을 기술하는 문서.제2차 세계 대전 당시와, 종전 이후 군사 지원 프로젝트 덕분에 세계 각지로 공여된 M8 그레이하운드는 근 80여년 동안 세계 곳곳의 분쟁과, 항쟁에 동원되었다.
1.1. 대전기
1.1.1. 제2차 세계 대전
1944년 오버로드 작전 당시 처음 실전에 투입되었으며 이후 서유럽, 중유럽, 태평양을 가리지 않고 미군이 참전한 곳이면 따라다니면서 활약을 하였다.여타 미군 차량들과 같이 영국, 자유 프랑스, 브라질, 중화민국 등, 타국에 1,000대 이상 랜드리스 되면서 전차가 부족하거나 정찰 차량이 요원한 군대들에게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추가로, 장갑차 특성상 지뢰에 매우 취약해서 승무원들에게 복부 보호용 방편복을 착용시켰으며, 소수의 차량은 얇은 방편복을 보완하기 위해 차체 하단에 샌드백을 거치해두기도 하였다.
1.1.1.1. 서부전선
1.1.1.1.1. 오버로드 작전
프랑스 전역의 미 육군 소속 M8 LAC |
M8의 주포인 37mm 포는 4호 전차 정도는 좀 무리해서라도 근거리에서 충분히 관통할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의 체급을 지닌 상대와 마주쳤을때는 낭패를 보았다. 하지만 미군 기록에서는 1944년에 티거를 격파했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데, 매복하고 있다가 티거가 홀로 지나가자 뒤로 접근했고, 그레이하운드의 접근을 눈치챈 티거가 포탑을 돌렸지만 그보다 빠르게 25야드(23미터)까지 접근해서 37mm 3발을 엔진룸에 속사해서 잡았다는 것이다.
독일쪽 기록에는 이 시점에 해당 지역에는 티거 1은 없고 티거 2 부대가 며칠 전에 지나간 게 전부이기 때문에 둘을 조합하면 어떻게 길을 잃고 혼자 뒤쳐졌던 티거 2를 잡았다는 말이 된다. 물론 37mm 포로는 영거리에서 티거 후방장갑 관통도 간당간당한 수준인데다가 티거의 희귀성 및 당시 미군이 독일군 전차의 상당수를 티거라고 착각했던 걸 감안하면 실제로는 4호 전차[1]나 판터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체급 차이를 감안하면 대활약이라고 평가된다.
1.1.1.1.2. 아르덴 대공세
벌지 전투 당시 벨기에 노빌의 미 육군 소속 M8 LAC[2] |
아르덴 대공세 당시 생 비스에서 격파된 독일 국방군 소속 Pz.Sp.Wg. Ford M8 (a) |
1.1.1.1.3. 독일 본토 진격전
뮌헨 베이어리셰어 호프 호텔 앞에서의 마를레네 디트리히와 미 육군 소속 M8 LAC |
1.1.1.2. 이탈리아 전선
이탈리아 전선 당시 몬테세에서의 브라질 원정군 소속 M8 LAC "테레사" |
그렇지만 이러한 점은 차륜형 장갑차들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단점이었기에 큰 문제는 아니었다. 전장에서의 문제로 일선에서 사용부적합 판정을 받았던 M5 스튜어트가 종전까지도 운용되었던 이유가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인데, 궤도형 차량은 차륜형 차량에 비해 늪지대나 눈밭에서 훨씬 기동성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차량들이 동원되어 정찰 및 적군 토벌 용도로 활약하였으며, 끝내는 이탈리아에서 스위스 방면으로 패주하던 독일군을 가로막는데 공을 세웠다.
1.1.1.3. 오스트리아 전선
오스트리아 티롤에서의 독일 국방군 소속 Pz.Sp.Wg. M8 (a) |
오스트리아 국경에 진입한 자유 프랑스 육군 소속 M8 LAC "솔페리노" |
1.1.1.4. 태평양 전쟁
1.1.1.4.1. 필리핀 탈환전
필리핀 탈환전 당시의 미 육군 소속 M8 LAC |
1.2. 냉전
1.2.1. 그리스 내전
그리스 내전 당시의 그리스 왕국군 소속 M8 LAC[3] |
1.2.2. 6.25 전쟁
6.25 전쟁 당시 영월에서의 대한민국 국군 제3기갑사단 제316기갑부대 소속 M8 그레이하운드 네임드 차량 "경무", "타공" |
당시 장기적으로 볼 때 대한민국에 기갑부대를 창설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기갑 장비 공여를 통해 경험을 가진 기갑요원을 확보해야했다. 다만 미국은 공세적으로 운용하기 어렵게 하기 위해 외형과 탑승원 수, 좌석위치는 전차와 같으나 방어력과 화력이 약한 이 장갑차를 공여하였다.
당시 M8 그레이하운드는 무전기 성능이 상당히 고성능이어서, 서울의 남산 기갑연대 통신소와 강원도 강릉의 8사단에 배속된 그레이하운드가 통신이 가능하였다. 그래서 6.25 전쟁 당시 통신 중계 임무를 부여해서 전선에 보낸 사례가 많았다. 허나 이 와중에 현지 지휘관이 이게 전차가 아니라 장갑차임을 알았음에도 포탑에 포가 달렸으니 전차를 막으라고 무리하게 투입하는 판단을 하기도 하였다.
사정은 있었다. 지휘관들의 증언에 따르면 전선에 있는 보병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사기 진작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때문에 삼팔선을 순회하면서 보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라도 아군 측 전차로 선전하였다. 사실상 전사할 것을 알면서도 싸우러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독립기갑연대로부터 M8 그레이하운드를 지원받은 부대의 지휘관들 역시 전쟁 초기 기습을 받고 상당히 불리했던 상황으로 인해 계속 고전하였다. 전쟁 초기에 대한민국 국군은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를 제외한 M4 셔먼이나 M24 채피 등의 전차를 1대도 보유하지 못했고 보병들 역시 대전차 병기가 태부족이라 대안도 없었다.
한국전쟁 초기에는 2대의 그레이하운드가 수 대의 T-34-85와 조우하여 교전을 벌인 결과 1대를 기동불능으로 만들고 승무원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의 포격에 의해 타이어에 펑크가 나면서 도랑에 빠진 것을 구난하는데 실패하여 손실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T-34 전차를 상대로 무리하게 전차전에 투입된 결과 크나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그래도 장갑차라는 특성에 충실하게 대보병 전투에만 임한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들은 북한군을 상대로 많은 활약을 펼쳤다. 초기 북한군은 대전차 전술이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고, 전차에게 불리한 교전거리가 짧고 험준한 산지를 역이용해 37mm 유산탄으로 많은 활약을 하여 M8 장갑차 단 2대가 북한군 200명을 사살한 전과도 있다.
이후로도 연이은 격전에 잇달아 투입되면서 점차 소모되어 대한민국 국군과 UN군이 북진을 시작할 무렵(1950년 10월)에 6.25 전쟁 이전에 도입된 물량들은 대부분 격파되거나 고장 등으로 인해 손실처리되어 극소수만이 운용이 가능했다고 전해지며, 마지막으로 남은 운용 기록은 1950년 11월의 청진 전투에 투입된 것이다.
대한민국 국군이 개전 이전 공여받았던 M8들 중, 마지막으로 살아남았던 1대는 1950년 12월 흥남 철수작전에서 선적을 거부당하자 승무원들이 직접 자기들의 손으로 소각처분하였다고 하는데, 이 승무원들은 배에 승선하고 얼마 안 지나서 M8이 불길에 타오르는 모습을 보자 오열했다고 전해진다.[5]
이후에 미국의 원조로 넘겨받아[6] 52년도 광복절 사열식 사진에도 그레이하운드 장갑차가 나온다. 1.4 후퇴 이후인 1951년 하반기에 지리산과 태백산 일대의 게릴라 토벌을 위해 투입을 고려하였으므로 소수의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링크
대구에서의 미 헌병대 소속 M8 LAC |
캐나다 육군 소속 로킹엄 여단장의 M8 LAC 지휘차량 |
전후 살아남은 M8 장갑차와 M20 장갑차들은 치장물자로 전환되어 있었고, 1980년대까지도 존속해 있었다. 추가로 북한군이 소수를 노획하기도 했는데, 이 차량들의 행방은 불명이다.
1.2.3. 알제리 전쟁
알제리 전쟁 당시의 프랑스 외인부대 소속 M8 |
1.2.4. 4.19 혁명
4.19 혁명 당시의 대한민국 경찰 소속 M20 |
1.2.5. 베트남 전쟁
1.2.5.1.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의 프랑스 극동 원정 군단 소속 M8 LAC |
1.2.5.2.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사이공에서의 남베트남 국가경찰야전군 소속 M8 LAC[7] |
이 차량들의 출처는 남베트남에 대해서 미국이 직접적인 군사 지원의 일환으로 1956년과 1958년 사이에 총 18대를 NPFF에 공여한 것이었으며 이후 남베트남이 패망하며 남은 차량들은 북베트남으로 편입되었다.[8][9]
1.2.5.3. 라오스 내전
라오스 내전 당시의 라오스 왕국군 소속 M8 LAC, 1967년 |
1.2.6.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인도네시아에 상륙하는 네덜란드 해병대 기갑여단 소속 M8 LAC |
1.2.7. 수에즈 위기
시나이 반도의 유고슬라비아 유엔긴급군 소속 M-100 |
1.2.8. 남베트남 쿠데타
1963년 사이공 쿠데타 당시 격파된 남베트남 헌병대 소속 M8 LAC |
1.2.9. 그리스 군사위원회 쿠데타
그리스 군사위원회 쿠데타 당시의 그리스 육군 소속 M8 LAC와 M24 채피 |
1.2.10. 4.21 쿠데타
4.21 쿠데타 당시 동원된 그리스 육군 소속 M8 LAC와 M24 채피 |
1.2.11. 1968년 멕시코 시티 올림픽
1968년 멕시코 시티 올림픽 당시 시위를 진압 중인 멕시코 육군 소속 M8 LAC |
1.2.12. 콩고 위기
콩고 위기 당시의 콩고민주공화국 정부군 소속 M8 LAC |
스웨덴 ONU 대대 소속 노획 M8 LAC "비비 벨"[10] |
1.2.13. 타크나조
타크나조 당시 타크나의 페루 육군 소속 M8 LAC |
1.3. 현대전
1.3.1. 유고슬라비아 전쟁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육군 이슬람 부대 소속 M-100 (M55), 1993년 |
이 중,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육군의 경우 상술한 개조형을 1량 이상 제작하여 운용했던 기록이 남아있다.
1.3.2. 2014년 베네수엘라 반정부 시위
베네수엘라 반정부 시위 당시 격파된 M8 LAC[11] |
[1] 특히 포탑과 차체에 스커트형 공간장갑을 장착한 H형 및 J형같은 경우 그 모양새가 사각형에 가까워져 티거로 오인하는 승무원들이 많았다.[2] 1945년 1월 16일 촬영된 사진이다.[3] 1947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촬영되었다.[4] 제1연대 수색대대 → 수색단 승격 → 독립기갑연대(이 때 육군직할) 개편 → 7사단 → 수도사단.[5] 흥남까지 오는 데에 승무원들은 이 단차와 함께 많은 시련을 거치고 또 목숨을 건져 마치 가족이나 집과도 같은 느낌이 들었을 것인데, 하물며 그런 물건을 직접 자기들의 손으로 불태웠으니 그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6] 다만, 몇몇 기록들을 보면 1.4 후퇴 이후에도 기갑연대가 아닌 각 사단에 파견된 몇몇 단차들은 생존했던 모양이다.[7] 1968년 11월에 촬영된 사진이다.[8] 이 당시 M8 장갑차들을 포함한 비 1선급 미군 중장비들 가운데 미 정부의 영향권 내에 있던, 즉 민간에 불하 받거나 타국 공여/폐차/표적처리 등의 결말을 맞지 않은 가운데 현역에 재투입 가능했던 장갑차들이 이 18대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나 본지 (남미를 비롯한)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위급해 보이지 않는 몇몇 지역들에 무기 및 기술 수출 제한 크리를 먹이게 된다. 그렇게 피를 본 나라들 가운데 가장 큰 피를 본 것이 당시 M8을 주력 장갑차로서 대량으로 굴리던 브라질군이었고, 이는 브라질군이 자신들이 기존에 운용하던 M8에 대한 퇴역 및 이를 대체할 국산화 모델 개발에 큰 영향을 주게된다.[9] 물론 이는 운용 단체인 NPFF가 남베트남의 경찰부대, 그것도 상당한 후방이었던 수도 사이공의 경찰부대였기에 이 M8을 운용했던 거고, 최전방의 남베트남 정규군 및 북베트남 접경 지역 민병부대들은 멀쩡히 당시 미군이 굴리던 M113 APC나 M706 코만도 장갑차들을 똑같이 굴렸다.[10] 1963년 1월 1일에 촬영되었으며, 차량의 이름은 불어로 "예쁜 벨"이라는 말이다.[11] 2014년 2월 19일 촬영된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