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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즈 위기 The Suez Crisis The Second Arab-Israel War | |
기간 | |
1956년 10월 29일 ~ 11월 7일 | |
장소 | |
이집트 시나이 반도 일대 | |
원인 | |
가말 압델 나세르에 의한 수에즈 운하 국유화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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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 |
패전 :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의 시나이 반도 철수 승전 :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 성공 | |
영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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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6년 11월 12일, 수에즈 운하 사이드 항에서 몰려든 이집트인 군중들을 통제하고 있는 영국군
당시 투입된 프랑스 공수부대
파괴된 이집트군 전차
The Suez Crisis, The Second Arab-Israel War, Tripartite Agression, Sinai War (Operation Kadesh) (영어)
La crise du canal de Suez, éxpedition de Suez, guerre de Suez (opération Kadesh), campagne de Suez (프랑스어)
(히브리어) מלחמת סיני (מבצע קדש), התוקפנות המשולשת
(아랍어) العدوان الثلاثي, العدوان الثلاثي أو حرب 1956, أزمة السويس أو حرب السويس, حرب سيناء أو حملة سيناء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이 동맹을 맺고 이집트를 공격해 일어난 전쟁. 이스라엘 측은 시나이 전쟁(카데시 작전)이라고도 한다. 이집트(아랍 연맹 측)에서는 삼국 침략이라 부른다.
전쟁기간은 1956년 10월 29일 ~ 1957년 3월.
2. 배경
1956년 7월 26일, 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양팔외교전략을 취했다. 미국과 서유럽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아스완 댐을 짓고, 소련과 무기 협정을 맺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무기를 도입하려 했던 것. 하지만 동유럽산 무기 도입 때문에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방 측은 아스완 댐 건설비용 지원을 거부했고,[2] 이에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한다. 이 수에즈 운하의 중요성은 문서 참조.친소 노선을 펼치며 수에즈 운하를 집어삼킨 이집트에 영국과 프랑스는 거세게 반발하였고, 이스라엘 역시 자신들의 선박이 수에즈 운하 통과를 금지당하는 데 크게 격분했다. 그리고 수에즈 운하 국유화 조치는 단순히 영국과 프랑스 입장에서 재산 피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아돌프 히틀러의 라인란트 재무장, 안슐루스를 연상시키는 침략적 팽창행위로 간주되었다. 1930년대 히틀러를 상대했던 앤서니 이든 영국 총리는 나세르를 중동의 히틀러로 간주하였고, 제2의 히틀러가 중동에서 패권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방지하는 예방전쟁이 필요하다는 인식
사실 비단 수에즈 운하만이 이 전쟁의 원인이 아니었다. 영국의 앤서니 이든 정권은 이라크에서 값싸게 석유를 확보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나세르가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나세르는 이집트 민족주의와 반식민주의, 아랍사회주의를 주창하며 이라크에서 영국의 입김을 제거하려 들었고 영국은 이에 복장이 터지고 있었다. 프랑스의 기 몰레 정권 역시 나세르 때문에 환장할 지경이었는데 당시 한창 진행 중이던 알제리 전쟁에 나세르가 개입하여 반프랑스 게릴라들을 지원하고 있었고 이에 프랑스는 이집트를 타격할 준비를 하는 한편 이스라엘에 프랑스제 최신 병기를 지원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나름대로 고민이 컸는데 당시 이스라엘은 호전적인 나세르가 선제공격을 해올 것이라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었고 당시 가자지구에서 양측 간 계속된 제한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전과가 훨씬 크긴 했어도 이스라엘에 지속적으로 타격을 주는 팔레스타인 민족 게릴라인 페다이가 나세르의 지원을 받아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들 페다이에 의해 이스라엘의 한 키부츠 지도자인 로이 로스버그가 살해되는 일이 벌어지자 모세 다얀은 대국민연설을 통해 팔레스타인의 투쟁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정당한 싸움을 하는 저들이 어중간한 대응으론 절대로 우리를 모두 죽이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 테니 유대인들이 살기 위해서는 외세의 간교한 평화협상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면서 투지를 불태웠다.
3. 전황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의 삼국 외무장관은 셰브르에서 3자 회담을 벌였다. 여기서 이집트 공격을 결의했는지 안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이 전쟁은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쳐서 싸우고 있으면 영국과 프랑스가 질서유지를 구실로 개입하는 구도로 진행되어야 했지만, 양측은 전쟁에 거의 개입하지 못했고, 이스라엘군이 혼자서 이집트를 거의 발라버렸다. 이스라엘 국경의 시나이 반도 방향에서 시작된 공세는 전선 중앙부와 남부 방향의 돌파로 일찍 전세가 결정돼버렸고 11월 5일,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고 시나이 반도의 최남단까지 모조리 점령하여 전쟁은 이집트의 완패로 마무리될 상황이었다. 여기에 영국 공수부대와 프랑스 외인부대가 도착하여 이집트는 완전히 3면에서 적군의 공격을 받기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당시 미국 정부는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이 자신들과 상의도 하지 않고 전쟁을 벌였다는 것에 분노해 압박을 넣기 시작했고, 자신들의 핵전력을 과시할 필요가 있던 소련도 이집트를 감싸며 핵폭격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다.[3] 미국과 소련이 합심해서 영국과 프랑스에 맞서는 상황이 된 것이다.
미국이 같은 서방진영 국가인 영국, 프랑스에게 이렇게 강하게 나온 이유는 영국과 프랑스의 '중동의 히틀러 나세르를 좌시했다가는 1930년대 유럽의 참사가 재현될 것이다'라는 인식을 미국은 전혀 공유하지 않았고, 미국으로선 '고작' 수에즈 운하 하나로 소련과의 전면 핵전쟁까지 감수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의 행동은 제국주의의 뽕에 취해서 수십년 전처럼 식민정책을 유지하겠다는 행동이었으므로 도덕적 정당성도 부족한 데다, 세계대전 이후 국제 질서 전환에 따라 유럽 구 열강들의 식민지 유지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자유진영 국가의 이런 행동은 필연적으로 독립할 식민지 국가들을 죄다 공산국가로 만들 수도 있는 악수가 될 수도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뻘짓으로 중동 및 제3세계에 공산화 바람이 불도록 놔둘 수 없었으니 미국이 집안 서열정리에 나선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은 소련이 무력을 사용해도 영국과 프랑스를 돕지 않겠다, 즉 NATO에서 빼버리겠다고 압박을 가했다. 더 나아가서 영국에 대한 재정지원 중단과 함께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석유제재까지 가했다.[4] 이때 영국은 쿠웨이트 침공까지 고려했다. 그리고 미해군 6함대 소속 미드웨이급 항공모함 코랄 시와 에섹스급 항공모함 랜돌프가 지중해로 급파되어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무력시위를 했다. 미국이 정말로 양측과의 교전도 염두에 뒀는지 미해군의 알레이 버크 제독이 당장 6함대 사령관에게 영국과 프랑스의 적대행위에 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정도.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 초강대국들이 손 잡고 압박을 가하니 영국과 프랑스는 결국 백기 투항을 해야 했다. UN의 중재로 1956년 11월 6일,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철군하고 1957년 3월 이스라엘군이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하면서 전쟁은 종결되고 이집트의 외교적 승리로 끝났다.
영-프 연합군의 재침과 소련군의 군사적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미해군의 포레스탈급 항공모함 포레스탈이 추가 증원되었다.
4. 영향
영국과 프랑스는 가장 큰 손해를 봤다. 전쟁을 일으키고도 오히려 수에즈 운하의 소유권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두 나라가 우려했던 나세르를 중심으로 한 아랍민족주의의 단결과 이집트의 패권 차지라는 나세르의 목적에 오히려 힘을 실어준 격이었다. 서방 세계의 불협화음과 전후 영국의 결정적인 실책 중 하나로 여겨지는 이 사건은 당시 영국 총리였던 앤서니 이든이 최악의 건강 상태[5] 속에서 제대로 된 판단과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던 것 때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결국 그는 이 사건으로 인해 대중들의 지지 뿐 아니라 보수당의 지지까지 잃게 되어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당연히 정치인으로서의 생명도 끝났다.게다가 이 전쟁으로 영불 양국이 입은 가장 큰 손실은 단순히 수에즈 운하의 상실이 아니라 국제적 위상의 추락을 재확인받았다는 점이다. 미소의 협박과 영불의 굴욕적인 철수는 세계의 패권이 더이상 영국, 프랑스가 아닌 미국, 소련으로 완전히 넘어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으며 '서유럽의 시대가 끝났다'는 암암리의 인식이 사실이었음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물론 국력 차이는 이미 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부터 벌어졌지만 수에즈 전쟁은 전 세계에 이 사실을 확실히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열강들의 식민지 내에서 벌어진 독립 운동은 더욱 탄력을 얻었다.
이 전쟁이 끝난 뒤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이 핵전쟁의 위기에 닥치면 자신들을 보호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독자적인 핵전력 개발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2차대전 기간 중에도 많은 연구를 해 왔고, 풍부한 핵연료와 실험지를 가진 호주의 도움까지 등에 업은 영국은 비교적 빨리 핵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으나, 프랑스는 진도가 늦었다. 거기에 먼저 핵클럽에 가입한 영국은 재빨리 자신들을 배신했던[6] 미국 편에 붙어 프랑스의 핵개발에 딴지를 걸면서 올챙이 시절 모르는 개구리란 게 어떤 건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열받은 프랑스 정부는 조국의 핵무장을 외치면서 친미 일변도의 대소 공동 전선에서 이탈했다. 이후 1960년 샤를 드골이 재집권하여 알제리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프랑스의 내정을 휘어잡으면서 프랑스의 핵개발은 가속화된다. 이 와중에 영원히 자국 영토로 못박으려던 알제리는 기어코 전쟁으로 독립했다.
일부 시각에서는 이 시점으로 서방 국가들이 (소련 제외) 국제연합의 눈치를 보는 새 시대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는데 이는 미국 또한 국제 사회 분위기로 인해 정책을 전환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로 미국 또한 베트남 전쟁 등 여러 국제사회 눈치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5. 학살
한편 이집트 쪽에서 유대인을 향한 테러 공격과 게릴라가 있었고,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 점령 당시에 이스라엘에 테러를 가했던 게릴라들을 색출한다는 이유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심지어 유엔 소속의 의사들조차 이에 휘말렸다. 나중에 다그 함마르셸드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 진위여부를 이스라엘에 추궁했고 이스라엘 크네세트(이스라엘의 국회)에서도 가자 지구 팔레스타인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 있었다는데 어찌 된 일이냐고 청문회가 열리기도 했다. 외무장관 골다 메이어는 "그런 것 없다. 우릴 해방자로 반겨주던데?"라고 잡아뗐으며, 참모총장 모셰 다얀은 아랍인들이 먼저 공격을 했기 때문에 죽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페다이의 수장이었던 노인의 2003년 회고에 따르면, 정작 페다이들은 중동전쟁 터지고 죄다 이집트로 진작에 달아났었다고 한다. 즉 페다이 혐의를 받고 죽은 사람들은 페다이와 친했다며 떠벌리고 다녔던 사람들이라는 것. 어쨌든 유엔 감시단과 이스라엘의 합동 조사단은 300~500명 가량의 무고한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 군대에 의해 살해된 것만큼은 확실하다고 못을 박았다. 미국 만화가 조 사코의 책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Footnotes in Gaza)>이 1956년 11월에 자행된 이스라엘군의 가자 주민 학살 사건을 다뤘다.수상이었던 다비드 벤구리온은 미국에게 다른 건 몰라도 가자 지구만큼은 이스라엘이 확보하겠다고 억지를 부렸지만 퇴짜를 맞았다. 하지만 불과 11년 후에 제3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6. 여담
냉전 초기에 핵을 둘러싼 동맹국의 위기와 소련의 핵을 동원한 무력개입 협박,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소련이 정말로 핵을 동원해서 무력을 사용했다면 미국이 과연 가만히 있었을까?"에 대한 논의 때문에 미국에서는 대체역사소설이나 첩보물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소재이다.[7]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에 의해 영화(1969)로도 제작된 레온 유리스의 소설 토파즈에서는 수에즈 위기 당시의 프랑스의 병크와 반미노선, 소련에서 2차대전 때부터 심어둔 프랑스 고위층 첩자의 활동을 작품으로 그리고 있다. 심지어는 작중에선 미국에게 악몽과 같던 프랑스의 NATO 탈퇴도 이 첩자와 소련이 이룩한 최고의 성과로 나온다. 이 작품에는 늙은 프랑스 대통령이 소련 첩자에게 자신도 모르게 놀아난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름 자체는 창작된 가상의 인물로 나오지만 '반미 성향, 2차 대전 레지스탕스 출신, 강경 민족주의자' 성향에다 알제리 사건 등의 행적을 볼 때 샤를 드골이다.
이 내용은 1960년 대 초에 있었던 사파이어 스캔들을 소재로 각색한 것으로, 소련에서 망명한 KGB 고위 인사가 미국 정보당국에 프랑스의 정보기관과 드골 정부 고위층에 다수의 소련 스파이들이 침투해 있다고 폭로한 사건이다. 결과적으로 이 폭로는 미국과 프랑스 사이에 상호 불신을 고조시켜서 양국의 첩보 협력 관계를 한동안 마비시켰다.
포스트 아포클립스 소설 <해변에서(On the Beach)>[8]에서는 수에즈 위기 때 소련에 대한 미국의 오인공격으로 핵전쟁이 벌어졌다고 묘사한다.
해리 터틀도브의 장편 대체역사소설 <The World of Difference>[9]에서는 미국과 소련 출신의 주인공 모두 수에즈 위기 당시 벌어진 아랍공중전에 참가한 파일럿 출신이라는 언급이 있다.
당시 캐나다의 총리였던 레스터 B. 피어슨은 이 전쟁을 중재한 공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피어슨은 중립적 위치에서 평화유지군을 파병하고자 했으나, 나세르가 "국기에 영국 국기가 있는데 무슨 중립이냐"며 거절하였다. 그래서 캐나다의 국기가 지금의 단풍잎 국기로 변경되었다.
[1] 영국과 프랑스[2] 미국의 경우는 아스완 댐 건설에 필요한 자금 문제로 난색을 표한 것도 있다. 건설 비용이 2억 7천만 달러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액수였기에, 미국 내 여론이 남의 나라에다가 무작정 돈을 퍼준다며 부정적으로 흘러갔고, 이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차관 지원을 철회한 것이다. 꼭 이집트의 친소 정책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빠질 예정이었던 것이다.[3] 소련의 핵전력은 니키타 흐루쇼프의 뻥카로 많이 과장되어 있었고 이 시점에는 아직 미국에 비하면 한참 미약했지만 적어도 영국과 프랑스를 붕괴시키기엔 충분했다. 동년도부터 R-5 포베다(SS-3 Shyster) 준중거리 탄도미사일을 동독에 배치했고 사거리는 프랑스의 파리와 영국의 런던에 거뜬히 핵투발을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4] 안 그래도 수에즈 운하 폐쇄로 인해 영국의 석유 사정은 악화된 상황이었는데 다른 나토 회원국들과 아랍 국가들이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석유제품 수출 금지를 가하자 영국 경제 사정은 악화될 게 뻔했다.[5] 당시 이든 총리는 담석 제거 수술의 후유증에 시달렸고 여기에 처방약의 부작용까지 겹쳐서 건강이 대단히 나빴다.[6] 미국은 영국과 대전 기간동안 맺었던 핵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영국의 핵개발에 도움을 주지 않은 전과가 있다.[7] 일단 미국은 겉으로는 핵폭격하든 말든 알바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비밀공개 결과 내부에서는 영불 양국에 핵폭격이 가해지면 세계 3차대전이 일어날 것이니 막아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소련의 폭격기가 뜨면 그 첩보를 영불에 알려줘서 격추시킬 계획이었다고. 단,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은 묵인하겠다고 방침을 세웠다.[8] 핵으로 인해서 북반구가 망하고 유일한 청정지역인 호주는 방사능 구름의 위기로 멸망을 기다린다는 내용. 1970년대에 김민이 코미컬라이징을 했고 영화는 두 번 만들어졌다.[9] 태양계 4번째 행성에 생명이 살고 있고 미, 소의 공동 탐사대가 탐사 중 그 나라의 역사에 개입한다는 대체역사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