Лёгкий танк Т-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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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간기3. 대전기
3.1. 중일전쟁3.2. 소련-일본 국경분쟁3.3. 폴란드 침공3.4. 겨울전쟁3.5. 베사라비아-북부코비나 점령3.6. 제2차 세계 대전
4. 냉전3.6.1. 독소전쟁
3.7. 계속전쟁3.8. 라플란드 전쟁3.6.1.1. 바르바로사 작전3.6.1.2. 우만 전투3.6.1.3. 스몰렌스크 전투3.6.1.4. 브로디 전투3.6.1.5. 모스크바 공방전3.6.1.6. 레닌그라드 공방전3.6.1.7. 세바스토폴 공방전3.6.1.8. 크림 전선3.6.1.9. 스탈린그라드 전투3.6.1.10.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3.6.1.11. 테후마르디 전투3.6.1.12. 바그라티온 작전3.6.1.13. 동프로이센 공세
3.6.2. 페르시아 침공3.6.3. 서부전선3.6.4. 태평양 전쟁3.6.5. 소련-일본 전쟁1. 개요
T-26의 실전 사례를 정리한 문서.T-26은 스페인 내전에서 실전을 최초로 치렀으며, 2차 세계대전을 거쳐 냉전기인 국공내전까지 사용되며, "냉전 시기까지 주력으로 사용된 유일한 전간기 생산 전차"라는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2. 전간기
2.1. 스페인 내전
스페인 내전 당시의 스페인 공화군 국제여단 소속 T-26B "중앙 정부군 만세" 24번차 |
비록 산악지대에서 정해진 좁은 길로만 다녀야 했으며 훈련 상태가 좋지 못한 보병들이 엄호를 제대로 해주지 않은 탓에 같이 투입된 BT 전차와 함께 독일제 37mm 대전차포에 파괴되기도 하였으나, 상대방인 독일군은 1호 전차, 이탈리아군은 CV.33, CV.35같은 기관총만 탑재한 경전차나 탱켓 일색이었기 때문에[1] 전차 및 보병 간의 대결에서는 우위를 차지하였고, 국제여단 소속의 소련군 T-26 에이스도 많이 배출되었다.
특히 스페인 내전 당시 참가한 전차 중에는 가장 강력한 전차였고 45mm 전차포는 국민군, 독일군, 이탈리아군이 보유한 모든 기갑차량의 전면장갑을 관통할 수 있었다.
비록 전술적으로 상정한 조건이 아닌 스페인 특유의 산악지형, 스페인어, 러시아어 간의 통역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브루네테 전투에서는 대량의 T-26이 투입되어 공화파의 승리, 혹은 마드리드 포위 약화라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상술한 산악지형의 제약이 덜하고 전차 운용이 용이한 카스티야 고지대 평원 중부전선에서 공화국이 2년 반이나 전선을 사수하는데 성공하고 프랑코군이 결국 쿠데타 당시 계획했던대로 마드리드를 향한 전격전이 아니라 빙빙 돌아 남북으로 안달루시아, 바스크->카탈루냐를 먼저 공략하는 장기전을 강요받은건 이 전차를 필두로 한 성공적인 기갑전의 역할이 컸다.
이를 상대한 프랑코의 국가군 또한 인민공화군의 T-26을 인상깊게 보아 기회가 되는 족족 노획하여 수리해 사용했으며, 내전 종료 후 프랑코 정권은 편입된 T-26B들을 총 5개의 연대로 편성해 배치시켰다.
내전 종전 이후에는 T-26과 상대하면서 얻은 교리를 바탕으로 나치 독일의 1호 전차와 함께 스페인 최초의 자국산 전차 개발 계획인 베르데하 전차 프로젝트의 기반이 되었다.
2.1.1. 세세냐 전투
세세냐 외곽의 스페인 공화군 제1국제여단 소속 T-26B |
그러나, 이 중 3량이 화염병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이를 저지하려는 병력 8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고, 세세냐를 점령하긴 했지만, 스페인 공화군 측에서 국제여단 소속 소련 전차병들을 제외하고 전차 운용을 할 수 있는 인원이 없었기에 결국 후퇴를 택하게 되었다.
이 전투의 승자는 국민전선 측이었지만, 피해가 너무나도 막심해 실상은 명목상의 승리에 가까웠기에 스페인 국민전선 측에서는 독일에게 더 많은 병력 및 기갑 지원 요청을 했고, 레기온 콘도르를 결성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또한, 이 당시 "세묜 쿠즈미치 오사즈치"가 지휘하는 T-26B가 L3/33 10량을 격파한 뒤, 나머지 L3 1량을 들이받아 구덩이로 밀어넣어 격파하면서 세계 최초로 충각으로 적 전차를 격파했다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2.1.2. 브루네테 전투
브루네테 전투 당시 수리 중인 스페인 국민전선군 소속 T-26B |
하지만 전황은 지지부진하였으며, 결국 어느 쪽의 승리도 아닌 애매한 결과로 끝났다.
2.1.3. 사라고사 공세
벨치테 전투 당시의 스페인 공화군 제11국제여단 소속 T-26B "19번차" |
2.1.4. 테루엘 전투
테루엘 전투 당시 유기된 스페인 공화군 국제여단 소속 T-26B "마드리드 만세" 60번차 |
2.1.5. 레반테 공세
레반테 공세 당시의 스페인 국민전선군 소속 T-26B |
2.1.6. 에브로 전투
에브로 전투 당시의 스페인 국민전선군 소속 T-26B |
3. 대전기
역시 정말 많은 수량이 사용되었으며, 동부, 서부, 북부(핀란드, 노르웨이), 아시아 등 "전쟁 중 4개 이상의 전선에서 사용된 유일한 경전차"로 기록되어 있다.3.1. 중일전쟁
중일전쟁 당시의 국민혁명군 제200기계화사단 소속 T-26RT |
T-26RT는 일본군이 배치한 거의 모든 전차를 상대로 대등 이상의 활약을 할 수 있었는데, 상하이 전투 당시 빅커스 Mk. E를 모두 망실한 국민당군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전차였으며, T-26의 베이스는 빅커스 Mk. E였기에 운용 매뉴얼도 거의 유사하여 인원들을 훈련시키는데 유리했던 면도 컸다.
3.1.1. 1939년 동계공세작전
쿤룬관 전투 당시의 국민혁명군 산하 제200기갑사단 소속 T-26RT |
그러나 난닝 탈환전의 일환으로 심기일전하여 벌어진 쿤룬관 전투에서 국민혁명군 제200기갑사단의 T-26RT들이 제대로 대활약하였는데, 당시 4전구 소속 중국군 25개 사단과 함께 다수의 단차가 동원되어 난닝을 공격해 일본군 1만명을 사살하고 쿤룬관을 점령하는 쾌거를 이루었는데, 특히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나카무라 마사오 소장이 전사하는 등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1940년 11월 일본이 쿤룬관을 버리고 패주하며 대승을 이끌었다.
3.1.2. 대륙타통작전
대륙타통작전 당시 원난 성 쿤밍에서 격파된 일본 제국 육군 노획 T-26RT "512번차" |
3.2. 소련-일본 국경분쟁
3.2.1. 하산 호 전투
하산 호 전투에서의 위장한 소련 육군 소속 T-26B |
이때 T-26 에이스들도 여러 명 등장하였는데,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선사받은 전차장 "뱌체슬라프 비노쿠로프"와 "세묜 라쇼킨"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8월 6일, 그들은 일본군의 요새를 공격하여 철조망을 부숴버리고 벙커에 있던 일본군을 제압했으며, 기세를 탄 T-26 2대는 맹렬하게 적들을 향하여 진격하였지만, 곧바로 일본군에게 포위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침착하게 T-26의 높은 기동성을 능숙하게 활용하여 포격을 피해 많은 적의 장비와 인력을 파괴했고, 이윽고 보병 부대가 그들을 엄호하며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 밖에도 같은 칭호 수훈자인 제11전차여단의 "이반 바실리예비치 프로소로프"의 사례도 존재하는데, 그와 휘하 전차병들의 경우 돈좌된 T-26에서 무려 이틀간 적들과 맞서 싸웠으며, 이들은 포위당한 상태에서도 기관총과 주포로 일본군 중대를 절반이나 처치하였고, 소련군이 그들이 있는 위치를 점령해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산 호 전투 당시에 T-26 전차들은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 수훈자만 33명에 이를 정도로 매우 큰 공을 세웠다.
3.2.2. 할힌골 전투
할힌골 전투 당시의 소련 육군 소속 T-26B |
당시 대숙청 여파로 극동지역 일선 부대의 기존 지휘관들 상당수가 숙청되고 그 자리를 신임 지휘관들이 막 이어받은 상황으로, 초기에 미리 구축된 적군 대전차 진지에 경전차들을 밀어넣는 뻘짓도 있었지만, 초원에서의 양호한 주행능력과 45mm 전차포의 파괴력으로 일본군의 주력 89식 중전차, 95식 경전차를 상대로 좋은 전과를 올렸다.
일본군의 89식 중전차 치로는 대전차전에 부적합한 90식 57mm 포를 장착했고, 95식 경전차 하고는 보다 관통력이 향상된 37mm 포를 장착해 장부스펙상 당대 경전차들의 장갑을 충분히 관통할 수 있었지만 포의 완성도와 신뢰성 문제 때문에 할힌골에서는 BT-7과 T-26을 격파하지 못하고 패배했다.[3]
이 밖에도 하고의 37mm 90식 전차포 5발이 관통되었어도 불이 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37mm 포의 포탄의 품질이 낮아서였다고 사료된다.
3.3. 폴란드 침공
폴란드 침공 당시의 소련 육군 소속 T-26 전차 소대[4] |
이때 폴란드군의 주력이 서부에서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러 나가 동부 국경에는 소수의 폴란드 국경수비대(KOP) 및 긴급 편성된 예비대들만이 국경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소련군은 큰 어려움 없이 폴란드 동부를 점령했다.
그렇지만 침공 과정에서 폴란드군과의 교전으로 도합 5량의 T-26B가 파괴되었고 그 외에 기계적 결함으로 전력에서 이탈한 T-26도 일부 존재했다.
3.4. 겨울전쟁
겨울전쟁 당시 격파된 소련 육군 소속 T-26B 전차 소대 |
핀란드군은 장애물을 설치해 현가장치를 망가뜨리거나, 눈속에서 돈좌된 전차들을 상대로 라티 L-39 20mm 대전차 소총을 사격해 벌집으로 만들거나, 상술했다시피 열기에 약한 소련제 경전차의 단점을 파고들어 몰로토프 칵테일을 던져 석유 스토브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이렇게 보병들이 전차를 격파하려면 엄청난 인명손실을 감당해야했기에, 기갑전력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낀 핀란드군은 전력을 증강하기로 결심하고 격파했던 다수의 T-26들을 이송, 수리 및 자체개조를 통해 도합 126량 이상을 배치했으며, 이 차량들은 계속전쟁 시기 핀란드군 전차 전력의 주축으로 사용되었다.
3.4.1. 톨바얘르비-애글래얘르비 전투
톨바얘르비-애글래얘르비 전투 당시 격파된 소련 육군 소속 T-26A 전차 소대 |
3.4.2. 콜라 전투
콜라 전투 당시의 소련 육군 소속 T-26S |
3.4.3. 수오무살미 전투
라테 도로 전투 중 유기된 소련 육군 소속 T-26B |
그러나 연이은 폭설로 인해 전차 자체의 기동이 매우 어려웠기에 소련군은 T-26을 일부 한정된 도로에만 투입할 수 있었는데, 이 틈을 노린 핀란드군은 몰로토브 칵테일과 라티 대전차 소총으로 전차들을 파괴하며 격퇴했다.
혼비백산한 전차병들 중 몇몇은 전차를 버리고 도망치기도 하였으며, 핀란드군은 유기된 T-26들을 자국 내 공장에 가져가 피탄흔을 메꾸는 등의 수리를 거쳐 자국 전차 편제에 적용하였다.
3.5. 베사라비아-북부코비나 점령
베사라비아-북부코비나 점령 당시 루마니아 국경으로 이동 중인 소련 육군 소속 T-26B & BA-10 |
3.6.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소련 육군 소속 T-26B와 승무원들 |
3.6.1. 독소전쟁
3.6.1.1. 바르바로사 작전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유기된 소련 육군 소속 T-26S를 살펴보는 독일 국방군 |
그렇지만 T-26은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매우 큰 시련을 겪게 되는데, 우선 주무장인 45mm 20-K 전차포에 쓰이는 탄의 경우, 철갑탄은 초창기의 3호 전차와 4호 전차에게는 맞추기만 한다면 완전 격파가 가능하여 대전차전에서 나름 활약하였다만, 문제는 고폭탄이었는데 탄이 작다보니 작약도 적게 들어가 대보병전에서 동축기관총보다도 쓸모가 없다는 말까지 들었을 정도였다.
흔히 상술한 할힌골 전투에서 기원하여 기차역까지 가는데도 퍼져버렸다는 둥, 자력 주행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는 둥의 말이 나오는데, 실제로 T-26의 신뢰성은 원본인 빅커스 Mk. E보다는 살짝 뒤쳐졌지만, 그래도 동시대 기준으로는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다.[5]
그렇다면 대체 왜 바르바로사 작전을 필두로 한 독소전 초기에 기동 불능이나, 맥없이 격파되는 이러한 상황이 터졌냐하면, 다름이 아니라 스탈린의 최고 오판인 대숙청의 후유증으로 전차를 관리할 정비창 인원들도 싸그리 굴라그로 끌려가거나 혹은 처형당했기에 제대로 기본적인 수리조차 받지 않은[6] T-26들이 어떻게든 자력으로 기어가서 전투를 치렀기 때문이다.
또한, 장교들 역시 대다수가 숙청되어 그나마 있는 장교라고는 거의 다 신병인 수준이라 구식 전차 교리는 차치하서라도, 적들의 대전차 진지에 그냥 돌격시키는, 이를테면 반자이 돌격과 다를 바 없는 전술로 운용되었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는 T-26의 낮은 신뢰성은 과장된 것으로 보는게 올바르며, 실제로는 대숙청의 여파로 인한 인적 자원 손실의 폐해라고 보는 편이 옳다.
T-26은 정말로 고군분투하였는데, 바르바로사 작전 중, T-34-76은 최전선에서만 배치되었으며, 초기에는 어느 정도 T-34가 잘 버텨줬지만 얼마 안가 독일군의 8,8cm 포에 속절없이 파괴되는 와중에 절망적인 손실을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 T-50, T-60같은 후속 경전차들과 악착같이 사선을 넘나들며 싸우게 되었다.
1941년 말에 이르러 전선이 어느 정도 안정화되며, T-34-76의 대량생산을 위해 1941년을 끝으로 생산이 중단되었으며, 이후는 기존 차량의 유지보수용 및 기존 부품 소모를 위해 소량만 생산되었다.
3.6.1.2. 우만 전투
우만 전투 당시의 소련 육군 소속 T-26S |
추가로, 이 시기 미하엘 비트만이 3호 돌격포 A형을 타고 T-26 6대를 격파함으로써 비트만의 커리어를 열어준 전차로도 알려져 있다.
3.6.1.3. 스몰렌스크 전투
스몰렌스크 전투 당시의 소련 육군 산하 제105기갑사단 소속 T-26B |
3.6.1.4. 브로디 전투
브로디 전투 당시 격파된 소련 육군 산하 제19기계화군단 소속 T-26B |
3.6.1.5. 모스크바 공방전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의 소련 육군 소속 T-26 전차 소대[7] |
이후 T-34-76이 전선에 등장하면서 최전선에서 물러났으며, 본래의 목적에 맞게 정찰 및 대보병 임무에 투입되었다.
이 시기 알렉산드르 오스킨이 T-26에 탑승하여 독일 전차 2대를 격파하는 활약을 하였으며, 그는 동년 10월에 피격당하여 큰 부상을 입었으나 이를 딛고 다시 T-34-76, T-34-85에 탑승하여 티거 2 3대 격파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3.6.1.6. 레닌그라드 공방전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의 소련 육군 소속 T-26E "185번차"[8] |
레닌그라드 방면으로 진입한 북부집단군은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에 비하여 진격 속도가 느림과 더불어, 신형 장비의 수령이 느렸는데, 그 이유는 러시아의 혹독한 라스푸티차와 날씨 탓에 보급 속도가 느렸기 때문이었다.
이에 T-26들도 타 전선에서의 전훈을 얻어, T-26의 부족한 장갑을 임시 방편으로 증강시켰기에 독일군과 어느정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다.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T-26의 활약으로는 바로 소련 육군 제86독립전차대대의 일화가 있다.
제86독립전차대대는 1941년 12월 20일에서 26일 사이에 콜피노에서 크라스니보르와 토스노를 방어하기 위한 작전에 투입되었는데, 이 시기 T-26을 운용했던 기록이 남아있다.
6일간의 작전 동안 대대 산하 소대장이었던 "M.I 야코블레프" 중위가 지휘하는 T-26은 벙커 2개와, 대전차포 3문, 기관총 진지 4개,박격포 3문을 격파하였으며, 추가로 크라스니보르에서 단신으로 200명의 독일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야코블레프 중위가 지휘하던 단차는 9발이나 피탄되는 와중에도 분전하였으며, 이 전과로 야코블레프 중위는 소비에트 연방 영웅 훈장을 수여받았다.
덧붙여서, 독소전쟁 중 T-26이 제일 오랫동안 사용된 전투이기도 한데, 1944년까지 제1전차여단과 제220전차여단 소속으로 각각 32량씩 편제되어 사용되었다.
3.6.1.7. 세바스토폴 공방전
세바스토폴 공방전 당시의 소련 육군 소속 T-26A & T-26B |
3.6.1.8. 크림 전선
크림 전선 당시의 소련 육군 산하 제1근위전차여단 소속 T-26B "11번차"[9] |
3.6.1.9. 스탈린그라드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의 소련 육군 소속 T-26B와 전차병들[10] |
3.6.1.10.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당시의 소련 육군 돌격전차대대 소속 T-26B |
전선에 투입된 T-26은 대전차전이 아니라, 본래의 목적에 맞게 순찰 및 보병부대 지원으로 사용되었다.
3.6.1.11. 테후마르디 전투
테후마르디 전투 당시 격파된 독일 육군 제563대전차자주포대대 산하 3중대 소속 7,5 cm Pak 97/38(f) auf 740(r) |
3.6.1.12. 바그라티온 작전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비텝스크의 독일 육군 소속 Pz.Kpfw T-26B 739(r) & Pz.Kpfw T-26C 740(r) |
3.6.1.13. 동프로이센 공세
동프로이센 공세 중 격파당한 독일 국방군 소속 Pz.Kpfw T-26A 737(r) |
3.6.2. 페르시아 침공
페르시아 침공 당시 이란 타르비츠 시에 진입한 소련 육군 산하 제6전차여단 소속 T-26S |
이때, 이란군에는 100여대의 FT-6와 TNH로 이루어진 기갑사단 두 개가 있었지만 소련군은 이를 T-26을 앞세운 공세로 완전히 격퇴했으며, 결국 이란은 연합국에게 점령당했다.
3.6.3. 서부전선
3.6.3.1. 오버로드 작전
오버로드 작전 당시 프랑스에서 격파된 독일 국방군 소속 Pz.Kpfw. T-26B 738(r)과 Pz.Kpfw. T-26C 738(r)[11] |
이 시기 투입된 독일 국방군의 T-26은 상술하였듯이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남부집단군과 중부집단군이 노획하여 프랑스 및 본토에 주둔하는 후방 부대에 예비물자로 편성하기 위하여 보낸 것들이었다.
3.6.4. 태평양 전쟁
3.6.4.1. 동남아시아 전역
동남아시아 전역 당시의 국민혁명군 제48기갑사단 소속 T-26RT[12] |
3.6.5. 소련-일본 전쟁
3.6.5.1.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당시의 소련 극동 육군 소속 T-26S |
소련 극동군은 독소전쟁 기간 동안 전투를 치르는 대신에, 극동에서 일본군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낮아 도태장비였던 BT-5, BT-7 전차들도 같이 일선에서 운용하고 있었다.
독소전쟁이 종결된 이후인 1945년 여름, 소련군은 T-26으로 무장한 극동군의 전투력을 향상하기 위하여 670대의 T-34-85를 배치했으며, 나머지 두개의 전차 대대는 이전과 같이 T-26과 BT-7 경전차를 사용했다.
제1극동군 소속 11개의 전차여단에는 각각 80량에서 85량의 전차가 장비되었는데, 이 중 절반은 T-26 또는 BT-7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트란스바이칼 전선의 2개의 전차사단과 5개의 전차여단에도 일부 T-26이 있었다.
T-26은 가솔린 엔진 특유의 고RPM 특성 상, 디젤 엔진을 사용한 M4A2나 T-34-85와 다르게 빠르게 시동을 걸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가벼운 중량으로 늪지대나 거친 지역에서 오히려 이들보다 더 나은 기동성을 보여주었다.
전쟁 후기 기준 속도가 느리고 장갑이 얇았지만, 45mm 포는 일본군의 전차를 격파하는데 충분한 위력을 지녔으며, 이후 만주 작전이 소련의 승리로 끝나는데에 힘을 보탰다.
3.6.5.2. 남사할린 침공
남사할린 침공 당시 행진 중인 소련 극동군 소속 T-26 전차 소대 |
만주 전략 공세 작전과 동시기에 이루어진 남사할린 침공 작전에도 다수가 동원되어 사할린을 점령하는데 공을 세웠다.
종전 후, 1946년에 하얼빈에서 열린 전승 기념 열병식에도 등장하였으며, 소련군과 15년 동안 동고동락한 이 전차는 이렇게 영광스럽게 퇴역하였다.
3.7. 계속전쟁
계속전쟁 당시의 핀란드 방위군 소속 T-26B[13] |
계속전쟁에서의 핀란드군은 T-26을 이용해 원 주인이었던 소련군을 기습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히거나 높은 기동성을 바탕으로 눈속에서 튀어나와 혼비백산시키는 등의 전술을 통하여 대활약을 하였다.
3.7.1. 탈리-이한탈라 전투
탈리-이한탈라 전투 당시의 핀란드 방위군 소속 노획 T-26B |
3.7.2. 일로만치 전투
일로만치 전투에서 격파된 소련 육군 소속 T-26RT "57번차" |
3.8. 라플란드 전쟁
로바니에미 전투 당시의 핀란드 방위군 소속 T-26B[14] |
이 때 핀란드군의 주력 전차는 이미 장부상 성능이 훨씬 좋은 "스투르미"[15]와 "라비스틴"[16]이었으나, 로바니에미 지역은 이 두 차량이 다닐 수 없는 지형과 좁은 길로 이루어져 있어 투입 할 수 없었기에 핀란드 군부 측에서는 한랭에서 무리없이 기동하고, 좁은 길도 잘 다닐 수 있는 T-26에 주목하여 해당 전투에 투입시켜 독일군을 몰아내는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4. 냉전
4.1. 국공내전
국공내전 당시의 국민혁명군 제200사단 소속 T-26RT "568번차" |
마지막으로 T-26이 대량으로 사용된 전쟁이었으며, 이후에는 훈련용, 전차호, 예비장비 급으로 재편성되며 기갑사의 한 획을 그은 이 전차는 전쟁사에서 퇴장하였다.
4.1.1. 화이하이 전역
화이하이 전역 직후 상하이에서 철수 중인 국민혁명군 제200사단 소속 T-26RT & M3A3 스튜어트 |
[1] 브레다 20/65 기관포를 장착한 CV-35와 1호 전차가 있긴 하였으나 극소량이었다.[2] 기존의 T-26B에는 무전기가 없기 때문에 무전기가 있는 지휘전차 사양인 T-26RT가 공여된 것으로 보인다.[3] 바르야틴스키의 2006년 저서에 따르면, T-26의 경우 할힌골에서 일본군 전차의 집중사격을 맞고도 격파되지 않고 작전을 속행한 사례가 존재한다. 그나마 소련군 전차를 상대로 전과를 기록한 장비는 기갑부대가 아니라 보병연대의 94식 대전차포였지만 부족한 수량으로 전세를 바꿀 수 없었고, 소련 기갑부대의 포위망에 갇힌 일본군 제23사단은 그대로 궤멸당했다.[4] 선두 차량은 T-26B 초기형이며, 뒤를 따라오는 차량은 T-26S이다.[5] 애초에 신뢰성이 정말 낮았더라면 소련군이 1930년대부터 운용할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이, 속도도 훨씬 빠르고 기술적으로는 우수한 BT 전차 시리즈가 동시대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련군은 이로 대체하기는 커녕, 오히려 BT 전차의 생산은 줄이고 T-26 시리즈의 생산을 증폭시켰다.[6] 심지어 매우 기본적인 기동 점검조차 하지 않았다는 말도 존재한다. 그만큼 대숙청 직후의 소련의 인적 자원 손실은 엄청났으며, 그 결과는 매우 참담했다.[7] 1941년 12월에 촬영된 사진이다.[8] 1944년에 촬영된 사진이다.[9] 1942년 4월에 촬영된 사진이다.[10] 1942년에 촬영된 사진이다.[11] 1944년~1945년 사이에 촬영된 사진으로 추정된다.[12] 1942년 촬영된 사진이다.[13] 1944년 6월에서 7월 경에 촬영된 사진으로, 신형 위장 도색을 도포하였다.[14] 전투 당시 "킴 뵈르크" 소위가 촬영한 사진이다.[15] 3호 돌격포 G형의 핀란드군 제식명[16] 4호 전차 J형의 핀란드군 별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