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7 02:40:10

모리스 가믈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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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395><colcolor=#fff> 모리스 귀스타브 가믈랭
Maurice Gustave Gamelin
파일:971ae0f7b3ca9d6605dbc98467bf9ebe--french-general-maurice-gamelin.jpg
출생 1872년 9월 20일
프랑스 파리
사망 1958년 4월 18일 (향년 85세)
프랑스 파리
학력 생시르 사관학교 (졸업)
군사 경력
복무 기간 프랑스 육군
1893년 ~ 1940년
최종 계급 대장(Général d'armée)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
서훈 레지옹 도뇌르 그랑크루아

1. 개요2. 일생
2.1. 1차 세계대전 이전2.2. 1차 세계대전2.3. 전간기2.4. 2차 세계대전2.5.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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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리스 귀스타브 가믈랭은 프랑스의 육군 장성으로,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군 장군으로서 복무했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조프르 장군 휘하의 참모로서 마른 전투의 승리에 기여했고, 그 뒤로도 여러 전투에서 능숙한 지휘를 통해 조국의 승리에 기여했다. 전후 프랑스 군부 내 핵심 장성으로 발돋움한 가믈랭은 프랑스군의 세계 대공황 극복 및 재무장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라인란트 재무장, 뮌헨 협정 등 나치 독일의 군사 도발에 소극적으로 대응했고, 기동전, 제병협동 교리가 도입되는 등 변화한 전쟁에 적응하지 못하고 구시대적인 실책을 반복하여 결국 프랑스가 패전하는 원흉이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1차 대전의 영웅에서 2차 대전 최악의 졸장으로 전락했다.[1]

2. 일생

2.1. 1차 세계대전 이전

가믈랭은 1872년 9월 20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제피린은 나폴레옹 3세의 육군 총사령관이였는데[2] 아들인 가믈랭의 예술가적 기질을 알고 예술가로 키우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부친의 마음과는 달리 어린 나이부터 군대에 관심을 보이던 가믈랭은 1891년 10월 31일 생 시르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한 후 1893년에 수석으로 졸업함으로서 본격적인 군인 인생을 시작했다.

가믈랭의 첫번째 군 경력은 북아프리카였다. 그는 알제리 주둔군 제 3연대에서 복무했고 뒤이어 튀니지 주군 여단에서 장교로서 근무했다. 가믈랭은 그곳에서 종종 그림을 그리며 여유롭게 살았다. 1897년 파리로 돌아온 가믈랭은 육군대학 입학시험을 합격한 후 사관학교에서 수년간 공부했다. 이 당시 가믈랭은 특유의 성실성과 재능 덕에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고 샤를 랑르자크(Charles Lanrezac) 장군으로부터 미래의 프랑스군을 이끌 인재라는 극찬을 받았다.

1904년, 가믈랭은 샤쇠르 알팽[3]의 제 15대대 장교로 복무했다. 이곳에서 가믈랭은 맡은 임무를 깔끔하게 수행하고 부하들을 잘 이끌어 상부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1906년에 '전술에 관한 철학적 연구'라는 책을 출판했고,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극찬을 받으며 당대 최고의 군 사상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특히 이 책을 감명깊게 읽고 몇년 뒤 그를 발탁해 자신의 부관으로 삼은 장성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바로 훗날 가믈랭의 상관이 되는 조제프 조프르 장군이었다. 여기엔 훗날 프랑스군 최고의 명장으로 칭송받게 되는 페르디낭 포슈 중령의 도움도 있었다고 한다.

1908년, 가믈랭은 조프르 장군의 부름을 받고 제 2군단의 참모로 부임했고 1910년에는 전쟁부의 관료가 되었다. 1911년, 가믈랭은 샤쇠르 알팽 제 11대대장으로 부임하여 3년간 복무한 후 1914년 3월 조프르 장군의 참모가 되었다. 그러던 1914년 8월 3일 독일 제국이 프랑스에 선전포고하면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2.2. 1차 세계대전

파일:3_180px-Maurice_Gustave_Gamelin.jpg

가믈랭은 조프르 장군의 휘하에서 열정과 탁월한 전술적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마른 전투에서는 반격 작전을 고안하여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해 중령으로 승진했고, 1914년 11월 1월에 제2 반여단의 지휘관으로서 독일군의 측면을 치기 위한 '바다로의 행진' 1차 이프르 전투를 수행했다. 그 후 알자스 전선에서 독일군과 싸웠고, 솜 전투에도 참가했다.

1916년 4월, 가믈랭은 대령으로 승진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몇번 더 전공을 세워 준장이 되었다가, 8개월 뒤 도로 대령으로 복귀했다. 그 뒤로는 1917년 4월부터 제 11보병사단의 지휘관으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1차 대전 말 연합군의 대반격인 백일 공세 때 누아용 지방에서 패주하는 독일군을 공격해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적에게 큰 타격을 입히는 대승을 거두어 세간의 찬사를 받았다. 이렇듯 가믈랭은 1차 대전에서 참모, 야전 지휘관으로서 훌륭한 지휘력을 선보이며 프랑스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2.3. 전간기

전후 가믈랭은 해외 각지로 파견되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는 브라질에 있었고, 이후 레반트, 시리아, 레바논 주둔 프랑스군을 지휘했다. 그러던 1931년, 그는 막심 베이강의 뒤를 이어 프랑스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어 군의 행정 업무 대다수를 처리했고, 1935년 이후에는 장성들의 감독관으로서의 권한도 부여받았다. 여기에 1938년 1월 21일 제정된 법률에 따라 육, 해, 공군을 조율하는 역할도 부여받았다. 이렇게 막강한 권한을 누린 이는 1차 대전 당시 조프르 원수 외에는 오직 가믈랭 밖에 없었다. 가믈랭은 이 막강한 권한을 사용해 마지노 선을 건설하고, 프랑스군 재무장에 집중했다.

그가 이렇게 많은 힘을 받았던 것에는 정치적인 문제가 개입되어있었다. 1936년 프랑스에는 SFIO를 중심으로 급진당, 공산당이 연대하는 좌익적인 인민전선이 집권했는데 군대는 반대로 우파적인 성격의 구성원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공화정의 파괴와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극우단체였던 악시옹 프랑셰즈는 필리프 르클레르와 같이 군대 내에 많은 동조자들을 가지고 있었고 비시 정부에서 페탱을 비롯한 수뇌부가 적극적으로 프랑스의 공화주의를 파괴했던 것이 있다. 그러나 가믈랭은 이들과 다르게 프랑스의 민주주의에 대해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고 이를 자랑스러워했던 인물이었고 인민전선의 입장에서는 그를 신뢰할 수 있을만한 인물로 여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36년 3월 나치 독일이 라인란트 재무장을 단행할 때 이를 방관하는 실책을 범했다. 당시 프랑스 외무장관 피에르에티엔 플랑댕과 총리 알베르 사로는 가능하다면 영국과 협력해서, 만일 영국이 협조하지 않더라도 프랑스 단독으로 독일과 맞서려 했다. 플랑댕 외무장관은 국제연맹에서 독일을 규탄하고 로카르노 조약 당사국들에게 프랑스의 군사 조치에 대한 지원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이처럼 당시 프랑스 정부는 압박을 통해 독일이 스스로 물러나게 하고 싶었지만, 실패한다면 군사력을 동원 할 생각과 의지가 충만했다. 실제로 히틀러는 훗날 "만약 당시에 프랑스가 라인란트로 진격했다면, 우리는 철군해야 했을 것이다."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가믈랭은 정부의 강경 노선에 미온적으로 답했다. 가믈랭은 플랑댕 외무장관에게 "정부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최선을 다하겠지만, 군 예산의 구조적 삭감[4]과 방어 전략 때문에 일방적인 군사 공격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또한 2월 19일 프랑스 참모본부 회의에서 독일군은 이미 프랑스군에 비해 전력이 우위이니 프랑스 단독으로 독일을 라인란트에서 몰아내는 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라인란트에 파견된 첩보원들이 독일군의 규모를 크게 오판해 50만 대군이 라인란트에 진주했다는 비관적인 보고를 올리는 바람에[5] 가믈랭의 발언은 혜안이 되었고, 정부는 뭣도 모르면서 강경하게만 나가는 군알못 취급을 받으며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을 용인할 수밖에 없게되었다.

2.4. 2차 세계대전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가믈랭은 프랑스군 총사령관으로서 독일과 맞서게 되었다. 당시 가믈랭의 명성과 영향력은 매우 높아, 독일의 장성들조차 가믈랭을 상대하는 것을 꺼렸다. 가믈랭은 현 프랑스의 전력으로는 선제 공격에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 선 방어 후 역습한다는 전략을 채택했다. 우선 마지노선에 36개 사단을 배치하고, 프랑스 북부에 전개된 육군 주력부대를 벨기에 중부에 위치한 딜 강에 전개시켜 딜 강을 자연 방어선으로 삼아 벨기에 영토 중앙 대부분을 가르는 방어선을 형성했다. 이를 통해 독일군이 마지노선으로 오든,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로 진입하려든 뭐를 시도하든 방어해 적의 손실을 극대화한 후 때가 되면 총반격을 개시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딜 계획은 1940년 1월 10일 딜 방어선에 집중 공세를 취한다는 독일군의 작전 계획서를 입수하며 그 당위성이 입증되는 듯 하였다. 이에 강력한 기갑부대를 가능한 빨리 딜 방어선으로 파견해 적의 기갑사단을 격퇴하기로 결정하고 프라우 장군이 지휘하는 기병군단을 돌입시켜 딜 방어선 바깥에서 지연전을 실시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여기에 가믈랭은 독일군의 예상 침공로 중 하나로 예측되는 네덜란드도 보호하기 위해 딜 방어선의 북쪽 끝에서 네덜란드까지를 연결하는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했다.[6] 이에 가믈랭은 북동부전선 전략예비대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었던 제 7군을 벨기에 북부로 투입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때 북동부전선 사령관 겸 프랑스군 부사령관인 알퐁스 조르주 장군은 프랑스군 북동부전선의 유일한 예비 야전군을 섣불리 최전선으로 보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지만 가믈랭은 묵살했다.

그 후 과정은 프랑스 침공 참고.

이 시기 가믈랭의 대표적인 실책들은 다음과 같다.
  • 지도력 부재와 불필요한 예술적 감수성
    1차 세계대전 시기 탁월한 전술가였지만, 1940년에 이르러서는 이미 68세의 나이로 노쇠해 휘하 참모 및 부대들을 지휘하는데에 문제를 겪었다. 게다가 명령을 지시할 때 명확한 표현이 아닌, 시적인 표현[7]을 남용해 부하들에게 "보들레르"란 별명으로 불렸다#.
  • 구시대적 사고
    • 구시대적 전략, 전술[8]
      항공, 전차 등의 발전으로 기존의 화력전을 대체할 기동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가믈랭은 폴란드 침공으로 독일군이 그 효용성을 전세계에 과시했음에도 "폴란드는 프랑스가 아니다."라며 적을 얕잡아보고, 새로운 사고를 거부했다. 가믈랭은 여전히 전차와 항공기는 보병을 보조하는 역할에 불과하며 적을 효과적으로 "제압"하는 데에 초점을 두었고, 기동을 통해 상대를 포위 섬멸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다만, 가믈랭과 같은 사고를 가진 군인들은 프랑스는 물론이고 독일 국방군에도 여럿 있었다.
    • 구시대적 통신 체계
      가믈랭은 유선 전화, 특사 파견 등 구식 방식을 선호해 라디오, 무전기의 사용을 기피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전선에서의 상황 전파는 오토바이를 이용한 전령을 통해 통상 48시간이나 소요되었다. 최소한 전신기 한 대 정도는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에, 가믈랭은 "군사 명령을 하달하는 것을 경마 경기 결과를 전달하는 것과 비교해서는 안된다."며 거부했다. 더욱이 총사령관 가믈랭과 부사령관 조르주 간의 임무분담에 대한 소통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가믈랭은 조르주와 해당 문제에 대해 조율하기 위해 친히 75km를 차로 달려서 조르주의 지휘소로 가야 했다. 거기다 이 둘의 의견 조율을 담당할 북동부전선 참모들이 소재한 곳은 총사령부와 북동부전선 사령부의 중간지점이었다. 이런 주먹구구식에다 구시대적인 방식을 고집한 프랑스군이 급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 벨기에군과의 협조 문제
    가믈랭은 벨기에군과 연합 작전을 수립하고 작전 수행시 벨기에군과의 호흡을 맞출 책임자를 명확히 정하지 않았다. 즉, 북동부전선 사령관 알퐁스 조르주 대장, 제 1군 사령관 조르주 블랑샤르 대장, 그리고 가믈랭 본인 모두가 벨기에군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그 결과 지휘 체계에 혼선이 발생했다. 결국 가믈랭은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할 무렵인 5월 10일이 돼서야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3세에게 연락 담당관을 파견했지만, 그동안 누적된 문제를 해결하고 효과적인 연합군을 편성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또한 가믈랭은 딜-브레다 방어 계획 및 마지노선 방어 계획을 추진할 때 가장 취약한 전선으로 손꼽히는 아르덴 전선을 사실상 방치했다. 아르덴 일대에 배치된 벨기에군은 2개 사단에 불과했고 프랑스군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럼에도 가믈랭은 이들과 제대로된 협조체제를 맺어두지 않았고, 그 결과 아르덴 일대의 벨기에군과 프랑스군은 각각 독립작전을 수행하다 각개격파당했다. 그러나, 이런 중대한 실책에 대해 가믈랭은 "그들(벨기에군)은 싸우지도 않고 증발해버렸다."며 책임을 벨기에군에게 전가했다.
  • 확증편향
    독일군의 아르덴 전선 기습 돌파 작전은 현대 군사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습임이 분명하고, 이 점에 대해서는 프랑스 학자들조차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이 완벽했었느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단적으로 프랑스 정보국 소속 독일지역 담당 부장 파울 파이욜 대령은 3월 22일 독일군 첩보원들이 아르덴 삼림지대, 스당에서 아브빌 방향, 그리고 솜 강 하구에 이르는 도로를 집중적으로 정찰하고 특히 교량의 통과하중 능력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윽고 스위스 베른에 위치한 프랑스 국방무관 역시 5월 1일 본국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독일군은 5월 8일에서 10일 사이에 마지노선을 포함한 전 전선에 걸쳐 공격할 것이다. 주공은 스당이다."

    그러나, 가믈랭과 부사령관 조르주는 보고를 단순한 독일의 기만에 속은 것에 불과하며 주공은 벨기에 북부라는 자신들의 주장을 고집했다. 그후 5월 11일 오전 한 정찰기 조종사가 수많은 전차와 차량화 부대가 아르덴에서 행군 대형을 이루고 있는 장면을 포착했다. 그리고 5월 11일 야간부터 12일 새벽 사이 제9군 소속 정찰기 조종사는 라이트를 가린 채 아르덴에서 기동하는 수십 km의 차량 행렬을 관측하고 이를 상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제9군 정보부서는 보고를 무시했다. 그리고 5월 12일 아침 또 다른 정찰기가 아르덴 방면으로 날아갔다가 독일군 대공포에 피격되어 날개와 연료탱크가 벌집이 된채 간신히 기지로 귀환했다. 조종사는 끝없는 차량행렬을 명확하게 보고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전차 대수까지 언급했지만 제9군 정보 참모부장은 터무니없는 보고라 여기고 무시해버렸다.[9]

    5월 12일 야간과 13일 사이에 프랑스군 정찰기 조종사들은 아르덴을 가로지르는 엄청난 '촛불 행렬'을 촬영했다. 당시 아르덴으로 진입한 독일군의 많은 차량들은 아르덴의 험난한 지형 탓에 헤드라이트를 킨채로 운전할 수밖에 없어 정찰기에게 그대로 목격되었다. 그러나 가믈랭은 이를 '타타르인의 공격소식'[10]이라고 간주하고 무시했다. 결국 5월 13일 독일군은 마스 강을 건너 스당을 돌파했다. 그럼에도 가믈랭 사령부는 이 심각한 상황에 대해 미미한 정보만을 수집했고 5월 13일 상황보고서 말미에 "적의 주공 방향을 판단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고 기재했다.

    이렇듯 가믈랭은 자신의 생각과 어긋나는 정보를 받아들이길 거부했다.(훗날 6.25전쟁 당시 맥아더 사령부가 중공군을 찾았다는 정찰기의 보고를 묵살한 것과 비슷하다) 그는 아르덴을 통과한 적 기갑부대의 공세를 견제 공격 또는 양공으로 간주하고 이에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는 자신의 구미에 맞는 첩보만을 수용하고 전쟁의 현실을 무시했다. 가믈랭이 터무니없는 착각이라고 무시했던 보고들을 적시에 수용했다면 딜 계획을 중단하고 포위될 위험에 처한 부대들을 솜 후방으로 후퇴시키는 방책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벨기에에 전력을 집중시키는 걸 고집했다. 히틀러는 이런 프랑스군의 행보에 대해 5월 14일 '제 11호 명령 제1항 적의 상황'에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지금까지의 공세 경과를 볼 때, 적은 아군의 작전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적은 지속적으로 강력한 전투력을 나무르-안트웨르펜 연안 선에 진출시키고 있으며 A집단군[11] 작전 지역을 경시할 것으로 판단된다."
  • 마지노선에 대한 집착
    마지노선은 어디까지나 방어선일 뿐이며, 그 이상의 의미를 두어서는 안됐다. 그러나, 가믈랭은 "마지노 선 중 일부라도 적에게 빼앗겨서는 안된다."며 15개 사단이면 충분한 방어선에 무려 36개 사단에 달하는 병력을 배치시켰다. 게다가 독일군이 아르덴 전선을 돌파하고, 스당이 함락당한 뒤에도 마지노선에 주둔한 36개 사단 중 단 한 개 사단도 차출하지 않고, 계속해서 방어선을 지키게 했다. 당시 독일 C집단군이 마지노선 인근에서 기만 전술을 수행해 마지노선에 주둔한 프랑스군을 잡아두고 있었지만, 15개 사단이면 충분한 방어선에 36개 사단을 배치시킨 것도 모자라서 당장 본토가 털리는 와중에 일부라도 차출하지 않고 내버려둔 것은 중대한 실책이다.[12]
  • 지나치게 빠른 포기
    패배는 병가지상사라는 말이 있듯이, 전쟁에서 작전이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아 위기에 직면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프르는 섣불리 알자스-로렌 지역을 공격했다가 독일군이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 북부를 공격하는 바람에 자칫하면 나라가 망할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그는 불굴의 의지를 발휘해 택시, 버스 같은 모든 교통수단을 총동원해 병력을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회군시키는 데 성공했고 마침내 마른에서 독일군에게 결정적인 역습을 성공시켜 국가를 구했다. 이때 가믈랭은 바로 이 마른 전투에서 역습 작전을 수립해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경험이 있었으니 그걸 살려 위기를 뒤집을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에겐 불행하게도, 1940년의 가믈랭은 1914년의 조프르와는 달리 전쟁을 일찌감치 포기해버렸다. 그는 전쟁 개시 닷새 뒤인 5월 15일 저녁 8시 30분에 달라디에 국방장관에게 현재의 암울한 상황을 보고하고 상황을 역전시킬 예비대가 없다고 알렸다. 당시 두 사람의 전화 통화를 엿들었던 미국 대사 윌리엄 볼릿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달라디에는 창백한 얼굴로 털썩 주저앉아 "그럼 우리가 완패했단 말이오?"라고 물어봤고 가믈랭은 "예, 당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5월 16일에는 더욱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날 아침, 가믈랭은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과 프랑스 총리 레노, 국방장관 달라디에 앞에서 특유의 미사여구를 섞어가며 현 상황을 보고했다. 처칠은 도대체 어디에 전략적 에비대가 있는지 알고 싶어 가믈랭에게 "전략적 예비대는 어디에 있소?"라고 물었다. 이에 대한 가믈랭의 대답은 단 한마디, "전혀 없습니다(Aucune)."였다. 처칠은 회고록에서 이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막강한 프랑스군과 고위 지도부를 어떻게 봐야 하는 걸까? 750km의 전선을 책임져야 할 일국의 총사령관이 예비대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후 사령부에 쓸쓸하게 복귀한 가믈랭은 역습작전의 총체적 지휘권을 북동부전선 사령관 조르주 장군에게 위임했다. 하지만 조르주 장군 역시 역습을 이끌 마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조르주의 부관 앙드레 보프르[13] 장군은 5월 14일 이른 새벽 스당이 돌파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조르주 장군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마치 가족 중 누가 죽은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조르주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 "스당 전선이 돌파당했어! 무너졌다고!" 그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오열했다. 이 전쟁에서 내가 처음으로 본 눈물이었다. 그 후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은 더 늘어났다. 정말 끔찍한 기억이었다. (참모장) 두망 장군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14] "장군님, 전쟁이란 게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전쟁에서는 예상치 못한 사건도 일어나는 법입니다!"


    명색이 유럽 최강의 육군이라는 프랑스군의 총사령관과 부사령관이 질질 짜고 있으니 역습 작전이 제대로 진행될 리 없었다.[15] 그러다가 5월 19일, 가믈랭은 스당을 돌파한 후 대서양으로 진군하는 독일군 A집단군의 선두부대와 후속부대간에 비교적 큰 간격이 발생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작전명령 12호를 발령해 '기동성을 갖춘 특수임무부대'에 그 방면으로 진격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의 명령문에서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담은 명령은 단 한 문장, "모든 것은 1분, 1초에 달려있다."뿐이었다.

2.5. 말년

프랑스가 패배한 뒤 가믈랭은 1940년 9월 6일 체포되어 에두아르 달라디에, 폴 레노, 레옹 블룸과 함께 패배의 책임을 묻는 리옹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재판은 비시 정부에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올리고 패전의 책임을 전가하며 반대파들을 탄압하기 위한 정치적인 재판이었다. 그 근거로 프랑스 침공 당시 패전에 책임이 큰 졸장들은 가믈랭 외에도 막심 베이강을 위시로 수두룩했지만, 기소된 것은 페탱이 권력을 잡는 것을 거부했던 가믈랭이 유일했다는 점이 있다.[16] 가믈랭을 제외한 나머지 피고인들은 전부 항전을 주장했던 정치인들뿐이었다. 가믈랭은 재판에서 침묵을 지켰다.[17] 재판이 순 억지라서 정치인 출신의 피고인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하자 재판정의 논리가 궁색해지면서 영 지지부진해졌고, 견디다 못한 히틀러는 비시 정권에 재판을 중지할 것을 명령했다.

1942년 11월 독일군이 비시 정권을 무너뜨리고 프랑스 전역을 장악할 때 체포되어 부헨발트 수용소에 투옥되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스트리아의 이터 성채로 이송된 가믈랭은 1945년 5월 5일 미군에 의해 구출되었다.[18] 전후 프랑스로 귀환한 가믈랭은 회고록을 출판했는데, 그 내용은 1940년 프랑스군의 졸전에 대한 자신의 변명을 늘어놓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 뒤에도 명예 회복을 위해 애쓰던 가믈랭이었지만 프랑스에서 비웃음 속에 묻혀져 1958년 4월 18일 쓸쓸히 사망했다. 향년 85세.
[1] 비슷한 예로 1차 대전시기 전우인 로베르 니벨 장군이 있다. 그래도 니벨은 고직 전투 하나에서 지는 것에 그쳤지만, 가믈랭은 전쟁 자체를 패배했다.[2] 1859년 솔페리노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3] Chasseurs Alpins 알프스 산악경보병부대[4] 당시 프랑스군 국방 예산은 1930년부터 1934년까지 17% 삭감되었다.[5] 실제 라인란트에 진주한 독일군은 수천명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거의 몸만 온 수준으로 무장이 매우 형편없었다. 이들은 '프랑스가 반격하면 바로 도망쳐라' 라는 명령을 받고 진주했으나, 반격은 없었다.[6] 이 계획을 'Breda variant'라고 불렀는데, 연장된 방어선이 기존 방어선과 네덜란드의 도시 '브레다'를 연결하기 때문이다. 이는 프랑스 침공과 동시에 벌어진 연합군과 독일군 양측의 수많은 삽질 중 하나였는데, 브레다까지 진격한 후 익일 점심에는 틸버그까지 밀고 들어가보니 공세는 이미 독일국방군 제9기갑사단에 의해 허리가 끊겨있었다. 방어선에 합류해야 했던 네덜란드군은, 공군은 이미 루프트바페의 폭격에 공항째로 날아가버렸고 주요도시에 떨어진 독일 공수부대는 개전 초기의 혼란을 심화시켰으며 마지막으로 육군은 B집단군의 강력한 조공에 의해 풍비박산나 북동쪽으로 퇴각해있었다. 벨기에 방면도 결코 성치가 않았는데, Albert Canal의 방어선이 공수부대로 인해 약화되고 B집단군에 의해 박살이 나버렸기에 성급히 이루어진 엔트워프를 향한 벨기에 군의 후퇴는 딜 방어선을 향하던 연합군의 기동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7] "나는 선을 움직이는 운동이 싫다(Je hais le mouvement qui déplace les lignes)."라던지. 보들레르의 시 <LA BEAUTÉ>(1857) 의 구절이다.[8] 사실 이 점은 배경을 더 깊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는 퓌리 드 프랑세즈라고 불리는 교리를 채택하며 전쟁은 과학이다라고 주장했고, 반면에 상대인 프로이센은 전쟁은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양쪽이 격돌한 결과, 철도로 인한 빠른 동원을 통해 승리한 쪽은 프로이센이며, 프랑스는 자존심이 구겨졌지만 더 이상 자신들이 육군 1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하며 사회가 요구하는 쇄신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에 따라 과거 프로이센을 격파해 프로이센식 기동전 교리 수립에 영향을 주었던 나폴레옹 시대 프랑스처럼 기동전을 채택하기로 했으며, 1차대전 때는 독일과 거의 비슷한 기동전을 펼쳤다. 후티어 전술로 유명한 돌파병도 사실 프랑스가 1915년 초부터 참호 청소병이라는 형태로 운용하고 있었고 1차대전이 끝날 무렵 가믈랭의 선배 세대들은 기동전이 미래라고 생각하며 백일 전투, 말메종 전투와 같이 2차대전 독일 국방군처럼 보병-전차-항공기를 동시 및 협력 운용하는 전술을 펼쳤고, 에스티엔느 대령을 계승한 에메 두망 장군도 1920년대 프랑스군의 기계화를 주도하는 등 1939년의 프랑스군과는 정반대의 전략과 전술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문제는 대공황과 염전 사상에서 비롯됐다. 우선 1차대전의 지나친 공세적 전술로 인해 막대한 사상자를 낳았기 때문에 1910년대에 청년이었던 프랑스 국민들은 1930년대에 기득권이 되면서 전쟁을 극도로 기피하게 되었다. 마지노 선 또한 이러한 사상으로 인해 지어진 요새고 사회적 요구와 대공황으로 인한 국방 예산 삭감은 프랑스군으로 하여금 기동전을 채택하지 못하게 되었다. 가믈랭과 같은 1차대전의 후배 세대는 선배들이 채택했던 기동전을 버리고 영국식 전략기동론을 채택하며 기본적으로는 참호와 요새를 통해 정적, 지연전을 펼치고 적의 약점이 보일 때만 기동하여 돌파하는 전술을 채택하게 된 것이다. 프랑스군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것은 기동전의 효용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게다가 기동전은 필연적으로 적보다 우수한 군대를 요구하며 이는 많은 전차와 항공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예산이 많이 들 수밖에 없는데 1938년 기준으로 프랑스군의 국방 예산은 독일의 1/12 수준이었다. 게다가 해군을 거의 키우지 않았던 독일과 달리 프랑스는 세계제국이었으며 지중해 패권과 식민지에 무력 투사를 할 필요가 있었기에 해군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알다시피 해군은 3군 예산중에 가장 예산이 많이 드는 군대다. 이러한 복합적인 이유로 프랑스는 선배들이 갈고 닦아놓았던 기동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구시대적 사고 방식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꽤 복잡한 이유다. 프랑스 공방전 패장인 가믈랭 조차도 선배들이 닦아놓은 기동전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인 상황이 기동전을 하기 힘들게 만들었을 뿐이다.[9] 훗날 구데리안은 회고록에 "제9군 정보부서야말로 뜻하지 않은 동맹군이었다"며 비웃는 서술을 남겼다.[10] 1854년 크림 전쟁 때 한 타타르인이 세바스토폴 요새가 함락되었다는 잘못된 보고를 전한 데서 유래한 관용구.[11] 아르덴 전선을 돌파한 기갑군[12] 기본적으로 마지노선같은 요새를 건설한 이유가 소수의 군대로 다수를 맞아 싸우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상식밖의 패착이다.[13] 보프르는 이후 드골 대통령 시절의 프랑스 정부에서 나토 파견 대표 등을 역임했고, 학자로서도 간접전략 이론을 제시하는 등 냉전 시절 프랑스를 대표하는 장성으로 명성을 얻었다.[14] 전간기 막바지에 소련과 대독 군사협정을 맺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 영불 협상단 대표 중 프랑스 대표로 파견된 그 조제프 두망이 맞다. 당시 총사령부 참모장 겸 방공총감을 맡고 있었다.[15] 결국 장군도 사람인지라, 장군들 역시 지휘하는데 있어서 멘탈관리가 굉장히 중요하다. 멘탈이 붕괴되면 있던 능력도 못 내기 때문이다. 일례로 1차대전 발발 당시 프랑스군 총사령관이였던 조제프 조프르는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던 상관없이 매일 잠도 8시간 이상 잘 정도로 강철멘탈로 유명했고, 그가 가졌던 특유의 강철멘탈은 국경 전투에서 패배하고도 결국 마른 전투에서 승리하고 크게 기여하기에 이른다. 또한 조프르는 멘탈이 약한 장군들은 얄짤없이 보직해임이나 현부심으로 쫓아내버렸다. 문제는 2차대전때는 총사령관부터가 멘탈이 나가버렸으니....[16] 물론 가믈랭의 책임이 가장 컸음은 부정할 수 없다. 동맹국들을 경악하게 만든 군사 운용은 물론이고 후퇴 시 장비를 버리고 가기까지 했으니 페탱이 항전을 선택해도 결과가 좋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17] 공산주의자들에게 패전의 책임을 돌렸다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 그런 책임회피를 한 것은 베이강이었다.[18] 참고로 이때 벌어졌던 이터성 전투는 매우 흥미로운 기록을 남긴 제 2차 세계 대전의 공식적인 마지막 전투로 유명하다. 미군독일 국방군이 연합했기 때문. 이 기묘한 연합군이 상대한 적은 바로 무장친위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