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9-26 16:20:09

에밀 뮈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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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le Muselier(1882. 4. 17 - 1965. 9. 2)

프랑스제독.

1. 출생과 군 생활 초기2. 제1차 세계 대전과 전간기3. 제2차 세계 대전4. 전후

1. 출생과 군 생활 초기

1882년, 프랑스 남부의 항구도시 툴롱에서 철도역 직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17세에 해군사관학교에 입학, 3년 후 수석 졸업했다. 그의 동기 중 한 명이 바로 훗날 프랑스 해군 원수가 되는 프랑수아 다를랑이었다.

1903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주둔 함대에서 통신 장교로 실무 생활을 시작, 1906~1907년의 기간 동안 순양함 크라운의 포술 장교로, 1909년에는 육상 근무를 하였다. 1911년에는 투르빌 해군대학의 포술 교관으로 재직했다.

2. 제1차 세계 대전과 전간기

1차 대전이 터지자 아드리아 해에서 근무, 알바니아 왕자의 보호 임무를 수행했고, 툴롱으로 복귀한 후 다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과 교전했다. 그러다 부상과 질환으로 귀국, 치료 후 해군 육전대에 자원하여 벨기에에서 싸웠다. 1918년에 소령 진급과 함께 첫 함장 직책을 받았다. 이 때의 공로로 프랑스 해군 십자 훈장을 받았다.

전쟁이 끝나고, 뮈즐리에는 러시아적백내전에 참가하여, 아조브 해역을 방어하며 붉은 군대와 싸웠고, 1922년에 중령으로 승진했다. 3년 후 구축함인 우라강의 함장이 되었다. 1926년에 대령으로 승진했으며, 이듬해 에른스트 레나, 1930년 볼테르, 1931년에 브르타뉴 3척의 전함의 함장을 연속으로 맡았다.

1933년, 튀니지의 시디 압달라(Sidi-Abdalah) 항의 사령관으로 재직 중, 51세의 나이에 소장으로 진급, 제독이 되었다.

1938~1939년에는 본토로 귀국해 마르세유 항의 사령관을 맡았는데, 이때 다양한 민간 선박의 활동으로 방어하기 어려운 마르세유의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중장으로 승진한 이후, 그는 퇴역하면서 해군 총사령관 다를랑 제독의 정책을 비판하였다.

3. 제2차 세계 대전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게 패한 후, 뮈즐리에는 다른 제독들과 달리 다를랑 제독을 따르지 않고, 옛 부하들을 만나 석탄 무역상의 도움을 얻어 화물선을 타고, 지브롤터로 향했다. 그곳에서 수상기 편으로 런던으로 날아가, 샤를 드골 장군과 만나 자유 프랑스에 들어갔고, 자유 프랑스 해군과 공군 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수중에는 해상 및 항공 전력이 극히 미약했기에, 그의 직책은 잠정적인 것이었다. 총 50명의 프랑스 해군 제독들 중 자유 프랑스에 자발적으로 합류한 것은 뮈즐리에 제독 단 한 명 뿐이었다.

1940년, 뮈즐리에는 알렉산드리아로 날아가 시리아가 자유 프랑스를 위해 봉기할 수 있는지를 살펴본 후 런던으로 돌아왔다. 영국으로 돌아온 뮈즐리에는 갑자기 영국 경찰들에게 체포되었다. 황당하게도, 그 이유가 그가 비시 정부와 연락하고 있었고, 다카르라는 작전을 계획하여 자금을 모은 후 자유 프랑스의 신병 모집을 방해하며, 자유 프랑스가 가진 쉬르쿠프급 잠수순양함을 나포하여 비시 프랑스로 가져올 계획이라는 첩보를 영국 정보부가 입수했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드골은 이를 조사하여, 정보가 거짓임을 판명해 그가 석방되도록 해주었다.

1941년, 임시 정부가 설립된 후 뮈즐리에는 해군과 공군 장관을 맡았으며, 캐나다 북부의 프랑스령인 생 피에르 미클롱의 자유 프랑스에 합류를 촉구, 지역 투표를 거쳐 성공적으로 자유 프랑스 영토로 돌릴 수 있었다.

1942년에 런던으로 복귀한 뮈즐리에는, 자신이 겸하던 임시 정부 경찰청장직을 사임했다. 이유는 미국이 미국 가까이에 있는 영토들에 대해 간섭치 말라는 요구를 했기 때문으로, 드골은 청을 거절하려 했으나 결국 그의 사임을 받아들였다.

1943년, 알제리에 도착한 뮈즐리에는 드골로부터 알제리 경찰청장 직책을 받으나 거절했고, 대신 앙리 지로 장군 예하에서 도시 민병대 사령관 보좌관이 되었다. 1944년에서 1945년 동안 뮈즐리에는 몇 가지 법령 창안을 도우며, 1945년에 독일에게 항복을 받을 프랑스 해군 대표로 파견되었다.

4. 전후

1946년에 모든 공직에서 사임[1]하고 정계에 투신, 국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군사적인 능력과 달리 정치적 능력은 부족했다. 결국 이를 사임한 뒤, 1차 대전 참전 해군 육전대 퇴역군인회를 세우며, 육전대 시절 싸웠던 플란더스와 이스의 자유 벨기에 투사회의 명예회장과 국가 상호 협력 단체의 회장이 되었다.

1965년, 툴롱에서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 최종 계급은 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