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02:03:07

게리 무어

<colbgcolor=#000><colcolor=#fff> 게리 무어
Gary Moore
파일:external/www.guitarnoise.com/gary-moore.jpg
본명 로버트 윌리엄 게리 무어
Robert William Gary Moore
출생 1952년 4월 4일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사망 2011년 2월 6일 (향년 58세)
스페인 말라가 에스테포나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1]
직업 싱어송라이터, 음악가
장르 블루스, 블루스 록, 하드 록, 헤비 메탈, 퓨전 재즈
악기 기타, 보컬
활동 1968년 ~ 2011년
링크 공식 사이트

1. 개요2. 생애 및 작품3. 평가4. 그의 기타 5.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IMG_3064.jpg
영국 북아일랜드 출신의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 록과 블루스, 헤비메탈, 재즈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왕성하게 활동하였었고, 누구도 범접할 수 없던 그만의 섬세한 필링과 기타가 우는 듯한 플레이로 세상에서 가장 슬픈 기타를 쳤던 사나이라 불린다.[2]

2. 생애 및 작품

1990년 영국 해머스미스 오데온에서의 “Still Got The Blues” 연주.[3]

70년대에는 그의 절친인 필 리놋[4]이 이끄는 하드록 밴드 '씬 리지'에서 자주 활약하며 하드록 연주를 들려주였으며, 80년대 초엔 프로그레시브 재즈록 밴드인 '콜로세움 2'에서 열정적인 재즈록[5]를 연주하였다.[6] 또 역시 그의 절친이었던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출신의 그레그 레이크, 크림의 베이시스트 잭 브루스나 유명 세션 드러머 코지 파웰의 앨범에서도 연주를 해주었다.[7]

그리고 80년대 초중반부터는 솔로로 활동하면서 딥 퍼플 출신의 이안 페이스나 로저 글로버 등과 함께 격정적인 헤비메탈 연주를 들려주었다. 이 당시 최대의 히트곡은 Empty Room이라는 하드 록 발라드이다. 한국에서는 KAL기 격추 사고를 노래한 Murder in the sky도 대단히 관심을 모았었다. 이 시기 또 한 가지 특징은, 대단히 파워풀한 보컬을 직접 맡아 하고 있다는 점도 꼽을 수 있다. 물론 이 시기에도 블루스라기엔 좀 애매하지만 블루지한 곡들을 꽤 많이 연주하긴 했다. 씬 리지 역시도 블루지한 느낌의 하드록 밴드였기 때문에 그 시절에 유명한 Parisienne Walkways[8]가 씬 리지의 앨범에서 발표되었다.

90년대 들어서부터 본격적으로 팝 취향의 느린 곡에 블루지한 감성을 가미한 곡들과 팝 발라드들을 모아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상업적으로 크게 흥행했다. 'Still got the Blues'가 이때 발표한 대표곡 중 하나다.[9] 물론 이 시기에도 그는 크림의 '잭 브루스', '진저 베이커'와 함께 'BBM'이란 밴드를 만들어 크림 시절에 유행했던 사이키델릭 하드록을 연주했다.

2011년 스페인에서 휴가를 즐기던 중 향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심장마비로 인한 자연사로 추정되나 원인은 아직까지 불명이다. 다만 2000년도부터 급격히 불어난 체중으로 인해 사망한 것 아니냐는 추측도 적지 않다. 2010년도 라이브 영상만 봐도 노래 부를 때 숨이 차서 서브 보컬들이 급하게 매꿔주는 장면도 있다.

3. 평가

로이 뷰캐넌과 함께 기타가 운다는 표현이 가장 잘 맞는 기타리스트. 피킹 할 때마다 기타와 함께 호흡하는 듯한 표정과 몸짓 또한 인상적. 그뿐만 아니라 원래 헤비 메탈을 연주했던 사람인만큼 속주 실력 역시 매우 출중해[10] 감성적인 속주를 했던 매우 파격적인 인물이었다. 잉베이맘스틴이 최근에 업로드한 영상을 보면 깁슨으로도 무지막지하게 엄청난 속주를 보여준다. 연주 스타일에서는 게리무어가 독보적인 개성을 가진 기타리스트는 분명하지만, 속주에서는 잉베이맘스틴 정도에 비교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잉베이맘스틴이 자주 구사하는 이코노미 피킹이라던지 아르페지오 수준을 비교하면 게리무어는 다소 투박한 연주방식이다

특유의 한이 서린듯한 또는 기타가 통곡을 하는듯한 음의 표현력과 간결한 노트 진행에 밴딩 등의 기교로 입체감을 입히는데 있어서는 세계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는 평을 들었으며, 이미 트렌드에서는 멀어진 음악이지만 게리 무어 사후에도 그의 곡을 듣는 대중은 많을 정도로, 그의 음악에는 단순히 악보 위에 펼쳐진 노트 그 이상이 있다고 평가 받는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 리듬감도 엄청나다. 표현력이 뛰어난 만큼 당연히 루바토스러운 연주가 많을 것 같지만 실제 라이브 공연을 보면 그 어느 기타리스트보다 정확한 리듬감을 보여준다. 소위 끊어줄 땐 칼같이 끊고 끌어줄 땐 최대한 끌어주는 조화로움 속에 더더욱 그의 표현력이 돋보이는 것이다. [11]

물론 블루스 기타리스트로서는 어느정도 과장이 있기는 하다. 80년대 이후 당대의 블루스, 블루스 록 기타리스트라면 로이 뷰캐넌도 아직 건재하고 있었고, 역시 요절한 스티비 레이 본, 로리 갤러거, 자니 윈터 등등 블루스 씬에서 게리 무어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 인물은 많이 있다. 다만 그들보다 상업적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사랑받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성공에서 상당 부분은 블루스 그 자체로 성공한것이 아닌, 블루스를 팝 발라드화 시켜서 얻은 것이다. 그리고 원래 게리 무어는 하드 록헤비 메탈을 주로 하던 기타리스트였기 때문에[12], 원래부터도 정석적인 블루스를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실제로 대중적 인지도를 생각하며 블루스 올타임 평론들을 뒤져보면 전혀 그를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70년대에서 80년대 당시 대부분의 하드 록 기타리스트가 그러하였듯이 블루지한 연주를 하던 하드록 뮤지션이었으며 그 위에 자신만의 감정적인 프레이즈들로 특유의 애절함을 잘 녹여낸 기타리스트라 평가할 수 있겠다. 그의 본령은 블루스라기보다 어디까지나 하드 록이었으며, 블루지한 음악을 할 때조차도 헤비 메탈의 프레이즈와 별 차이 없는 연주를 했다. 그 외 재즈 뮤지션들과 많은 재즈록 음악 협연도 하였고 커리에 후반기에는 전자 음악까지 시도하는 등 여러 장르에서 다방면으로 활약하였다.

4. 그의 기타

Gibson에서 시그니처 기타가 출시되었을 정도로 레스폴을 애용했다. 스무살때 전설적인 깁슨 레스폴 '그리니'를 피터 그린에게 팔아달라고 졸라서 구입하고 사용했으며 그리니는 게리무어가 일생동안 가장 좋아했던 기타이다.[13] 그리니는 2004년 게리 무어의 손목 부상으로 취소된 몬스터즈 오브 락의 위약금을 물기 위해서 2004년에 매각 되었다가 10년간 유랑 신세 후 2014년 7월 메탈리카커크 해밋이 인수, 라이브 때마다 사용하고 있다. 2백만달러(한화약25억)에 팔려 가장 비싼 레스폴이 되었다!# 2023년 깁슨에서는 이 그리니의 복각 모델을 출시했다.[14]

그리고 72년도에 찍힌 사진속 게리 무어[15]는 그리니가 아닌 레스폴을 들고 있음에 미루어보아 10대 때부터 레스폴을 사용했었다는걸 알 수 있다. 그가 헤비메탈을 하던 시기에는 1961년Fender Stratocaster, Jackson 솔로이스트 또한 애용하였으며, 초기 유명 연주곡인 The Loner의 뮤직비디오를 보면 솔로이스트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외에도 Hamer 기타를 사용하였다.

5. 여담

  • 핀란드 국민밴드 나이트위시의 대표곡 중 하나인 Over the Hills and Far Away의 원곡자이기도 하다. 대부분 나이트 위시 버전을 먼저 접해서 잘 모르는 사실.
  • 이름 Gary는 개리도 아니고 게리도 아닌 어중간한 발음이고, 게어리 gέəri, gέəri 비슷하게 발음하기도 한다. 아일랜드, 영국인의 발음은 개리에 가까운데, 국내에서는 국어원 심의에 의해 게리로 쓰기로 되어 있어 원어 발음과는 조금 떨어져 있다. 이 국어 표기법 덕분에 배우 개리 쿠퍼도 게리 쿠퍼로 쓴다.
  •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상술했듯 KAL기 폭파사건을 비판하는 곡 'Murder In the Skies'를 발표했다. 그는 한국 언론과 이메일 인터뷰에서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부당한 공격에 대해 어떻게든 항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이번 공연을 계기로 한국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그리고 2010년 4월 30일 서울 올림픽 펜싱경기장에서 열린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내한 공연에서 “천안함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분들과 가족들에게 이 곡을 바친다”며 'Still Got the Blues'를 연주했다. 그는 이메일 인터뷰에서 "최근 한국에 충격적인 사고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젊은 군인들이 목숨을 잃다니 굉장히 불행한 일"이라며 "공연에서 이들을 위로하는 연주를 하고 싶다"고 밝혔다. # #
  • 얼굴 오른쪽 입주변에 깊은 상처가 있다. 1970년대 중반 여자친구와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남자 두명이 다가와 여자친구에게 수작을 부렸다. 그에 항의하는 무어에게 남자가 병을 깨서 얼굴을 그어 버린 것이다. 씬 리지의 동료이자 무어의 친구였던 에릭 벨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그것은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그 많은 억눌린 분노와 감정이 그의 플레이에서 나올 것입니다. (중략)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힘든 일일 것입니다."
    즉, 무어의 연주 스타일을 변화시킨 치명적인 사건이었다는 증언이다. 앨범 표지나 잡지 사진은 얼굴을 약간 돌려 흉터가 안보이게 찍거나 인터뷰에서도 카메라가 자신의 왼쪽을 찍도록 한 것을 볼 수 있다. 나이 들면서 차츰 영향에서 벗어나 신경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 많은 사람들이 그의 국적을 아일랜드로 착각하는데, 그가 태어난 북아일랜드 벨파스트는 독립국 아일랜드가 아니라 엄연히 영국이다. 그를 Irish라고 표현하는 것은 아일랜드 국민이라는 뜻이 아니라 아일랜드계의 문화적·민족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가 스페인의 한 호텔에서 숨졌을 때, 영국 외무부는 자국민의 사망 사실을 인지하고 영사조력을 제공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였다.# 그의 국적이 영국이라는 명백한 증거이다.[2] Parisienne Walkways만 들어봐도 기타음이 상당히 구슬프다. 마치 서럽게 우는 것 같은 소리가 난다.[3] 명실상부 그의 대표곡이자 최대 히트곡이며, 그의 사후 에릭 클랩튼, 폴 길버트를 비롯한 여러 기타리스트들이 커버하며 블루스계의 스탠다드 중 하나로 자리잡은 명곡이다.[4] 영문 위키백과에 나온 발음은 '필 라이넛'이라고 나와있으나, 정작 아래 동영상을 보면 본인은 필 리놋이라고 발음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왜인지 '필 리'이라고 잘못 알려졌다.[5] 이 시기에 콜로세움2에는 키보디스트 돈 에어리도 함께 있었고, Down To You라는 명곡을 만들어 내었다. 젊은 시절 게리 무어의 감칠맛 넘치는 연주력을 느낄 수 있는 필청곡이다.[6] 필 리놋은 1985년도에 약물 남용으로 사망하면서 둘이 같이 무대에 서는 일은 없어졌다.[7] 코지 파웰과 게리 무어가 참가한 돈 에어리의 솔로 프로젝트 앨범 K2에는 겐키 히토미가 보컬로 참여하기도 하였다.[8] 중간에 하울링을 이용한 피드백 주법이 들어가 있다. 무려 30초가 넘어가는데, 라이브에서는 더 늘리기도 한다. 그 덕에 난이도가 꽤 높은 곡 중에 하나다.(실은 장비도 좋아야 한다.) 우리나라에선 김태원이 콘서트에서 많이 보여준다.[9] 곡 구성과 기교에서 많은 유사성이 보이는, 79년 파리지앤의 워커웨이의 연장선상에 있는 축소 버전 같은 곡이라 할 수 있다.[10] 그 ~잉베이 말름스틴~과 비견되는 수준이다.잉베이맘스틴이 깁슨으로 연주한 영상을 보면 게리무어와 비견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게리무어 팬들의 일방적인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11] 다만 오히려 이런 연주 때문에 블루스 기타리스트로서는 더욱 저평가될수밖에 없다. 원래 블루지한 솔로란 어느 정도 리듬을 밀고 당기며 셔플을 타는 연주를 더욱 리드미컬하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블루스 연주를 배울 때 너나없이 배우게 되는 것이 '칼박'을 지양하라는 것이다[12] 그가 솔로 활동 초창기에 주로 사용했던 기타인 잭슨 솔로이스트를 만든 잭슨 기타가 바로 헤비 메탈을 대표하는 기타 브랜드이다.[13] 35년동안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14] 가격은 컬렉터스 에디션 5만 달러, 커스텀샵 에디션 2만 달러, 스탠다드 모델 3200달러.[15] 파일:external/www.trcjt.ca/gm72frnt.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