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슈타인호프 작가의 대체역사물 명군이 되어보세!의 등장인물이자 2부에서 주인공 이재석이 빙의한 인물. 진성대군과 거창부부인 신씨의 증손자로 1551년생이며 아들을 보지 못한 명종 이환의 양자로 입적되어 원 역사의 선조와 비슷하게 1567년 즉위한다. 빙의 시점은 즉위 15년째인 1582년.키가 작고 외모도 볼품없다고 묘사된다. 재석이 각각 1부, 3부, 4부에서 빙의하는 연산군 이융, 성친왕 이현, 황태손 이진이 작중 시대 기준으로 키도 크고 외모 하나는 준수한 것과는 반대.
2. 작중 행적
무종, 인종, 명종과 다르게 전형적인 성리학적인 조선 임금...인 정도가 아니라 이후 언급되는 행적들을 보면 전형적인 걸 넘어 그냥 무능하고 무식한 암군임이었음이 드러나고 있으며 무능한 암군이라는 것은 작가 공인이다. 원 역사의 성리학적인 조선에서도 뛰어난 명군들은 분명 존재했는데 당장, 한국사 최고의 명군인 세종대왕만 해도 유교 경전을 달달 외운 신하들을 경연에서 발라버렸을 정도로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였다. 현대에는 논란이 있지만 영조와 정조도 성리학에 정통하면서 정무 능력은 뛰어났다.재석은 경성군이 통치하는 채로 이후 한 대만 더 지났으면 무종 시절 자신이 해놓은 개혁이 다 사라지고 조선은 다시 유교가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후 전개를 보면 재석이 빙의하지 않은 상태로 경성군이 계속 왕위에 있었다면 조선의 유교 국가화 정도가 아니라 충분히 조선이라는 나라를 멸망시키고도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아버지인 경성군을 지켜봐 온 세자 이성도 인정한 것이다.
경인왜란 파트에서 당시 강릉부사가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지휘하는 왜군이 쳐들어오자 바로 항복한 뒤 우에스기가 떠나고 싶은 자는 떠나도 좋다고 하자 목민관의 직무를 방기하고 양반들과 함께 떠나버렸는데 싸움도 없이 항복한 것도 모자라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치기까지 한 죄로 참수당한 뒤 효수되었다. 이후 강항이 당시 상황을 회고하길 '변하기 전 주상'이었다면 오히려 도망친 강릉부사를 '적과 타협하지 않고 선비의 절개를 지켰다'며 포상했을 거라고 한다.
만약 재석이 빙의하지 않았더라면, 경성군은 군사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만큼 니탕개의 난과 무자호란으로 부여주와 연해주 통솔력을 잃어버리고 명나라에 반환해야 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조선의 대외 이미지는 추락할 수 밖에 없고, 유럽의 국가들도 조선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금위사도 축소된 형편이라 경성군을 비롯한 당대의 인물들 역시 일본의 침략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리고 작중 경인왜란은 조선이 원 역사의 임진왜란보다 피해를 덜 입으면서 명나라의 군비 지원 빼고 거의 자력으로 막아내 승리해서 그렇지 도요토미 히데요시보다 더 유능한 오다 노부나가가 일으킨 원 역사의 임진왜란보다 스케일이 더 큰 전쟁이었고, 승자인 재석 본인도 본인이 가진 미래 지식이 아니었다면 오다한테 절대 못 이겼다고 인정한 것을 감안하면 경성군의 조선은 일본의 침략에 원 역사의 임진왜란보다 훨씬 더 큰 피해를 입고 피로스의 승리를 거두거나, 아니면 정말로 멸망했을 수도 있다.
요약하면 그냥 성격 나쁘고 무능한 암군이다. 작중 밝혀진 무능한 면모와 악행들만 봐도,
- 무종 대에 얻은 영토의 개척과 관리 소홀.
- 예산 절감한답시고 돈이 들어가는 정책들은 죄다 취소, 축소. 국방도 소홀히 하여 대일, 대여진족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음.
- 그나마 남아있던 재정 관리도 소홀히 해 내수사 관리들의 횡령과 부패가 만연하게 만듦.
- 그렇게 돈을 아낀다면서 정작 여색은 밝혀 전국의 미녀들을 뽑는 일에는 돈을 쏟아붓고 그렇게 생긴 후궁과 자녀들에게는 가장 노릇 한 번도 안 함.
- 과도하게 권력에 집착하여 후계자인 세자까지 견제하고 의심함.
- 성리학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상공업을 억누르고 농업을 장려해 조선의 경제 발전을 강제로 틀어막음.
- 성리학밖에 모르는 골수 사림파들을 중용하여 가까이 하고, 서원 특혜와 같은 사림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 조선을 성리학이 지배하는 나라로 만들려고 함.
- 외국인 선교사들이 일본에게 무기를 팔았다는 이유로 입국을 막고 쇄국으로 일관.
- 소수민족인 백정들을 관노로 만들고 북방으로 강제 이주시키며 탄압.
- 임해군이 온갖 악행을 저지를 때 친한 종친이란 이유로 처벌하지 않고 묵인. 하성군도 주색잡기로 면박을 듣기는 했지만 하성군의 주색잡기는 조선 시대 종친들이 소소하게 사고 치는 수준이었지 처벌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 성리학 타령을 하면서 선대왕인 무종을 모욕하는 패륜 발언을 하는 위선적인 행보. 이 발언을 자기 측근들하고만 있는 사석에서 했으니 망정이지, 공론화되었다면 제대로 된 성리학자들이 볼 때 당장 끌어내려야 할 수준이었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무종의 증손자로 입적되어서 왕이 된 것이고, 무종 쪽의 종통을 계승했으니 경성군의 법적 조상은 진성대군이 아니라 무종이 된다. 당장 작중에서도 무종의 종통을 계승해서 왕이 되어 놓고 정작 선대의 유산만 누리려 하고 무종을 부정하는 미친 짓거리를 한다며 비판한다.
그나마 원 역사의 대표적인 폭군인 연산군과 비교하면 주도적으로 커다란 전횡과 패악질을 저질렀다거나 무익한 토목공사나 전쟁을 일으키는 짓을 하는 등의 폭정을 대놓고 하지는 않았지만, 15년 동안 재위하면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적폐들을 서서히 쌓아가며 조선을 내부에서부터 병들게 만들고 있었다는 점에서 연산군 못지않은 암군이다. 무엇보다 명군이 되어보세 세계관에서는 폭군 연산군은 존재하지 않고 상당한 업적이 있는 무종이라는 군주만 있으며 무종의 뒤를 이어 조선을 발전시킨 인종과 명종이 있다 보니 이쪽 세계관의 조선 왕 중에서는 최고의 암군 스타일이다.
원 역사의 선조와 비교해서도 여러모로 왕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이 뒤떨어져 재석이 빙의하지 않았으면 최악의 암군으로 기록되었을 인물이다. 그나마 경성군이 선조보다 나은 점은 세자를 포함한 자녀들이 정상인에 개념인들이란 점 정도인데, 이것도 다지의 외손녀인 중전을 비롯해 모친 쪽 혈통을 강하게 물려받은 덕이라고 작가가 밝힌 바 있다. 그리고 4부에서 경성군과 유사한 행적의 사덕제 완복시가 경성군과 비슷한 짓거리를 저질렀다가 재석이 가져온 변화로 인해 아주 1위 열강으로 성장한 대한에게 처절하게 응징을 당해 본인도 왕위에서 쫓겨나고 나라도 셋으로 쪼개지는 등 비참하게 몰락하면서 재석이 빙의하지 않은 경성군이 계속해서 다스린 조선이 어떻게 되었을지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재석이 빙의해준 덕에 후대에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왕으로 기억될 것이다. 새로운 학문과 기술을 받아들였고, 자국의 군사력을 당대 세계 최강급으로 끌어올려 국난을 극복하고 북로남왜라는 한반도의 고질적인 병폐를 뿌리 뽑음과 동시에 영토를 크게 넓혔고, 조선인들의 세계관을 확장하고 그동안 조선에 만연하던 중화사상을 깨뜨렸으며, 최후까지도 아픈 몸을 이끌고 몸소 한겨울 칼바람을 맞아가며 기우제를 지내 비를 내리게 하고 죽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후세에는 '광개토대왕, 세종대왕과 함께 한민족 3대 성군'으로 뽑힐 만한 업적을 남겼다.
첫 15년의 무능도 초장왕과 마찬가지로 '장조의 큰 그림'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다. 애시당초 묘호도 초장왕의 시호에서 따온 장조이며, 초장왕처럼 재위 초에는 암군의 면모를 보였다가 재위 중반에 완전히 각성해 위업을 쌓았기 때문이다. 장조의 위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기인 북방에서의 승리도 북방의 빠른 안정화를 위한 여진족 정리와 왕권 강화 및 군사력 강화와 총신의 승진을 위한 당위성을 획득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전쟁이 벌어지도록 계획했다고 여겨질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장조의 위업으로 조선은 북태평양을 통째로 차지한 대아주 최강의 열강 대한으로 등극하고 중국은 기존의 통일 제국으로서의 중화 개념이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일본은 장조 사망 이후 수백 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대한의 하위 파트너로 만족하고 대한과 적대할 생각은 꿈에도 꾸지 못 하게 되었으니 17세기 이후 대아주의 판도를 계획하고 실현시킨 지략가로 묘사될 가능성도 있다.
스페인과 비교해 설령 이웃 국가여도 전투력은 약간 떨어질지 몰라도 전쟁에선 이길 수 있고, 중국과 비교해서 정복은 무리일지라도 방어전은 충분히 해내고도 남는다고 자신할 만한 수준이다. 스페인과 비교하면 군재개혁된 조선 창병들의 숙련도가 원본인 스페인 테르시오에 밀리기는 하지만, 화력과 기병은 스페인보다 우월하므로 전반적으로는 오히려 우세하다고 할 수 있으며, 떨어지는 창병들의 능력도 말기에는 임꺽정의 검술에서 비롯된 신형 검술을 도입해 모든 병사들이 근접전에 돌입할 수 있게 만들어서 역전했다. 즉 명과 오스만이라는 대국들을 제외하면 당대에 군사적으로 열세에 처할 만한 나라가 없다.
재위 초기 15년간의 경성군과 그 이후의 성향, 개인적 품행 등이 너무나 다르기에 후대 역사학자들에게 미스터리로 남을 듯하다.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어 방향을 바꿨다거나 원래 이중인격자였다거나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듯. 3부에서 나오기로는 황실 내에서도 '무종대왕께서 장조대제에게 빙의했다.'라는 전설이 전해진다고 하니 주류 학계에서 인정받지는 못하겠지만 서프라이즈에 단골 소재로 무종 빙의설 같은 것이 자주 언급될 듯.
작중에서 하성군이 경성군의 정책을 좋게 생각했던 것을 보아 경성군이 적어도 평시에는 문제점이 크게 눈에 띄는 타입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만 이는 하성군이 기본적으로 정복, 패권주의보다 안정적인 민생과 평탄한 외교 관계를 중시하는 성향 때문이라 그렇게 평한 거지, 경성군이 지나치게 무능한 태도를 보였으면 아무리 무책임한 성격의 하성군이라도 비판했을 것이다. 그리고 본작의 하성군은 성종의 증손자라는 방계 종친으로 자라 원 역사와 사고방식이 다소 다른 것도 고려해야 하는데, 본작의 하성군은 왕이 안 되고 성종의 증손자라는 방계 종친으로 자랐기 때문에 주색잡기에 전념하며 대간들에게 탄핵당하던 전형적인 날라리 종친이었고[1] 어릴 때 경성군과 친형제처럼 자랐기 때문에 태도가 다른 걸 고려해야 한다.
3부 끝자락에서 천녀에 의해 밝혀지길, 원래 경성군의 영혼은 본래의 경성군이 저지른 악행과 적폐들이 표면상으로 드러나고 터지기 전 재석이 빙의하면서 그가 본격적으로 죄를 짓기도 전에 죽은 것이 되었다 보니 극락으로 보내졌다.
저승의 상황을 다룬 3부 외전에 묘사된 것을 보면 진짜 그의 영혼은 원래 아내였던 의인황후 김씨가 죽어 저승에서 만나자 처음에는 '이 노파는 누구냐?' 하고 짜증을 내고, 나중에는 '다른 남자랑 어울린 화냥년'이라고 욕설을 퍼붓는 등 저세상에 가서도 더러운 성격은 여전하다. 그러나 정작 본인도 무종(연산군)의 영혼과 마찬가지로 태조 이성계에게 '잡귀에게 몸 뺏기고 왕 노릇도 못한 한심한 놈'이라고 폭언과 구박을 듣고 신하, 가족, 조상에게 삼중으로 임금 대접을 못 받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이융과 달리 15년동안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해봤다는 하찮은 우월감을 느끼고 있으며, 몸을 뺏어간 재석에게 분노하면서도 장조의 이름으로 올라오는 공물은 또 잘 챙겨먹고 있다.
3. 기타
나이와 재위기간을 보면 알겠지만 원 역사 선조 포지션을 대신하고 있다. 본작에서는 원 역사 선조인 하성군이 방계 종친으로 존재하고 있는데, 하성군과 경성군은 설정상 5촌지간이다. 참고로 설정상 경성군은 하성군보다 1살 연상이며, 즉위년도 원 역사의 선조와 동일하다. 다만 본작의 경성군의 시호는 장조라서 선조의 묘호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진성대군(원 역사 중종)-창녕군-은성군-경성군
- 진성대군-덕흥군-하성군(원 역사 선조)
설정상 선대 임금이자 양부인 본작 명종과 7촌지간이다.
- 성종-무종(연산군)-인종(아들)-명종(아들)
- 성종-진성대군-창녕군-은성군-경성군
원 역사의 명종은 연산군의 동생 중종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중종의 서손자인 하성군이 선조가 되었지만, 본작의 명종은 연산군의 손자이기 때문에 1대의 항렬이 더 내려간 것이다. 이 때문에 덕흥군의 행실이 불량해도 애초에 하성군은 왕이 될 수 없었다. 설정상 경성군의 조부 창녕군은 진성대군이 원 역사의 단경왕후인 부부인 신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데, 덕흥군이 명종이 42세일 때 태어났음을 고려하면 덕흥군이 늦둥이라 이복형인 창녕군과 부자지간 수준으로 나이 차이가 났고, 그 때문에 덕흥군의 아들들이 창녕군의 손자인 경성군과 나이가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경성군의 나이는 덕흥군의 장남 하원군을 기준으로 해도 6살밖에 차이가 안 난다.
작중에서는 은성대원군이 경성군의 즉위 당시 이미 사망한 이후였다고 언급되는데, 재석이 임해군이 강간과 방화 범죄를 저질렀을 때 하성군을 일본으로 추방할 당시 '내 아들이 모두 죽는다 해도 임해군은 즉위 가능성이 없고 임해군의 동생이나 사촌들이 되겠지'고 평한 것과 창녕군과 은성대원군의 다른 아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보아 신씨-창녕군-은성군-경성군은 모두 독자였던 모양이다.
원 역사에서 왕의 7촌 조카가 입적되어 즉위한 사례는 없다. 명종-선조는 3촌지간이고, 헌종-철종은 7촌지간은 맞지만 철종이 7촌 당숙으로 오히려 항렬이 높았다. 사도세자의 양고손자(4대손)로 태어났던 고종도 철종의 양부 순조의 아버지 정조가 큰아버지인 효장세자의 양자였기 때문에 7촌이 아니라 9촌 조카의 신분이었고, 생물학적으로는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7대손이라서 17촌 조카였다.
특이하게도 선대인 명종이 아직 살아있을 때 경성군이 양자로 들어와서 세자로 입적되고 왕세자빈과 후궁들까지 입궁했다고 하는데, 조선 시대에 양자로 즉위한 인물 중 생전에 양자로 들어와서 세자 책봉까지 받은 인물은 없다. 이는 조선 시대 입양 제도의 특성상 나중에 친아들이 태어났다 분란을 일으키는 걸 막기 위해 선조처럼 생전에 지명은 해뒀지만 입적은 안 하거나, 철정과 고종처럼 당사자와 상관없이 주변인의 담합으로 즉위한 사례뿐이다. 아무래도 명종이 경성군을 택군했을 당시 명종의 몸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 아들을 새로 가지는 것을 완전히 포기했던 모양이다.[2]
독자들은 명군이 되어보세!가 원래 선조 대체역사물로 쓰려다 연산군 편을 프리퀄 비슷하게 1부로 쓰고 선조 재위기를 2부로 미룬 것으로 보는데, 이 과정에서 설정 변경으로 선조는 방계 종친 하성군으로 남고 선조의 하위호환급 캐릭터인 경성군을 창작한 것으로 본다. 재석은 조선의 암군에게 빙의해서 조선의 망국을 회피시키는 것으로 추측되는데, 선조가 임진왜란과 후계자 문제로 벌인 추태와 삽질과는 별개로 평시에는 명군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엄청 유능해서[3] 빙의시키기에는 애매한 캐릭터였음을 고려하면 이것도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 사실 조선 시대 종친들의 특성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날라리 짓을 하는 게 본인의 신변에 오히려 더 안전하다. 임해군처럼 도가 지나치면 당연히 처벌받지만.[2] 이와 비슷한 전개로 고종, 군밤의 왕의 철종과 고종이 있다. 철종도 1861년 자신이 중병에 들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자 흥선군과 손잡고 계해환국을 일으켜 장동 김씨의 절반을 숙청한 뒤(죽인 건 아니다) 흥선군의 아들 이재황(김귀남)을 양자로 입적한 뒤 세자로 책봉하고 몇 달 뒤 사망해 1863년에 고종이 즉위했는데, 원 역사와 달리 선왕의 생전에 후계자로 지명되어 세자위도 잠깐 올라본 경험 때문에 고종의 정통성이 원 역사보다 높았다.[3] 의외로 평시 업적만 따지면 조선 시대 모든 왕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의 능력자였다. 특유의 성격 문제가 위기 시에는 안 좋은 방향으로 발휘되어 난세에는 암군이 되어버리는 타입이라 문제지, 선조 재위기간이 내내 평화로웠으면 숙종, 영조처럼 성격 문제로 빈축만 사고 끝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