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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제(명군이 되어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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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군이 되어보세!
등장인물 (1부 · 2부 · 3부 · 4부 · 이재석 · 김상희)

조선 제21대 국왕
대한 제7대 태황
영종 원평제 | 英宗 元平帝
영종익문선무장의희경영철현효태황
英宗 翼文宣武莊義熙敬英哲顯孝太皇
출생 1763년
대한 황도 한성부
즉위 1782년
대한 황도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사망 1829년 음력 6월 2일
대한 황도 한성부 경복궁 강녕전
재위 대한 태황
1782년 ~ 1829년
(음력 1782년 ~ 음력 1829년)
연호 원평(元平)
황릉 양주 숭릉(崇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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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全州)
금(昑)
부모 부황 목종 영태제, 모후 남양 홍씨
부인 황후 파평 윤씨 }}}}}}}}}

1. 개요2. 작중 행적3. 평가4. 기타

1. 개요

영종 원평제 이금英宗 元平帝 李昑

명군이 되어보세! 4부의 등장인물.

재석의 4부 빙의체인 황태손 이진의 할아버지로, 목종 이선(李鍌)의 아들이자 광덕제의 아버지이다.

원 역사의 영조에서 모티브를 따온 인물로 묘호와 휘의 한자까지 동일하다. 그러나 나이는 1763년생이라 원 역사 정조(1752년생)보다 11살 연하, 문효세자(1782년생)보다 19살 연상으로 이들의 중간에 위치한다. 원 역사 영조와 나이가 비슷한 것은 3부의 등장인물인 사도태자 이은(李訢)으로 원 역사 경종보다 4살 연하, 영조보다 2살 연상이다.

2. 작중 행적

4부 시작 시점인 1823년의 대한 태황이자 재석의 할아버지. 1763년생.

적자 둘을 병으로 잃고, 유일하게 남은 적자인 태자 이순이 망나니라서 고심이 크지만 고조할아버지인 중종도 소싯적에 망나니였다가 개과천선한 전례 때문에 태자에게도 일말의 기대를 갖고 폐태자하지 않고 참고 있다.[1] 하지만 아내를 죽게 만들고도 반성의 기색조차 없는 태자에겐 희망이 없다 판단했는지, 사고로 어머니를 잃고 (재석이 빙의하면서) 성숙해진 것으로 보이는 태손에게 기대를 품는다.

원 역사의 이금처럼 매우 권위적이고 엄격한 성격이어서 자식, 손자들에게 사석에서도 폐하라고 부르게 하고, 그 망나니 태자조차도 사석에서도 꼬박꼬박 폐하라고 칭한다. 다만 재석이 빙의한 태손 이진의 경우 워낙 끔찍한 사고를 겪은 걸 감안했는지 할바마마라 부르는 걸 용인했는데, 책봉을 받은 후 폐하라고 부르자 좋아하는 티를 숨기지 않았다.

황제의 권위를 중시해 나폴레옹을 찬탈자에 참칭자라 비난했는데, 나폴레옹을 싫어해서 내린 평이지만 그가 전 유주를 적으로 싸우고 있으니 패망할 것이라고 본의 아닌 예언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나폴레옹이 유주무쌍이라 불리는 뛰어난 걸물이었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다고. 멕시코 제1제국, 그란 콜롬비아 합중국도 같은 이유로 승인하지 않았다. 이는 즉위 초인 1788년 부황의 후궁 귀비 오씨가 원평제를 독살하려는 음모를 벌인 무신지변을 겪은 영향도 있는 듯.

몰락한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로 도주해 누벨프랑스를 세우자 한동안 누벨프랑스 승인을 거부했지만, 그래도 완충국으로서의 누벨프랑스의 가치 때문에 묵시적으로는 누벨프랑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가 누벨프랑스가 대한에 대해 계속해서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결정적으로 프랑스 국왕 루이 19세가 자신을 무시하는 행태에 열받아서 프랑스를 엿 먹일 겸 말년에 태도를 바꿔 재석을 미주로 보내 정식으로 누벨프랑스를 승인했다.

네덜란드 본국이 프랑스에 점령당하자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대군을 파병하고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대가 없이 돌려주기까지 했다. 무작정 도리 때문만이 아니라 네덜란드령 동인도까지 차지하면 감당하기 어렵다는 실리적 판단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추정의 영역이라 이 행동에 대해서는 독자들 사이에서는 '동남아 전체를 대한의 세력권을 만들 절호의 기회였는데 그냥 호구 짓을 한 거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연재분에서 이와 관련된 전후 사정들이 좀 더 밝혀졌는데, 파병을 한 이유가 단순히 이념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나폴레옹 전쟁으로 영국과 네덜란드가 동인도와 남만해에 신경을 못 쓰는 바람에 일대가 해적으로 난장판이 되면서 역내 안정을 꾀해야 한다는 실리적인 이유가 있었고, 이때 대군을 동원하는 것을 보고 독립을 획책하던 번국 술루국이 뜻을 접었으며, 식민지를 돌려준 이후 네덜란드는 대한에 철저히 저자세를 취해서 계미남변 당시 대한에게 빌려주었던 실론의 탕갈라를 완전히 할양하고 술루국이 북보르네오 쪽으로 확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큰소리를 못 내는 등 실질적인 이득이 있었다.[2] 그리고 이 사실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면서 대한의 국제적인 신용도도 올라갔으니 남는 장사였다.

태자 외에 후궁 소생 아들 다섯(그중 둘은 요절), 서녀 셋을 두었다.

미식가 기질이 있어 신기하고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며 서양 딸기를 대한에 처음 도입했다고 한다.

건강 관리에도 신경을 많이 써 의학에도 관심이 많고 담배나 아편 등 건강에 해로운 것들을 몹시 싫어한다. 태조부터 흥선제까지 23명의 국왕 중 환갑을 넘겨 장수한 사람이 태조, 정종, 중종, 영종. 단 4명인데, 태조는 57세까진 고려의 신하였으며 7년 재위 후 강제로 왕위에서 내려오며 수명이 연장되었고, 정종은 겨우 2년만 하고 왕위에서 내려왔으며, 원래 친왕이었다 34세에 즉위한 중종은 3회차 회귀자였다.

즉 궁에서 태어나 태자로 교육 받고 죽을 때까지 보위를 지킨, 태자 시절부터 주어지는 어마어마한 공부량과 임금이 짊어져야 할 살인적인 격무를 전부 소화하며 환갑을 넘긴 건 영종이 유일하다. 다른 임금들은 도저히 한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격무 앞에 불혹 넘어가서부터 건강이 급격하게 상해 숙조, 목종처럼 40대에 죽거나 오래 버텨봐야 50대 후반이었다. 평생 술 한 잔 안 마신 현종도 50대 후반에 붕어했으니 66세에 붕어한 영종의 평소 관리가 얼마나 철저했는지 알 수 있다.

재위 중 장조 이래 200년 넘게 유지되었고 3부의 숙조 때도 폐지를 고려했었던 재한 네덜란드인들의 간택단자 제출 의무 예외를 폐지하고, 미주 백성들에게도 간택단자를 제출하게 해서 은근히 쌓인 불만을 해소해주는 뛰어난 정치력을 보였다.

신덕왕후정도전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도 했다고.

원 역사 영조처럼 압슬을 폐지하는 등, 전반적으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던 부분들을 원칙에 따라 처리하는 등 원 역사의 옹정제에 비견될 만한 통치를 했다.

태손이 미주에 간 동안 건강이 안 좋아져서 며칠이지만 태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며 쉬고, 식욕도 떨어져 평소 좋아하던 딸기와 수박도 한 조각 먹고 물린다. 이것도 내관이 조금이라도 드시라고 간청해 억지로 먹은 것.

그래도 대리청정을 하는 태자가 사고 안 치고 무난하게 정사를 돌보는 것에는 기뻐하며, 한편으로는 좋아하는 과일을 재배하는 토실에 석탄을 그만 떼고 광혜원으로 돌리라면서 삶을 정리하려는 모습이 마지막 등장이 되었고 결국 재석이 진주만에 있을 때 폐렴으로 붕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재석은 7년간 든든했던 할아버지의 죽음에 진심으로 슬퍼하며, 멕시코에서 시간을 지체하느라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서양에서는 원평제가 내린 외국 포경선 금지령에 반감을 품고 그를 '고래왕'이라는 별명으로 부른다고 한다.

3. 평가

원 역사 영조에서 모티브를 따왔지만 덜 극단적인 면모 덕분에 임오화변 꼴은 안 났기 때문에 인성 문제는 영조보다 덜하다. 이는 건흥제가 개과천선(?)한 전례가 있어서 기대를 한 것도 있고, 광덕제가 사도세자보다 선을 봐가면서 놀았던 데다, 광덕제가 사도세자와 달리 워낙 마이페이스 기질이 강해서 원평제가 뭐라 하든 개의치 않은 것도 있다.

다만 광덕제와 황태손 이진 모두 암군으로 성장했을 거라는 암시가 있어 후계자 교육은 마냥 좋게 볼 수 없다. 이진은 말할 것도 없고 광덕제도 정황상 빙의자로 추정되는데, 광덕제도 빙의 전부터 성격이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었다는 암시가 있기 때문이다. 천녀의 개입이 아니었으면 2대 연속 암군을 배출해 대한이 나락으로 떨어진 원인 제공자로 지명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4. 기타

나이는 원 역사 정조~순조 사이에 위치하고, 재위기간은 정조 중기~순조 재위기에 걸쳐있으며 목종이 사도세자와 동갑, 광덕제가 순조보다 5살 연하이기 때문에 시기만 따지면 정조 포지션에 제일 가깝다.

본작에서는 정원군이 태어나지 않아 정원군 이하 인물들은 모두 태어나지 않았지만, 굳이 따지면 정조의 21촌 조카가 된다. 원평제의 항렬이 더 낮은 이유는 원 역사에서 영조와 사도세자가 42세 차이로 현대 기준 조손뻘이지만 본작에서는 사도태자(영조 2살 연상)-현종(효장세자 2살 연상)-목종(사도세자 동갑)-원평제 순으로 1대가 더 벌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열조가 선조의 39살 아들로 조손뻘 차이가 아니었으면 1대 더 벌어질 수도 있었다.
  • 정조 : 중종-덕흥군-선조-정원군-인조-효종-현종-숙종-영조-사도세자-정조(10대손)
  • 광덕제 : 진성대군-창녕군-은성군-경성군-경종-선조-열조-중종-사도태자-현종-목종-원평제(11대손)


[1] 실제로는 성친왕에게 재석이 빙의해서 달라 보였던 거지만, 후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알 턱이 없으니...[2] 물론 술루국이 딴 생각을 품었던 건 알지도 못 했고, 탕갈라도 네덜란드가 알아서 넘겨준 거라 의도했다고는 할 수 없는 부분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