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군이 되어보세! |
등장인물 (1부 · 2부 · 3부 · 4부 · 이재석 · 김상희) |
1. 개요2. 대한(大韓)
2.1. 재석의 가족2.2. 황실2.3. 성친왕파2.4. 예왕파2.5. 조정
3. 청4. 후금5. 일본6. 유구7. 아모국8. 서9. 후송10. 안남11. 섬라12. 준가르13. 천축국14. 파사국15. 현돌궐16. 대유주2.5.1. 내각승상→국무총리대신 2.5.2. 좌, 우 승상 → 참정대신2.5.3. 6부 대신 → 12부 대신2.5.4. 금위사장2.5.5. 익문사장2.5.6. 외관(外官)2.5.7. 기타 관원
2.6. 군부2.7. 대한령 미주2.8. 종교인2.9. 기타2.10. 대한의 외번(外藩)1. 개요
슈타인호프 작가의 웹소설 명군이 되어보세! 3부의 등장인물들.실존 인물 | ★ |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한 가상인물 | |
2. 대한(大韓)
1, 2부에서 역사가 너무 많이 바뀌었기 때문인지 2부에 비해 대다수가 가상인물이 되었다.2.1. 재석의 가족
- 성친왕비 → 인선황후 강씨
성친왕 이현의 아내. 금천 강씨[1]인 호부대신 강기석의 딸. 이현이 견서사로 쫓겨나기 1달 전에 혼례를 치렀기 때문에 유럽에 온 뒤에 빙의한 재석은 당연히 본 적도 없다. 절망한 성친왕이 계속 술만 퍼먹는 바람에 관계도 갖지 못해 당연히 아이도 없다. 사실 혼사 자체도 호부대신 강기석이 건복제의 최측근이라 가능했던 것으로 어지간한 사람 같았으면 딸을 그런 망나니에게 시집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본래 건강한 규수였으나 마음고생이 심하다보니 병을 얻어, 시집 오기 전 즐기던 취미인 정원 가꾸기도 하지 못할 정도로 몸 상태가 악화된다. 재석이 성친왕에 빙의한 뒤 그동안 미안했다는 편지와 다이아몬드 목걸이[2] 선물을 보내자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잠시 회복했다가, 성친왕이 참전했다는 소식에 다시 병석에 누웠고, 결국 1685년 음력 3월 12일 성친왕이 큰 공을 세웠다는 소식을 듣기 한 시진 전에 사망한다. 모두가 그녀를 불쌍히 여겼고(예왕조차도), 재석은 부고를 듣고 내 잘못은 아니지만 안타깝다며 올렝카와 3달 간 관계를 갖지 않는 것으로 예를 표하며,[3] 후일 귀국한 후에는 1년에 4번씩 꼬박꼬박 강씨의 묘에 성묘하고 제사도 지낸다. 성친왕이 태황으로 즉위한 후 황후로 추존되고, 묘도 격에 맞게 능으로 격상된다. 시호는 인선(仁宣), 능호는 원릉(元陵). 4부에서 밝혀진 바로는 1809년에 재석이 선물한 목걸이를 노린 도굴 시도가 있었다고 해서 더 안쓰럽게 되었다.
저승의 상황을 다룬 외전에 따르면 진짜 성친왕의 영혼이 전혀 개과천선 안 한 것을 보고 크게 상심했다. 비슷한 처지인 문정왕후 신씨와 의인황후 김씨와도 어울리려 하지 않으며, 성친왕 이야기도 못 꺼내게 한다고 한다.
대한 추존 태황 원종 | 元宗 | |||
대한 중종의 황태자 사도태자 | 思悼太子 | |||
원종사도수덕돈경홍인신문환무장헌광효태황 元宗思悼綏德敦慶弘仁神文桓武莊獻廣孝太皇[A] |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묘호 | 원종(元宗) | ||
존호 | 사도수덕돈경홍인 (思悼綏德敦慶弘仁)[A] | ||
시호 | 신문환무장헌광효태황 (神文桓武莊獻廣孝太皇)[A] | ||
출생 | 1692년 12월 24일 (음력 11월 17일) | ||
대한 남미주 지선성 성친왕저(미주별궁) 안채 | |||
사망 | 1736년 5월 7일 (음력 3월 27일) | ||
대한 한성부 경희궁 동궁전 침실 | |||
능묘 | 의선원 → 경릉(懿善園 → 敬陵) 회심원 → 원릉(回深園 → 願陵)[7] | ||
절일 | □□절(□□節) | ||
재위 | 대한 황태자 | ||
1700년 ~ 1736년 5월 7일 (음력 1700년 ~ 1636년 3월 27일) | |||
대한 태황 대리청정 | |||
1710년,[8] 1711년[9], 1723년 등,[10] 1724년[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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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은(訢) | ||
전호 | 비현각(丕顯閣) | ||
부모 | 중종 건흥제, 인현황후 민씨 | ||
부인 | 인목태후 한씨, 숙녀 이씨 | ||
자녀 | 3남 5녀. 원강제 이영, 의현군주 이성연, 의진군주 이□□, 황손녀 이□□, 진왕 이원, 황손녀 이□□, 황손 이□, 의순공주[12] | }}}}}}}}} |
- 사도태자 → 원종 이은(李訢)
재석과 상희의 장남. 1692년 음력 11월 17일생. 올렝카는 아르장(argent, 銀)이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돌잡이에서 활과 법전을 잡았다. 재석과 상희는 이은이 태황이 될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현대인 부모다운 사랑으로 자유롭게 키웠기에 학문은 별로 가르치지 않았지만 순수한 성격이며, 동생들과 마찬가지로 현대 아이들이 하는 것처럼 부모를 엄마, 아빠라고 부른다. 카자크 6형제의 자식들과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내서 신분 차이에도 격식없는 친구 사이이다.
성친왕이 태제로 책봉된 후 태손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기관인 강서원이 설치되는데, 엄한 스승들에게 하루종일 힘든 교육을 받는데다 부모도 바빠져 같이 놀지 못하는 것을 고통스러워 한다. 재석은 다라미츠가 가르치는 시간에는 그나마 좀 놀 수 있게 해서 숨통을 틔워준다. 1700년 봄에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의젓한 청소년으로 자란다. 대한에 유학 온 표트르의 아들 알렉세이와는 서로 평대할 정도의 대등한 친구가 된다. 성품은 여전히 순수하고 활달해서 부황인 재석과 눈싸움을 하며 눈뭉치를 던지다 할머니인 진성태황태후에게 걸려서 혼나기도 한다.
친구 알렉세이가 사촌누나인 폐현주 이연수를 포기하지 못하고 재석이 제안한 루시아와의 혼인을 거절하자, '작은엄마' 올렝카의 호소를 받고 알렉세이를 설득, 루시아와 약혼하고 함께 러시아로 돌아가게 한다. 혼인도 하고 패기있는 젊은이로 잘 성장하고 있으며, 한강에 빠진 파포태를 직접 수영해서 구할 정도로 수영 실력도 늘었다. 독주를 과하게 즐기는 것이 유일한 단점이다. 부모의 걱정에도 술을 줄이지 않는데다 얼굴도 점점 검어진다 하여 요절할 복선을 깔았다.
1706년 15살 때 장녀를 낳아 아버지가 되었다. 어릴 때 부터 같이 놀던 카자크 자녀 소꿉친구들 중에서 이고르의 딸 안나(아냐)를 후궁으로 들인다. 부황처럼 종종 암행을 나가는데, 남장시킨 후궁 안나와 호위인 양소목을 항상 대동하며, 부황과 모후가 남몰래 서로 평대하는 것과 같이 암행을 나가서는 안나가 자신에게 말을 놓게 한다. 불량배에게 붙잡힌 혜련을 구해줘서 혜련의 짝사랑 대상이 되기도 한다.
모친인 상희가 유언으로 술을 끊으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술을 즐기더니만 결국 아직 40도 못 된 1730년에 이미 심한 간경화 증상을 보인다. 건강이 악화되자 술을 끊었지만 이미 늦었다고. 제위에 오르지 못하고 요절할 것이 거의 확실해졌고, 결국 1736년 1월 17일 태증손의 백일잔치를 마친 직후 토혈을 하기 시작하며[13] 병세가 말기로 치닫는다. 백성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좋은 태자였어서[14]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태자의 쾌유를 빌기까지 하고, 주변 우호국들은 물론이고 후송에서조차도 위문 편지와 약재 선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 시대 의료기술 수준으로는 이미 가망이 없는 상태였고 결국 두 달여만인 3월 27일 부황의 품에서 피를 토하며 사망한다. 시호는 원 역사의 사도세자와 한자까지 같은 시호를 받았다. 아들 이영이 즉위한 후 태황으로 추존되고 원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 태자비 → 인목태후 한씨
1691년생, 청주 한씨. 부친 한원은 예부대신을 지내고 중추원 지사 직에 있다. 재석이 일부러 명문가이지만 세력이 없는 가문 딸을 원해 간택했다. 첫 딸이 12살이 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고 있어 시아버지인 재석이가 염려했으나, 결국 막내로 아들을 낳는다. 건흥제와 태황태후 양씨가 세상을 떠난 후 황실의 가장 웃어른이 되어 인목태후라는 존호를 받는다. - 의현군주 → 의현장공주 이성연
양력 1706년 12월생. 태자의 장녀. 1720년 결혼했다. 동생과 같이 할머니가 연주하던 바이올린에 관심을 보인다. - 의진군주 → 의진장공주 이○○
1710년 생. 태자의 차녀. 1725년 안동 김씨 자손과 결혼했다. 언니와 같이 할머니가 연주하던 바이올린에 관심을 보인다. - 황손녀 이○○
1715년 생. 태자의 삼녀. 5살에 요절했다. - 숙녀 이씨
카자크 6형제 중 이고르의 딸. 본명은 안나지만 아냐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불린다. 이은보다 2살 연하인 1694년생. 어렸을 때부터 이은과 소꿉친구였는데 자라면서 점차 서로 남녀의 정으로 연모하게 된다. 원래 세묜과 혼담이 오갔으나, 이은이 재석의 허락을 받아내 태자 후궁인 숙녀로 봉해져 입궁한다. 이은이 암행 나갈 때 항상 데리고 가며 그때는 시부모처럼 남편과 평대한다. - 진왕(振王) 이원
양력 1713년 1월 8일(음력 1712년 12월 12일)생으로 미주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제위를 계승하면 군왕으로 승작될 것이다. 태자비가 아들을 낳지 못해 후계구도가 불안하고, 재석은 이원의 탄생을 기뻐하면서도 찜찜해한다. 원손 이영이 태어났기 때문에 황실 후계구도에서는 일단 밀려났고, 14살에 혼인한다. 동생 이영에게 위협이 되지 않기 위함인지 정치 쪽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고, 서학당 동물학부에 들어가 동물학자가 된다. 궁궐에서 키우는 애완치타를 좋아한다. 커다란 우두머리 치타를 안고서 얘기를 할 정도. - 황증손 → □□공 이전
1729년생. 진왕의 적장자이다. - 황증손녀 이○○
1730년생, 두 돌이 되기 직전 요절했다.
조선 제19대 국왕 | |||
대한 제5대 태황 현종 원강제 | 顯宗 元康帝 | |||
현종소휴연경돈덕수성순문숙무경인창효태황 顯宗昭休衍慶敦德綏成純文肅武敬仁彰孝太皇[15] | |||
출생 | 1717년 | ||
대한 한성부 경복궁 자선당 | |||
즉위 | 1740년 | ||
대한 황도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 |||
사망 | 1775년 5 (음력 ) | ||
대한 한성부 | |||
재위 | 대한 황태손 | ||
1736년 ~ 1740년 | |||
대한 태황 대리청정 | |||
1739년 ~ 1740년 | |||
대한 태황 | |||
1740년 3월 8일 ~ 1775년 (음력 1740년 2월 10일 ~ 음력 1775년) | |||
연호 | 원강(元康)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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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영(璟) | ||
부모 | 부황 사도태자 원종, 모후 인목태후 | ||
부인 | 황후 유씨 | }}}}}}}}} |
- 황태손 → 현종 원강제 이영
1717년 생, 태자와 태자비 한씨의 장남. 큰누나와 11살이 차이나는, 모두가 바라고 바라던 적장손이다. 4살 차이 서형에게도 살갑게 대한다. 할아버지 건흥제의 교육을 잘 받아 명군의 자질을 보인다. 황실에 손이 귀하다는 어른들의 의견에 따라 후궁을 둘 들였다. 1736년 모두가 바라고 바라던 적장자를 보았다. 사도태자의 사망 이후 건흥제의 후계자로 낙점받았다. 할아버지 건흥제가 영조, 아버지 이은이 사도세자를 모티브로 만든 인물임이 명확하니만큼 정조를 모티브로 한 인물.
사도태자의 장례가 끝나고 조금씩 나라일을 물려받으며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하다, 1739년부터는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외교에도 재능을 보였고 내정을 훌륭하게 해내는 모습을 보이며 차기 군주로서의 능력을 보였다. 1740년 3월 건흥제가 승하하자 태황으로 즉위하고 중종 묘호를 올리고, 아버지 사도태자에게도 원종이라는 묘호를 추존한다.
아버지가 과음으로 요절한 것 때문에 술을 싫어하다 못해 증오한다.[16] 제사 음복 같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일절 입에도 대지 않고, 그때도 입술만 축일 뿐 절대 한방울도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17] - 황태손빈 → 황후 유씨
외무대신을 지낸 유명홍의 손녀. - 황증손녀 → 황녀 이○○
1733년생. 사촌언니인 진왕의 딸이 2살 직전에 죽고, 정확히 한 달 후에 태어났다. - 황증손녀 → 황녀 이○○
1734년생. 경희궁 후원의 동궁에서 태어났다. - 황태증손 → 황태자 → 목종 영태제 이선(李鍌)
1735년 10월 9일경에 경희궁에서 태어났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한반도 최초의 황태증손이다.
- 정친왕 이권(李淃)
재석과 상희의 삼남. 양력 1700년 하반기 생.[18] 재석의 자식들 중 처음으로 대한에서 태어났다. 키도 매우 커서 관용구지만 구척장신이라고 나온다. 190cm는 되는 듯. 형들이 자리를 비웠을 때 대신 동생들의 군기를 잡으면서 은근히 야심을 보인다. 야심도 있고 사람들에게 훌륭한 군자의 모습으로 알려진데다 태자에게 적통 아들이 없는 점이 맞물려 예왕처럼 될 수 있다는 경계를 받기도 한다. 물론 예왕처럼 위선자는 아니고 심성은 선량하다.
1714년 혼인했지만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함께 지낸 혜련누님을 짝사랑한다. 정작 혜련은 태자를 짝사랑하고 있어 정친왕의 마음을 모른다. 재석이 루이 14세 조문 사절로 디에고를 보내려 하자 부황과 표트르 1세처럼 유럽에 가서 문물을 배워 형 이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자신을 부사로 보내달라 요청한다. 겸사겸사 혜련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시종으로 혜련을 데려가겠다고 하여 부모의 뒷목을 잡게 만들고 결국 유럽도 못가고 야단을 맞게 된다.
혜련이 세묜에게 시집가며 결국 이어지지 못하게 되자 크게 상심했지만 어찌어찌 마음을 정리하고, 이후 서학당에 틀어박혀 화학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그런데 그 틀어박힘의 정도가 좀 심해서 특별한 날이 아니면 부모형제들이 얼굴 보기도 힘들다고 한다. 바로 위의 형 이준이 행사 때 나오는 것도 혜련이가 보고싶어서 그러는 게 아닐까 하고 내심 생각하는 걸 보면 시간이 흐른 후에도 미련이 남은 듯 하다. 뇌홍을 합성하는 업적을 남기고 1761년 6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 정친왕비 유씨
1702년생. 문화 유씨로 유봉정의 조카이다. 혜련이게 마음이 끌린 남편이 유럽에 진위사로 가겠다고 하자 출산 직후임에도 고분고분 남편의 말을 듣고 허락해줬다. 재석과 상희가 며느리의 심정을 헤아려, 아이를 낳고 바로 유럽으로 가려는 아들을 꾸짖었다. - 함창공 이진
정친왕의 장남. 양력 1717년 5월 29일 생. 부친을 따라 화학 연구를 하나 독성 물질을 다룬 탓인지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고 한다. - 왕녀 이○○
정친왕의 장녀. 돌이 좀 지나서 사망한다. - 웅천공 이헌
정친왕의 차남. 1720년생. 부친과 형의 뒤를 이어 화학자가 되며, 부친이 합성한 뇌홍을 퍼커션 캡으로 실용화하는데 성공한다. - 창녕후 이준
정친왕의 서자. 1728년생.
선친왕이홍
재석과 상희의 사남. 양력 1702년 11월 8일 생. 이로써 상희는 적통 황자를 4명 이상 낳은 네 번째 중전이 되었다.[19] 1715년 혼인했다. 1721년까지 자식이 없어 형 이준에게 놀림을 받았으나 늦게 자식을 보았다. 그 후에는 한동안 여색에 빠져 파락호처럼 굴더니, 현자타임이 왔는지 시니컬한 성격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정도가 지나쳐 친형인 이준에게도 불손하게 굴고, '현재' 데리고 있는 첩만 6명[20]이고 친형이 죽었는데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기생집에 틀어박히는 등, 재석이가 파락호같은 놈이라며 손자인 진왕이 선친왕처럼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독백을 할 정도로 개인적으로 가장 못마땅해하는 아들로 보인다. 어지간히도 문란하고 한량처럼 지낸데다 성격도 좋지 않은 듯. 독자들은 원래 망나니 성친왕의 DNA가 발현된 것으로 생각한다.
결국 1737년 동짓날 황실 잔치 자리에서 부황 재석이에게 대놓고 나한테 물려준 재산보다 연주와 예카테리나에게 준 재산이 몇배이다. 친아들이면서 얼굴 한번 못본 외손녀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 나같은 놈이 동지 팥죽은 먹어서 뭐 하겠냐고 소리지르며 술상을 엎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 잔치 분위기를 개판으로 망쳐놓는 큰 패악질을 부린다. 목격한 황족, 궁인, 내관들 등의 입을 통해 이것이 전국에 알려지고 조정과 사림에서 처벌하라는 상소가 빗발치자, 결국 부황에 의해 일시적으로 폐서인 당하고 울릉도 유배를 당하게 된다. 유배를 가서도 오만한 태도는 여전한데다 울릉도 선비들은 다 스스로 일을 해 생활하니 나도 그럼 부황의 뜻을 따라 포경선에 타겠다며 어깃장을 부린다. 1740년 경신년이 되자 부황은 이제 그만 용서하고 유배를 풀어주려고 결심했지만, 울릉도 주민들이 영물이라 부르는 거대한 하얀 향유고래를 잡아서 업적으로 삼겠다고 고집하며 바다로 나갔다가 실종되어버린다. 이 소식을 듣고 부황 건흥제가 충격받아 쓰러졌고 결국 그대로 승하하고 만다.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고, 나무판자에 의지해서 표류하다가 연해주 바닷가 우대개 토인 마을에 도착한다. 너무 깡촌이라 한어가 통하는 사람이 없어 정체를 밝히지 못하다가 반년만에야 자신의 실종 때문에 부황이 죽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고, 이제 신분을 밝히고 돌아가봤자 죽은 목숨이라 생각하여 기억을 잃은 척 행세하고 '이씨'라는 이름으로 토인 마을에 눌러앉는다. 오히려 아무도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토인 마을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었고 현지인과 가정을 꾸려 자식 두 명도 봤으며 만족하고 살아가는데 그러던 지 7년째 되던 해, 여행 중 이 마을에 우연히 들렀던 형 이준에게 발각된다.[21] 분노한 이준이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패고 한쪽 귀까지 잘랐으나 우대개인 아내가 발목을 잡고 싹싹 비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약해져 죽이거나 한양으로 끌고가지는 않아서 목숨만은 건진다.[22] 2부의 원균처럼, 자신의 잘못으로 모든 부귀와 권세를 잃었지만 비천한 신세로 살아남을 수는 있게 된다. 4부에서 재석이 이 사건에 대해 조사한 뒤 선원들의 시신만 일부 발견되고 이홍은 끝내 그대로 실종되었다는 기록을 발견한 것을 보면 이준은 이 재회에 대한 이야기를 무덤까지 가져간 듯. 토인 마을 생활에 만족하고 살면서 정신적 성장을 이루는 듯 했으나, 마지막까지 변명만 늘어놓다가 자기 아내까지 방패로 써먹으면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좋아하는 극한의 찌질함을 보여줘서 독자들을 감탄하게 했다. 죽은 후에도 저지른 짓이 있으니[23] 지옥행일 가능성이 높고, 세조처럼 형을 필두로 형제들과 조상들에게 끝없이 갈굼받을 것이다.- 선친왕비 박씨
순천 박씨. 이홍과 동갑. 남편 때문에 속을 끓이고 산다. 동지 잔치에서 남편이 사고친 뒤 시아버지에게 울면서 빈다. - 왕녀 이광
선친왕의 장녀. - 왕자 이경
선친왕의 적자. 1728년 생. - 종성후 이적
선친왕의 서장자. 1722년 생. 대는 적자인 이경이 잇지만, 이홍이 유배간 시점에선 이경이 아직 어려서 6살 위인 이적이 집안을 대표하고 있다. 1740년 3월 8일 건흥제가 이홍의 사면에 대해 이야기하러 불러들여 독대하던 중 하필이면 이홍의 실종 소식이 전해져서 종성후 이적이 보는 앞에서 건흥제가 중풍으로 쓰러져 잠시 후 사망해버린다. 사실 이적이 직접 잘못한 것은 없으나 자기 아버지가 원인을 제공한데다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덤터기를 쓰고 분노한 사촌형 이영에게 따귀까지 맞는다. 안 그래도 선친왕의 자식들은 아버지의 행실 때문에 본인들은 행동을 조심하다못해 눈치보며 기죽어 지냈다고 하는데, 이 사건으로 평생 쥐죽은 듯 조용히 살다가 갔다고 한다. 심지어 몇 세대가 지나도록 자손 대대로 괄시당한다고 한다. - 우대개 토인 출신 아내
우대개 토인 마을에 눌러앉은지 4년째에 새로 얻은 아내. 이홍보다는 대강 20살쯤 어리다. 미색과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토인 여성이지만 이홍이 나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낀 듯. 목숨걸고 이홍을 지키려는 모습에 이준의 마음이 약해져서 남편의 목숨은 살렸다.[24] - 우대개 토인 출신 아내와 낳은 자식들
1747년 이홍이 이준에게 발각되었을 때 큰아이는 약 3세, 작은아이는 갓난아이였다.
- 의명공주 → 의명대장공주 이연주
재석과 상희의 장녀. 양력 1704년 5월 5일 생. 막내에 고명딸이라 재석과 상희가 귀하게 길러 철부지다. 오빠들과는 현대의 현실남매처럼 서로 놀리며 노는 사이. 어렸을 때는 얼핏 보면 혜련이를 거의 몸종 취급 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나, 모후가 친동기처럼 대하라고 하기도 했고 어릴 때 부터 정이 많이 들어 정말 친언니처럼 편히 대하는 것 뿐으로, 혼인하면서도 데려가려 했지만 상희와 재석이 막는다. 모후 상희가 바이올린을 같이 배우자고 하자 악기 연주는 천한 기녀들이나 하는 거 아니냐고 거절하고,[25] 서녀인 이복언니들 루시아와 율리아도 태자비, 친왕비가 되었는데, 적녀인 자신의 자손들이 그 밑으로 떨어질 수는 없다며 최소한 불랑국이나 천축국으로 시집가야 된다고 조르기도 한다.[26]
그러나 이번 생의 딸은 꼭 곁에 두고 살겠다는 상희의 고집, 재석에게 들은 타국 황실의 막장 속사정 등 부모의 반대를 못 이기고 박문수와 혼인한다. 막상 혼례 때 박문수를 보자 그에게 첫눈에 반하고,밤일에 한번 더 반해서부모인 재석과 상희가 신기하게 여길 정도로 남편에게 껌뻑 죽는 남편바보가 되어 잘 살게 된다. 고령위와의 슬하에 3남 2녀를 둔다.
표트르를 조문하기 위해 남편 고령위가 진위사 정사로 러시아로 떠나자, 부황과 이형준처럼 유럽에서 첩과 사생아를 데려오지 못하게 감시하려는 목적으로 남편을 따라나선다. 여행 중에 아이도 하나 더 만들고, 역시 대한만한 곳은 없다는 것을 느끼며 귀국한다. 귀국 후에 남편이 또 서나라 내란에 휘말려 귀국이 늦어지자 매일 제물포항에 가서 남편을 기다리느라 한양에서 제물포를 오가는 기차칸 한칸을 전세내게 되어 시보에 이를 비판하는 기사가 날 정도의 남편바보이다. 하지만 어머니 인현황후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불교를 믿으면서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해 말년의 부황 건흥제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는 효녀가 된다. 1768년 향년 64세로 사망한다. - 고령위/보스토크 백작 박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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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의 임꺽정, 서림처럼 실제 역사보다 늦은 1701년에 태어났다. 부친은 평생 산림으로 지냈으나 백부 박태한이 학무대신, 국자감 대사성을 지냈다. 원 역사처럼 용모와 지혜가 뛰어나밤일도 출중해아내인 공주를 완전히 사로잡는다. 원역사와는 달리 문음으로 강무관에 들어가 무인의 길을 걷는다. 동서인 부수를 지원하는 임무를 받아 백위영을 거느리고 우선 이르쿠츠크에 있는 알렉세이를 만나 부수를 지원하는 동맹을 맺어 파포태의 반군을 격멸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다. 러시아의 표트르 1세도 알렉세이의 보고를 받고 박문수에게 '보스토크 백작' 작위와 상금을 내린다.[27] 이후 표트르를 조문하는 진위사가 되어 다시 러시아를 다녀온다. 사절로 갈 때마다 해당국 왕실에 국상(國喪)이 터져 저승사자라는 뒷담화가 돌자 이에 부담을 느끼고 서나라 승평제의 조문 사절을 자원해 갔으나 이번엔 서나라 흥시제와 광동왕 사이의 다툼에 이용당하여 국상 정도가 아니라 내란의 불씨가 되고 만다. 이인좌의 희생으로 광동을 탈출하고, 권훤이 이끌고 온 대한 원정군에 합류하여 큰 무공을 세운다. 서나라 원정 후에는 육군 참장으로 군을 떠나 감찰원 어사대장으로 금융범죄자들을 잡아들이고 있다. 4년 뒤 토포사로 임명되어 장길산 토벌에 성공하고 돌아온다. 건흥제 사후 육군제조를 역임하고, 1766년 향년 65세로 사망한다. - 박순규
의명공주의 장남. 1719년생. 성인이 된 후 아버지가 장길산 토벌에 나갈 때 종사관으로 동행하여 큰 공을 세운다. - 박지연
의명공주의 장녀. 1720년생. 15세에 혼인했다. - 박형규
의명공주의 차남. 1723년생. - 박유연
의명공주의 차녀. 1727년생. 루스에서 태어난다. - 박종규
의명공주의 삼남. 1729년생. 장래 희망이 축구선수여서 엄마의 뒷목을 잡게 만든다.
건흥제의 후궁 황귀비 소씨 | 皇貴妃 蘇氏 | ||
비호 | 황귀비(皇貴妃) | |
휘 | 올렝카 | |
출생 | 1666년 7월 13일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 비텝스크 | |
사망 | 1721년 12월 18일(건흥 22년)(향년 55세) 대한 한성부 경복궁 연수당 천행수(독감)로 인한 사망 | |
재위 | 비 | 1700년 ~ 1721년 |
매장지 | 대한 한성부 마포성당 | |
부모 | 얀 3세 소비에스키, 헬레나 질린스카 | |
부군 | 건흥제 이현 | |
자녀 | 장녀 수빈공주 이명주(차리차 루시아 표도로브나 로마노바) 차녀 수명공주 이향주(율리아) |
- 유주부인 → 순비 → 귀비 → 황귀비 소씨(遺洲夫人→ 順妃 → 貴妃 → 皇貴妃 蘇氏, 올렝카)
폴수국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사생아. 외가는 벨라루스 비텝스크의 하급 귀족인 질린스키 가문이다. 작가에 의하면 외모의 모델은 마리나 본다르코로 금발벽안의 굉장한 미인이며 키도 어지간한 남자들보다 크다. 재석 각성 전날 성친왕이 꼬셔서 관계를 가진 상태였고,[28] 재석도 외모와 성격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 성친왕이 그저 노리개로 삼으려 했던 그녀를 무책임하게 버릴 수 없다는 책임감에 그대로 데리고 다니게 된다. 이후 잠시 헤어졌다가 재석이 폴수국에서 마상창시합을 승리하고 빈 전투에서 무공을 세우자 얀 3세 소비에스키에게 올렝카와의 관계를 인정받는다. 미주 이주 후 대한 조정에서도 공식적으로 성친왕의 측실로 인정하여 '유주부인 소씨(遺洲夫人 蘇氏)'라는 작위를 받는다. 후에 성친왕비로 등장한 상희와도 친해지고 재석과 상희의 아이들도 자기 아이처럼 잘 돌봐준다. 잔병치레도 잦았고, 재석과 10년 이상 같이 살았는데도 아이 소식이 없어 불임체질이 아닌가 추정되었으나, 실은 난임체질이었고 미주에 있을 때 상희가 구해다 준 약을 복용한 끝에 마침내 임신하여 딸 루시아(명주)를 낳는다.
대한에서는 올렝카를 만난 직후 성친왕이 개과천선했기에 올렝카 덕분에 성친왕이 변했다고 생각하여 좋게 평하고 있다. 또한 올렝카의 외모가 뛰어나고 성친왕과 만나게 되는 과정이 전형적인 로맨스 판타지 플롯과 같기에 본국에서 올렝카를 소재로 하는 로망스와 야설도 많이 나온다. 재석이 태황으로 즉위한 후 순비(順妃)가 된다. 유럽에 있었다면 상상도 못할 지위에 오른 것에 행복해하며, 2부에서 상희를 괴롭혔던 후궁은 자식에게 엄마라고 불릴 수 없다는 법도는 대한에서 알아듣는 사람이 거의 없을 폴란드어로 루시아에게 '마트카'(엄마) 소리를 듣는 것으로 해결하기 때문에 올렝카에게는 아무 영향이 없다. 이후 둘째딸 율리아(향주)를 낳는다. 궁 내에선 한복이 아닌 유럽식 드레스를 입고 다닌다. 올렝카의 두 딸들이 올렝카를 마트카라고 부르던 것은 올렝카 사후에도 궁중 용어로 정착되어, '후궁 소생의 황자녀가 생모를 부르는 말'이 된다.
순수하기만 한 성격처럼 보였으나, 폴란드 왕실 내에서 사생아라는 이유로 천대를 받아와 한이 많이 맺혀있는 상태여서 자기 딸 루시아를 알렉세이와 결혼시켜 미래의 러시아 차리나로 만들려는 야심을 보이고, 재석과 상희, 이은을 집요하게 졸라 루시아와 알렉세이의 혼인을 성사시킨다. 그 후 둘째 율리아도 후금으로 시집보내려 했는데, 처음에는 이미 정혼자가 있는 대패륵 파포태와 혼인을 재석에게 조르다가 상희가 동서양의 문화차이를 들어 잘 설득해서 율리아는 파포태의 동생 부수에게 시집보낸다. 그 후에도 대한, 청, 후금 3국의 공동 세습친왕가인 심왕에도 자기 사위 후금 황자 부수를 앉혀달라고 재석에게 베갯머리 송사를 하다가 거절당하고, 가뭄 때문에 율리아와 부수의 혼례를 간소하게 치르기로 하자 서운하게 생각하는 등 동양 사고방식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다. 50대에 접어들면서는 소외되는 후금 공주 출신인 이준의 후궁 정빈을 나름 챙겨준다.
이렇게 자식들을 먼 외국으로 보내면서까지 외국 왕실에 자신의 혈통을 뿌리려는 야심때문에 평이 애매했었으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시집 보낸 두 딸 모두 시댁에서 성공적으로 적응하고 반대로 상희와 연주의 문제가 터지면서 재평가를 받았다. 말년에는 건강이 나빠져 바깥 출입을 자제하고 칩거하다 만 55세 때인 1721년 겨울 독감에 걸려서 처소인 연수당(戀秀堂)에서 훙서한다.[29] 사후 알렉세이에게 시집갔던 장녀 루시아가 러시아 황후가 되었고, 부수에게 시집을 갔으나 황후 자리와는 멀어보였던 차녀 율리아도 남편 부수가 파포태와의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대칸 자리에 오름에 따라 율리아도 대복진이 되면서 두 딸을 황후로 만들어주고 싶다는 소원을 죽은 뒤에나마 이루었다. 또한 루시아의 딸인 외손녀 카타지나(예카테리나)는 폴란드 왕비가 되었고, 4부 시점에서는 외손자 표트르의 후손인 로마노프 황가가 폴란드 왕위를 차지하면서 폴란드 왕실에 그녀의 피가 흐르게 되었다. 1729년 비에서 귀비로 추존되었고 4부 시점에서 황귀비 소씨로 언급된 걸로 보아 훗날 추존 작호가 다시 승작된 걸로 보이며, 러시아에서도 추존되어 더 이상 한낱 사생아가 아닌 정식 폴란드 공주로 인정받는다.[30]
1~4부 전체를 통틀어 손꼽히게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인물로, 폴란드 국왕의 딸이지만 사생아로 태어나 천대를 받고 살다 세상 반대편에서 건너온 왕자와 희대의 로맨스를 찍었고, 그 왕자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측실이나마) 황제의 부인이 되었으며, 두 딸을 황후의 자리에 올리고 마지막에는 끝내 자신을 천대했던 조국의 왕 자리에 자신의 후손을 앉히는 복수극을 완성했다. 사망한 지 100년 가까이 지난 4부 시점에서도 그녀의 영향력은 짙게 남아 안토니오 비발디가 창작한 기사왕과 올렝카의 로맨스를 소재로 한 오페라[31]가 인기를 끌면서 대한 황실이 기사왕과 올렝카의 직계후손이라는 오해가 유럽에 널리 퍼지기도 했으며, 누벨프랑스로 망명한 얀 헨리크 돔브로프스키가 기사왕과 올렝카의 인연을 예시로 들어 누벨프랑스를 방문한 황태손 이진(4부 재석)에게 폴란드 독립운동 지원을 요청하기도 한다.[32] 독자들에게는 1부의 다지, 2부의 중전 등과 함께 평가가 좋은 히로인에 속하며, 대역갤 등지에서는 명군 세계관의 월트 디즈니 컴퍼니 작품 단골 주인공일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 플롯을 조금 가다듬기만 하면 훌륭한 디즈니 프린세스 클리셰가 되고 성친왕도 마찬가지인데다 주변 등장인물들도 비슷한 캐릭터성이 있기에 나오는 언급.
3부가 완결된지 한참 지나 2024년에 고향인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배경으로 실존한다면 올렝카의 이복언니가 되는 엘주비에타 공주를 주인공으로 한 다른 대체역사 소설인 폴란드 여왕 키우기가 연재되면서 재평가를 받게 되었는데, 파면 팔수록 시궁창스러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현실[33]이 알려지면서 반란이 합법일 정도로 왕권이 개판인 유사국가에서 자라 전제군주제 국가인 대한으로 시집와 중앙집권 맛을 보았음에도 딸 관련 행보만 빼면 정말 얌전하고 착하게 지냈다고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
- 정빈 → 정비 김씨
진성태황태후가 간택해온 후궁. 1685년생. 경주 김씨. 조부는 대제학, 부친은 이부대신을 지냈다. 얌전하고 소극적인 성격. 어릴 적 많은 동년배 소녀들처럼 로망스 소설로 성친왕의 이야기를 접한 후 계속 환상을 품고 살아왔고 운이 좋게도 그 꿈을 이루었다. 아들은 못 낳았지만 성공한 덕후. 입궁하면서도 애장품인 소설들을 잔뜩 챙겨왔으며 나중엔 의붓딸 의명공주에게 그 책들을 빌려줬다고 한다. 인현황후 사후에 1726년 빈에서 비로 승작한다. - 의선옹주 이희주[34]
재석과 정빈 김씨의 장녀. 양력 1703년 8월생. 1716년 파평위 윤성일과 혼인해서 슬하에 2남을 두나 차남은 출생 직후 사망한다.
- 희빈 → 희비 박씨
진성태황태후가 간택해온 후궁. 1685년생. 밀양 박씨. 조부는 우참찬, 부친은 경남감사를 지냈다. 활달하고 붙임성이 좋아서 상희에게도 친근하게 굴고 의료봉사에도 따라가서 조수 노릇을 하는 등 상희에게 잘 보이고 있다. 인현황후 사후에 1726년 빈에서 비로 승작한다. 45세에 사망한다. - 회왕 이계
재석과 희빈 박씨의 장남. 양력 1703년 2월생. 1716년 여산 송씨 소생과 혼인했으며 측실 1명을 두고 있다. 적자인 외아들이 세살에 사망하며 정실 소생 1남1녀만을 두고 있다. 1748년 45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한다. - 군위공 이성윤
회왕의 적자. - 이재연
회왕의 적녀.
- 숙빈 → 숙비 → 귀비 홍씨
진성태황태후가 간택해온 후궁. 1685년생. 남양 홍씨. 홍가신[35]의 고손녀이며 부친과 조부는 관직은 없으나 이름 높은 재야 학자로 성리학 뿐 아니라 양명학, 수학, 서학에 능통하다. 학자 집안 출신답게 박식하고 토론도 잘 한다. 재석도 말이 잘 통한다는 이유로 세 후궁들 중 가장 총애하며, 그 덕인지 세 후궁들 중 처음으로 임신했다. 1714년 둘째아들을 잃었지만 자신은 기왕이 있으니 괜찮다며 애써 슬픔을 누르고 웃었다. 인현황후 사후에 1726년 빈에서 비로 승작한다. 재석의 말년에는 사실상 중전 역할을 하여 귀비로 승작되었다. - 기왕 이활
재석과 숙빈 홍씨의 장남. 양력 1702년 12월 11일 생. 1715년 경주 최씨인 아내와 혼인해 슬하에 1녀를 둔다. 1760년 향년 60세로 사망한다. - 기왕비 최씨
경주 최씨. 슬하에 1녀를 둔다. - 왕녀 이○○
기왕의 장녀. 자라면 현주로 책봉될 것이다. - 황자 이전(李栴)
재석과 숙빈 홍씨의 차남. 양력 1709년 5월 생, 1714년 홍역으로 요절한다.
- 혜련 → 민혜련
1698년 양력 11월 22일 이전 출생. 갓난쟁이 때 한양대화재 때 재석이 진화작업을 하다가 폐허에서 구해냈다. 부모가 아이를 안고 사망하면서 열기를 막아서 생존할 수 있었고, 재석은 건복제와 상희의 허락을 구해 키우기로 한다. 상희는 지난 생에 멀리 떠나보낸 두 딸로 인한 상처 때문에 혜련을 수양딸 삼아 키우며 아끼고, 루시아도 혜련을 친동생처럼 아낀다. 재석이 태황이 되어버려서 결국 4세에 애기나인이 되어 인생을 자기가 제약해버린 셈이 되었고, 신분의 선이 그어져서 안타깝게 여긴다. 12세가 되어서는 상희의 막내딸 연주를 돌보는 보모 역할을 하고 있다.
상희와 재석은 친자식들과 남매같이 자라길 바랐지만 혜련은 철든 후부터 재석 가족들과의 신분의 벽을 느끼며 이 가족 속에 내 자리는 원래 없었다는 생각만 깊어지고 마음아파한다.
의명공주는 시집가며 정든 혜련을 데려가려 하나 재석은 공주의 성격 상 미모의 혜련이 집에 있으면 부마와 혜련 사이를 의심할 것이 뻔하다는 이유로, 상희는 혜련에게 자기 인생을 찾아주려는 이유로 못 데려가게 하고, 의학교에 들어가 여의사가 되길 권한다. 그러나 자신을 진심으로 위해서 상희가 제안한 의학교 입학도 출궁하면 태자를 영영 보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가슴앓이를 한다.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고 의학교에 들어가 여의사가 되고, 궁에서 올렝카의 주치의가 된다.
출궁하면서 상희 친정오빠 민지원에게 입양되어 민씨 성을 쓰고, 의학교 등하교길을 경호했던 세묜과 자연스레 가까워지더니 1721년 세묜과 결혼한다. 이후 의명공주를 수행하여 러시아를 방문한다. 러시아를 다녀온 후에도 황실 주치의로 일하며, 상희와 은이, 건흥제의 임종을 지켜보게 된다. 4부에서 언급되기로는 63세가 되어 은퇴할 때까지 광혜원에서 의사로 일했으며, 광혜원 서열 3위인 종3품 부정까지 올랐다고 한다.[36]
2.2. 황실
2.2.1. 숙조계
조선 제19대 왕비 | |||
대한 제3대 황후 □□皇后 □□황후 | |||
존호 | 진성□□(□□□□) | ||
시호 | □□(□□) | ||
출생 | 1636년(선조 10년, 건원 5년) | ||
대한 충청남도 아산군 일동면 삼거리[37] | |||
사망 | 1708년 12월 24일 (음력 11월 17일) | ||
대한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 | |||
능묘 | 정릉(□陵) | ||
절일 | □□절(□□節) | ||
재위 | 대한 황태자비 | ||
?? ~ 1650년 | |||
대한 황후 | |||
1650년 ~ 1678년 | |||
대한 황태후 | |||
1678년 ~ 1699년 3월 27일 (음력 1678년 ~ 1699년 2월 26일) | |||
대한 태황태후 | |||
1699년 3월 27일 ~ 1708년 12월 24일 (음력 1699년 2월 26일 ~ 1708년 11월 17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3px" | 본관 | 덕수(德水) | |
부모 | □□후 이□□, □□후부인 □씨 | ||
부군 | 열조 연가제 | ||
자녀 | 4남 3녀 | }}}}}}}}} |
- 진성황태후 → 진성태황태후 이씨
열조의 황후이자 건복제와 성친왕의 모후.[38] 이순신의 장남 이회의 손녀. 1636년생. 막내 성친왕을 귀여워하며 오냐오냐 키웠는데, 정도가 너무 지나쳐 성친왕이 양녕대군 수준의 패악을 부리는 데다 성친왕과 반대로 엄하게 자란 건복제에게 성친왕이 밉보여서 결과적으로 성친왕이 견서사로 국외추방당하는 원인을 간접적으로 제공한다.[39]
재석이 동변관리사가 된 후 사망한 강씨를 대신할 새 친왕비로 미색과 총명함을 겸비한 것으로 유명한 민지영(3부 상희)를 새 성친왕비로 간택해 미주로 보내준다. 무인지변 당시 건복제가 의식불명에 빠져 혼란한 상황에서 황실 큰어른으로서 상황을 정리하며 반란 진압에도 일조한다. 숙조가 붕어한 후 재석이 원역사의 조선에서 영조가 형인 경종의 왕세제로 즉위하면서 했던 것[40]을 떠올려 칭호를 태황태후로 높인다.
재석이 태황으로 즉위하자 이전과 태도가 달라졌는데, 제왕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어서 숙조를 엄격하게 대하고 성친왕은 오냐오냐 하면서 키워서 상술한 사단이 났는데도 재석이 태황이 되자 과거 숙조를 대했던대로 재석을 대한다.[41] 이후 태후와 합세해서 재석에게 3명의 후궁을 들이게 한다.
황태후로서의 정치적 입장보다는 두 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모성애 강한 어머니이다. 3부 들어서 막 나가는 경향이 생긴 재석 때문에 마음고생을 자주 한다. 원각사와 회엄사를 자주 방문했다는 것을 보면 불교도인 듯 하다. 디에고가 대한에 찾아왔을 때는 분노해서 매우 질책하긴 했지만, 황실의 핏줄을 버릴순 없다며 종친으로 살게 해줄 것을 권한다. 이후 디에고를 만났을 땐 누가 봐도 성친왕의 아들인데다가 예의바른 태도와 성실함에 만족해한다.
재석 또한 빙의를 시작한 후 50여년만에 처음으로 얻은 '친어머니'인데다 상희를 정실 아내로 맺어주는 등 태후에게 고마움이 많아 태후가 노환으로 병석에 눕자 상희가 말리지 않았으면 내의원을 뒤집어버렸을 것이라고 묘사되는 등 태후를 친어머니처럼 생각하고 지극정성으로 효를 다한다. 계미남변이 끝난 후 1708년 12월 24일 향년 73세에 노환으로 붕어한다. 붕어 직전에도 문병을 와 슬퍼하는 재석에게 태황이 아랫것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고 꾸짖을 정도로 마지막까지 강단있는 모습을 보인다. - 정현장공주, 정선장공주
열조와 진성태황태후 이씨의 딸들로 건복제와 성친왕의 동복 누나들. 어머니, 올케와는 친하지만 동복동생인 남동생들과는 딱히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사이라고 한다. 두 사람의 남편들은 족친위인데 예왕의 반란 때 탈출해 성친왕에게 가담했으며, 심양회맹에도 건흥제와 함께 참석한다. 올케인 황태후와 조카인 영선공주와 같이 놀며 지낸다. 1732년 이전에 둘 모두 노환과 병으로 훙서한다.
조선 제17대 국왕 | |||
대한 제3대 태황 숙조 건복제 | 肅祖 建福帝 | |||
숙조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태황 肅祖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太皇[B] | |||
묘호 | 숙조(肅祖) | ||
존호 | 현의광륜예성영렬 (顯義光倫睿聖英烈)[B][44] | ||
시호 | 장문헌무경명원효태황 (章文憲武敬明元孝太皇)[B][46] | ||
출생 | 1659년 | ||
대한 한성부 경복궁 교태전[C] | |||
즉위 | 1678년 | ||
대한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C] | |||
사망 | 1699년 3월 27일 (음력 2월 26일) | ||
대한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 |||
능묘 | 태릉(泰陵) | ||
절일 | □□절(□□節) | ||
재위 | 대한 황태자 | ||
?? ~ 1678년 | |||
대한 태황 대리청정 | |||
?? ~ 1678년[49] | |||
대한 태황 | |||
1678년 ~ 1699년 3월 27일 (음력 1678년 ~ 1699년 2월 26일) | |||
연호 | 건복(建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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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윤(阭) | ||
전호 | 선정전(宣政殿) | ||
부모 | 부황 열조, 모후 진성황후 | ||
부인 | 순현황후, 귀비 박씨, 진빈 홍씨, 미인 백씨 | }}}}}}}}} |
- 숙조 건복제 이윤
3부 초반 대한의 태황이자 재석이 빙의한 성친왕 이현의 동복형. 1659~1699. 연호인 건복은 신라 진평왕이 사용한 연호다. 정치적, 외교적 감각도 좋고 결단력도 있는 등 훌륭한 통치력에, 경연을 벌이면 경연관들의 말문을 막히게 할 정도로 학식도 뛰어나고 대한 밖의 세상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가진 명군. 독자들의 평가는 '몸 약한 태종'. 현대인처럼 하늘의 뜻 따위를 믿지 않고 현실적 손익만을 따져 행동하는 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다.
친동생을 어린 나이에 국외 추방하는 등 냉혹해보이는 면모도 있었으나 원래는 정 많은 성격으로, 태자의 죽음 앞에서 비통해하거나 순진무구한 이은의 모습을 보고 흐뭇해하는 등 인간미도 보이기도 한다.[50] 타고난 건강이 상당히 좋지 않은데 흡연자이기까지 해서 재위 내내 골골댔으며, 결국 만 40세의 이른 나이에 붕어한다.
재석 빙의 2년 전 동생 성친왕이 자신과 달리 모후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온갖 패악을 부리는 것을 응징하기 위해 성친왕을 견서사라는 명목으로 영구추방했다. 그러나 재석이 빙의한 후 성친왕이 개과천선한 모습을 보이자 성친왕을 어느 정도 용서하여 동변관리사라는 벼슬도 내리고 저택도 지어주는 등 나름 대우를 해줬고, 태자 이원이 사망하며 후계 구도가 불안해지자 귀국을 허가한다.
이후 한양대화재로 큰 피해가 발생하자 화병으로 쓰러지고, 한양대화재에서 성친왕이 진압과 인명 구조를 잘 이끄는 것을 보고 가태제로 임명하며 대리청정을 명한다. 이후 무인지변 발생 소식을 듣고 다시 한 번 화병으로 혼절하지만 하루만에 정신을 차리고 예왕을 역적으로 선포하여 무인지변 진압을 도운 뒤, 성친왕을 공식적으로 황태제로 책봉하고 군권, 인사권을 제외한 모든 권한을 넘겨준다.
무인지변을 수습하고 예왕이 사사된 이후 심리적 충격 때문에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재석에게 모든 권한을 넘기고 자리만 보전하다가 1699년 3월 27일 붕어한다. 죽기 6일 전 재석에게서 '미래인이 천녀에게 소원을 빌고 무종, 장조, 성친왕에게 차례로 빙의했다'는 사실상의 고백을 들었지만 동생의 재담이라 생각해 웃어넘긴다.
재석 입장에서는 어차피 건복제는 믿지 않을 것이고, 설사 믿는다 해도 오늘내일하고 있었기에 건복제가 이 이야기를 퍼트려도 주변에서는 헛소리를 한다고 여길 것이라는 계산까지 하고 혹시나 싶어서 상희 얘기는 빼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건복제가 금위사 보고와 성친왕의 편지를 통해 처음으로 성친왕이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채고 '무종대왕의 전설'을 떠올린 것을 보면, 정말 믿고 자신 이후의 군주들 가운데 설령 암군이 즉위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장조 때처럼 재석이 빙의해 나라를 구원할 것이니 안심하고 편히 갔을 수도 있다. 저승의 상황을 다룬 외전에 따르면 어차피 사후세계를 믿지도 않았고 재석의 말도 정말로 농담으로 생각했다가 죽어서 저승에서 깨어난 후에야 재석의 말이 다 사실이었음을 알고 크게 놀랐지만,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재석이 강림하여 나라를 지킨다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든든해한다고 한다.
묘호는 을병대기근을 이겨낸 공으로 숙조를 받는다. 서양에서 부르는 별칭은 근엄왕. - 귀비 박씨
건복제의 후궁. - ○○옹주 이○○
건복제의 서녀. 1695년 출산 중 사망. - 진빈 홍씨
건복제의 후궁. 자식으로 의현옹주가 있다. - 미인 백씨
건복제의 후궁. 자식은 없다.
조선 제20대 왕비 | |||
대한 제4대 황후 □□皇后 □□황후 | |||
존호 | 순현□□(□□□□) | ||
출생 | 1657년(연가 7년) 10월 8일(음력 9월 2일) | ||
대한 □□[51] | |||
사망 | 1746년 날짜 미상 (음력 월 일) | ||
대한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 |||
절일 | □□절(□□節) | ||
재위 | 대한 황태자비 | ||
?? ~ 1678년 | |||
대한 황후 | |||
1678년 ~ 1699년 3월 27일 (음력 1678년 ~ 1699년 2월 26일) | |||
대한 황태후 | |||
1699년 3월 27일 ~ 1740년 3월 8일 (음력 1699년 2월 26일 ~ 1740년 2월 10일) | |||
대한 태황태후 | |||
1740년 3월 8일 ~ 1746년 (음력 1740년 2월 10일) ~ 1746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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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후 양□□, □□후부인 □씨 | ||
부군 | 숙조 건복제 | ||
자녀 | 2남 1녀 | }}}}}}}}} |
- 순현황후 → 순현황태후 양씨
건복제의 황후. 1657년생. 건복제보다 2살 연상. 태자, 경친왕, 영선공주를 낳았다. 친정은 한미한 가문이었으나 선황 연가제가 외척을 경계한데다 본인의 성품과 미모가 뛰어나 간택된다. 남편 건복제의 차가운 성격에도 큰 갈등 없이 원만한 가족관계를 유지한다. 재석이 태황으로 즉위하면서 원역사에서 인종-명종, 경종-영조 형제 계승 때의 조선 사례를 떠올리고 황태후로 격을 높인다.
남편 건복제와 두 친아들인 태자와 경친왕을 모두 먼저 떠나보내는 큰 아픔을 겪는다. 태황태후 이씨와 고부관계가 매우 돈독한데, 건복제가 살아있을 때 냉혹한 성격을 못마땅해한 이씨와 양씨가 뒷담화를 나누면서 사이가 돈독해졌기 때문이다. 이는 건복제 사후에도 변하지 않아서, 재석이 즉위한 후에도 황실의 큰어른이자 조언자로 대부분 같은 목소리를 낸다. 1708년 겨울 시어머니인 진성태황태후가 붕어하자 황실 최고 어른으로 등극하고, 계속 창덕궁에서 지낸다. 올렝카와 상희를 먼저 보내고 80살이 넘어서도 정정하게 잘 지내고 있다.
1735년에는 하나뿐인 며느리인 효장태자비 허씨와 딸 영선공주도[52] 먼저 보내고 홀로 남는다. 자식을 모두 앞세우는 아픔을 겪었음에도 여전히 온화하고 정정하다. 1736년에는 사도태자 이은의 죽음을 겪은 건흥제를 위로한다. 1740년 시동생 건흥제까지 승하하자 크게 애통해한다. 이후 황실의 중심을 잡아 갑작스럽게 즉위한 이영을 뒤에서 받쳐주다가 1746년 향년 90세의 나이로 승하한다. - 경친왕 이천
건복제의 차남. 1679년생. 아버지와 형을 닮아 병약했고 1685년 마진(홍역)에 걸려 7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 길주공
강녕공의 차남. 1696년생. 5촌 당숙 경친왕의 봉사손으로 입적된다. - 영선공주
건복제와 황후 양씨 사이의 외동딸. 1677년생. 사실 고명딸인데 오빠와 남동생이 모두 요절해서 외동딸이 되었다. 혼인을 하고 자식도 낳았다는 것을 보면, 태황의 약한 체질을 물려받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건복제의 딸 셋 중 유일한 적통이라 건복제의 적통 후손은 모두 영선공주의 자식들[53]이 되었다. 남편은 예왕의 반란 때 성친왕의 편을 들고 탈출했으며, 그 후 심양회맹에도 참석했다. 양력 1712년 5월 30일에는 모후와 고모인 장공주들과 함께 불꽃놀이를 보는 등 소소하게 놀며 지낸다. 1732년 어머니인 순현태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 - 반남위 박진훈
1674년생. 영선공주의 남편, 삼성공을 대신해 조문사절을 간다.
대한 숙조의 황태자 효장태자 | 孝章太子 | ||
작호 | 황태자 | |
시호 | 효장태자(孝章太子) | |
본관 | 전주(全州) | |
휘 | 원(□) | |
부황 | 숙조 건복제 | |
모후 | 황후 양씨 | |
부인 | 덕비 허씨 | |
묘소 | □□원(□□園) | |
절일 | □□절(□□節) | |
재위 기간 | 대한 황태자 | |
음력 | ?? ~ 1697년 4월 15일 | |
양력 | ?? ~ 1697년 6월 3일 | |
생몰 기간 | ||
음력 | 1676년 ~ 1697년 4월 15일 | |
양력 | 1676년 ~ 1697년 6월 3일 |
- 효장태자 이원
건복제의 장남. 1676년생. 모후를 닮아 인자하고 책을 좋아하는 조용한 성격. 왕재가 충분하지만 아버지를 닮아 몸이 좋지 않은데, 을병대기근 때 미행을 나가지만 누구도 황태자라는 생각을 못하고 병든 난민으로만 생각할 정도다.
모범을 보이겠다며 단식을 한 것이 원인이 되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같은 이유로 치료조차 한동안 거부해서 1697년 6월 3일(음력 4월 15일) 동궁인 창덕궁 낙선당에서 훙서한다. 죽기 전 유언으로 숙부인 성친왕의 귀국을 요청하고 건복제가 이를 받아들여 재석이 귀국하게 된다. 자녀는 없었다. - 덕비 허씨
황태자 이원의 부인. 건복제 초기에 내각승상을 지내고 물러난 곡성후 허적[54]의 손녀로 성품이 순하고 착하며 체구도 크고 건강하다고 한다. 조부의 배경뿐만 아니라 모친이 다산하였다[55]는 점도 고려되어 황태자비가 되었다. 하지만 남편의 몸이 워낙 약해 결국 7년의 결혼생활 동안 자식을 낳아보지도 못하고 과부가 된다. 마음고생이 심했던지 태자가 죽은 해 1월에 천주교에 귀의하고 태자 사후 매일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이후 덕비(德妃)라는 칭호를 받았다. 태황은 며느리를 안쓰러워해서 동궁에서 계속 지내게 해주었고, 엄동설한에 내보낼 수 없다며 거처가 마련될 때까지는 성친왕도 일단 가태제로 책봉할 정도로 신경써주었다. 무인지변 후에는 자신이 동궁에 계속 있어서 성친왕 일가가 변을 당했다며 자책하고 스스로 동궁을 나가 친정으로 돌아간다. 1735년 이전, 시어머니 순현태후보다 먼저 훙서했다. - 경흥공
1696년생 영해공의 삼남으로 5촌 당숙 효장태자의 봉사손으로 입적된다. - 김 선시, 홍 숙녀
황태자 이원의 후궁들. 황태자비처럼 자식도 없이 과부가 되어버렸다. 허씨가 아직 동궁에서 지낼 때 셋이 함께 모여 기도했다는 걸 보아 이들도 같이 종교에 귀의한 듯.
2.2.2. 현왕계
- 현왕 이종(顯王 李腙)
열조의 서장자. 1653년생.[56] 생모는 열조가 동궁에 있을 때 시중을 들었던 궁녀다. 장남이지만 모친의 신분이 천해서 적자가 태어나자마자 총애를 잃었으며 이현과는 12살이나 차이나서 서로 무관심했다고 한다. 다만 열조가 그래도 장남이라고 재산을 좀 챙겨주긴 했는지 어느 정도 재력은 있다.
모친은 첫 등장 시점에 이미 사망했고, 본인도 궁궐에 출입도 잘 안 하고 대신들과도 말을 섞지 않는 등 권력에서 멀리 떨어져, 사냥이나 다니는 한량의 삶을 살고 있다. 사냥을 많이 즐기는 탓에 무예는 뛰어나다. 여색도 많이 즐기는지 자식도 많다. 이름이 언급된 아들만 적자 셋, 서자 셋에 딸도 많이 두었다고. 빙의 전 성친왕은 서자라는 이유로 띠동갑 형에게 반말을 일삼았는데도 불구하고 성친왕에게 계속 호의적인 것을 보면 성격도 매우 좋은 호인인 듯 하다.
무인지변 때 예왕이 그도 살해 대상으로 삼았지만, 그를 척살했어야 할 장희재의 호위청이 오히려 성친왕 편으로 돌아서서 군사를 보내 보호하고, 아들 영해공과 그를 지지하는 족친위 1백여명과 성친왕 진영에 합류한다. 재석이 즉위한 후에도 관계는 변치 않아서, 재석은 가끔 누군가에 기대고 싶은 소망, 빙의 전의 성친왕이 그에게 저질렀던 무례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무인지변 때 자신을 전폭적으로 편 들어준 데에 대한 보답으로 사석에서는 '형님'이라고 부른다. 디에고의 혼례 때 법도 때문에 참석하기 어려운 재석을 대신해서 큰아버지인 자신이 신랑 가족 자격으로 참석해주고, 이후 그의 가족들 모두가 디에고와 친해진다. 그야말로 종친의 FM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경계를 절대 사지 않도록 한량으로 살면서 선을 넘지 않고, 아들들도 자신처럼 처신을 잘 하도록 잘 키운데다가, 재석에게 심적으로 기댈 구석이 되어주어서 일가가 재석의 재위기간 내내 평온하게 살 수 있었다.
1728년 러시아에 다녀온 의명공주와 박문수 부부를 환영하는 연회 날 과음하고 귀가한 후 백인 첩과 동침하다 복상사로 훙서한다. 향년 75세. 매우 건강했던 형이 어처구니없이 급사하자 재석은 이번 생에서의 믿음직한 형을 잃은 슬픔에 황망해 한다. - 소월당 백씨
현왕의 백면나인 첩. 1728년 75세의 현왕이 그녀와 과음 후 무리하게 관계하다 복상사한다.
- 영해공 이철
현왕 이종의 장남. 1670년생. 아버지와 함께 사냥이나 다니는 한량. 붙임성이 좋고, 귀국 후 재석에게 자주 놀러온다. 어찌나 사냥을 많이 다녔는지 활쏘기 솜씨가 반세기 가까이 활을 쏘아온 재석과 거의 동급이고, 무예도 뛰어나다.
무인지변에서는 예왕군으로 돌아선 족친위에서 제대로 된 양반 100여명과 함께 혈투 끝에 탈출해서 성친왕 군영에 합류했으며, 기세가 잔뜩 올라서 예왕의 사자에게 욕설을 퍼붓고 패주하는 반란군을 추격하는 전투에도 직접 참전한 공으로 평난 3등공신에 책봉된다. 친화력과 무예가 뛰어나 여진 습속이 강한 후금에 사신으로 자주 간다. 1747년 이전에 사망했다.
- 강녕공 → 강녕왕 이고
현왕 이종의 차남. 1673년생. 공부를 멀리 하고 반촌다점과 주점에 죽치고 앉아있는 한량. 형과 비슷한 성격에 재석에게 자주 놀러오는데 어찌나 많이 놀았는지 사패 솜씨가 거의 타짜 수준이다. 형제들이 진성태황태후 조문사절의 답사로 떠날 때도 강녕공은 술과 여자를 좋아해 향응에 넘어갈 우려가 있다가 혼자 사신을 맡지 않았다. 딸이 태자 이은의 장녀로 입양되어서 의순공주로 봉해져서 하와국 왕세자빈이 되자, 하와국 국구가 되고 왕으로 승작된다. 이후 딸을 데리고 하와국에 가서는 하와이 미녀들에 빠져 한참만에 돌아왔으며, 대한에서 얻은 자식 13명에 더해서 하와이 여인들에게서 얻은 자식이 5명이나 더해졌고 그 후손들 중 한명은 4부에서 등장한다.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 뿐 종친으로서 학습한 기본적인 정치적 식견은 있고 단순히 놀아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국구로서 하와국에 애정을 갖고 있어서, 외전을 보면 미주를 다녀오지 않은 조카손자가 즉위해도 하와국에 관심을 잃지 않도록 건흥제가 사망하기 전 편지를 띄워서 사위가 최대한 빠르게 직접 와서 조의를 표하도록 조언했다. 1747년 이전에 사망했다. - 승현후 이종선
강녕왕의 아들. 1696년생. 정친왕 이권과 친하게 지낸다. 부친보다 숙부 삼성공을 닮아 학문이 뛰어나 종친부 종5품으로 재직 중이다.
- 삼성공 이순
현왕 이종의 삼남. 1678년생. 책을 좋아하는 조용한 성격이지만 아버지와 형들을 따라다닌지라 샌님은 아니고 건강하다. 효장태자와 나이대가 비슷하고 학구적인 성격도 비슷해서 친한 사이였다. 이런 성향 때문에 성친왕이 객사할 경우 양자로 들어갈 유력한 후보였고, 효장태자 훙서 후 두 형과 달리 건복제의 양자로 입적될 가능성이 잠시 거론되었고 재석도 그가 태황이 된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줍음이 많은지 재석의 귀국 후에 술 한잔 따르고 바로 자리로 돌아간다. 문재가 있다 보니 문치화가 많이 된 청나라로 사신으로 자주 간다. 1747년 시점에는 삼형제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었다.
- 명천후 이정, 은산후 이현, 흥양후 이원
현왕의 서자들. 나이는 영해공~강녕공 또래. 어릴 때 성친왕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바람에 1697년 성친왕이 귀국하자 모두 지방으로 도망간다. 1717년이 되어서야 상경하여 건흥제를 알현하고, 그 후로는 성친왕이 괴롭힌 것을 대신 보상해주려는 건흥제에게 후한 대우를 받는다. 명천후가 특히 건흥제의 비위를 잘 맞춘다고 한다.
2.2.3. 기타
- 경흥공 → 경흥왕 이원
선조 이연의 서자의 아들로 딸이 의원공주로 봉해지고 조홀국왕비가 되어 국구가 되는 바람에 왕으로 승작된다. 조홀국왕비가 된 딸을 엄히 가르쳐 출가외인을 근거로 들어 딸이 지나치게 친정에 오는 것을 막는다.
- 회령후 이홍진
진왕(진안군)의 손자이자 성도공 이창의 장남. 반촌사단(社團, 기업집단), 장조와 상빈 이씨에게 물려받은 전답, 진왕의 소설 판권을 모두 가지고 있어서 도성 종친들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갑부이다. 몸 관리는 안 하는지 안경을 쓰며 상당한 비만이다. 무인지변 때 반군이 지른 불로 반촌사단 건물들이 모두 불타버리지만 평소에 보험을 들어뒀기에 보험금을 왕창 타서 큰 손해는 보지 않았고 이후 반촌 다점, 주점, 극장을 모두 벽돌로 재건한다. - 회령백 이연성
회령후 이홍진의 넷째아들로 형들이 모두 요절하여 아버지 사후 반촌사단 단주 직을 이어받는다. 반촌신보라는 문화 예술 전문 잡지를 창간하여 대한 제일의 문화권력자로 자리매김한다.
2.3. 성친왕파
재석이 황태제로 책봉되고 대리청정을 시작하며 대한을 통치하기 이전부터 성친왕 계열이었던 인물들.2.3.1. 8차 견서사
8차 견서사는 정사 성친왕 포함 총 11명으로 정사 성친왕, 부사 이형준, 서장관 정호찬, 아르망 다라미츠 신부, 의관 이진원, 익위사 무관 2명(홍상훈, 김종건), 통변 이홍석, 시종 3명(박종선, 지말복, 오돌천)이다.- 문현공(文賢公) 이형준
부사 → 미주 권학사 → 성균관 동지관사 → 좌참찬 → 우승상. 1625년생,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57] 호는 송재(松齋). 본국에 본처와 1남 2녀가 있다.[58] 재석 빙의 전 성친왕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서연관으로, 성친왕이 견서사로 추방될 때 견서사의 부사가 되어 함께 추방된다.[59]
재석은 성친왕에 빙의한 직후에는 그를 꼬장꼬장하고 투덜대기만 하는 노인이라고 여기고 적당히 맞춰주며 정치적 방패 정도로 삼을 생각이었지만, 추방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 성친왕 때문이었지 그가 개과천선한 모습을 보이자 사이가 좋아졌으며 재석도 처음 한 생각은 벼락맞을 생각이었다고 자책하며 그를 참스승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1658년 7차 견서사에 말단 서기관으로 참여해 루스국에 다녀왔는데, 바셴카라는 20살 연하의 14살 소녀와 관계해서 자신도 모르던 사생아 보리스가 있었다. 루스국에서 보리스, 바셴카와 재회한 후 보리스와 그 의형제들을 데리고 다니게 되며 그들에게 아버지로 대우받는다. 미주 이주 후에는 수신독본이란 책을 집필하고 권학사가 되어 강연을 다닌다. 재석이 귀국할 때 함께 귀국하여 성균관 동지관사 관직을 받고, 재석은 일단 대리청정 중 경력을 쌓게 하기 위해 좌참찬에 임명했다가 자신이 즉위한 후 우승상으로 승진시킨다.[60] 국구(國舅)라 자기 의견을 내는 걸 절제하는 좌승상 민성윤 대신 조정에서 토론을 이끌어가는 등 군기반장 역할을 충실히 한다.
나이가 적지 않은 만큼 재석은 그를 언제든 기로소에 보내서 여생을 즐기게 해주려고 했으나, 전쟁 중이라 미뤄졌다가 결국 감기에 걸렸고, 폐렴으로 발전해서 1705년에 만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참스승인 그가 세상을 뜬 것에 진심으로 애통해한 재석은 그의 가는 길을 몸소 지켜봤으며, 마지막 유언은 성군이 되어달라였다. 재석은 세상을 떠난 그에게 장례 물품을 황실에서 내어주고,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를 제수하는 등 신하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예우를 다했다. 본처가 낳은 적자 쪽 현손녀는 술루 왕세자빈이 된다. 이후 제대로 된 유학자가 없던 미주에 유학을 전파하느라 애쓴 공로를 인정받아[61] 문현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오랫동안 유럽에 있어서 학파를 이루진 못해 문묘에 배향되진 못했지만,[62] 4부에서 언급되는 것을 보면 참스승의 대명사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은근히 입체적인 캐릭터로 얼핏 보면 80년 전 스타일 그대로의 정통 한복을 입고, 인종 문제에도 보수적인 입장을 보이며, 재석이 빙의한 성친왕이 말을 잘 듣자 상투도 다시 틀고 조선옷도 입게 설득하고 성리학 진도도 나가려고 하는 것을 보면 1, 2부의 사림파 꼰대같이 보이지만 현실적, 패권주의적, 실리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졌다. 유주 문물도 즐기고, 아카데미를 참관해서 서학을 공부하는 것도 공부를 안 하는 것보다 낫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다가, 졸지에 생긴 혼혈 서자와 5명의 의형제들도 의붓아들로 받아들이고 교육을 충실히 시키는[63] 개방적인 모습도 있다.바셴카를 처음 만났을 때 자기는 폭삭 늙었는데 당신은 30년 전 그대로라고 하는 로맨티시스트 면모도 있다.2부 이후 70여년간 변화한 사대부들의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캐릭터.
- 정호찬[64]
서장관 → 총융청 연대장 → 총융청 총관. 1650년생. 1부의 정호찬과는 동명이인.[65] 본국에 2살 연하의 본처와 본처 소생 3남[66]이 있으며 미주 시절 23살 연하의 양첩 이사벨라를 들인다.[67] 호는 월송(月松). 본래 성친왕 이현의 익위사였고[68] 그 중 성친왕과 가장 친해서 황태후의 요청으로 서장관이 되었으며 여전히 무관 노릇도 하고 있다. 익위사가 되기 전에 강무관을 수료하고 북방에서 실전도 겪은 뒤 훈련도감에서 복무하다가 열조가 성친왕의 익위사로 꽂아줬다. 강무관 경험 덕분에 무예뿐 아니라 병학에도 조예가 깊다.
1부 정호찬은 과묵하고 진중한 성격이고, 딸만 셋이며, 아내와 함께 자고 첩을 들이지 않는 반면 3부 정호찬은 유쾌하고 수다스러운 성격에, 아들만 셋이고, 미주에 있는동안 양첩을 들이는 등 재석에 대한 충성심 빼고는 반대되는 캐릭터이다. 재석은 절친했던 옛 정호찬과 이름이 같고 유쾌한 성격 때문에 첫인상부터 신뢰감을 느끼며 1부 정호찬과 동일시하고 있다. 미주에서는 대평원 원주민들을 회유하는 사신으로 떠나 미시시피 강 유역과 오대호 지역 누벨프랑스까지 다녀오는 대 여정을 거의 피해없이 잘 수행하고 2년여만에 귀환한다. 재석이 귀국할 때 함께 귀국하여(현지처 이사벨라도 데리고 온다) 참장 계급으로 승진, 총융청 2연대장을 맡는다.
한양대화재가 발생할 때 마침 도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런던 체류시 심심해서 봐둔 런던 대화재 당시 문서를 참고해서 민관을 가리지 않고 건물들을 폭파해서 방화대를 만들어서 궁궐에 불이 옮겨붙지 않게 하는 공을 세웠다. 그 후 화재복구를 위해 원각사 터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난이 일어나자 바로 성친왕을 구원하러 나서고 배후를 위협할 수 있는 호위청 총관 장희재를 설득해서 성친왕 편에 서게 하는 위엄을 보여준다.[69] 계획대로 예왕군의 배후를 들이쳐서 동대문 전투에서 결정적인 공훈을 세운다. 그 공로로 평난 2등공신에 책봉되고 재석이 즉위한 후 총융청 총관이 되며, 그의 집은 1부와 같이 측근들과 밀담을 나누는 장소가 된다. 계미남변 후에는 한양 방위 책임자인 오군대총관으로 승진한다. 본처는 1710년에 먼저 세상을 떠났고, 12년간 오군대총관 직에 있다가 70세에 대장 계급을 받으면서 사직하고 이사벨라와 함께 늙어가고 있다.[70] 퇴직 후에는 회고록을 쓰고 있는데, 재석이 회고록 내용을 궁금해하나 자기가 죽은 후에 바칠테니 기다려달라며 끝까지 회고록 내용에 대해서는 함구한다.[71] 1740년 건흥제가 승하한 지 6개월 후 노환으로 사망하면서 8차 견서사 인원 중 가장 오래 살았다.
4부에서 언급되기로는 재석이 4부에서 황태손 이진으로 빙의한 후 정호찬의 자손들에게 물어봤을 때 자손들은 회고록의 존재에 대해 모르고 있었고, 재석이 흥선제로 즉위하여 어명으로 회고록을 찾으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정호찬의 자손들이 집안 잔치를 열었는데 야매 숙수가 복어 요리를 잘못 만드는 바람에 집안의 성인들은 모두 복어 독에 중독되어 죽고 아이들만 살아남는 횡액을 당해 회고록 이야기는 꺼낼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고 하여 결국 재석은 이 회고록을 보지 못한다.
- 아르망 다라미츠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1642년생. 조선식 이름은 알망주. 대한에 7년간 거주해 조선어와 한문에 능숙하며 이현에게 어학과 예절을 가르치기 위해 8차 견서사와 동행했다. 루이 14세의 총사대에 근무했으나 프랑스가 같은 천주교 국가들을 배신하고 이교도 오스만과 동맹을 맺은 사실에 염증을 느껴 27세에 성직자가 되었다.[72]
미주에서도 재석과 함께 지내다가 대한으로 함께 귀국한 뒤 자혜원에서 지낸다. 무인지변 후 성친왕에게 예왕의 딸들을 마포 대성당에 유배 보내달라는 부탁을 하고 수락되는데, 이유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재석이 즉위한 후 시강원이 정식으로 열리자 이은의 스승 중 하나가 되어 라틴어, 프랑스어, 검술, 승마를 가르치는데, 은이가 편하게 여기는 스승이라 힘든 태자 교육에서 잠시 숨쉴 틈을 주고 몸을 움직일 시간을 줄 의도였다. 친구인 다토스와 포르토는 늙은 후 고국에서 죽고 싶다며 귀국했지만 다라미츠는 대한에 뼈를 묻겠다며 노년이 되어서도 올렝카의 고해신부 역할을 하다가 1725년 봄, 선종한다.
- 이홍석
역관. 1649년생.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라틴어를 모두 구사하는 능력자. 심지어 본래는 몰랐던 러시아어와 영어도 루스국과 잉글국 체류 중 조금씩 배운다. 장조가 죽은 뒤 상빈 이씨가 세운 고아원인 자혜원 출신으로, 자혜원의 멸칭인 이태원[73]이라는 말만 들어도 화를 낸다고 한다. 프랑스 체류 시에는 재석 본인이 프랑스어 구사가 가능해서 별 활약이 없다가 독일에 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활약한다.
심각한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기계처럼 감정없이 통역만 하는 강심장의 소유자. 글을 모르는 시종 셋의 편지를 대필해주는 역할도 맡는다. 성친왕이 동변관리사로 취임하여 견서사 임무가 해제되자 본국으로 돌아간다. 귀국 후 루스어를 익혔다는 이유로 북변으로 파견되어 루스인들과의 통역을 맡는다. 북변에서 돌아온 뒤에는 어학훈도가 되어 자혜원의 아이들에게 외국어를 가르친다.
무인지변 이후 건복제가 심어둔 금위사 탐보꾼이었음이 밝혀지는데, 암살시도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는 이유로 문책되어 잠시 직책에서 해임당한다.[74] 이후 루스국 사절이 오자 프랑스어와 루스어를 모두 구사한다는 이유로 알렉세이의 개인 교사를 맡는다. 이진원보다 조금 뒤에 노환으로 사망한다.
- 이진원
의관. 1636년생. 상빈 이씨(2부 상희)의 큰오빠의 장남의 아들, 즉 상빈 이씨의 조카손자로 가문 대대로 이가의원을 하고 있다 장조 때 설립된 의학교에서 외과술을 배우고 군의로 10년간 복무한 뒤 외과술에 능하다는 이유로 견서사에 뽑힌다. 다리 절단 수술[75]도 성공적으로 집도하는 상당한 실력자이다. 실력이 뛰어나지만 많은 환자를 봐야 한다는 가훈에 따라 내의원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성친왕을 포함한 사절단의 누구와도 개인적인 친분을 절대 쌓지 않았으나 상빈 이씨와 같은 가문인 것에 대해 대화한 이후로 재석과 친분을 쌓기 시작한다. 병균학에 대해서는 적극 지지하며 병균이 발견되지 않은 질병은 병균이 너무 작아서 볼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김종건을 이은 두번째 암살자였다.[76] 재석이 성친왕에 빙의한 후 개과천선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으며 상희 또한 자신을 가족처럼 대하자 마음이 돌아선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재석의 귀국명령에 따라 암살지령이 내려지면서 재석에게 독약을 올렸으나 낌새를 챈 재석이[77] 짐짓 독약을 마시는 척 하자 독약 그릇을 뺏어 깨트리고 협박에 못이겨 그랬다고 용서를 빈다. 재석은 그를 용서하고, 대미주에서 실종되었다고 헛소문을 내서[78] 예왕이 가족에게 보복하는 것을 막고 '원가'라는 미주 이주민 2세로 위장신분을 주어 본국에 몰래 데려온다. 건복제 사후 미주에서 조문 사절단이 방문할 때 서류를 조작해서 '사실 실종된 이진원은 살아있었고 건강을 회복한 뒤 조문단과 함께 귀국했다'는 것으로 처리되어 가족에게 돌아온다. 칠순 가까운 나이에도 서반아령 필리핀 총독부와의 전쟁에 군의로 참전한다. 1717년 이전 시점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 홍상훈
익위사 무관 → 용호청 대대장 → 용호청 연대장 → 참장. 1643년생. 무기는 잘 다루지만 행동이 다소 둔하고 미련하다고 한다[79]. 재석이 귀국할 때 함께 귀국하여 용호청 대대장 보직을 받는다. 권훤과 함께 예왕에게 붙으려던 용호청 총관을 설득하여 재석 편으로 돌려놓는다. 총관이 마뜩치 않아서인지 선임대대장으로서 용호청을 지휘하는데, 정호찬과 협의 하에 적절한 기만책으로 마치 판세가 결정된 이후에 참전할 것처럼 예왕군을 속이고 측면을 들이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 공로로 평난 2등공신에 책봉되고, 용호청 연대장으로 승진했다. 서반아령 필리핀 총독부와의 전쟁에 참전하고, 루스로 시집가는 루시아를 국경까지 호위한다. 1717년 이전 시점에 사망했다.
- 김종건
익위사 무관 → 무위영 대대장 → 참장. 1647년생. 제2차 빈 공방전에서 낙마하여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을 재석이 구해줘서 목숨을 건지고 크게 감동한다. 사실은 성친왕을 암살하라는 명을 받았던 예왕의 첩자였으며 이 때문에 본국에 돌아가면 얻을 재물 생각에 싸움을 피하려 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재석이 목숨을 구해주자 감동하여 그 사실을 고백하고 재석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재석은 이진원과 함께 대미주에서 실종된 것으로 위장하고 '종가'라는 미주 이주민 2세로 위장신분을 주어 본국에 몰래 데려와 자기 집에 숨겨둔다.
한양대화재 때 화재가 가족이 있는 남촌으로 번지자 무단이탈하여 가족을 찾으러 간다. 자혜원으로 피난해 무사했던 가족을 만나지만, 신세를 편 홍상훈과 달리 거지꼴로 나타나서 성친왕에게 찍혀서 쫓겨난 걸로 오해받고, 이 때 예왕 측에서 김종건이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예왕이 난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무인지변 이후 예왕이 그에 대한 내용을 실토하며 생존이 밝혀지고, 건복제에게 암살 시도 사실을 밝히지 않고 죽음을 위장한 것은 기군망상에 해당하기에 홍상훈보다 급이 낮은 무위영 대대장이 된다. 서반아령 필리핀 총독부와의 전쟁에 참전하고, 루스로 시집가는 루시아를 국경까지 호위한다. 그 후 다시 필리핀 전선에 참전했다가 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 양주댁 박씨
김종건의 아내. 슬하에 시집간 딸들과 김만식이라는 아들이 있다. 남편 없이 지낸 17년간 채소가게를 하며 홀로 지냈다. 재석은 양주댁을 비롯한 김종건 일가를 집에 들여 보호하려고 했으나, 양주댁이 폐를 끼치기 싫다며 거절했고 사실을 설명할 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남촌에 계속 살게 놔둔다. 한양대화재 중 간신히 목숨을 건져 자혜원에 잠시 피난했다가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러 온 김종건과 재회한다. 이로 인해 최신원에게 포섭되어 감시를 하던 이웃이 김종건이 살아돌아온 것을 목격, 예왕과 최신원이 무인지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이후 김종건은 복권되었으나 홍상훈보다 급이 낮은 무위영 대대장이 되었는데, 대신 재석이 현금으로 보상을 줘서 불만을 무마했다.
- 박종선
이현의 전담 시종. 1638년생. 본래 내수사 궁노비였다가 성친왕이 혼인하면서 하사받았고 견서사에 따라가면 보수로 은 500냥을 준다고 해서 지원했다. 재석 빙의 전의 이현과는 거의 인간관계가 없었으나 재석이 빙의한 후 믿을 수 있는 내 사람을 만들기 위해 친분을 쌓기 시작하여 어느새 동네 형님같은 수준으로 친해진다. 노총각으로 오래 노모를 모시고 살아서 요리를 잘 하며 대유주에 온 뒤 불랑국 요리까지 배웠다.
대한령 미주로 이동한 후 그동안의 봉사에 대한 보상으로 노모를 미주로 모시고 와서 함께 면천받고 과부와 혼인도 한다. 그 후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낳았으며 노모는 미주에서 사망한다. 재석이 귀국할 때 함께 돌아온다. 성친왕저의 집사로 외출도 잦기 때문에 시중의 소문을 모아오는 역할도 한다. 난이 일어날 땐 성친왕의 재산 문서들을 들고 무사히 탈출했다. 재석이 태황으로 즉위한 후에는 재석이 하사받았지만 빈 집인 예왕저를 관리하며 한가하게 지냈다가, 디에고의 집과 하인들을 관리하게 된다. 70세 무렵이 되어 치매기가 왔어도 예왕저는 철저하게 관리해 완친왕 부부가 혼인 후 바로 살기 불편함이 없었다. 1717년 이전 시점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 지말복
이형준과 정호찬 전담 시종. 1657년생. 박종선과 달리 자원하지 않고 임의로 뽑혀왔다. 박종선과 달리 성친왕의 소유가 아니라 면천은 받지 못하지만 혼인은 하도록 허락받는다. 성친왕이 동변관리사로 취임하여 견서사 임무가 해제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후 다른 일행들과 연락하지 않고 지내서 20년 후 조르조 문제로 재석이 찾았을 때 근황조차 알 수 없었다. 간신히 소식을 다시 찾았을 때는 1717년 이전 시점에 이미 사망했다고 한다.
- 오돌천
의관, 통변, 무관 담당 시종. 1643년생. 박종선과 달리 자원하지 않고 임의로 뽑혀왔다. 본처가 대유주 체류 중 죽었는데 박종선과 달리 성친왕의 소유가 아니라 면천은 받지 못하지만 재혼은 하도록 허락받는다. 성친왕이 동변관리사로 취임하여 견서사 임무가 해제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엔 다른 일행들과 연락하지 않고 지내서, 20년 후 조르조 문제로 재석이 찾아봤지만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간신히 소식을 다시 찾았을 때는 1717년 이전 시점에 이미 사망했다고 한다.
2.3.2. 카자크 6형제
- 보로후(堡蘆侯) 이진용(보리스)[80]
이형준이 바셴카와 관계해 낳은 사생아. 1659년생. 카자크들 사이에서 자랐으며 카자크들 중 가장 덩치가 크다. 항상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해 이형준이 오지 않았으면 스스로 대한으로 찾아갈 생각이었다고 한다. 이형준을 만난 후 재석이 근위병으로 삼는다. 이형준이 항렬자를 따라 이진용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는데 별로 마음에 안 들어서 잘 쓰지 않는다. 재석과 함께 대한에 귀국했고, 이형준의 적자는 이미 50세에 사망했기에 이복형과의 만남은 이뤄지지 못한다. 이형준의 적자 소생 조카들과 서로 불편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이형준의 집으로 가지 않고 계속 재석과 함께 산다.
무인지변이 일어나자 뛰어난 피지컬에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포위망을 뚫고,[81] 정호찬이 있는 총융청으로 구원을 전하고, 총융청이 예왕군을 급습하면서 동대문 전투에서 활약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내 이리나를 유탄에 잃었고, 법 때문에 복수하지도 못하고, 한 달을 술에 절어 지낼 정도로 괴로워한다.
무인지변 후 2등 평난공신이 되었고 육군 참위로 내금위에 특채되어 재석의 호위를 계속 맡으며, 장옥정과 재혼을 제의받는다. 공신이 되어서 계급도 참령이 되었고, 결국 장희재 주선 하에 장옥정과 혼인했다. 무관이라는 공식 신분이 생기자 집도 새로 얻었다. 그 후 정령으로 승진, 표트르 1세가 보내준 카자크인 부대인 백위영 연대장 직을 맡는다. 인현황후의 상여를 운구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또래인 이고르, 이반, 탈라스와 함께 은퇴한다. 후임은 바실리. 이후 분가한 보로 이씨의 시조로 언급된다. - 이리나
보리스의 부인. 보리스와의 사이에서 아이 셋을 낳는다. 적당히 미주에서 처를 구한 다섯 친구들과 달리 이형준이 직접 나름 괜찮은 집안 처자를 구해와서 학식도 나름 있어서 상희의 말동무 겸 간호사 노릇을 했다. 다른 카자크 부인들과 마찬가지로 본명은 따로 있으나 남편인 보리스와 동료들은 발음이 힘들어 이리나라는 러시아식 애칭으로 부른다. 무인지변 중 성친왕저를 습격한 반군이 쏜 유탄에 맞아 사망한다. 보리스의 아이들은 다른 카자크 부인이 돌봐준다. - 드미트리(이원웅)
보리스의 장남. 백위영 근무가 따분하다는 이유로 고향인 미주 파견에 자원한다. 미하일과 농담처럼 혼담이 오가던 올가와 혼인한다. 공부를 싫어하여 친구들과 달리 무과 급제를 못해 부사관인 정교에 머물러 있었으나 광동 토벌 때 불산성에 가장 앞장서 들어가 남문을 점령한 공을 세워 군관으로 특진한다. - 장옥정
★[82]
1675년생. 원 역사보다 16년 늦게 서반아계 혼혈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오빠 장희재의 부인인 올케의 젖을 먹고 자랐다. 외고조부가 2부의 스페인 용병대 기록관 세바스티안 데 라 로카로, 서반아계 혼혈이라 그런지 도성 전체를 술렁이게 할 정도의 엄청난 미녀. 처음에는 예왕의 첩이었다. 남편의 야심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술김에 하는 농담으로 알았으나 진심인 것을 알게 된 후 귀비 자리를 넘어 황후 자리까지 탐낸다. 난이 일어나자 장희재에게 난에 가담하면 장씨 일가가 제일가가 될 수 있다며 설득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장희재가 예왕에게 가담하지 않고 성친왕 편에 붙어 공을 세운 덕에 살아남았고, 예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도 데려올 수 있었다.[83]
장희재는 무인지변 중 아내를 잃은 보리스와 그녀를 재혼시킬 것을 청하고 고민 끝에 보리스가 승낙하여 재혼한다. 보리스와의 사이에서 남매를 낳고 여전히 뛰어난 미모를 유지하며 잘 살고 있으며, 실제 역사처럼 질투가 매우 심해 보리스를 휘어잡는다. 예왕 소생의 딸은 생부의 업보 탓에 한국인 상대로는 혼삿길이 막막했으나, 다행히 외국 출신인 미하일이 관심을 보이면서 그에게 시집보낸다.
- 이고르(이영선), 바실리(배실이), 안드레이(안대호), 탈라스(단나수), 이반(이반영)[84]
보리스의 카자크 친구들, 부와 명예도 죽음도 함께하기로 한 단순한 친구 이상의 의형제에 가까운 사이다. 가장 나이 많은 이고르가 1658년생, 가장 어린 바실리가 1668년생. 다들 카렐린이나 효도르 같은 인상의 180cm가 넘는 거구들이다. 보리스를 따라가기로 해 다같이 재석의 근위병이 된다. 보리스의 아버지인 이형준을 역시 아버지라고 부른다.
보리스나 이들이나 사냥이나 전투할 땐 은밀하고 신속하게 움직이는데 정작 일상생활에선 평범한 대화도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울리고 실내에서도 쿵쾅대며 걷는 마초 중의 상마초. 손님 접대할 때 무희 대신 흥겨운 코사크 답무를 추는 모양이다. 대한에 귀국한 후 계속 재석과 함께 지낸다. 무인지변 때 이고르는 보리스와 함께 총융청으로 구원을 청하러 가고 나머지 4명은 올렝카와 재석의 세 아이들을 각각 하나씩 맡아 탈출시킨다. 무인지변 이후 이고르는 2등 공신, 나머지 넷은 3등 공신이 되고 전원 내금위에 들어와 재석의 경호를 계속한다. 보리스가 장옥정과 재혼하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자 누군가는 내 여편네가 그 총알을 맞았어야 했는데라고 하고, 뭘 망설이냐며 수락하라고 만담을 연출한다. 범인의 처는 정황상 엘레나라는 러시아식 애칭을 가진듯.
공신이 된 후로 이고르는 참령, 나머지는 정위가 되었는데 재석은 장희재의 건의대로 벼슬이 좀 올라가면 2명씩 외금위, 겸사복에 배치해서 금군을 더 확고하게 휘어잡을 계획이다. 무관이라는 공식 신분이 생기자 모두 집을 얻어서 따로 살게 되었는데, 다른 집이래봤자 바로 옆집이라 예전 성친왕저에 함께 살 때와 별 차이는 없다고.안드레이는 보리스와 장옥정에 의한 벽간소음을 재석에게 고자질한다.이고르와 바실리는 디에고의 남아메리카 원정에 경호원으로 동행하는데, 각각 정령, 부령으로 승진한 만큼 나이도 많이 들었고 안데스 산맥에서 고산병에 시달리면서도 스페인 관헌들 여럿을 때려 눕히는 힘을 보여준다. 이고르가 바실리가 남아메리카에 간 동안 본국에 남은 넷은 표트르가 보낸 카자크 부대인 백위영의 연대장과 대대장이 되고, 이고르와 바실리도 부연대장과 참모가 된다. 세월이 흘러서는 이고르와 안드레이, 이반 순서로 세상을 뜨고 가장 막내였던 바실리만 현역으로 남아 백위영장으로 재직한다. - 카자크 6형제의 자식들
카자크 6형제는 미주에서 각자 혼인을 해서 자식을 둔다. 신분 차이에도 어려서부터 이은과 함께 자란 친한 소꿉친구다. 이 중 마리아와 탈라스의 아들 세묜이 이은과 가장 친한 듯.하지만 이은은 훗날 세묜에게 NTR을 선사하고무인지변 때에도 모두 살아남는다. 어려서 죽은 아이들, 젖먹이들을 빼고도 15명이나 되며, 이 중 안드레이네 왈가닥 딸 올가와 이반의 아들 미하일 간에 장난삼아 혼담이 오가는 등 카자크 자식들끼리도 혼담이 오간다. 이은이 황태자가 된 후에는 신분 차이로 인해 예전처럼 격의없이 놀지는 못하나 여전히 이은을 수행하며 익위사처럼 곁에서 모시고 있다. 남자아이들 8명은 성년이 되자 전부 입대하는데, 편한 백위영 근무를 마다하고 태어난 고향인 미주 동변 근무를 자원하여 미주로 떠난다. 후금 내전에도 참전하고, 이후 표트르를 조문하는 진위사에도 참가한다. - 단세문(세묜)
탈라스의 아들. 1693년생. 안나와 혼담이 있었지만 태자 이은과 안나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알고는 깨끗이 양보한다. 안나를 보낸 상처 때문인지 오랫동안 독신으로 지냈지만, 미주를 방문한 이은이 식인 회색곰에게 죽을 뻔 했을 때 몸을 날려 이은을 구하는 모습으로 뒤끝은 없음을 보여준다. 그 공로로 종 8품 정교에서 종 6품 부위로 특진하고 좌룡장 훈장과 백은 2천냥을 받는다. 그 후 혜련의 경호를 맡다가 점차 가까워져 1721년 혜련과 결혼하고 자녀 셋을 둔다. 후금 내전에도 참전하고, 이후 표트르를 조문하는 진위사에 아내 혜련과 함께 참가한다.
2.3.3. 기타 유주인
- 장 마리 드 포르토
아르망 다라미츠의 총사대 시절 친구. 총사대를 나온 후 법률가가 되어 파리 고등법원에서 일한다. 고문단이 되어 대한으로 갈 예정으로 재석이 대미주로 갈때 데리고 간다. 미주에는 법률 전공을 살릴 일이 없어 미주 속오군 훈련을 맡는다. 재석과 함께 대한 본국에 입국하고, 성균관 강의를 제안 받는다. 이후 포도청을 개혁하는데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 노년이 되자 프랑스로 돌아갔고 그 후 프랑스에서 아라미츠보다 몇 년 일찍 사망했다.
- 로베르 다토스
아르망 다라미츠의 총사대 시절 친구. 총사대를 나온 후 공병이 되었다.[85] 고문단이 되어 대한으로 갈 예정으로 재석이 대미주로 갈때 데리고 간다. 지선성을 방어하는 성채를 쌓는 일을 맡는다. 재석과 함께 대한 본국에 입국하고, 강무관 강의를 제안 받는다. 이후 훈련도감 예하 공병영을 훈련시켰다. 노년이 되자 프랑스로 돌아갔고 그 후 프랑스에서 아라미츠보다 몇 년 일찍 사망했다.
- 알렉상드르(나중현)
재석이 프랑스에서 고용한 조선공. 당대 프랑스 최고의 조선공 가문이었던 위박 가문의 일원으로 위박 가문에서 한 손가락에 꼽을만한 실력의 조선공이다. 재석을 따라 대한이 아닌 미주로 가게 되자 실망하는데 증기선의 소문을 듣고 그 비밀을 캐내려는 의도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소 경영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성친왕이 미주에 건설한 조선소의 경영을 맡는다. 배에 미친 덕후로, 그 때문에 프랑스에서도 결혼생활에 실패했고, 미주에서도 혼인은 했지만 재석이 귀국한 후에 미주에 남아 3개월 동안 조선소에서만 살고 집에 안 들어갔더니 아내가 도망가버렸다. 대한에 온 후에는 아예 대한에 정착하여 재석에 의해 아산만에 새로 들어선 조선소의 소장으로 임명된다. 계미남변 당시 대한이 영국-네덜란드 전열함 함대와 전쟁 상태에 들어가면서 전열함이 없던 대한 해군에 급하게 전열함이 필요해지자 재석에 의해 총관으로 임명, 전열함 건조 임무를 맡아 빠르게 전열함대를 육성, 대한 해군의 선전을 이끄는 공을 세우고 재석에게서 나중현이라는 한국 이름도 받는다. 이후에도 아산 조선소를 경영하다가 1729년 양력 3월에 향년 75세로 사망한다.
- 야니냐, 헬렌
올렝카가 폴수국을 떠날 때 부터 뒤를 따르며 함께한 시녀들로 올렝카의 충복들. 야니냐는 1660년생, 헬렌은 1668년생으로 비아위스토크 출신. 올렝카가 순비로 봉해지자 혼인도 포기하고 본방나인으로 함께 입궁한다. 헬렌은 루시아의 러시아로 시집갈 때 올렝카의 명으로 시녀장으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같이 떠난다. 올렝카의 오른팔과 마찬가지인 폴란드인 시녀 3명, 태황태후가 뽑은 궁인 50명을 통솔하며, 러시아에서 뒤늦게 혼인한다. 야니냐는 계속 올렝카를 모시며 대한에 남았고, 연주가 표트르의 진위사로 떠날 때 연주를 수행해 헬렌과 재회한다.
- 앙투안
재석이 내달국에서 고용한 프랑스인 요리사. 두부를 잘 만들어서 박종선을 대신해 재석의 식사를 책임진다. 미주를 거쳐 본국까지 따라왔으며 사치와 미식을 많이 즐겨본 예왕조차 거금을 주고 영입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요리 솜씨가 뛰어나다. 즉위 후로도 재석의 곁에 남았고 1727년 대한 땅에서 세상을 떠났다.
- 헨드릭 피터슨
재석이 네덜란드에서 고용한 회계사. 대미주에서 재석이 시작한 조선소, 해운업, 광산업의 회계를 맡는다. 재석은 데리고 오고 싶었으나 이들을 대체할 인물이 없고, 알렉상드르와 달리 돈만 주면 계속 고용할 수 있는지라 계속 일하게 한다.
- 레이프 에릭손, 안데르스 다니엘손
재석이 수배국에서 고용한 광산기술자들. 재석의 명으로 광산을 탐색하여 미억대령 너머의 태호[86] 근처에서 은광[87]을 발견하고, 이후 광산 경영을 맡는다. 피터슨과 같은 이유로 계속 미주에 남기기로 했다.
2.3.4. 여흥 민씨
건흥제의 처가.- 민지훈
민성윤의 장남으로 상희의 첫째 오빠. 1656년생. 형부 참의. 건복제 사후 예왕이나 그 아들이 태황이 될 경우 우환을 없애려는 예왕파에 의해 성친왕 일가는 물론 외척인 민씨 가문도 숙청당할 것을 우려하고 있으며, 가문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친왕이 태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건흥제 시대에는 판내직부사 직 등 요직을 지내다가 1729년 사망한다. - 민지상
상희의 둘째 오빠. 1659년생. 대 아파치 원정을 위해 형황이 보내준 1차 원군 2천명을 이끄는 지휘관으로 등장한다. 황실, 이순신, 신립, 이장곤, 고다지의 피를 모두 받은 집안 사람답게 15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34세의 나이에 벌써 정4품 정령이며 능력도 뛰어나다. 한양대화재 직전에 귀국하여 훈련도감 중군(부사령관)에 부임하며, 무인지변 때 피신한 재석 일행을 보호하고 반란군 진압에 나선 공로로 평난 2등 공신에 책봉되며, 수어청을 해편한 무위영 총관으로 승진한다. 대한이 신서반아를 정벌하기로 하자 도원수로 임명받아 출진, 파나마까지 진격하나 본인을 비롯한 많은 군사들이 황열병에 걸려 멕시코까지 물러났다. 종전 후 귀국해 1722년 오군대총관에 올랐다가 노년으로 은퇴했으며, 1734년 금군이 확대개편될 때 명예직인 대한근위대총사 직과, 아카풀코 점령을 기리는 악가백 작위를 받는다. 1736년 사도태자 이은 훙서 직후 사망한다.
2.3.5. 기타 한인
- 안용복
★[88]
장 바르가 사직하면서 추천한 동현 호의 후임 선장. 1659년생. 수군 정위 출신 사관으로 능력이 출중하여, 자유롭게 바다를 누비기 위해 수군을 전역하고 동현 호에 타게 되었다. 집안 대대로 수군에 복무했으며 고향은 주산군도이다. 재석이 태황이 되자 동현 호도 태황 어승선 지위를 얻게 되어 선장인 안용복도 수군에 복귀, 부령으로 승진한다. 홍제원에 전시할 동물들을 수송하다가 스페인과 전쟁이 터지자 참전하여 프랑수아 바르의 프랑스 함대와 합동작전으로 신서반아 여러 항구를 털어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온다. 나이가 든 후에는 현역에서 물러나 해양 측량 탐사 기관인 순해국의 국장이 되었다가 1723년 65세로 은퇴했다.
- 유봉석
재석의 2번째 배인 상춘 호의 선장. 안용복과 달리 상인 출신이다.
- 권훤(權萱)
1671년생. 안동 권씨 집안 장남으로 권율의 양자 권익경의 현손이며[89] 부인 이씨는 이덕형과 롤리타의 아들이었던 이여수의 증손녀이다. 조상 권율처럼 업적을 남기고 싶다는 열망에 빠져있다가 예왕의 모사 최신원의 부추김을 받고 미주로 건너와 성친왕의 전령으로 채용된다. 재석은 이름이 견훤과 비슷해서 꺼림칙하게 생각하고 뒷조사를 해봤지만 부추김을 받기만 했지 예왕과는 연관이 없어 안심하고 측근으로 삼는다. 군공에 목말라 있어 재석에게 미주 대평원을 침공하자고 조르지만 재석에게 거절당한다. 재석이 귀국할 때 얘를 놔두고 가면 정말 미주에서 사고를 칠까봐 강권해서 데리고 온다.[90]
미주에서 세운 공적이 인정되어 종7품 참위 벼슬을 받고 한양대화재 중 용호청 동대문 수문장으로 근무하다 적절한 판단으로 동대문을 개방하여 인명피해를 줄이는 공을 세운다. 무인지변 때도 동대문을 지키면서 예왕군의 습격을 뚫고 나온 성친왕을 돕고 태후가 상황을 수습하러 보낸 선전관과 함께 조정 중신들 앞에서 난의 전모를 밝히는 등 공을 세우고 평난 2등공신이 된다. 벼슬도 5단계나 올라서 부령이 된데다가 강무관에서 교육도 받는 등 희망한대로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다.
디에고의 혼례 때 장인어른이 신부 측 아버지 역할을 맡으면서 친분을 쌓게 된다. 이후 서반아령 필리핀 총독부와의 전쟁에 참전하며, 마닐라 점령에 결정적인 공을 세워 훈 1등을 받게 된다. 그 후에도 본국 귀환을 본인이 거절하고 계속 필리핀 전선에서 활약하여 훈장을 추가로 받고 참장 계급까지 승진한다. 그후 요동주 유군장, 대붕영 총관, 술루국 절제사, 대한북병사, 오군대총관 등 군부의 요직을 거치고 1730년애는 광동 반란 토벌군 도원수로 참전하여 대승을 거두고 돌아와 무관직 최고봉인 삼군부 도총사 직을 역임한 후 1737년 삼정승에 속하는 우참정대신까지 오른다. 사람들은 과거에 정식으로 급제하지 않았는데도 큰 공을 세웠다 하여 무과대장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하며, 사후 충장공이라는 시호를 받고 4대손은 현종 이영의 막내딸 신혜옹주와 결혼했으며, 6대손녀 권나현이 4부에서 황태손에 빙의한 재석의 아내가 된다. - 이마리
이덕형과 롤리타의 현손녀. 1673년생. 권훤의 아내로 롤리타를 꼭 빼닮은 미녀이다. 본인과 상의도 없이 미주로 간 권훤을 잡으러 미주로 쫓아오는 등 롤리타처럼 과감한 성격. 상희와는 본국에서부터 언니동생 할 정도로 친한 사이다. 천주교 신자로 남편이 천주교에 입교하길 바란다. 디에고의 혼례를 전폭적으로 도왔고, 이후 일가와 친한 사이가 되며 도로테아를 의동생 삼는다. 둘째아들 권창(요한)은 천주교도로 길렀고, 디에고의 딸 이사벨라와 결혼한다.
- 박수원
재석이 미주에 있는 동안 올렝카를 소재로 한 음담패설이 돌고 있다는 말을 듣고 범인들에게 인실좆을 시전해주기 위해 정호찬을 통해 고용한 대송인. 정호찬보다 10살 연상인 정호찬의 친한 형으로, 수 년 간의 소송 끝에 상당한 배상금을 뜯어내며 범인들을 일가와 함께 시베리아 추방형에 처하게 했으며, 재석은 박수원의 실력이 쓸만한 것 같으니 보상으로 받아낸 배상금을 박수원에게 다 주고 계속 잘 활용한다. 재석이 귀국한 후 월 은화 100냥에 계약을 맺고 재석의 전속 대송인이 된다. 상희는 재석과 둘이 있을 때는 현대식으로 '박변'이라고 부른다. 재석이 태황으로 즉위한 후에도 여전히 전속 대송인이며, 디에고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게 된다. 나이가 든 후에는 로펌을 세워 젊은 대송인들을 거느리고 있다.
- 조경신
재석이 본국 귀국 후 고용한 서기. 서얼 출신. 서생임에도 의외로 활솜씨가 좋다. 디에고의 집을 관리하고 한국어를 가르친다. 디에고가 남아메리카 원정에 나가자 보좌관으로 동행하게 되며 디에고의 키니네 탈취작전에 적극 협력한다. 페루에서 접한 기니피그, 마카, 야콘 등의 농축산물이 유용하다 생각해서 대한에 도입한다. 1713년에는 박종선의 후임으로 구 완친왕저를 관리하는 집사 일을 하고 있다.
- 김연화
1685년생, 재석이 귀국했을 때 형황이 보내준 내수사 노비 소녀, 연화라는 이름은 재석, 상희 부부가 지어주었다. 연못에 옹기종기 핀 연꽃처럼 화목하게 살라는 뜻이다. 예쁘고 착하고 성실하여 재석이 입궁할 때 데리고 들어가 궁녀로 삼았고 상희의 신임을 받아 측근이 되어 대전 지밀상궁을 지내고 있다. 재석은 연화도 혜련처럼 출궁, 혼인을 시켜줬어야 하는데 때를 놓친 점을 미안해하고 있다. 사실은 대체역사 갤러리의 독자가 쓴 팬픽의 주인공인데 작가가 읽고 감탄하여 본작에 등장시켰다.
2.4. 예왕파
2.4.1. 예왕 일가
예왕이환(譽王李瓛)
열조의 서자, 건복제의 이복동생이자 이현의 이복형. 1662년생, 열조가 총애하던 중국계 후궁 혜비 진씨 소생. 3부 전반부의 메인 빌런. 생모를 닮아 굉장한 미남이며, 물려받은 재산도 많아 형제들 중 가장 부유하고 학식 또한 뛰어나다. 대외적으로는 군자의 표상이라 불릴 정도로 철저하게 모범적인 생활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권력을 탐하는 야심가로, 병약한 건복제와 그 황자들이 죽으면 성친왕을 제치고 제위를 차지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십여년이 흘러 나이가 많아지자 직접 제위를 차지하는 대신 아들 경평공을 건복제의 양자로 입적시켜 대원왕이 되기로 계획을 바꾼다. 모범적인 겉모습과 다르게 집안에서는 음주와 사치를 즐기며[91] 폭력적인 면모도 보이는[92] 이중적인 성격이다.
경쟁자인 성친왕을 제거하기 위해 김종건과 이진원을 암살자로 심어둔다. 이후 통제하기 어려운 야심가 권훤을 성친왕 아래로 보내는 등 여러 수단을 썼지만 모두 실패했고 결국 성친왕의 귀국을 막지 못한다. 후계 경쟁에서 정통성과 공적에서 밀려 패색이 짙어졌고,[93] 재석이 빙의한 성친왕과 대화해본 뒤 성친왕이 실제로 변한 것 같으니 제위를 포기하고 성친왕과 화해할지를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한양대화재가 일어나 이를 계기로 성친왕이 황태제로 가책봉되고 자신이 심어뒀다가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던 암살자 김종건이 살아있음을 알게 되자, 성친왕이 즉위하면 이를 빌미로 자신을 숙청할 것이라 생각하여 조급하게 난을 일으킨다. 병력을 만여명 정도 모으기는 했으나 부족한 지휘 경험과 급조된 반군이라는 한계가 금방 드러났고, 결국 반란은 처참한 실패로 돌아간다. 마포나루의 증기선을 타고 대유주로 탈출하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한강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끝내 실패하고 붙잡혀 진노한 형황에게 친국을 당한다. 동지 전날인 양력 12월 20일, 재석은 그의 자식들은 죽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며 마지막 팥죽 한 그릇을 대접하고 예왕은 눈물을 흘리며 팥죽을 먹은 뒤 사사된다.[94]
시신은 야산에 아무렇게나 묻혔고 재산은 몰수되어 한양대화재 복구비로 사용되며, 북촌의 예왕저는 집을 잃은 카자크 6형제 등 재석의 가솔들에게 임시로 주어졌고, 이후 재석의 둘째 아들 완친왕 이준의 사저가 되었다. 혜비를 위해서 중국식으로 꾸며놓은 생활 공간이 있어, 청나라 공주인 완친왕비가 적응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사후세계를 다룬 외전에서 언급되기를, 죽은 뒤 지옥에서 불타고 있다 한다.
예왕비김씨
김세룡의 딸로 예왕의 정실부인. 1665년생. 남편의 야심을 잘 알고 아비와 함께 동조하며, 궁궐에 자주 들어가 태후, 황후에게 지극정성으로 대하면서 남편 예왕의 입지를 굳히는 공작을 했다. 황후 자리도 욕심이 나고 안동 김씨를[95] 대한 제일의 가문으로 만들겠다는 것을 보면 예왕이 보위에 오를 경우 세도 정치를 실현시키려 한 듯하다. 최종보스치고는 허당스럽고 싸구려 악당같은 면모를 많이 보인 예왕보다 더 침착하고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성과를 낸 것은 없고,[96] 결국 예왕과 함께 체포된다. 김세룡과 김희권의 전향 덕에 폐서인으로 끝나고 목숨은 건진다. 이후 친정으로 돌려보내져 반쯤 연금 생활을 하다가 1712년 병사한다.금산현주이연우
예왕의 차녀, 1691년생. 부모를 닮아 미모가 뛰어나다. 무인지변 이후 마포 성당으로 보내져 아라미츠와 함께 지내게 되는데 공식적으로 출가하여 수녀가 된 것은 아니다. 기도와 성서 읽기만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나이가 차면 아라미츠가 대유주로 보낼 계획이었으나 계미남변으로 계속 미뤄졌고, 언니 연수가 도망가자 연우를 측은히 여긴 상희가 의학교 입학을 주선한다. 1716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의학교를 졸업하자 재석은 연우를 특별 사면하고, 이때 26살이 되어있어 혼기를 놓친 나이였기 때문에 조모 혜비 진씨의 유산을 물려받아 혼인에 보태라고 하며 결혼도 허락한다. 이후 병원일을 하다 만난 서학당 총장 윤두서의 서자 윤덕용과 인연이 닿아 결혼하고 행복하게 산다.
- 혜비 진씨
열조가 총애하던 후궁으로 예왕 이환의 생모. 1645년생. 2부에서 조선에 정착한 명나라 장수 유정이 조선에서 재혼하여 얻은 딸의 후손으로, 열조가 대명묘에 들렀을 때 그 미모가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고 예왕을 낳았다. 40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미인이고, 1698년에도 40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동안. 사적인 대화는 전부 중국어(북경방언)로 하고 아직도 명의 멸망을 슬퍼하는 등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졌다. 매일 원각사에 가는 독실한 불교도인 듯. 정치적인 욕심이 없는 선량한 성품이라 아들의 야심을 전혀 모르고 지냈다. 그러나 예왕이 뜬금없이 난을 일으킨 뒤 실패하여 역적이 되자 큰 충격을 받는다.[97] 그녀가 마포나루에서 아들을 잡으려는 포도청 군관의 앞을 가로막는 틈을 타서 예왕은 한강에 투신했다. 결국 건져져서 다 끌려갔지만. 난에 대해서는 몰랐기에 처벌은 받지 않았으며, 예왕의 가산이 몰수되는 와중에도 그녀가 천 냥 수입의 전답 하나를 소유하는 것만은 허락되었다. 하지만 세상에 절망해서 대명동에 있는 대명사란 절로 들어갔고 1704년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2.4.2. 반란군 주축
- 최신원
예왕 이환의 문객. 예왕의 측근이자 모사. 권신이 되고 싶어서 예왕의 보위 찬탈 계획을 부추겨온 인물. 김종건과 이진원을 암살자로 포섭하는 등 예왕의 뒷공작들을 직접적으로 전담한다. 성친왕이 귀국한 후 한양대화재를 계기로 사실상 태제가 되는 것이 확정되고 김종건의 생존 사실까지 알게 되자 예왕을 부추겨 무인지변을 일으키도록 한다. 이후 난이 실패하자 예왕과 함께 마포나루로 탈출하던 중 붙잡힌다. 난의 주동자에다가 지위도 낮기 때문에 심영준, 박정호 등은 최신원에게 모든 죄를 떠넘겼고 결국 다른 역도들이 참수형을 당한 것과 달리 거열형으로 사망한다.[98]
- 김희준
김세룡의 차남. 족친위 제3연대장으로 무인지변에서 병력 동원을 맡게 되었다. 족친위 병력을 장악해 창덕궁을 습격, 오군대총관 한지권을 살해하고 창덕궁을 봉쇄하지만 본대의 패배 소식을 듣고 본대와 합류한다. 아버지와 형이 역모를 고변한 줄은 전혀 모르고 이제 집안이 다 멸문되게 생겼으니 잃을 게 없다고 생각하여, 족친위 기병들을 이끌고 성친왕을 죽이러 나가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태황의 칙명까지 떨어지자 남대문으로 도망치는 군사들을 막으려다가 군사들에게 짓밟혀 압사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사후 거열형을 선고받으나 이미 죽은 뒤라 부관참시 형태로 집행되었다. 여담이지만 예왕은 김희준이 죽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숙조는 추국할 때 그가 살아서 진술한 것처럼 속여서 예왕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 심영준
한양대화재 당시 한성판윤. 성친왕이 한양대화재 진압과 이재민 구호에 큰 공을 세운 것은 숨기고 한성부 판관 김정균을 폭행한 것만 부풀려 태황에게 모함하나 태황이 성친왕을 불러 자초지종을 듣고 성친왕을 칭찬하는 바람에 닭쫒던 개 신세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성 내에 소문이 퍼지는 바람에 차라리 고자질을 안 한 것만 못하게 되었다. 화재의 책임으로 처벌받게 될것이 확실하자 휘하 한성부 인원들을 동원해 무인지변에 가담한다. 공만 탐하고 지휘관에 협조하지 않아 패배에 일조했고 다른 역도 수뇌부들과 함께 체포된다. 최신원에게 모든 죄를 떠넘기지만 결국 처형된다. 그나마 뉘우치고 자백한다 해서 거열형으로 죽었을 게 참수형으로 바뀐 정도다. 이건 서이혁과 박정호도 마찬가지.
- 서이혁
수어청 총관, 한양대화재 때 남대문 개방을 안 해서 많은 사망자를 낸 책임으로 백의종군하게 되자 처벌을 피하기 위해 무인지변에 가담했다. 고지식하고 견실한 장수로, 지리멸렬 그 자체인 반군 수뇌부 중 유일하게 전술적 식견이 있었고 용병술에 뛰어난 모습을 보인다.[99] 그러나 예왕 본인과 다른 수뇌부들이 모두 군무에 문외한이기에 그의 의견은 반영되지 못했다.[100]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자 부하들이라도 살리기 위해 투항을 주장하며 끝까지 싸움을 주장하던 김희준과 대립했지만 결국 역도 수뇌부와 함께 체포되었다. 남탓을 하며 끝까지 추태를 부린 심영준, 박정호 등과 달리 담담하게 죄를 인정했고,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는 대신 병사들은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며 부하들에게 관대한 처분을 청하고 참형에 처해진다.
- 박정호
금화도감 제조. 한양대화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처벌을 받기 싫어 휘하의 금화군 인원들을 동원해 무인지변에 가담했다. 공을 탐하고 지휘관에게 협조하지 않아 패배에 일조한다. 패주 후 책임소재를 놓고 심영준과 다투는 추태를 보인다. 반란 막바지에 전략 견해 차이로 다른 지도부와 다투다 그대로 관군에 생포된다. 친국에서 심영준과 똑같이 겁을 잔뜩 먹고 태황에게 목숨만 구걸한다. 결국 참수형에 처해졌다.
- 차병헌
수어청 2대대장. 성친왕저에 방화하고, 자기 본분을 다하고 있던 금군들을 살해하였으며, 민간인들까지 살해하는 등 악행이란 악행은 골라서 했다. 이 죄로 다른 반란군 연대장, 대대장들이 참수형에 처해지는 것과 달리 거열형[101]으로 처형되었다. 부하들도 연대책임을 졌는데, 다른 반란군 부하들이 하급장교들은 인도 파견되고 병사들은 불명예 제대 및 화재복구 노역에 동원되는 선에서 끝난 것과 달리 2대대 병사들은 장 100대를 맞고 북변에서 3년간 노역에 처해졌고, 인도 파병 자원 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
2.4.3. 기타 지지세력
- 김희권
김세룡의 장남. 형부 협판. 예왕파로 활동했으나 예왕, 최신원, 김희준 등이 거사를 일으키기 직전에야 알게 된 아버지 김세룡과 함께 전향해서 재석에게 역모가 있음을 알린다. 재석이 적에게 포위된 성친왕저를 탈출할 때 훈련도감에 데려가 훈련대장 등 증인들 앞에서 증언을 기록하여 권훤을 통해 태후와 조정 대신들에게 보고한다. 평난 3등공신에 책봉되었지만, 상술한 이유로 아버지와 함께 관직을 내려놓고 낙향했다.
- 박종훈
이부대신. 예왕파이며, 성친왕이 미주에 머물며 원미주를 장악해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 폈다. 성친왕 귀국 후 수행원이었던 이형준, 정호찬, 홍상훈을 새로 발령 보내야 하는데 정황상 이를 태업한 것으로 보이며, 결국 이들은 5개월 만에 보직을 받았다. 재석이 대리청정을 하게 된 이후로 낭패감에 휩싸여 있으며, 어차피 화재복구에 이부는 할 일이 없는지라 문서 정리 정도를 시켰다. 무인지변 이후에는 다함께 사직을 청하나 일단은 반려되고, 상술한 잘못이 있어서인지 이마에 피가 나도록 머리를 찧으며 난에 대해 몰랐다며 무죄를 호소한다. 재석의 태황 즉위 후 사임해서 중추원에 들어갔고, 전력 때문에 앞으로 벼슬길은 사실상 막혔다.
- 남지원
예부대신. 예왕파이며, 역시 성친왕이 미주에 머물며 원미주를 장악해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 폈다. 재석이 대리청정을 하게 된 이후로 낭패감에 휩싸여 있으며, 화재복구에 할 일 없는 건 예부도 마찬가지라 문서 정리 정도나 시켰다. 난 이후에는 다함께 사직을 청하나 일단은 반려되고, 난에 대해 몰랐다며 무죄를 호소한다. 재석의 태황 즉위 후 사임해서 중추원에 들어갔고, 전력 때문에 앞으로 벼슬길은 사실상 막혔다.
- 유진승
한양대화재 당시 대사헌, 성친왕의 대리청정에 반대 의견을 내나 건복제에게 핀잔만 듣는다.
- 심석정
연가제 시절 좌승상까지 지낸 심기원[102]의 3남. 이부대신을 역임했고 현재는 중추원 참의다. 예왕의 장남 경평공에게 딸을 시집보내서 확실한 예왕파로 자리매김해 원역사의 가해자의 후손과 피해자의 후손이 손잡는 재밌는 일이 일어났다. 난에 대해서는 몰랐기 때문에 딸이 혼인한지 110일 만에 이혼을 명령받고 친정으로 돌려보내지는 것으로 끝났다.
2.5. 조정
황실과 다르게 조정에는 실존 인물들이 다수 등장하는 편이다. 그러나 대한이 원역사의 조선과 완전히 다른 길로 접어든 만큼, 실존 인물들 다수가 운명이 뒤바뀌었다.2.5.1. 내각승상→국무총리대신
삼승상의 명칭은 선조의 칭제건원 후 영의정이 내각승상, 좌, 우의정이 좌, 우승상으로 변경되었으며, 건흥제가 6부를 12부로 개편한 후 1717년경 다시 내각승상을 국무총리대신(국상), 좌, 우승상을 좌, 우 참정대신(좌상, 우상)으로 변경한다.- 조복형
3부 초기 내각승상. 선제인 열조 때부터 조정 고위직에 있었던 노신이다.
- 김주원
조복형의 후임 내각승상. 하와이 복속 문제에서 김세룡의 편을 든다.
- 김세룡(金世龍)★[103]
예왕의 장인. 안동 김씨 가문으로 김자점의 손자. 이부대신 → 우승상 → 내각승상. 장남 김희권은 형부 국장, 차남 김희준은 족친위 대대장이다. 예왕의 계획을 잘 알고 전적으로 협조하고 있으며 조정에서 예왕의 인맥을 넓히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성친왕이 살아서 귀국한 다음에는 일단 성친왕이 태제가 되는 것부터 막은 뒤 미주왕에 봉해 미주로 쫓아내고[104] 태자가 된 이은은 적절하게 처리한 다음 예왕의 아들을 옹립하기로 계획을 바꾸고 성친왕의 아들이 보위를 물려받을 것이라고 분위기를 몰아간다. 그러나 성친왕이 한양대화재를 계기로 대리청정을 맡으며 입지를 확실히 굳히게 되자, 재석도 의아해할 정도로경력있는 신입성친왕의 국정 능력을 극찬하고, 한편으로는 예왕에게는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메세지를 전한다.[105]
그러나 예왕이 조급해져서 성공 가능성이 낮은 난을 일으킨 것을 뒤늦게 알자 즉시 예왕을 손절, 성친왕에게 장남 김희권을 보내 고변했다. 재석은 양다리를 걸친게 아닌지 의심했지만, 김세룡은 난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서 빨리 고변하려 뛰어가다 계단에서 굴러서 부상을 입었고, 그 상태로 내관에게 업혀서 기다시피 태후전을 찾아와 고변할 정도로 진심으로 난을 막고자 했다. 난이 끝난 후에는 조정을 제대로 이끌지 못한 죄로 전원 사직을 청하나 태황이 난의 수습 이후로 미룬다.
난을 고변한 공로로 평난 1등공신에 책봉되고, 숙조가 붕어할 때 고명대신으로 유언까지 들었다. 사실 예왕은 김세룡이 음모에 가담했다고 진술했으나, 금위사 관원들을 포섭해둬서 증거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처벌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뿐, 이후에도 얼마든지 문제삼을 수 있기 때문에 재석이 태황이 된 후에는 관직을 내려놓고 낙향했다. 후세에는 국가를 위해 혈육을 버린 멸사봉공의 대표적 인물 또는 줄타기의 달인이란 엇갈린 평가를 받을 듯. 1704년 70세로 사망. 4부에서 언급되기로는 그의 후손들도 아무래도 세간의 눈치를 보느라 벼슬에 나서지 않고 낙향해서 지내다가, 증손자 대가 되어서야 벼슬길에 나섰다고 한다.
- 남구만★
중추원 영사 → 좌승상 → 내각승상. 내각이 다 사표를 낸 상황이라 친국 후 태황을 접견하는 데 동행한다. 중추원에 있는 것을 보면 실존인물과 똑같은 명신으로 보인다. 과거 좌승상을 지냈으며, 좌승상이 공석이라 재석이 대리청정 중 좌승상으로 올렸고, 태황이 된 후에는 내각승상이 되었다. 이형준 사망 후 자신도 75세로 노환이 있다며 은퇴한다.
- 민성윤
대제학 → 우승상 → 좌승상 → 내각승상. 1635년생. 상희가 빙의한 성친왕비 민씨의 부친으로, 영창대군의 외손자. 작위는 양화백(楊花伯) → 양화후. 성친왕의 스승 이형준과는 과거시험, 성균관, 집현전까지 함께 한 절친으로 현재도 자주 서신을 왕래하고 있다. 재석이가 하와이에서 보내온 카우이 일행에게 책임지고 조선인으로서의 예법을 가르쳤다. 사위가 벌인 사업이기도 하고, 그게 유자로서 마땅히 져야 할 짐이라는 제국주의 시대스러운 사고를 드러내기도 했다.
송시열의 제자이며, 그가 사망한 후 관직을 잠시 내려놓았다. 태자가 병사한 후 태황의 건강도 악화되자, 아들들과 논의 끝에 사위를 밀어준다는 오해를 사더라도 스승이 그랬듯이, 동복동생인 성친왕이 보위를 이어야 한다는 원칙대로 행해야 한다고 결정한다. 예왕파의 세력을 알고 반발을 예측함에도 선비의 의기를 보이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을 보면, 예왕은 보위에 부적격하다는 나름의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태황이 자신의 후계 문제를 더이상 논하지 못하게 한 회의에서 태황이 성친왕을 태제로 봉하고 싶어한다는 의사를 제대로 읽어냈고, 결국 성친왕은 태제가 되었다. 난이 일어났을 때 마침 집에 있었는데, 예왕에게 민성윤 일가를 몰살하라는 지시를 받은 장희재가 성친왕 편을 들면서 호위병력을 보내줘 무사했고, 태후가 보낸 선전관, 권훤과 함께 조정에 복귀했다. 난 이후에는 다함께 사직을 청하나 당분간 반려되고 평난 1등공신에 책봉[106] 된다.
성친왕이 태황으로 즉위하면서 국구(國舅)가 되었고, 무인지변 후 내각에서 유일하게 유임되고 좌승상에 기용된다. 재석은 외척과 총신에 의존하는 정치는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어차피 나이들이 많으니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형준이 먼저 사망하고 남구만이 은퇴하면서 70 노구에 내각승상 직위를 맡게 된다. 태황태후의 국상을 치른 후 1709년 은퇴하고 중추원에 들어간다. 1717년 노환으로 사망한다.
- 성시균
건복제가 성친왕에게 미주 이동을 명령하러 보낸 칙사. 예부 소속, 정4품. 1646년생. 독실한 천주교도지만 원칙을 중시하는 성격이라 재석이 로마에 잠시 다녀오도록 허락했음에도 공무 중 다른 일을 할 수 없다며 거절한다. 성친왕의 개과천선한 모습에 크게 호감을 가져 귀국 후에 형황에게도 좋게 보고하고 조보에도 성친왕이 유럽에서 쌓은 업적들에 대해 기고문을 써주는 등 재석의 편이 되어 준다. 태후가 간택한 새 성친왕비(상희)를 모시는 칙사가 되어 대미주를 찾는다. 본인도 성친왕이 받은 동변관리사를 보좌하고 감시하는 동변감리사 직위를 받아 성친왕 곁에 있게 된다.
숙조의 최측근으로서 성친왕이 진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증언해준 은인으로, 재석 역시 그 호의를 이용하지 않고 그의 직책을 존중하며, 월권 문제가 있을 수 있는 권한 행사는 일일이 묻고 일을 진행할 정도로 처신을 잘 했다. 성친왕에게 귀국령이 떨어지고 후임 동변관리사가 되었다. 재석이 태황이 된 후 이종덕을 귀국시키면서 후임 미주대총관이 되었으며, 1년 후 재석이 지선성에 두고 간 짐을 다 갖고 귀국했다.재석은 일단 중추원 자리를 주고 유급휴가라고 할 수 있는 사가독서를 명했고, 비선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이형준이 사망하고 남구만이 은퇴하면서 좌승상 직위에 올랐다.
이후 스페인, 영란 연합과의 전쟁에서 건흥제가 원하는 조건대로 종전 협정을 조인시킨다. 태황태후 국상 후 민성윤이 노령으로 은퇴하자 내각승상으로 승진한다. 유구국을 무력으로 번국화하려는 건흥제의 계획에 대해 그러면 일본을 자극하여 을미동정 이래로 유지되던 우호관계가 깨질 것이라고 설득하여 단념시킨다. 1716년경 병이 들어 사임하고 1719년 노환으로 사망한다.
- 최석정★
재석이 태황이 된 후 첫 공부대신이자 최명길의 손자. 무인지변 후 재석의 총신이 된 장성준이 내각이 다 사직하는데 혼자만 유임될 수 없다며 대신 후임으로 추천했다. 원역사의 인물처럼 수학에 능해서 산학원 수학 교수를 하고 있었고, 뛰어난 능력에 다 전임자의 공으로 돌리는 겸손한 성품도 갖고 있다. 1709년에 우승상에 올랐으며, 1712년 만 66세가 되자 은퇴를 청했지만 아직 한참 더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한 재석은 오히려 철도도감 도제조직까지 겸직시켜 공밀레질을 시전했다. 재석이 은퇴를 반려하며 내각승상은 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성시균이 병으로 사직하는 바람에 내각승상의 명칭을 국무총리대신으로 변경하여 최석정을 국무총리대신에 앉힌다. 바쁜 와중에도 '수학소론'이라는 수학책을 발간해 서학당 수학 교과서로 채택된다. 연로하고 쇠약해졌음에도 재석이 재택근무라도 좋으니 총리대신 직을 지키라고 하여 혹사당하고 있다. 그 후 '수리대전'이라는 책도 한편 더 내고, 1721년 음력 3월 1일 경인선 철도 개통식에 참석한 뒤 드디어 사직을 허락받으나 그날 밤 수면 중 사망한다.죽음으로 탈출하셨다!
- 김성권
재석이 미주에 있을 때 본국에서 온 미주 총관부 형부 부장. 노골적으로 예왕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직계황족인 성친왕을 깔아뭉개는 망언을 하고 성친왕과 대놓고 싸우자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성친왕이 문제 삼았으면 파직은 물론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을 심각한 사안이었지만 당사자인 재석 본인이 문제삼을 생각이 없었고, 공론화할 경우 미주대총관에게도 불똥이 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인지 총관부에서는 2개월 감봉이란 가벼운 징계를 내렸다.가장 좌불안석일 사람일 것이다무인지변 후 재석에게 보복성 숙청을 당할까봐 두려웠는지 사직을 청했으나 반려당하고, 재석은 최소 5년은 임지에서 일하게 할 생각이었는데 5년씩 계속 임기를 연장시키다 보니 김성권은 어느덧 20년째 고국을 못 가고 미주에서 일하면서 본인의 사직 신청까지 계속 반려당하다 어느새 미주대총관까지 오르게 되었다. 본인은 용서받은 것인지 벌을 받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한탄하고 있다. 20년 만에 겨우 귀국한 후 식민정책에 대한 최고 전문가라고 우참정대신으로 승진, 그 후 국무총리가 되어 일인지하 만인지상이 되었으나 여전히 일에 갈려나가고 있다. 미주에서 처벌 아닌 처벌을 받으며 오래 있은 탓에 재석의 의중을 파악하고 거기에 따라 일하는 편이다. 1728년 드디어 은퇴를 허락받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나 재석은 사임하는 게 아쉬워서 우는 것으로 아전인수격 해석을 한다. 심지어는 1730년 미주에서 아파치가 다시 변경을 노략질하자 재석은 이 노인을 다시 복직시킬 생각까지 할 정도였으나 민지원이 말려서 포기했다. 1735년 노환으로 사망하였고 김성권 사후 미주에서 장길산이 도적질을 하며 날뛰자 재석은 장길산이 날뛰는 것이 김성권이 미주를 떠나서라고 역정을 부릴 정도다.
- 민지원
상희의 막내 오빠. 1661년생. 한림원 학사. 큰형과 달리 정치권력의 생리를 아직 모르는지, 예왕이 태황이 될 경우 불어닥칠 숙청과 성친왕의 아들이 태황이 될 경우 버팀목이 되어줘야 할 태후와 황후와 자신들 가문이 힘이 없어 금방 예왕파에게 밀려날 거란 위기감을 못 느끼는 안일한 모습을 보이지만, 건흥제 즉위 후 재석을 보좌하며 1722년 대사성, 1726년 내무대신으로 올라 삼형제 전부 출세가도했다. 출궁한 혜련을 수양딸로 맞아 의학교를 마친 후 내의원 취재 준비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김성권이 은퇴한 후 국무총리대신 자리에 오른다. 1736년 사도태자와 형 민지상의 죽음을 겪고 본인도 기력이 쇠해져 사직한다.
- 이광좌★
1730년의 외무대신. 1735년에는 좌참정대신을 지내고 1736년 민지원이 은퇴하자 국무총리로 승진한다.
2.5.2. 좌, 우 승상 → 참정대신
- 강기석
호부대신 → 좌승상. 작위는귀주백 → 귀주후. 건복제의 총신이자 성친왕의 장인. 자신의 딸이 생과부가 될 것을 알면서도 성친왕에게 시집보냈지만, 딸이 마음고생 끝에 사망하자 슬퍼한다. 이후 제2차 빈 공방전에 대한 보고가 올라오고, 성친왕에 대한 처우 문제가 나오며 현왕이 이를 치하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사적으로는 사위지만 명백한 사전죄라며 과거 이기빈을 백의종군에 처한 예를 들어 반박했다. 사실 이때 딸인 성친왕비가 죽은 직후인데다, 그 사인이 성친왕의 참전 소식에 충격받고 중병에 걸린 것, 즉 원인제공자가 성친왕인지라 성친왕을 좋게 볼 리가 만무했다. 이후에도 성친왕과 관련해서 조정에 분쟁이 벌어질 때 대체로는 그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에 서거나, 이후 장인인 대제학 민성윤과 함께 중립을 지킨다.
이후 병을 이후로 현직에서 물러났으나, 태황이 중추원 판사로 봉해 여전히 국정을 의논한다. 세월이 지나 딸의 죽음으로 인한 원한도 희석되어서인지 성친왕에 대해서도 중립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황태자 이원 사망 후의 후계 구도를 논할 때에는 예왕의 편을 든다. 좌승상으로 복귀한 다음에는 아무리 딸의 죽음으로 인한 원한이 희석되어도 성친왕이 태황이 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는지, 예왕파의 의견을 따르며 예왕파와도 교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인지변이 일어나서 반란군이 창덕궁을 포위할 때 삼정승 중 유일하게 궐내에 있었는데, 이에 분노한 태황이 예왕 토벌 명령을 내리려다가 쓰러지자, 성친왕이 태황이 되면 폭군이 될 게 뻔한데 차라리 잘됐다며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일단 궁을 봉쇄하고 아침까지 상황을 기다리자고 몰다가, 아침이 되어 성친왕의 승리가 확실해지고 태후가 상황을 수습하러 나오자 사라졌다. 이후 대전 외진 곳에서 비상을 먹고 자결한 채 발견되었다. 남긴 유언이나 유서는 없지만 자결한 시점이 조정을 움직이지 못하게 막은 직후로 보인다는 점에서 최소한 예왕파의 행동을 막으려는 의도는 확실해 보인다.[107] 태황 역시 궁에서 자살한 불경죄만 물어서 작위를 박탈하는 것 외엔 지방관으로 있는 두 아들들을 포함 어떠한 처벌도 하지 않으며, 재석도 딸 강씨를 황후로 추존한다.
- 윤시현
건흥제 즉위 후 첫 예부대신. 서, 준가르, 벵골까지 포함해서 후송만 빼고 주변국에 다 가본 베테랑 외교관이다. 외교 업무 뿐만 아니라 교육, 보건, 예술, 제례가 다 예부 소관이라 과로에 시달리고 있다. 1717년에는 좌참정대신(좌상)으로 승진했었으나 그 직후 노환으로 사망한다.
- 이신경
1726년의 우참정대신.
- 조진경
1726년의 예무대신. 인현황후 사후 홀로 된 건흥제에게 새로 중전을 들일 것을 건의한다. 그 후 우상으로 승진한다.
2.5.3. 6부 대신 → 12부 대신
- 송시열★
예부대신. 3부에서 처음 등장한 한인 실존인물이다. 원역사처럼 집현전을 거치지 않은 재야 성리학자들인 산당의 영수로 능력은 뛰어나지만 말이 거칠기로 유명하다. 논란이 생길 때마다 성친왕을 벌하자고 주장하긴 하는데카토세상이 바뀐 만큼 1, 2부의 사림파처럼 무작정 성리학적 명분만 들먹이는 게 아니라 국제관계와 현실을 정확히 파악한 것을 근거로 성리학적 명분을 내세우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예왕에게 동조해서 성친왕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게 권한을 주려는 김세룡의 음모를 막는 등 도움을 주고 있다.[108] 건복제도 노신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가 발언하면 중간에 끊지 않는다.
을병대기근이 발생한 시점에서는 노환을 이유로 관직을 내려놓고, 이 늙은이가 축낼 곡식으로 백성을 살리라며 스스로 곡기를 끊어 1696년 향년 90세로 사망한다. 문정공이라는 시호를 받고 문묘에 배향되는 영예를 누렸으며, 원 역사에서도 오래 살긴 했지만 이 세계관에서는 더 살고 죽음도 자의로 택했으며, 당쟁이 없어 정적들을 사문난적으로 몰지도 않았고, 죽음도 백성을 위한 희생이었으므로 실제 역사보다 더 추앙받게 되었다. 더군다나 그의 제자들인 이형준은 건흥제의 스승이자 우승상, 민성윤은 국구(國舅)이자 좌승상이 된데다가 한때 악동이었던 성친왕이 황제에 걸맞은 학식을 갖추게 된게 이들 덕이라고 대외적으로 알려졌으며, 건흥제가 뛰어난 업적을 세웠으니 더 높은 평가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슈타인호프 작가가 4부 연재 중에 댓글로 밝힌 바에 의하면 재석 빙의 전 성친왕을 잠깐 가르쳤다가 학을 떼고 팽개쳤다고 한다.
- 이인엽
성친왕이 하와이를 정복한 시점의 호부대신. 송시열의 하와이 복속 비판을 비난하면서 적당한 물품만 하사하고 명목상 백성으로 두기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 이완[109]
성친왕이 하와이를 정복한 시점의 병부대신. 군사적인 관점에서 하와이 점유가 이익이 된다[110]고 주장하면서 하와이에 설치할 수군진만큼은 병부 관할에 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존경하는 선배인 이원기의 청도 있고, 성친왕이 아파치 토벌전에서 보여준 신중한 용병술을 보고 성친왕이 보위에 오르는 것을 지지하고 있다. 난 이후에 다함께 사직을 청하나 일단은 반려된다. 재석의 태황 즉위 후 중추원에 들어갔으며, 성시균의 후임 동변관리사로 임명되었다.
- 장성준
공부대신. 3부 시점에선 국가적 사업인 대규모 토목 사업이 거의 끝난 상태라 뭔가 공을 세울 거리가 없나 혈안이 돼있다. 그런 조바심에서 나온 게 개량된 증기선과 증기기관차. 바람 걱정 안하고 움직일 수 있는 증기선을 만들고 궤도마차가 운용 중이니 소형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차를 만들면 미주에서 식량 들여오기 쉬워져 기근을 해결할 수 있다며 개발할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당장 현실성은 없다는 다른 신하들 반대에 부딪히긴 하지만 재석도 혼자만 생각하고 있는 걸 벌써 실체화하려는 위엄을 보여준다.
예왕파로 밝혀지나, 그냥 선비로서 예왕이 더 낫다고 생각한 정도라 무인지변 이후에도 박종훈이나 남지원처럼 적극 무죄를 주장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기술관료라 재석의 명령에는 잘 따른다. 다만 한양대화재 후 도시를 재개발하려는 재석의 구상을 이해하지 못해서 되묻긴 한다. 난 이후에는 다함께 사직을 청하나 일단은 반려되지만, 도성 복구 과정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이면서 완전한 재석의 최측근이 되었다. 그래도 다들 사직을 청했는데 자신만 예외일 수 없다며 관직은 내려놓지만, 재석은 그를 중추원에 보냈고 처음 증기기관차를 주장한 인물인 만큼 열기창 도제조로 임명한다. 1710년 드디어 증기기관차 시제품을 완성한다. 증기기관차 개발에 성공하자 육군부의 예산까지 타내기 위한 장갑열차 개발까지 구상하는 등 2부의 김지 같은 모습을 보인다. 71세때인 1712년 첫 철도 노선인 경인운하선과 평양탄광선 개통을 앞두게 되나, 경인운하선 개통을 4년 앞둔 1717년 향년 76세로 사망한다.
- 이맹전
호부대신. 을병대기근으로 인해 조정에서 원미주 개척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는데, 성친왕이 이에 반대하는 장계를 올리면서 조정에서 논쟁이 일어나자 성친왕의 논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걸 근거로 강력하게 반대해서 건복제를 설득하고, 여기에 더해 성친왕의 귀국에 대해서도 전향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든다. 이제 대한이 농사만 짓고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닌 만큼, 유주와 미주 사정을 잘 알고 나라를 위해 잘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성친왕이 보위를 물려받길 바라고 있다. 난 이후에는 다 함께 사직을 청하나 일단은 반려된다. 재석의 태황 즉위 후 중추원에 들어갔으며, 이종덕 후임 미주대총관이 되었다.
- 권정구
형부대신. 성친왕과 예왕 중 편을 정한 것 같진 않으나, 전과자가 또 죄짓는 꼴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라서 성친왕이 진짜 개심했을지 다소 의심하고 있다. 난 이후에는 다함께 사직을 청하나 일단은 반려된다. 재석의 태황 즉위 후 관직을 내려놓고 중추원에 들어간다.
- 송재권
건흥제 즉위 후 첫 병부대신. 작중 조선의 학사장교라고 할 수 있는 향도로 복무하고 그대로 군대에 눌러앉아 병부 문관으로 재직해서, 2부의 김명원 같이 후방지원에 더 적합한 인물이다. 하와진첨사가 하와이에서 대규모로 일어난 반란을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재석이 어사를 보내기로 했는데, 다른 해외 주둔지에도 보내 전반적인 군 기강 확립을 건의해서 그렇게 하기로 한다. 후송과 관계를 정상화하면 염초를 자유롭게 수입할 수 있고 경험을 쌓은 선원들이 많아져서 해군력이 강화될 수 있다는 이유로 우려를 표했지만, 사절단이 다녀와서 이미 염초는 엄청난 양을 자급자족하고 있다고 보고하자 전자의 우려를 접고 교역에 찬성한다.
- 황재선
건흥제 즉위 후 첫 호부대신. 6부를 두루 경험했고 학식도 풍부한 노신이다. 다만 66세나 되어서 재석도 징검다리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후송에 사절단이 다녀온 후 '이미 후송은 교역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으니 봉쇄는 무의미하다'는 논리로 교역을 찬성하고, 더 나아가 어차피 각국이 증기기관을 만들 것은 필연이고 대한이 쌓은 기술과 경험을 단숨에 능가할 수는 없으니 증기선을 보내서 교역하자는 의외로 현실적이고 개방적인 면모를 보인다.
- 김희중
건흥제 즉위 후 첫 이부대신. 새로 찍어내는 화폐의 이름을 '건흥통보'로 하지 않는 것에 아쉬움을 표하며 처음 등장한다.
- 김회정
건흥제 즉위 후 첫 형부대신. 말 그대로 대쪽같은 사람이다.
- 이정현
1715년경의 예무대신. 봉상시 도제조이다가 예부가 예무부와 외무부로 분리될때 예무대신으로 승진했다. 조정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유자의 짐을 거론하며 부자, 형제, 숙질간이 서로 황위를 놓고 싸우는 무도한 무굴국을 대한이 쳐 교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등 유교 탈레반스러운 모습을 보여 재석이 학을 떼고 중추원으로 보내버렸다.
- 남형준
이정현 후임 예무대신. 예법에 밝으며 점잖은 사대부로 이정현과는 반대로 온건파이다.
- 허인원
허준의 증손자로 초대 의무대신. 명의 허준의 가문의 명성과 높은 의술로 태의까지 오르고 조직 통솔력도 좋기에 의무대신에 발탁되었다.
- 박권★
1726년의 학무대신. 표트르의 진위사로 고령위를 추천한다.
- 조득신
1728년의 외무대신.
- 이경암
1729년의 내무대신. 1662년생.
- 서종태
1729년의 내무대신. 1662년생.
- 성시진
1735년의 재무대신.
- 신현규
1735년의 예무대신.
2.5.4. 금위사장
- 박중현
3부 초기 시점 금위사장. 유능하지만 업무에만 충실할 뿐 개인적인 의견 제시는 하지 않는다. 예왕의 평소 행실이 지나치게 완벽한 것 때문에 의심한다. 유능한 모습을 보였지만 15년이나 장기 재직하면 조직이 타성에 젖어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이유로 황태자 이원 사망 이후 해임되며 호성후에 봉해진다. 건복제의 예상대로 박중현은 예왕의 처신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고 건복제가 직접 금위사의 감시망이 허술해질 수도 있다며 암시를 줬지만, 깔아놓은 첩보망이 예왕에게 무력화되었다는 것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111]
- 김창균
박중현의 후임 금위사장. 의금부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수사관 출신으로, 의도적으로 조직 쇄신을 위해 금위사 외부 출신 인사를 기용했다. 부임하자마자 금위사의 많은 문제점들을 개선했고, 특히 예왕을 감시하는 금위사 정보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도 알아내고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 그 결과로 예왕이 장옥정에게 귀비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아낸다.[112] 전임 박중현과 달리 적극적으로 자기 의견을 내는 성격이다. 예왕에 대한 금위사 감시망이 구멍이 뚫린 것을 알았고, 예왕을 명백한 위험요소로 파악하고 대책을 건의했던 것을 보면 분명 유능하긴 하나, 가족에 대한 정이 남다른 태황이 이를 반려했고 설상가상으로 한양대화재로 금위사가 전소되어서 무인지변을 막는데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다. 금위사장으로서는 난을 못 막는 죽을죄를 저질렀으니 참형에 처해져도 이상하지 않았겠지만, 상술한 사정이 참작되어 해임 및 유구국 파견이라는 가벼운 문책으로 끝났다.
- 박헌종
건흥제 즉위 후 첫 금위사장. 전임자와 달리 포도청 출신으로, 김창균이 금위사장일 때 부장이었고 해임 후엔 금위사장 대리였다가 정식으로 임명했다. 예왕의 딸 이연수가 탈출한 책임을 지고 자진 사임했다.
- 공승택
박현종의 후임. 의금부 출신이었다.
2.5.5. 익문사장
- 양대식
해외정보 수집을 담당하는 익문사의 수장. 필리핀에 중국인으로 위장한 첩보망을 까는 등 매우 유능한 인물로 보인다. 10년간 근무 후 사가독서 휴가를 받아 물러난다. - 임승덕
양대식 후임 익문사장. 필리핀에 첩보망을 깔았던 양대식과 정반대로 무사안일하게 굴다가 유구의 칭제를 놓쳐 해임당한다.
- 김광리
임승덕 후임 익문사장. 부지런하고 성실하지만 임기응변을 잘 못하는 단점이 있다. 후송의 철갑선 건조를 놓쳐 질책당한다.
- 조하제
김광리 후임 익문사장.
2.5.6. 외관(外官)
- 조기철
건복제 때의 골가타 총관. 견서사로 추방되는 성친왕 일행이 천축국에 들렀을 때 막대한 양의 보석, 미희, 명주를 바쳤는데 이를 안 건복제가 진노하여 감찰을 실시한 결과 막대한 양의 부정축재를 한 것이 들켜서 파직되고 북방으로 귀양 간다. 관례대로 묵인되던 재물까지 몰수당했다는 이례적인 조치임이 감안돼서인지 골가타에서 모은 재물 몰수와 본인 정배로 끝났다.
- 이연성
건흥제 때의 골가타 총관. 조기철과는 정반대로 청렴하고 강직하며 무굴 황실과의 관계도 좋은 유능한 외교관. 현지에 파견될 파천군의 지휘도 맡게 되었다. 계미남변으로 5년간 본국과의 연락이 끊기고 마침 무굴 황제 아우랑제브가 사망하며 인도에 내전이 일어나자 섣불리 개입하기보다는 본국과의 연락이 회복될 때까지 거점을 굳게 지키는 쪽을 선택, 약탈물을 기대하던 휘하 장졸들은 불만이었지만 재석은 신중한 판단이었다고 오히려 치하하고 교대시켜 준다. 그러나 돌아온 파천군이 콜레라를 옮겨오는 바람에 콜레라로 죽었거나, 살았다 해도 콜레라 대유행의 책임을 지고 문책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 이성은
이연성 후임 골가타 총관. 외수사에서 30년간 잔뼈가 굵은 상인 출신으로, 군재는 없지만 어느 쪽이 유리한지 판단하고 붙는 능력이 탁월해 내전 중인 인도에 파견하기 딱 적임인 인재다. 천축 내전에서 최후의 승자인 플루크시야르에게 베팅한 게 맞아들어가 관세 면제 특권을 받아낸다.
- 배원식
이성은 후임 골가타 총관. 무굴 제국이 마라타 동맹, 영국 동인도회사, 나디르 샤에게 연속으로 털리고 붕괴되는 과정을 목격하며, 신임 태수 사파라즈 칸에게 면세 혜택 철회라는 날벼락을 맞자 진작에 병력 증강을 요청했는데도 건흥제가 너무 인도 쪽은 신경을 쓰지 않다가 이런 일이 생겼다고 불평한다.
- 신창훈
대남주 도독. 필리핀의 서반아 총독부가 벌인 학살을 피해 피신온 난민들을 보호하고 이들의 증언을 취합해서 보고했으며, 이후 직접 진상조사를 하러 온 남국순변사 김만중을 맞이한다.
- 송명규
박다도호부(하카타)에 있는 구주총관부의 구주대총관.
- 김익무(金益茂)
상트 페테르부르크 주재 익문사 주재관.
- 이인좌★
서나라 수도 성도에 주재하는 주서사. 역사의 변화로 역적이 될 일이 없어졌고, 재석은 그런 이인좌를 역사가 확실히 달라졌다는 상징처럼 느꼈기에 더 중용했다. 그러나 서나라의 내전에 휘말려 광동왕에게 유폐당했고, 박문수와 함께 탈출하던 중 광동군의 총에 맞아 살해당한다.[113] 사후 정2품상 금좌광록대부에 추서되었고 대한군이 광동으로 보복 원정을 떠나게 된다.
- 최기열
심양회맹 당시 요동주 도독.
2.5.7. 기타 관원
- 김만중★
1697년[114] 시점의 예부협판. 건복제의 명을 받아 용산 강가에서 성친왕을 마중했다. 이형준과 친분이 있는 사이. 인기 소설 구운몽의 작가로 유명한데 원역사의 구운몽과 내용이 달라지고 스케일이 커지며, 정치 상황이 변해 사씨남정기는 쓰지 않았다.[115] 스페인에서 필리핀 거주 한인들을 학살한 사건이 터지자 남국순변사로 임명되어 피난민들이 모인 대남도에 가서 성실하게 조사하고, 더 정확한 진상 규명을 위해 필리핀으로 직접 떠난다. 드 에체바리 총독을 만나서 보름에 걸친 치열한 논쟁 끝에 한인들을 화형에 처하고 사당을 불태워서 임금을 모독했다는 명분을 확보하고, 억류되어 있던 관료들과 상인들을 송환받게 된다.
- 김정균
한양대화재 당시 한성부 판관. 화재로 혼란한 틈을 타 도둑질을 하는 자들을 잡기 위해 돌아다니던 중 인명구조를 하던 성친왕 일행과 마주치고 도적으로 오해해서 체포하려 했다가 재석에게 폭행당한다. 예왕파인지 아닌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본의 아니게 황자들 간의 난을 일으키게 되는 나비 효과를 불러왔다.
- 우진기
건흥제 시기의 첫 한성판윤. 도성 복구 현장을 순행하는 재석을 수행한다.
- 고인선
전 병부협판. 후송 선박들을 출항세만 받고 통과시켜둔 뒤 해적으로 위장한 전선으로 모두 털어버리자는, 즉 사략선을 운용하자는 제안을 했다가 그 자리에서 파직당한다.
- 이세홍
건흥제 즉위 후 처음 등장한 대사헌. 시대가 바뀌어서 성리학 뿐만 아니라 서학, 산학, 라틴어, 스페인어에 능숙하지만, 재석이 무종 때 겪은 사림들이 성리학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런 사람들이란 걸 깨닫게 해준, 매우 꼬장꼬장한 원칙주의자다. 성친왕의 사생아라고 주장하는 디에고를 바로 추방하고 이에 관한 논의를 금할 것을 주장하며, 종2품임에도지은 죄가 있어서진짜 아들이라면 천륜을 버릴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정1품 우승상 이형준도 공격하고, 이미 소문이 퍼졌다는 말에 익문사도 공격하는 패기를 보인다.광역디스필리핀 총독부가 함락 위기에 놓이자 항복했다는 소식에 백성들에게 신의를 얻지 못했으니 게릴라로 전환하지도 못했을 거라는 견해를 밝히고, 전쟁의 명분이 굳어진게 필리핀 총독부의 화교 학살인 만큼 여기에 동참했던 한인 군사들은 어떤 식으로든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성리학 논리에 입각하면서도 현실적인 조언을 한다.
- 이종근
중추원 첨사이자 권훤의 장인. 이덕형과 롤리타 부부의 증손자이다. 혈혈단신으로 온 도로테아의 아버지 노릇을 해서 혼례를 도왔다.
- 윤두서★
서학당 제조 → 총장. 아직 40대의 젊은 나이이지만 다방면의 학문에 능통한 인재이다. 서학당을 명실상부한 근대식 종합대학으로 발전시킨다. 서자 윤덕용이 예왕의 딸 이연우와 결혼한다.
- 이이명★
실제 역사와는 달리 성균관 → 국자감 교수로 학자로만 살다가 1716년 은퇴했으나, 최석정의 천거로[116] 유럽 파견 진위사의 부사로 임명되어 유럽에 가게 되며, 진위사에서 정무적인 역할을 맡는다. - 이기지★
이이명의 아들. 실제 역사에서 북학파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것처럼 이 세계에서도 서양 문화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깊어 집현전에서 서학을 10년간 연구하다 부친의 종사관으로 자원해 따라간다.
- 유봉원★
유수원의 아버지. 별다른 관직이 없던 원역사와 달리 시강원에서 이은의 교육을 담당하는 스승 중 하나다.
- 오명항★
계미남변에 종군했다가 부상을 입고 문관으로 전환했다가, 표트르의 진위사 부사가 되어 고령위를 수행한다.
- 김필용
2부에 등장했던 김지의 5대손으로 열기창 도제조. 1728년 드디어 장갑열차를 개발하여 조상과 선임자의 염원을 이뤄내지만, 재석은 딱 조상 김지처럼 자기가 만들고 싶은 걸 만드는 매드 사이언티스트로 취급한다.
- 이형직
서나라 승평제의 조문을 위해 파견된 진위사 부사. 광동왕 장장익이 제공한 향응을 마음껏 누리지만, 그 뒤 이인좌의 사망, 사신단의 억류 등의 사건이 터진 뒤로는 책임감 있는 행동을 보여준다.
- 조현명★
광동왕 장장익에게 보낸 칙사. 정5품 국장인 젊은 관리.
- 석종원
2부에서 아모국을 10년간이나마 통합했던 군주 석탈왜의 후손, 석탈왜 사후 아모국이 다시 부족간의 내분이 잦아지자 석탈왜 가문이 아모국을 떠나 조선에 귀화한지 100여년이 지나 그냥 평범한 대한 양반으로 살면서 과거에 급제하고 1738년에는 승선 직을 지내고 있다.
- 곽현중
학부협판. 하와도에 멧돼지 피해 방지 대책으로 호랑이를 보내자고 했지만 건흥제는 기각, 그후로도 하와도로 호랑이를 보내는 게 낫다고 했으나 건흥제는 호랑이 타령하면 호랑이를 하사하겠다고 하자 기겁하며 사죄한다.
- 박원성
오도만호부(고토열도)의 만호. 복강도(후쿠에섬)에서 태황을 맞이한다.
- 정지원
장기도호부(나가사키)의 부사.
- 조용원
제주부사.
- 허선
나주목사.
2.6. 군부
- 장희재
★[117]
장옥정의 동복오빠. 1651년생. 역시 스페인계 혼혈로 대단한 미남이다. 형황이 미주 아파치 토벌을 위해 보내는 원미군 본대를 이끄는 장수. 실제 역사처럼 부계는 역관 집안 출신이나 외가가 세바스티안 데 라 로카의 후손이다. 대남도 토인의 난, 청나라 한족 민란 진압 등의 공을 세워 육군 부장에 속말주 병마절도사를 지내다가 원미군 지휘권을 받았다. 예왕과의 친분도 없고 군 경력도 요직이라 해도 변방만 떠돌았지만 재석이 보기에도 훌륭한 장수이다. 한양대화재 직전에 귀국하여 호위청 총관으로 부임한다.
무인지변 때 난에 가담하면 장씨 가문이 제일의 가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설득하는 장옥정의 편지를 보고 마음이 흔들렸지만[118], 정호찬에게 성친왕이 무사하다는 밀서를 받고 성친왕 편을 들기로 결심, 군사를 보내 예왕의 척살 목표였던 현왕과 민성윤의 신변을 보호하고, 창덕궁을 구원하려고 시도하다가 족친위 반란군과 교전을 벌였다. 예왕의 사자는 바로 체포했으며, 명례방의 예왕군 주력을 격파하여 무인지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다.
무재가 뛰어난데, 예왕군이 호위청을 사실상 아군으로 여기고 있다는 심리적 허점을 노려서 급습하고 이어서 일제사격과 순차사격을 반복해서 진영을 허물고 일부는 돌격시켜 큰 피해 없이 호위청 단독으로 더 숫자가 많은 예왕군을 패퇴시켰고, 성친왕의 품성을 본지라 지나친 살육도 자제하게 한다.
난이 진압된 후 평난 1등공신에 신임 오군대총관이 되어서 군부 실력자로 자리매김하고, 장옥정은 보리스에게 시집보내 재석과의 관계도 더 돈독히 한다. 의외로 육군임에도 이형준이 제안한 육군부/수군부 분리에 찬성한다. 서반아령 필리핀 총독부와 전쟁이 벌어지자 남정대장군으로 임명되어서 전쟁을 총지휘하여 필리핀을 대한의 강역에 넣는 업적을 쌓는다. 전쟁 후에도 군부의 요직을 역임하다 1727년 겨울 향년 75세에 노환으로 사망한다.
- 이원기
진성태황태후의 오라비이며 건복제와 건흥제의 큰외삼촌.[119] 1629년생. 이순신의 후손답게 무과에 응시, 강무관도 졸업하며 여러 벼슬도 역임하고 남도수군통제사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노장이다. 엄격한 교육으로 변하기 전의 태황의 모습을 기억한다는 것을 보면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보이며, 빙의 전 성친왕도 자신을 언제나 감싸주는 모후의 오빠라 그런지 무도하게 대하지 못했다고 한다. 누이인 태후가 지금이라도 건복제가 후사를 얻고 귀국하는 성친왕의 아군이 되어준다는 구상을 언급하자 이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차라리 처음부터 성친왕을 태제로 책봉해 보위를 물려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다.
다른 대신들과 달리 성친왕이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는다. 은퇴한 무장이라 현실적인 영향력은 없지만, 이순신의 후손인 만큼 군부에 연줄이 많다. 무인지변에서 예왕군에 가담하려던 용호청 총관 윤승묵을 주저앉힌 것에도 한 몫 했다. 1710년 81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 이원형
진성태황태후의 2살 터울 남동생으로 건복제와 건흥제의 작은 외삼촌. 1638년생. 큰형 이원기처럼 수군으로 출사해서 대한수군통제사를 역임했고, 비변사의 수군 제조가 된다. 육군제조 김용상과 함께 필리핀 남부의 이슬람 제왕국을 토벌하는 것에 찬성한다.
- 김용상
훈련도감 대장. 피신한 성친왕을 열렬히 환영해주고 도와서 예왕군 진압에 나선다.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는 훈련도감이 이제까지 방어하는 전투만 해서인지 공을 더 세우기 위해 선봉에 나서려고 한다. 평란 2등공신에 책봉되고 삼군부 도총사로 승진하나, 병 때문에 금방 자리를 내려놓았고, 관전무관단 단장으로 청나라의 보복전을 참관한다. 이후 비변사 육군제조가 되어 수군제조 이원형과 함께 필리핀 남부의 이슬람 제왕국을 토벌하는 것에 찬성한다.
- 윤승묵
용호청 총관. 성친왕을 좋아하지 않아서 예왕의 격문을 받고 난에 참가할 뻔했지만, 이원기가 설득하고 성친왕과 견서사를 함께 한 측근인 홍상훈이 대대장이었으며 휘하 장수들이 설득해서 성친왕 편에 서기로 한다. 이런 사정이 있으니 재석도 용호청은 동촌 화재 진압부터 보냈다. 재석도 이게 못마땅했는지 전투 동안 벼르고 있다가 승리 후 윤승묵을 따로 불러 치하갈굼한다. 사실 예왕의 반란군에 참가하려던 것을 예하 장교들이 전부 반대하는 바람에 성친왕 편에 선 것인데, 그 결정이 자신의 목숨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평난 3등공신까지 되게 해준다. 하지만 이후 등장이 없는 걸 보면 역시나 재석에게 찍혀 공신 자리 하나 받은 걸 끝으로 더 이상의 출세길은 막힌 모양이다.[120]
- 이민호
총융청 총관. 성친왕에 호의적인 장수지만, 북한산성에 있는 본영에 있어서 무인지변에서는 역할을 하지 못했고, 총융청은 화재 후 복구를 위해 원각사 터에 주둔해 있던 정호찬 지휘 하에 2연대만 성친왕군에 합류했다. 그래서 평난 공신에 책봉되지도 못했다. 정호찬이 총융청 총관이 된 것을 보면 다른 자리로 이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 박중원
족친위장. 김희준이 난을 일으키면서 현왕파 병력을 제압하고 족친위로 장악하면서 허수아비로 만들었다는 것을 보면 난에는 반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 한지권
무인지변 당시의 오군대총관. 난이 일어날 때 창덕궁 안에 있었으며, 상황을 파악한다고 나갔다가 김희준이 장악한 족친위에게 살해당한다. 오군대총관이 죽으며 조정은 더한 혼란에 휩싸이게 되고, 누가 했는지도 모르지만 오군대총관을 살해했으니 예왕군은 영락없는 반란군이 되었다. 사후 평난 2등공신에 추증된다.
- 김진식
마포나루 경비를 맡은 포도청 정위. 성친왕 일가가 귀국했을 때 맞이했던 군관이었고, 난 때도 계속 그곳에 근무하고 있었다. 증기선을 타고 도망치려던 예왕 일가를 붙잡고, 자살을 시도하려던 예왕을 구해내는 공을 세워 평난 3등공신이 된다. 포도청 쪽에서 계속 근무하여 1736년에는 한양의 치안을 담당하는 좌포도대장 자리에 앉아있다.
- 김원중
삼군부 도총사. 야전 경험이 풍부한 노련한 장수.
- 한종련
북병을 지휘하는 대한북병사. 육군부/수군부 분리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견을 표출한다.
- 민함★
대한수군통제사.이름부터가 수군이다당연히 육군부/수군부 분리에 찬성하나, 아무리 육군인 장희재가 의외로 적극 찬성하고 있으니 거드는 게 모양새가 더 좋다지만 자기 일을 남 일처럼 여기는 태도를 보여서 재석에게 찍혔다. 결국 재석이 눈치를 줘서 병을 핑계로 관직을 내려놓았다.
- 서인혁
외금위 부위로, 펠리페 2세 때 조선에 온 스페인 고문관의 후손이다.[121] 앙헬(Ángel)이란 스페인식 이름도 갖고 있다. 대한 황실을 찾아온 디에고를 심문한다.
- 이세진
남도수군통제사였다가 대한수군통제사로 승진한, 풍부한 실전경험에 전략적 사고를 갖춘 유능한 장수.
- 이홍권
해성공 이기빈과 셀린 부부의 증손자. 계급은 부장. 1644년생. 서도수군통제사였다가 계미남변의 정남수군통제사로 임명된다. 증조부처럼 유능하고 부하들을 잘 휘어잡지만 과도하게 공훈을 탐한다. 네덜란드령 바타비아 요새로 도망친 스페인 함대를 아우토른 총독이 내놓지 않고 보호하자, 항구를 장기간 봉쇄하여 전투를 유도, 스페인 함대를 이길 뻔하나 곧 등장한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함대에 패한다. 본인의 독단으로 잉글랜드, 네덜란드와 전쟁을 개시한 꼴이 되었으니 분노한 직속상관 장희재에게 즉시 지휘권을 박탈당하고 체포된다. 본국으로 압송된 후 역시 진노한 재석에게 친국당하며 손톱을 모두 뽑히고 아오지 탄광에서 5년 넘게 노역하다가 태황태후 붕어로 인해 내려진 사면령으로 겨우 석방된다.
- 홍하명
대남수사로 계급은 참장. 필리핀 원정군의 선발대인 대남도 병력을 싣고 루손 섬에 상륙, 전쟁을 시작한다. 스페인 해군과의 첫 해전에서 적함 1척을 격침하고 2척을 나포, 적함에 실려있던 군자금 은 10만냥을 탈취하는 대승을 거둬 '자응장 훈2등'을 수여받는다. 전쟁이 영란연합까지 확대된 후 마다구 토벌 중 유명한 해적두목 존 할제를 생포하는 공을 세운다.
- 한명근
대남수영 참모장으로 계급은 정령.
- 이상원
대남병영 8연대장. 천주교 신자. 루손 북부 한인 마을을 수복한 뒤, 스페인 편에 선 필리핀 원주민 마을을 공격해 원주민과 선교사 포로를 잡고 한인촌 학살에 가담한 인원을 참한다. 처형 후 목은 대남 토인이 가져가고, 목없는 시신은 불로 지은 죄를 물로 씻으라는 의미로 카가얀 강에 버리고, 처형 대상 중 처음 화형을 주도한 가르시아 신부를 보고 장조 어전에서 난리를 피운 미치광이였던 동명이인 신부를 떠올린다. 월경민들의 한인 천주교 개종자들에 대한 린치를 국법을 내세워 막는다.
- 홍진오
필리핀 원정대 2중대 2소대장으로 계급은 부위. 드 에체바리 총독에게 항복을 재차 권유하러 사자로 파견된 권훤을 수행한다. 2번 선두에서 적진에 뛰어들었고, 적의 깃발 2개를 빼앗고, 적장 2명의 목을 베어 부령으로 진급한다. 이 공으로 2등 평남공신에 봉해진다. 재석은 전공을 보고 현대의 유명인 누군가가 떠오른다고 평하며 관심을 보인다. 장장익의 난에서 오랜만에 재출연 해서 22년 2월 22일 연재분에서 불산 수로 방어 포대 3개를 부수고 전초기지를 축성하였다. 1736년에는 삼군부 부총사로 승진하여 행정업무에는 관심없는 도총사 권훤 대신 행정업무를 처리하느라 과로에 시달린다고 한다. 그 후 박문수를 보좌하여 미주 장길산 토포군으로 출정, 끈질긴 추격 끝에 장길산을 붙잡는 공을 세운다.
- 이홍원
충무대왕 이순신의 삼남이자 2부 재석의 부마였던 덕수위 이면의 증손자. 1651년생. 남도수군통제사였다가 해임된 이홍권 후임 정남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이홍권의 패배를 수습할 책임을 맡는다. 영란서 연합함대와의 첫 해전에서 스페인 함선 4척을 모두 나포하고 영국 프리깃 1척 격침, 전열함 1척 중파 등의 대승을 거두어 군사들의 사기를 높인다. 전투 중에는 항상 짙은 자수정으로 만든 선글라스를 써서 표정을 감추는 버릇이 있다. 이제 막 취역한 전열함들에다가 갑자기 발생한 조우전이었다는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복승만(붕타우) 해전을 무승부로 이끌고 영국의 오포드 백작과 평화협상을 시작한다.
- 김국표★
실제 역사처럼 대한제일검 김체건의 아들. 대한 최강의 검객이지만 아버지를 넘을 수 없다는 겸손함으로 별호가 대한제이검이다. 건흥제의 경호를 담당하는 선전관 직에 있으면서 건흥제가 잠행이나 순행을 나갈 때 근접경호를 담당한다.
- 사정현
2부 재석이의 맏사위인 동해위 사노부와 서장녀 정신옹주의 현손, 즉 장조의 외가 5대손이다. 가문의 가풍에 따라 무과에 응시하고 강무관을 졸업해 족친위에서 복무하다가 족친위가 무인지변으로 해체된 뒤 내금위로 옮겼다. 이후 필리핀 정복전에서 기병으로 자원한다.
- 김춘호(봄을 좋아하는 금빛 호랑이)
미주야인 미억족 추장 김주마의 손자. 본국에 와서 무과에 급제하며, 미주야인들도 대한의 동등한 백성임을 강조하기 위한 건흥제가 선전관에 임명하여 곁에 둔다. 올렝카의 부고를 율리아에게 알리기 위해 갔다가 파포태의 난 소식을 듣고는 지친 말을 교체할 때 빼고는 한시도 쉬지 않고 말을 달려 닷새만에 돌아와 건흥제에게 보고하고 나서 혼절한다. 건흥제가 잠행을 나갈 때 김국표와 함께 경호를 맡는다. 박문수의 장길산 토벌군에 동행하여 누벨프랑스 총독에게 대한의 항의를 전하는 사신으로 파견되어, 원주민을 차별하는 프랑스인들에게 작은 충격을 준다.
- 이봉상★
충무대왕 이순신의 5대손으로 실제 역사처럼 뇌물 사건에 연루되어 수사제독 지위에서 면직된 후 안용복 후임으로 해양 측량 탐사 기관인 순해국 국장이 된다.
- 김종익
장장익의 난에 출정한 홍진오의 2연대 이부참모. 계급은 부령.
2.7. 대한령 미주
2.7.1. 미주대총관
- 이종덕
미주대총관. 진성대군의 6대손. 대한령 미주의 총책임자로서 형식상으로는 동변관리사 성친왕의 상관이지만, 권위에서는 황족인 성친왕의 발끝에 못 미치니 재석이 자신의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본국에 책을 잡히지 않을 정도의 적절한 관계를 설정하는데 애를 먹고 있다. 매우 양심적이고 성실한 관료이나 적극성은 떨어지는 성격이며 눈치도 부족한 편이다.[122] 재석이 태황이 되고 나서야 10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다.
2.7.2. 한인
- 홍주원
미주 총관부 판관으로 미주 대법원장에 해당하며 품계로는 정6품까지 올랐다. 판사인 판관으로서 오를 수 있는 품계는 6품관까지가 끝이므로 홍주원은 판관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품계까지 도달했다. 법조인들이 설치는 법조공화국이 되는 걸 막기 위한 조치. 그래서 한국의 판관직류는 변호사자격을 따기 위해 시험에 응시하고 커리어 관리를 위해서 일하는 직업이 되어버렸다. 비교를 위해 다른 직급들을 본다면 단세문(세묜)이 종 6품 부위이고 열기창 대구지소에 근무하는 증기기관 다룬지 40년이 넘은 베테랑 황병삼이 종 6품 주부다. 본국에서 건너온 명문가 남양 홍씨 출신 엘리트. 은퇴 후 아예 가족들까지 미주로 불러들여 미주에 정착한다.
- 홍한선
미주에 있는 내달상단 지사의 간부, 즉 네덜란드계 한인으로 네덜란드식 이름은 한스이다.
- 송기환
북미주 지사. 북미주 근무가 4년이 되어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
- 조영균
본국 출신의 남미주 군관. 원군이 올 때 까지 태호성을 지키라는 성친왕의 요청을 무시하고 파이우트족에게 행패를 부려서 아파치 토벌에 나선다. 원군에 묻히지 않고 공을 세워 귀국할 생각에 파이우트족에게 숙소와 식량을 고압적으로 요구하고, 부녀자 폭행과 약탈을 저지르는 수하를 처벌하지 않아 분노한 파이우트족의 매복에 걸려 본인과 수하 300명의 목숨을 잃는다.
2.7.3. 원씨 가문
- 원준
원사웅의 증손자. 신욱족의 피가 많이 섞여 외모가 한인보다는 미주 토인에 가깝게 생겼다. 원사웅이 북미주에 쌓은 기반 덕분에 10만석지기 대부호로 살고 있지만, 반역자인 조상 원균의 죄를 갚겠다는 생각에 본국에 가서 무과를 보고 강무관에 들어간다. 반역자 원균의 후손이라는 점과 인종적 차이 때문에 강무관에서 따돌림을 당했고, 강무관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오군영으로 가는 대신 미주로 돌아와서 덕진성에서 무관으로 20년간 복무한다. 성친왕의 하와이 원정 계획을 듣고 신욱족 전사들 중 자원병을 모집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건복제 사후 조문 사절이 되어 본국을 찾아온다. 대한이 신서반아를 정벌하자 두 아들과 함께 의병을 이끌고 참전한다. - 원신
원준의 장남. 원주민식 이름은 '쓴 뿌리를 씹는 자'. 가문의 선조 원균이 왜군이 된 것에 대한 정신적 복수를 한다고 왜인 여자 노비들을 사들여 성노예로 부리고 있다. 원준이 죽은 후 가주가 되었으며 본처소생 2남 1녀, 서얼소생 4남6녀를 두었다.
- 원진
원신의 적자.
- 원선
원신의 적자.
- 원호
원준의 차남. 신서반아 정벌 후 정식으로 군문에 들어가 정위 계급까지 올랐다. 장길산을 쫒다가 역습을 받아 죽을뻔 한다.
- 김도연(金跳鰱, 물 위로 뛰어오르는 금빛 연어)
신욱족 대추장. 원신, 원호 형제의 외숙.
2.7.4. 토인
- 양소목(작은 나무)
재석이 고용한 이은 전담 시종. 미주야인 혼혈인으로 이은에게 대자연을 숭배하는 미주야인의 종교관을 가르치고 수영도 가르친다. 이은이 바다에 빠지는 사고를 당했을 때 바다에 뛰어들어 목숨을 구하는 공을 세운다. 이은이 황태자가 된 뒤에도 익위사 관원으로 채용해서 곁에서 보필하게 한다. 이은이 장성한 후에도 항상 근접경호를 하며 충성스럽게 보필하며, 이은이 과음으로 간경화에 걸리자 본인도 노인이 되었는데 잠시도 은이 곁을 떠나지 않는다. 은이가 사망한 후 미주 본궁에 만들 은이의 가묘 능참봉에 임명되어 가묘에 묻을 옷가지[123]를 가지고 고향 미주로 돌아간다.
- 김주마(달리는 금빛 말)★
미억족 전사추장. 조선과 접촉한 후 미억족이 큰 피해를 봤기에 대한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으나 미억대령(시에라네바다 산맥) 너머를 탐험하려는 성친왕과 동행하면서 친분을 쌓는다. 건복제 사후 조문 사절이 되어 본국을 찾아온다. 재석에게 정 3품 절충장군 품계를 받았으며 손자인 김춘호는 본국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이 된다.
- 김대송(세상에서 가장 큰 금빛 소나무)
올로내족 대추장. 대한에 충성하는 대신 총과 군마 등 각종 무기를 얻어 이웃 소부족들을 복속시키고, 남쪽 스페인령 누에바에스파냐와의 국경을 경비하고 있다. 건복제 사후 나이가 많아 본국에 오지는 못한다. 재석에게 정 2품 자헌대부를 받았고, 1716년 노환으로 사망한다. 손자 중 3명은 향시 문과에 합격해 현지 관원으로 일하고 있다.
김성권이 '얼마나 산지 아무도 모르는 노인'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엄청나게 오래 장수했다. 성친왕 시절 미주에 있던 1690년대 초반에 이미 80이 가까웠고, 그 후로 20년이 넘게 흐른 1716년에 사망했으니 100살 가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 오소리 발톱
태호 근처에 거주하던 파이우트족 추장. 처음에는 재석과 광산 채굴권을 적당한 값에 매매하는 호의적인 관계로 시작했으나, 아파치 토벌 때 부족의 겨울 양식을 거덜내고, 부녀자 폭행을 저지른 조영균과 그 수하를 함정에 빠뜨리고, 조영균과 휘하 300명을 죽인다. 범죄자만 죽였으면 재석도 좋게 좋게 마무리하려 했으나 300명이나 죽인 바람에 본인은 옆 부족 추장과 지선성까지 끌려가 교수형 당하고, 일곱여개의 피아우트 부족 마을도 초토화된다. 죽을 때 지도자로서 자신의 행동은 당연했다는 것을 당당하게 밝히고 마지막까지 일절 동요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서 재석의 마음을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 김은어(숨어다니는 금빛 물고기)
올로내 족 출신으로 젊어서부터 해상 밀수업자로 일하면서 20여년동안 미주 서부 해안지대를 안 가본 곳이 없는 뛰어난 항해사. 심지어 거북섬까지도 다녀왔을 정도다. 안용복과 친분이 있어 안용복의 주선으로 비수백 디에고와 함께 일하게 된다.
2.7.5. 기타
- 조성칠
20년 전 미주대령 동쪽으로 도망쳐서 토인들과 섞여 살다가 대한군이 아파치를 토벌하기 시작하자 투항해서 길잡이를 자처한 인물. 도망친 사연에 대해서 살인죄를 저질러 도망쳤다고도 하고 빚 때문에 도망쳤다고도 한다. 토인들 틈에서 뭘 하고 살았는지에 대해서도 증언이 계속 바뀌어서 사냥꾼, 장사꾼, 의원 노릇을 했다고도 하고 대한이 미주 전체를 정복할테니 여러 부족이 연합해야 한다고 선동해왔다고도 한다. 재석은 거짓 투항한 첩자로 의심되기도 하고 계속 증언이 바뀌어서 신뢰하지 않는다. 재석은 처벌까지는 하지 않고 통역 겸 길잡이로 쓰고 있으며, 이후 정호찬이 대평원의 인디언 연합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서 떠날 때도 대동한다.
- 장길산
★
미주 최대의 마적 두목. 빚에 쫒기는 도망자인 한인 부친이 원주민 모친과 원나잇으로 낳은 자식으로, 아버지를 찾겠다고 지선성에 왔으나 아버지를 찾기는커녕 혼혈이라고 차별을 받자 분노하여 조폭이 되더니 세력을 키워 미주 최대의 마적단을 이끌게 된다. 인종 불문한 부하가 1천여명이며 태황 직속인 태호은광을 습격해 은 10만냥을 탈취하고 스페인령 누에바에스파냐까지 넘어가 도적질을 하며, 꾀가 많아 번번히 관군의 추적을 따돌리고 역습한다. 점점 흉폭해져서 마을을 습격해 주민들을 잡아가 노예로 파는 노예상인 짓까지 하며 프랑스령 루이지애나와의 밀거래도 독점한다. 누에바에스파냐에서도 '엘 바스타르도(사생아)'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두려워할 정도. 박문수가 토포사로 왔다는 소식을 듣자 분명 낙하산으로 자리를 꿰찬 애송이일 것이니 납치해서 몸값을 받을 생각을 하고 사냥 중인 박문수를 습격했으나 이는 박문수의 함정이었고, 크게 패하고 간신히 제 목숨만 건져 대평원으로 도주하지만 토포군의 오도리, 왜인여진 추격대의 끈질긴 추격에 결국 잡히고 거열형을 받아 머리는 본국으로 가고 나머지는 투석기로 바다에 날려 버린다.
2.8. 종교인
2.8.1. 천주교
- 앙투안 토마스
제9대 조선 교구 주교. 플랑드르 출신 예수회원. 조선 주교로 1683년 부임했다.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사망한 뒤 위령미사를 3차례 올린다. 그 후 노환으로 선종했다.
- 장 폴 드 동데르
제11대 조선 교구 주교. 도미니코회의 충동질에 넘어가 대한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 교황 클레멘스 11세와 건흥제 사이에서 난감한 처지에 처했다.
- 마르티네스
자혜원장.
2.8.2. 불교
- 묵천
승병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도총섭. 천민 출신이며, 일흔이이 넘은 나이에 걸맞게 진중한 고승이지만 재석이 비하르 지방의 불교 성지순례를 시행하면서 승병들을 호송단으로 쓸 구상을 밝히자 체면 불구하고 매우 흥분한다.
2.8.3. 덕성도
- 천사 광진 → 시조대천사 광진
본래 평안도 숙천의 작은 암자를 홀로 지키던 승려였으나 근처 천주교 성당으로 신도들이 옮겨가자 앙심을 품고 성당 대문에 똥을 칠하는 소심한 테러를 저질렀고 재석의 명으로 장 10대를 맞는다. 이후 천주교를 미워하지만 말고 연구해보자고 마음먹고 성경 연구를 하다가 불교, 천주교, 힌두교가 융합된 신흥종교 덕성도를 창시하여 구월산 인근에서 전도하기 시작한다. 이후 승려 시절과 다르게 머리, 수염을 깎지 않고 덥수룩하게 하고 다니며, 덕성도의 교주인 '천사'를 자칭하고 다닌다. 사이비스러운 교리와 다르게 신자에 대한 비리나 착취 없이 진심으로 봉사활동에 충실하고 있어 재석도 개입하지 않기로 한다.
4부 시점에서는 덕성도가 대한은 물론 청, 후송에까지 널리 퍼지며 수백만의 신도를 가진 대형 종교가 되었으며 광진은 시조대천사로 격상되어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그가 묻힌 구월산은 덕성도의 성지가 되었다. 첫 등장이 성당 문에 똥칠하다 붙잡힌 찌질이 스님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결말. 하지만 생전의 광진 본인은 자신을 신격화하지 말라고 가르쳤으니 사후 자신이 신격화된 것을 안타까워할 듯하다.
- 대종사 김춘삼
덕성도의 열성신도이자 광진의 측근. 본래 거사라고 불리던 광진에게 더 위광 있는 이름이 필요하다고 제안하여 광진이 천사를 자칭하고 다니게 한다. 광진과 다르게 겉으로 보이는 위세를 중시하는 면이 있다. 직접 언급은 없었으나 신자들 중 광진 다음가는 높은 위치였던 것으로 보이므로 광진 사후 교주인 천사 다음가는 2인자 직책인 초대 대종사가 되어 광진을 신격화하는 한편 덕성도의 체계를 정비한 인물로 추정된다.
2.9. 기타
- 성친왕저 집사
동촌 연화방, 현재의 현대그룹 계동사옥 자리에 위치한 성친왕 사저의 집사. 성친왕비 강씨가 사망한 이후 성친왕저는 빈집이 되었고, 이 자는 성친왕이 국외추방되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믿었기에 횡령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집의 노비들은 돈을 받고 다른 집에 빌려주고, 농토에서 들어오는 수입의 3/4를 자기 앞으로 빼돌렸으며 일꾼들이 머무는 행랑채를 제외하고는 집 관리도 하지 않아 성친왕저는 겉만 그럴싸하고 완전히 폐가로 전락해버린다. 성친왕이 온다는 보고를 도착 반나절 전에 뒤늦게 받고 수습할 시간도 없이 성친왕 일행이 들이닥쳐 모든 행적이 들켜버렸고, 보리스와 이고르에게 붙잡혀 참교육을 당한다. 결국 빼돌린 돈 6만냥을 다 토해내고 북변으로 전가사변당한다.
- 안돈이(안톤)
동현 호의 선의 중 하나. 순혈 내달인으로 내달식 이름은 안톤. 이진원의 사위이기도 하다. 내달국어, 불랑국어, 서반아어에 모두 능통하고 귀족 예법도 어느 정도 안다. 때문에 유럽 귀족가 수행원으로 위장하기 쉽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의학 지식이 있어 키니네 나무인 친초목을 알아볼 수 있다는 점까지 고려되어 디에고의 원정대에 합류한다. 안데스 산맥을 넘으면서 고산병에 시달리다가, 현지 안내인에게서 코카나무 잎이 고산병 뿐 아니라 만병통치약이라는 말을 듣고 코카나무 잎을 직접 섭취해보고 그 효과에 반해 코카 잎 연고와 농축 탕약을 만드는 등 코카 예찬자가 되어 대한에 코카나무를 유입하나 전부 재배에 실패했다.
- 정경원
정준석의 장남 정영훈의 아들로 대남도의 대호족. 1650년생. 정지룡이 해적으로 활개칠 때에도 음으로 양으로 두 집안끼리 연락을 했으나 정명완이 쫓겨나자 역모 혐의를 받을까하여 정명완을 돕지 못했다. 그런데 조선이 전쟁으로 인해 정가군을 지원하겠다하여 정경원이 말레이로 직접 가서 정명완에게 대남도 토인병과 많은 군수물자를 줬다. 자칭 대한 황자라는 조르조를 만나자 건흥제가 디에고처럼 크게 반겨하리라고 단단히 착각하고 조르조를 대한에 태워다 준다.
- 이하재
1708년 이전의 상선. 연가제 시절부터 궁궐에 있던 나이든 내관이다. 조르조 관련으로 격분한 재석의 성친왕 시절 성질머리를 알고 있던지라 태황태후의 호출을 쩔쩔매며 전한다.
- 김진귀
1724년 시점의 상선.
- 춘식
승평제 조문을 위해 진위사로 파견된 박문수의 하인. 광동왕 장장익이 제공한 향응에 홀라당 넘어가고, 탈출할 때도 정이 들은 여자를 데려가려 한다.
- 박호식
장장익의 난에 참가한 홍진오의 종졸.
- 황병삼
열기창 대구지소에 근무하는 종 6품 주부, 채영진의 사수. 증기기관 다룬지 40년이 넘은 베테랑으로,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자식들도 다 분가하여 굳이 집에 갈 이유가 없어 일부러 울릉도에서 겨울나기를 하며 채영진을 속터지게 한다.
- 채영진
열기창 대구지소에 근무하는 종 8품 봉사. 본래 장조 때 귀화한 체코인 광부 가문의 자손으로 체코식 이름은 토마시 쿠벨릭. 광산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집안 내력이 싫어 한 곳에 정착하려고 증기기관 기술자가 되었으나 황병삼 밑에 배속되어 영남지방 전역을 증기기관 수리 때문에 떠돌아다니다가 황병삼 때문에 신혼인 부인도 못보고 울릉도에서 겨울을 나게 되어 울상이 된다.
- 김태경
울릉현령으로 울릉도로 귀양온 선친왕 이홍의 무리한 요구 때문에 피가 마른다.
2.10. 대한의 외번(外藩)
2.10.1. 대명공
- 주자랑
2대 대명공. - 주승훈
주자랑의 장남. 천자의 계승자라고 으스댔다가 품행이 불량하단 이유로 후계구도에서 밀려났고, 건복제에 의해 병사당한다
- 주승길
3대 대명공, 주자랑의 차남.
- 주경승
4대 대명공.
- 주덕훈
5대 대명공.
- 주원홍
6대 대명공, 주덕훈의 삼남. 1727년 봄에 즉위했다.
2.10.2. 심왕부
- 완친왕 → 심왕 이준(完親王 → 瀋王 李鎨)
재석과 상희의 차남. 양력 1696년 4월 생. 붙임성 있는 자유로운 성격으로, 장조의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대한에 방문한 후금 대패륵 파포태와 매우 친해져 금나라 형이라는 뜻의 '금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형 이은과 국혼 얘기가 나왔던 청나라 영화고륜공주와 혼인한다. 완친왕 부부와 자녀들 모두 청을 방문하는 것을 금하고, 지방에 거처를 마련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만 10세이던 1706년 양력 10월에 혼인하는데, 5살 연상인 완친왕비 영화고륜공주가 머리 하나는 더 큰 꼬마신랑이다. 청나라에서 대한, 청, 후금 공동 세습친왕작인 심왕에 앉히자는 제안을 내놨고 재석이 받아들여 세습친왕가인 심왕에 봉해지고 심양행궁으로 이사간다.
처음에는 생각지도 않은 혼인으로 집(경복궁)에서 쫓겨났다 생각해서 꽁해있으며, 이 때문에 매일 부황과 모후에게 문안을 오며 아내도 좋아하지 않는다. 첫날밤에 아내 손도 안잡고 잤지만, 만 14세가 되자 부부관계에 눈을 뜨면서 아내와 사이가 좋아진다.[126] 심왕으로 봉해지자 심양에도 동물원을 세울 생각부터 하는 등 철부지 성격은 그대로다. 1712년 첫 아들을 보게 된다. 영화고륜공주에게 길들여져서눈나누나 취향이 됐다. 심왕이 된 후에도 겨울에는 춥다고 한양에서 지내고 봄~가을에만 심양에서 지낸다.
동물애호가이지만 동시에 포경하는 모습을 희열있게 즐기고, 미식가적인 면도 있어 사냥이 금지된 대해우 고기를 먹어보고 싶어하며, 물돼지(돌고래) 태아 찜이나 해구신을 즐기는 등 이중적인 면모도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미식을 모은 상차림인 심양전석을 만든다. 막내 여동생 연주와는 현실남매 그 자체로 현대인 남매들이 그러듯 서로 놀려먹는다. 그래도 심양 백성들에게는 많이 베풀고 수하 관리들을 엄하게 단속해 심양 백성들에게는 칭송을 받는다. 원성군과 원신군에게 소설책, 연극구경, 코끼리 애호 등을 가르쳐 놓고는 10살이 지나자 공부를 안한다고 혼내는 개구리 올챙이적 모르는 행동도 하고 있다.
부황 건흥제가 동생 이홍의 불효로 돌아가시게 되자 태의들을 다 전가사변 보내겠다고 소리지를 정도로 크게 분노하고, 7년 후 여행을 떠났다가 우연히 들른 우대개 마을에서 이홍을 만나고 이홍이 발뺌하는 모습에 분노해 죽일 작정으로 구타했으나 이홍의 현지처가 울며 호소하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흔들려 내 아우 홍이는 죽었다고 말하며 그대로 떠난다.[127] 1754년 58세에 사망한다. - 영화고륜공주/완친왕비 → 심왕비 김씨(榮華固倫公主/完親王妃 → 瀋王妃 金氏)
청나라 중통제 바스하의 장녀로 태자 이은보다 1살 연상, 완친왕 이준보다 5살 연상인 1691년생. 태자 이은과 국혼이 비밀리에 오갔으나 후금 공주이자 청 태후인 할머니의 반대로 무산된다. 이후 바스하가 모후를 설득하는 데 성공, 완친왕 이준과 국혼하여 완친왕비가 된다. 어릴 적부터 한국어와 풍습을 익혔으며 얼굴도 미색이고 키도 매우 크다. 재석이 평하길 '준비된 황태자비'. 혼인 후에는 다이샨과 홍타이지의 선례를 따라 김씨로 칭하며, 머리와 손톱을 한국식으로 바꿨고 집안에 있을 때를 제외하면 항상 한복을 입고 한국어로 대화하는 등 재석 부부의 눈에 들려고 노력한다. 이준이 부부관계에 눈을 뜬 후로는 이준을 키잡하는 재미로 살고 있다. 심왕에게서 4남 1녀를 두었으나 아들 한명은 요절한다. 중년이 된 후에는 장남 이성균에 대한 교육에 열성이다. - 세자 이성균
심왕과 심왕비의 장남, 1712년 양력 10월말생. 아버지를 닮아 붙임성이 좋고 사촌인 황태손 이영과도 사이가 좋다. 하지만 황손들이 모인 잔치 자리에서 술김에 술루 세손 후안에게 술루의 왕통이 단절되면 우리 심왕가에서 왕통을 물려받을 수 있지 않느냐는 큰 결례되는 말을 했다가 분노한 건흥제에게 한번 크게 내리갈굼을 당한 후로는 행동을 조심한다. - 세자빈 양씨
태후 양씨의 조카손녀뻘로 세자와 사이에서 3명의 자식을 두었다. - 공주 이○○
1716년생 심왕과 심왕비의 장녀. 청나라로 혼인을 갔다. - 원신군 이성준
1720년생 심왕과 심왕비의 차남. 성인이 된 후에는 외가인 청나라의 정황기에 들어가있다. - 원현군 이성곤
심왕과 심왕비의 삼남. - 수은고륜공주/정빈 김씨(壽恩固倫公主/□嬪 金氏)
이준이 심왕으로 책봉되면서 심왕 후궁으로 들어온 1699년생 후금 공주. 와극달의 세 딸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고명딸로 부수와 가장 친하다. 후금 왕실 일원이라 천주교도이다. 심왕비에게 키잡되어 누님 취향이 되어버린 준이에겐 어린 여동생 같은지라 조금 겉돌지만, 올렝카가 나름 챙겨준다. 심왕에게서 1남 3녀를 두었으나 딸 한명은 요절한다. - 옹주 이○○
심왕과 정빈 김씨의 장녀. 1716년 여름 생. 금나라로 혼인을 갔다. - 원성군 이성호
1720년생 심왕과 정빈 김씨의 장남. 예친왕 애신각라 순영의 손녀와 혼인했으며 외가인 후금에서 근위대인 케식 무관으로 있다.
2.10.3. 하와국
2.10.3.1. 역대 국왕
- 케아케알라니와히네★[128]
하와도 발견 시점 하와도의 여왕. 성친왕 함대 방문 시에는 잠시 피신했다가 돌아왔고 성친왕 함대가 떠난 뒤 쿠아후이아에게 하와도에 잔류한 한인들을 잡아오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한인들의 힘을 빌려 반란을 일으킨 쿠아후이아에게 패배하고 퇴위당한다. 하지만 쿠아후이아를 죽이고 하와국왕에 오른 마우이는 하와도 민심을 잡기 위해 그녀를 전 왕조의 왕으로써 정중하게 예우하여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고 한다.
- 쿠아후이아(Kuahwia)★
케아케알라니와히네의 봉신이자 마우이의 주군이자 장인. 하와도에 잔류한 한인들을 잡아오라는 주군 케아케알라니와히네의 명령을 무시하고 한인들의 힘을 빌려 반란을 일으킨다. 한인들이 투창 사거리 밖에서 활과 총으로 지휘관만 골라서 저격하는 방식으로 내전은 손쉽게 이기고 케아케알라니와히네를 퇴위시켰으나, 본인이 즉위식을 하기 전날 급사한다. 쿠아후이아의 아들들은 모두 실종되어버렸고 딸은 마우이의 부인이 되어 결국 왕위는 마우이에게 넘어간다.
- 장명왕 하마위(마우이)
성친왕 함대가 하와이(하와이 제도)에서 맨 처음 도착한 하와도(빅 아일랜드)의 와가촌(와이아케아)의 추장. 1655년생. 성친왕의 빛나는 서양식 갑옷과 군사들의 총포 사격을 보고 성친왕을 전쟁신 '쿠'의 화신이라고 생각하고, 힘을 빌려 하와이를 통일하려고 한다. 하와도 여왕 케아케알라니와히네의 봉신인 쿠아후이아의 봉신으로 마을 하나를 통치하는 소추장이었으나 성친왕에게 자신이 하와도 전체의 왕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성친왕 함대가 떠난 후 하와도에 잔류한 대한 병사들을 동원해서 쿠아후이아의 편에 붙어 케아케알라니와히네를 타도하는 내전을 일으켰고 케아케알라니와히네를 퇴위시킨 뒤 왕으로 즉위하려던 쿠아후이아와 그 아들들도 제거해버리고 쿠아후이아의 딸과 결혼, 사위라는 명분으로 자신이 하와이의 왕위에 오르고 건복제에게 하씨 성을 받고 하와이 국왕으로 책봉까지 받는다. 번왕으로서 사조룡을 수놓은 녹색 곤룡포를 입는다. 재석은 친한파 마우이가 왕이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잘 된 것이기는 하나 속았다는 사실에 불쾌해한다.
아들인 하정위에게 부인 가비를 NTR 당하고 가비에게 독살 시도까지 당하는 충격적인 상황을 겪었지만 의식을 되찾았고 반란 진압에 성공한다. 반란 와중에 세자가 사망했음에도 어째서인지 세자를 책봉하지 않다가 역병으로 다른 왕자들을 잃은 후에야 카우이를 세자로 책봉해달라고 대한에 주청한다. 1712년 향년 58세로 훙서한다. 이후 장명왕(莊明王) 시호를 받는다.
- 현도왕 하가위(카우이)
와이아케아의 추장 마우이의 8남. 1675년생. 동료 둘과 함께 동현에 처음 올라온 최초의 하와이인. 성친왕을 보고 빛의 신 '카네'라고 생각한다. 이후 처음 동현에 오른 둘과 함께 통역 역할로 뽑혀 동현 호에 타고 성친왕 함대와 동행한다. 통역을 하면서 사실은 잠시 피신했던 하와도 여왕 케아케알라니와히네가 성친왕에게 항복한 것으로 사기를 친다. 그 와중에 이들이 신이 아닌 인간임을 깨닫고 자신도 그걸 배워 쓸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하와이 정벌이 끝난 후 상춘 호에 타고 건복제를 알현하러 대한으로 간다. 건복제를 알현하고, 하가위라는 대한 이름을 받고 4년동안 민성윤의 집에서 기숙하며 대한의 문물을 배워 돌아간다. 아버지 마우이는 하와이의 왕이 된다. 하정위의 난에서 기존 세자를 포함한 형제 대다수가 사망했고 본인도 공을 세운다. 게다가 하와이에 프랑스 사략함대가 퍼트린 홍역과 매독이 퍼져 다른 왕자들도 많이 죽어, 결국 마우이가 카우이의 왕세자 책봉을 요청하는 표문을 재석에게 올렸다. 그 후 1712년 부왕이 훙서하자 만 37세의 장년의 나이로 2대 하와국왕이 되며, 무종, 장조 때 책봉에 관련되어 명나라의 갑질을 겪은 재석은 끌지 않고 하가위를 바로 하와국왕으로 책봉해준다. 국왕이 된 이후에도 2대 카우아이 대영주 가와공 아우가테와는 으르렁거리며 지냈으나 막상 아우가테가 죽은 후로는 삶의 의욕을 잃은 듯한 모습을 보이며 성친왕을 만난 이후의 자기 삶의 일대기를 이종에게 구술한 후 1732년 12월 30일 57세로 훙서한다. 이후 현도왕(賢度王) 시호를 받는다. - 강정왕 하상운(카이헤코아)
카우이의 장남, 조부의 훙서와 부왕의 책봉을 요청하는 주청사로 대한에 왔다. 1696년생. 만 16세의 어린 나이이나 일국의 세자로 부족함이 없어보여 부왕의 책봉과 동시에 세자로 책봉된다. 대한 종실의 딸을 세자빈으로 달라는 부왕의 친서도 가지고 왔다. 동갑인 강녕왕의 딸이 태자 이은의 양녀로 입적되어 의순공주가 되어 하상운의 세자빈이 된다.
여색을 밝혀서 첩이 셋이나 있으며, 혼인하자마자 아내가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만든다. 의순공주에게서 자식 둘을, 현지인 첩 세명에게서 자녀 넷을 낳았다. 폐서인된 경평공 이종을 아재라고 격의없이 부르며 친하게 대한다. 1732년 부왕이 훙서한 후 3대 하와국왕으로 책봉받아 즉위한다. 이후 강정왕(剛精王) 시호를 받는다.
2.10.3.2. 왕실
- 아누헤아
카우이의 왕비.
- 가비
쿠아후이아의 딸이자 마우이의 부인. 하와국의 왕비가 되긴 했으나 사실상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의 원수인 마우이의 아내가 된 것이기네 원한을 품었던 듯 하다. 그래서 자신의 양아들 격인 마우이의 4왕자 하정위와 사통을 했고, 마우이를 독살하려 시도한다. 하지만 독살이 실패하고 반란이 진압되자 화산에 뛰어들어서 자살한다. 많고 많은 자살 방법 중에 하필 화산에 뛰어들어서 고통스럽게 죽은 것을 보면 어지간히 원한이 뼈에 사무쳤던 것으로 보인다.
- 의순공주
강녕왕의 딸. 1696년생. 화번공주로 4살 연상인 당숙인 태자 이은의 양녀로 입적, 의순공주로 책봉되어 하와국 왕세자빈이 된다. 여색을 밝히는 남편 때문에 처음에는 고생하다가, 적응한 이후에는 오히려 투기를 부힌다.
- 세자 하원식(카울라나)
하상운의 적장남. 귀국하는 장길산 토포군을 따라 한양을 방문하여 환대를 받는다. 아버지처럼 대한에 온 김에 맹수 사냥을 하기를 원하여 사냥을 나갔다가 무방비 상태에서 호랑이를 마주치지만 맨손으로 호랑이의 혀와 귀를 붙잡아 꼼짝 못하게 하고 시종들에게 몽둥이 찜질을 하게 해 생포하는 괴력을 보인다. 부왕 사후 왕위에 올라 하와국 왕실을 현창하는 와가촌 본궁 건설, 교주어해가 편찬 사업 등을 벌인다.
- 하원길
하상운의 사남.
- 하정위(에케카)
마우이의 4남. 부왕 마우이의 부인, 즉 자신의 새어머니 격인 가비와 사통하며 왕위 찬탈을 위해 반란을 일으킨다. 한 때 하와국 영토의 절반 가량을 점령했지만 결국 진압되었고 상어밥으로 던져져서 처형된다.
2.10.3.3. 추장
- 카훌루이 추장
카훌루이의 추장. 성친왕 함대의 소문을 듣고 기습공격을 준비했다가 장창으로 급습해서 성친왕 함대에서 13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이후 성친왕 함대의 보복 공격으로 마을 주민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거의 전멸당했고 본인도 그 와중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카훌루이에서 벌인 학살의 소문 때문에 이후 성친왕 함대에 저항하는 이는 없었다.
- 오아공 칼라니
호눌룰루 추장. 성친왕 함대의 소문을 듣고 잠시 도망쳤다가 대한에 입조한다. 진주만을 대한에 바치라는 성친왕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건복제에게 '오아공'이라는 작위를 받는다.
- 오아공 아나칼레(오안가)
1732년 시점 오아공.
- 가와공 카마카코아
카우아이 추장. 칼라니와 달리 도망치지 않고 대한에 입조한다. 와이아케아처럼 자기 부족에서도 자기 아들을 포함한 세 사람을 대한으로 보내기로 한다. 건복제에게 '가와공'이라는 작위를 받고, 카우아이 섬의 대영주가 된다.
- 가와공 아우가테(가우성)
카마카코아 추장의 장남 1673년생. 카우이와 대한으로 향한다. 카우이에게 경쟁심을 갖고 있다. 건복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자기 아버지가 마우이보다 더 강하니 벼슬을 내려달라고 외치는 무례를 범하지만 건복제는 문제삼지 않는다. 가우성이라는 대한 이름을 받는다. 가와공의 작위를 물려받을 확실한 후계자이기에 왕위 세습 여부도 불확실한 카우이를 바웃는다. 아버지가 죽은 후 2대 가와공이 되고, 하와이에 퍼진 홍역을 알리는 사신으로 대한에 온다. 1729년 사망한다.
2.10.3.4. 한인
- 최지원
하와국에 주재한 대한 고문단의 수석인 국사(國師). 하와이식 관직명은 '왕과 공들을 앞서 가르치는 자'. 전임 국사 현권덕과는 달리 하와국인들에게 큰 인망을 쌓아 하와국에서 계속 유임시켜 달라고 표문을 올리는 바람에 17년째 국사로 재임 중이다.
- 현권덕
최지원의 전임 국사. 향응에 빠지는 바람에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경평공이종
예왕의 장남, 1682년생. 예왕이 거금을 들여서 비싼 강사들에게 교육받았기에 학식이 뛰어나 종친이 아니었으면 대과에도 붙을 수 있었을 정도라 한다. 무인지변이 진압된 후 혼인한지 110일밖에 안 된 아내와 이혼당하고,[129] 하와이로 유배돼 진주만에서 평생 말단 군졸로 복무하게 된다. 그나마 한국에 남은 가족과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는 건 가능하고, 아버지와 달리 온화하고 선량한 성품인데다 학식을 아깝게 여긴 통제사가 행정병 일을 맡겨 육체적으로는 편하게 지낸다. 여가시간에 서당을 열어 하와도 토인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점차 현지 한인 수병들과 하와인들에게 '귀양온 스승님' 포지션으로 존중받게 되며, 현지 여성과 인연이 닿아 재혼도 하고 딸 하나를 둔다.
이후 하와인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30년에 걸쳐 '하와어해'를 집필하여 하와어 한글 표기법을 정립한 공으로 군역에서 해제되어 하와국 내에서 이동의 자유를 얻었고 하와국의 학무대신 격인 '아이와 선비를 가르치는 자' 직위에 올랐다. 외전에서 하와국왕 카우이가 삶을 정리하면서 건흥제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구술한 50만자 회고를 5000자로 줄이는 임무를 맡게 되었는데, 이때 별개로 전체 분량을 정리해서 '하와국사'란 역사책을 쓴 것으로 보인다.[130] 예왕이 공들여 교육시킨 재능을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한껏 꽃피운 셈. 이후 여생동안 하와국의 학무대신으로 재직하고 하와이인들을 교육시키면서 80세까지 장수했다고 한다.
경창공이청
예왕의 차남, 1689년생. 형과 같은 운명에 처해졌다. 풍토병에 걸려 심하게 앓다가 결국 1708년에 하와이에서 병으로 사망한다.
2.10.3.5. 기타
- 칼레오하노(갈래오)
동현에 처음 오른 카우이의 두 부하 중 하나. 상춘 호와 동행한다.
- 푸알리
동현에 처음 오른 카우이의 두 부하 중 하나. 동현 호와 동행한다.
- 페니아미나
하와국 '왕의 물소를 돌보는 자'(농무대신).
- 헬레우마
하와국 '왕의 통나무배를 깎는 자'(어로대신).
2.10.4. 조홀국
2.10.4.1. 역대 국왕
- 압둘 잘릴 4세★
조호르 술탄. 구칠에게 왕위를 찬탈당하며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외부 세력인 정명완이 대한의 지원을 업고 개입하여 5000의 군세로 정명완군 3000과 맞붙었으나 패배한다. 이후 사로잡혀 대남도 토인병에게 참수당하고 수급이 대한으로 보내진다.
- 구칠★
압둘 잘릴의 조호르 술탄 자리를 잠시 찬탈한 인물.
- 고조 해성왕 정지룡(정종훈)[131]
대중성주 정준석의 차남, 즉 무종(1부 재석)의 현손이다. 원래 이름은 정종훈. 1641년 선조가 대중성주 직책을 회수할 때 이를 받아들인 아버지 정준석, 형 정영훈과 달리 반발해 11척의 배와 2천 명의 부하를 이끌고 탈주, 해적이 되었다. 이후 이름을 정지룡으로 바꾼 뒤 적두도를 점령해 난공불락의 요새구룡성?를 쌓고 자신의 해적단인 정가군의 본거지로 삼았다. 30년이 지난 3부 시점에는 인도네시아까지 진출했고 그 부하가 1만명에 이른다. 세력이 워낙 강대해 서나라에서 수군대도독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회유했다. 단순 해적을 넘어서 광동과 해남도 일대 해안선 전역을 영지로 하는 군벌과 같은 위치로 대놓고 세금과 통과세를 거두고 있다. 주로 터는 대상은 후송 배들이며 그래도 대한 출신이라고 대한 배는 노리지 않는다고 알려졌으나... 사실은 대한 배를 습격하면서 생존자를 한 명도 남겨두지 않은 거였고 그러면서 다른 배들을 털다 대한인과 마주치면 해치지 않고 살려주는 등 기만책을 쓴 덕에 대한 측에서도 정가군을 토벌하지는 않는다.[132] 대한 출신 본처 외에도 중국인, 일본인, 안남인, 양인, 흑인 등 온갖 인종의 처첩을 수십이나 거느렸다. 60년간 정가군을 이끌다가 1701년 노환으로 사망한다. 너무 장수해서 아들이 아닌 손자에게 세력을 물려준다. 손자가 왕이 된 후 대한에서 해성왕(海盛王) 시호를 내렸으며 손자에 의해 고조(高祖)로 추존 된다.[133]
- 순종 남순왕 정경진
정지룡의 아들, 정명완의 부친으로 아버지보가 먼저 사망했다. 이후 남순왕(南順王) 시호를 받았으며 조홀국왕이 아들에 의해 순종(純宗)으로 추존된다.
- 태조 진무왕 정명완
정지룡의 손자. 1675년생. 정지룡의 대한 출신 본처의 아들과 일본계 며느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1701년 조부 정지룡으로부터 정가군을 물려받았고 서 조정에서 수군대도독 벼슬 세습도 인정받았다. 대한과 서반아의 전쟁에서 대한 조정의 요청으로 서반아를 공격하겠다고 선언하자 수적으로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국계 숙부들이 반란을 일으켜 적두도에서 쫓겨난다. 이후 내전으로 혼란에 빠진 조호르 술탄국에 자리를 잡고 적두도를 장악한 숙부들, 왕가군과 전쟁을 계속한다. 재석은 자신의 후손을 챙겨주고 싶은 마음도 있고 번국도 만들 겸 공위 상태로 혼란에 빠진 조홀국왕 자리를 정명완이 차지하도록 돕는다. 대한의 지원으로 조호르 술탄국 내전에 개입해서 승기를 잡도 압둘 잘릴 4세를 사로잡고 조홀국왕으로 즉위한다.
역경을 거쳐온 삶이라 골초가 되었는데, 도래인 정복자 출신 왕가가 다스리는 신생국가를 다스리느라 신경 쓸 일이 많아 담배를 끊지 못한다. 왕비 의원공주와의 사이에서 1녀를 얻은 후, 더운 날씨로 고생하는 그녀를 위해 해수욕탕을 만들어주는 등 아내를 무척 애지중지한다. 1735년 폐암으로 사망했으며 진무왕(振武王) 시호를 받았다. 능력이 뛰어난 정복군주였으나 지나치게 한인과 일본인을 우대하고 말레이인과 중국인을 천대한 정책 때문에 그가 죽자마자 후계를 두고 내전이 일어난다.
- 조홀왕 정주신
정명완과 의원공주의 차남. 1717년생. 형 정주원이 아기 때 죽어 사실상 장남으로 세자에 책봉되었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홀국왕에 책봉된다. 책을 좋아하지만 내전이 일어나자 부왕을 닮아 과감한 성격임이 드러나는데, 이복형 정주태가 말레이인과 중국계 화교를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키자 일본 용병 2천명을 고용하고 대한 본국과 술루국, 영국의 지원을 받아 진압에 나선다. 이 기회에 말레이 귀족 세력을 확실히 밟아놓기 위해 정주태의 어머니 신빈 마씨가 친형 정주원을 독살했다는 죄목을 선포한다. 내전이 격화되면서 아예 말레이인의 씨를 말리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이며 진압을 밀어붙여 2년만에 1737년 반란을 진압한다. 반란을 진압한 후 보복으로 말레이계와 중국계 주민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그 자리를 천축에서 들야온 천축인 노동자로 채운다.
2.10.4.2. 왕실
- 정명완의 처
정명완의 첫번째 아내. 중국인이었고, 정명완이 쿠데타로 적두도에서 쫓겨나는 와중에도 남편과 함께 도주했으나 오랜 망명 생활로 병이나 그만 1700년대 초반에 죽고만다. 슬하에 딸만 있고 아들이 없어 정명완이 의원공주를 하사받는 원인이 된다. 부군이 국왕이 된 후 왕비로 추존된다. - ○○공주 정○○
정명완의 첫부인에게서 낳은 유일한 딸. 정명완이 조홀국왕이 된 후 정명완 신하의 며느리가 되었다.
- 의원공주
경흥왕 이원의 딸. 1696년생. 화번공주로 당숙인 건흥제의 양녀로 입적, 의원공주에 책봉되어 조홀국 왕비가 된다. 더운 조홀국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고 시원한 본국을 그리워한다. 정명완과 2남 2녀를 두었다. 자신을 아껴주던 남편 정명완이 죽은 후 삶의 보람을 잃고 우울하게 살다가 1740년 양아버지 건흥제가 사망한 보름 뒤에 뒤따르듯 세상을 떠난다. - 왕자 정주원
정명완의 장남, 출생 한달만에 요절한다. - 왕녀 정○○
정명완과 의원공주의 장녀. 1714년생. - 왕녀 정○○
정명완과 의원공주의 차녀. - 신빈 마씨
말레이 출신으로 정명완의 여섯 후궁 중 한명이며 정주태의 친모이다. 패배가 확정되자 독을 먹고 자결한다. - 파항군(芭港君) 정주태(이스칸다르)
정명완과 말레이 귀족인 신빈 마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명완의 서장자. 1705년생. 정명완이 죽자 그동안 불만이 가득했던 말레이 토착 귀족들과 화교 상인 세력들의 추대를 받아 반란을 일으키지만 대한, 술루국, 영국의 지원을 받은 정주신을 이기지 못하고 패배에 몰리고 모친 마씨까지 자결하자 항우처럼 최후의 돌격을 하여 전사한다. 여담으로 이때 건흥제가 예왕이 사사되기 전 마지막 형제의 정으로 동지 팥죽을 대접한 훈훈한 일화가 '난을 진압하고 이복형을 살려줄 것처럼 하다가 독이 든 팥죽을 먹여서 죽였다'로 왜곡되어서 전해지고 있음이 드러났다.
- 덕빈 무씨
정명완의 두번째 말레이 출신 후궁으로 정주명의 모친. - 부탈군(浮莌君) 정주명
1720년생 덕빈 무씨의 막내. 내전에서 정주태의 편을 들었고, 어리지만 무재가 있는지 선봉장으로 괜찮은 활약을 보였다.
2.10.4.3. 신료
- 정희신
선전관. 대남도 정씨의 종손.
- 정경신
동부승지 → 예조판서. 정희신의 동생.
2.10.5. 술루국
2.10.5.1. 역대 국왕
- 아흐메드[134]
해전에서 전사한 부왕의 뒤를 이은 10살 남짓한 어린 술탄. 디에고가 지휘하는 대한군에게 패하고 포로가 되어 대한에 압송된다. 건흥제의 친국을 받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술루가 해적질을 한 거나 대한이 필리핀을 빼앗은 거나 뭐가 다르냐며 대들어 건흥제와 대한 조정의 어그로를 잔뜩 끈다. 그래도 어린아이라고 동정표가 꽤 있던 편이었으나 제발로 다 걷어차 날려버렸다. 북방 유귀도에 유배되는데, 첫 겨울을 겪고 질려버린 시종들에게 목졸려 살해당한다.
재석은 아흐메드를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으며 실제로 그의 죽음은 재석의 의사가 아닌 시종들의 독단적인 범행이었으나 100여년후 4부에서의 묘사를 보면 외국에선 건흥제가 죽여 놓고 발뺌했다고 소문이 나 있다.
초대 술루국왕 디에고 1세 | Diego I | ||
작호 | 술루국왕 | |
본관 | 전주 이씨[135] | |
휘 | 진서(秦誓) | |
부모 | 부황 건흥제 생모 멘도사 백작부인, 양모 귀비 소씨 | |
부인 | 술루국왕비 하씨 | |
생몰 기간 | ||
양력 | 1682년 11월 23일 ~ 1745년 | |
재위 기간 | 술루국왕 | |
양력 | 1714년 ~ 1745년 |
- 비수백 → 비수후(沸水侯)[136] → 술루국왕 이진서(李秦誓)/디에고 1세
서반아 장군 빌라다리아스 후작의 딸 이사벨 마리아 안나와 재석 빙의 전 성친왕의 하룻밤 불장난으로 태어난 사생아. 1682년 11월 23일생. 13살까지 아버지의 정체를 모르고 살았다. 연인 도로테아와 결혼하려 했으나 도로테아의 부친인 칼레아 후작이 재산도 작위도 없는 사생아인 디에고와의 혼인을 승낙하지 않자 도로테아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떠나고, 좋아하던 소설인 홍희동전[137]의 홍희동처럼 자신도 대한으로 가서 지위를 인정받으면 도로테아와의 관계를 인정받을 수 있다 생각하여 연인과 대한으로 온다.
외모가 성친왕(재석)과 상당히 닮았는데, 입국장에서 자신이 태황의 사생아임을 주장했을 때 성친왕의 얼굴을 아는 관리가 놀라 식은땀을 흘리며 일단 정중히 모셨고, 재석과의 첫 접견에서도 동석한 대소신료 모두가 진짜 성친왕의 사생아임을 확신했을 정도이다. 게다가 모친 이사벨의 초상화를 가져왔고, 첫 접견 자리에서 초상화를 본 재석이 놀라 모든 신료들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버린다. 이렇듯 부정할 수 없는 정황증거가 쌓였기에 재석은 그를 자신의 친자가 맞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사생아이기에, 자식으로 인정받았을 뿐 황자로까지 인정받지는 못해 군왕이 아닌 백작위를 받았고 계승권은 없다. 황적에도 올라가지 못했고, 공식적으로는 순비 올렝카의 양자로만 취급된다. 재석은 귀국을 권했으나 대한에 정착한다.
서반아, 잉글국, 내달국과의 전쟁이 일어나자 불랑국과의 연합 사략 함대에 종군하는데, 본대와 갈라져 페루에 잠입해서 대한에 절실했던 친초목 묘목을 비롯한 유용한 동식물들을 가져온다. 이 공으로 비수후로 승작된다. 도로테아와의 사이에 아들을 낳아 재석에게 첫 손자를 안겨준다. 대한이 필리핀을 차지한 후 필리핀의 스페인인들을 회유하기 위한 선무사가 되어 필리핀에 부임하고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여 술루 술탄국을 토벌할 순변사로 승진한다. 1710년에 자식이 3명이 된다. 술루 술탄국을 정복한 후 조정의 의견에 따라 친왕과 같은 대우를 받는 술루국왕으로 책봉된다.[138] 부황이 궁궐을 지으라고 준 내탕금도 군자금으로 돌리고 부하들을 인종, 종교에 상관없이 공정하게 대해 충성심을 고취하는 등 명군다운 모습을 보인다.
루이 14세 조문을 위한 진위사 정사로 임명되어 유럽에 금의환향 하게 된다. 진위사에서는 사교에 대한 역할을 맡는다. 1745년, 향년 63세에 천수를 누리고 사망한다.
2.10.5.2. 왕실
- 비수백부인 → 비수후부인 → 술루국왕비 하씨/도로테아 데 칼레하
칼레아 후작의 고명딸. 디에고의 연인인 금발녹안의 미녀. 부친 칼레하 후작이 디에고와의 혼인을 불허하자 남장을 하고 빠져나와 디에고와 함께 대한으로 사랑의 도피를 한다. 디에고가 작위를 받고 혼인도 하면서 모든걸 이룬다. 한국식 성씨는 하(夏)씨를 사용한다.
권훤의 처가는 롤리타를 떠올리게 하는 도로테아의 친정 노릇을 하고 권훤의 아내 이마리는 도로테아를 의동생 삼는다.[139] 정호찬의 첩 이사벨라, 상희와도 친한 사이가 된다. 남편과 함께 필리핀에 부임하며, 술루왕비가 되자 사랑 하나만 믿고 스페인을 떠나오던 과거를 생각하며 매우 감격스러워한다. 유럽식 작위는 술루 대공비이다. 남편과 함께 유럽에 다녀오기도 한다. 행복하게 살다가 1741년, 향년 57세에 사망한다.
- 왕세자 비수공 이성진(프란치스코)
술루국왕의 장남. 1704년 생. 부모가 견서사로 파견되는 동안 한양에서 머문다. 남동생과 같이 축구 덕후로 술루 국가대표 축구단을 조직했다. 30대에 들어서는 아들을 3명이나 두었다고 한다. - 세자빈 이씨
이형준의 적자 쪽 현손녀로 프란치스코에게 시집간다. - 가북후 이정원(후안)[140]
1722년 생 이성진의 장남. 세손으로 책봉되었다. 삼촌 뻘 되는 황태손 이영에게 부인이 맘에 안든다고 첩을 들이는 방도에 대해서 상의한다. - 세손빈 남씨
1723년 생 본국에서 술루국으로 이주한 의령 남씨 출신이다. - 이세원(세르히오)
1725년 생 이성진의 차남. - 바실공주 이성희(이사벨라)
1705년 생. 술루국왕의 장녀. 부모가 견서사로 파견되는 동안 대한 본국에서 머문다. 올렝카와 친조손처럼 친해진다. 악기 배울 의사가 없던 수명공주와 달리, 상희와 함께 바이올린을 배운다. 결혼 후에는 한양에 살면서 상희와 은이를 떠나보낸 후 쓸쓸해하는 할아버지 건흥제의 말벗이 되어 드린다. - 권창(요한)
1704년 생. 권훤의 차남으로 권훤의 집안과 도로테아가 가족이나 다름없었고, 천주교도이기 때문에 이사벨라의 부마로 낙점되어 약혼한다. 아버지 권훤을 닮아 모험심과 공명심이 많은 성격이다.
- 볼내공 이성운(알레한드로)
술루국왕의 차남. 1708년 생. 부모가 견서사로 파견되는 동안 대한에 머무르며 형과 축구 경기를 관람한다. 성인이 된 후에는 용감한 장수가 되어, 장길산 토포군에 술루 정예병들을 거느리고 참전한다. - 왕녀 다니엘라
술루국왕의 차녀. 1721년 생. 부모가 견서사로 스페인에 머무는 동안 임신해서 귀국하는 배 안에서 태어났다.
2.10.5.3. 신료
- 권기선
술루국의 내정을 담당하기 위해 대한 조정에서 파견된 집정. 본국에서 공부대신과 내무대신을 역임했다.
- 이두명
권기선의 후임 집정. 법무대신 출신으로 원칙주의자.
2.10.5.4. 군부
- 고메스
서반아령 필리핀 소속 대위로 스페인인, 필리핀 원주민, 일본인 혼성 부대로 한인 불법체류자 마을 하나를 습격하면서 처음 등장했다. 습격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적을 잔혹하게 대하는데에는 주저하지 않는 군인이지만, 포로들을 다 화형시킨다는 방침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대한 본국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우려하는 넓은 시각을 가졌다. 한서전쟁 종전 이후 자신이 동포들에게 피해를 끼쳤으니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필리핀에 남아서 술루 술탄국 정벌에서 대한군 휘하 스페인인 부대를 지휘했다. 계급은 인정되지 않아서 스페인인들 사이에서만 '대위'라고 불렸으나, 술루국 건국 이후 근위연대장이자 육군 원수가 되었다.
- 조르조 벨라르디
이탈리아 연대 연대장이자 대령. 이탈리아 남자답게 유쾌한 성격에 여자를 밝힌다. 로마 태생으로 어머니가 로마의 코르티잔이었고, 용병이 되어 이 군대 저 군대를 떠돌다가 술루국에 와서 경험과 능력을 인정받아서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카타리나로 위장하고 살고 있던 이연수를 보고 아시아로 오기로 결정했다'는 잡담을 하는데 디에고와 동갑이기도 한 것을 보면 정황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성친왕의 또다른 사생아로 추정된다. 마침 그가 등장한 외전 에피소드 제목도 '어떤 인생의 갈림길'인 것을 보면...
2.10.5.5. 기타
- 가르시아
광동군에 고용되었던 스페인 용병. 광동군의 비실용적인 거포를 녹여 소형포 여럿을 만들어 진압군들에게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광동군이 패배하고 포로로 잡혔으나 술루국에 보내져 디에고의 신하가 되었다. 디에고에게 독립하자는 망언을 해서 질책을 받고 예의주시하기로 한다. 작품을 통틀어 세번째로 등장한 가르시아로 독자 댓글은 작가가 스페인에서 가르시아란 사람한테 소매치기나 인종차별을 당한 게 아니냐는 추정으로 가득 찼다.
- 아흐메드의 시종들
일단 왕이었던 사람을 데려오는데 막 대할 수는 없으니까 현지에서 아흐메드와 함께 데려와 붙여준 시종들. 총 3명이었으나 혹독한 유배생활 속에 겨울을 한 번 겪고 나자 다들 질려버려서 1명은 숲으로 도망가다 곰에게 죽었다. 남은 2명 중 1명도 배로 도망가려다 들켜 두들겨맞고 실패했다. 결국 둘이 작당해서 '모셔야 할 사람이 없어지면 우리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는 생각으로 잠든 아흐메드를 살해하고 사고로 위장하려고 했다가 딱 걸렸다. 이렇게 주인이 없어지긴 했지만 아동 살인범, 그것도 제 주인이었던 사람을 죽인 자들에게 곱게 귀향하는 게 가당키나 할까. 끔살 수준의 사형을 당하는 최후를 맞았다.
2.10.6. 주산군도
- 오명청
2부에서 조선의 좋은 사업파트너였던 명나라 대상인 오공충의 5대손으로 주산방 방주. 오씨 가문은 명나라가 망한 후 사업기반을 주산군도로 옮겨 주산방을 창립해 대 후송 무역을 맡고 있다. - 유홍
정해현의 지현[141]
3. 청
3.1. 역대 황제
- 목종 순치제 애신각라 나락혼(愛新覺羅 羅洛渾, 아이신기오로 롤로훈)
청의 5대 황제. 연호는 순치(順治).[142] 애신각라 낙명의 4자로 23년간 재위하다 1695년 음력 4월에 사망한다. 무리한 남정 대신 국력을 비축하는 정책을 선택하고 한족 신사 계급을 회유하는 유화정책을 펴 청을 안정시킨 명군이었다. 황후는 8촌 누이인 후금 현종 석새의 공주이다.
- 현종 중통제 애신각라 파사합(愛新覺羅 巴思哈, 아이신기오로 바스하)
청의 6대 황제, 나락혼의 차남. 1668년생. 1695년 음력 4월, 28세의 젊은 나이에 황제로 즉위한다. 연호는 중통. 태자 시절 대한에 입조했을 때 건복제가 증조부 청 태종(다이샨)을 그대로 빼닮았다고 평한 것을 볼때 능력이 뛰어나고 야심가인 것으로 보인다. 즉위 직후 을병대기근이 와서 후금과 연합해 기병 12만으로 후송을 침공한다. 후송 재침공을 준비한다는 것을 보면 초기 패전에 상당히 이가 갈렸던듯. 1702년 재침공에서는 유친왕 복전의 활약으로 대승을 거둔다. 대한과의 관계 증진을 위해 완친왕비(심왕비)로 딸 영화고륜공주를 시집보냈고, 그 뒤에도 태손비로 대한 공주나 군주를 들이려 한다. 후금에서 왕자의 난이 벌어지자 어부지리를 노리며 내치에 집중한다. 1728년 낙마 사고로 붕어한다.
- 신종 홍화제 애신각라 박화탁(愛新覺羅 博和託, 아이신기오로 보호토)
청의 7대 황제, 파사합의 장남. 이은보다 3살 연상인 1689년생. 승마와 궁술에 뛰어난 호방한 성격이다. 장조대제의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당숙인 후금 대패륵 파포태와 대한에 방문한다. 방문 후 태자 이은, 차레비치 알렉세이, 완친왕 이준까지 다섯이 몰려다니며 친해지고, 신서반아 원정을 위해 떠나는 대한군, 대한의 번국인 하와국 사신을 보고 바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건흥제에게 증기선 수출을 부탁한다. 청나라 치하 한족과 후송 한족의 정체성 구별을 위해 변발을 확대시키려 한다. 1728년 부황의 붕어로 7대 황제로 즉위하여, 만주 친왕들이 갖고 있던 팔기군 중 하오기(下五旗)의 군권을 황제 직할로 회수하려는 시도로 하오기의 후송 공격을 허락하나, 양양성에서 예상 외의 대패를 당해 군권은 회수했으나 뒷맛이 씁쓸하게 되었다. 태자 때부터 대한에 증기선, 증기기관차 수출을 줄기차게 요청했으나 매번 거절당하자 점차 대한에 대한 반감을 품게 된다.
3.2. 황실
- 태후 패아지근씨(孛兒只斤氏, 보르지긴씨)
1652년생 나락혼의 황후로 중통제 바스하의 모후. 아이신기오로 석새의 딸로 후금 공주이며, 건복제와 건흥제의 8촌 누나이자 형수다. 근친혼임을 감춰야 했고, 몽골계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시키려는 목적도 겸해 모계인 보르지긴씨를 사용한다. 모국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자기 맏손녀를 대한 황태자비로 보내는 것을 반대해 관철시켰으나, 그 후 아들에게 설득되어 친왕비로 보내는 것은 허락한다. 1716년 붕어한다.
- 효친왕 애신각라 다이진(皛親王 愛新覺羅 多爾眞)
1695년 생 파사합의 3남. 사절로 대한에 온다.
- 황후 엽혁나랍씨(葉赫那拉氏, 예허나라씨)
만주귀족 출신 박화탁의 황후 - 애신각라 소포도(愛新覺羅 蘇布圖, 아이신기오로 수부투)
1706년생 박화탁의 장남, 파사합의 태손. - 태자비 동가씨
- 애신각라 파이감(愛新覺羅 巴爾堪, 아이신기오로 바르칸)
1710년생 박화탁의 삼남.[143] - 귀비 뉴호록씨(니오후루씨)
박화탁의 첩.
- 홍친왕 애신각라 늑이금(谼親王 愛新覺羅 勒爾錦)
파사합의 재당숙. 1700년 후송의 침공 때 방어군 총사령관을 맡으나 기만책에 휘말려서 해하 전투에서 1만에 달하는 군사를 잃고 홍정원에게 대패한다. 사막으로 유배되었다가 5년만에 화병으로 사망한다.
- 유친왕 애신각라 복전(裕親王 愛新覺羅 福全)
파사합의 숙부로 1702년 벌어진 청-후금 연합군의 후송 재침공 사령관을 맡아 후송이 대비하지 않던 호북성 방면으로 청군 8만, 후금군 5만을 이끌고 침공, 후송의 방어거점인 신양성을 점령하고 후송군 15만을 섬멸하여 사수 이북을 빼앗는 대승을 올린 명장이다. 조카손녀인 영화고륜공주가 완친왕에게 시집갈 때 호송한다.
- 회친왕 애신각라 아달례(匯親王 愛新覺羅 阿達禮)
파사합의 숙부로 태황태후의 조문 사절로 대한에 온다.
- 신친왕 애신각라 다탁(愼親王 愛新覺羅 多鐸)
파사합의 이복 동생. 1677년생. 파포태의 난이 정리되자 마무리 회의 사절로 후금을 방문한다.
3.3. 신료
- 오응웅★
숙조 사후 파견된 조문 사절의 부사. 오삼계의 아들. - 오세번★
오응웅의 아들, 후송의 침공 때 숙주성 수비대장이었으며, 청 본군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숙주성을 맹공하는 후송군을 상대로 3개월간의 처절한 공방전을 통해 성을 굳게 지켜 결국 후송군이 철수하게 만든다.
- 삭액도★
청나라의 대한 주재 대사. 1703년에 70대인 노신이다.
- 납란성덕★
삭액도 후임 대한 주재 청 대사. 실제 역사처럼 유명한 시인이다.
- 은특포
홍화제 시기 내각승상.
- 사극단
홍화제 시기 호부상서.
- 복민
홍화제 시기 공부상서.
- 안태
홍화제 시기 예부상서.
- 장정옥★
홍화제가 신설한 최고 군사기관인 군기처의 군기대신.
4. 후금
4.1. 역대 대칸
- 단종 대덕제 애신각라 분고
후금의 5대 대칸. 연호는 대덕(大德). 본래 선황의 여섯째 아들이었으나 형 셋은 요절하고, 원래 대패륵이던 형을 그 아래 형이 암살했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하는 바람에 13세의 나이에 대패륵이 되어 황위를 계승한다. 대패륵 시절 8촌 누이인 청 정종 낙명의 공주와 혼인한다. 후계를 남기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어, 동생 와극달이 8촌 누이이자 형수인 분고의 대복진과 혼인하고 대칸위를 계승한다. 청 중통제 파사합의 외숙이자 고모부.
- 인종 태화제 애신각라 와극달(仁宗 □和帝 愛新覺羅 瓦克達)
후금의 6대 대칸. 연호는 태화.[144] 1668년생. 세례명은 요셉. 형 분고가 후계 없이 죽자 8촌 누이이자 형수인 청나라 공주 출신 황후와 혼인하고 대칸이 되어 청나라와 혼인동맹을 유지한다. 청 중통제 파사합의 외숙이자 고모부. 심왕 책봉 회맹에서 건흥제에게 소소한 불평을 계속하고 유구황제 상익을 무시하는 등 까칠한 태도를 보인다. 신하들에겐 엄하지만 가족들에게는 물러 후궁을 일체 들이지 않았고 형이 벌인 왕자의 난에서 비롯된 참극을 보았기 때문인지 파포태의 난행을 보면서도 미적거리다가 1722년 1월 쓰러져 의식은 있으나 말을 못하는 전신마비 상태가 된다. 이후 건강이 약간 회복된다. 부수가 파포태를 무찌르고 상도에 돌아오자 기뻐하며 부수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이 된다. 1726년 붕어한다.
시광제애신각라 파포태(始光帝愛新覺羅 巴布泰, 아이신기오로 바부타이)
와극달의 차남으로, 4살 터울인 형 상아대(常阿垈)가 파포태가 8살 때 낙마하는 바람에 요절해서 대패륵(태자)이 된다. 1693년생. 대복진은 몽골 패아지근씨 규수.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로. 장조대제의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당조카인 청 태자 박화탁과 대한에 방문한다. 태자 이은, 차레비치 알렉세이, 완친왕 이준까지 다섯이 몰려다니며 친해지는데, 어도선에서 실족해서 한강에 빠진 것을 이은이 구해준다. 완친왕과 특히 친해지더니 완친왕처럼 코끼리 덕후가 되어 건흥제에게 혼인 선물로 코끼리를 요청한다.
갈수록 군주에 걸맞지 않은 재목임이 드러난다. 스무살 까지는 지위에 맞게 행동하는 시늉은 했지만, 모후가 붕어하고 대복진이 아들을 낳자마자 마음대로 놀아난다. 후계자 수업은 제쳐두고 코끼리 사육에만 몰두하며, 대복진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여색도 심하게 밝히는데다,[145] 카라코룸을 여름 수도로 두어 몽골을 제압하려는 정책도 코끼리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폐기하고 카라코룸은 처가에 넘기려는 등 정치적인 안목도 전무하며, 호랑이를 화살 한대로 죽일 정도로 개인적인 무용은 뛰어나지만 준가르 침공 때도 코끼리를 타고 혼자 돌진하다가 크게 패배하는 등 군사적인 안목도 없다. 게다가 코끼리 한마리가 독화살을 맞고 죽자 보복으로 준가르 포로들을 코끼리로 밟아죽여 민심도 잃는다.
반대로 민심을 얻고 있는 동생 부수를 질투하는 걸 넘어 자신의 권좌를 위협하는 정적으로 생각해 증오하는 와중에 부황이 쓰러지자 동생을 친다. 원래는 부수를 역적으로 선포해 죽이고 율리아는 두번째 복진으로 들이려 했으나,[146] 부수 부부가 심왕부로 도망치자 부수 부부를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하라고 대한 측에 요구하고 1722년 3월 1일 즉위한다. 연호는 시광(始光).[147] 부수와 내전이 벌어지자 뜬금없이 부수의 동서인 알렉세이가 가담했을 거라며 이르쿠츠크를 공격했다가 오히려 러시아와 대한의 개입까지 불러들이게 되고 결국 성급하고 잔혹한 성격 탓에 휘하 병력들까지 등을 돌리며 패배하여 부수에게 생포된다. 이후 폐서인되었고, 부수는 일단 아버지가 살아계시는 동안은 죽이지 않고 감금만 해두었다. 4년간 감옥에 갇혀 있다가 태상황 와극달이 사망한 뒤 교살로 처형된다. 부수는 그래도 형제인지라 먼저 자결을 권유했고 원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끝까지 거부함에도 중인환시 공개처형이 아니라 본인, 심왕, 고령위, 나십만 참관하는 조용한 자리에서 죽였다.
- 성종 천정제 애신각라 부수(聖宗 天正帝 愛新覺羅 富綬)
와극달의 삼남. 큰형이 요절했기 때문에 이패륵으로 봉해지고 대한에서는 상도위로 봉해진다. 1696년생. 세례명은 제오르지우스. 파포태의 동생으로 율리아와 혼인한다. 갈수록 막장이 되어가는 형 파포태와 달리 독실한 천주교인인데다 차분하고 성실한 성격이어서 부수가 황위를 물려받길 기대하는 신하들이 있지만 본인은 형이 정신차리기를 바랄 뿐 야심이 없다. 조혼한 아내가 어린 나이에 출산하면 건강에 좋지 않을까봐 부부관계도 아내가 나이가 찰 때까지 미룰 정도로 아내 율리아를 매우 아낀다. 준가르 침공전에서 용감히 싸워 승리한데다가 포로들에게도 관대하게 대하여 민심을 얻는다.
형 파포태가 자신을 역적으로 선포했을 때 형수 보르지긴씨가 정보를 흘려주고 충신들이 도와 심왕부로 도피한다. 처음에는 형이 간신들에게 속은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희망고문을 하나 결국 현실을 깨닫고 형이 노리는 것 중 하나가 자신의 아내 율리아라는 사실에 각성,[148] 아내와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서 반정을 결심한다. 성 발렌티누스 축일인 1722년 2월 14일에 심양을 떠나고, 평소 쌓은 인망과 파포태의 자충수, 대한과 러시아의 지원 덕에 파포태를 물리치고 반정에 성공한다. 반정 이후 대패륵의 자리에 올랐고, 부황에게 양위받아 동년 9월 23일 후금 7대 대칸으로 즉위한다. 즉위 후에는 독실한 천주교 군주로 선정을 펼치며 재석이 승하했을 때에는 마침 기차를 타보려고 심왕부에 놀러왔다가 재석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당장 한양으로 달려가 본인이 직접 조문을 온다. 이후 1760년 사망했으며 '성종(聖宗)'이라는 묘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작중 후금 최고의 성군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성종 시절의 교훈을 망각했는지 4부에서 부수의 후손들은 다시 대칸 자리를 두고 내전을 벌이다 요서를 잃고 형제국인 청나라의 번국으로 지위가 떨어지게 되었다.
4.2. 황실
- 경효의황후 패아지근씨(敬孝義皇后 孛兒只斤氏)
4대 대칸 천권제 애신각라 석새(아이신기오로 쇼서)의 대복진으로 후금 황실의 초대 보르지긴 황후. 분고와 와극달의 모후. 박화탁과 파포태가 장조의 제사를 참배하기 위해 대한을 방문한 1705년에는 생존해 있어 언급되나 그 후 언급은 없다.
- □효□황후 애신각라씨(□孝□皇后 愛新覺羅氏)
대덕제와 태화제의 대복진이자 8촌 누이. 파포태, 부수, 정빈 김씨, 나십의 모후. 청 정종 낙명의 딸이며, 중통제 파사합의 고모이자 외숙모. 1713년 붕어하는데 이 때부터 파포태가 마음대로 놀아나기 시작하며, 태화제까지 쓰러지자 파포태를 제어할 사람이 없어진다. - 애신각라 상아대(愛新覺羅 常阿垈)
1689년생 태화제의 장남. 1696년 요절한다. - 패륵 애신각라 나십(愛新覺羅 喇什)
1705년생 태화제의 5남. 파포태와 부수의 동생. 세례명은 요셉. 형이 둘이나 요절해서 셋째 패륵이며, 막내인 아이진(阿爾進)도 요절해서 막내 취급이다. 대복진은 만주 귀족인 호륜(呼倫)씨 규수. 대칸위를 찬탈한 파포태에게 일단 숙이고 들어갔다가 카라코룸 전 투에서 결정적인 순간 부수 파벌로 갈아탄다. - 애신각라 아이진(愛新覺羅 阿爾進)
태화제의 6남.
- 수명옹주 → 수명공주 → 수명대장공주/대복진(秀明大長公主/大福晉) → 효성인황후 이향주/율리아(孝誠仁皇后 李香珠)
재석과 올렝카의 차녀. 양력 1700년 12월 2x일[149] 생. 1710년 후금 패륵(황자) 부수와 혼인하고 공주로 승작되었다. 아직 어려서 언니처럼 먼 나라로 시집가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품었으나 언니의 편지로 자신도 대칸 계승권이 있는 황실의 일원임을 자각한다. 남편과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잘 적응하고 있으며, 아들도 얻었다. 막장스런 파포태의 행적을 보고[150] 차라리 개념인인 남편 부수가 대패륵이 되는 것이 후금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 중이다. 파포태의 마수를 피해 남편, 자녀들과 함께 무사히 심왕부로 도피, 남편을 다그쳐 싸우러 나가게 한다. 1754년 54세에 사망한다. - 대패륵 → 중종 장락제 애신각라 파이도(中宗 長樂帝 愛新覺羅 巴爾圖)
1717년 1월생 부수와 율리아의 장남. 세례명은 안드레아. - 황녀
1720년생 부수와 율리아의 장녀. 1723년 초에 사망한다.
- 예친왕 애신각라 순영(睿親王 愛新覺羅 淳潁)
예친왕 애신각라 다이곤의 증손
- 애신각라 악이박(愛新覺羅 博鄂爾)
와극달의 사촌동생으로 태황태후의 조문 사절로 대한에 온다. 부수 파벌.
4.3. 보르지긴 가문
- 대복진 → 폐대복진 패아지근씨
파포태의 대복진. 세례명은 알렉산드라. 냉철한 성격이고 외모도 못나지 않으나 파포태가 눈이 높아 소박맞는다. 파포태의 막장 행각에 질려 쇼윈도 부부 상태이다. 냉철한 성격으로, 파포태가 부수를 죽이면 건흥제를 달래기 위해 율리아를 대복진으로 맞이하고, 보르지긴 씨족에게 이를 뒤집어 씌우고 토사구팽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부수 측에 정보를 흘려 달아나게 만들어 위험을 분산시킨다. 오빠 색이합과 함께 파포태와 부수 둘다 싸움터에서 죽기를 바라며 보르지긴의 몽골 지배 부활을 노린다. 부수에게 보험을 든 덕택에 파포태에게 연좌되지 않고 친정에서 자유롭게 산다. - 애신각라 연태(愛新覺羅 燕泰)
파포태와 패아지근씨의 외동아들. 세레명은 바오로. 1714년생. 난이 마무리 된 후 수도원으로 보내진다.
- 패아지근 색이합(孛兒只斤 索爾哈)
폐대복진의 큰오빠로 파포태의 큰처남. 1690년생. 상도 수비를 맡았다가 파포태가 패배하지 부수에게 저항 없이 성문을 연다.
- 패아지근 파배(孛兒只斤 巴排)
폐대복진의 작은오빠로 파포태의 작은처남. 1694년생. 파포태의 곁을 지켰으나 파포태가 러시아를 건드리는 등 자멸적인 행동만 계속하여 마지막 전투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직접 파포태를 생포해 부수에게 넘긴다.
- 패아지근 다이제(孛兒只斤 多爾濟)
대복진 남매의 당숙부로 내전이 벌어지자 휘하 군사들을 이끌고 부수 파벌에 가담한다.
4.4. 신료
- 과이가 달리선(瓜爾佳 达理善)
개국공신인 과이가 오배의 손자. 파포태 파벌.
- 납란 대민(納喇 垈敏)
심왕의 후금 출신 호위 기병 300기를 지휘하던 장수로 부수 파벌.
- 오도(五島)
부수가 기주(旗主)로 있는 왜인팔기 동백기(桐白旗)의 보좌관인 도통(都統)으로 부수의 최측근.
- 오랍나랍 나이포(烏拉那拉 那爾布)
파포태파로 카라코룸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카라코룸 전투에서 파포태의 패색이 확실해지자 부수 쪽으로 편을 바꾼다.
5. 일본
5.1. 역대 쇼군
- 도쿠가와 이에카츠
도쿠가와 막부의 5대 정이대장군.[151] 한인들은 관행적으로 일본 국왕으로 부른다.
- 도쿠가와 이에노부
★[152]
도쿠가와 막부의 6대 정이대장군. 1676년생. 1690년 15세의 나이로 후사없이 요절해서 직계혈통이 끊긴다.
- 도쿠가와 요시무네
★[153]
도쿠가와 막부의 7대 정이대장군. 1670년생. 이에노부의 9촌 조카로 첫 방계 출신 쇼군. 외가는 아민의 후손인 군마 마쓰다이라씨. 대한과 교류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던 히로시마 번주 출신으로 친한 성향이다. 을병대기근때 대한에 많은 식량을 제공한다. 대한에서도 그 보답으로 1707년 호에이 대지진이 터지자 많은 구호물자를 제공한다.
경인왜란 당시 전사한 오다 노부나가를 비롯한 왜장들의 시신을 돌려받고 싶다며 건흥제에게 정상회담을 청해 성사된다.[154] 대한과 상호 호혜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국내 반발 세력을 휘어잡는 등 정치력은 뛰어나지만 키가 작고 뚱뚱한 외모이다. 처조카인 천황의 사촌누이를 대한 황실에 시집보내려 하나, 당사자가 병사하는 바람에 무산된다. 1716년부터 건강이 나빠지더니 1719년 사망한다.
- 도쿠가와 이에토시
도쿠가와 막부의 8대 정이대장군. 요시무네의 아들. 1737년경 중병이 들어 자리보전을 하고 있으며 정이대장군 자리를 내려와 오고쇼가 된다.
- 도쿠가와 이에나리
도쿠가와 막부의 9대 정이대장군. 이에토시의 3남으로 이에토시의 장남과 차남이 요절해 정이대장군이 되었다.
5.2. 도쿠가와 가문
- 도쿠가와 요시노부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친동생이자 히로시마 번주로 태황태후의 조문사절로 대한에 온다. - 도쿠가와 이에히사
요시노부 사후 히로시마 번주가 된다. 건흥제의 조문사절로 대한에 온다.
- 도쿠가와 요시치카
기슈 도쿠가와가로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5촌 조카다. 상희를 문병하러 1724년 대한에 방문한다.
- 도쿠가와 쓰나에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11남 요리후사의 손자로 미토 고몬으로 유명한 2대 미토 번주 도쿠가와 요시쿠니의 조카, 항렬상 요시무네의 증조부뻘인 3대 미토 번주. 국수주의자로 을미조약을 폐기하고 규슈를 수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요시무네가 거부하자 대신 아모국에 일본인 이민들을 슬금슬금 보내 아모국을 차지하는 것으로 목표를 수정했다. 1719년 사망하지만 그의 영향으로 미토 번은 무력으로 대한을 쳐서 북구주 수복을 외치는 반한파의 소굴이 된다. - 도쿠가와 무네타카★
쓰나에다의 양자, 4대 미토 번주.
5.3. 마츠다이라가
- 마쓰다이라 요리토요
3대 다카마쓰 번주. 쓰나에다의 조카[155]로 아들 무네타카를 쓰나에다에게 양자로 보낸다.
- 마쓰다이라 히데모리
요시무네의 외조부이자 아민의 4대손. 68세로 사망. - 마쓰다이라 요시히데
히데모리의 아들로 서나라 광동 반란 진압 육군 사령관인 정남육군봉행.
5.4. 천황가
- 나카미카도 덴노(마스노미야)★
일본 114대 천황. 을미동정 당시 명나라 군사들이 교토고쇼를 불태웠던 원한을 아직 잊지 않는 등 미토 번과 비슷한 반 대한 사상을 갖고 있지만 막부에게 매수당해 미토 번사들의 전쟁 책동에는 미적거리는 태도를 보인다.
5.5. 사무라이
- 오오카 다다스케
정남해군봉행.
- 다테 요시무라
센다이번의 5대 번주. 다테 마사무네의 차남 타다무네의 8남 무네후사의 장남으로 사촌인 4대 번주 쓰나무라가 후사가 없어 양자로 입적되어 번주가 되었다. 3, 4대 번주의 무능으로 연해주 농장과 서양식 조선소 등 많은 이권을 막부에게 빼앗긴 것을 다시 수습하여 번의 경제력을 다시 회복시킨 중흥군주. 미쓰이 상회와 협상하여 아모국 교역권을 15년간 독점하기로 한다.
- 와키자카 야스사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차남 와키자카 야스모토의 양증손.
5.6. 기타
- 아메노모리 호슈(우삼동, 雨森東)★
태황태후 조문 사절로 온 히로시마 번주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보좌역. 실제 역사처럼 친한파 학자로, 강항의 학통을 이은 성리학자로 일본에서 공부한 후 대한의 문물을 흠모해 동래에 유학해 울릉도 출신 스승에게 성리학을 배웠으며 대한에도 일본의 석학으로 이름이 알려질 정도의 대 학자가 되었다.
- 미쓰이 다카하라
일본 최대의 기업인 미쓰이 상회의 주인.
6. 유구
6.1. 역대 국왕 → 황제
- 상정(尙貞, 쇼테이)★
유구의 11대 국왕. 성친왕이 미주에서 귀국길에 식량과 식수를 보급하기 위해 들렀을 때 그의 신분을 알고 초청해서 식사를 하고 미주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태황과 조정에서는 성친왕이 유구를 배후로 일을 꾸밀까 경계했는데, 유구 국왕의 친서, 성친왕의 보고, 익문사 관원의 첩보가 다 일치하는 것을 알고 성친왕의 정직함에 만족스러워한다. 1709년 노환으로 사망해 세손 상익이 계승했다.
- 순제 상순(順帝 尙純, 쇼준)★
유구의 세자로 대한에 입조한다. 유구에 대한수군 저탄소를 설치해달라고 요청한다. 술에 취해서 유구가 대한을 무척 두려워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칭신하면 대한에서 유구왕을 갈아치울까봐 칭신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속내를 재석에게 밝혔는데, 진짜 취해서인지 취한척한 것인지는 불명. 재석이 태황이 된 후에도 친분이 두터웠으나, 원역사처럼 1707년 부왕보다 먼저 사망한다. 칭제건원 후 순제(順帝)로 추존된다.
- 세조 영락제 상익(世祖 永樂帝 尙益, 쇼에키)★
아버지 상순이 사망한 후 숙부들과의 권력투쟁을 2년간 겪은 후 세손이 되어 대한에 입조한다. 1710년 갑자기 스스로 칭제건원하여 '영락제'를 칭한다. 대한과 일본에서는 상익이 외왕내제를 지켜 대한과 일본에 동등한 관계를 요구하지만 않는다면 묵인하기로 한다. 대한 측에 심왕 책봉식 회맹에 자기도 참석하겠다고 요청, 한양을 거쳐 회맹에 참석하게 된다. 심왕 책봉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폐렴으로 쓰러져 건흥제에게 유언으로 유구의 독립 유지와 태자의 안위를 부탁하고 1711년 12월에 대한 안주에서 사망한다.
- 천안제 상경(天安帝 尙敬, 쇼케이)★
1700년생, 상익의 아들. 대한에 흡수당하지 않으려면 군사적 역할도 분담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대한에 2등 중선 2척을 발주하고 군사 1000명을 더 징병하는 한편, 국민 통합을 위해 역사책인 유구전사 편찬사업을 시행한다.
6.2. 황실
- 상강(쇼코)★
1676년 생, 상정의 삼남으로 후궁 소생이다.
- 상기(쇼기)★
1682년 생, 상정의 사남으로 후궁 소생이다.
- 태후 모씨★
상경의 모후. - 북곡왕(北谷王) 상철(쇼테쯔)★
상익의 차남, 대한에 조문사절로 온다. 외전에서 자신이 태황을 조문 온 최고위 사절인줄 알고 이를 이용해서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조카의 제위를 뺏으려는 음모를 꾸몄는데 부수가 모든 시선을 다 뺏어가서 분해하는데, 4부에서 언급된 바로는 결국예왕의 난에서 잘못된 교훈을 얻어서후송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가 도움을 요청했던 일본은 오히려 대한에 이 일을 알리고, 대한 주둔군의 빠른 개입으로 인해 후송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패배하고 바다로 도망쳐 그 후 생사불명이 되었고 한다.
6.3. 신료
- 채온
천안제의 스승, 국사.
- 마봉필
천안제 시기 예무봉행.
- 모응봉
천안제 시기 외무봉행.
- 향원량
천안제 시기 병무봉행.
- 방현웅
천안제 시기 공무봉행.
7. 아모국
- 투로시노
아모국의 전 '곰을 쏘는 자'(국왕), 1736년 곰사냥을 하다 죽었다. 말이 국왕이지 아모국은 여전히 기존 부족사회를 유지하고 있어 국왕은 명목상의 자리일 뿐이다. '곰을 쏘는 자' 주제에 곰에게 죽었다는 것 때문에 부족장들에게 사후에도 비웃음거리가 된다.
8. 서
8.1. 역대 황제
- 태종 영창제 장형운
서의 2대 황제. 연호는 영창(永昌).1641년생. 형들과 달리 파촉인 후궁 소생 4남. 15세 때 후송 원정에 동행하던 중 장헌충이 급사하자 군사들과 친한 사천 출신이라는 점을 이용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형들을 제거한 뒤 황제로 즉위한다. 이후 서는 중원과는 언어도 문화도 다른 별개의 국가이니 중원을 노릴 필요도 없다고 선언하며 확장정책을 중단하고 대한과 관계를 회복한다. 후송과 청이 전쟁 중일 때 양광 지방을 확보해서 후송과 안남의 연계를 차단하고 안남을 번국으로 들인다.
황실이 본래 외지인이라 권력기반이 약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 고려 태조 왕건처럼 각지의 유력자들과 결혼동맹을 광범위하게 맺었다. 자신이 본래 선황의 서자였고 쿠데타로 집권한 배경 때문에 권력에 지나치게 집착해 친자식들도 경계하여 황태자 책봉을 환갑이 넘은 후에야 행했고, 그나마도 장남이 아닌 황태자의 권위를 제대로 챙겨주지 않아 황자들간의 권력암투가 매우 심했다. 마지막까지 정치력을 발휘해 군국제를 부활시켜 황자들을 달래면서 왕자의 난을 막고 정국을 안정시킨 뒤 1715년 붕어한다. 하지만 이는 문제를 뒤로 미룬 것에 불과했기에 결국에는 장장익의 난이 일어나는 단초가 되었고, 길게 보자면 4부에서 서나라가 패망한 원흉이 되었다. - 황태후
영창제 장형운의 정실. 1715년이 황태후가 된다. 1728년에 며느리가 황태후가 된 것으로 보아 가 이전에 붕어한 것으로 추정. - 성비 송씨
광동 객가 출신으로, 영창제의 후궁이자 초대 광동왕 장원소의 모친. 일찍 죽었다.
- 현종 승평제(玄宗 升平帝) 장원검
1672년생. 장형운의 적장남(셋째)으로 서의 3대 황제. 연호는 승평(升平). 황후 소생으로 즉위 후 사천, 광주, 중경, 장사 등을 직할지로 삼고 있다. 봉국을 받은 형제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부황에게 배운게 거의 없어서 스스로 배우고 익혀야 했다고 하는데도 대국을 잘 읽는 것을 보면 황제로서 능력은 부족하지 않으나, 형제들의 트롤링 때문에 나라가 분열되어가는 상황을 겪고 있다. 1728년 가을 운남왕 장장령이 동생 장장선을 암살한 사건에 충격을 받고 쓰러진 뒤 깨어나지 못하고 붕어한다. - 황태후
승평제 장원검의 정실로 흥시제의 모후. 1728년 황태후가 된다.
- 희종 흥시제(熙宗 興始帝) 장장현
1696년 생. 승평제의 장남이자 태자로 부황 장원검이 자신이 겪은 일을 반면교사 삼아 어릴때부터 제왕 수업을 시켰으나, 삼촌들의 분란으로 곤란한 상황에서 1728년 제위를 계승했으며 연호는 흥시(興始)이다. 광동왕 장장익이 대한에서 보낸 승평제 조문사절 박문수를 이용해 자치권 확대 요구를 하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역이용하여 환영연 자리에서 악어의 눈물을 흘리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이 기세를 타고 광동왕을 역적으로 몰아 토벌하고 겸사겸사 운남왕의 세력까지 소모시키려는 꼼수를 썼다. 하지만 광동의 반란을 불러와 국력을 크게 깎아먹는 큰 실책을 저지르고 만다. 간신히 광동 반란을 진압하고 군국제를 폐지했으나 대한과 일본에게 빚을 지는 등 앞날이 밝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침이 없어 황제권 강화에 성공했다. 3부 마지막에 건흥제가 불효자 때문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 때문에 고생한 자신과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껴 안타까워한다.
8.2. 신료
- 왕대수
광서를 근거지로 한 해적단 왕가군의 대두목. 여성이며 암호랑이(모대충)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정지룡과 똑같이 서나라의 벼슬을 받은 해적 군벌이며 정가군과 적대 관계. 정명완이 축출되면서 정가군의 내분이 벌어지자 이 틈을 타서 정가군 지부들을 뺏으면서 세력을 확장한다. 대한과 잉내연합의 전쟁이 확전되자, 대한과 화친하는 대가로 정명완이 적두도를 포기하도록 약속받는다. 그러나 잉내연합이 불러온 마다구 때문에 큰 타격을 입은 데다가 전쟁이 끝난 후 대한과 잉글랜드가 연합하여 왕가군 소탕에 나서고 서 조정에서도 직첩을 회수하고 토벌에 가담한 덕분에 궤멸당한다.
- 문종례(文宗藝)
중서령. 태조 장헌충을 따라 북방에서 내려온 한족 가문 출신이다.
- 양헌충(楊獻忠)
광주에 있는 광주절도사. 광동인.
- 목청원
형주에 있는 장사절도사. 후송의 침공을 3개월동안 고립된 상태에 수성하다 중과부적으로 장사가 함락되며 본인도 전사했다.
- 조건명
병부상서
- 이호문
양헌충의 후임인 광주절도사. 사천인. 광주를 지키다 전사한다.
- 악종기★
진남대도독 중경절도사로 흥시제의 명을 받아 광동왕 토벌에 나선다. 지휘를 아주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광동왕에 비해서는 능력이 모자라고 대한군이나 일본군만큼 무기가 좋은 것도 아니라서 고전하는 중. 한-일군의 도움을 받아 겨우 반란을 진압한다.
8.3. 서의 내번(內藩)
원래는 왕자들의 작위를 색상에서 따와 왕작에 봉하고 그쳤으나, 영창제 장형운이 죽기 전에 군국제를 부활시켜 봉국을 나눠주는 대신 승평제에게 충성하도록 한다. 이들도 자기들이 내란을 일으킬 경우 후송이 쳐들어올 것을 알고 일단은 승평제에게 충성하는 척 하며 자기 봉국의 기반을 다진다.서나라 황실 가계도: #
광동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아래 세 왕은 왕작은 유지되었으나 봉국의 통치권은 흥시제에게 모두 몰수당했다.
- 청왕(靑王) → 형주왕 → 파주왕 장원정
장형운의 적차남(여섯째). 승평제의 동복동생이기 때문에 요충지인 서나라령 형주, 즉 호남성을 맡았다. 그러나 무능한 암군으로 4년간 향락에 빠져있다가 1719년 쳐들어온 후송군에 참패하고 형주 지방을 잃고 만다. 그 후 파주왕으로 전봉된다.
- 흑왕(黑王) → 섬서왕 장원식
장형운의 서삼남(넷째)으로 북방 한족 소생이다. 청나라 영토인 장안을 치겠다고 북벌 준비를 하고 있어 승평제의 골치를 썩인다.[156] 광동 반란 이후 군사권이 모두 흥시제에게 몰수당하자 몹시 아까워한다.
- 자왕(紫王) → 귀주왕 장원락
장형운의 막내(일곱째)로 백왕과 동복형제이다. 맏조카인 장원교의 장남 장장령보다 1살 어리다. - 세자 → 귀주왕 장장균
귀주왕의 세자. 이후 귀주왕에 오른다.
8.3.1. 운남
- 백왕(白王) → 초대 운남왕 장원교
장형운의 서장남(첫째)으로 대리국 왕족 출신 백족 소생이다. 1660년생. 운남왕이 된 후에는 국력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 반독립적이었던 남만인들의 호구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 것을 보면 군주의 자질이 없진 않은 것으로 보였으나, 부족들을 복속시키는데 실패해서 부족장을 통해 간접 통치를 할 수밖에 없었고 광업과 교역이 경제기반인 나라에서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물리고 주변국 침략을 일삼으면서 교역을 스스로 망치는 당 둘 다 불안하게 만들었다. - 장장선
장원교의 차남으로 장장령의 동생. 어릴 때 수도인 성도에 볼모로 보내져 승평제에게 진심으로 충성한다. 승평제가 자신을 내몰고 장장선을 운남왕으로 삼을까 두려워한 장장령이 자객을 보내 암살한다.
- 2대 운남왕 장장령
장원교의 장남. 조부와 사천인들이 중심인 서나라 황실에 불만을 공공연하게 토하는 매우 불손한 모습을 보인다. 안남을 쳐서 영토와 주민을 늘려 운남왕부의 힘을 기른 다음 궁극적으로는 아예 독립까지 할 야심을 품고 있다. 부왕이 죽어 운남왕이 된 후에는 아예 승평제의 명령도 씹고, 수도로 자객을 보내 동생 장장선을 암살하는 등 사실상 운남을 독립국화 하지만 부친의 실패한 정책들을 수정하지 않아서 기반이 불안한 상태. 광동왕이 봉기했을 때는 성도에서 먼저 선수를 쳐서 막대한 재물과 미녀를 주고 광동왕 토벌에 동참할 것을 명했는데, 막대한 전리품을 얻고 운남의 자치를 확실히 보장받을 수 있을 거라는 계산으로 이에 응해 광동과 싸운다. 그러나 운남군의 낙후된 전력탓에 광서군과의 싸움에서 큰 피해를 입고 영지에 예비대를 제대로 남겨오지도 않은 탓에 교지국의 기습적인 침공을 받는 등 무능함이 만천하에 드러난다. 교지의 침공에 분노하여 광동토벌군에서 무단이탈해 베트남으로 쳐들어갔지만 험지를 무리하게 통과하려다 사방에서 적군에게 포위당해 운남의 독립은커녕 본인의 목숨과 내번의 존폐를 걱정해야 할 처지에 몰렸다. 다 굶어죽고 겨우 4000명의 군사만 남았을 때 간신히 일본 수군의 구원을 받아 살아났으나, 구해준 대한-일본 연합군 장군들에게 자신은 왕이니 자기 명을 받으라고 갑질을 하고, 연합군 측이 거부하자 자기 휘하 군사들을 이끌고 대한군이 겨우겨우 민심을 돌려놓은 근처 광동 백성들을 역적이라며 약탈 학살하고 다녀 대한군의 민사작전을 망쳐놓는 트롤링을 벌이다가 악종기에게 잡혀 성도로 압송되다가 도주를 시도하여 처형된다.
8.3.2. 광동
- 적왕(赤王) → 초대 광동왕 장원소
장형운의 서차남(둘째)으로 영창제의 애첩인 광동 객가 출신 성비 송씨 소생이다. 1663년생. 정지룡과 친분이 있어 대한에서는 내란이 일어날 경우 장원소를 밀어주기로 계획한다.
잠깐 등장했지만 흥미로운 캐릭터성을 보여줬다.여색을 매우 탐하지만 신하들에게 왕의 여자인 궁녀를 동침할 수 있게 베풀고, 그러다가 임신하면 임신시킨 신하에게 그냥 하사할 정도로 이상한 부분에서 관대하다. 황실 직할지인 광주를 가졌다면 이를 기반으로 복건을 도모할 수 있었을 거라고 하는 등 야심이 없는 것은 아니나, 자신이 늙은 만큼 무언가를 더 못 할 것 같으니 1687년생 장남이 확실히 세습할 수 있게 노력하기로 한다. 요약하자면 암군의 자질이 충분하나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선택했고, 자신이 가진 것과 한계를 파악하고 확실히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군주의 자질이 있다. 1723년 후궁과 성교 중 풍을 맞아 전신마비가 되었고, 얼마 안 지나 사망했다. - 장장헌
장원소의 차남. 수도에 볼모로 가있다가 장장익이 즉위한 후 자기 삼남과 바꾸어 광동으로 데려와 참모로 삼는다. 불산성이 함락되자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깨닫고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형 장장익을 죽이고 관군에 투항, 목숨은 보장받는 대신 평생 연금형에 처해진다.
- 2대 광동왕 장장익
장원소의 장남. 1719년 후송의 침공 때 광동 방어에 성공한다. 대한 인현황후 국상 때 황제 승평제와 별도로 조문 사절을 보내 서나라 조정에서 보낸 공식 사절과 싸우는 등 사실상 광동을 독립국화 한다. 하지만 후송이 침공해도 조정에서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광동의 중심도시인 광저우는 황제 직할령인 점에 불만을 품고 있다. 한사 박문수를 이용해 흥시제에게 광저우 양도 등 자치권 확대 요구를 시도하다가 역적으로 몰려 난을 일으킨다. 군재는 뛰어나서 관군과 대한-일본 연합군에 포위당한 상황에서도 여러번 위기 상황을 벗어나며 버티고 있다. 그러나 한일서 연합군에게 밀리고 밀려 불산성에서 농성하다가 마지막 역습에 실패하고 동생 장장현에게 죽는다. - 장세견
장장익의 삼남. 1717년생.
- 조중선(趙重詵)[157]
광동국 병조상. 장원소에게 열심히 아부하며, 습작을 위해 일을 꾸밀 계획을 짠다. 장원소에게 '은혜'를 받아서 궁녀를 데리고 별실로 간다.
- 유휴(劉烋)
장장익이 흥시제에게 자치권 확대 요구를 위해 보낸 사자. 장장익과 같이 전장에 나가 싸우던 장장익의 충신.
- 증정★
광동왕부의 승상.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로서 광동왕부를 감시하거 있었는데 반란을 일으킨 장장익에게 죽는다.
- 조상망
예부상. 강경론자. 서나라에서 아예 떨어져 나와 대한의 번국이 되자고 주장하며 그 가교가 될 만한 박문수를 억류하고 로비를 하려한다. 하지만 박문수가 탈출하고 그 중에 주서사 이인좌가 피살되어 한군이 파병되는 계기를 만들고만다. 반란 진압 후 매국죄로 거열형을 당한다.
- 육수정
병부상. 온건론자였기 때문에 반란 진압 후 흥시제에게 사면받는다.
- 왕경
광동군 총병. 사미포대 전투에서 광동군을 총지휘했다. 대패했지만 한군과 교전경험이 가장 많은 장수라서 계속해서 한군과의 전투에 투입되는 중.그리고 번번히 깨진다.
- 임용완
광동군 부총병. 사미포대에서 홍진오를 맞아 전투를 벌이나 포대에서 대응하는 홍진오에게 패배한다. 홍진오의 설득에 대한 측에 귀순하여 선무공작을 벌이고 있으며, 홍진오와 바둑 시합을 세번 해서 세번 다 이겼다. 운남왕이 광동 백성들에게 벌이는 패악에 분노하여 대한 측으로 전향한 광동병사들을 모아 의용군을 만들어 운남군과 싸우며, 이 공로를 흥시제에게 인정받아 내란이 진압된 후 광동 광서를 모두 다스리는 양광총독 직을 제수받는다. 총독이 된 후 전란으로 폐허가 되었던 광동 부흥에 전력을 다해 8년만에 광동의 민심과 경제를 다시 회복시키는 업적을 쌓는다.
8.3.3. 광서
- 녹왕(綠王) → 초대 광서왕 장원호
장형운의 서사남(다섯째)으로 묘족 소생이다. 광동왕과 함께 봉기를 일으켰다. 자애로운 성품으로, 흥시제와 장원소의 화해를 주선하려 하나, 세자인 장남에게 왕위를 계승당한다. - 장장적
장원호의 서자. - 장장원
장원호의 서자.
- 2대 광서왕 장장권
장원호의 장남. 1700년생. 부왕을 암살하고 이를 본인보다 16살 어린 막내 장장적에게 뒤집어 씌우고 왕위를 계승한다. 게릴라전을 통해 관군을 크게 애먹였으나 관군 대도독 악종기가 반란 가담을 사면하고 왕위를 보존해준다는 보장을 받아오자 편을 바꿔 관군 편을 든다. 하지만 광동이 함락된 후 부왕 시해 진범임이 밝혀져 폐위되고 처형당한다.
- 육생남★
광서왕부의 승상.
9. 후송
9.1. 역대 황제
- 현종 소무제 조형서
후송의 4대 황제로 연호는 소무(紹武).[158] 1680년생으로 선황 조광훈이 요절하여 겨우 4살의 나이로 제위에 올랐다. 너무 어리기에 모후 진씨가 섭정을 했으나 1695년 건주의 침공을 계기로 친정을 시작한다.[의문]
청에게 보복전을 준비하며 군비를 확장하고, 숙조의 사망을 계기로 대한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하여 청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대한에서 침공을 늦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신들을 붙잡아놓자, 참지 못하고 원정을 감행했다. 원정에서 청에게 큰 타격을 입히자 만족하고, 대한과의 국교도 1702년 수립되나 청의 보복 침공으로 사수 이북 영토와 후송군 15만, 백성 4만을 잃는 큰 피해를 당한다. 이후 대한-스페인 전쟁이 영란연합과의 전쟁으로도 확전되자 간신히 육성한 함대를 영란군이 고용한 마다가스카르 해적들에게 줄줄이 털리는 굴욕을 당하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콜레라까지 펴져 백성 수십만을 잃은데다가, 대한-청-후금이 심왕 부활을 통해 혼인동맹을 공고히 하기도 한다. 기대했던 서나라 왕자의 난도 일어나지 않고, 서나라에서 후송으로 줄을 갈아타려 하던 안남국 정씨왕조도 후송을 통수치고 그대로 서나라 줄을 유지하는 등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굴욕을 당한데다 나라 안에서도 지방 향신층이 예전 육조시대처럼 문벌귀족화 되고 있어 나이보다 20년은 더 늙어보일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허장성세로 백여명의 수졸이 인력으로 외륜을 돌리는 대형 철갑선을 만들어 주산군도 앞바다에서 무력시위도 하고, 1716년에는 자전을 편찬하여 문화적인 정통성이라도 세우려 한다.
1719년 서나라가 건주-준가르 전쟁에 한눈을 판 틈을 노려 63년만에 호남성을 탈환, 형주 전역을 장악하여 창업주 조승복 이래 가장 큰 영토를 확보한 황제가 된다. 소무자전을 편찬하면서 관화를 버리고 수도 난징에서 쓰는 오어를 표준어로 채택하여 북벌을 사실상 포기하고 강남 왕조의 정체성을 새로 세우려는 모습도 보인다. 소무자전이 편찬 완료된 1728년에는 팔고전서 편찬 작업도 시작하는 등 문화적인 업적을 차근차근 쌓아올렸다. 서나라가 광동의 반란으로 내전이 벌어지자 양광 지역을 빼앗을 준비를 하는 등 군사적인 확장정책도 아주 포기한 것은 아니었으나 조카 홍사옥이 준비도 안됐는데 먼저 침공을 시작했다 패배하는 바람에 또 좌절을 맛본다. 1735년 팔고전서를 완간한 후 할 일을 다 마쳤다는 듯 1736년 57세 나이로 붕어한다. 묘호는 현종(顯宗).
예왕이 내부의 적이었다면 조형서는 외부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재석은 호적수로 존중했던 조형서가 자기보다 먼저 떠난 것을 진심으로 아쉬워한다. 객관적으로 볼때 전혀 업적이 부족한 황제가 아니다. 형주 수복으로 영토도 충분히 넓혔고, 소무자전과 팔고전서를 편찬해 문화적 기틀도 다졌으며, 건흥제에게 그토록 이를 갈면서도 조승복 이래 완전히 파탄났던 대한과의 외교 창구를 다시 열어 흥선제 시기 양국이 준우호국 수준으로 밀접하는 계기를 다졌다. 이 모든 것이 후송이 이후로도 100년 이상 더 버티고, 태평천국의 난으로 무너질 수 있었던 상황에서도 기사회생할 수 있게한 기반이었으니 조승복 이후 최고의 군주이며 창업주인 조승복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비기지 못 할 업적을 세웠다.
그럼에도 건흥제에게 번번히 좌절당하고 자기 수명을 깎아가면서 끊임없이 도전하고 뭐든 해보려 했던 삶이 너무나 처절하면서도 인상 깊었기에 사망 후 서나라에선 조형서가 죽으며 "하늘은 이 형서를 낳고 어찌 또 건흥을 낳으셨나이까!"라고 외치고 죽었다는 헛소문이 퍼졌다. 본인은 유능한 군주이나 적국에 더 뛰어난 군주가 있고 나라 내부사정이 어지러워 번번히 좌절한 점이 작중 동시대인인 칼 12세를 연상하게 한다.
- 명종 태안제 조호덕
1713년생 조형서의 삼남. 셋째였으나 형 둘이 요절하여 황태자가 되었다. 학문을 좋아하고 꼼꼼한 성격으로 부친이 붕어하자 즉위하였다. 연호는 태안(太安). 즉위하자마자 청나라 공격을 시작하는데, 일단 양양, 번성 방면으로 6만 군사를 보내 마치 청나라 수도 개봉부를 공격할 것처럼 하여 청나라 주력군을 끌어내고, 실제 주력군은 대운하를 통해 안휘성, 강소성 방면을 점령하는 성동격서 전략을 세운다. 대한이 청을 지원하지 않겠느냐는 신하들의 걱정에 대해서는 한황 건흥제는 고령으로 곧 죽을 것이고 황태손 이영은 아직 어려[160] 대응을 못할 것이라는 행복회로를 돌리고 있지만 청나라에게 또 크게 패배하고 만다. 건흥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노괴[161]가 드디어 죽었다며 특히 불효자식 때문에 죽었다고 비웃으며 기뻐한다. 하지만 이틈에 주산 군도를 치자는 제안은 거부할 정도로 정세 파악은 제대로 하고 있다.
9.2. 황실
- 조호승
조형서의 장남으로 만 14세로 요절했다.
- 조호열
조형서의 차남.
- 황태후 진씨
조형서의 모후. 어린 조형서를 대신해 섭정에 있었으나 군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고 한다. 건주의 침공을 계기로 섭정에서 물러났다.
9.3. 신료
- 송정경
외교관. 한국어에 능통하다. 숙조가 사망한 후 조문 사절로 찾아와서 자기네 건국 시조인 조승복의 잘못까지 언급해가며 대한과의 관계 개선 의지를 밝히고 6일만에 귀국한다. 이후 1700년 국교 수립 요청 사절로 다시 대한을 방문한다.
- 사사정★
한림원 대학사, 대한군에 사로잡힌 후송 포로들의 석방 교섭을 위해 대한에 특사로 온다.
9.4. 군부
- 왕소
병부상서. 군벌이 아닌 중앙군 출신으로 잔뼈가 굵은 장수 출신.
- 정극장★
복건수사제독. 원역사의 정지룡 역할을 대남도 정씨 정종훈이 가져가버려서 이 집안은 후송 조정의 허가를 얻어 대한 수군 몰래 밀무역 일을 하는 집안이 되었다. 아버지 정경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과를 보아 출세는 했으나 청, 서, 대한에 3면을 틀어막힌 후송 수군의 암담함 때문에 스트레스를 잔뜩 받고 있다.
- 손계원
무창도통사로 백전노장이다. 철갑선을 앞세워 서나라 수군을 격파하고 악주성과 장사성을 함락했다.
- 임현서
좌시위대장군으로 형주 정벌에서 장원정의 도읍인 상덕성을 함락했다.
- 대명세★
상희의 문병을 목적으로 1724년 대한에 사신으로 방문한다.
- 연갱요★
황실 직할인 우림군 상장군이다가 해임된 홍승훈 후임 정주도통사가 된다.
- 장호원
후송의 내부 상태를 보여주는 캐릭터. 가난한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나 군대에 입대했다가 성실한 태도 덕분에 우림군 백호장 자리까지 오른다. 얼마 안 되는 월급을 모아 가족들에게 보내는 등 선량한 성격이다. 태안제 즉위 직후 청나라 공격 때 참전해 패배하는 아군의 후위부대라는 절망적 임무를 맡았지만 용감히 싸우다가 고구의 구원을 받아 무사히 돌아오고 정6품 천총까지 승진한다.
- 고구
장호원네 집이 땅을 부쳐먹는 지주인 고씨 집안 막내아들. 빽으로 우림위 정9품 총기 자리를 얻어 장호원의 부하로 들어왔지만 여러 차례 공을 세워 정6품 천총까지 승진한다. 단 둘만 있을 때는 지주와 소작농 관계대로 말을 놓기로 했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장호원을 상급자로 예우하고, 장호원이 가르쳐준 노하우에도 감사할 줄 알고 장호원이 위험에 처했을 때 구출하는 등, 부잣집 막내답게 철이 없긴 하지만 인성은 바른 편이다. 부친 고씨부터 다른 지주들과 달리 소작인들에게 공정하게 대하는 사람으로, 장호원에 대한 보답으로 장씨 집안의 소작료를 1년에 닭 3마리만 바치면 된다고 사실상 면제해주는 은덕을 베푼다.
9.5. 홍씨 가문
- 위국공 홍정원
홍승주의 손자로, 후송 최대의 군벌. 청 침공군 총사령관을 맡았다. 20만 대군을 이끌고 청의 허를 찌르는 양동작전을 벌여 해하 전투에서 청 주력군을 격파하나, 숙주성을 굳게 지키는 오삼계의 손자 오세번의 철벽방어에 막혀 3개월간의 공방전을 벌이다가 청의 구원군이 오자 어쩔수 없이 철수한다. 공주를 며느리로 맞고 후송의 대장군으로 승진하는 등 조형서의 신임도 두텁다.
- 홍승훈
흥정원의 아들이자 수연공주의 부군. 정주도통사로 근무 중 조형서의 형주 정벌 중 광동을 공격해 형주로 가는 지원을 차단하는 공을 세운다. 1730년 서나라 내전 시기엔 위국공 작위를 세습한다. 아들을 다스리지 못한 벌로 정주도통사 직에서 해임되나 2년만에 복직한다. 하지만 정주도통부는 지금까지 강병이었는데 새 병법을 도입할 필요가 없다고 포로생활로 철든 아들의 주장을 기각하는 등 꼰대짓을 한다. - 수연공주
조형서의 친누이동생. 1684년생. 모후를 닮은 천하절색. 청과 후금은 화번공주로 대한 황실에 시집가서 관계 개선을 도모할까 염려하고 있었으나 건흥제는 별 관심이 없는데다 태자 이은은 너무 어렸고, 조형서도 친누이를 정실 황후가 아니면 시집보낼 수 없다 생각하여 결국 홍정원의 아들 홍승훈에게 시집간다.
서나라 내전 직후 장남 홍사옥이 독단적으로 광동을 침공했다가 일본에게 포로로 잡히게 되면서 아들을 살리기 위해 오빠에게 애걸복걸한다. - 홍사옥
홍승훈의 아들이자 수연공주의 장남, 소무제 조형서의 조카.서나라 내전 막바지에 송의 광동 침공 당시 황제 조형서는 한일군이 철수할 때까지 기다릴 것을 명했으나 젊은 혈기에 황명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출정했으나 해주부 전투에서 일본 기병대에게 사로잡힌다. 젊은 혈기에 아직 연륜이 부족해 포로로 잡힌 와중에도 주색잡기를 즐기고 있으나 조형서는 그를 엄벌하고 그 기회에 홍승주 가문의 권력까지 빼앗을 생각을 한다. 결국 일본에 몸값으로 은 180만 냥을 주고 석방, 귀국한다. 조형서 앞에서 자기가 주색잡기를 즐긴 것은 옛날 카이사르처럼 무사히 돌아오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궤변을 늘어놓았으나 어머니 수연공주 덕에 근신 처분만 받는다. 2년 후 다시 총병직에 복직했는데 그 전보다는 좀더 철이 들어서 대한군이나 일본군 같은 강병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직접 대한의 병법서를 독학해 정주도통부 군사들에게 맹훈련을 시킨다.
9.6. 기타
- 호염방
양쯔강과 상해 일대 상권을 장악한 휘상의 방주. 주산군도를 본거지로 한 대한의 주산방과 협력 관계이다.
10. 안남
- 응우옌푹쭈(阮福淍, 완복주)★
현 광남국주로 레 황실이 송나라가 애산전투로 망한 것처럼 망해 없어지를 바라고 있다. 서나라의 내전이 터지자 북하국을 충동질해 운남왕과 싸우게 하고 어부지리를 노리려 했으나 하필 그 시기에 찬랍과 참족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 응우옌푹쭈(阮福澍, 완복주)★[162]
응우옌푹쭈(阮福淍)의 아들로 부친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다.
- 응우옌푹코앗(阮福濶, 완복활)★
응우옌푹쭈(阮福澍)의 아들로 부친에 뒤를 이어 즉위한다. - 귀인 쩐씨(陳氏, 진씨)★
- 찐장(鄭杠, 정강)★
찐끄엉의 장남으로 부친의 뒤를 이어 즉위한다.
11. 섬라
- 보로마콧★
시암국왕으로 1732년 즉위한다.
12. 준가르
- 체왕 랍탄★
준가르의 군주인 홍타이지. 1718년 후금과 청의 합동공격을 받아 동부 영토 절반을 잃는 참패를 당한 것도 모자라 카자흐 족의 봉기까지 일어나 수습하다가 분사한다. 향년 84세.
- 갈달 체렝★
체왕 랍탄의 아들. 준가르의 홍타이지. 체왕 랍탄의 뒤를 이어 외부 문제를 안정시킨 후 반기를 든 로브 산쇼노를 꺾었다.
- 로브 산쇼노★
체왕 랍탄의 아들. 형인 갈단 체렝과의 왕위 다툼에서 패한 후 따르는 무리를 모아 용병 생활을 하다가 나디르 샤에게 고용되어 인도 원정에 종군한다. 인도의 부를 직접 목도한 후 아예 인도에 눌러앉아 풍요로운 벵골 지역을 정복해 독립 왕국을 세울 궁리를 하고 마침 벵골 태수와 대한 골가타 상관과의 관계가 틀어지자 대한의 골가타 상관의 지원을 받아 태수를 죽이고 벵골 칸국을 세운다.
13. 천축국
- 아우랑제브★
무굴 제국 바드샤. 정복군주로서 영토는 크게 넓혔으나 친이슬람 정책으로 무굴 제국을 내전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은 후 계미남변이 끝날 때 쯤 병사한다.
- 바하두르 샤 1세★
아우랑제브의 차남으로 형제들을 죽이고 황제로 즉위하나 즉위 5년만에 사망한다.
- 자한다르 샤★
바하두르 샤 1세의 장남으로 동생들을 죽이고 즉위한다.
- 플루크시야르★
자한다르 샤의 조카로 자한다르 샤를 죽이고 즉위한다. 대한 골가타 총관부의 지원에 대한 보답으로 면세 특권을 내린다. 그러나 향락에 빠져 놀기만 하다 권신 사이드 형제에게 암살당한다.
- 무함마드 샤★
사이드 형제의 꼭둑각시 바드샤로 옹립되었으나 사이드 형제를 숙청하는데 성공하지만 그 후로는 암군이 된다. 마라타 동맹과의 전쟁 과정에서 헛소문에 속아 영국인들을 학살했다가 영국 동인도회사에게 원역사보다 더 일찍 털리고 인도 서부의 이권을 뺏긴 데다가, 원역사처럼 나디르 샤를 모욕하는 짓을 저질렀다가 나디르 샤에게 완벽하게 패하고 델리를 약탈당한다.
- 슈자 우드 딘 무함마드 칸★
벵골 태수, 12년 간 즉위 후 사망한다.
- 사파라즈 칸(알라 우드 딘 하이다르 융)★
슈자 우드 딘 무함마드 칸의 아들로 아버지가 죽은 후 벵골 태수가 된다. 나디르 샤가 남겨두고 간 준가르 용병들의 위협에 대비한다는 이유로 대한 상관에 내려졌던 면세 혜택을 박탈한다.
14. 파사국
- 나디르 샤★
무굴 제국 무함마드 샤에게 외교 교섭을 시도했으나 모욕만 당하고 무굴을 침공하여 역사대로 대승을 거두고 델리를 약탈 학살하여 수많은 보물을 빼앗은 후 준가르 용병대를 남겨두고 귀국한다.
15. 현돌궐
- 아흐메트 3세★
오스만 제국의 제23대 파디샤. 오랜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추구하는 온건주의자로 적성국인 러시아를 뒤에서 도와주고 100년간 서로 적대해온 대한을 껄끄러워한다. 그래서 동맹국 프랑스의 중재를 통해 관계를 개선하려 한다.
- 알렉상드르 기카
오스만에서 보낸 사절단장. 알바니아 출신의 백인으로 외교는 피정복민에게 맡기는 오스만의 관습에 따른 전문 외교관.
16. 대유주
16.1. 불랑국
16.1.1. 역대 국왕
- 루이 14세★
3부 시작 시점의 프랑스 국왕. 성친왕을 막 완공한 베르사유 궁전에 묵게 해주고 연회에도 거듭 초청하며 대화 중 중국 고사를 인용하기도 하는 등 대한과 아시아에 상당히 호의적이다. 프랑스어와 궁중 예절을 가르칠 가정교사 샤를을 재석에게 붙여준다. 성친왕에게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예고하며 대한이 프랑스와 동맹해 필리핀과 대미주에서 스페인 식민지를 위협해주면 필리핀을 대한에 넘기겠다고 제안한다.
주인공 재석이 성친왕의 몸에 빙의한 것이 딱 루이 14세와 만난 시점과 비슷하기에 재석은 망나니였던 성친왕이 개과천선한 것에 대한 설명으로 '명군 루이 14세를 보고 감명받아 태도를 고치기로 했다'고 핑계를 대는데, 견서사들이 아무도 토를 달지 않을 정도로 한인들이 보기에도 루이 14세는 훌륭해보였던 듯 하다. 재석과 헤어진 이후 원역사대로 돌팔이에게 속아 이를 몽땅 뽑아버리고 관장을 하여 악취를 풍기고 항상 설사를 싸는 더러운 모습이 되었다고 하며 재석은 그와의 추억을 망가트리지 않기 위해 일부러 찾아가지 않고 깨끗하던 모습으로 기억하기로 한다. 이후 원역사처럼 과도한 전쟁으로 나라에 망조가 들게 하여 한때 그를 존경했던 재석에게도 비난을 받는다.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프티 도팽 루이가 홍역으로 사망하면서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져 1715년 사망한다. 장남, 장손 부부, 증손자까지 모조리 한꺼번에 잃었던 원역사와 달리 장남과 증손은 살아있으며 나름 대체역사의 수혜자다.
- 그랑 도팽 루이 이후의 명군 유니버스와 원 역사의 프랑스 왕실 가계도 비교표: #
- 그랑 도팽 루이 → 루이 15세★
루이 14세의 아들. 1661년생. 재석과 동년배이고 놀기 좋아하는 성격이라 잘 어울려 지내게 된다. 원역사에서는 왕이 되지 못하고 천연두로 사망했는데, 예수회를 통해 이미 종두를 맞았고 자녀들도 종두를 맞힌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지자 재석에게 편지를 보내 프랑스와 동맹을 맺자고 권유한다.
1715년 부왕 루이 14세가 사망하자 루이 15세로 즉위한다. 종두 덕분에 천연두는 무사히 넘겼지만, 장남 프티 도팽 루이를 홍역으로 잃고 급격하게 건강이 나빠진다. 결국 1720년 사망한다. - 브르타뉴 공작 → 부르고뉴 공작 → 루이 16세★
프티 도팽 루이의 차남으로 원역사와 달리 사혈치료를 피하고 생존하여 왕태손이 된다. 할아버지 루이 15세 사망 후 왕으로 즉위하며, 증조부 루이 14세를 닮아 야심만만한 성격이다. 왕세자를 병으로 잃은 후 한동안 실의에 빠진다. 그 후에는 증조부 루이 14세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망상에 빠져 국가 재정난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여색을 밝히고 베르사유 궁을 증축하며 전쟁으로 영토 확장을 하겠다는 야욕에 불타고 있어 이 세계에서도 결국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말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재석이 루이 14세를 존경했고 스승인 이형준을 끔찍이 모셨다는 사실은 유럽에서도 알려졌는지, 외전에서 전쟁을 말리는 스승의 드 플뢰리 추기경의 잔소리를 귀찮아 하면서도 똑같이 증조부를 존경하는 기사왕보다 못할 수는 없다며 참는 모습을 보인다.
16.1.2. 왕실
- 프티 도팽 루이★
그랑 도팽 루이의 장남으로 종두는 맞았으나 1712년 홍역으로 원역사와 같이 요절한다.
- 베리 공작 샤를★
그랑 도팽 루이의 삼남. 1714년에 사냥 중에 사망한 원 역사와 달리 살아있다. 큰형은 죽고 작은형은 시칠리아 국왕이 되어 프랑스에 남은 왕족들 중 왕위계승권자인 조카들을 빼면 가장 높은 왕족이 되었다. 건강이 좋지 않은 부왕 루이 15세를 대신해 디에고를 환영하는 연회를 주관하며, 빌라다리아스 후작의 부고를 알린다. 루이 15세가 사망하자 어린 루이 16세의 섭정이 되었으나 미시시피 거품 사태가 원역사보다 크게 터지자 책임을 지고 사임하고 실의에 빠져 죽는다. - 베리 공작부인 루이즈 엘리자베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의 딸. 6촌 오빠인 남편과는 정략결혼한 사이인데 스캔들로 악명이 높으며,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파리를 방문한 표트르 1세와도 관계를 가진다.
- 앙주 공작 → 양시칠리아 국왕 필리포 1세★
그랑 도팽 루이의 차남, 원역사 펠리페 5세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결과 스페인령 양시칠리아 왕국을 넘겨받아 원역사와 달리 양시칠리아 국왕으로 즉위하며 스페인 왕위에 대한 계승권을 영구포기한다.
-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
루이 14세의 동생. 여러 차례 전쟁에서 승리한 명장이자 유능한 외교관이다. 여성적인 복장을 하고 다니며 항상 주변에 미청년 애인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남색가이기도 하며 성친왕에게 종종 묘한 시선오를레Ang?을 보내는데, 이는 성친왕을 딸 엘리자베트 샤를로트의 사윗감으로 눈독을 들인 것으로 성친왕이 러시아로 가버리자 마음을 접고 아쉬워한다.
-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아들. 원 역사처럼 어린 국왕의 섭정 자리를 노렸으나 베리 공작에게 섭정 자리를 뺏기자, 베리 공작과 존 로가 벌이는 인도 회사 주가조작을 방관하고 대신 대한과의 친선관계를 자기 주관으로 돈독히 하여 버블 붕괴가 일어나면 책임을 물어 베리 공작의 자리를 뺏을 궁리 중이다. 결국 버블 붕괴가 일어나고 베리 공작이 사임하여 바라던 대로 섭정이 되었으며, 국내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전쟁을 벌이기도 하다가 노환으로 사망한다.
16.1.3. 신료
- 장바티스트 콜베르★
프랑스의 재무대신 겸 해군대신. 재석이 원 역사에서 표트르 1세가 네덜란드에서 선박건조 실습한 것을 흉내내어 프랑스 군함 조선소에서 실습을 한 것에 혹시 다치기라도 하면 어쩔뻔 했냐고 학을 뗀다.
- 루부아 후작 프랑수아-미셸 르 텔리에★
루이 14세의 육군장관, 재석과 대화하며 장 바티스트 콜베르를 은근히 깎아내린다.
16.1.4. 기타
- 샤를 드 샤티옹
루이 14세가 재석에게 붙여준 가정교사. 재석에게 프랑스어, 유럽 궁중 예법, 춤을 가르친다. 조부가 1642년 대한에 사절로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 앙드레
베르사유 궁전의 시종.
- 타베르니에[163]
보석상. 재석에게 선물로 사용될 보석을 판매한다.
- 장 바르★
재석이 범선 동현 호를 주문한 후 고용한 프랑스인 선장. 1650년생. 덩케르크 출신이며 사략선장 경력이 있다. 제 특기를 살리지 못하고 건복제의 명으로 동현을 몰고 태평양 항로에서 운송 일이나 좀 하다가 본국에 전쟁이 나자 귀국한다. - 프랑수아 코닐 바르★
장 바르의 장남. 1677년생. 64문 3급 기함, 44문 중프리깃 3척, 24문 프리깃 2척으로 이뤄진 사략함대를 이끌고 대서양, 남미에서 사략활동을 하다 마닐라에 도착하고 홍하명을 만난다. 대한이 점령한 마닐라에서 함대를 재정비하는 와중에 한양을 방문해 건흥제를 알현하고, 운송의 안전성과 편의, 돈세탁을 위해 약탈품을 돈으로 바꿔 베네치아 은행 계좌에 입금해줄 것을 요청한다.
- 루이 블랑샤르
벽란도에 주재하는 프랑스 동인도회사 상관장. 평민 출신이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출세했다.
- 조르조 살마나자르★[164]
비수후 디에고의 사례를 보고 자신도 건흥제의 사생아 '이 조르조'라고 주장하며 찾아온 사기꾼. 자신이 1683년 1월에 로마에서 창부 어머니와 건흥제 사이에서 태어났고 프랑스의 예수회 수도원에서 자랐는데[165] 어머니가 죽기 직전에야 출생의 비밀을 알려줘서 황자로 인정받기 위해 대한에 찾아왔다고 주장한다. 재석은 외교적 문제를 우려해서 루스국을 통해 조용히 돌려보내려 했으나 조르조가 계속 자신이 건흥제의 자식이라고 주장하고 다녀 금위사식 고문 풀코스를 체험시켜준다. 그 결과 자신의 정체[166]와 계획적으로 건흥제를 속이고 황자가 되기 위해 온 사기꾼임을 실토한다. 결국 사지가 잘려 내걸리는 최후를 맞는다.
- 존 로★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개척을 담당한 '미시시피 회사'의 CEO. 원 역사에서 미시시피 거품 사건을 터트린 것과 마찬가지로 루이지애나에 몰래 이주하는 한인들을 단속하겠다고 이이명이 원론적인 이야기를 한 것을 과장하여 루이지애나 한인들이 전부 프랑스에 귀화하여 많은 농작물을 생산하고 대한 미주총관부와 루이지애나 사이에 직교역로가 뚫릴 것이라고 언플하며 주가를 조작하고 있다. 섭정 베리 공작과 공모하여 프랑스 정부의 막대한 부채를 떠안는 대신 모든 교역회사들을 미시시피 회사에 인수합병한 '인도 회사'를 창설하고 영국의 남해회사와 동업하더니 결국 부도가 나고 만다.
- 보하르누아 후작 샤를 드 라 보이셰★
존 로가 부도를 낸 후 수습을 위해 1726년부터 프랑스령 누벨프랑스 총독으로 온 귀족, 본래는 해군 제독이었다. 행정관으로써의 능력이 뛰어나 루이지애나 식민지를 안정시키고, 그동안 교역에만 치중했던 루이지애나에 농업을 장려하여 자립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여 12년이 지난 1727년 말에는 상당한 성과를 올린다.
16.2. 폴수국
16.2.1. 역대 국왕
- 얀 3세 소비에스키★
폴수국 국왕. 크라쿠프에서 견서사 일행을 처음 만난다. 견서사가 루스국과 동맹하여 폴수국을 정탐하러 온 것이 아닌지 의심하는 등 첫 만남은 좋지 않았으나 재석이 마상창시합 승리로 그의 정적 차르니에츠키를 꺾자 신뢰한다. 빈 전투 이후 올렝카를 데려가도록 해주고 지참금으로 카라 무스타파의 금은보화를 비롯해 상당의 전리품을 나눠준다. 원역사대로 1696년 6월 17일 손녀의 탄생을 알지 못하고 사망하며, 대한에는 그 소식이 2년 후에야 전해져 올렝카가 위령미사를 드린다.
- 아우구스트 2세★
작센 선제후,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루스 차르국, 오스트리아와 결탁해 그 뒷배로 얀 3세의 다음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이 된다. 나르바 전투에서 스웨덴 국왕 칼 12세가 표트르 1세를 격파함에 따라 스웨덴이 지원하는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에게 쫓겨났다가 최종적으로 대북방전쟁에서 승리한 표트르 1세에 의해 다시 복위하는 것도 원 역사와 동일하다.
-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나르바 전투에서 승리한 칼 12세 의해 즉위했다가, 대북방전쟁에서 이긴 표트르 1세에 의해 쫓겨난다. 이후 아우구스트 2세가 죽자 선거를 통해 복위를 노려 결국 선거에서 1위에 성공한다. 하지만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터진 후 오스트리아의 사부아 공자 외젠이 수도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아우구스트 3세를 왕으로 내세우면서 그단스크로 피난했다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강화를 맺으면서 연금 매년 1만 에퀴를 보상으로 받고 퇴위한다.
- 앙주 공작 루이 → 폴란드 국왕 루드비크 2세★
프티 도팽 루이의 삼남이자 원역사의 루이 15세. 둘째 형이 원 역사와 달리 생존하여 프랑스 왕위에 즉위할 가능성이 낮아진 대신, 재석이 그를 러시아 공주와 결혼시켜 폴란드 왕위에 앉힐 제안을 했고 러시아와 프랑스 모두 동의하여 재석의 손녀인 러시아 공주 예카테리나와 결혼한다. 원 역사처럼 여색이나 밝히는 문란하고 무책임한 성격으로 결혼 후에도 난봉질을 고치지 못한다. 폴란드 국왕 선거에서 패배하지만 장인 장모가 러시아군을 동원하여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자칭 폴란드 국왕 루드비크 2세로 즉위하나 외젠 공에게 바르샤바를 빼앗기고 비텝스크를 임시 수도로 삼는다. 하지만 오스만의 헝가리 침공으로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와 휴전하면서 정식으로 폴란드 국왕으로 인정받는다. 왕이 된 후에도 국정에는 전혀 관심 없이 향락과 난봉질에만 몰두해 아내와 장모가 언급조차 꺼릴 정도다. 심지어 형 루이 16세가 보낸 군자금까지 유흥으로 써버려 카타지나 왕비가 외조부 건흥제에게 손을 벌리게 할 정도.
16.2.2. 소비에스키 가문
- 마리시엥카 왕후★
폴수국 왕후로 프랑스 귀족 출신. 서출인 올렝카를 미워하여 구박하고,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세임과 결탁하여 자기 장남 야쿠프 루드비크 대신 사위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에마누엘을 차기 왕으로 낙점하여 남편의 발목을 잡는다. - 야쿠프 루드비크★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장남. 얀 3세는 폴란드 왕위를 장남에게 세습하여 세습군주제를 도입하려 하나, 야쿠프의 왕위 세습은 세임과 결탁한 모후에 의해 실패하고 원 역사처럼 아우구스트 2세가 왕으로 선출된다. - 아델라이드 루드비케★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적녀. 1672년생. 원역사에서는 4살에 사망했으나 작중에서는 폴란드에서 활동 중인 예수회의 영향으로 종두를 맞아 조금 더 오래 살아남아 1682년 베르사유 궁전에 잠시 머물다 귀국한다. 결혼 전에 요절한다. - 테레사 쿠네군다 소비에스카★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적녀. 1676년생. 1682년 베르사유 궁전에 잠시 머물다가 귀국한다.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과 결혼하여 카를 알브레히트를 낳는다.
-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로마노바/앙주 공작부인 카트린→ 폴란드 왕후 카타지나
알렉세이와 루시아의 장녀. 1716년생. 새할머니의 이름을 받았다. 15세에 프랑스 앙주 공작 루이와 결혼한다. 무능하고 무책임한데다 난봉을 일삼는 남편에 대한 애정은 전혀 없고, 오로지 외할머니 올렝카와 어머니 루시아의 염원인 '소비에츠키의 핏줄이 폴란드 왕위를 되찾는다'라는 정치적 목적에 충실하다. 남편을 다그쳐 폴란드 왕위계승 전쟁을 치러내 폴란드 국왕 자리에 앉히고 실질적으로 국정을 맡고 있다. 어머니와 오빠는 폴란드를 러시아에 편입시키는 것이 목표인데 반해 본인은 폴란드에 자신의 왕조를 세우는 것이 목표여서 결국 오빠와 싸우게 될 운명이다. 남편의 사치, 유럽의 정세 등 자금 문제를 겪어 외조부 건흥제에게 요청해 3번이나 자금을 지원받지만 워낙 거액의 수치여서 대한에서도 폴수국에 자금 지원을 반대하는 간언들이 나올 정도다.
- 예카테리나의 8촌 질린스키
예카테리나의 8촌 오빠뻘로,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당시 질린스키 가문이 예카테리나에게 붙어 분골쇄신한 덕분에 왕비의 특사 단장을 맡아 대한에 방문한다. 자기 가문이 옛날 올렝카를 매우 귀하게 대했다고 건흥제 앞에서 자랑을 늘어놓으나, 진실을 아는 재석 입장에서는 매우 아니꼽게 보았다. 20만냥이라는 거금의 자금을 얻고 귀국한다.
16.2.3. 기타
- 아우구스트 3세★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2세의 아들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의 사위. 아버지의 왕위를 세습하기 위해 선거에 나서나 패하지만 오스트리아군이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폴란드 왕으로 옹립하나 오스만 제국의 헝가리 침공으로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와 휴전하면서 협상에 의해 금화 30만 에퀴를 보상으로 받고 퇴위한다.
- 우렘 백작 마누엘★
포르투갈의 왕자로 스페인의 호세 페르난도 1세의 지원으로 선거에 나서지만 패배한다.
- 스테판 스타니스와프 차르니에츠키★
폴란드 귀족으로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정적. 국왕이 성친왕의 작전회의 참석을 허락하자 국왕에게 망신을 주려고 재석을 도발하며 자신의 휘하 기사 한 사람과 마상창시합을 벌이도록 한다. 일부러 모욕을 주기 위해 경험 없는 초짜를 내보냈으나 실상은 승마 경험만 40년이던 재석에게 그 기사가 패배하며 자존심을 구긴다. 하지만 패배한 후 군말없이 약속을 지켜 재석에게 자기 정예 후사르 300기를 넘겨주는 상남자이기도 하다. 재석이 빌린 병사들을 챙기고 아끼는 모습을 보이자 이에 감탄해 재석에게 호감을 보인다.
- 즈비슈코[167]
얀 3세 소비에스키의 부하 기사. 독일어를 구사해서 통역 역할을 맡는다. 빈 전투에 참전한다. 이후 견서사 일행을 따라 루스국까지 동행하며 스몰렌스크를 뺏어간 루스국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낸다.
- 유란드
카르니에츠키의 부관. 재석에게 기병 전술과 간단한 폴란드어를 가르친다. 재석이 빌린 병사들을 잘 챙기는 모습을 보고 감탄해서 폴란드의 귀족으로 눌러앉으라고 권유한다.
16.3. 도이치
- 프리드리히 빌헬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대선제후. 견서사 일행이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도이치 영토를 조용히 통과하던 중 우연히 소문을 듣게 되어 베를린 궁전으로 초청한다. 대화 중 과거 이괄이 유주대란 중 도이치에서 약탈을 벌였음을 알려준다. 조선의 군사동원능력을 부러워하며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던 자신을 위로하고 격려해준 재석에게 호감을 느낀다. 이런 심경의 변화인지 아니면 선물한 홍삼 때문인지 원역사와 다르게 제2차 빈 공방전에 3000명의 병력을 파견한다. 그러나 빈 해방 후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전리품 분배 과정에 불만을 품고 철수한다.
-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프로이센 국왕. 원 역사대로 군대에 미친 성품에 장남, 차남을 자기 실수로 죽이고, 세자인 삼남 프리드리히를 학대하는 성격파탄자에 막장부모다. 재석은 프리드리히 빌헬름을 말려볼까도 생각했지만 개입할 수단이 없는 데다, 역사의 변수를 최소하려면 프리드리히 2세가 원 역사와 동일한 성장 과정을 겪는 게 낫다고 생각하여 지켜보기만 하고 있다.
- 프리드리히 2세★
원 역사처럼 부왕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친구들과 함께 영국으로 탈출하려 했으나 부왕에게 붙잡혀 감금당하고 처형당할 뻔 했으나 요제프 1세와 카를 대공이 뜯어말려 겨우 사형을 면한 대신 친구들의 참수된 머리를 강제로 보게 된다. 그 후에는 원역사처럼 애정없는 결혼을 하지만 아내와 섹스리스로 지내며, 부왕과 사무적인 관계만 유지하고 있다.
-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아버지, 재석이 유럽에 있을 때 잠시 마주쳤다고 3부 349화에서 잠시 회상한다.
16.4. 루스국 → 러시아 제국
16.4.1. 역대 차르
- 표트르 1세★
루스국 차르. 재석과 만난 시점에 12세로 실권은 없는 거구의 밀덕 소년이다. 재석이 그의 밀덕 성향에 딱 맞는 선물들을 가져갔고 빈 전투 참전 썰을 풀어서 금세 친해진다. 재석이 대한이 서유럽과 교류로 발전했음을 설명하며 바람을 넣어 견서사를 따라 '피터 알렉세이예프'란 가명으로 시종인 척 하고 스웨덴, 네덜란드, 잉글랜드를 여행한다. 하지만 원역사처럼 너무 소문이 널리 퍼져서 시종인 척 하는 위장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일단 본인이 끝까지 시종 피터 알렉세이예프라고 우기니 그렇게 대해주기는 한다.
3년이나 같이 다니며 재석과는 친한 형 정도의 사이가 되었고, 한국말도 의사소통이 될 만큼은 할 줄 알게 된다. 암스테르담 하숙집 딸 마르타와 첫경험을 가지고 애인으로 삼는다. 어린 나이인데도 재석보다 술이 몇 배나 센 술고래에다, 한국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영어, 러시아어를 섞어서 골리친과 소피아를 몇시간이나 욕하는 투 머치 토커다. 소피아는 수행원들이 표트르와 가까워질까봐 수행원들을 자주 교체하지만 오히려 명군의 자질을 보이는 표트르에게 호감을 품는 이들만 늘어나게 된다. 막수구파에 대화재가 나서 초토화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소피아와 골리친의 실정을 더이상 참을 수 없다며 3년간의 유학을 끝내고 귀국하며 예브도키야 로푸히나와 혼인한다. 이후 자신이 17살이 되었다며 친정을 요구했으나 소피아가 거절하자 누군가 자신에게 총격을 가한 것을 계기로 소피아를 암살미수범으로 지목하고 축출해낸다.
재석과 헤어진 후에도 미주에 있는 재석이 답장을 못 했음에도 계속 장문의 편지를 꾸준히 보낸다. 재석에게 들은 대한의 사례를 바탕으로[168] 루스국을 개혁하고 잉글국의 도움을 받아 해군도 건설하고 있다. 재석에게는 여전히 친한 동생처럼 굴지만 반대하는 신하를 직접 처형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말을 하면 쇠꼬챙이로 코를 찢어버리는 등 완전한 폭군이 되었다.
재석의 답장을 받고 귀국한 것을 알자 대한에 300명 규모의 사절을 보내 개혁에 필요한 도움들을 요청하며[169] 아들 알렉세이를 5년간 유학보낸다. 역사대로 대북방전쟁에서 초전에 패하자, 대한에 기병대와 군마를 보내는 대신 대한제 총을 공급받기를 요청한다. 첫사랑 네덜란드 출신 마르타가 향수병으로 귀국한 후 원 역사에는 예카테리나 1세가 되는 폴란드 출신 마르타를 정부로 들인다. 며느리로 온 루시아를 따라온 대한군 연대의 활약으로 폴타바 전투에서 실제 역사보다 더 큰 대승을 거두고, 오스만 제국과 싸운 프루트 강 전투에서도 차레비치 알렉세이의 발빠른 지원과 대한군 연대의 분투로 실제 역사보다 더 관대한 조건으로 강화를 맺고, 역사대로 러시아 제국을 선포한다.
원 역사보다 2년 늦은 1719년 프랑스를 방문했다가 디에고를 만나고, 건흥제를 다시 만나는 기분이라며 무척 반가워한다. 디에고가 자신의 여성편력과 이중잣대를 지적하자 깐깐하다며 투덜댄다.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1725년 사망한다.[170]
- 차레비치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로마노프 → 차르 알렉세이 2세
★
원역사의 알렉세이보다 2년 늦게 태어났다.[171] 1700년 8살의 나이로 아버지의 친서를 직접 들고 사절단의 정사 겸 5년간의 유학을 위해 대한을 방문했다. 아버지와 다르게 체구가 작고 유약한 성격이다. 재석은 알렉세이를 잘 교육시키는 한편 동갑인 이은과 친구가 되게 하고 가능하면 대한에서 혼인까지 시켜서 개혁군주 겸 친한파로 만드려 한다. 재석의 계획대로 이은이 알렉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서로 평대할 정도로 동격의 격의없는 친구가 되었다. 성당에서 마주친 예왕의 장녀 이연수를 짝사랑한다.
반역자의 딸인 연수와 알렉세이를 이어주는 것을 찝찝해한 것은 재석 뿐만이 아니라 표트르 1세도 마찬가지였으나, 알렉세이의 연수에 대한 애정은 소년의 치기어린 사랑 이상이어서 계속 거절한다. 결국 올렝카에게 부탁받은 은이까지 달라붙어서 연수와 사랑을 이루기 위한 현실적인 제약과, 친모인 올렝카처럼 루시아도 연수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미녀가 될 것임을 들어 알렉세이를 설득, 간신히 루시아와의 약혼을 성사시킨다. 귀국 후에 표트르는 알렉세이에게 예비대 지휘관을 맡겨 전쟁터로 끌고다니느라 루시아와 동침할 겨를도 없지만 대한 유학이 헛되지 않아 몰도비아 공국 원정을 간 표트르가 오스만의 대군에 포위당해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을 때(프루트 강 전투, 1711년) 예비대 사령관으로 후방을 교란, 표트르가 이끄는 군이 관대한 강화협상을 맺고 빠져나올 수 있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어 표트르에게 엄청난 신뢰를 얻게 되었고, 부황이 프랑스를 방문하는 동안 대리청정을 맡는다. 부황이 귀국한 뒤에는 시베리아 총독 직을 맡았다가 후금 내란에 개입하고, 부황의 승하로 원역사와 달리 차르가 된다.[172]
본작에서 등장한 세계사 변화의 큰 분기점 1이다. 예카테리나 1세가 로마노프 왕조의 조상인 원역사와 달리 알렉세이가 제위를 계승하면 러시아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지게 될 것이다. 특히 재석이 러시아가 동방으로 뻗어오지 않도록 표트르와 알렉세이에게 러시아 차르는 마땅히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여 진정한 로마 황제로 자리매김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바람을 잔뜩 넣어놓은 상태이고 알렉세이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황후 루시아는 폴란드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어, 앞으로 러시아와 동유럽, 중동의 역사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16.4.2. 황실
16.4.2.1. 루시아와 그 자식들
- 수빈[173]옹주 → 수빈공주 → 수빈대장공주 이명주 루시아(秀濱大長公主 李明珠)/차레브나 → 차리차 루시아 표도로브나 로마노바
재석과 올렝카의 장녀. 양력 1696년 11월 18일 생. 엄마의 외모를 많이 물려받아 머리도 갈색(어릴땐 금발이었다)[174]이고 백인의 외모에 가깝다. 법도에 따라 올렝카에게 엄마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 원칙이지만 대한에 알아듣는 사람이 거의 없는 폴란드어로 올렝카를 엄마라고 부른다.
재석은 루시아가 공식적으론 어쩔 수 없이 적서 차별을 받는 것이 안쓰러워서 혼인이라도 해외에 보내지 않고 가까운 곳에서 해주려 하지만 결국 올렝카의 뜻대로 만 9살에 차레비치 알렉세이와 정식으로 약혼하고 수빈옹주로 책봉되었으며, 1년 후인 1706년 봄, 러시아로 떠날때 화번공주들의 선례를 따라 공주로 승작되었다. 갓 혼인하여 가족들 품을 떠날 땐 두렵고 서러운 마음이 컸지만, 막상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자 한양에서와는 달리 남편 알렉세이의 지위를 체감하고 자신이 얼마나 큰 나라의 차리나가 될 것인지 깨닫고 야망에 불타기 시작한다.
루스식 이름은 루스 황실을 지키는 수호성인을 대부로 하여, 루시아 표도로브나 로마노바이다. 알렉세이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낳는다. 1719년 둘째 아들도 낳지만 한달만에 요절한다. 작중에서 루시아와 율리아 모두 올렝카를 닮은 절세미녀들이다보니 알렉세이는 미녀로 성장한 루시아를 무척 마음에 들어하게 된 모양. 내면은 한국인이라 황태자비인 자신에게 불륜을 원하면서 추파를 던지는 귀족들의 행태를 어이없게 여겼고, 이를 시아버지에게 알려 분노한 표트르 1세가 해당 귀족들을 엄동설한에 채찍질하는 일이 있었다.
시집온 뒤 모친 올렝카가 폴란드 왕실에서 받은 수모를 제대로 알게 되자, 이에 대한 복수심을 품고 아들 표트르에게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자손임을 상기시키며 폴란드에 대한 통치권도 있음을 주입, 모친의 복수를 위한 정당한 명분을 갖춰나간다. 폴란드 국왕 선거에 후보로 나선 사위 앙주 공작 루이가 선거에서 패배하자 남편을 움직여 폴란드를 침공,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7년 전쟁이 한창이던 1761년 65세에 사망하며, 원역사에서 옐리자베타 표도로브나 여제가 사망하며 전쟁의 향방이 바뀐 것과 똑같은 결과가 초래되었다.
생전에 부모와 조상을 은혜를 강조하고 정성껏 받드는 성리학적 가족 윤리를 심어놓았고 그 영향으로 러시아 황실은 다른 유럽 왕실들에 비해 부모, 조부모와 자식, 손자간 분규는 없는 편이다. 섭정인 모후의 권력을 빼앗은 알렉산드르 2세조차 모후의 실정이 명백했기에 일을 벌였고, 권력만 회수했을 뿐 다른 제약으로 모후를 괴롭히진 않았다.
- 차레비치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로마노프
★
알렉세이와 루시아의 장남. 그레고리력 1715년 5월 17일생. 할아버지의 이름을 받았다. 어른이 될 때까지 무사히 자란다면 차르 표트르 2세가 될 것이다. 두 조부가 합쳐진 성격. 4살 연상의 마리야 멘시코바와 1717년 약혼했고, 1728년 봄 혼인할 예정. 폴란드는 잠시 동생 예카테리나가 맡아둔 것 뿐이지 결국은 자신이 폴란드를 차지하리라 마음먹고 있다. - 미하일 알렉세예비치 로마노프
알렉세이와 루시아의 차남. 태어난지 얼마 안 되어 사망했다. - 파벨 알렉세예비치 로마노프
알렉세이와 루시아의 삼남. 1726년생.
16.4.2.2. 기타 황족
- 나탈리아 키릴로브나 나리쉬키나★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의 두번째 황후이자 표트르 1세의 어머니. 7세 때 7차 견서사를 만난 적이 있어 재석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표트르가 여행을 떠나려 하자 통곡하며 말리지만 표트르의 결심을 꺾지 못한다.
-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루스국의 실권자. 대한 측에서는 수령을 무시하고 아녀자가 실권을 잡은 것이 당나라 태평공주가 연상되어 나쁘게 보고 있다. 재석을 폴수국이 만든 가짜 왕자로 의심하거나 다른 대유주 국가들과 달리 친서를 가져오지 않고 홀대하는 것에 불쾌해하지만 예우는 정중하게 해준다. 직접 연극 극본을 쓰거나 조보에 글을 싣는 등의 취미가 있다고 한다. 작고 뚱뚱하긴 하지만 유명한 초상화에서처럼 못생기진 않았다고 한다.[175] 귀국한 표트르에게 실권을 넘기기를 거절하자 표트르를 암살하려 했다는 이유로 수도원에 감금된다.
- 네덜란드 여자 마르타[176]
암스테르담에서 표트르가 묵었던 하숙집 딸로 표트르가 16살 때 동정을 떼준 첫경험 상대. 이후 애인이 되어 표트르를 따라 루스국까지 간다. 표트르는 모후가 지어준 짝과 혼인했지만 마르타를 더 아꼈다.[177] 한동안 표트르의 정부로 지내다 향수병에 걸려 돌아간다.
- 폴란드 여자 마르타 → 차리차 예카테리나★
실제 역사에서처럼 표트르가 가장 총애하는 정부로 결국 표트르가 황후로 삼았다. 폴란드 혈통이라는 점 때문에 태자비 루시아와도 친하게 지낸다고 한다. 차레비치 알렉세이가 건재하니 여제는 되지 못하고 황후로만 역사에 남을 것이다. 표트르의 총애를 받아 수많은 아이들을 낳았지만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세 딸을 제외하고는 모두 요절한다.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폐렴에 걸려 앓다가 1727년 사망한다. - 안나 페트로브나 로마노바★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의 장녀. 원 역사대로 독일 홀슈타인-고토로프 공작가로 시집갔다. -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로마노바★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의 차녀. - 나탈리야 페트로브나 로마노바★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의 막내딸. 요절했다.
16.4.3. 기타
-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골리친★
소피아의 측근, 재상이자 애인. 부패한 인물은 아니며 루스국을 서유럽처럼 개혁하려 한다. 재석에게 설득되어 표트르 대제의 서유럽 여행을 추진한다. 그러나 의도는 좋아도 능력이 이를 따라가지 못해 국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폴란드와 동맹하여 오스만 원정을 추진하고 친정했으나[178] 청야전술에 휘말려 참패한다.[179] 이후로도 실정만 반복하다가 표트르가 권력을 잡자 시베리아로 쫓겨난다.[180]
- 프랑수아 달레
프랑스 출신 루스국 군사고문. 계급은 중령 → 대령. 성친왕에게 뇌물을 받고 표트르와의 만남을 주선한다. 표트르의 서유럽 여행에 호위 역으로 동행한다. 15년 후 재석이 건흥제로 즉위한 후 대한에 보내는 사절단에 부사로 파견되어서 재회하게 되었다. 이후 알렉세이의 수행원으로 대한에 체류하게 된다. 위그노 출신으로, 자신이 러시아로 떠나게 만든 루이 14세와 카톨릭 교도들을 극도로 증오해서 한양의 프랑스인 커뮤니티나 재석의 측근인 삼총사들과도 어울리지 않을 정도이다.
- 바셴카
7차 견서사 당시의 이형준이 루스국에서 동침했던 연인. 이형준보다 무려 20살 연하인 1645년생으로 이형준과 교제 당시 14살이었다.철컹철컹보로네시 지방 보야르의 딸로 아버지가 모스크바에 갈때 데리고 갔다가 이형준과 만나 눈이 맞았다. 이형준과 침대에서 뒹굴다가 아버지에게 걸렸고, 아버지에게 두들겨맞고 집으로 돌려보내진다. 그 사이 임신한 이형준의 아이 보리스를 낳았고 세묜이라는 카자크 남자에게 시집가서 산다.
조선 대공인 성친왕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동네 총각 대하듯 편하게 얘기하고, 이형준에게 한을 품기는커녕 자기 아들을 맡기고 뒤도 안 보고 떠나는 대범하고 쿨한 성격이다. 작가가 언급한 외모 모델. 평범한 러시아 아줌마보다 더 건장한 체격이고 14살 때에도 덩치는 컸다고 하는데 얼굴에는 젊을 적의 미모가 남아있다. 이형준이 붙여준 한국식 이름은 곱분이. 대한에 사절단의 일원으로 파견된 드미트리의 말로는 여전히 정정해서 허벅지만한 통나무를 나르고, 날뛰는 말을 붙잡아 세울 수 있다고 하며, 드미트리에게 보리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니 죽었다면 미사 드리게 죽은 날짜를 알아오라고 하는 등 성격은 여전하다. 1727년에 표트르 1세를 위한 진위사에 따라온 카자크 6형제의 자식들이 부친들의 고향 마을에 들렸을 때 여든이 넘었는데도 정정하게 생존해 있고 호탕한 성격도 그대로인 모습으로 손자를 만났다. - 드미트리
바셴카와 카자크 세묜의 아들, 즉 보리스의 이부동생. 1665년생. 이부형 보리스를 배웅하고 모친을 집에 모셔오기 위해 모스크바 여행에 동참한다. 표트르의 대한행 사절단의 일원으로 방문하여 15년 만에 이부형과 재회했다. - 오스타프
바셴카와 카자크 세묜의 아들로 보리스의 이부동생이자 드미트리의 친동생. 큰형을 찾으러 간 둘째형을 대신해 모친을 봉양하고 집안일을 챙긴다.
- 김홍선
대한에서 루시아의 국혼 선물로 자원자를 뽑아 보낸 한인 연대의 연대장. 폴타바 전투와 프루트 강 전투에서 큰 활약을 한다. 알렉세이 2세 즉위 후 한인 연대가 ‘루시아 황후 근위연대’로 승격되자 근위대령(레이브그바르디 팔코브니크) 계급으로 승진하고 표트르 1세 조문사절로 1727년 러시아에 온 친구 오명항과 반갑게 해후한다. 4부에서 언급되기로는 알렉세이 2세에게 '김노프 백작' 작위를 받아 러시아 귀족이 되었으며 다른 귀족들과 통혼하였고 그 5대손 안드레이 김노프 백작이 주 대한 러시아 공사로 부임한다.
- 야콥 브루스★
표트르 1세의 측근인 스코틀랜드 출신의 고참 지휘관이자 과학자.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동방총독으로 부임한 알렉세이를 따라왔고, 토볼스크에서 대기하다 파포태의 침략에 급히 이르쿠츠크로 넘어와 방어군 지휘를 맡는다.
- 니콜라이 오르고프
알렉세이가 대한에 유학할 때 수행했던 100명 중 하나로 한인 여자와 혼인해 회무 담당 위원회 소속으로 러시아 정부를 개혁하고 있다.
- 알렉산드르 다닐로비치 멘시코프★
멘쉬코프 공작. 표트르 1세의 총신으로 알렉세이 2세 시절에도 권신으로 권력을 누리고 있다. - 마리야 멘시코바★
차레비치 표트르의 약혼녀. 아름답고 영리한 재녀. 표트르와 1717년 약혼했고, 1728년 봄 혼인할 예정.
- 표트르 안드레예비치 톨스토이★
톨스토이 백작. 수십년간 러시아의 외교에 종사해온 노대신으로 차르의 측근. 레프 톨스토이의 조상.
16.5. 잉글국
16.5.1. 역대 국왕
16.5.1.1. 스튜어트 왕조
- 제임스 2세★
견서사 일행 방문 시점 잉글국왕. 도움만 된다면 이교도의 것이라도 상관하지 않는다며 종두를 맞았지만 독실한 신교도인 앤 공주가 본인은 물론 자식들에게도 종두를 맞히지 않아서 손녀들이 천연두로 사망한 것을 안타까워한다. 곧 태어날 자신의 아들 밑에서 신교도와 가톨릭교도가 평화롭게 융합하기를 바랐지만, 결국 명예혁명으로 폐위당한다. 재석은 제임스 2세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느끼고 아들을 얻음으로서 폐위당할 그의 운명에 안타까운 감정을 느끼지만, 제임스 2세의 이상주의적 성향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181] 명예혁명에 개입하지 않는다. 해군 제독의 경험으로 인해 조기 경보망의 중요성을 잘 알아 조선에서 열기구를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 앤 공주★
실제 역사보다 형부 윌리엄 3세가 더 오래 살았고 본인의 건강도 더 악화되어 여왕이 되지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스튜어트 왕가에 성공회 신자인 직계후손이 없어 하노버 왕조로 왕위가 넘어가는 것은 실제 역사와 같다.
- 윌리엄 3세★
내달국 빌럼 3세 항목 참조.
- 메리 2세★
원역사와 똑같이 천연두에 걸려 사망한다. 사실 종두를 맞아 살 수도 있었으나, 예수회에 대한 적대감과 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혀 고집을 부려 종두를 거부하는 바람에 죽음을 자초한 셈이 되었다.
16.5.1.2. 하노버 왕조
- 소피아 여왕★
앤 여왕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어 차상위 계승권자인 하노버의 소피아가 영국 여왕으로 즉위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오래 재위하지 못하고 사망한다.
- 조지 1세★
하노버 공. 모친 소피아 여왕의 섭정을 맡다가 모친 붕어 후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다.
16.5.2. 자코바이트
- 제임스 3세★
제임스 2세가 1688년 득남한 아들. 재석은 이 득남 때문에 제임스 2세가 퇴위당하는 것을 알기에 안타까워하면서 겉으로는 축하를 해준다. 프랑스를 거쳐 로마에서 망명생활 중이며, 그를 추종하는 자코바이트들은 호주로 유배된다. 계속 거절당하지만 디에고에게 지원을 요구하며, 그와 자코바이트들은 디에고를 사적, 정치적으로 모두 난처하게 한다.
16.5.3. 기타
- 카버리 백작 존 번★
재석 방문 시점의 왕립확회 회장.
- 아이작 뉴턴★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 뉴턴 이전에 유럽에도 조선에서 전래된 미적분학을 비롯한 레이디 이(상빈 이씨)의 수학적 업적들을 모두 받아들였지만 증명 없이 결과물만 전해졌는데, 뉴턴은 이에 대한 증명을 모두 해낸다. 대유주에서는 결과물만 내놓은 레이디 이보다 늦었지만 증명을 해낸 뉴턴이 더 뛰어난 학자라고 여긴다.[182] 30여년 후 디에고 일행이 진위사로 유럽에 방문했을 때는 왕립학회 회장, 조폐국장에 올랐으며, 원 역사처럼 남해회사 투기에 빠져 있다. 1723년 결국 주가폭락 사태가 터지며 재산의 9할을 잃는다. 그후 1727년 3월 31일 향년 84세로 자연사해 재석은 추모글을 보내 애도를 표한다.
- 새뮤얼 피프스★
존 번의 전임 왕립학회 회장이자 해군 관료. 재석은 현대 시절에 유명한 그의 일기를 읽어본 것으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재석과 표트르에게 해군 육성 방안에 대해 강의한다.
- 에드먼드 핼리★
핼리 혜성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한 천문학자이자 왕립학회원. 75~76년 주기로 돌아오는 혜성이 있다는 주장을 펼치는데 재석이 조선에서도 핼리 혜성이 관측되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알려줘서 근거를 보탬해준다.[183] 이 혜성에 대한 대화를 계기로 왕립학회에서 재석과 가장 친한 사이가 된다.
- 존 쇼터 경★
런던 시장.
- 존 처칠★
원역사대로 명예 혁명에서 제임스 2세를 배신한다.
- 로버트 헌팅턴
벽란도에 주재하는 잉글랜드 동인도회사 상관장. 숙조의 장례 후 연회에서 국상 기간에 건배를 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본국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스페인 편을 들고 있는 만큼 대한이 필리핀과 전쟁을 결정하자 중재자를 자처하고, 첫 승전을 거둔 후에도 끝까지 중재를 자처하지만 재석이 필리핀을 점령하겠다는 속내를 드러내자,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상관을 폐쇄하기로 한다.
- 스태포드 페어본★
잉글랜드-네덜란드 동군연합 연합함대의 잉글랜드 해군측 제독. 이홍권을 격파한 뒤 건흥제와 협상이 결렬된 이후, 계속 필리핀 탈환을 주장하는 후안 마르틴 제독에게 조선이 참전한 골치 아픈 상황은 스페인 때문이 아니냐며 비난하고, 마르틴 제독과 드잡이질을 벌인다. 마다구를 남중국해에 풀어놓아 골치거리를 만든 결정 때문에 오포드 백작이 문책하는 뜻으로 종전 후 대한 해군과 함께 마다구 토벌을 하라고 남겨두고 간다. 계미남변 초기 조선과 사이가 틀어진 원인이 윌리엄 3세가 '찬탈자'라고 평가가 안 좋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영국은 조선에서 추앙받는 중국의 M모 철학자 말대로 혼군을 축출한 것이며 가문명은 달라져도 정복왕 윌리엄의 후손이 대대로 통치하는데 조선은 왕도 아닌 자가 전 왕조를 무너트리고 칼로 왕위를 차지했으면서 누구에게 '찬탈자'라고 비난하냐는 생각을 한다.
- 프랜시스 퍼시
잉글랜드 해군 호위함 포세이돈 호의 함장, 영란함대에서 대한에 보내는 교섭 사절로 대한에 온다.
- 존 할제★
마다구 선장. 잉내 연합군에게 사면을 보장받고 남만해에서 약탈 행위를 벌이다가 홍하명이 이끄는 대한 수군에게 패하고 붙잡혀 처형된다.
- 오포드 백작 에드워드 러셀★
윌리엄 3세의 특사로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함대에서 본국에 요청한 원군을 이끌고 바타비아에 온다. 대한과 강화를 맺는 것이 목적이지만 자신들에게 유리한 결과를 맺기 위해 위력시위를 하여 대한이 양보하게 만들려고 한다. 스페인 총독 발데즈의 돌발행동으로 인해 대한 해군과 복승만(붕타우) 해전을 치렀고, 대한 해군이 전열함을 보유한데다 예상보다 잘 싸워 무승부로 끝나자 붕타우에 있던 발데즈 방치하여 대한이 포획하게 한다. 그 뒤 1707년 11월 11일(음력 10월 18일)에 한양에 방문하여 협상을 진행하고 전쟁을 종결시킨다. 재석과는 잉글국 체류 중 만나서 안면이 있었다.
- 코밤 자작 리처드 템플★
왕실의 총신으로 자코바이트 반란자 무리들을 유배시킨 신홀란도 식민지의 초대 총독으로 부임한다.
- 토머스 뉴커먼★
영국의 발명가, 실제 역사처럼 1711년 독자적으로 증기기관을 발명한다. - 로버트 월폴★
조지 1세, 2세의 수석장관 겸 제1재무경. 경제발전을 중시하고 아메리카 식민지가 함부로 확장정책을 펴다가 프랑스, 대한과 충돌하여 괜한 전쟁을 벌이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다.
16.6. 내달국
- 빌럼 3세★
네덜란드의 국가원수인 총독, 장인인 제임스 2세가 결국 의회에게 밀려나리라는 것을 예측하고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야심을 보인다. 대한과의 우호관계는 계속 유지하며 양국의 공존공영을 바란다. 명예혁명 결과 원 역사대로 영국 국왕에 오른다. 실제 역사보다 좀더 오래 살고 있는 대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대한까지 개입한 것과 아내를 먼저 사별하고 직계후손이 없는 것때문에 심려가 큰 상태. 결국 전쟁의 끝을 보지 못하고 1708년 사망한다.
재석이 견서사로 마침 런던에 있을 때, 명예혁명 직후 접견했는데, 조선과 유학에 지식이 있어서 그런지 자신이 무도한 찬탈자로 보이지 않게 의식하는 모습을 보이고 맹자의 천명론을 들어 자신의 거사를 해명하는 짧은 대화를 했다. 이때의 기억이 꽤나 인상적이었는지 강화를 맺기 위해 보낸 친서에서 그 당시의 기억을 언급하기도 한다.
- 다니엘 판 헴스케르크
벽란도에 주재하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관장. 본국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스페인 편을 들고 있는 만큼 대한이 필리핀과 전쟁을 결정하자 중재자를 자처하고, 첫 승전을 거둔 후에도 끝까지 중재를 자처하지만 재석이 필리핀을 점령하겠다는 속내를 드러내자,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상관을 폐쇄하기로 한다.
- 빌렘 판 아우토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총독. 후안 마르틴 제독을 비롯한 스페인 함대를 보호하며, 이들을 내달라는 이홍권의 요구를 묵살한다. 이홍권이 바타비아 항구를 봉쇄하자 육로로 우회해서 건흥제에게 항의 사절을 보내며, 이홍권이 스페인 함대를 두들기던 중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함대가 나타나자 이들과 호응하여 이홍권 함대를 공격한다. 대한과 협상이 결렬되어 전쟁을 지속하게 되자 재발 방지를 위해 봉쇄에 대한 응징을 하고자 하나 마땅한 방법이 없어 고심한다.
- 필립스 판 알몬데★
프랑스 사략함대를 추격하고 프랑스 식민지를 제압하기 위해 스페인과 동맹한 잉글랜드-네덜란드 동군연합에서 조직한 연합함대의 사령관. 잉글랜드 해군 전열함 6척, 호위함 4척, 네덜란드 해군 전열함 4척, 호위함 2척이라는 대함대를 이끌고 인도 퐁디셰리 프랑스 식민지를 제압한 후 시암으로 가려다가 이홍권의 대한 함대가 바타비아를 공격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바타비아로 급행, 이홍권 함대를 격파하고 대한 조정을 불안에 몰아넣는다.
16.7. 황제령[184]
- 레오폴트 1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자신의 둘째 아들 카를을 밀었지만 이후 차선책으로 자신의 외손자 호세 페르난도를 지지한다. 1705년 사망한다.
- 요제프 1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원역사와 달리 종두를 맞은 덕에 천연두에 걸려 죽지 않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나는 것을 보고 원역사보다 더 오래 살아 1738년 향년 60세로 사망한다. 하지만 정부를 만나고 다니다가 매독에 걸리는 바람에 아들을 보지 못 한 채 죽어 제위는 동생인 카를에게 넘어갔다.
- 밀라노 대공 → 카를 6세★
원역사 카를 6세로 형 요제프 1세가 죽지 않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지 못한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 스페인령 밀라노와 샤르데냐를 넘겨받아 밀라노 공작으로 즉위하고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영구포기한다. 하지만 프랑스에게 밀라노까지 빼앗기고 다시 오스트리아로 돌아와 장군으로 복무 중이다. 이 후 밀라노 탈환에 성공했다. 황제가 된 후 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제국을 물려줄 생각을 하고 있으나 국내외의 방해요소가 너무 많다. - 마리아 테레지아★
원역사처럼 로렌 공작 프란츠와 결혼했다. 아버지가 원 역사보다 30년이나 늦게 황제가 되었기에 좀 더 기반이 불안한 상태로 합스부르크 영지를 상속할 것으로 보이며 원 역사와 다름없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 사부아 공자 외젠★
원역사대로 프랑스를 떠나 합스부르크의 장군으로 복무 중이며 폴란드 왕위 계승전쟁에 아우구스트 3세를 지원하는 오스트리아군을 지휘하여 수도 바르샤바를 점령한다.
16.8. 법왕청
- 클레멘스 11세★
계미남변으로 필리핀에서 추방된 도미니코 수도회가 앙심을 품고 교황청에 대한의 제사는 우상숭배인데 대한령 선교를 독점한 예수회가 대한 조정과 결탁하여 이를 허용하고 있다, 계미남변도 예수회가 대한 조정과 함께 꾸민 일이다 라고 모함하자 이에 넘어가 조선 교구에 소명을 요구하는 등 대한 측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 디에고가 견서사로 왔을 때는 어느 정도 합의를 보고 제사에 관한 문제는 묵인하기로 한다.
- 이니코 카르치올로★
진위사 방문 시점에서 80세 가까운 노추기경. 디에고의 어머니 이사벨이 성친왕과 헤어진 것, 올렝카가 딸만 낳은 것, 그 외 덕비 허씨가 기독교인인데 남편의 요절로 황후가 되지 못한 것 등 조선이 통째로 개종할 수 있었던 기회가 수포로 돌아간 것을 아쉬워한다.[185]
- 아니발레 알바니★
디에고와 동갑인 젊은 추기경. 클레멘스 11세의 조카. 영국에서 로마로 향하며 바르바리 해적을 격퇴하고 기독교인을 구출한 디에고를 칭송하면서, 대한에서도 천주교인들이 제대로 된 교회 예식을 지킬 때가 되었음을 주장한다.
- 미켈란젤로 탐부리니★
진위사 로마 방문 시점인 1719년의 예수회 총장. 제사 묵인을 위해서 논의에 동석한다.
- 지울리오 알베로니★
친프랑스 성향의 추기경. 양시칠리아 왕국의 재상으로 필리포 1세를 보좌하고 있으며, 디에고에게 제사 문제에 대한 타협안으로 제사를 묵인하는 대신 파리 외방전교회, 베네딕토회도 대한에서 선교를 허락하는 타협안을 제시한다.
청양현주이연수 → 카타리나
예왕의 장녀, 1686년생. 부모를 닮아 미모가 뛰어나다. 무인지변 이후 마포 성당으로 보내져 아라미츠와 함께 지내게 되는데 예수회에 수녀회가 없는 관계로 공식적으로 출가하여 수녀가 된 것은 아니다. 기도와 성서 읽기만으로 시간을 보낸다. 나이가 차면서 고혹적인 미모의 경국지색이 되어, 마포 성당을 드나들던 6살 연하의 알렉세이가 연수를 보고 첫 눈에 반한다. 하지만 연수 쪽에서는 아무 관심도 없었고 알렉세이를 역적의 딸과 맺어줄 수 없었던 재석과 표트르의 반대로 혼인은 이뤄지지 않았다. 1706년 7월 알렉세이가 귀국하며 마포 성당의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탈출해서 어딘가로 사라진다.
재석은 연수의 탈출이 알려지면 황실의 권위가 떨어질 것을 우려하여 이 사실을 은폐하기로 결정, 공식적으로는 연수가 자살했다고 발표하고 무연고 시신을 그녀로 위장시켜 가짜 장례를 치른다. 알고보니 성당에서 눈이 맞은 연인 안토니오의 도움으로 오사카로 탈출, 고아를 거쳐 로마로 이주한 것이었다. 안토니오와 혼인한 뒤 일본인으로 위장하고, 카타리나라는 세례명을 이름으로 쓰며 동서양 화풍에 모두 능한 것을 활용해 화가로 활동한다. 초상화를 의뢰하기 위해 방문한 도로테아만이 그녀를 알아보고, 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속한다. 도로테아에게 동생 연우가 사면되었음을 전해 듣고 기뻐하고, 탈출에 후회는 없다고 한다.- 안토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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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수의 남편으로 개성 상인 집안 출신 청년. 먼저 오사카로 탈출한 연인 연수를 뒤쫓아 함께 인도 고아를 거쳐 로마로 향한다. 원래 집안이 일본과의 거래가 잦았기 때문에 일본어에 능통하여 일본인으로 행세한다. 로마에서 사용하는 안토니오라는 이름은 세례명. 서점을 경영하는 동시에 동양 서적 번역가로도 활동한다. 1719년 로마를 방문한 진위사 일행의 눈에 띄어 그들과 마주치게 된다.
16.9. 서반아
16.9.1. 역대 국왕
- 카를로스 2세★
바보왕으로 유명한 서반아 국왕. 직접 등장은 없었고 재석 빙의 이전의 성친왕이 만났다. 원역사에서처럼 바이에른의 요제프 페르디난트를 후계자로 지목한다. 원역사대로 1700년 사망하지만 자신이 원하던 후계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는 있었다.
- 호세 페르난도 1세★
원역사에서 카를로스 2세가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천연두로 죽었던 바이에른의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종두법으로 인해 살아남아 호세 페르난도 1세라는 이름으로 서반아 국왕으로 즉위했다.
본작에서 등장한 세계사 변화의 큰 분기점 2로, 단순히 왕 한명이 바뀐 것이 아니라 보르본 왕조가 아닌 비텔스바흐 가문이 스페인을 다스리며 스페인 바비에라 왕가가 되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전개도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 즉위를 인정받고 바이에른 선제후위 계승권을 영구포기 하였다.
아직 실권이 없던 어린시절 벌어진 한서전쟁에서 귀족들이 현실을 보지 않고 항전만 부르짓다가 스페인이 무참히 패배하고 영토를 빼앗기는 걸 보았기에 대한의 국력을 인정하고 진위사로 금의환향한 디에고를 환대하며 대한과 우호적인 관계를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현실주의적인 모습을 보인다.
16.9.2. 빌라다리아스 후작가
- 안토니오 델 카스티요 이 말도나도★
1대 빌라다리아스 후작(Marquès de Villadarias)으로, 디에고의 외증조부이다. 디에고가 태어날 때 당시의 빌라다리아스 후작으로, 새 외할머니인 파울라처럼 디에고를 학대하지는 않았지만 철저하게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1692년 사망한다.
- 프란시스코 델 카스티요 이 파하르도★
2대 빌라다리아스 후작. 디에고의 외조부로, 이사벨의 아버지. 1682년 딸 이사벨이 성친왕과 하룻밤으로 디에고를 가지자 스페인 북부 비스카야로 보내 몰래 디에고를 낳게 한 다음, 가문에 데려와 정성껏 키웠다.
첫 부인이 이사벨을 낳고 죽자 재혼하지 않다가 이사벨이 사생아 디에고를 낳자 파울라와 재혼하고 슬하에 7남매를 둔다. 디에고는 외조부가 재혼하지 않은 것은 이사벨을 훌륭한 사위와 결혼시켜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원역사대로 1716년 마드리드에서 사망하며, 적국인 프랑스의 왕자 베리 공작도 감탄할만큼 훌륭한 장군이다.
- 빌라다리아스 후작부인 파울라(Paula de Veintimiglia y Rodrígue de Santisteban)★
디에고의 의붓 외할머니이자 이사벨의 계모. 이사벨보다 겨우 7살 많은 1658년생의 젊은 과부로 27세 때 빌라다리아스 후작과 재혼한다. 산타 마우로 공작을 비롯해서 본인이 몇개나 작위를 가진 고위 귀족으로, 디에고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던 시아버지와 달리 이사벨과 디에고를 대놓고 혐오했다. 빌라다리아스 후작과의 사이에서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7남매를 두었다. 금의환향한 디에고를 굳이 일부러 만나서 쏘아붙이고 도로테아에게도 상처를 주는 등 성격은 여전히 꼬장꼬장하다.
- 멘도사 백작부인 이사벨 마리아 안나
빌라다리아스 후작의 딸. 1665년생. 8남매 중 첫째이다. 갈색 머리에 검은 눈의 미녀. 16세이던 1682년 초, 재석 빙의 이전 성친왕이 열흘간 끈질기게 구애하여 관계를 가졌고,[186] 11월에 사생아 디에고를 낳는다. 견서사 일행이 아직 대유주 내에 있었음에도 디에고의 출생 사실을 알리지 않는데, 본인은 추방된 망나니 황자의 정부가 되느니 시골 백작의 아내가 되는 게 낫다고 생각했고, 부친인 발라다리아스 후작은 유럽을 떠도는 성친왕이 아이를 제대로 돌볼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생아인 아들과 함께 계모에게 학대를 받았으나, 이후 마드리드에서 멘도사 백작에게 시집가서 잘 살고 있다. 성격은 바셴카처럼 쿨하며, 빙의 전 성친왕의 기억에도 남았던 엄청난 미녀. 이형준과 정호찬도 20년 넘은 일인데 초상화를 보자 그녀를 알아본다. 20년 만에 금의환향한 디에고를 잠깐 외출 나갔다 온 것처럼 대하는 뒤끝 없고 쿨한 모습을 보이고, 스페인 귀족사회 사정에 어두워진 디에고를 위해 초대장을 골라주기도 하며 이별 때도 담담하게 아들을 환송한다.
대한에서는 봉작을 받은 적이 없어 그저 서희(西姬)라고 속칭되며, 아들인 디에고 앞에서는 자당(慈堂), 존당(尊堂) 등으로 존칭된다. 1735년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며, 2년 후에 대한과 술루국에 부고가 도착한다.
- 멘도사 백작
이사벨의 현 남편. 결혼 전에 어린 디에고를 대할 때도 중립적인 태도를 취해 디에고의 기억에 좋게 남아있었는데, 재회했을 때도 디에고에게 예의있게 대하고 무리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 점잖은 모습을 보여준다. 빈둥거리고 있는 자기 집안 젊은이들을 술루국에 데려가 군공을 세울 기회를 달라고 요청한다.
- 안토니오 델 카스티요 이 베니티밀리아★
3대 빌라다리아스 후작. 디에고의 외조부가 파울라와 재혼하여 낳은 첫째 아들. 디에고의 외삼촌이지만 그보다 4살 어린 1686년생. 디에고를 대놓고 학대한 어머니와는 다르게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1716년 부친이 사망하자 3대 빌라다리아스 후작이 된다.
16.9.3. 칼레아 후작가
- 칼레하 후작
도로테아의 아버지로, 레콩키스타 시절부터 내려오던 유서깊은 가문의 당주다. 귀한 고명딸이 사생아인 디에고와 눈이 맞자 모욕적인 언사를 쏟아내며 떼어내려 하지만 도로테아와 디에고는 칼레하 후작이 보낸 추격대까지 따돌리며 대한으로 도주한다. 이후 도로테아가 대한에서 작위를 얻고 안부를 알리는 편지를 보냈지만 진위사로 금의환향하기까지 근 20년 동안 답장 한 번 주지 않았고[187], 칼레하 후작은 그 20년 동안 빌라다리아스 후작을 마주칠때마다 디에고를 언급하며 빌라다리아스 후작에게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디에고가 진위사로 금의환향하며 마드리드에서 대환영 받고 호세 페르난도 1세에게 화해를 요청받아 그 동안의 일을 사과하지만, 얼마 안 가 자중하라는 페르난도 1세의 경고도 무시하고 디에고에게 온갖 망언을 쏟아내며 밑바닥 인성을 드러낸다.[188] 결국 보다못한 아들 펠리페가 치매에 걸려서 이런다고 수도원에 감금시켜 버렸다.
16.9.4. 신서반아
- 가스파르 드 라 케르다 산도발 실바 이 멘도사★
겔베 백작. 신서반아 부왕. 재석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나 와병으로 귀국한다.
- 호세 사르미엔토 드 발라다레스★
겔베 백작의 후임 신서반아 부왕, 아즈텍 제국 마지막 황제의 후손인 목테수마 여백작의 부군. 재석에게 대한에 식량을 제공하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한다. 카를로스 2세의 후계자로 카를 대공을 지지한다는 소문이 퍼져서 해임당하고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 프란시스코 페르난데스 드 라 쿠에바 엔리케스★
알부케르케 공작.[189] 드 발라드레스 이후 부임한 신서반아 부왕. 오르테가 주교가 필리핀의 한인 불법거주자들을 모조리 처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알고 대경하고 이를 취소하고 현상유지를 할 것을 명령했으나,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이 후, 신서반아조차 위협당하는 상황에 분노하여 몬타네스 주교를 산제물로 바쳐서 수습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몬타네스 주교에게 원망을 품는다.[190]
- 돈 후안 오르테가 몬타네스★
미초아칸 주교. 겔베 백작과 목테수마 여백작 부군의 임기 사이, 목테수마 여백작 부군과 알부케르케 공작의 임기 사이에 2번 신서반아 부왕 대리를 맡았다. 대한 황실이 개종도 하지 않고 예수회만 받아들인다는 것에 악감정을 품어 대한에 적대적인 정책을 취한다. 부왕 대리 1기 때에 을병대기근을 맞은 대한에 식량 수출을 거부하고 모욕적인 언사를 날리는데, 이땐 다행히도 후임자인 드 발라다레스 부왕의 사과 서한으로 수습된다. 부왕 대리 2기 때는 필리핀의 대한 불법 이주민들을 무력을 동원해서 개종 및 복속시킬 것을 명령해서 대한과의 전쟁을 일으킨다. 전황이 대한 쪽으로 기울고 필리핀을 상실한 것은 물론 대한군이 신서반아에 상륙해 신서반아까지 위협당하자 자신이 성급했다며 자책하다가 사망한다. 재석은 국민 감정을 고려하여 몬타네스 주교가 헛것을 보다가 비참하게 죽었다고 보도할 것을 지시한다.
- 마르틴 데 우르수아★
유카탄 총독. 호세 페르난도 1세로부터 대한과의 종전 협상을 위한 교섭 사절로 임명되어 전권 위임장을 가지고 호에이 대지진이 발생한 엿새 뒤인 1707년 11월 3일에 대한을 방문한다. 발데즈가 영란 함대를 대한과 싸움 붙이기 위해서 저지른 학살건을 듣고 어처구니 없어하며 사죄하는 것으로 협상을 시작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할테니 대한이 점령한 곳을 반환해달라고 요구하지만, 영란연합이 스페인보다 먼저 대한과 평화 협정을 조인하는 바람에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되어 필리핀을 대한에 양도하고, 바하 칼리포르니아 반도를 금화 8만냥(88만 에스쿠도)에 매각하는 조건으로 평화 협정에 조인한다.[191] 원 역사에서는 에체바리의 후임 필리핀 총독이다.
16.9.5. 서반아령 필리핀
- 파우스토 크루자트 이 곤고라★
서반아령 필리핀 총독. 임기는 1690년부터. 을병대기근 때 곡물을 수출한다. 군인 출신이지만 행정가 경력이 더 길고 대한과 우호 관계를 유지한다.
- 도밍고 사발부루 드 에체바리(Domingo Zabálburu de Echevarri)★
서반아령 필리핀 총독. 파우스토 크루자트 이 곤고라의 후임. 필리핀 남부의 이슬람 토착 왕국들을 정복하는 일을 주로 맡던 군인 출신이다. 신서반아 부왕대리 몬타네스 주교가 한인 마을을 총독부 휘하로 편입시킨다는 결정을 따르는데, 한인 학살 사건이 터진다. 진상조사를 위해서 마닐라를 찾은 김만중에 맞서서 밀리지 않는 정치력과 노련함을 보이지만, 결국 논리에 밀려서 "한인들을 화형에 처하게 방조했고, 위폐를 불태워서 황실을 모독했다"는 전쟁 명분을 내주게 된다.
대한이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중국인으로 위장한 첩자들을 데려가자, 마닐라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이 대한군에 호응할 수 있다는 이유로 개종한 이들을 제외하고 수만명을 모두 학살해버리는 잔인한 면모를 보인다. 대한의 침공이 시작된 이후에는 민간인을 바타비아로 피신시킨 후 두차례의 항복 제의를 거부하는 등[192] 분전하나, 마닐라가 함락되자 결국 항복한다. 그러나 유럽인으로서 처음으로 동양의 군대에 항복했다는 굴욕감, 임무를 다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 말로는 신변을 보장한다 했지만 대한으로 끌려가 혹형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항복 직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원역사에선 1709년에 임기를 마치고 스페인으로 소환되는 인물이지만 작중에선 훨씬 일찍 죽었다.
- 가르시아
2부의 광신도 가르시아와 이름만 같은 도미니코회 수사. 2부의 동명이인에 못지 않은 광신도로, 한인 마을에 개종을 요구하러 찾아갔다 돌과 소금을 맞고 쫓겨난 원한으로 마을 습격에 동참한다. 포로들을 마닐라로 끌고 가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원래 방침이었으나, 이교도들은 재판을 받을 권리가 없다며, 남자들은 다 화형시키고 여자와 아이들에게만 개종할 기회를 줘야 한다고 주장해서 이를 관철시킨다. 그래도 광신도인만큼 신념은 확고한지, 아니면 성직자의 양심은 있는 건지 대한군의 침공 시 피난을 거부하고 원주민 천주교도들과 함께 있다가 대한군에 잡혔다. 다른 선교사들처럼 참수 당한 뒤 수급은 대남도 토인병의 전리품이 됐고, 목 없는 시신은 카가얀 강물에 던져진듯 하다.
- 후안 마르틴 데 살라망카
서반아령 필리핀 소속 제독. 1649년생. 스페인 함대 지휘관으로 대남수사 홍하명이 이끄는 대남수영 함대를 얕보다 참패하고 본인은 총상을 입는다. 날씨 때문에 패혈증에 걸렸고, 바타비아의 네덜란드 병원에서 치료받느라 마닐라에서 탈출한 스페인 함대가 이홍권에게 추격당하는 빌미를 제공한다. 건흥제와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의 협상이 결렬되자 필리핀 탈환을 주장하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계속된 필리핀 탈환 주장에 폭발한 페어본 제독과 드잡이질을 벌인다. 결국 이홍원이 이끄는 대한 함대를 만나자 다른 제독들의 만류를 듣지 않고 무모하게 공격하다가 포격을 받고 전사한다.
- 곤살레스
서반아령 필리핀의 스페인 함대 기함인 로스 앙헬레스 호 선장. 후안 마르틴 제독이 총상을 입자 함대를 이끌고 마닐라로 퇴각한다. 마닐라 포위 전에 스페인 민간인들을 데리고 바타비아로 탈출한다. 영란함대와 합류하여 통상파괴전을 벌이다가 대한 함대에게 패배하고 마르틴 제독이 전사하자 최선임자 자격으로 항복한다.
- 마르틴 데 발데즈
에체바리 후임으로 스페인에서 온 필리핀 총독. 임지인 필리핀은 대한이 점령했기 때문에 바타비아의 영란 연합군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 안남국 회유 겸 무력시위를 위해 영란연합 총사령관 오포드 백작이 연합함대를 안남국 붕따우에 입항시키자 영란 연합이 대한과의 전쟁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려고 오포드 백작의 명을 어기고 스페인 병력만 데리고 상륙하여 붕따우 주재 대한 상관을 불태우고 주재원들과 현지 고용인들을 학살하는 큰 사고를 친다. 이런 막나가는 행동에 학을 뗀 오포드 백작은 붕따우 해전 이후 바타비아로 철수하면서 발데즈를 버리고 갔고, 쓸데없는 분풀이를 하느라 연합함대가 자신을 버리고 간 것도 몰랐던 발데즈는 대한군의 포로가 되어 아오지 탄광에서 강제노역한다. 반년동안 탄광에서 죽을고생을 한 후 전쟁이 종전되면서 석방, 귀국했으나 쓸데없는 행동으로 조국 스페인을 더 어려운 처지에 빠뜨렸다는 비난에 시달리다 모든 공직을 내놓고 수도원에 들어가는 신세로 전락한다.
16.9.6. 페루 부왕령
- 페르난도
친초나 나무를 구하러 페루 부왕령에 잠입한 디에고 일행이 현지에서 구한 안내인. 자기 말로는 모계가 옛 잉카 제국의 황족이었고, 아버지는 보카타를 발견한 곤살로히메네스 데 케사다의 부하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눈치가 빠르고 입담이 좋다. 끝까지 성실하게 디에고 일행을 도와줘 많은 보수를 받는다. 코카나무, 기니피그, 마카, 야콘 등 남아메리카의 동식물을 일행에게 소개하여 대한에 도입되게 한다.
- 프란시스코 데 알바라도
키토를 다스리는 행정관. 보스케 후작의 아들로 위장한 디에고에게 속아서 연회를 베풀어준다. 딱히 다른 의도는 없고 먼 외지에서 온 후작가 도련님이라 반가워서 그런 것. 그의 입에서 디에고의 위장 신분인 보스케 후작가가 카스티야쪽 가문임이 언급된다.
16.10. 수배국
16.11. 단막국
- 한스 게오르그 베스트팔렌★
주 러시아 덴마크 대사. 러시아를 방문한 박문수를 통해 대한 본국에 직접 덴마크 동인도회사가 대한에 상관을 설치했으면 한다는 요청을 전달한다.
[1] 금천 강씨 집안은 현재 진주 강씨 인헌공파로, 조상 중 유명인으로 강감찬이 있다. 명군 세계관이 아닌 실제 역사의 조선 중기 조선 왕실과 혼인한 적이 있는데 그 유명한 민회빈 강씨다. 이쪽의 부친의 이름이 강석기인 것을 생각해보면 모티브일 가능성도 있다.[2] 죽으면서도 이 목걸이는 손에 꼭 쥐고 있었다.[3] 재석은 그녀와 만나게 되면 올렝카, 나중에 찾을 상희까지 함께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결국 생전에 그녀를 보진 못하게 된다.[A] 원 역사 사도세자와 동일 추정.[A] [A] [7] 경릉은 본국의 본묘, 원릉은 남미주 지선성 미주별궁 뒷산 가묘이다.[8] 경인조약 체결 기간[9] 심양회맹 기간[10] 총 5회[11] 모후 인현황후 국상 기간 1개월[12] 강녕왕의 딸이지만 화번공주로 하와국에 가지 위해 5촌 당숙 원종에게 입적[13] 재석은 이때 간이 나쁜데 왜 토혈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며 상희가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한다. 이는 식도정맥류라고 하는데 간경화의 흔한 합병증으로 주 증상이 토혈이며, 간경화 환자 대부분의 사망 원인이다.[14] 특히 미주에서는 '최초로 미주에서 태어난 황태자'라는 상징성 때문에 인기가 절대적이었다.[15] 원 역사 조선 현종과 동일 추정.[16] 참고로 원역사 정조는 엄청난 주당이었다. 조부와 부친의 캐릭터 모티브가 원역사 영조와 사도세자지만 작중 실제 행적은 정반대였음을 생각하면 이 부분 또한 작가가 의도한 부분인 것으로 보인다.[17] 다른 사람이 마시는 데에는 간섭하지 않지만, 태황이 차와 물만 마시는데 신하들이 마음 편히 부어라 마셔라 하기엔 아무래도 눈치가 보인다. 숙부 이준은 궁에서 열리는 주연이 많이 심심해졌다고 여길 정도다.[18] 작중 날짜가 정확히 나온 7월 11일 이후 출생이다.[19] 작중 조선에 이 기록을 가진 중전은 태종의 중전인 원경왕후 민씨(7명 출산, 3명 요절), 세종의 중전인 소헌왕후 심씨(8명 출산), 열조의 중전으로 숙조와 성친왕의 모후인 진성태황태후 이씨(4명 출산, 2명 요절)까지 3명 있었다. 진성태황태후의 첫째와 둘째는 요절하고 셋째가 숙조, 막내가 성친왕이다. 태조의 첫 번째 부인 신의왕후도 4명 이상 낳았지만(6명 출산, 1명 요절), 조선 건국 전 사망하였기에 중전으로 재위한 적이 없으며, 건국 후에 추존되었다.[20] 병으로 죽은 첩 1명과 싫증나서 위자료를 주고 내보낸 몇 명은 제외한 숫자이다. 며칠 데리고 놀다 버린 여인들은 셀 수도 없을 지경. 친형들과 이복동생들을 막론하고 다른 형제들은 모두 첩을 하나씩밖에 두지 않았는데 본인만 이렇다.[21] 7년간 외모가 꽤 달라져서 처음엔 이준도 알아보지 못했고 토인 통역 따위에 관심이 없었기에 본인만 자연스럽게 행동했으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들킬까봐 공포에 질려서 대놓고 수상하게 행동하다가 오히려 그게 의심을 사서 들켜버린다. 게다가 형에게 들킨 후에도 선친왕 시절 쓰던 귀고리가 나올 때까지 자기는 한인 혼혈 우대개인일 뿐이라고 거짓말을 하다가 더 쳐맞는다.[22] 심왕이 뜬금없이 '토인 이씨'를 반 죽도록 폭행한 이유는 '토인 이씨가 죽은 이홍의 귀걸이를 갖고 있어서 황족의 물건을 도둑질한 벌을 줬다'는 것으로 처리하고 넘어간다.[23] 명군이었던 부황을 충격으로 급사하게 만들어버렸으니, 이 정도면 대한을 넘어 동양 역사에 길이 남을 불효이자 불충이다.[24] 그런데 이준은 그냥 토인 아내가 남편이 걱정돼서 와봤다가 그러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이것도 이홍이 미리 이준에게 정체가 발각될 상황을 대비해서 토인 말로 아내에게 잠시 후 돌아오라고 말해둬서 연출한 상황이다.[25] 그러다가 상희가 췌장암에 걸려 회복이 불가능해지자 결국 배운다. 청개구리.[26] 또다른 이복오빠 디에고와 서모 올렝카의 예도 들었다. 물론 재석은 디에고는 야합(혼외관계)으로 태어났고, 올렝카와는 왕녀로서 국혼을 한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지만.[27] 여담으로 다른 인기 대체역사소설인 동방의 라스푸틴 주인공이 니콜라이 2세에게 받은 작위도 보스토크 백작이고, 부인인 공주가 남편바보인 것도 똑같아서 대역갤에서 소소한 재미를 주었다.[28] 수정 전의 3부 1화는 재석이 올렝카에게 핸드잡을 해서 올렝카가 오르가즘 끝에 실신해버리는 내용이었는데, 문피아 측에서 문제를 삼아서 결국 말로 올렝카를 다그치는 내용으로 수정되었다. 이후 문피아 남성향 검열 논란이 터지자 슈타인호프 작가가 당시 상황에 대해 밝혔는데, 문피아 측에서 수위와 더불어 올렝카가 현대 대한민국 기준으로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미성년자의 성행위를 묘사했다는 이유로 아청법에 걸린다고 하여 제재당한 것이라고 한다.#[29] 죽기 직전 넋두리로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게 나중에 죽기 직전이라도 좋으니까 세례를 받아달라'고 재석에게 간청하는데, 죽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소원이니 재석도 일단 말로는 그러겠다고 했지만 천녀와의 계약으로 윤회를 반복해야 하므로 실제로 그럴 수는 없었다.[30] 러시아 로마노프 황실에도 올렝카의 피가 흐르고 있고 폴란드 왕위도 러시아 황제가 갖고 있기 때문에 추존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31] 외손녀 카타지나가 외할머니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제작을 후원하였다. 당연히 기사왕과 올렝카의 사랑을 중점에 두고 있어 기사왕의 정실인 인현황후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32] 그런데 4부가 진행되면서 대한과 러시아가 국혼을 맺게 되었고 이로서 러시아 황실로 건너간 올렝카의 혈통이 돌고돌아 대한황실에 전해지면서 결과적으로 향후 대한황실에 소비에스키의 혈통도 흐른다는 게 맞는 말이 되었다.[33] 세임에 참여하는 귀족 전원에게 개별적인 무제한 거부권이 있어서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나면 무조건 발목을 잡아대는데다 심지어 반란이 합법이기까지 하다.[34] 처음에는 황자라고 묘사되었으나 3부 294화 댓글에서 작가가 황녀로 정정했다.[35] 실존 인물로, 충무공 이순신의 친구이자 사돈이다. 홍가신의 아들인 홍비가 이순신의 딸과 혼인했다.[36] 해당 시점까지는 대한에서 여성이 받은 관직으로는 가장 높은 기록이다.[37] 작중 묘사 없음. 충무대왕 이순신 생가 추정.[38] 재석은 2부에서 어머니를 만나는 꿈을 꿔서 울면서 상희에게 토로할 정도로 '나도 엄마가 있으면 좋겠다'며 어머니의 부재를 슬퍼했는데 3부에서 소망이 이루어진 셈이다.[39] 나가서 정신 좀 차리라는 의미로 건복제가 성친왕을 견서사로 추방할 때 개입하지 않는 대신 성친왕의 측근인 이형준과 정호찬을 겨우 견서사에 동행시킨다.[40] 경종비로 영조의 형수인 선의왕후를 왕대비로, 숙종비로 영조의 계모인 인원왕후를 대왕대비로[41] 그렇지만 평소와 같이 대하기도 했다는 것을 보면 본인도 어떤게 맞는지 번민하고 있는 듯 하다.[B] 원 역사 숙종과 동일.[B] [44] 작중에서는 숙종의 시호를 존호로 언급하므로 숙종이 가장 처음 받은 존호 표기.[B] [46] 작중에서는 숙종의 시호를 존호로 언급하는데, 오류로 추정.[C] 작중 묘사 없음. 추정.[C] [49] 연가제 사망 전 6개월.[50] 조정 대신들을 앞에 두고 순진무구한 모습을 여과없이 드러내서 재석은 망신을 당한 셈이지만, 건복제는 제위를 염두에 두고 자식들을 키운 예왕과 달리 성친왕은 그런 고려 따위 없이 순수하게 아버지로서 이은을 키운 것으로 보여 만족한 것으로 보인다.[51] 작중 묘사 없음.[52] 그래도 딸이 낳은 외손주가 2명 있다.[53] 영선공주 소생 외손 2명[54] 원역사에선 1680년에 사사(賜死) 당했다. 실제 생몰년으로도 타임라인이 얼추 맞고, 작중 조선의 정치는 실제 역사보다 훨씬 안정됐으니 더 오래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55] 건강한 아들딸들을 무려 11명이나 낳았다고 한다.[56] 처음에는 성친왕과 22살 차이인 1643년생이라고 나와서 그럼 열조는 9살때 첫 아들을 낳은 것이냐며 잠시 논란이 되었으나 작가가 오타였다며 1653년생으로 정정했다. 똑같은 숫자로 2번이나 연속으로 틀리게 썼고, 열조가 현왕을 태자일 때 낳았다고 해석하기 쉽도록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현왕의 나이가 진짜 오타였는지 설정 오류를 뒤늦게 수정한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57] 여담으로 주인공인 이재석도 원래의 현대에서 효령대군파였다고 언급된다. 그래서 이형준이 주인공 이재석의 조상님이 아니냐는 가설이 나오기도 했다.[58] 적자는 50세에 이형준보다 일찍 사망한다. 당시 기준으로 딱히 단명한 것은 아니고 70대가 넘도록 살아있는 이형준이 장수한 것. 본처는 드센 성격이라 이형준은 계집질을 좋아하지만 첩은 들이지 못했다. 서자 보리스를 데리고 귀국한 후에는 본처에게 참교육 당해서 눈탱이가 밤탱이가 됐는지 원래 쓰던 안경 대신 자수정으로 만든 선글라스를 끼고 나온다.[59] 성친왕을 잘못 교육시킨 것을 책임지라는 의미도 있었고, 태후의 부탁으로 성친왕과 친한 사람을 넣어준 것이기도 하다.[60] 고인물재석이 태제 책봉 이후 경연에 참석해서 경연관들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자 세간에선 '견서사 파견 중에 망나니 성친왕의 학식이 풍부해졌다'고 인식했기 때문에, 이런 급격한 승진에도 반발이 없었다.[61] 미주에 있던 기간 동안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향교를 방문하고, 제자를 양성하고, 직접 쓴 책을 전파하는 등, 사대부들이 이주하길 꺼린 탓에 사실상 유학이라 할만한 게 없던 미주에 유학을 전파한 시조나 다름없는 셈이다.[62] 재석이 억지로 밀어붙였으면 어떻게든 배향되는 건 가능했겠지만, 재석은 그렇게까지 하는 건 이형준 본인도 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굳이 그렇게 하진 않았다.[63] 원체 공부와 담을 쌓아서 높은 수준의 교육까진 못 시켰지만, 유학의 가르침은 의외로 잘 받아들여서 무인지변 때 흔쾌히 자신의 가족들보다 재석의 가족들을 챙겨서 공을 세운다.[64] 정호찬이라는 이름은 슈타인호프 작가의 지인의 이름으로, 슈타인호프 작가의 모든 대체역사 소설에는 정호찬이라는 이름의 가상인물 캐릭터가 보너스로 등장한다. 댓글로 드립치는 거 되게 좋아한다.[65] 경주 정씨인 1부 정호찬과 달리 연일 정씨로 정몽주의 직계 후손도 아니다.[66] 각각 1669, 1670, 1672년생.[67] 이사벨라는 정호찬의 막내아들보다도 나이가 어리다. 본처는 키가 150cm 정도로 작지만 관대한 성격이라서 양첩을 들인 것을 비난하지 않았다고 한다. 본인은 본처와 이사벨라는 각각 오다 마코와 셀린 패러크를 모델로 할 거라고 한다[68] 본래 왕세자에게만 붙여줬지만 칭제한 후에는 다른 황자들에게도 붙여주는 것으로 바뀌었다.[69] 묘사를 보면 한 편이 되어달라고 부탁하거나 반란군에 가담하지 말아달라는 협박도 아닌 성친왕은 살아있고, 구하러 가니 막지 말라는 한줄 뿐이었는데, 장희재에게는 마음을 흔들어 놓는 편지였다고 한다.[70] 재석은 76세의 최석정도 일한다고 붙잡으려 했지만, 국무총리대신은 문신이니 그럴 수 있지만 무신은 늙어서는 일할 수 없다며 퇴직이란 명분으로 탈출에 성공했다.[71] 재석은 정호찬보다 나이가 적은 자기가 정호찬보다 오래 살 것 같으니 회고록을 볼 수 있을까 기대했으나 재석이 정호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재석은 회고록을 보지 못 했다.[72] 성(D' Aramitz)이 삼총사의 아라미스와 비슷해서 재석은 혹시 아라미스의 모델이 된 실존인물인가 싶어 루이 13세 때 총사대에서 근무한 적이 없냐고 물어보았다. 그러나 삼총사의 아라미스의 모델이 된 인물은 앙리 다라미츠이며 3부 시점에 이미 고인. 친인척일 수는 있다.[73] 자혜원이 이태원(梨泰院)에 위치해있어서 같은 음을 가진 이태원(異胎院)이 자혜원의 멸칭이 되었다. 즉 다른 배에서 났다는 뜻의 모욕에 가까운 멸칭이다.[74] 재석이 열심히 변호했고 다른 문책을 내리기 전에 건복제가 사망해서 여기서 그친다. 그가 견서사에서 한 보고 덕에 재석의 이미지가 개선됐으니 재석에게도 은인이었다.[75] 다리의 상처가 감염된 아파치 포로를 살리기 위해 다리를 잘랐는데, 당사자는 자신을 전사가 될 수 없는 몸으로 만들었다며 대한에 증오를 품게 된다.[76] 모든 사람을 멀리했던 의심스러운 태도와 예왕과 최신원의 대화에서 독약을 쓸 수도 있다는 언급이 복선이었다.[77] 4회차 인생인 재석이 아니더라도 너무 어설픈 태도라 의심을 안할 수 없었다. 외과 전문가가 뜬금없이 벌벌 떨면서 한 번도 올린 적 없는 보약을 대령하니 뭐...[78] 암살 시도가 발각되었다는 사실을 공론화해봤자 예왕을 그것만으로 범인으로 단정하기는 어렵고, 황실의 명예가 실추됨은 물론 김종건과 이진원이 처벌받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미주에서 실종되었다는 소문을 내서, 예왕으로 하여금 암살시도를 눈치챈 성친왕이 공론화를 막고 조용하게 둘을 처리해버렸다고 믿게 만드려는 것이다.[79] 남정네만 수백명이 드글대는 곳에 자기 첩을 데려오고 싶다고 말하는 등.[80] 작호 보로후는 보리스의 출생지 러시아 보로네시에서 가져왔다.[81] 이때 재석이 자기 가족들만 챙긴다며 미안해 하자, 아버지 이형준에게 배웠다며 "주군은 부모와 같으니 머리와 같고, 처자는 의복과 같다"는 유학 구절을 읊으며 괜찮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재석이 장조 시절 북방에 친정을 갔을 때 대리청정을 하던 세자를 선동해서 난을 일으키려다가 실패하고 수감된 사관들이 자살하면서 유서에 남긴 말이기도 하다. 이형준은 불충분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그가 시킨 교육은 빛을 발했다.[82] 모친이 서반아인이고 출생 시기도 다르므로 원 역사의 희빈 장씨와 이름만 같은 가상인물로 봐야 한다.[83] 두돌도 안 된 아기인데다 서녀이기 때문에 건복제가 봐줬다고.[84] 처음엔 이고르까지만 한국식 이름이 알려져서 나머지 카자흐들도 이형준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만큼 다 이씨 성을 받은 것으로 보였으나, 다른 이름들을 보면 그냥 본명에서 음차한 이름들을 쓴 듯.[85] 포르토와 다토스는 대놓고 삼총사를 노린 캐릭터인 듯 하다. 2부의 임꺽정, 서림과 비슷한 설정인 듯. 달타냥의 모델인 실존인물 샤를 드 달타냥 백작에 대한 언급도 짧게 나온다.[86] 현실의 타호 호수.[87] 현실의 콤스톤 은광[88] 실존인물 안용복은 부산 출신에 수군에 복무했다는 것 말고 별 정보가 없어서 재석도 이 안용복이 그 안용복이 맞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출생지도 확실히 다르고, 장희빈 남매와 마찬가지로 실제 인물을 모티프로 한 가상 캐릭터라고 봐야 할 듯. 굳이 생각해 보면 재석의 노력으로 역사가 바뀐 세계인 만큼 재석의 행동의 나비효과로 안용복의 부모가 주산군도로 이주해서 주산군도에서 안용복이 태어났다고 생각할 수는 있을 것이다.[89] 형식상으로 권율의 5대손이지만 권익경은 권율의 양자이므로 유전적으로 직계는 아니다.[90] 재석이도 자신의 전생에서 각별한 인연이었던 권율의 후손인 그가 곤경에 빠지길 원하지 않았던 것도 있다.[91] 다만 구휼을 워낙 많이 하기에 세간에서는 좋은 마차를 쓰는 등의 사치스러운 면모도 그다지 나쁘지 않게 본다.[92] 금위사 첩자들을 잡아 고문할 때 직접 참관하며 은근히 즐겼다고 한다.[93] 다만 이 시점까지는 성친왕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던 과거의 악행 문제 때문에 예왕에게도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94] 그런데 빙의 전 성친왕의 악명 때문인지 성친왕이 예왕이 사약을 들기 전 형제의 정으로 대접한 팥죽이 예왕을 살려줄 것처럼 속이고 독이 든 팥죽을 줘서 죽였다로 와전되어서 퍼져서, 작중 세계관에서는 '독이 든 팥죽'이 간장게장과 감을 대체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95] 세도정치로 유명한 신 안동 김씨가 아닌 구 안동 김씨다.[96] 상희에게 '성친왕이 새 사람이 된 건 오직 올렝카 덕'이라는 의심암귀를 심어주려고 하지만 인생 4회차인 상희에겐 그저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97] 원래 엄청난 동안 미녀 였는데, 30살은 더 먹은 것 같은 얼굴이 됐다고.[98] 과거 재석이 하던 거열형과 달리 소를 이용해 찢어죽이는 것이 아닌 머리와 사지를 잘라 죽이는 것이다. 다만 일반적으로는 참수부터 한 뒤에 팔다리를 자르는데 최신원은 산 채로 팔다리부터 자르고 머리를 자른다. 그나마 임해군처럼 형을 다 집행하기 전에 죽는 걸 막기 위해서 아편을 복용시켜서 고통은 덜어줬다.[99] 시가전에서는 몇번 못 쏠 총포를 지닌 수어청 병사들보다는 냉병기를 장비한 한성부 병사들이 더 낫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훈련도감군은 총포를 쏘니 대부분 오군영 공병대 출신이고 화재와 싸우는데 익숙한 금화군 병사들에게 전투력 약한 한성부 병사들의 무기와 장비를 들려서 양익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자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면 성친왕 일가는 아예 탈출하지 못했을 수 있었는데 실패로 돌아가면서 난은 사실상 실패했고, 후자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면 성친왕군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100] 결국 그가 우려했던 부분들은 다 현실이 되어서 예왕군의 패배에 일조했다. 다만 본인도 실책을 저질렀는데, 훈련도감군과 싸우는데 수적 우위를 살리려면 야밤에 기습해야 했는데 아군의 피해가 우려되어서 아침에 정면승부를 건 것이었다.[101] 3부 시점에서는 머리를 자른 다음 팔다리를 자르는, 사실상 참수형이다.[102] 원역사에서는 모반 혐의로 김자점에게 처형당한 그 인물로 보인다.[103] 원역사에서는 효명옹주의 남편, 즉 인조의 부마였고 조부 김자점이 몰락할 때 함께 처형된다.[104] 태황의 친부가 살아서 대원왕에 봉해져 혼란이 발생하는 미증유의 상황을 막기 위함이라는 명분을 붙일 셈이었다.[105] 성친왕이 결국 본색을 드러내서 폐태제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후 일어난 일을 보면, 어차피 김세룡은 작중 역사에선 명신인 김자점의 후손이고, 이미 자신의 지위도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고 할 수 있는 내각승상이니 비상한 결단까지 하며 사위를 태황에 올릴 만큼 절박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살던 대로 살기로 했을 수도 있다.[106] 민성윤이 한 것은 없으나, 정치적 배경에 더해서 차남이 공을 세운 공으로 보인다. 실제로 원로나 고위 대신이 한 것이 없어도 정치적 배경으로 공신이 되는 건 흔히 있던 일이다. 해당 문서 참조.[107] 딸의 죽음으로 인한 원한은 잊을 수 없어서 성친왕 편을 들 수도 없지만 태황을 배신할 수도 없기에, 예왕파가 다수인 조정에서 경거망동하지 못 하게 자신이 편을 드는 척하면서 다 주저앉히고 자신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진 것으로 보인다.[108] 물론 김세룡 뜻대로 되었더라도 성친왕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으니 애초에 안 될 일이었다.[109] 작가에 의하면 실존인물 이완과는 다르다고 한다.[110] 성친왕에 앞서 하와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자신이 먼저 정복을 주장했을 것이라며, 대한에 적대적인 세력이 하와이를 차지한다면 이를 근거지로 삼아 북대동양 전체를 뒤흔들수 있으니, 다른 세력이 차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점유해야 한다는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111] 이로 인해 본의 아니게 김세룡의 은인이 되었다. 김세룡은 예왕의 음모에 깊게 발 담그고 있었지만, 금위사 감시망이 무력화되었으니 난이 일어나기 전 김세룡이 했던 언행들은 증언이 불가능해져 버렸고, 그 결과 김세룡은 예왕을 손절하고 장남을 시켜 무인지변을 고변한 것만으로 1등 공신이 되어 가문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112] 자기 첩을 귀비라고 부르는 것은 태황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살벌했던 무종 시기였다면 이것 하나만으로 예왕은 의금부에서 손톱이 뽑혔겠지만, 건복제는 '술에 취해서 아끼는 첩에게 애정표현이 과했다'는 정도로 넘어갈 수 있고, 성친왕이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예왕을 숙청하는 것은 후계 구도를 불안정하게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에 문제삼지 않기로 한다.[113] 광동군도 주서사인 줄은 몰랐고, 광주절도사의 간자로 착각했기 때문.[114] 원역사의 김만중은 1692년 사망했지만 귀양생활을 하지 않아서인지 수명이 늘어났다. 현재 기준으로도 83세까지 장수한 원역사의 송시열이 더 평탄한 정치인생을 겪은 작중 역사에선 90세까지 살고 자의로 목숨을 끊었을 정도이니 충분히 가능하다.[115] 대한과 서반아령 필리핀 총독부와의 전쟁이 임박한 지금, 제목만 같고 내용은 완전히 다른 '사씨남정(南征)기'를 쓰는 게 아니냐는 독자들의 드립이 있었는데 결국 정씨남정기를 쓰게 되었다.[116] 재석이 느끼기에 나만 고생할 수 없다는 최석정의 오기가 느껴졌다고 한다.[117] 여동생 장옥정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장희재와 이름만 같은 가상인물이다.[118] 그러나 장옥정이 그다지 총명하지 않다는 걸 알아서 이 편지도 큰 영향을 미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미주에서 아파치 토벌전을 벌이면서 성친왕을 직접 곁에서 본 데다가, 어차피 태제로 가책봉된 상황인데 난을 일으킬 리 없다며 예왕으로부터 온 격문을 믿지 않았다.[119] 원 역사에서 이순신의 장남 이회는 이지백, 이지절 두 아들이 있었고, 둘째 이지절은 아들이 없던 이회의 동생 이예에게 입적된다. 이순신의 장손 이지백도 아들이 없어 이지절의 장남 이광윤이 이지백에게 입적되었으므로, 이원기와 여동생인 태후 이씨는 가상인물이다.[120] 부하였던 홍상훈도 2등공신인데 명색이 총관인 자가, 정위인 김진식이나 황족이지만 이끈 병력이 100명 남짓에 불과했던 영해공과 동급인 3등공신이라는 건, 평생 먹고살 길은 열어 줄 테니 그것만 먹고 떨어지라는 소리다.[121] 누구 후손인지 작중에서 나오지는 않았지만, 훗날 4부에서 역시 서씨 성인 육군대신 서진홍이 로드리고의 후손이라 나오는 것으로 보아 서인혁 역시 로드리고의 후손으로 추정된다.[122] 재석이 대기근을 대비해 호부의 금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계획을 짜두자고 했다는 것에도 소극적이었다가 이후 실제로 허가가 떨어지자 재석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며 예를 표해서 형황의 눈치를 보며 업무를 하던 재석을 기겁하게 만든다.[123] 미주에서 살던 어린 시절 입던 옷.[124] 작중에서는 선조 때 신설된 직위이며, 불교계의 캔터베리 대주교에 해당한다.[125] 손흥민이 득점왕을 차지하며 화제가 된 다음날 연재분에 첫 등장했으니 거의 확실하다.[126] 작중 재석의 표현이 걸작인데 '코끼리를 보러 다니기만 하던 녀석이 드디어 제 몸에 달린 코끼리를 쓰는구나'.[127] 그나마 7년이나 지나 좀 누그러진 것으로, 7년 전에 알았으면 한양으로 압송하여 처형하라고 고하고, 만약 이영이 목숨은 살려주면 자기가 사법권을 가진 심왕부로 끌고가 죽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그러진 것도 이준은 그래도 친형제라 그런 것이고, 성균이나 정빈이 동반했다면 한양으로 압송하자고 했을 것이지만 마침 가족들이 동반을 거절해 홀로 수행원들만 데리고 여행하던 중이라 이 일을 묻어둘 수 있었다.[128] 원역사의 카메하메하 1세의 고조할머니. 하지만 작중에서는 퇴위당했으니 카메하메하 1세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129] 원래는 분가했으니 연좌의 대상이 아닌데, 난이 성공했으면 그가 황태자가 되었을 테니 절대 용서할 수 없어서 연좌시키기 위해 강제 이혼을 시킨 것으로 보인다.[130] 일개 촌장이었던 마우이 일가를 하와국 국왕으로 만들기 위해서 행한 모든 공작들이 담겨 있어서 대한에서 제후국의 치부가 퍼질까봐 금서로 지정하였다.[131] 실존인물 정지룡과는 이름만 같은 가상인물이다. 작가의 언급에 의하면 실존인물 정지룡은 역사의 변동으로 태어나지 않았다고 했으나 후에 후송에 밀무역하는 가문이라고 정지룡의 자손인 정경, 정극장이 등장했다.[132] 대한 조정의 신료들은 정지룡이 진짜 대한 배는 안 터는 줄 알았으나 태황 건복제는 다 죽여서 증거가 없는 걸 수도 있다 의심했는데 진짜 그런 거였다.[133] 대한의 번국이라 공식적으로 묘호를 쓸 수 없기에 과거 조선이 명나라 몰래 묘호를 올렸던 것처럼 내부 문서에만 기록했다. 대한에서도 알고는 있으나 외왕내제 정도는 자기들도 다 해봤던 거라 대한으로 보내는 공식 외교 문서에 적지만 마라 정도로 묵인하는 중.[134] 시간 상 16대 Mustafa Shafi ud-Din 술탄의 아들로 추정. 실존인물 여부는 불명.[135] 사생아였기에 족보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본관은 전주 이씨다. 훗날 전주 이씨 비수파 같은 이름으로 분류될 수도 있을듯.[136] 졸본천 옆의 지명에서 나온 말로, 고주몽이 나라를 세운 곳이기도 하다. 아버지를 찾아온 디에고와 비슷한 주몽과 연관 있는 지역에, 디에고의 출신지인 비스카야 지방에서 따왔다는 중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137] 정확히 말하면 디에고가 읽은 서반아판은 <해 뜨는 동방의 나라에서 태어난 용맹하고 현명하며 자애로운 기사 돈 디에고의 세 대륙과 세 바다에 걸친 모험>이라는 문장형 제목이다.[138] 조공국은 대부분의 경우 독립적이기 때문에 유럽 기준으로도 King이지만, 디에고가 봉해진 술루국은 번국일 뿐만 아니라 건국 자체를 죄다 대한이 주도했기 때문에, 디에고는 유럽 기준으로는 Prince, 즉 대공이다.[139] 상희 입장에서는 친한 언니의 의동생이 의붓며느리가 되는 요상한 관계가 되었다.[140] 가북(加北)은 이사변 북쪽 섬 카부칸에서 따왔다.[141] 정해현은 명나라 때 주산 일대의 행정구역으로 지현은 종3품이다.[142] 실제로는 청 세조의 연호이다.[143] 박화탁의 차남은 어릴때 요절.[144] 원 역사에 사용된 태화 연호의 한자는 太和, 泰和 2가지지만 후자가 금 장종의 연호로 가능성이 높다.[145] 결코 대복진이 못난게 아니라 파포태가 눈이 높은 것이다. 절세미녀인 제수 율리아에게도 흑심을 비쳐, 부수가 봉기한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한족 농노 처녀들을 수없이 잡아다 겁탈하고, 임신하면 독한 낙태약을 먹여 사생아는 없지만 약 부작용으로 죽은 시녀들이 많다.[146] 그러나 대복진은 파포태가 보르지긴을 토사구팽하고 최강국인 대한의 공주인 율리아를 대복진으로 삼을 것이라고 생각했다.[147] 북위 태무제가 사용했던 연호이다.[148] 율리아의 설득은 다른 것은 다 효과가 없었지만, 파포태가 자신을 노리는 것을 언급하면서 자극하자 부수가 각성한다.[149] 12월 30일에서 며칠 전.[150] 특히 자신을 향해서 흑심을 드러내는 것에서.[151] 현실의 5대 정이대장군은 도쿠가와 츠나요시이다.[152] 현실의 도쿠가와 이에노부(1662년생)와 이름만 같은 가상인물.[153] 현실의 도쿠가와 요시무네(1684년생)와 이름만 같은 가상인물.[154] 심지어 이 때 일본측에서는 쇼군(대군)이라고 칭하기는 하지만 태황에게 꿀리지 않는다고 얘기를 꺼내는데 대한에서도 바로 긍정하면서 만족스러워한다. 즉 정치적 이유로 신하를 칭할 뿐, 외국에서 황제로 여기는 것은 천황이 아니라 쇼군이라고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155] 2대 다카마쓰 번주와 쓰나에다가 서로 사촌으로 각각 큰아버지, 작은 아버지의 양자로 입적되었다.[156] 패하면 국력이 깎이고 이겨도 흑왕의 힘이 커질 뿐이기 때문. 게다가 승평제는 면밀한 분석과 검토를 통해 부황이 장안을 얻지 못한 것은 그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157] 처음 등장 시에 한자까지 조중선이라고 나오고 그 후에는 황중선으로 나오는데, 작가의 오타로 추정.[158] 실제로는 남명 문종의 연호이다.[의문] 10.5장 1화에 의하면 조형서는 4살에 즉위하여 건주가 침공한 1695년까지 13년간 섭정을 받았다고 하는데 13장 4화에 의하면 조형서는 1680년생으로 4살에 즉위하여 14년간 섭정을 받았다고 한다. 연도가 미묘하게 어긋나는데 설정이 꼬인 것으로 보인다.[160] 사실 조호덕 본인과 5살 차이밖에 안 된다.[161] 이후 '노괴'는 독자들 사이에서 재석을 부르는 별명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162] 부친과 한자가 다르다[163] 유명한 장 바티스트 타베르니에 본인은 아니고 그 아들 혹은 조카 정도로 설정했다고 한다.[164] 실존인물. 원역사에서는 영국에서 화려한 언변으로 자신이 포르모사(대만)에서 왔다고 주장하고 다녔던 사기꾼이었다.[165] 로마 출신이라면서 이탈리아어는 못하고 프랑스어만 하는 것을 이렇게 해명한다.[166] 1679년생이고 프랑스 랑그도크 출신이라는 점. 원역사의 살마나자르와 같다.[167] 이름은 쿠오 바디스의 작가로 유명한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소설 십자군의 기사에서 따왔다.[168] 표트르는 대한이 급속도로 발전한 이유가 서반아와 접촉하면서 '동양적'인 면을 버리고 서양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루스국도 마찬가지로 동양적인 면을 버려야 한다고 판단했다.[169] 과거 조선이 유럽으로부터 받았던 것처럼 인력, 기술, 물자들을 요청했는데 개중에는 곤란하거나 들어줄 수 없는 것도 있었다.[170] 다만 사망원인은 원역사와 달리 폐렴이 아니라 요로결석이다.[171] 작가의 말에 의하면 표트르가 마르타에게 너무 빠졌기 때문이라고.[172] 표트르 1세는 조선에 유학 보낸 것이 헛되지 않았다고 평가하는데 실제로 알렉세이는 재석이 신경써서 교육을 시켰기에 행정 등 내부적인 일 외에도 군사를 다루는 일에도 무지하지 않도록 군사학 관련 교육도 제법 시켜놓았다. 덕분에 군대를 다룰 때 기본적인 안목 이상은 갖춰서 공을 세울 수 있었다.[173] 생모인 올렝카의 출신지인 폴'수'국에서 따온 봉호.[174] 금발 백인과 한국 황인의 자식이 금발로 자라날 확률은 아주 낮다. 대부분 아기라서 머리 숱이 적기 때문에 옅은 색으로 보이는 것으로 자라면서 엄마가 금발 백인인 축구선수 박주호 딸 나은이처럼 갈색 머리로 바뀐다.[175] 그 초상화는 19세기에 일리야 레핀이 그린 상상화다.[176] 예카테리나 1세와 동명이인.[177] 알렉세이가 2년 늦게 태어난 것은 마르타의 영향이라고 한다.[178] 군 경험이 전무한 골리친이 친정을 한 이유는 워낙 반대가 많은 전쟁이라 귀족들이 지휘를 맡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179] 전투는 한 번도 하지 않고 행군만 하다가 돌아왔는데 10만 병력 중 4만 5천을 손실했으며 이래놓고 이겼다고 허위보고를 했다가 걸린다. 실제 역사에는 이 패전 때문에 소피아와 골리친에 대한 귀족들의 지지가 떨어진 틈을 타 표트르가 쿠데타를 일으켜 소피아를 숙청하고 친정 체제를 세운다.[180] 그래도 표트르는 그가 자신의 유럽행을 찬성한데다가, 무능하지만 애국자라는 것은 인정하고 재산 약간은 갖고 갈 수 있게 해준다.[181] 명예혁명을 돕는 것은 남의 나라 반란에 명분도 없이 참여한 것이니 형황에게 찍힐 일이고 제임스 2세를 도와서 명예혁명을 막으려다가는 잉글국 귀족들에게 죽을 수도 있다.[182] 원 역사에서도 미분은 피에르 드 페르마가, 적분은 요하네스 케플러가 처음으로 완성했지만, 이를 최초로 증명해낸 아이작 뉴턴과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가 수학계에선 더 고평가받는다.[183] 재석은 2부 장조 시절 1607년의 핼리 혜성을 눈으로 목격했으나 사망하기 1년 전 시점이라 눈이 침침했고 당시 조선에는 구름이 많아서 제대로 관측하지 못했다. 또한 당시의 조선은 재석이 자신의 죽음의 원인이 된 기우제를 고려해야 했을 정도로 기후가 좋지 않았기에 이 1607년의 혜성은 나쁜 징조로 여겨졌다고 한다. 1682년의 핼리 혜성은 3부 성친왕의 몸으로 프랑스 체류 중 조선소에서 일하다가 목격한다.[184] 도이치는 신성 로마 제국을 가리키며 황제령은 합스부르크 영지를 의미한다. 즉 레오폴트 1세는 도이치의 황제이자 황제령의 영주이다.[185] 엄청 자의적으로 끼워맞춘 것으로 디에고의 어머니가 성친왕을 따라가도 당시 이미 조선에 있을 때 결혼한 본처인 강씨가 있었으니 황후가 될 수 없으므로 디에고도 태자나 태황이 될 수 없었고, 강씨가 죽자 민씨(상희)를 보내 새로운 본처가 된 상황이며, 설사 올렝카가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태황이 되었다고 해도 대한의 종교에 대한 문화상 임금이 특정 종교 신자라도 모두가 개종을 할 리도 없다. 그리고 덕비 허씨가 기독교인이 된 건 태자가 죽은 이후다. 디에고도 이 점을 설명하려고 해봤지만 아무리 말해도 변하는 게 없으니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도 이 사람은 이 정도 선에서 그쳤기에, 도와줄 테니 반란을 일으켜 제위에 오르라고 부추기는 멍청이들보다는 나았다고.[186] 하지만 성친왕은 이사벨과 관계 후 바로 거리를 두고, 얼마 뒤 이탈리아로 튀었다.[187] 도로테아가 친한 사촌인 다니엘라를 만나서 들은 바로는 그 동안 도로테아가 보낸 편지를 전부 불태웠다고 한다.[188] 자기 딸을 데려간 보상으로 디에고와 도로테아의 딸인 손녀라도 내놓으라며 어차피 이교도들 땅에서 제대로 자랄 리가 없으니 스페인으로 데려와 후작가 사람으로 키우겠다 말한다.[189] 실제 역사에서 미국의 앨버커키 시가 이 사람의 작위에서 이름을 따왔다.[190] 몬타네스 주교 때문에 불편해진 상황이 나오는데, 몬타네스 주교 주도의 대학살 이전에는 대한과 우호적인지라 경계를 크게 할 필요도 없었고 태평양을 건너는 것도 하와이 등을 통해서 간편했었다. 필리핀을 잃고, 신서반아를 위협당하는 것 외에도 이전에는 당연시 되던 것들을 할 수 없게 된 상황인지라 대한을 적대해서 얻은 불이익이 까면 깔수록 계속해서 나온다.[191] 사실 금화도 줄 생각 없었지만, 우르수아가 펠리페 2세와의 인연에 매달려 호소해서 과거 펠리페 2세에게 신세진 것을 갚는다는 뜻으로 금화라도 준 것이었다.[192] 경인왜란록과 을미동정록을 읽었는지 이때 전범들의 받은 혹형을 거론하며 자신도 그렇게 처벌할 것이냐고 비아냥댄다. 그러나 그 대상들은 본토 침략자이자 대역죄인 이진 등의 특별사례라고 강조하면서 포로가 된다면 대우와 안전보장을 약속받았음에도 싸워보지 않고 항복할 수 없다며 거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