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본연방 大日本聯邦 | Japa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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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 야마토 민족, 아이누 | ||||
언어 | 일본어 | ||||
문자 | 가나, 한자 | ||||
종교 | 불교, 신토, 기독교 | ||||
군대 | 일본군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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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원수 | 메이지 덴노 ,(1867년 ~ 1912년), → 다이쇼 덴노 ,(1912년 ~ 현재), | ||||
정부수반 |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가츠라 타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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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체역사소설 고종, 군밤의 왕에 등장하는 일본을 소개하는 문서.2. 정치
2.1. 헌법
제1조: 대일본연방은 일본 국민의 총의에 입각하여 만세일계의 천황을 통치와 통합의 상징으로 삼는다.
2.2. 행정부
1868년, 보신 전쟁이 무승부로 끝난 후 마지막 순간까지 중립을 지킨 조정의 중재로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늦게나마 쇼군직을 버리고 겉으로 에도 막부를 해체하여 신정부가 출범했다. 하지만 신정부는 말이 하나의 정부지 웅번들이 우세하나 주도하지 못하는 서부, 여전히 도쿠가와의 접시꽃 문양이 휘날리는 동부로 나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경찰조직이 서부의 헌병대와 동부의 신선조로 나뉘었다.2.2.1. 역대 내각총리대신
대일본연방 내각총리대신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직함 | 대 | 이름 | 임기 | 정당 | 비고 | |
취임 | 퇴임 | ||||||
내무경 | 1 | 오쿠보 도시미치 | ??? | 1897년 | 무소속 | 지조개정 폐번치현 대일본연방 헌법 제정 | |
내각총리대신 | 1 | 도쿠가와 요시노부 | 1897년 | 1907년 | 애국공당 | 한양 선언 나가사키 아주대회 개최 | |
2 | 이토 히로부미 | 1907년 | 1913년 | 입헌정우회 | |||
3 | 가츠라 타로 | 1913년 | 현재 | 입헌정우회 |
2.3. 입법부
시기로 따져도 조선보다 늦어졌는데 용어까지 조선 것을 쓸 수는 없다는 심보로, 의회를 국회라고 부른다. 선거는 아직 백성들에게 이르다는 판단에, 각 번에서 고쿠다카에 따라 많게는 다섯, 적게는 둘을 추천하도록 하였다. 옛 도막파 입헌정우회와 옛 좌막파 애국공당이 개혁의 속도, 불평등조약 개정 문제, 조선과의 관계 등 거의 모든 안건에서 다투고 있다.2.3.1. 정당
- 입헌정우회
이토 히로부미가 창당한 우익 정당. 군권을 높이는 프로이센 방식의 헌법을 추구하며, 사사건건 신정부의 발목을 붙잡는 애국공당을 견제하고 있다. 창당 초기 조속히 조선을 따라잡지 못하면 신주가 온전치 못하게 될 것이라 주장하였지만, 조일동맹 체결로 이토가 정계에서 쫓겨난 이후 정한론을 폐기했다.
- 애국공당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민권 운동가 이타카키 다이스케가 꾸렸던 행복안전사를 끌어와 창당한 정당. 민권운동의 기치를 이어받아 옛 막부의 폐단을 없애고 군권과 민권을 함께 높이겠다는 대의를 내세우고 있다. 외교적으로 아시아를 중시한다. 각 번의 고쿠다카에 따라 의원직이 배분되어 국회의 다수당을 차지했다. 에도 막부와 조선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만큼 외교적으로 친조 노선을 추구한다. 결국 1897년에 치러진 제1회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신승하였다.
- 일본공산당
한양에서 공산당 선언을 읽고 사회주의에 심취한 사이온지 긴모치가 가타야마 센과 손잡고 창당한 정당. 애국공당의 그림자에서 힘을 숨기면서 지지자를 모으고 있다. 조선의 만민공산당과 대단히 긴밀한 사이다. 제1회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약진하여 원내 3당이 됐다. - 영수: 사이온지 긴모치
- 당원
- 가타야마 센
2.4. 외교
2.4.1. 아시아
- 일본-조선 관계
1867년, 신정부가 출범하기 전에 조선과 수호조규를 체결했다. 당초 신정부를 주도하는 서국 세력, 즉 삿쵸 동맹은 국수주의에 심취하여 조선을 깔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무승부로 끝이 난 보신 전쟁과 류큐 병합 실패, 홋카이도 독립 사태 등 사건사고를 겪으면서 일본보다 빠르게 성장하는 조선을 인정하게 됐다. 조일동맹을 체결한 이후에는 정한론이 정계에서나 학계에서나 소멸했다.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먼저 개화하였는데 조선에 앞질러져버린 현황에 대한 위기감과 질투심도 있다. 그래서 조일동맹을 연장하지 않고 새로운 파트너 영국과 손을 잡았는데[3] 이후 벌어진 독도 분쟁과 1895년 조선군이 청을 상대로 보여준 위용에 기겁하여 살짝 숙이는 모양새다. 조선과의 관계가 더욱 진전되자 공사관을 대사관으로 높이고 동래와 원산에 영사관을 설치했다.
다이쇼 덴노의 인간선언을 계기로 일본이 다른 범속한 나라와 다른 신이 지켜주는 나라라는 관념이 무너진 이후로는 서로 경쟁하고 놀릴지언정 증오하고 질시하지 않는 관계가 됐다.
- 일본-청 관계
1868년, 일청수호조규를 체결하여 자주국 지위를 인정받았다. 1872년 있었던 대만 출병으로 갈등을 빚었지만, 조선의 중재로 대만 시장에 접근할 수 있었다. 막부가 해체되고 신정부가 출범하면서 일자리가 사라진 일부 사족들이 대만 농장에서 요짐보 노릇을 하고 있다.
- 일본-류큐 관계
1872년, 병합을 시도하였으나 조선의 개입으로 사쓰마 번이 실질 통치했던 류큐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다. 이후 류큐 병합을 포기했지만, 이미 경제가 종속된 상황이라 일거리를 찾아 가고시마에 가는 류큐인들이 적잖이 있다. 아마미 제도 등 영토 분쟁이 계속되고 있어 양자간 감정이 썩 좋지는 않지만, 아주대회의 종목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입을 모아 무술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상황에 따라 협력하기도 한다.
2.4.2. 유럽
- 일본-영국 관계
1890년, 군사동맹을 체결했다. 공개적으로 친조 노선을 천명한 요시노부가 집권하여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2.4.3. 아메리카
- 일본-하와이 관계
전 신선조 조장 사이토 하지메가 이끄는 일도일포류 문하생들이 하와이 국왕의 친위대 노릇을 하고 있다.
3. 문화
4. 경제
주요 산업은 생사판매다. 조선에 황란이 닥치기 전부터 슬그머니 추격하다가 여전히 아시아의 신흥 시장에 관심은 있지만, 조선은 살짝 불안하게 여기던 자본까지 받아들여 부국의 완성까지는 아니어도, 오쿠보가 메이지 원년부터 닦아 온 장구한 대업이 첫 단계의 완성을 고할 정도는 되었다. 대황란 이후로는 동양 열국 중 국내총생산 2위 자리를 두고 조선과 여러 차례 경합하다가 인구를 내세워 끝끝내 그 자리를 공고히 하였다. 다만 1인당 GDP는 한 번도 조선을 이겨보지 못하였다.5. 군사
옛 다이묘들의 반발로 징병제 도입이 늦어져 1880년 기준으로 전 병력이 같은 시기 조선군의 절반 이하인 약 3만 5,000명이었다. 해군의 경우 아즈마함과 후소를 필두로 하는 일본 해군이 우위에 있었으나, 가용한 전함의 수는 조선이 더 많았다. 조일동맹을 체결한 이후 일본이 섬나라라는 이점을 살려 육군 육성을 잠정적으로 포기하고 그 대신 해군 육성에 집중했다.다만 소위 따갚되스러운 제국주의적 발상으로 국력 이상의 군대를 육성하다가 망한 현실의 일본 제국과 달리 어느새인가 조선에게 물들어 '평화가 제일이다'라는 초당파적인 인식이 생겨 '딱 우리나라를 지킬 수 있을 정도의 군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렇게 정부가 제어할 수 있을 정도의 병력만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문민통제가 원활히 이루어지고 있다.
5.1. 육군
평민에게 칼을 쥐어 줄 셈이냐는 옛 다이묘들의 극심한 반발로 징병제 도입이 늦어져 일본의 인구가 조선의 2배가 넘는데 동원력에서 밀리는 상황이다. 오죽하면 원 역사에서 일본 육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조일동맹을 파기하고 영일동맹 체결을 이끌어 낸 이토에게 "조선을 적으로 돌리면 어찌할 생각이냐. 황군의 무적 정신력?"이라고 비아냥 댈 정도이다.5.2. 해군
원 역사와 달리 조슈 번이 해군을 주도하고 있다. 막연히 우리는 섬나라니 해군만 기르면 될 것이다 여겼는데 조선의 상승세가 그칠 줄 모르고, 그만큼 부단히 군비도 늘어나 새로운 동맹국인 영국이 제공한 원조와 차관으로 이것저것 사들이고 자체적으로 건조하고 나서야 조선 수군의 총 톤수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청년학파 교리를 수용하여 조선이 운용하는 전함을 견제하기 위해 최신 어뢰정도 여럿 구비했다.- 아즈마함(東艦): 철갑선. 남북 전쟁이 끝난 후 아메리카 연합국으로부터 사들인 전함이다.
- 후소(扶桑): 철갑선. 아즈마함보다 한 세대 뒤의 전함이다.
- 류조(龍驤): 구형 코르벳. 독도 인근 해역에서 조선 수군의 양원호와 전투를 벌였다.
- 부시(富士): 전노급 전함. 일본 해군 최대 전력이다.
6. 인물
자세한 내용은 고종\ 문서 참고하십시오.7. 개변된 역사
전반적으로 해외 침략 의식이 매우 약해지고 정한론은 커녕 조선의 힘을 과대평가해서 안절부절 못하는 등 현실의 당대 일본에 비해 매우 얌전한 국가가 되었다. 그래서 현실의 '대일본제국'이 아니라 1960~70년대 내부 안정과 경제 발전에 치중한 '경제동물' 일본에 가깝다는 독자들의 평가가 있다.- 수신사 & 조일수호조규
통신사 파견을 조공으로 왜곡한 '야도 마사요시'[4]를 규탄하고 다시는 이런 망령된 말로 두 나라의 신의를 해치는 자들이 나오지 않도록 촉구하기 위해서 수신사 파견이 원 역사보다 9년이나 빠른 1867년에 이루어졌고 이와 함께 흔히 강화도 조약으로 알려진 '조일수호조규'가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독소 조항 없이 조선과 도쿠가와 막부 사이에서 체결됐다. 그런데 조일수호조규에 '조일 양국은 자립국이되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았으므로) 자주국은 아니다.'라는 문구가 들어가서 이에 격분한 아이즈 번 존황양이파 낭인들이 테러를 감행하였고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수신사가 타고 온 제너럴 셔먼호가 침몰하며 미국이 자국 선박을 빌미로 개입할 문제로 번질 위험이 생겼다. 이로 인해 조약 재개정 문제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결국 일본은 대외적으로 자'주'국이 아니라 자'립'국이 됐다.
- 반쪽짜리 신정부 출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으킨 혼란으로 막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지지하는 좌막 세력이 웅번을 때려잡아야 한다는 의론 일치를 보아 동국 번들이 막부군의 연전연패에도 기세를 올리며 한데 뭉쳤고 조정은 끝까지 중립을 지켜 토막파가 관군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또한 에도 무혈개성에 큰 역할을 한 가츠 가이슈가 조선 공사로 가버리고 교체된 육군총재가 강경파 에노모토 다케아키의 설득에 못이겨 결사 항전을 결심하여 에도 무혈개성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나라를 반절로 쪼개는 내전을 벌일 각오까지는 되어있지 않았던 웅번들이 에도성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하여 보신전쟁이 무승부로 끝이 났다. 그리하여 공식적으로 출범한 신정부는 말이 하나의 정부지 사실상 웅번들이 우세하되 주도하지 못하는 서부와 요시노부가 공경들의 중재를 받아들여 늦게나마 쇼군직을 버리고 막부를 해체했음에도 여전히 도쿠가와의 접시꽃 문양이 휘날리는 동부로 나뉠 수밖에 없었다.
- 도쿄천도 ×
구 좌막파 세력이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어 신정부가 천도를 포기했다. 그래서 수도가 여전히 교토이며 '도쿄'가 아니라 '에도'이다.
- 류큐 왕국 병합 포기
원 역사보다 2년 빠른 1872년에 대만을 침략했지만 청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지도 못했고 코치웨카타 초조가 끌어들인 조선의 중재로 대만의 경작권을 얻는 대신 류큐 병합을 포기하기로 했다.
- 메이지 6년 정변 ×
원 역사보다 빠른 조선의 근대화, 사이고 다카모리의 낙향, 조일수호조규의 존재로 인해 메이지 6년 정변 이른바 정한론 정변이 일어나지 않았다.
- 지조개정
동국 세력의 저항으로 원 역사보다 2년 늦게 지조개정이 실시되었다.
- 자유민권운동
원 역사에서는 오쿠보 정권에 대항한 친 사이고 유신지사들의 장외투쟁 성격이 강했으나 본작에서는 신정부가 군대 대신 민의를 모아 옛 좌막파 번들을 흔들어보겠다는 심산으로 사람을 풀어 자유민권운동을 주도했다. 바로 이때 조선이 뜬금없이 '선의'로 의원제를 도입할 생각이라면 어떻게든 도와줄 용의가 있다고 제안하였고 그 결과 자유민권운동을 두고 동국 땅의 여론이 두 동강났다. 신정부 입장에서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역시 '선의'로 두 쪽 난 여론을 봉합하는 데 도울 수 있을 만큼 돕겠다는 조선의 개입을 끽해야 에도에서 연설 한두번 하고 말 것이라고 생각하여 허용하면서 일이 더 꼬이기 시작했다.
조선의 선비들은 통신사 보내던 시절의 인연을 내세워 지번사들을 찾아가 일일이 의원제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 당을 하나 꾸리게 되면 무가의 입장에서도 이익이 된다는 논리로 설득하였는데 오쿠보와 이토 히로부미의 기대와 달리 번주를 몰아낼 생각까지는 없었던 호농과 부민들이 이를 그럴듯하다 여기고 옛 다이묘나 대가의 당주 등 각 번에 확실히 뿌리내린 '어르신'들을 찾아가 신정부라 해 보았자 '외지인'이니 자신들에게 조금 양보만 해 주면 영영 번의 웃어른 자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협조하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한 것이다. 인구로 보나 석고로 보나 의회가 설치되면 동국의 지분이 높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니 당초 승부를 걸어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요시노부를 비롯한 옛 좌막파들이 마음을 바꾸어 신정부에 합류하기 시작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동서의 분단이 그럭저럭 봉합되었지만, 실역사에서 있었던 과감한 개혁은 불가능해졌다.
- 홋카이도 독립 및 연방국가화
바로 위에서 설명한 요시노부의 변심에 절망한 원 역사의 에조 공화국 초대 대통령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무사들만의 나라를 세우고자 도쿠가와 가문 밑에서 버티다 보면 신정부가 제풀에 못이겨 내각과 군부에 자신들의 자리를 마련해주리라 여겼던 옛 좌막파의 하급 사무라이들과 함께 요코하마 항의 옛 막부 해군을 한데 그러모아 쓸 만한 함선이란 함선을 모두 끌고서 홋카이도로 건너가 마츠마에 번을 그대로 집어삼켜 독립을 선포하였다.
원 역사처럼 막부의 잔당 정도만 데리고 변방에서 최후의 저항을 벌이는 것이었다면 봉쇄 정도만 해두어도 알아서 무너졌겠지만, 본작에서는 쓸데없이 먼저 발전한 언론 때문에 북상하는 함대에 올라탄 무사만 해도 수백에 삿쵸 동맹의 전횡에 실망한 규슈의 사족들까지 합류하여 그 규모가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에노모토가 자치권만 주면 독립하지 않고 구성국으로 남겠다며 먼저 고개를 숙여 더 이상 적이 늘어나면 곤란했던 신정부가 이렇게 된 이상 홋카이도 개발을 미끼로 러시아 자본이나 먹어보자는 생각으로 에노모토의 공화국 건국을 승인하였다. 단 대일본국 구성국의 이름에 오랑캐(에조)가 들어가면 이상하니 국명을 홋카이도 공화국으로 바꾸었고 일본의 국명도 일본 연방으로 바뀌었다.
홋카이도 공화국은 현재 아시아개발은행을 통해 러시아 자본이 들어오고 원 역사처럼 개척민도 받아들여 착실히 성장중이다. 원 역사에서 일본의 홋카이도 개척은 한족의 만주 개척, 미국의 서부 개척에 비할 만한 규모의 인원이동이었다.
- 키오이자카의 변 ×
신정부에 불만을 품은 구막부 출신 하급 사족들이 모조리 홋카이도 공화국으로 건너갔으므로 오쿠보가 암살당하지 않고 장기 집권하고 있다.
- 의회 설치
원 역사의 제국의회보다 대략 10년 빨리 개원했다. 이름은 조선을 따라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국회'. 선거는 아직 백성들에게 이르다는 판단에 각 번에 고쿠다카에 따라 의원들을 적게는 둘, 많게는 다섯을 추천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석고가 높던 동국의 우세가 이뤄진다. 한편 국회 개원이 빨라지면서 이토 히로부미의 입헌정우회 창당도 앞당겨졌다. 그리고 전 쇼군 요시노부의 지원에 힘입어 민권운동 세력이 주축이 된 애국공당이 원내 1당을 차지하였다.
- 신선조
옛 좌막파 세력이 건재하여 여전히 동부에서 그 이름을 지키고 있으며 도호쿠의 경찰 역할을 하고 있다.
- 조일동맹 체결
이토 히로부미가 친조노선의 선봉장 요시노부를 실각시키기 위하여 원교근공으로써 정한을 이룩해야 한다고 선동하는 책자 '일본책략'을 유포하였다. 그런데 새로 만든 국제(헌법)에 따라 대책회의를 참관하던 귀남이 듣자하니 사건 수괴가 '나쁜놈' 이등박문이라, 혹시 그놈이 나쁜놈인 것 아니냐고 묻고 신하들도 간신이 권력을 잡기 위해 타국과 마찰을 유발하는 참람된 일이 있을 법하다고 생각해 뭔지 몰라도 생각대로 안되게 진행하는 방안을 떠올린다. 그것은 바로 조일간에 군사동맹을 맺는 것.
이는 결박동맹이라 하여 가상적국간에 군사동맹을 맺어 서로의 군사활동을 감시함으로서 안전을 확보하는 방법 중 하나다. 물론 자신의 군사활동도 제약되지만 애초에 전쟁할 생각 자체가 없는 조선에게는 전혀 손해가 없고, 당시 조선은 육군 20만 명을 보유하여 일본의 세 배나 되니 알려져도 무서울 것도 없었다(...). 그리고 거절할 명분이 없었던 오쿠보 내각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조일동맹이 성립되었다. 그러고 나자 이번엔 극동의 양대 개화국이 군사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에 청국과 러시아가 기겁을 했지만.
한편 불장난이 거하게 실패한[5] 이토는 행동을 같이 하던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조슈 번에게 해군을 넘겨주겠다는 오쿠보의 약속에 넘어가 자신을 팔아버려 권력을 잃고 미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나게 됐다.
- 육군 육성 잠정적 포기
20만 육군을 보유한 조선과 동맹을 체결한 것을 계기로 육군을 잠정적으로 포기하고 강력한 해군을 육성하여 강병을 이루기로 한다.
원 역사와 달리 사쓰마 번이 아니라 조슈 번이 해군의 주도권을 잡았다.
- 오쓰 사건 ×
시베리아 철도 기공식이 앞당겨졌고 홋카이도 공화국을 매개로 일찍부터 교류하여 반러 감정이 강한 것도 아니라서 일어나지 않았다.
- 조일동맹 파기 및 영일동맹 체결
조일동맹을 파기하고 원 역사보다 대략 10년정도 앞선 1890년에 영일동맹을 체결한다. 애초에 조일간에 "여차해도 서로 싸우는 척만 해서 극동의 평화를 지키자"는 밀약을 맺어두었기에 조선에서는 영국에 소개문을 보내 영국을 당황시켰지만 어쨌건 극동에 파트너가 생기는 게 나쁜 일일 리는 없으므로 받아들였다. 또한 조선과의 동맹파기로 인해 입헌정우회 주도로 육군 육성에 들어간다.
- 징병제 도입
영일동맹을 계기로 신식 무기를 도입하는 등 군대를 더 강하게 키울 수 있게 되었기에 입헌정우회의 오쿠보 도시미치가 애국공당의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사정하여 원 역사보다 몇십년 늦었지만 징병제를 시작했다.
- 청년학파 군사 교리 도입
처음에는 막연히 섬나라니 해군만 기르면 될 것이다 여겼는데, 조선의 상승세가 그칠 줄 모르고 이에 따라 그만큼 부단히 군비가 늘어나 영국이 제공한 원조와 차관으로 최신 어뢰정을 여럿 구비했다. 조선의 거함은 덩치만 크고 내실은 없으니 어뢰를 이용하면 충분히 격퇴할 수 있다는 말을 믿고 도입한 것이다.
- 헌법 1장 1조
애국공당 인사들의 진언을 통해 헌법이 얼마나 중한지 깨달은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다른 것을 양보해가며 끝까지 저의 뜻을 관철시켜 1장 1조가 "대일본연방은 일본 국민의 총의에 입각하여 만세일계의 천황을 통치와 통합의 상징으로 삼는다."가 되었다. 만세일계는 대일본제국 헌법 1조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나머지는 일본국 헌법 1조를 기반으로 했다.
- 폐번치현
요시노부가 헌법 1장 1조를 위해 양보한 것 중 하나가 폐번치현이다. 이로써 원역사보다 20년 가량 늦게 폐번치현이 이루어졌다.
- 제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삿쵸 동맹의 필사적인 저지로 원 역사보다 7년 늦게 치러진 1회 총선에서 애국공당이 신승하여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 30년만에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 아시오 광독 사건
일본 공산당이 광독 문제를 제기한 다나카 쇼조에게 적극 호응하여 1897년에 제련량을 줄이고 농사에서 손해본 이들에게 보상해주는 방향으로 일이 잘 풀렸다.
- 우측통행 도입
아주대회를 계기로 좌측통행에서 우측통행으로 제도를 고쳤다.
- 나가사키 아주대회 개최
일본 나가사키에서 제1회 아주대회가 열렸다.
- 동해-일본해 명칭 분쟁의 소멸
류큐 왕국과의 국경 분쟁이 종료된 뒤 오가사와라 제도와 같은 남쪽 섬들에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서태평양의 일본 근해 지역을 일본해[6]로 부르기로 했다. 원 역사 동해 해역은 조선에서 조선해[7]라고 부르게 되면서 이후 이 해역의 명칭을 두고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사라졌다.
- 아이누 자치구 설정
아무리 막부 잔당이나 기타 개척 행렬이 가득 몰려갔다고 해도 미개척지인 홋카이도에서 믿을 만한 사람은 적고 행정은 어려워 토착민인 아이누를 마냥 무시할 수 없어 홋카이도 공화국 북쪽에 자치구 몇 곳을 두었다.
- 만국연합(유엔) 평화유지이사회 이사국 지위 획득
대전쟁 종전 이후 유럽, 소련, 신대륙을 제외한 '나머지 세계'에 분배된 이사국 자리 중 하나를 조선의 추천으로 차지하였다. 원 역사 안보리 상임이사국과 달리 임기제이지만, 원 역사 G4를 생각해보면 감개무량.
- 인간선언
원 역사에선 패전에 의한 GHQ의 강요로 이뤄진 덴노의 인간선언이 여기서는 다이쇼 덴노가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게 하는 궁내부와 내각의 인물들에 대한 견제책으로 시작되어[8] 대공황이 일어났을 때 귀남이 했던 노변담화와 같은 형태로 '같은 나라의 같은 사람으로서, 이해를 함께하고 평안과 곤고 나누면서 모두 용왕매진 하자'하는 요지로 국민에게 전해지게 된다. 이 인간선언은 일본 전체에 희망을 복돋아 주면서 일본이 대공황을 동아시아 3국 중 가장 빨리 벗어나게 한 원동력이자 신의 나라임을 내세워 다른 아시아와 거리를 두던 일본이 아시아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1] 내무경 → 초대 내각총리대신[2] 첫 민선 내각총리대신[3] 물론 조선과는 각자의 동맹국이 충돌시 우리는 싸우지 말고 걍 충돌하는 시늉만 하자고 합의는 봤다.[4] 원 역사에서도 같은 주장을 신문에 실었다.[5] 작중 묘사로는 불장난을 하다 보면 연기에 놀란 이웃이 대문 박차고 뛰어들어 물을 퍼붓기도 하는 법이다.[6] 원 역사의 필리핀해로 추정[7] 아마 황해처럼 국제표기일 때 자주 쓰는 명칭이고, 국내에서는 여전히 친숙한 동해 표기를 쓸 가능성이 높다.[8] 정확히는 조선에 가려 했으나 궁내부와 내각이 계속 반대해서 홧김에 "아잇 싯팔 천황도 사람이라고!"라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