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 국민정부 6대 행정원장 | ||
한문 | 孔祥熙 | |
한국식 독음 | 공상희 | |
영문 | Kung Hsiang-hsi | |
호 | 자연(子淵) | |
자 | 용지(庸之) | |
출생 | 1881년 9월 11일 | |
청나라 산서성 태곡현 | ||
사망 | 1967년 8월 16일 (향년 85세) | |
미합중국 뉴욕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
학력 | 예일 대학교 | |
직업 | 기업인, 정치가 | |
가족 | 아내 쑹아이링 | |
행정원장 재임 기간 | 6대 1938년 1월 1일 ~ 1939년 12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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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정치인, 기업인, 경제관료.2. 생애
1881년에 중국 산시성(山西省) 진쭝시(晋中市) 타이구현(太谷縣)에서 출생. 공자(孔子)의 75대손으로 태어나, 청나라의 관리이며 유학자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릴적부터 유학을 배웠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가 1905년에 오하이오주의 오벌린 칼리지를 졸업한 후, 다시 예일 대학교에서 광물학을 공부하여 1907년에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아이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고 있던 중 신해혁명을 맞게 되는데, 이때 고향의 유지들과 함께 지역의 질서를 잡는 조직을 만들어 운영했다. 1912년 영국의 아시아각패화유공사(亞細亞殼牌火油公司)로부터 산시(山西)성의 등유 전매권을 따내어 돈을 벌었다. 1913년에 일본의 초빙으로 재일본 중국기독교 청년회의 총간사로 취임했다. 도쿄에 주재할 당시 쑨원(孫文)이 이끄는 중화혁명당의 경비제공과 쑨원의 문서처리 임무를 관할하다가, 쑨원의 영어비서로 일한 쑹아이링(宋靄齢)을 알게 되었다. 1914년에 일본에서 쑹아이링과 결혼하고 이듬 해 산시성으로 돌아가 이전처럼 교육과 상업에 투신하였다. 동시에 산시의 군벌이던 옌시산(閻錫山)의 막하로 들어가 사업을 더욱 확장시켰다.
그 후 산시독군겸 성장(山西督軍兼省長)이던 옌시산(閻錫山)의 추천으로 등용되어 1923년에 쑨원의 대리인으로 북방군벌들과 연락을 취했다. 1925년 3월에 쑨원이 베이징에서 사망할 때, 쑨원의 임종을 지키며 유언을 들은 증인 중 한 명이 되었다. 1929년 3월, 국민당 3차 당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그 뒤로도 중화민국의 상무장관 (1928년 ~ 1931년), 재무장관 (1933년 ~ 1944년) 등 주요 직위를 역임했으며, 1932년 유럽과 미국으로 시찰을 떠났다. 1933년 4월에 귀국한 후 중화민국 중앙은행 총재에 취임했고 그 해 10월에 행정원 부원장도 겸직했다. 재무장관으로 있을 때 세제개혁을 실시하여 재정면에서 지방의 조절과 민중의 곤궁을 조율하려 했다. 동시에 은행제도의 개편에도 나서서 증세를 통해 중국은행과 교통은행을 국민정부 재정부의 관할하에 두었다. 1935년 처남 쑹쯔원과 함께 법폐개혁을 실시하고, 주미 중국대사 스자오지를 통해 중미은협정 체결을 감독했다. 1935년 11월 1일 왕징웨이 저격 사건이 일어난 이후 행정원장 대리를 맡았다.
1936년 7군자 체포 사건의 수습과 제6차 초공작전의 독전을 위해 장제스가 시안에 가려 하자 반대했으며, 서안 사건 발생하자 장제스를 구출할 것을 주장했다. 1937년 4월 천사오콴 등 해군 장교들과 함께 베를린을 방문하여 아돌프 히틀러과 만나는 등 유럽을 순방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명목상 조지 6세의 대관식을 축하하는 특사로 다시 유럽에 파견되었는데, 실제 목적은 장제스를 위해 전쟁물자를 확보하고 몇몇 나라로부터 차관을 끌어오는 것이었다.[1] 11월에 귀국하여 트라우트만 공작을 지지했으나, 일본이 점령지를 모두 일본의 괴뢰국으로 만들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자 주전론자로 돌아섰다. 1938년 평화 회담 대표로 방일이 계획되었으나 취소되었다.
1938년 행정원장에 임명되었으나 1939년에 해임되었다. 이후 행정원 부원장 직을 유지하였으나 거듭된 부패와 사치 사건으로 물의을 일으켰으며, 1945년 6월 중일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로자먼드 스캔들과 미국 달러 공채 뇌물 사건에 휘말려 장제스에게 문책을 당한 후 사임했다. 1946년, 국민정부가 난징으로 환도하자 정치적 재기를 시도했다. 1947년 쑹아이링이 수술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는데, 이때 쑹아이링이 쿵샹시에게도 미국행을 권해서 같이 뉴욕으로 가서 리버델리의 별장에 머물며 은행업을 경영했다. 1948년 재정경제긴급처분령을 감독하기 위해 상하이에 파견된 장징궈가 두웨성의 아들 두유병을 체포하는 일이 생겼는데, 두웨성은 아들을 구하기 위해 쿵샹시의 아들 공영간이 황금밀수업을 한다는 것을 일러바쳤다. 이 때문에 공영간은 장징궈의 손에 사형당할 뻔했으나, 콩샹시의 처제이며 공영간의 이모인 쑹메이링 등에게 탄원하여 겨우 구해낼 수 있었다.
이후 국부천대를 단행한 중화민국이 안정상태에 접어들고 리쭝런의 부총통 탄핵이 있고 실시된 1954년의 제2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에 부총통으로 출마하려 했다. 그러나 장징궈가 그를 낡은 사회의 권세 있는 집안이라고 극심하게 비판하자, 대만에서 자신이 설 자리가 없음을 알고 정치의 꿈을 완전히 단념하였다. 이후 중화서국 이사장이라는 명예직을 지내다가 1967년 8월 16일 향년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 가족
아내 쑹아이링은 여동생 둘이 있는데 큰 여동생의 남편은 쑨원이며 작은 여동생의 남편은 장제스이다.2남 콩링제는 영국 육사에서 공부했다. 이후 미국에서 석유사업으로 성공했다고 알려져 있다.
2녀 콩링웨이는 남장 매니아로 유명하다.
4. 매체에서
호이4 중화민국 정치고문으로 등장한다. 산업전문가 특성을 가지고 인프라 시설, 민간공장 건설속도에 10%의 버프를 준다. Eight Years' War of Resistance 모드에서는 소비재 소모를 5% 감소시키지만 특유의 축재로 인한 시민들의 반발을 사서 사회주의 지지를 올려주는 너프가 있었다. 이후 패치를 통해 국가안정도와 전쟁지지도를 각각 5% 하락시키고 대신 산업생산을 10% 늘려주며, 법폐개혁과 독일과의 외교를 위해 필요한 인물이 되었다.그외에 독일에서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을 소환시킬 것인지를 묻는 선택지가 뜨면 이상하게도 히틀러와 담소하는 쿵샹시의 사진이 뜬다. 국민정부 시기 독중관계를 상징하는 사진이기도 하고 시기도 전쟁 직전이니 아주 이상할 건 없는데,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됐다는 이벤트에 화기애애할 때 사진을 띄워놓으니 좀 건성으로 고른 티가 난다.
1997년 개봉된 홍콩 영화 <송가황조>에서는 이재에 밝으면서 남의 기분을 잘 맞춰주는 인물로 등장하여, 동서 사이인 쑨원 및 장제스 아래에서 일하며 이런저런 조언을 한다. 다만 영화 속 주인공이 쑹아이링, 쑹칭링, 쑹메이링 세 자매라서 쿵샹시의 비중이 크지는 않다.
5. 주요 경력
난징 국민정부 역대 행정원장 | |||||||
4대 | → | 대행 | → | 5대 | |||
왕징웨이 | → | 쿵샹시 (1935년 11월 1일 ~ 1935년 12월 16일) | → | 장제스 | |||
5대 | → | 6대 | → | 7대 | |||
장제스 | → | 쿵샹시 (1938년 1월 1일 ~ 1939년 12월 11일) | → | 장제스 |
난징 국민정부 역대 행정원 부원장 | |||||||
6대 | → | 7대 | → | 8대 | |||
쑹쯔원 | → | 쿵샹시 (1933년 11월 4일 ~ 1935년 12월 11일) | → | 쿵샹시 | |||
7대 | → | 8대 | → | 9대 | |||
쿵샹시 | → | 쿵샹시 (1935년 12월 11일 ~ 1938년 1월 1일) | → | 장췬 | |||
9대 | → | 10대 | → | 11대 | |||
장췬 | → | 쿵샹시 (1939년 12월 11일 ~ 1943년 9월 13일) | → | 쿵샹시 | |||
10대 | → | 11대 | → | 12대 | |||
쿵샹시 | → | 쿵샹시 (1943년 9월 13일 ~ 1945년 6월 4일) | → | 웡원하오 |
6. 참고 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대만현대정치사 상, 장성구, 지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