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불가리아 귀국 후 소피아 국제공항에서 국민들의 환호를 받고 있는 시메온 2세 전 불가리아 국왕
1. 개요
군주제 몰락 이후에 국내에서 추방되어 국외로 망명한 구 왕가의 구성원들이 국외 망명 생활을 했다가 모국으로 돌아오는 일.군주제 폐지를 주도하여 정권을 잡은 세력들이 정치적 권력을 잃고 몰락하여 정권이 바뀌었거나 혹은 군주제가 없어지고 공화제가 들어서면서 후일 수립된 정부가 완전히 자리를 잡고, 공화제 수립 초기 왕정 폐지를 주도했던 정치권의 1세대, 2세대 정치인들이 다 죽고 자연스레 세대가 교체되면서 왕족의 귀국을 허용하는 경우가 있다.
대체로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 등 정체가 바뀐 나라들에서 이전 옛 지배층들에 대한 정치적 화합과 이해관계의 득실을 명분으로 입국 금지를 없애고 귀국을 허용하거나, 왕정폐지와 공화정 성립을 주도했던 정치권의 구 세력이 사라지거나 몰락하고, 비교적 책임소재가 낮은 신진 지배층에 의해서 허가/승인되는 경우들이 많다.
2. 사례
2.1. 귀국이 허용되어 모국으로 돌아와 정착해서 사는 경우
프랑스 제3공화국은 오를레앙 왕조의 수장인 파리 백작 필리프 도를레앙의 딸 마리 아멜리에와 포르투갈의 태자 카를루스의 결혼식 연회가 성황을 이루는 것을 보고 왕당파의 세력에 위협을 느끼고 1886년 영국으로 추방시켰다. 이 조치는 제3공화국이 붕괴된 이후인 1950년에야 해제되었는데, 이 때 오를레앙 왕조의 당주는 필리프의 증손자인 앙리[1]였다.포르투갈의 경우 1910년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된 후 한동안 구왕족들의 입국이 금지되었으나,[2] 살라자르 정권 시기이던 1950년에 입국금지가 해제되어 당시 브라간사 왕가의 수장이었던 두아르트 누누와 그 가족들이 귀국할 수 있었고 현재 브라간사 왕가 구성원들은 포르투갈에서 생활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6년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던 이탈리아의 경우 구 사보이아 왕조 일원에 대해 무솔리니 파시즘 독재정권과의 연계를 문제 삼아 이들을 전부 포르투갈과 스위스, 미국 등 국외의 타 서방권 국가들로 추방시킴과 동시에 입국 금지 조치를 공화국 신헌법에까지 연동시켜가며 왕가의 입국을 1950년대와 60, 70, 80, 90년대까지 장장 긴 세월동안 막았다가 1990년대에 들면서 구 왕족들을 용서하자는 주장과 여론들이 당시 지식인들과 국민들 사이에서 제기되어 1999년 이탈리아 정부에서 구 왕가의 일시적 방문을 허가했고, 마리 조제 왕비가 2001년 사망한 후, 2002년 7월에 국회 하원에서 공화국 수립 이래 수십년 넘게 지속되어 온 사보이아 왕조에 대한 입국 금지 조처를 폐지하고 이탈리아 영구 귀국을 허용해주자는 법안을 통과시켜 이탈리아 국회에서 이 법안을 승인, 가결하면서 망명 중이던 사보이아 왕조 남성들의 이탈리아 귀국이 허용되었으며, 동년에 헌법 수정을 통해 구 사보이아 왕가의 입국을 금지하는 헌법의 조항마져 삭제했다. 현재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디 사보이아 등 사보이아 왕조의 구성원들 대부분이 2002년과 2008년에 이탈리아로 돌아와 이탈리아 공화국의 평범한 시민권자로 생활하고 있다.
지중해 바다 건너 이탈리아의 옆나라인 그리스 또한 1967년 군부 쿠데타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면서 옛 글뤽스부르크 왕가 왕족들이 영국 등으로 망명을 떠났고, 1970년대 군부 독재가 몰락하고 민주화가 된 직후에도 귀국하지 못하다가 2013년에 안토니오 사마라스 당시 그리스 총리가 구 글뤽스부르크 왕실 일가에 대한 영구 귀국을 허용하면서 그리스 귀국이 이뤄졌다. 현재 이들은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에서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는 민주화 이후의 역대 그리스 총리와 대통령들의 정책실패와 부정부패 등으로 인해 국민여론 내에서 군주제 복귀 지지 여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3] 정치권의 현행 공화국 헌정 수호 의지가 강하고 그리스인의 전반적인 여론도 공화정 유지가 훨씬 우세하다.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도 제2차 세계 대전 후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산당에 의해 공산정권이 성립되면서 시메온 2세 당시 전 불가리아 국왕과 미하이 1세 전 루마니아 국왕 등을 비롯한 구 왕가 사람들이 국외로 추방되어 스위스와 스페인에서 망명생활을 했다가 공산당 정권이 무너지고 각각 모국들이 민주화되면서 귀국이 허용되었다. 특히 시메온 2세의 경우 정치에 뛰어들어 공산체제가 무너지고 민주화된 불가리아 총리가 되기도 했으며 현재 이들 모두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에서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랫나라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현재 국민여론 내에서는 군주제 복귀 지지 여론이 상당하지만 정치권에서는 현재의 공화제 헌정 수호를 주장하며 군주제 복귀 주장에 대항하고 있다. 루마니아의 경우는 불가리아에 비해 입헌군주제 도입을 지지하는 여론이 정치권에서도 높은 편이지만, 어려운 경제 상황때문에 직접적인 왕정복고 논의가 계속 발목을 잡히는 상황이다.
몬테네그로는 유고슬라비아의 해체 이후로 구 왕가였던 페트로비치녜고시 왕조가 귀국을 허락받고 왕족들 대부분이 실질적 수도인 체티녜[4]에 정착해서 거주하고 있다. 이쪽은 몬테네그로 정부로부터 비주권군주제 형식으로나마 실질적인 국가원수 대접을 받아서, 대통령과 동일하게 공무를 수행하며, 정부에서 왕위 계승에 대한 법률을 제정하거나 체티녜에 새 왕궁을 건설하는 등, 사실상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상태다. 그러나 여기도 루마니아의 경우처럼 경제 문제가 발목을 잡은 탓에 입헌군주제로의 본격적인 이행은 정치권에서 망설이고 있는데다[5], 국민들과 정치권에서 군주제 부활에 대한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음에도 정작 그 수혜자가 될 페트로비치녜고시 왕조 측에서 왕정복고 논의에 대해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는 탓에, 이에 대한 진전이 제대로 되지는 않는 상태다.
아프가니스탄 역시 과거에는 왕국이었다가 1973년 모하마드 다우드 칸 전 대통령이 일으킨 쿠데타로 인해 왕정이 폐지되면서 모함마드 자히르 샤 전 국왕 등 구 바라크자이 왕가 사람들이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망명객으로 떠돌다가 2001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탈레반 정권이 붕괴되고 아프가니스탄에 새 정권이 수립되면서 구 왕족들의 귀국이 허용되어 자히르샤 전 국왕 등 구 바라크자이 왕가의 직계 인사들이 아프가니스탄으로 귀국하였다. 다만 최근 2021년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철수를 결정하고, 탈레반과 정부군의 내전이 격화되는 등 정정이 불안정해지면서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다시 해외로 망명해야하거나 탈레반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게 될 경우 성씨와 이름 등을 바꾸고 신분 세탁해야 되지 않겠냐는 주장이 구 바라크자이 왕족들 사이에서도 나오고 있는 지경이다. 하지만 2021년 탈레반에게 정권이 넘어간 현재 2007년에 노환으로 서거한 자히르 샤 전 국왕의 유가족 등 구 왕가 사람들 중 일부가 탈레반 정권으로부터 보복을 받지 않고 아프가니스탄 국내에서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6] 그러나 현 정치권의 인사들 대부분이 노골적으로 적대하다 못해 왕정폐지 후 서방으로 망명한 팔라비 구 왕족들에게 궐석재판에서 내린 사형선고를 지금까지도 유지하며 팔라비 구 왕족들이 모국으로 귀국하면 정치범으로 사형시키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이웃국가인 이란과는 달리, 아프가니스탄은 현재 탈레반 정권이 현 이란 정부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원리주의에 근거한 신정제를 펼치고 있음에도 이전 바라크자이 구 왕족들을 적대하거나 사형시키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탈레반 정권의 일부 고위층 인사들 중에는 자히르 샤 전 아프가니스탄 국왕을 위인으로 존경하거나 바라크자이 왕조의 왕정 시대를 고평가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7]
대한민국의 경우, 영친왕 일가와 덕혜옹주 등의 귀국 사례를 들 수 있다. 광복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구 대한제국 황실 가의 귀국을 일절 허용하지 않았고,[8] 결국 제1공화국 시기에 이들은 귀국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5.16 군사정변 이후 구 황실에 어느 정도 우호적이었던 박정희 대통령[9]이 집권하고 이들에 대한 귀국 및 대한민국 영구 정착을 허락하고 나서야 구 황실 일원들은 고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이해원을 포함한 일부 황족들은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거나 최소한 황실 재산을 반환해줄 것을 요구하지만, 군사정권을 상대로 국민들이 피말리는 투쟁을 벌인 끝에 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던 역사가 있는지라서, 대부분의 한국인들 사이에서 황실의 복고 시도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반응을 보인다[10].
2.2. 귀국이 이뤄지지 않거나 못하고 있는 경우
1952년 왕정이 폐지되고 군부의 주도로 공화제가 수립된 이집트의 경우 나기브, 나세르 정권 시기에 파루크 2세 전 왕을 비롯한 옛 무하마드 알리 왕조 인사들을 국외로 모두 추방하고 입국 금지 조처를 내렸다가 나세르 대통령 사망 후 1970년대와 80년대에 사다트 대통령과 무바라크 대통령이 입국 금지를 모두 해제하고 시민권을 부여하는 등, 귀국을 허가했지만[11] 현재까지도 구 왕족들이 이집트로 돌아와 이집트에 정착하지 않고, 스위스 등 유럽국가들에서 거주하고 있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집트 정부에서 왕가에 대한 입국금지를 해제했기에 이들은 관광 및 정부 행사 참여 목적으로 이집트를 매년 방문하고 있다.이집트의 이웃나라이자 1951년 이탈리아로부터 독립 당시 왕국으로 독립했다가 1969년 카다피의 군부 쿠데타로 왕정이 폐지된 리비아의 경우 2011년 아랍의 봄으로 카다피 정권이 붕괴되면서 카다피 정권 시절의 국기를 폐기하고 왕국 시절에 사용하던 이전의 적흑녹 가로 삼색기 형태의 국기를 다시 리비아의 국기로 제정하기도 했으며, 카다피가 죽었으니 이제 카다피의 쿠데타로 축출되어 미국, 이탈리아 등 서방 국가들에서 망명/거주 중인 알 세누시 구 왕가를 귀국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가끔씩 나오고 있다. 그러나 카다피 정권 붕괴 이후 리비아에서 정파 간 갈등과 내부 혼란이 지속되면서 이웃나라인 이집트처럼 귀국 허용이나 시민권 부여와 같은 수준의 정치적 논의는 크게 이뤄지지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카다피 정권 붕괴 후 리비아 내 정국 혼란이 극심했을 당시 리비아 내부에서도 미국에 망명 중인 이드리스 1세 전 국왕의 조카의 아들인 모함메드 알 세누시를 리비아로 귀국시켜 왕정복고를 추진하자는 주장이 나온 적도 있었다.#
아프리카의 르완다와 부룬디 역시 벨기에의 식민화 이전에도 여러 왕국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벨기에의 식민지배에서 독립 후 왕국으로 독립했지만 이마져도 벨기에가 식민지배와 독립 이후 해당국들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 행사를 위해 앉혀놓은 이들이었기에 왕가에 대한 지지는 높지 않았고, 두 나라의 왕가 모두 르완다의 왕가는 투치족 부족장 출신이었고, 부룬디의 왕가는 후투족 부족장이었는데 이들 모두 해당국의 후투족과 투치족을 억누르며 통치하면서 내부 부족간 갈등이 증폭되어 정치적 혼란을 겪다가 결국 왕국으로 독립 후 왕정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다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국가들인 레소토나 에스와티니의 왕실과는 달리 왕정이 끝내 유지되지 못하고,[12] 왕가들이 국외로 추방되면서 공화국이 되었다. 지금까지도 이 두 나라의 망명 구 왕가들은 1974년 군사쿠데타로 제정이 폐지된 이후에 70, 80년대 당시 멩기스투 군사 정권 치하에서 귀국하지 못하다가 1991년 멩기스투 정권이 붕괴된 이후에 귀국한 에티오피아의 솔로몬 구 황가처럼 르완다와 부룬디로 귀국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현재 르완다의 대통령인 폴 카가메와 부룬디의 대통령인 에바리스트 은데이시미예 모두 이 요구를 무시하며 구 왕가의 귀국을 불허하고 있다.
한편 이란의 경우 수천년 넘게 여러 왕조들이 들어서고 멸망하며 군주제가 지속되어오다 마지막 왕조였던 팔라비 왕조가 1979년 이란 혁명으로 당시 거센 반정부 시위와 군경의 유혈충돌에 권력 기반마져 무너져버린 무함마드 레자 샤 팔라비 전 국왕과 그의 일가족 등 구 왕가의 구성원들 전체가 당시 이란을 떠나 미국, 유럽, 캐나다 등 서방권으로 도주하면서 왕정이 폐지, 붕괴되었고, 혁명 이후에는 혁명을 주도한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와 알리 하메네이 등 이슬람 원리주의파 세력들이 나머지 팔라비 왕정 폐지를 주장했던 공화주의와 사회주의 정파 세력들을 모조리 숙청, 권력에서 배제하고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면서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의 공화정이 수립되었는데, 군주제가 폐지된 이후에 정치 체제가 여러번 바뀌었거나, 혹은 군주제 폐지 후 군주제 시기를 경험했던 이전 세대들이 대거 죽거나 도태되면서 국민 세대의 교차가 이뤄졌던 다른 유라시아 지역 국가들과는 달리, 이란은 현재 정치권의 지도부들 거의 대부분이 팔라비 왕정 치하에서 반정부 투쟁을 펼치거나, 이란 혁명 당시 팔라비 왕조를 축출하여 혁명을 주도했던 이해당사자들이고, 팔라비 왕조 시기를 경험했거나 그 시기에 태어났던 기성세대들이 사회의 주류로 남아있어 왕정이 붕괴되고 현재의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정부가 성립된지 사반세기가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왕정 폐지 이후의 간격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13]
그리고 팔라비 왕조 체제 하에서 비밀 경찰 사바크(ساواک, SAVAK)에게 고문과 암살을 당하거나, 왕조 말기였던 이란 혁명 직전에 많은 이란 국민들이 시위 과정에서 팔라비 왕실 휘하의 정부군과 경찰의 총격을 받고 사망하는 등 당시 팔라비 왕조의 전제 정치로 인해 사망 또는 불구자가 된 사람의 일가 유가족과 피해자 사이에서도 팔라비 왕실 일가에 대한 증오와 원한이 상상을 초월한다.[14] 그리고 이란 혁명 직후에 정권을 장악한 혁명 세력들이 국외로 망명한 팔라비 구 왕족들에게 궐석재판에서 당시 팔라비 2세 전 국왕을 비롯한 일가족 모두에게 사형을 선고했는데, 이 당시 궐석재판으로 선고된 구 왕가의 사형판결이 이란 국내에서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어 이 사형판결을 무기삼아 팔라비 왕가가 이란으로 귀국하면 사형 집행을 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이란 정부가 고수하고 있고,[15] 거기에 현재 미국에 망명 중인 레자 팔라비 전 왕태자 등 팔라비 구 왕족 중 일부가 이란 국가평의회(National Council of Iran)라는 망명 반정부 단체를 결성하여 현 이란 정부에게 대항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다, 현재 이란 정부와 팔라비 구 왕가의 사이가 서로 화합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구대천 수준으로 워낙 나쁘고, 일반 이란 국민들의 기저에도 팔라비 왕조 시대와 팔라비 왕가에 대한 역사적 반감이 아직까지도 남아있고, 이란 혁명 이후 국외에 망명중인 팔라비 구 왕가의 구성원들 다수가 망명지인 서방권에서 자살이나 약물중독, 질병, 노환으로 사망하거나, 2020년대 현재 파라 디바 전 황후나 레자 팔라비 전 왕태자 등 살아있는 구 왕족들도 대거 노령화되어 망명지인 서방 국가들에서 언제 노환이나 질병으로 타계해도 이상하지 않을 연령대에 접어들었고, 자칫 팔라비 구 왕가 인사들에 대한 사면 및 귀국 허용을 해주었다가 팔라비 왕정 시절 팔라비 2세 전 국왕에 의해 설립되어 팔라비 왕조 시대 당시 정치 탄압과 인권유린들을 자행해오다가 이란 혁명으로 몰락하여 서방 국외로 망명하거나 현재 이란 내에서 연좌제에 의해 적용되어 처벌받고 있는 비밀경찰 사바크 출신 전직 인사와 후손들도 똑같이 사면,귀국을 허용해야 하거나 최악의 경우 이란 혁명으로 팔라비 왕조를 몰아내고 성립된 현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정권의 정치적 정통성에도 상당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이 살아생전 근미래에 이란으로 귀국하거나, 이란 정부 차원에서 팔라비 구 왕가들에 대한 사면이나 귀국 허용이 내려질 가능성은 없다는 평가가 대부분이지만, 일부 이란계 미국인이나 이란계 캐나다인 등 해외 이란계 이민자들 사이에서는 이란 정부가 이란 혁명 이후 팔라비 왕가에게 선고한 궐석재판의 사형판결을 폐기/취하하고 팔라비 구 왕가들의 귀국을 허용하여 현 이란 정부와 구 왕가 간의 정치적 화해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극소수나마 존재하고 있다. 허나 이들의 주장도 해외 이란계 이민자 사회 내부에서도 별 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자세한 건 팔라비 왕조, 이란계 미국인 문서 참조) 한편 팔라비 왕조 이전의 카자르 왕조의 경우 팔라비 왕조와는 달리, 현재 이란 정부에서도 카자르 왕가에 대해서는 범죄인으로 취급하지 않는 등 정치적인 탄압을 가하지는 않고 있지만 일부 망명 중인 카자르 가의 직계 인사들 중 일부가 카자르 왕조의 왕위 계승권을 요구하며 현 이란 정부에게 맞서고 있다.
이라크 역시 본래 영국의 위임통치령이었다가 1932년 식민지배국이었던 영국에 의해 옆나라 요르단처럼 하심 가문이 통치하의 군주국을 건설하기로 합의되어 이라크 왕국으로 독립했다. 그러나 이마져도 당시 영국의 편리에 의해 세워진 왕정이었고, 수니파였던 하심 가문이 이라크 현지의 다수 시아파들을 억누르며 통치하던 형국이었기에, 결국 소수 수니파 왕실의 지배에 의한 다수 시아파 세력들의 반발과 저항이 일어났고[16] 1958년 압둘 카림 카심 장군 주도의 군부 쿠데타로 왕정이 폐지되고 파이살 2세 전 국왕등 직계왕족들이 총살당하면서 당시 영국으로 외교관 신분으로 나가있던 자이드 빈 후세인의 후손들로 하여금 현재 이라크 하심가문의 수장이 되어 영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 현재 이들은 이라크로의 귀국과 방문을 주장, 요구하고 있지만, 현재 이라크가 정치적으로 혼란한 실정이다 보니 이라크 정치권에서도 망명 구 하심 왕가에 대한 제대로 된 귀국 논의와 허용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란 혁명 당시 국외로 망명한 팔라비 구 왕가 인사들에게 궐석재판에서 선고한 사형판결을 사법부와 정치권에서 유지하며 정부 차원에서도 팔라비 구 왕가가 망명을 접고 이란으로 귀국하면 이 사형판결에 의거해 사형시키겠다는 극렬하리만치 강경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옆나라 이란과는 달리 현재 이라크 정부는 현재 영국에서 망명 거주 중인 하심 구 왕가가 귀국한다면 귀국 이후에도 범법자로 처벌하지 않고, 구 왕가 사람들에 대한 신변 안전도 보장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중이다.
2.3. 귀국이 이루어져 다시 군림하게 되는 경우
왕정복고 문서 참조.[1] 그런데 어떻게 뚫었는지(?) 1908년생인 그의 출생지는 프랑스다.[2] 특이한 점은, 이때 1834년에 제정되었던 미겔 1세의 후손에 대한 추방법을 그대로 유지한 채 별도의 법령으로 마리아 2세의 후손인 구왕족등의 입국을 금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후 마지막 국왕 마누엘 2세가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포르투갈 왕가의 직계가 끊어지는 바람에 1910년 제정된 입국 금지 법령은 사문화되었고, 1834년의 법령에 의해 나머지 구왕족들의 입국이 금지되는 상황이 두 법령이 모두 폐지되어 입국금지가 해제될 때까지 이어졌다.[3] 전쟁 패전과 연이은 민심상실로 왕정이 폐지된 이탈리아와 달리 그리스는 군부의 쿠데타에 의해 왕정이 폐지된 경우라 명분이 존재한다.[4] 공식적인 수도는 포드고리차이지만, 대통령 관저와 정부청사, 총리관저 및 국회의사당이 모두 체티녜에 있기때문에 사실상 무늬만 수도인 빈 껍데기다.[5] 다만, 몬테네그로는 총리가 실권을 행사하는 내각책임제라서 대통령은 명목상의 국가원수로만 있는지라서, 입헌군주제로 전환하는 것에 대한 절차 상의 문제는 거의 없다. 이는 왕정복고 논의가 활발한 유럽 국가들의 공통된 특징이다.[6] 다만 일부에서는 탈레반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7] 심지어 아프가니스탄은 자히르샤 전 국왕을 1973년 쿠데타로 축출/폐위시키고 공화국을 세운 모하마드 다우드 칸 전 대통령 등 쿠데타의 주도 세력들 대부분이 자히르샤 전 국왕에게 반기를 들던 왕가 출신들이었으며, 다우드 칸 역시 폐위당한 전 국왕이던 자히르샤의 사촌형에다 왕정 시절 총리직을 역임하는 등 자히르샤로부터 녹을 먹은 사람이었다. 이렇듯 왕가 인사들의 내분과 탐욕으로 왕정이 쿠데타에 의해 무너지고, 이후에 들어선 다우드 칸의 공화국 정권마저도 집권 5년 뒤인 1978년 공산주의 세력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전복되어 버리면서 아프가니스탄은 1979년 왕정에 대한 민심의 이반과 불만으로 호메이니와 하메네이 같은 당시 이슬람 원리주의 지도자들과 왕정에 불만이 터진 시민층들이 혁명을 일으켜 팔라비 왕조를 무너뜨려 왕정을 폐지시키고 당시 혁명에 참여했던 인사들의 주도로 현재의 이슬람 신정 체제 정권이 수립되어 21세기 현재까지도 팔라비 왕조를 몰아냈던 혁명 지도층과 그 후손들이 권력을 잡고 있는 이웃나라 이란과 달리 1973년 왕정이 쿠데타로 폐지된 이후에 탈레반 등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들이 등장하여 정권을 잡기 전까지 왕정 이후의 정권들만 여러 번 무너지거나 전쟁과 내전들을 수차례 겪으면서 당시 왕가 축출과 왕정의 폐지를 주도했던 권력층이 대거 사망하거나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하였다.[8] 신생 공화국이었던 대한민국 정부 입장에서는 황족의 귀국이 복벽운동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고, 또 이승만 개인적으로도 구 황실에 앙금이 있었다고 한다. 양녕대군파 후손으로 엄연한 왕가 후손인 자신을 고종이 독립협회 관련 일로 투옥을 시키고 옥에서 병을 얻는 등 고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한제국 시절 이승만을 포함한 개혁파들의 적극적인 개혁 요구에 미적지근하게 받아들였다는 점이 이승만의 불만을 초래했다.[9] 공화국의 수호자였다가 황제가 된 나폴레옹과 카이사르의 숭배자였으며 장제스, 리콴유와 더불어 가부장적 보수주의의 상징인 아시아적 가치의 대표적인 인물이다.[10] 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이 있다고 해봤자, 단순히 일본 제국주의 체제의 꼭두각시로 이용만 당했던 역사적 사실때문에 동정 여론이 조금 있는 수준에 그칠 뿐이다.[11] 사다트는 입국 금지를 해체했으나 관광목적 및 개인자격의 일시 방문만을 허용하는 등 구 왕가의 완전한 귀국 정착은 거부했지만 1981년 사다트 암살 이후 이집트의 대통령이 된 무바라크는 시민권을 부여하며 완전한 귀국정착을 허락했다.[12] 레소토는 소토족이 절대다수이던 단일민족 국가였고, 에스와티니는 스와지족이 99%를 차지할 정도로 후투족과 투치족이 혼재되어 있었던 르완다와 부룬디와는 민족 구성의 양상이 판이하게 달랐다.[13] 오죽하면 이란 정치계 내에서도 이슬람 원리주의 노선을 고수하는 보수강경 성향의 원칙파와 개혁개방을 주장하는 개혁파 모두 팔라비 구 왕가에 대해서는 만장일치로 증오하는 모습을 보일 정도다.[14] 그런데 팔라비 왕조가 이란 혁명으로 폐지되고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정권 수립 이후에 등장한 이슬람 혁명 수비대도 팔라비 시대의 사바크는 저리가라할 수준으로 이란 국민에 대한 정치적 탄압을 자행하고 있다.[15] 현재 이란 정부와 사법부에서는 1979년 이란 혁명 당시 팔라비 2세 전 국왕과 그 일가족들에게 선고됐던 사형판결을 폐기하거나, 궐석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미국, 캐나다, 유럽 등 서방 국가들에 망명 중인 팔라비 왕가의 일부 특정 인사들도 사형 판결 대상에서 삭제하거나 변경할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16] 반면 이라크의 이웃국가인 요르단은 지배층인 하심 왕가를 비롯해 국민 피지배층들 모두 수니파 무슬림들이 대다수였다.